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미궁

2008.11.05 21:0811.05

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자신은 한 가운데에 버려졌는데, 이 넓은 세상에 던져졌는데 저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푸욱 숙이고 같은 말만 중얼거린다. 공포스럽기까지 한 장면에 아이는 잔뜩 겁을 먹었다.

주저앉아 벌벌 떨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중얼거리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어떤 사람이 눈을 떴다.
그리고 중얼거림이 멎었다. 아이의 세계가 멎었다..







Prelude.

A. K. A. Chaos iz..



세 번째, 미궁









소년은 손을 뻗었다. 작은 손가락들은 벽돌로 짜인 단단한 벽을 더듬으며 스멀스멀 기어간다.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선 차갑고, 딱딱하고, 거친 벽돌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벽돌처럼 차갑지만, 긴장을 머금은 손바닥은 그 차가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어둠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발이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다. 소년은 그곳에서 멈춰 섰다.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은 얼어붙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가락들을 잃어버렸다.
소년은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검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던 손가락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시리도록 차가운 손끝, 아직도 감촉은 생생히 느껴지는데, 소년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딛어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손가락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기에.

소년은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다.
빛이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해주었다.

빛은 항상 그곳에 서 있다. 그는 매번 소년이 포기할 모험을 떠났다 돌아올 때, 웃으며 소년을 맞아주곤 하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쩌면 매번 다시 시작되는 소년의 무모한 모험을 비웃고 어서 돌아오라는 손짓일지도 모른다.

빛으로 가득 찬 방, 소년은 한가운데에 누웠다.
빛은 소년의 온몸을 감싸며 따뜻하게 빛나고 있지만, 눈 감은 소년의 얇은 눈꺼풀을 찌를 만큼 강렬하진 않다.
항상 그는 은은하게, 소년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사라지는 일 없이 언제나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검은 시선 속에 들어찬 어둠은 소년이 손을 떼어낸 벽 너머의 어둠과는 다른 존재이다.
차갑고 거칠으며 어둡고 무섭고 딱딱한 벽 너머의 어둠과는 달리, 소년의 어둠은 따뜻하고 편안한 그만의 것이다.
소년의 어둠은, 빛과 벽돌로 가득 찬 세상만을 보는 소년에게 그가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그려내곤 한다.
눈꺼풀 너머, 먼지처럼 작고 반짝거리는 수많은 잔상 속에서 소년은 익숙한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항상 맨 처음은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은, 딱딱하고 차가운 벽돌로 가득 찬 미궁에서 시작한다.
환상은 익숙하다. 소년은 자신의 머리에 달린 단단한 뿔과, 털이 무수히 나 있는 커다랗고 거친 손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기억해내고, 그녀가 환상 속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왕의 욕심에 대한 신의 분노,  저주로 말미암아 숫소에게 욕정을 품었고, 그로써 자신이 태어나고 이 미궁에 갇히게 된 것까지.

매번 같은 곳으로 눈을 돌리면, 어둠 저편에서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보게 된다.
바닥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다가오는 형체, 그 끝에 아른거리는 가느다란 꼬리.
빛의 꼬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어둠을 갈라놓듯 황금빛의 흔적이 어둠을 양옆으로 갈라놓곤 하였다.
이윽고 그 황금빛이 어둠을 뚫고 다가온다. 환영은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잘 생긴 어느 영웅의 모습이다.

그는 매번, 환영 속 소년을 향해 단단한 방패와 날카롭게 솟은 칼을 잡은 채 달려들곤 하였다.
소년은 우악스런 단단한 뿔과 커다란 손으로 그 남자를 짓누르곤 하였지만, 결국은 그의 칼에 심장이 꽂히게 된다.
그러면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나며 커다란 머리가 쓰러지고, 남자는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뒤돌아선다.
사라지는 모습은 여전히 눈부신 황금빛이며, 그 뒤를 따르는 황금빛 꼬리는 다시 어둠을 하나로 만들곤 했다.

그를 향해 매번 손을 뻗었지만,
소년의 기억은 항상 황금빛의 꼬리를 붙잡기 전에 멈춰버린다.



눈을 뜨면 다시 편안한 빛, 그리고 단단한 벽, 그 너머에서 차갑게 도사리는 어둠.
황금빛의 남자는 사라졌고, 어둠을 갈라 길을 만들던 꼬리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고, 털 오라기 하나 없이 깨끗한 자신의 손등과 손가락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붉은 피는 없지만, 소년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의 허전함을 느낀다.
그것은 소년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였지만, 소년이 그토록 갈망하고 찾는 무언가일까.
마치 황금빛 흔적을 따라 저 어둠 속을 뛰쳐나가면, 그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 같은.

소년의 뜨거움은 가슴에서 맺히고, 눈에서 새어 작은 얼굴에 은빛 흔적을 남겼다.
소년은 눈가를 타고 흐르는 그것을 보드라운 손등으로 닦아내고, 다시 눈꺼풀 뒷쪽의 환영을 주시하였다.



차갑고 어두운 벽들로 만들어진 미궁 속에서 소년은 걷고 있다.
길 앞을 막아서는 커다란 관문들, 소년은 그것들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소년은 주문을 읊기 시작한다. 그것은 언제부터 기억하였는지 모를, 길고 복잡한 의식용 주문.
마지막 관문이 열리고, 미궁의 끝에는 커다란 재판장에 수많은 모습의 신들이 앉아있었다.
자칼 머리의 신 옆으로 따오기 머리의 신이 보이고, 그 사이에는 커다란 천칭과 그 아래서 입을 쩍 벌린 괴물이 있었다.
괴물은 사자처럼 강인한 앞다리와 하마같이 묵직한 뒷다리로 서선, 악어 같은 입을 쩍 벌리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자칼 신이 소년을 이끌고 재판장 앞에 섰다. 소년은 재판장 가장 위에 선 세 명의 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여신과 매의 머리를 한 신 가운데에서, 하얀 왕관과 빨간 왕관을 겹쳐 쓴 하얀 옷의 신이 서서히 눈을 떴다.

소년은 관문에서 했던 것처럼 주문을 외웠고, 그 주문이 끝나자 제일 높은 곳에 앉아있던 신이 일어섰다.
따오기 신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마치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부드러운 깃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칼 신은 천천히 두 손에 쥔, 아직도 약동하는 주먹만 한 소년의 심장을 들고 걸어들어왔다.

따오기 신이 깃털을 쥔 손을 놓았다. 천칭은 부드러운 깃털의 무게만큼 가라앉았다.
그 반대편에서, 자칼 머리의 신은 소년의 심장을 쥔 채 높은 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칭 아래에서는 괴물이 악어 같은 입을 쩍 벌리고, 약동하는 심장의 맛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천칭 반대쪽에서 나풀거리는 작은 깃털과, 자칼 신이 심장을 쥔 손을 놓는다면 드러날 소년의 무게.
그 순간을 바라보는 소년의 천칭 위에 놓인 심장은, 눈앞에서 더욱 세차고 활발하게 뛰고 있다.

따오기 신이 손가락을 천천히 떼었고, 공중에서 나풀거리던 깃털이 제자리에 올려졌다.
천칭이 좌우로 흔들리고, 소년의 심장이 멎는 순간 심장의 무게도 판가름이 날 것이다.

제일 높은 곳에 앉아있던, 하얀 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서 떨어지는 심장, 그의 무게만큼 천칭은 조용히 가라앉을 것이다.



눈을 떴고, 소년의 눈앞에는 커다란 재판장 대신 빛으로 가득 찬 방만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자칼 머리의 신도, 따오기 머리의 신도, 괴물도, 심장과 깃털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하얀 신도 사라졌다.
소년에게는 이미 익숙한 광경이 되어 있었지만, 결국 볼 수 없을 심장의 무게는 어쩌면 그를 안도시켰을지 모른다.

꿈속에서 외웠던 주문도, 머리로 떠올리려고 혹은 입으로 읊어보려고 해도 나오는 것은 이상한 소리뿐.
지금 당장 그 주문을 외울 수 있다면, 저 너머에 웅크리고 나를 노려보는 저 어둠도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지금 당장에라도 저 너머에서 황금빛의 용사가 어둠을 가르고 나타나서, 나를 데리고 가 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소년의 어둠 속에서 만들어지는, 눈 뜬 어둠과 함께 사라질 환영일 뿐.
눈을 뜨면 황금빛의 용사와 어둠을 갈라놓던 꼬리도, 왕관을 쓴 하얀 신과 약동하는 심장도 모두 사라진다.
그 환영이라도 잡아 보려 몇 번이나 손을 뻗었지만, 결국 눈앞에 남은 것은 소년을 비웃는 빛과 단단한 벽,
그리고 저 너머에서 잔뜩 웅크린 채 소년을 주시하는, 칠흑같이 깊은 어둠뿐.


소년은 생각했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고, 누구이며, 왜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가.
어쩌면 그는, 깊고 어두운 미궁 속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꿈을 꾸는 거대한 반인반수의 괴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의 심판을 받을 사자의 기억, 혹은 그 심판을 받을 사자의 과거를 떠올리는 신일지도 모른다.

소년이 가진 기억 혹은 환영 속의 모습은 너무도 많았지만, 모두는 이 어둡고 좁은 미궁 안에서 모습을 시작한다.
어둡고 차가우며 좁다. 길은 한없이 길고, 어느 곳이 출구일지 모를 정도로 길은 복잡하게 꼬여 있다.
비웃는 빛과 웅크린 어둠, 차가운 벽돌길이 소년의 모든 세상이었고 환상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미궁이란 지독한 공간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지를 미친 듯이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생각 끝에 소년이 내린 결론은, 어떻게 해서든 저 어둠을 뚫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론을 비웃듯이, 그의 등 뒤에서 은은한 빛은 소년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감싸며 웃고 있었다.


소년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한기가 가는 손가락에 들러붙어, 그대로 어둠 속에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소년은 눈을 딱 감은 채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벽에서 기어 나온 한기가 온몸에 들러붙었다.
눈앞을 덮는 새까만 어둠, 하지만 그것은 소년에게 환영보다는 공포와 차가운 감촉만을 가르쳐준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포근한 빛이 매번 그렇듯, 어서 오라는 듯이 그에게 따뜻한 손짓을 건네었다.
하지만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 물은 채 다시 앞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미칠 듯이 두려웠지만, 땅에서 전해지는 발자국의 진동은 소년에게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도 그와 같은 불빛이 보인 것은.


환상 속에서 본 황금빛 갑옷의 영웅인가? 사자를 향해 다가오는 하얀 신의 휘광인가?
너무도 많은 것이 소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소년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소년은 미치도록 두려웠다. 어둠 너머에서도,  조금 전의 그처럼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잘못 본 것은 아니다. 분명 반대쪽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 빛을 향해 뛰어간다면, 금방이라도 소년은 이 깊은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머의 빛은, 그의 심장을 찌르고 어둠을 다시 닫아버릴 그 무언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던 소년은,  어느새 자신이 다시 빛이 가득한 방 한가운데로 돌아온 것을 눈치채었다.
하지만 빛도 그가 돌아옴을 축하하는 인사를 꺼내기 전에,  낯선 곳에서 다가오는 다른 빛에 경계를 품었을 것이다.
어둠, 그리고 빛 너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나라의 신관들은 정말 악취미군. 도대체 얼마나 이 차갑고 어두운 곳을 걸어야 하는 거지?」

저 너머에서 반짝이는 그것은 등 뒤의 빛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차갑거나 딱딱하지 않음에도, 그것은 어둠보다도 더 두렵다.
그저 미칠 듯이 두렵고, 무섭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알 수 없어서 마음속에서 깊은 고함을 질렀을 뿐이다.

반대편에서, 그 고함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소리는 아득한 먼 곳처럼 새 나왔다.

「다 왔습니다.」

이윽고 빛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저도 모르게 소년은 눈을 감아버렸다.
어둠 건너편에서 다가온 빛은, 이제껏 본 것과는 다르게 무례하게 소년의 눈꺼풀을 비집고 그에게 말한다.

「여기 있었군.」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고, 자신의 앞에서 환히 빛나는 불빛과 그 뒤에 선 남녀를 보았다.
소년은 소년으로서 처음으로 보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자신이 환상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몇 번이나 감고 떴음에도,  소년으로서 마주한 타인들은 여전히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처럼 생긴 사내가 입을 떼었다. 목소리는 미궁의 그것처럼 딱딱하고 차갑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소년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어란 것은 소년만이 존재하는 미궁 속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소년이 입을 간신히 열었지만, 그의 목을 타고 토해낸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의 울음소리뿐.
분홍 머리칼의 여자가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웃음마저 불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답해보아라.」

여전히 낯선 목소리. 하지만 소년은 문득 검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낯익은 무언가를 보았다.
먼지처럼 작고 반짝거리는 잔상 속 어렴풋한 환영은 그의 눈꺼풀 속에도 존재하였다.
문득, 그 모습에서 매번 환영 속의 소년을 죽이고 뒤돌아서던 황금빛 용사의 광경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빛나는 깃털이 소년의 심장을 꿰뚫고 악어처럼 먹어치울 것 같았지만, 그 너머엔 영원이 존재할 것 같았다.

「신중의 신, 영원한 군주,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우리들의 그분은 누구시더냐.」

문득 소년이 마주친 분홍빛 여인의 은빛 팔다리,
그것은 환상 속에서 보았던, 심장을 저울질하던 새하얀 깃털과 닮아있었다.
너무도 가벼워 날아갈 듯이 보이지만, 죽은 자만큼 무겁게 읊조리고, 금방이라도 심장을 먹어치울 것 같은.

「누트의 자궁에서 태어나 우주를 지배하고, 내세를 관장하고, 영원히 빛나는 깃털로 날아오를 피닉스의 이름은 무엇이냐?」


- 퍼억


눈부신 은빛의 차가운 아름다움.
소리는 묵직하였다. 심장을 찌르듯, 묵직하게 파고들어가는 은빛의 주먹.
쓰러지듯 소년은 주저앉았다. 생각지 못한 충격을 받은 온몸이 가늘게 떨리고,

심장에서는, 뜨거운 피 대신 익숙한 주문이 터져 나온다.

입 끝에서 외우는 주문은 모든 관문을 지나고, 신 앞에 서서 그를 찬양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불안한 빛이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고, 그 빛이 희미해질수록 남자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는 점점 더 깊어진다.
소년이 낭송하는 주문은 어느새 신에 대한 찬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위대한 자에 대한 찬가.

당신은 누트의 자궁에서 태어난 첫째아들입니다. 당신은 아버지 게브, 에르파트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왕관을 쓴 군주입니다. 당신은 고귀한 백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신과 인간의 왕입니다.
당신은 우사르, 또는 아사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문을 외우는 소년의 혀끝에서,  한 조각의 새하얀 무언가가 나타났다.

「깃털을 담아라.」

혀끝의 주문과 함께 조금씩 꿈틀거리고, 부드럽게 일어난 잔털을 고르자 어느새 그것은 완연한 형체가 되어 있었다.
분명 부드러운 깃털을 가진 몸체는 새의 그것과 닮아있지만,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한 소년의 얼굴이 있었고,
은빛의 머리칼. 소년은 그 얼굴에서 왠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은빛의 주먹은 소년이 새라고 생각하는 그 것을 붙잡았다.
지저귀는 심장은 소년의 입 끝에서 탄식을 내뱉고,

영혼의 새가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것은 웅크린 어둠 너머로, 빛을 등지고 천천히 사라진다.
소년은 손을 뻗었다. 작은 날개 사이로 떨어지는 한 조각의 깃털,

무너지는 환영 속에서, 어둠 같은 낯선 목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생생히 전해져온다.

「다시 만날 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순간, 소년의 세상은 깃털만큼 가볍게 닿았고, 심장만큼 뜨겁게 약동하였다.
소년이 보지 못한 심장의 무게가, 소년이 존재하였던 미궁을 아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로써, 소년은 부서지는 환상을 꾸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소년이 눈을 떴을 때, 소년이 소년으로서 보게 된 타인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눈뜨는 빛, 소년을 둘러싼 차갑고 단단한 벽돌들, 그리고 소년이 있었다.

꿈이었을까.
아니면 이것이 꿈인 걸까.

손을 들어 몇 가지를 확인한 소년은 단단한 뿔이나, 손등에 뒤숭숭 난 거친 털 같은 것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소년은 천천히 일어섰고, 손을 더듬어 벽을 짚었다. 벽은 여전히 거칠고 단단하지만, 생각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고, 저 멀리서 황금처럼 빛나는 빛줄기가 어둠을 양옆으로 갈라놓은 것을 보았다.

소년은 두려워하며 한 발자국을 옮겼다.
두려운 한 걸음을 다가갈수록, 소년은 황금빛 용사나 어둠을 닮은 남자가 저편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발자국은 어둠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제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발걸음을 떼었을 때, 환상은 환상처럼 사라져버리고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금빛의 세상.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강렬한 황금빛이 소년을 몰아칠 듯 감쌌고, 소년은 숨이 막혔지만 미칠 듯이 기뻤다.
하얗고, 너무도 곱고, 뜨거움을 고이 간직한 작은 알갱이들은 미궁에서 보았던 차가운 벽돌과는 너무도 다르다.


소년은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 작은 온몸이 반쯤 바닥 속으로 파묻혔다.
따뜻한, 그리고 미칠 듯이 아름다운 황금빛 광경에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소년의 약한 눈꺼풀은 내리쬐는 태양의 강렬함을 버티지 못하고 빨갛게 물이 들었다.

소년은 그대로, 모래 속에서 눈을 감고 어둠을 보았다.
미궁 속에서 보았던 환상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문득 그 편안하고 나른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소년은 처음으로 배가 고파졌다.


소년은 잠에 들었다.

미궁의 바깥은 너무도 편안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바깥의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자신이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사람들.
그들이 모두 몸을 굽혀 아이의 발치에 손을 뻗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아이도 그들을 따라 몸을 굽혀 팔을 뻗어보았다. 얼굴이 모래바닥에 푹 파묻혔다. 따뜻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다시 어두운 곳으로 이끌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편안한 마음이 든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오시리스' 中





Chaos iz..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7 장편 모래폭풍 [混沌]Chaos 2008.11.11 0
236 장편 십자가 (上) [混沌]Chaos 2008.11.09 0
235 장편 십자가 (下) [混沌]Chaos 2008.11.09 0
234 장편 여인 [混沌]Chaos 2008.11.07 0
233 장편 Silverline 2 [混沌]Chaos 2008.11.07 0
232 장편 Silverline 1 [混沌]Chaos 2008.11.06 0
231 장편 폭발 [混沌]Chaos 2008.11.05 0
장편 미궁 [混沌]Chaos 2008.11.05 0
229 장편 그 날 밤 [混沌]Chaos 2008.11.04 0
228 장편 어느 날 [混沌]Chaos 2008.11.04 0
227 장편 [인류바이러스] 첫째 날 (14) 조나단 2008.11.04 0
226 장편 [인류바이러스] 첫째 날 (13) 조나단 2008.11.04 0
225 장편 [인류바이러스] 첫째 날 (12) 조나단 2008.10.31 0
224 중편 어느 경호원의 일상생활 (2) 튠업 2008.09.15 0
223 중편 어느 경호원의 일상생활 (1) 튠업 2008.09.13 0
222 중편 행운의 동위원소 下 qui-gon 2008.08.15 0
221 중편 행운의 동위원소 上 qui-gon 2008.08.15 0
220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5) 별밤 2008.07.30 0
219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4) 별밤 2008.07.30 0
218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3) 별밤 2008.07.3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