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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망(皎望)
The Darkside of the Stars


5. 독한 류쿠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강도 섬유가 우주와 실내를 경계지었고 죽음과 침묵의 공간은 자신의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잔에 다시 류쿠를 따랐다. 잔을 흔들자 거의 녹아버린 얼음 몇 조각이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얼굴 왼쪽이 간지러워 손가락으로 안대 위를 긁었다. 흉터의 촉감은 역시 불쾌했다. 살로노바에서 얻은 훈장.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건 약 4개 소대 뿐, 나는 2개 여단을 제물로 바쳐서야 겨우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희생이 너무 컸다.  오직 술만이 나를 그 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었다.

나의 유격군은 소혹성 게부라 주변을 맴돌았다. 행성연합은 율의 죽음을 이용해 엘루드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물론 아난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해야 했지만 반란군조차도 내분을 수습하지 못했다. 결국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지상에는 율의 추종자와 반대파들이 공존하며 수시로 행성연합의 괴뢰정부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우주에서의 상황은 더욱 좋지 못했다. 에기유와 바그람이 행성연합과의 화친으로 노선을 변경함으로써 유격군은 명실상부한 해적떼가 되어버렸으니까. 곧 엘루드-에기유-바그람의 연합함대가 유격군의 항로를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이미 호드가 파괴되었고, 남아있는 거점 중 하나인 케테르는 행성연합군의 파상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령관, 브리핑 시간입니다. 부관들은 이미 다 모여 있습니다.”

데스크 위에 입체 모니터가 떴고, 서인의 아름답지만 냉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눈동자와 목소리. 나는 문득 서인의 과거가 그리워졌다. 가냘픈 몸을 깔끔한 수트로 감쌌던 아름다웠던 시절. 지금은 유격군 부관의 처지에 만족한 듯 보이는 그 모습은, 그러나 나로선 안타까울 뿐이었다. 너의 따뜻함은, 배려는, 너의 어깨를 파고든 차가운 기계팔에 물들어 이젠 사라지고 없단 말인가…….

“알았다. 지금 곧 가지.”

유격군 제복을 입은 그녀는 말없이 거수경례했다. 통신이 끊어졌다. 모니터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득 그것이 생각났다. 지문자물쇠가 달린 서랍을 열었다. 긴 서랍 안에는 권총이 두 자루 들어있었다. 은으로 세공된, 지나치게 유려한 장식이 과연 이게 사람을 쏘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권총이었다. 잘 해봐야 멋들어진 장신구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 권총은 두 자루 모두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리볼버 두 정을 양손에 집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6발 밖에 들어가지 않는 비효율성이 특징이었다. 먼 옛날부터 장교들이 호신용으로 사용했고, 사실은 자살용으로도 사용한 게 분명한 바로 그 권총이었다. 엘루드의 병원에 비밀리에 입원해 있던 서인 역시 입 안에 리볼버를 물었다. 율의 추종자가 몰래 돌려준 아난의 권총에는 친절하게도 세 발의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다. 총을 빼앗는 내 손아귀. 빗나간 탄환. 병실의 벽에 난 작은 상처. 그녀의 뺨을 치는 내 손아귀. 잃어버린 오른팔보다 잃어버린 아이를 더 슬퍼하며 섧게 울던 그 울음. 율과, 아난과, 그리고 나를 저주하던 그 슬픈 웃음. 그 날의 태양은 도시의 더러운 공기를 듬뿍 빨아들여 몹시도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권총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고 엄지손가락으로 자물쇠를 눌렀다. 누를 때 힘이 조금 들어갔는지 손가락이 약간 뻐근했다. 데스크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집었다. 걸을 때마다 오른쪽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살로노바에서의 전투 이후로 나는 다리를 절었다. 자동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거울처럼 맨질맨질한 그 문에 비친 나는 어떤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얼굴 반쪽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흉터는 검은 안대로도 다 가려지지 않았고, 유격군의 검은 제복은 독재자의 충견(忠犬)을 연상시켰으며, 비척거리는 다리는 그 자체로 흉물이었다. 류쿠가 아직 위장에 뜨끈하게 남아있어 붉게 타오르는 얼굴이며, 그 아래로 비쭉비쭉난 수염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무책임한 알콜중독자, 한 마리 늙고 병든 짐승에 불과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더 이상 유격군을 이끌 수 없어. 새로운 지도자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어야 했어. 나는 서인이 아난의 뒤를 잇는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든 것은 복수 뿐이었고, 그것을 위해 선택한 자리는 또다시 사령관의 보좌역이었다. 그런 삶의 관성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난을 위한 것인지, 혹은 자신의 아이를 위한 것인지 나로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는 결국 파멸하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기울어 가는 뱃전에 몸을 묶은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가라앉으리라. 그러나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 또한 있었다. 아직 우리에겐 소혹성이 하나 남아있었고, 행성연합군은 이쪽 우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에기유와 바그람은 겉으로는 동맹상태였지만 자원경쟁으로 인한 알력은 행성연합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그렇다면 놈들의 빈틈을 파고드는 거다. 놈들의 터진 살점을 비집고, 상처에 독을 뿌리고, 뼈를 부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행성연합이 이곳 변경행성에서 제 팔다리를 잃는 꼴을 두 눈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율의 말이 옳았다고 해도, 아난이 나를 죽일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옹을 입은 로닌의 칼은 적의 피를 원할 뿐이었으니까.

문을 나섰다. 침침한 빛이 우주선의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의 불분명한 걸음과는 반대로, 내 지팡이의 걸음걸이는 정확했고 그 울림에는 분별이 있었다. 어느새 브리핑 룸 앞에 다다랐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부관들이 서 있었고 대대장 야콥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도전적이었다. 좋은 눈이었다. 브리핑 룸의 사령관석 왼쪽에는 서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차가웠다. 나를 향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투명한 적의였다.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그녀의 말없는 언어를 이해했다. 그렇다. 지금은.

복수를 준비할 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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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젤라즈니를 기억하며.

문장의 부박함과 어리석음과 남 앞에 나선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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