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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행운의 동위원소 上

2008.08.15 12:1008.15

중편 분량입니다. 번다한 글이라 올리기가 죄송스럽네요.



#1

2020년의 어느 날, 상현은 동생과 식사를 나누며 말했다.

"이 세상은 이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었고, 우리는 변화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거야."

나누던 얘기 중에 자연스레 나온 말이건만 동생의 반응은 왠지 심드렁했다.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인데?"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났잖아."

"중요한 시기?"

"다사다난했던 지난 오 년 말이야. 그건 계속될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새 시대의 문턱을 지나온 셈이라고. 대부분의 사람은 생활 곳곳으로 스며든 변화에 더는 저항감을 보이지 않잖아? 이미 시대는 변화를 겪은 거야. 앞으로의 변화는 이 신세계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단면들일 뿐이지."

"그래, 형 말이 틀린 말은 아니네. 뭐, 아직도 논란은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이 변하는 모습 때문인가. 확실히 대체로 나쁜 생각들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동생은 제 앞에 놓인 돈가스를 먹기 좋게 썰어놓고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형은 그런 문제보다 오늘 고른 그 반지의 전달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나을 걸? 필요하다면 내가 조언을 해줄 수도 있는데."

확실히 동생은 복잡한 일에 좀처럼 관심을 두는 법이 없었고 형인 상현의 의견에 쉽게 수긍하는 습관마저 있었다. 따라서 시사 문제로 얘기를 나누기엔 썩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닌 셈이다. 어쨌든, 동생이 거론한 문제가 개인적으로는 보다 중요한 일이었던지라 상현도 더 길게 대화를 늘이진 않았다.

물론, 상현의 강좌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학생들은 쉽게 수긍하는 버릇이 없었거니와 이런 문제에 나름 관심도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는 의문이 생기거나 반론하고 싶어질 때면 주저 없이 손을 드는 부류가 있었다. - 과연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선생님. 변화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표현이 너무 겸손한 것 같습니다. 이건 차라리 진보나 발전, 혁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요?"

동생 나이 또래의 이 만학(晩學)은 자신이나 상현의 세대가 생각하는 바를 잘 짚어내고 있었다. 상현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과 같은 인문학도들이 생활고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진보이고 발전이며 혁명이었다. 2010년. 그가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하던 그 때, 졸업을 앞둔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나누던 얘기란 무엇이었나. 그들은 니체와 헤겔보다는 경기 불황과 취업에 더 관심이 있었고 상현이 대학원으로 진학한 것 역시 그런 사회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현은 자신이 바라는 수업을 위해, 단지 동의를 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확장해보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이 학생과 같이 생각할 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집적기(集積器)를 일컬어 '인류 구원을 위한 제2의 매개체'라 부르기도 하고요." 상현은 학생이 손목에 착용한 기계에 눈길을 던졌다. "어쩌면 '혁명'이라는 말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겠지요. 학생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 기계가 이룩한 일들을 근거로 들곤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요?"

상현의 주문에 교실의 왼편 구석에 앉은, 나이 어린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제2 메시아 설에 관해서라면 역시 육종학자의 인간쓰레기 유전자에 대한 기능적 해석을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과를 연구하는 중, 인간 유전자의 기능 구조에 관한 착상을 얻어낸 건 행운에 해당하는 요소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하필 사과를 연구했던 것이 은유적 상징이 되기도 했지요."

만학이 말을 덧붙였고 상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쩌면 이 기계를 예찬하는 사람들의 집적기가 개입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일부 학생이 조용히 웃는 새, 어린 학생이 말을 이었다.

"사망선고를 받은 환자의 수술 성공률과 회복률 증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평균 수명이 늘어났고요. 산업재해도 감소했고 기업 생산성도 눈에 띄게 증가했죠. 예술 명작의 홍수가 쏟아지는가 하면 지니계수*는 점차 0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기계가 이룩한 사회과학적 성과 덕에 통계수치들 사이의 상관관계나 인과성을 좀 더 신뢰성 있게 따질 수 있죠. 그 결과로 통계학은 집적기와 그러한 변화에 인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학생의 말대로입니다. 집적기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통계로 입증된, 실재하는 긍정적 변화를 부인하려들진 않아요. 다만,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기존의 가치 질서가 교란된다는 점입니다. 혹시 여기에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나요?"

학생들은 조용했다. 강좌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이 어린 학생들은 기계가 가져온 변화에서 신비함보다는 일상의 친숙함을 느껴온 세대였다. 상현이 반대자들의 의견을 대신해 정리해 주었다.

"최근 온라인 상의 아고라 광장에서 벌어진 논쟁을 눈여겨본 학생들이 있나 모르겠군요. 그곳에 올라온 글들 가운데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집적기로 인해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것이죠.

그들은 집적기가 우리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과 공기 같은 존재가 된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어요. 인류는 집적기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스스로를 특정한 운명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나았다 비판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는 변화의 운명이 어디에 귀착될지를 불안해하는 겁니다. 과거에는 경제 종속이나 군사 종속의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변수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때 그 변수에 의한 영향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지요. - 아, 물론 그건 지금에도 큰 차이는 없어요."

"하지만, 선생님. 집적기가 모으는 126번 원소는 그 자체의 특성상, 변화를 긍정적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에 대한 우려는 단순히 기존의 질서를 안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 특유의 경직 되고 보수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데요."

만학의 목소리에 희미한 감정의 울림이 있었다. 어쩌면 그도 온라인의 아고라 광장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이 변화가 단지 경쟁이라는 하나의 독특한 요소를 배제해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기도해요. 인류에게 남은 것은 경쟁을 가장한, 천박한 평등주의에의 욕구를 부추기는 질투심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이런 변화는 지속적인 진보선 상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나 헤겔의 변화가 아닌, 단순한 국면의 전환으로 봐야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찰스 파스테르나크의 말을 빌어 인류를 '호모 쿠아에렌스' 즉, 발전과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존재들이라 가정한다면. 우리는 건전한 경쟁 심리의 상실로 발전의 동력을 잃어, 개념적 멸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그들이 주장하는 바의 요지이죠."





#2 울즈소프의 젊은이.

1665년, 영국의 울즈소프에서는 한 젊은이가 고즈넉한 정원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요한 시골 풍광과 젊은이의 단출하고 깔끔한 복장이 한껏 여유롭고 평화로운 사색의 풍경을 자아냈지만, 사실 세상 이면에는 죽음이 무섭게 그늘을 드리우던 때였다.



영국과 구라파에 창궐한 역병은 세상사람 넷 중의 하나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도시에 가득찬 절규는 오직 갈 곳 없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고 부유한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병든 도시를 떠났다. 구원을 바라는 기도, 고통의 신음, 슬피 우는 통곡들. 그 목소리들이 섬 곳곳에 음산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젊은이가 양부(養父)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은 것은 케임브리지의 대학 당국이 역병에 대비해 휴교령을 내린 까닭이었다.

"학교를 떠나있더라도 탐구의 끈을 놓진 말게.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자네에게 주신 사명인 게야."

배로우 교수는 기약없는 이별과 함께 젊은 제자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그의 충고는 기실 노파심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이며 룸메이트 위킨스의 안위는 분명 걱정스러운 것이었지만, 정작 이 젊은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학업에 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투쟁이자 이타적인 고난이라 여겼다. 역병과 같은 대이변이 파괴된 규율과 어긋난 질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연구는 인류가 지켜야 할 질서에 한걸음 다가서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다행히 울즈소프는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훌륭한 곳이었다.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 독서나 사색 외에 달리 할 일을 찾기가 어려웠고, 고요하고도 포근한 풍광은 성찰에 도움이 되는 면면마저 있었다. 덕분에 그의 일상에는 어느새 평안이 찾아들었다.

이즈음 그가 궁리하던 주제는 주로 빛이나 행성 궤도에 관한 독일인 학자의 옛 논문이었다. 유럽의 젊은 지성들이 그러했듯 젊은이도 가난했던 학자의 이 논문을 혁신적이며 훌륭한 것으로 평가해 마지않았는데, 이 논문에는 중요한 공백이 있었고 그것이 그의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답의 부재. 스스로 자부하던 학문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의 연구와 사색에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저 논문집을 손에 쥔 채로 정원의 나무 아래에 앉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들을 점검해보는 것이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미 해는 기울어 달이 동쪽 지평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별들이 희미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고 풀벌레들의 밤 노래가 시작된 지 오래였다. 논문의 표지는 어스름이 어둠에 묻혀 글자를 읽기 어려웠다.

아, 존경하는 케플러여.

젊은이는 논문을 달빛 위로 들어 바라보았다. 이 논문을 작성한 위대한 독일인 수학자는 1618년까지 보르헤의 천문 관측 자료들을 정리해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할 세 가지 법칙들을 도출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정밀한 법과 질서로 우주를 창조했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이러한 수학적 재능과 신실함이야말로 젊은이가 그를 사랑하며 존경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달과 별들은 어찌하여 저 하늘에서 끊임없이 타원의 궤도를 운동할 수 있는가? 창조주께서는 거기에 어떤 신묘한 질서를 세운 것일까? 혹여 내가 케플러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인과율을 밝힐 수 있다면! 그리되면 세상은 나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질서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텐데. 위대한 문학가들의 창작욕은 결국 자신을 불멸로 이끌 불후의 명작에의 염원으로 귀결되지만, 이 젊은 과학도의 순수한 탐구욕은 오로지 숨겨진 질서의 발견과 자신의 신앙 속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석양은 긴 꼬리를 물고 사라졌고 울즈소프의 맑은 하늘 위로는 달과 별들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의 울음소리 가운데 그들은 창조주의 질서를 따라 운행을 시작했다. 젊은이는 그제야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가을의 찬 대기가 수많은 원자의 복합체를 흔들어, 플라워 오브 켄트 품종의 작은 사과나무에서 푸르게 농익은 열매 하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열매는 허리를 굽힌 젊은이의 손에 쥐어졌고 이 찰나에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다소간에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나 이 일을 우연 내지 행운이라 할 수 있다면, 이 행운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1687년에 수학적으로 정리되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게 된다.

이 젊은이는 갈릴레이가 죽은 해인 1642년의 12월(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643년의 1월)에 태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부정하던 갈릴레이의 역학을 설명했고, 케플러의 운동을 설명해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한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를 통해 인류는 진보와 발전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젊은이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3 중이온 가속기

2009년 10월 19일. 상현은 재수생이라는, 본격적 학업에의 삶이 타의에 의해 유예된 어중간한 신분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피곤한 눈에 힘을 주며 읽는 것은 논술 대비용의 조간신문이었다. 이 날 신문의 1면에는 '국가원자연구소 완성'이라는 큼직한 제호와 함께 이 연구소가 4조 원 상당의 예산이 투입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중이온 가속기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연예인 행사와 뉴턴의 사과나무 기증식이 함께 진행된 준공식.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관련 기사면 안내가 실려있었다.

상현은 문득, 나라 안이 어수선하던 2008년 말 즈음 가속기를 건설할 거라던 기사가 있었음을 기억했지만, 그제나 지금에나 중이온 가속기란 어휘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새로운 중(重)원소 발견의 경쟁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고단한 재수생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란 그저 작은 호기심과 경탄의 대상일 뿐일데. 문과 논술에 나올 가능성마저 희박했기에 별 가치가 없는 가십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 기사를 따로 갈무리했던 것은 그저 이과 수험생이었던 친구, 영선을 위함이었다.





#4 『트리알츠의 연금술사』

상현이 근래에 읽는 책은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라는 소설이었다. 나이 삼십 줄에 대학의 인문학 강사쯤 되는 사람이 읽을 책이 넘쳐나는 판에 판타지 소설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흉을 잡힐 법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란 것이 식자와 대중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결과를 따지어들자면 상현 역시도 이런저런 인식과 무관히 이 소설에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가 평가하기로 이 작품은 다른 소설에 비해 지루하고 어려운 구석이 있는, 이를테면 소수의 독자가 좋아할 만한 매니악한 작품이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이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까.

상현이 불현듯 떠올린 것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연설문이나 기고문, 서간 등을 모은 책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세상과 평화에 대한 관점,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족에 대한 견해들. 사람들은 저자의 이름만으로 쉽게 책을 선택하며 글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서 깊은 반향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경도자들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 것이며, 물리학자가 자신의 비전문분야를 주로 기술한 개인 수기에는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는 이 책의 성공도 유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126번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규명하고 행운집적기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원희선 연구원. 그가 쓴 이 판타지 소설을 과연 독자들은 순수하게 선택하였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채 환호하는 것인지. 만약 저자가 원 연구원이 아닌 다른 인물이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널리 반향을 얻을 수 있었을지.

그럼에도 상현이 굳이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를 읽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순전히 오랜 친구인 영선의 선물이었던 까닭이다. - 그는 언제나 영선이 읽는 책이나 관람한 영화, 듣는 음악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려 애썼다. 행운집적기에 특별한 관심 역시도 결국은 영선이 첫 집적기를 개발한 기업 연구개발팀의 일원인 탓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기대도 없이, 오직 의무감만으로 읽기 시작했던 이 책에서 상현이 제법 흥미로운 텍스트를 발견하고 몰입하게 된 것은 의외의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 작품도 처음에는 다른 판타지 소설들처럼 배경을 풀어내는데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었다. 배경이 되는 트리알츠는 과거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제국의 식민지였고 현재에는 부르주아와 혁명가들에 의해 독립을 쟁취한 신생국가였다. 이들은 좀 더 민주적인 권력 합의체로서 양원(兩院)을 만들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들로 구성된 상원에 부여한 채 일반 선출직의 하원을 만들었다.

이 나라는 제국의 그늘을 걷어내고자 종교적 억압과 허례허식을 타파했으며 자유로운 학술과 예술을 장려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계몽주의와 실험주의의 사조가 깃든 일종의 르네상스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라인슈타인은 그 격동기를 살아가던 소심한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였다. 그는 우로보로스라는 연금술 학회의 회원이며, 화학이라는 신학문을 준비하던 젊은 키미스트(Chymist*)였는데, 이 인물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트리알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이상학적 사유에 관심이 깊은 슐레릭 교도였다는 점이다. (참고로, 슐레릭 교는 트리알츠에서는 천대를 받는 종교였다.) 글의 갈등은 여기에서 유발되었고 상현이 관심을 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주인공은 사유를 통해 단자의 개념에 이르렀고 이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이론을 동료들에게 밝혔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관심뿐이었다. 라인슈타인은 이 일로 낙심해 두문불출하지만, 그로부터 머지않은 어느 날에 젊은 상원의원의 방문을 받게 된다.

의원은 연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에 깊은 통찰력이 있어 새로운 체계의 학문을 세우는 일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권력적 촉매'였다. 이는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여러 연구자의 이론을 모아 정리하고 다른 연구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라인슈타인은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마침내 촉매를 통해 세상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 어쩌면, 이 상반된 두 사람의 묘한 우정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중요한 축이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의원은 비판적이면서도 자상하고 충실한 후원자였다. 그는 이론에 담긴 형이상학적 사유를 두고 라인슈타인과 논쟁을 벌였지만, 어찌 되었건 라인슈타인을 독려하고 논문의 발행과 세미나를 지원했다. 첫 세미나에서 라인슈타인은 동료 연금술사들과 철학자들에 맞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

첫 질문자는 그와 같은 우로보로스의 연금술사였다.

"단자에 대한 실체가 규명된 바 있소? 이미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만물의 근원으로 상정한 원소는 그 실체를 확인하고 분류 중에 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단자는 그저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 같은데요?"

"아직 단자는 관념적 차원의 가설일 뿐이지만 사실 그 실체는 마법학의 이론을 통해 어느 정도 규명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실재하는 한, 마법을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순 질료인 원소가 아니라 실체인 단자의 차원에서 규명되어야 할 겁니다. 단자는 원소보다 더 심층적인 개념이며 현재의 가설적 과정에서는 관념일지언정 단자 자체는 관념이 아닌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하지요."

"원소보다 심층적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원소는 변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연금술사들은 주로 그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완성된 현자의 돌을 얻진 못했으나 마법적인 힘을 통해 몇몇 질료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단순 실체란 변화할 수 없고 변화란 오직 복합체 내에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즉,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근원적 존재로 규정한 원소라는 것도 실상은 다른 근원적 실체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연금술사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단자에는 문제가 있소. 여기 논문에 담긴 내용을 봅시다. 만일 단자가 가장 근본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단자가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일 성질의 존재들을 어찌 규명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철이나 납들이 모두 각기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소."

"제 내용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단자는 성질에서 중첩될 수는 있으나 결국 단위별로는 각자의 개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과 나는 인간으로 생물적으로는 같은 종에 속하지만 고유의 개별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이나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복합체인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념을 설명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진 철이라 할지라도 그 조각조각은 각자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것 안에 다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단자도 복합체인 것이 아닙니까?"

아케네 출신의 철학자가 던진 물음에 라인슈타인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다수성의 빈위 자체가 단자를 규정짓는 하나의 속성입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의 고삐를 죄었다.

"그걸 관념적 차원으로 풀어보면 좀 혼란스럽더군요. 당신은 키미스트가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말한 단자의 규정성은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벗어나자면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질서의 세계를 단정하게 됩니다. 철에 비유하자면 당신의 단자론은 그 단자에 이미 속성이 빈위로 내재되어 있어 그 철이 무기가 되거나 모루가 되거나 농기구가 될 운명을 안고 있다고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더구나 예정된 신적 질서라니! 그렇게 상정한 개념이란 당신과 같은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이 실질적으로 규명하고 접근할 수 있는 건가요? 단지 사유 속의 놀음은 아닙니까? 이건 키미스트의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슐레릭 교도의 믿음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제가 슐레릭 교도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처음 불편한 자세로 어릿하게 섰던 라인슈타인도 질문과 답변의 공방 속에서 어느덧 초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실체인 단자를 규명하면 규명할수록 이 세상에는 잘 짜여진 질서와 규칙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껏 밝혀낸 단편적인 질서들이 더욱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고 그 안에 어떤 초월자가 예정한 질서가 있는 겁니다. 키미스트들도, 연금술사들도 모두 이런 질서와 규칙을 탐구하고 규명하는 - 그 자신도 예정된 운명 속에 갇힌 구도자들일 뿐인 것은 아닐까요? 누가 신의 뜻을 알겠습니까마는. 우리가 당장에 규명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학자의 본분이 아닐 겁니다."
……」

어쩌면 라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은 라이프니츠와 아인슈타인을 적절히 혼합한 이름일지 모른다. 초월자가 짜놓은 질서와 예정된 운명이라. 혹여 소설 속에 담긴 주인공의 사고와 의식들이 원희선 연구원의 이론 저변에도 놓여있던 것은 아닐까? 원 연구원은 21세기의 케플러이자 아이작 뉴턴인가?

불가지론자인 상현에게 이런 부분은 다소 거부감이 있었지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책장을 앞으로 넘겼다.





#5 원희선 연구원

2012년 9월 30일. 한국의 국가원자연구소에서 일어난 작은 창조와 파괴의 역사에 관해 인문학도인 상현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은 일견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 '한국 최초의 신원소 발견'이라는 10월 초의 보도를 접했을 때,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싸구려 애국심에 고취된들 한국 최초의 신원소 발견이라는 것은 2년 전의 중이온 가속기라는 어휘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는 무관한 듯, 낯설고 생경하기만 했다.



한편, 이 해의 추석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을 낀 연휴란 것이 늘 그랬다. 아쉬움과 미련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거대한 자석.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 자기장을 관측하고자 점점이 뿌려놓은 고운 쇳가루와 같은 것이었다. 민간의 기업들이 개천절 사이의 평일에 슬쩍 다리를 놓아 오 일의 연휴를 마련한들, 이 절충안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고 국가원자연구소는 심지어 명절에조차 근무를 강요받고 있었다.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물론, 학구적으로 훌륭한 바이오그래피의 부총리마저도 슬슬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터에, 국원련은 중이온 가속기를 이용한 신 원소 발견 외에도 몇 가지 주변적인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부 연구자들의 불만과 빈축을 샀지만, 정치가들에게 순종적인 관료 집단이 예산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부득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본업에 충실하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아?"

넉살 좋던 원희선 연구원은 그렇게 자신과 후배 연구원을 위로했다. 중이온 가속기의 3번 검출기 모니터실 당직이란 것은 분명 본업에 충실한 업무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당직 교대까지의 무료한 시간은 무엇으로 보상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시덥잖은 명절 TV 프로그램에 질려버린 원 연구원은 고민 끝에 그는 산 아래로 자전거를 몰아 나갔다. 세종시에서 사람 향취를 맡으며 식사도 해결하고 더불어 가을 산길을 산책하려는 요량이었다.

단풍진 나무들은 길을 따라 제법 가을의 정취를 자아냈고 자전거를 타며 맞는 바람은 서늘했지만 상쾌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도 잠시. 그가 산등성이 길 끝에 이르러 본 것은 명절 연휴를 맞아 텅 빈 계획도시의 모습이었다. 왜 이 생각은 못했담? 혹여나 하며 내려간 시내에는 작은 상점 하나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연구소로 돌아가는 길은 지루했을뿐더러 슬슬 허기가 져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국원련에 도착해 자전거를 끌며 터덜터덜 정원을 지나던 그는, 작은 과실수가 자리 잡은 너른 정원 한 끝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아무리 배가 주리기로 정원의 울타리를 넘어 열매를 딸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잔디 속으로 살짝 숨어든 푸른 사과 열매가 그의 눈길을 스쳐간 것뿐이다. 굳이 표지석의 글귀를 살피지 않더라도 원 연구원은 이 나무가 켄트 오브 플라워 품종의, 일명 '뉴턴의 사과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면 정원 관리인이 임시로 세워둔, <열매를 따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의 문구 정도였을까.

이즈음 원 연구원을 자극한 것은 허기와 재치, 호기심 따위였을 것이다. 동인(動因)은 허기. 행위 실천의 강화 요인은 뉴턴의 사과가 어떤 맛일지에 관한 호기심.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은 재치가 확보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열매를 따는 것과 줍는 것은 다른 행위지 않은가?

이브의 실제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알 길은 없으나, 그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에 손을 뻗듯 원 연구원 역시 망설임보다 과단성이 앞섰다. 잠시 후, 울타리에 몸을 기댄 그의 손 위로 살짝 가루가 묻어나는 푸른 과실이 쥐어졌다. 열매의 푸른 빛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풍겨온 것은 농익은 사과의 향긋하고 시큼한 냄새였다. 그는 기분 좋게 열매를 주머니 안에 추렸다.

"잘 다녀오셨어요, 선배님?"

피로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던 당직자가 원 연구원을 맞아 일어났다. 그는 원 연구원이 책상 위로 올려놓는 사과를 살피며 물었다.

"그건 웬 사과에요?"

"오다가 주운 거야."

그 대답이 실없다 여겼던지 당직자는 피식 웃으며 당직 일지를 푸른 사과 옆으로 올려놓았다. 원희선 연구원이 당직 일지에 사인을 하며 물었다.

"뭔가 이상한 건 없었어?"

"아직 뭔가 검출될 때가 아니잖아요. TV에서는 명절인데도 시답잖은 프로그램만 해주고…….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무튼, 이런 단순 노동은 정말 싫다니까요. 전 명색이 과학자인데."

원 연구원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봐요, 후배님. 2012년에도 여전히 당직 인계를 서면 사인으로 하는 사회에서 뭘 기대하시는 건가.

"그래도 바싹 신경이 오른 설비 팀을 생각해봐. 예상 가동시간이 지수함수처럼 늘면서 그 사람들 불만이며 불안이 아주 장난 아니더라."

"뭐, 그건 그렇죠."

의무와 책임이 인수인계되자 원 연구원의 후배는 뭔가 후련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밖으로 나서기 전 당직실 구석의 책장을 가리켰다.

"아, 연휴 전날에 책을 좀 새로 들여놓은 것 같던데요. 그래도 정히 심심하면 있다가 부르세요. 전 기숙사에 가서 쉬고 있을 테니까요."

"아니야, 푹 쉬어. 할 일이 없으면 끼적이던 소설이나 마저 써보지 뭐."

그 말에 후배는 웃었다.

"암만 취미라도 그거 올해 안에 완성되긴 하는 건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후배가 떠난 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원 연구원은 곧 TV를 끄고 작은 냉장고 안을 뒤적였다. 운좋게도 빵 쪼가리와 음료수가 남아 있었다. 그는 뒤이어 읽을 책을 찾아보았는데, 물리나 화학 관련의 전공 서적이며 학회지를 뒤적거리던 끝에 SF 소설 몇 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런 데서까지 과학연구소 티를 내는구먼. SF라니."

그러나 불평을 내뱉으면서도 주저없이 뽑아든 것은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었다. 가을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린 일이 피로했던지, 의자의 걸쇠를 풀고 앉아 한껏 몸을 젖힌 원 연구원은 하품을 참으며 책상 위로 발을 올렸다. 빵을 한 입 베어문 그가 첫 책장을 넘겼다.

「하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클레온 황제는 말했다.

"총리는 해리 샐던이라는 사나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소?"」

그사이, 원 연구원의 발치에 놓인 푸른 사과는 말없이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며 검출기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6 질량 112, 원자번호 54, 어느 제논의 일생:

그 시각. 이온 원(原)으로부터 잉태되어 처음 세상으로 나선 그와 형제들에게 울음소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는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비유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맞은 세상은 진실로 비어 있었고 좀 더 간명한 표현을 쓰자면 철저한 진공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온 원은 자신의 아이 - 질량 112, 원자번호 54의 제논 - 를 애처롭게 바라보았고,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진 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 갓난아이가 관찰 중에 느낀 급작스런 진동은 자신의 세계를 꿰뚫고 휘감는 어떤 거대한 힘의 준동이었다. 그 힘은 진공의 바다에서 제논의 몸을 떠밀어 표류시켰다. 제논은 본능적으로 흐름을 살피고 그것이 진공 세계의 양끝으로 자리 잡은 거대한 D자형 전극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냈다. 전극은 제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사실, 거대한 전극으로 빨려들어 D자형 수평 아치를 따라 흐르는 것은 그리 권장할만한 경험이 아니다. 그 안은 몹시 어둡고 운동의 속도는 끔찍할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다. 전극은 금세 그와 형제들을 진공의 세계로 도로 내뱉었지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무섭게 반대편의 전극이 그들을 다시 휘감아 들였다. 두 전극의 잔인한 장난에 제논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세계는 비명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매 전극을 도는 반원 운동의 결과로 제논은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고, 결국 잠존 상태에 빠져들듯 무서운 현기증이 일며 마침내는 공포의 의식마저 희미해졌다. 이때에 제논은 비로소 자신에게 집중되고 투사되는,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평범한 존재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신적 권능이었다. 그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말 한마디가 세상을 파괴할 수 있었고, 그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동작 하나가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막강한 권능에의 도취감은 어느덧 그의 몸과 마음을 황홀하게 휘감고 있었다.

이렇듯 고 에너지에 흠뻑 취한 제논은 이윽고 연속되는 반원의 운동을 마친 채 가속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빠르게 바뀌던 주변 풍경 속에서, 좁은 길 너머에 자리 잡은 천국의 문을 보듯 - 저 앞에 굳건히 버티어 선 우라늄 238을 보게 되었다. 수많은 알파 방사선들의 공세조차 무심히 산란시키는 저 난공불락의 여리고. 우라늄 238은 자신의 핵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속시키며 강력한 쿨롱의 벽을 현현하고 있었다. 저 벽에 부딪히는 자, 필시 홀로 파멸하리라.

그러나 제논은 이미 자신의 궤도를 바꿀 힘이 없었다. 몸을 휘감은 강대한 에너지가 그를 앞으로 밀어냈고 또 그 자신도 힘에 도취하여 일체의 두려움을 내던진 후였다. 그의 두 눈이 불탔고 우레의 바퀴는 몸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쿨롱의 벽을 헤집고 나아가 기어이 우라늄 238과 충돌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 순간 제논은 자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죽음이며 세계의 파괴자로다!"

여리고 성벽은 무너져 내렸다. 제논 112와 우라늄 238의 인상적인 충돌로 일어난 첫 창조의 과정. 'Fiat Lux!'(* '빛이 있으라' (창세기 1:3 中)) . 눈부신 섬광 함께 9개의 헬륨 및 미처 결합 못 한 4개의 중성자, 양성자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매섭던 충돌은 차가운 융합을 일으켰다. 지각 판이 서로 부딪치듯 두 원소가 일으킨 맹렬한 격돌이 불안정의 바다 위로 '안정의 섬'을 떠받쳐 올린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 제논과 우라늄은 없었고, 대신에 양성자 수 126, 중성자 수 186으로 질량값 312를 갖는, 전대미문의 - 그러나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 중원소가 3번 검출기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이 괴물을 발견한 검출기의 파수병들이 조급히 경보 신호를 보낸다. 미세한 신호들은 복잡한 회선을 오가며 3번 검출기의 모니터실로 향하고, LCD 디스플레이는 신호를 받아 작은 경보음과 함께, 인지하기 쉬운 붉은 바탕의 노란 글씨를 출력한다.

'요주의 원소 검출'

이로써 플라워 오브 켄트 품종의 초록색 사과는 원 연구원의 발바닥과 함께 발견의 소식을 최초로 접한 생명체의 자격을 얻었고, 모니터실의 바닥 위로는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7 원소의 발견

이 원소는 질량 값 312의 126번 원소였다. 이것의 의의는 많은 물리학자가 고대하던 마법 수의 원소이며 소위 '안정성의 섬'이라 불리는 영역에 속해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 신원소를 국가명이나 인물 명을 따는 관례에 따라 '코리듐(Koridum)'으로 명명할 거라던 뉴스는 국민을 열광케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도 상현은 그런 발견이 여전히 자신의 삶과는 깊은 연관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이런 신원소 발견의 여정은 제법 길고 오래되어 수십 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다만, 2002 이전까지도 많은 물리학자들은 114번 부근에 안정적 원소가 있으리라던 글렌 시보그 박사의 가설에 회의적이었고 실제 113번 원소가 발견되기까지 이것은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영선은 높은 번호의 원소의 안정성 여부가 왜 중요한가를 궁금히 여기는 상현에게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주었다.

"네가 컴퓨터의 동영상 플레이어로 영상을 틀어놓고 빠르게 재생/일시정지 버튼을 연타한다고 해봐. 가장 빨리 끊어낼 수 있는 영상의 간격은 얼마나 될 것 같아? 일 초를 백으로 나눈 만큼이나마 끊어낼 수 있을까?"

상현은 어린 시절 스톱워치로 장난을 치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런데 우라늄 이후 113번까지의 원자들은 거기에 다시 일만을 나눈 시간조차 견디질 못하는 거야. 그야말로 찰나잖아."

영선은 별 뜻없이 꺼낸 말이겠지만, 상현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그가 알지 못하던 생멸(生滅)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그러니 생멸의 순간이 반복되는 찰나라는 시간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해온 것보다 더욱 짧은 순간을 의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2002년 두브나라는 러시아의 도시에서 두비움을 발견해냈어. 이 두비움은 앞선 원소들보다 3천만 배에 이르는 시간을 지속했지 뭐야. 이 원소가 바로 114번 원소였고 글렌 시보그 박사의 가설이 힘을 얻게 된 거야."

상현은 뒤이어 잔인한 사디스트들의 흥분한 모습을 떠올렸다. 원소를 충돌시켜 갈가리 찢고 그것을 이어 붙여 만든 인공의 창조물. 그는 문득 제노바 출신의 한 물리학자를 떠올린다. 이 경우라면 근대의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겠는걸.

"126번 원소는 마법 수에 해당하는 원소야. 마이어와 예센이 껍질모형을 통해 이론적으로 검증했어. 중성자 수는 2, 8, 20, 28, 50, 82, 126, 184이고. 양성자 수는 거기에 116이 들어가. 이 수치의 양성자나 중성자 값을 가질 때 원소가 안정된다는 거고."

"마법 수라. 어감이 묘한데? 이번에 국원련에서 발견된 원자가 바로 그 마법 수의 원소인 거로구나?"

"그래,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냐. 발견된 원소의 질량 값이 312였거든. 312의 성질도 밝혀야 할뿐더러 이중 마법 수의 원소인 310의 발견이 남았지. 126번 원소가 발견된 이상 모두가 질량 값 310의 동위원소를 찾고 싶어 할 거야."





#8 인류의 새로운 시대 D-7

2014년의 크리스마스 이브. 여인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새, 이 평범한 가정의 나머지 일원들은 거실의 TV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구석의 작은 트리에서는 일정한 규칙을 따라 형형색색의 작은 전구들이 빛을 뿌려댔고, 이브의 들뜬 분위기는 주방 식탁 위에 놓인 생크림 과일 케이크에 이르러 한층 고조되었다. 케이크의 하얀 설원 위에 선 배불뚝이 산타 사탕이 푸른 트리와 '메리 크리스마스'라 양각된 초콜릿 사이에서 달콤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가족의 가장만은 이 명절에서 외따로 떨어진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TV의 소음 속에서도 무심히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혼을 빼놓던 크리스마스의 특집 만화가 끝나자 아이들은 아쉬움 속에 일어나 주방의 식탁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TV는 화면을 검게 물들이며 양쪽 스피커로 현대적으로 편곡된 음악 하나를 흘려 보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집안의 가장은 이 광고에 익숙했으나 신문을 내려놓고 잠시의 시간과 관심을 할애했다.

어둑한 화면 가운데로 서서히 번져나간 빛의 막대가 수평의 방향으로 기다란 호를 그리며 구부려졌다. 이윽고 중앙이 부풀어 오르며 태양이 떠오르자, 태양을 반쯤 가린 둥근 행성은 항성이 쏟아내는 강렬한 빛 아래로 어슴푸레 푸른 바다와 흙빛의 속살을 드러낸다.

이제 화면은 자전하는 지구의 한 부분을 빠르게 확대시켰고 우측 아래로 연월일을 표시한 타이머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 확대된 곳은 유럽 대륙의 발칸 반도였다. 그와 함께 화면으로 희미하게 투사된 것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었는데, 화면이 지구의 다른 곳으로 빛의 여운을 남기며 옮겨갈 때면 그때마다 또 다른 역사의 순간들이 화면 위로 명멸하며 지나갔다. 빈센초 카무치니의 「시저의 죽음」, 예수 탄생을 그린 카라바지오의 「목자들의 경배」, 반으로 쪼개진 사과와 뉴턴의 초상화, 프랑스 혁명의 시대 -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위엄 있게 선 레닌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연설 중인 히틀러. 그리고 익살스럽게 혀를 내민 유대계 독일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모습까지.

2012년을 지나며 세종시 국가원자연구소가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타이머는 2014년 12월 31일에서 멈추어 섰다. 화면이 축소되며 다시 자전 중인 지구를 비춰들자, 남자 성우의 낮은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통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2015년 1월 1일.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음악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잠시 거실로 나온 부인이 행주로 손을 훔치며 그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머가 마침내 2015년 1월 1일로 나아가자 화면 중앙의 태양은 강렬한 빛을 뿌리며 화면을 하얗게 물들였다. 점차 작아져 가는 배경음의 여운 속에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인 현성의 로고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고 광고는 마무리되었다.

이 집의 가장은 신문을 접어 소파 앞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신문 맨 뒷면에 역시 검은 바탕 위로 태양을 절반이 넘도록 가린 지구의 희미한 여명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구의 위쪽으로는 '2015년 1월 1일', 그 아래로는 조금 더 작은 폰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도대체 2015년 1월 1일에 뭔 일이 생긴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상차림을 끝낸 부인이 식탁 자리에 앉으며 꺼낸 말에 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제는 신비주의 마케팅도 한물갔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몇 달째 저리 광고를 해대니 요즘은 어딜 가도 화제더라고. 일주일 즈음 남았으니 곧 알게 되겠지."

뒤이어 그는 케이크가 뭉개지기 전, 서로 자기가 자르겠다 다투는 아이들에게서 플라스틱 칼을 빼앗아야 했다.

"2015년 1월 1일에 인류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때는 과연 이 녀석들이 더는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않을지. 한번 두고 봐야겠어."





#9 행운집적기

"손님. 뭐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상현은 걸음을 멈추고 점원이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진열대는 두꺼운 강화유리를 접착제로 녹여 붙여 깔끔하게 마감을 한 것이었다. 상현은 물건을 살피던 롱코트의 남자 곁으로 다가가 섰다. 진열대 안에는 제품들이 투명한 아크릴 판에 올려진 채 위아래로 어두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이거 왠지 홍등가를 보는 것 같군. 저마다의 모습을 보여주며 잠자코 선택을 기다리는 상품들. 그러나 전자상가의 점원이란 고객이 선택하길 마냥 기다려주는 포주들과는 다른 인종이었다.



"어지간한 행운집적기는 다 있습니다. 현성의 휠 오브 포츈부터 중국산 저가 제품까지요."

상현이 물었다.

"요즘 현성 제품은 얼마나 하나요?"

"국내에선 유일하게 국원련과 과학부와 제휴하고 공식 협력을 받은 제품이지요. 그래서 다른 제품보단 가격이 비쌉니다만. 뭐, 그래도 전과 비교하면 우스울 정도예요. 고객님께서는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오셨어요?"

상술. 시간을 내지 못해 함께 오지 못한 동생은, 인터넷 주문을 하는 것보다는 직접 나가 제품을 보고 고르겠다던 상현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두었다. 첫째, 전자상가의 점원들은 앞서 가격을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

"딱히 생각해온 건 아니고 가격이 맞으면 살까 합니다만."

"음." 선수를 빼앗긴 점원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현성 제품이 2년 전, 그러니까 2015년에 처음 출시되었을 때에는 천만 원이 넘었지만 그건 다 옛날 얘기죠. 중국산 해적 제품이 이십 만원 남짓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현성 제품이 이런저런 부가 기능도 좋고 제품의 내구성도 뛰어납니다."

점원은 상현이 볼 수 있도록 진열대 위에 놓인 양면 모니터로 제품 카탈로그를 띄워 주었다.

"MP3 재생기능은 기본이고 PMP 및 DMB 기능까지 겸비하고 있어요. 크기는 이렇게 손가락 세 개 정도로 작지만, 용량이 120GB에 320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 기능까지 있죠. 외양은 크롬도금. 라디오 수신이나 만보기, 심박 수 체크까지 됩니다."

"그래서 가격은 얼마나 되는 건가요?"

상현이 재차 묻자 점원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런 침묵의 어색함을 피하려 그는 곧 무언가를 뒤적이는 척하며 입을 연다. "이게 얼마였더라. 재고 상황에 따라 가격이 좀 달라서요."라 말한다. 동생의 조언대로다. 점원은 아마도 눈앞의 손님이 미리 정보를 알아보고 왔는지. 씀씀이는 큰지. 그리하여 얼마를 불렀을 때 승낙을 하며 얼마를 부르면 협상할 수 있을지를 따져보고 있었을 것이다.

"음, 현성 제품은 최소 40만 원은 주셔야겠어요."

"중국산 제품과 비교하면 그리 싼 편은 아니로군요."

그러나 점원은 실망하지 않고 싹싹하게 웃으며 진열장 내의 다른 제품군을 가리켰다.

"가격이 부담되신다면 중국산 제품이나 국내 중소기업 제품을 사시는 것도 괜찮죠. 부가기능도 거의 비슷해요. 카메라 화소 수가 좀 떨어지거나 관련된 칩을 저가형으로 사용하는 걸 제외하면 말이죠. 하지만, 요즘은 이런 제품들도 튼튼하고 디자인도 괜찮게 나와 많이들 찾습니다. 기본적인 집적기 기능은 떨어지지 않고요."

이제 셋째 단계에 접어드는 거로군. 동생의 기특한 조언에 내심 혀를 차던 상현의 곁에서, 롱코트의 남성은 물건을 골라 가게의 다른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고 있었다.

"이 제품을 3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잘 선택하셨어요. 인기도 좋은 제품이고 평가도 좋지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손님."

그는 바로 포장을 풀어 기계를 손목에 착용하고 스위치를 켰다. 그가 구입한 것은 현성에서 제작한 손목착용형 제품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세련된 콤비골드 시계처럼 보였고, 실제 일반 시계와 외형이 같았다. 남자는 제품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는 카드 명세서에 사인한 뒤, 가게의 명함을 받고 가게를 떠났다. 그가 이후에 들른 곳은 집 부근의 커다란 베이커리였다. 그곳에서 낭만적인 크리스마스 이브를 위해 작고 예쁜 생크림 케이크 하나를 구입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식탁 위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았다. 부인이 접시를 내오자 아이들은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은 자신이 얻은 작은 행운을 알아챘다. 점원의 실수인지 - 혹은 운이 따랐던지 - 상자 안에는 두 개의 일회용 케이크용 칼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 케이크를 자르는 권리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가장은 두 아이의 손에 각각 케이크 칼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손목에 찬 행운집적기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10 2020년 MBS 9시 뉴스 中: 세상의 변화. 행운집적기 5년.

(앵커)
올해로 행운집적기가 일반에 소개된 지도 5년이 지났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일상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행운집적기. 그 탄생과 역사, 사회에 가져온 변화와 파문을 되짚어보겠습니다.



(기자)
2012년 9월 31일. 세종시 국가원자연구소의 3번 검출기가 126번 원소를 발견해냈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원소 발견의 쾌거. 코리듐으로 명명된 이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원희선 연구원의 가설은 획기적인 토대를 마련하였고, 각국의 연구소 역시 코리듐의 이용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1월 1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정부와 산업분야가 협동하여 2년여의 개발 과정을 거친 뒤, 첫 상용화된 행운집적기 휠 오브 포츈 즉, 워프가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수천만 원 상당의 고가에 판매된 이 행운집적기는 당시 '대기업의 부적 사업 진출'이라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2015년 말의 '야구 파동'과 '수능 파동'을 통해 대중에게 그 실용성과 효능을 인정받았습니다.

행운집적기의 경쟁 및 시장 질서 교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2016년에는 설계도 유출로 중국과 대만의 저가 행운집적기 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허 및 통상 분쟁과 안정성 등의 위험 제기 속에서도 중국산 제품의 등장은 행운집적기의 시장 가격을 지속적으로 낮춰 마침내 1인 1집적기 시대를 열기에 이릅니다.

2016년 이후 행운집적기는 인류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혁신적인 연구들이 진척되었고 실업률과 사망률이 감소했으며 인류의 평균 수명이 증가하는 한편 이혼율은 감소 추세에 있습니다. 부의 편중이 완화되고 있고, 교실 내 성적 편차 등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는가 하면 예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이 계속하여 쏟아져 나옵니다. 복권 사업은 폐지되었고 일부 종교 사업이 불황을 겪는 것도 행운집적기에 의한 중요한 사회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여전히 행운집적기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향후 5년 이내에 각국의 지니계수가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이며, 20년 이내로는 국가 간 격차 또한 유의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재건, 43, KDI 연구원)

그러나 행운집적기의 보급으로 우리가 잃게 된 것들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주말마다 이곳 잠실 경기장을 찾았지만, 요즘은 재미가 시들해지는 느낌이에요. 아무래도 좋아하는 팀이 전반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다른 팀보다 승률이 높아져야 응원하는 재미가 있는데, 모든 팀의 승률이 해가 갈수록 조금씩 비슷해져 가고 있거든요. 결국 모든 경기의 승률이 반반이 된다면. 글쎄요. 승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박진감은 넘치겠지만 왠지 전과 같진 않을 것 같네요." (박희철, 31, 변호사)

인터넷에는 행운집적기 사용을 반대하는 모임들도 있습니다.

"요 몇 년간 학생들은 공부에 대해 흥미를 잃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얻어도 집적기 덕분이라 생각할 뿐이고, 실제 열심히 하지 않아도 집적기를 켜면 대체로 만족할만한 점수가 나오거든요. 이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행운집적기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것이 곧 노력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박탈감을 느끼게 할 것이고 마침내는 사회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게 될 겁니다." (이동섭, 47, 교육감. 안티집적기 카페 회원)

그러나 대다수 시민의 생각은 다릅니다.

"박탈감이라는 거야 있는 사람들 얘기지요. 기득권층에게는 불행할지 몰라도 그 기득권이 권력에 기생하거나 운이 따른 결과로 얻게 된 것이라면, 행운집적기는 결과적으로 올바른 사회 변화를 끌어내는 셈입니다. 합리주의라는 관점에서도 소수의 박탈감보다 다수가 얻는 행복이 크다면 타당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가월, 52, 교사)

"사회는 여전히 복잡다단하며, 행운집적기의 발명이 이룩한 경이로운 과학 및 사회 발전에도 여전히 우리는 모든 선택에서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운집적기가 특정 성과에서 개인의 노력 부재를 모두 벌충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의미 있는 경쟁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행운집적기는 그저 '운'이라는 부당한 변수를 모두에게 거의 동일한 상수 값으로 바꿔준 것뿐입니다." (김영선, 31, 현성 WoF 개발팀)

위와 같은 여러 우려와 도덕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행운집적기가 이룩한 긍정적인 변화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완화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으며 사회 정의 아래 점진적으로 평등을 이룩해나가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부가 결국 개개인의 운에 따른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을 이제 많은 사람이 이해하며, 제한적이지만 보편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논쟁을 일으키면서도 행운집적기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으며, 이제는 사실상 필수재 품목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행운집적기에 대한 소모적인 도덕성 논란이 아닌, 행운집적기를 통해 어떻게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유지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상 MBS 최동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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