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교망(皎望)
The Darkside of the Stars


4. 어둠 속에서 나는 보았다. 커다란 칼을 들고 서 있는 한 여자를. 그녀는 황야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어느 쪽으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을 원했고, 파괴를 원했고, 피를, 무엇보다도 목숨을 원했다. 야트막한 절벽 아래서 지켜보던 나는 그녀가 숲의 한가운데 있는 빌딩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군데군데 금이 가고 녹슨 철근이 죽은 생선의 척추처럼 굽어지고 썩어가는 그 건물 한가운데서 얼핏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이제는 잊혀진 바다의 냄새, 그 짜디짠 소금기, 아니, 차라리 피냄새에 가까운……. 그녀 앞에 사내들과 여자들이 무릎꿇고 있었다. 다치고 멍든 낯선 얼굴들이 심판을 기다리는 수인(囚人)처럼 목적을 잃은 눈망울로 그녀를 지켜본다. 칼끝이 하늘을 향하고, 벤다. 죽음의 곡선에 도취된 그들은 머리와 분리된 자신의 몸뚱어리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머리 없는 목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고, 마지막이 남았을 때 그들은 절규했다. 그들은 마지막 희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것이 되어 내 손으로 마지막 남은 여자를 벤다. 그 얼굴은 어딘가 익숙하긴 했지만 어쩌면 그저 착각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서인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공허를 바라보았다. 이미 칼은 의지도 목적도 없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제 역할을 다할 뿐이었다. 베었다.

탄흔이 새겨진 탁자에 몸을 숨기며 전방을 주시하다가 문득 꿈 생각이 났다. 피냄새가 코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요 며칠 동안 잠잠했던 꿈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나는 분대를 대기시켰다. 저 문 너머의 적들은 유탄에 맞아 온몸에 파편이 박힌 채 바닥을 뒹굴고 있을 것이다. 총소리와 폭발음이 먼 파도처럼 들려왔다. 적은 오지 않았다. 나는 이동을 지시했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통로를 빠져나갔다. 나를 포함한 사십 명의 소대원들 중 살아남은 녀석은 일곱 명. 적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우리는 큰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는 적진을 돌파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온몸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뺨과 어깨에 스친 상흔이 쓰렸다.

율은 엘룬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도시 살로노바에 새 수도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아난주의의 계승을 표방한 그였지만, 아직 아난을 기억하고 있는 혁명정부 요인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전의 상징인 살로노바를 앞세워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국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의 살로노바 비밀방문은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을 놓쳐버리면 놈은 행성연합군의 뒤에 숨은 채 우리가 몰살당하기만을 기다릴 것이 뻔한 탓이었다. 비밀요원의 정보는 옳았고 우리는 놈의 거처를 급습했다. 지상에 잠입한 유격군 두 개 여단을 동원했다. 여단이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조금 큰 대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내가 지휘하는 돌격소대는 차라리 결사대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유격군 중에서도 젊고 건장한 병사만을 뽑아 선두에 섰다. 전선의 최전방에 선 나를 만류하는 야콥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귀에 꽂힌 무선이어폰에 신호가 들어왔다. 비(非)영상통신이었다.

“펜릴, 발퀴레 넷. 에코(E) 지점 점령.” 발퀴레 넷 지휘관의 느릿한 목소리와는 다른, 짧고 명료한 발음.
“발퀴레 넷의 두목은?” 막연하고 두려운 예감. 언제 느끼더라도 생소한 기분.
“보응웬잡 대장은 전사하셨습니다. 지휘관 유고로 부관인 제가 지휘하고 있습니다.”

젊고 건강한 목소리는 지금 다소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전쟁터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지체하지 말 것. 신속하게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라.”

야콥은 간단하게 응답하고는 통신을 끊었다. 보응웬잡이 죽었다. 함께 싸움터를 헤쳐온 녀석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나 또한 이곳 살로노바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문득 서인이 떠올랐다. 소혹성의 작은 병실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던 그 초췌한 얼굴……. 아니, 아니다. 어차피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니냐. 복수를 위해 온 것이 아니냐. 다행히 복수할 대상은 놀이터의 4차원 도미노 조각처럼 차고도 넘쳤다. 어느 조각까지 밀어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내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살로노바의 지방의회는 커다란 미로였다. 고대 지구의 미궁에 숨은 괴물 미노타우르스처럼, 율은 제 몸을 깊숙한 어둠 속에 꽁꽁 감추었고 그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호위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푸른 눈을 가진 괴물을 잡으러 가고 있었다. 나의 분대는 입자가속탄으로 줄리엣(J) 지점 입구를 부쉈다. 회의장 안쪽에 위치한 작은 화상회의실이었다. 적은 열 명 남짓했고, 유탄이 허공을 맴돌았다. 유탄이 폭발하면서 생긴 파편이 적과 부하들의 머리를 함께 뚫었다. 나는 자동조준기능을 상실한 사하산(産) 7.62mm 소총을 난사했다. 격렬한 총격전. 쓰러지는 적들. 쓰러지는 전우들. 태어날 적의 완전한 모습을 조금씩 박탈당한 채로-총알과 파편에 손가락을 잃고, 다리를 잃고, 머리를 반쯤 잃어가며-그들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J 지점에서 살아남은 건 나의 분대였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살아남았다. 거구의 시리우스 사나이 뷰로와, 나와 비슷한 키에 아직 앳된 얼굴의 청년병사였다. 엘루드 출신임을 뚜렷하게 증명하는 까만 곱슬머리가 눈에 띄었다.

“자네 이름은 뭔가?”

청년은 서인을 연상시키는 가느다란 눈동자를 커다랗게 벌렸다.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청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입을 열기 위해 애써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렸다.

“갼, 갼체입니다, 사령관. 엘루드 출신입니다.”

그에게는 소년의 수줍음이 남아있었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곧 나는 나의 물음과 행동을 후회했다. 이름을 물어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더 많은 시간과 미래를 가진 젊은이에게 이대로 마지막까지, 죽음까지 함께 하자고 말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너의 삶을 살라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놈을 죽이고 여기를 빠져나가자. 아니, 너만이라도 살아서 빠져나가라. 그저 살아남아.

우리들 셋은 다음 지점을 향해 뛰었다. 다른 소대들에서 끊임없이 통신이 날아들었다. 희생은 많았지만 유격군은 의회를 빠르게 점령해나갔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배신자의 머리. 우리는 그것을 유격군의 깃발에 꽂아 개선할 것이다. 설령 이곳에서 전멸하더라도 놈이 우리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놈의 머리가 우리의 잘린 머리와 함께 고대의 박물관에 전시되도록 할 것이다.

폭발이 일어났고, 앞장서서 달리던 뷰로가 바깥쪽 벽으로 날아갔다. 몸이 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그의 목은 폭발로 인해 꺾였는지 완전히 돌아가버렸다. 나와 갼체는 포복했고, 통로로 뛰쳐나오는 적들을 쏘았다. 화약 냄새가 지독했다. 안개처럼 흩날리던 폭연이 조금 사라졌다. 적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갼체에게 조심할 것을 지시하려 했다. 그의 입술은 분노와 공포로 들썩이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갼체는 통로 끝으로 뛰었다. 그는 교차로에 멈춘 채 왼편 정면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나는 다시금 그를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탄환은 명령보다 빨랐다.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와 풀썩 주저앉는 소리 중 무엇이 먼저였는지 난 분간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것이 한 개의 인생이 무너지는 소리, 미래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소리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갼체의 박살난 머리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유탄도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 중 하나를 통로 바깥으로 던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러나 들을 때마다 생소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어폰의 피코(pico) 위치추적장치로 어느새 탱고(T) 지점까지 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조심스럽게 T 지점으로 이동했다. 좁은 복도에 파편과 탄환이 가득 박혀 있었고,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귀빈실 입구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방에 들어섰다.

억센 힘이 소총을 휘어잡았다. 몸을 돌려 적의 광대뼈를 향해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빗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적은 그 틈을 노려 총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총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땀에 젖어 미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상대는 내 다리를 노리며 재차 공격해왔다. 나는 총을 세로로 세워 적의 공격을 막았다. 둥팡홍(東方紅)의 총격술은 꽤 유용했다. 둥팡홍의 종족들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자연히 하단공격과 방어가 우선인 총격술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약았다. 킥으로 아래를 치는 척하면서 손날을 뻗어 내 손목을 후려쳤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고, 총을 들고 있기가 더욱 힘들었다. 고통을 참으면서 소염기 부분을 상대의 어깨에 힘껏 찔러넣었다. 적의 강철 같은 손과 발은 합금의 단단하고 딱딱한 두께를 견뎌냈다. 개자식. 나는 놈의 턱을 노리고 힘껏 개머리판을 쳐올렸다. 피했다. 킥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총이 손을 벗어나 파편투성이 소파 뒤로 날아갔다. 나는 몸을 뒤로 빼 적의 간격에서 멀어졌다.

킨레이는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비록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왼쪽 눈동자는 생생히 살아있었다. 투명한 적의였다. 그는 등 뒤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곧이어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것은 그의 적의만큼이나 차갑고 예리한 단검이었다. 빛이 칼날에 스며 구불구불한 네오다마스쿠스(Neo Damascus) 문양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에 비하면 내가 꺼낸 합금검은 장난감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킨레이는 내가 띈 웃음을 자신에 대한 비웃음으로 이해했는지 입꼬리를 한쪽으로 길게 늘여뜨렸다. 하지만 눈은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을 왼손에 고쳐쥐었다. 타고난 전사. 그는 전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짐승을 두고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궁리하는 건 전사의 몫이 아니다. 그저 움직일 뿐이다. 적의 살갗을 후비고 심장을 파먹기 위해. 그리고 그건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놈의 손등을 그었다. 하지만 놈은 선공(先攻)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주먹이 엇갈렸고 칼을 휘두르며 서로의 약점을 노렸다. 놈과 나의 킥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통증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킨레이는 노련하게 방어하면서도 내 몸의 빈곳을 놓치지 않았다. 내 몸은 이미 심하게 긁힌 거울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이고, 곳곳이 쑤시고 아팠다. 이를 물었다. 이쪽도 상대도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킨레이의 피투성이 제복은 그의 단단한 근육과 불거진 살점과 뜨거운 피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칼로 놈의 목을 긋는 척 하면서 라이트 킥으로 허리를 후렸다. 킨레이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심장을 노렸다.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그가 공격을 오른쪽으로 흘렸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을 뒤로 빼 간격을 벗어났다. 통증이 머리를 휘감았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였고, 상처의 감촉은 불쾌했다. 비명을 질렀다. 검고 길죽한 선은 이미 눈알을 지났다. 멀쩡히 남은 오른쪽 눈만을 계속 깜박거렸다. 시야적응이 힘들었다. 놈은 이제 짐승을 잡기 위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거꾸로 쥐던 칼도 고쳐쥐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타고난 전사. 역겨웠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이대로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그의 칼이 어깨를 스쳤고, 나는 그의 비어있는 목을 그었다. 놈이 몸을 빼지 못하도록 군화 뒷굽으로 무릎을 찍고 팔꿈치로 광대뼈를 후려쳤다. 그는 내 왼팔에 칼을 박았다. 나도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 우리 둘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차가운 눈은 여전히 나를 보았지만, 그러나 내 모습을 보기 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힘겹게 몸을 세웠다. 왼팔에서 그의 칼을 뽑았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서도 칼을 뽑았다.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공허한 몸뚱이가 증오스러워 다시 찔렀다. 찌르고, 또 찔렀다. 살점을 뜯어내고, 근육을 도려내고, 심장을 파헤쳤다.

다시 눈을 뜨자 세상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바닥이 몹시 미끄러웠고 나는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단 하나, 고통이 생각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새 내 왼손은 칼 대신 얇은 주사기를 들고 있었고, 허벅지는 사소한 통증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이 악성 각성제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아니, 몇 분, 아니, 그걸 도무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진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 몸을 마치 꿈처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만 같은데. 갈기갈기 찢어진 소파 뒤에 멍청하게 누워있는 자동소총을 집어들었다. 방을 빠져나오면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은 피의 바다를 끌어모으는 소용돌이처럼 검었고 깊이를 알 수 없었다. 태초의 고동을 잊은 지구고래처럼 그의 심장이 내뿜는 피는 잦아들었고, 곧 멈출 것이었다. 나는 태초의 핏빛 바다에서 솟아나온 듯 붉게 물든 네오다마스쿠스를 집었다. 방을 나섰다.

아마 나는 비틀거렸을 것이다. 내 걸음을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판단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런 진흙탕에 뛰어들었던 말인가. 그것도 혼자만이 아니라 여럿의 목숨을 손에 쥐고서. 폭약 한 줌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을, 아니, 9mm 저격탄 하나로도 율의 머리를 아난의 묘비에 꽂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었다. 복수에 굶주린 늑대들을 고작 탄알 하나로 잠재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놈을 죽인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행성연합에 의한 지배. 자주권을 상실한 ‘새로운’ 노예상태로, 중심도 변경도 없이. 빌어먹을, 아무라도 좋으니 대안이 있다면 제시해 달라. 십여년을 전쟁터에서 방황하던, 혁명의 꿈을 쫓던 얼빠진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으니. 설령 대안이 있다 한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대안인가? 무엇을 위한 대안인가? 말해다오, 예수여, 붓다여, 무함마드여. 옛 지구의 현자들이여. 그대들이 주장했던 대안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펜릴. 발퀴레 여섯.”

신호가 들어왔다. 수십 차례 호출했는지 이어폰이 꽂힌 귀가 뜨거웠다. 버튼을 누르고, 신호를 받았다.

“말해.”
“의회 중앙통제실 점령. 호텔(H)에서 발퀴레 둘과 합류하겠다.”
“좋아.”
“여기는 발퀴레 일곱. 발퀴레 일곱도 호텔에서 합류하겠다.”
“즐거운 미팅이 되길 바란다.”

신호를 끊을 찰나에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잔뜩 긴장된, 아직 절제되지 않은 목소리였다.

“펜릴! 발퀴레 넷. 호위병 격멸, 발두르 도주. 빅터(V) 방향으로 이동 중. 추적하고 있습니다.”
“나도 간다. 교신 유지하도록.”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나인지, 나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짐승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짐승은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더 냉정하고 영리할 것이었다. 지구의 차가운 얼음 위에서, 악신(惡神) 로키의 자식은 최후의 날을 미리 알았기에 신들의 밧줄에 묶이는 치욕을 교활하게 견뎌냈기 때문이다. ‘신들의 황혼’에 오딘을 깨끗이 잡아먹고 발할라를 끝장낸 커다란 늑대들은 지금 또다른 피를 맛보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로키의 꾀에 빠져 겨우살이 가지에 찔려 뚝뚝 피를 흘리는 너를 우리는 원한다. 파괴를, 피를, 더 많은 목숨을!

빅터 지점의 방에 들어섰다. 아마 의회의 자료실 중 하나였을 것이고,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얼핏 그들의 뒤에 낯익은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았다. 율의 짙푸른 눈동자가 비명을 질렀다. 적들이 총을 쏘았다. 나는 마지막 남은 유탄을 던졌다. 무언가 풀썩 하고 쓰러지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소리가 들렸다. 총격전은 계속되었다. 은폐하고 엄폐하고 몸을 굴리면서, 사브르(sabre)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빛을 서로에게 내뿜으면서. 마지막 남은 병사는 빈손이었다. 그를 눈앞에 두고 소총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없었다. 놈이 빨랐다. 놈이 뺀 권총이 내 왼쪽 어깨를 뚫었다. 오른손으로 겨우 권총을 뽑을 수 있었다. 쓰러지면서 병사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도 쓰러졌다. 나는 슬슬 통증이 올라옴을 느꼈다. 다시 한 번 각성제를 맞아야 했다. 손이 떨렸다. 어쩌면 온몸으로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리춤에서 작은 주사기를 뽑아 이번에는 목에 박았다. 약간의 경련, 신음, 그리고 정지. 나는 권총을 든 채 일어섰다. 정면에 피로 그려진 붉은 추상화를 향해 걸었다. 탄연이 거의 사라지자 비로소 그 밑에 쓰러진 병사가 보통 호위병이 아니라 고급 장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소령 계급장은 피에 젖어있었다. 어쩌면 오보얀에서 같이 싸웠던 대대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시야의 오른쪽 언저리에 한 사내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총알이 허공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가 난 방향으로 권총을 겨눴지만 내 눈은 여전히 쓰러진 대령을 향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 대령의 표정은 흡사 웃는 것만 같았다.

“멈춰.”

율이 떠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덜그럭거리며 두뇌를 요동시킨다. 비록 귀는 교신기로 막혀 있어도 나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내 감각은 모든 걸 초월했으니까. 시간도 공간도 모두 내 것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나는 나의 자기기만과 현학에 역겨움을 느꼈다. 멍청하긴, 알기는 뭘 안단 말이냐. 감각은 엉망진창, 고통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괴물, 살아있는 시체 주제에. 귀가 웅웅거렸다. 내 시각은 율의 녹색 눈동자를 관통했다. 그의 몰골은 형편없이 망가져있었다.

“오랫만에 만나니 반갑소, 선전관 동지.”
“쟈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모든 걸 다 망쳐놓았단 말이다! 네놈들 때문에 엘루드는 영원히 노예로 전락하고 말 거라고!”
“너 때문에 시작한 전쟁이야. 한 가지 물어보지. 왜 아난을 죽였나? 너는 아난주의자였잖아?”
“행성연합과 공모한 주제에 에기유와 바그람을 끌어들인 댓가다. 아난은 잘못 생각한 거야. 행성연합을 기만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해선 안 되는 거였어.”

귀울림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빨에 깊이 패인 자국만을 짓눌렀을 뿐이었다. 피맛이 났다. 눈을 깜박였다. 율의 윤곽이 어지러이 교차되었다. 그의 목소리도 조금씩 울리고 있었다. 세계가 울리고 있었다.

“약에 의지해 지금까지 잘도 버텨왔군. 이 무모한 전쟁의 승자가 된 걸 기뻐할 시간은 주지. 하지만 쟈오,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

허리에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총을 겨눴지만 오른쪽 어깨가 늘어졌다. 허벅지마저 총알에 뚫리자 무릎이 꺾였다. 내 시야는 마치 모래 속으로 무너지는 탑 위에 선 것처럼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 위로 푸른 눈동자가 입을 열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짓밟는 질투와 심판의 신 야훼처럼 오만한 목소리로.

“진실 하나 알려주지. 아난이 자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기 전에, 내부에서 검토 중이던 계획이 하나 있었지. 자네가 자리를 거부하고 이 행성을 떠나는 즉시, 자네가 탄 우주선을 폭파시킬 계획 말이야. 아난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그런 게 정치야. 잘 가게.”

나는 네오 다마스쿠스 칼로 율의 발등을 찍었다. 비명이 허공을 감쌌고, 이어진 총소리가 율의 비명을 집어삼켰다. 총탄은 내 이마를 스쳤다. 바닥에 떨궈진 권총을 집어 놈의 머리를 겨냥했다. 그러나 탄환은 그의 어깨를 관통했을 뿐이었다. 율은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네 놈은 정말 모른단 말이야? 왜 행성연합이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겠어? 너는 우두머리를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이 행성을 장악하려는 음모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그렇게도 정치를 모른단 말이야!”
“그런 것 따위, 알게 뭐야.”

총알이 율의 머리를 뚫었다. 하얀 것, 붉은 것, 검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머리에서 터진 것이 이제는 목에서, 가슴, 배, 허벅지에서 튀어나왔다. 신이여,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몸에 뜨거운 세례를 부어라. 나는 지금 마음껏 탄환을 낭비하고 있다. 펜릴의 이빨이 발두르의 시체를 제멋대로 찢어발기고 있다……. 입으로 흥한 자, 총으로 망하리라. 예수가 말했던가? 아니, 어쩌면……. 방아쇠가 딸그락거렸다. 피스톨은 더 이상 총알을 토하지 못했다. 나는 문득 레이저건에 대한 고대 지구의 상상도를 떠올렸다. 빛을 한 군데 집중시켜 쏘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세기가 지났어도 몇 가지 개량은 되었지만 강철탄만큼 확실한 살상도구는 없었다. 마치 정치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어떤 악(惡)일는지……. 되었다. 알게 뭐냐. 더 이상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목적은 달성되었다. 율의 눈동자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군화 소리가 방을 메웠다. 적인가, 아군인가.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서 있는가. 오만하고 꼿꼿하게? 혹은 발톱마저 빠진 굶주린 늑대처럼 축 늘어진 채로? 알 수 없었다. 오직 소리만이 가까웠다. 곁에 다가온 목소리는 젊고 건강했다.

“사령관, 의회를 완전 점령했습니다.”

야콥의 거친 숨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상황 파악, 잠깐의 침묵, 승리에 대한 만족감…….

“율도 처치하셨군요. 하지만 사령관, 눈이…….”
“됐다. 어서 퇴각하자. 여기 오래있을 때가 아니다. 전 병력을 집결하도록…….”

아마 나는 비틀거렸을 것이다. 젊은이의 어깨가 내 몸을 지탱했다. 내 목소리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내 안의 짐승이 나를 대신해서 말하고 있으리라.

“약기운이 떨어져간다. 어서 탈출을…….”

이미 나는 내 안의 짐승에게 잡아먹힌 상태였다. 짐승이 내 몸뚱이를 사정없이 찣어발기고 있었다. 고통이 심장을 파헤쳤다. 검붉은 어둠이 내 눈을 가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 깊고 어두운 감옥을 어떻게 빠져나간단 말인가? 이제 나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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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7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2) 별밤 2008.07.30 0
216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1) 별밤 2008.07.30 0
21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② DAMN 2008.03.20 0
214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9 라퓨탄 2008.03.19 0
213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8 라퓨탄 2008.03.19 0
212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7 라퓨탄 2008.03.19 0
211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6 라퓨탄 2008.03.19 0
210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5 라퓨탄 2008.03.19 0
209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4 라퓨탄 2008.03.18 0
208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3 라퓨탄 2008.03.18 0
207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2 라퓨탄 2008.03.18 0
206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12 라퓨탄 2008.03.18 0
20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①2 DAMN…、 2008.03.16 0
204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2) 나길글길 2006.12.13 0
203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1) 나길글길 2006.12.13 0
202 장편 악마를 위하여 - Ⅰ. kyrie eleison 령아 2006.08.25 0
201 장편 뱀파이어 듀켈 제 1장 방랑자라는 이름의 어쌔씬 2 김인화 2006.08.01 0
200 장편 뱀파이어 듀켈 <1.방랑자란 이름의 어쌔신> 1 김인화 2006.07.30 0
199 장편 뱀파이어 듀켈 <프롤로그> 김인화 2006.07.30 0
198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2 바보 2006.07.2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