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Silverline 2

2008.11.07 20:2711.07


「..강해지는 법을 배우고 올게요.」







Prelude.

A. K. A. Chaos iz..



여섯 번째, Silverline 2









노인의 몸뚱이는 무거운 선박의 그림자에 짓눌려져 있었다.
희미한 달빛마저 비추지 않는 곳에서, 어렴풋이 스러지는 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짧은 순간에 몇년의 나이를 더 먹었든 간에, 얼핏 나타나는 노인의 실루엣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늙은이를 삼킨 그림자가 뱉어낸 침묵은, 이미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였다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기울어가는 그림자 속으로 침묵이 침몰해가고, 싸늘한 달빛만이 날카롭게 떨어져 시간을 베어간다.
그 중 하나가 남자의 턱수염 끝에 떨어져 포말처럼 부서진다. 수염 끝으로 부서지는 파편이 달라붙었다.

「후회라도 하고 계십니까.」

남자가 천천히 입을 떼자, 턱 끝에 붙어있던 달빛 파편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허공에서 부서졌다.
하지만 노인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기울어가는 그림자만큼 수그러든 고개는 표정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마저도 스러지고 다시 침묵이 얼어붙어, 파도에 부딪히는 뱃전만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다.

「그 아이의 선택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신께서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이 늙은이가,」

그 파도의 소음 중 한 틈에서,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목을 쥐어짜 겨우 뱉어내는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남자는 그 목소리가 다시 침묵에 파묻혀 그림자 속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귀를 기울였다.

「뭔 욕심이 있다고, 내 남은 생보다 어린 아이를 먼저 보냈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에멘시 가문을 이끌던 집사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 20년쯤을 세찬 바람과 파도에 갉힌, 그래서 구멍과 쉰 소음이 섞여 바람을 타고 나오는 신음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겨우 꺼낸 그것도, 마치 깊은 해저속의 무엇처럼 자꾸 가라앉을 뿐인지라. 달빛도 땅으로 굽어든다.

그리고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배인 주름은 그림자 속에서 더욱 심하게 일그러져 있고, 빛을 잃은 눈동자는 더욱 초라하게 비추어졌다.
그 모습을 검고 주름 진 천조각 위에 뚫어놓은 두 개의 회색빛 구멍과 다른 점을 굳이 찾아보라고 한다면,
색 없는 노인의 눈동자는 끔찍한 침묵 속에서 울리는 파도소리만큼이나 가끔씩, 그 눈을 깜박이고 있다는 것 뿐.

「마음속에 쌓이면 병이 됩니다. 차라리 전 제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초승달이 유난히도 날카롭게 비추어, 색깔의 대비에 의해 그를 짓누르는 그림자는 더 짙어 보인다.
남자는 침몰하는 노인이 뱉어낸 마지막 한숨이 달빛을 따라 검은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하얗게 서렸던 김이 별빛에 부딪혀 흩어지고 달빛에 두 쪽으로 베여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남자도 입을 떼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무엇부터 들어보시겠습니까?」
「나쁜 소식.」
「..보통은 좋은 소식을 먼저 선택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쁜 소식을 내게 들이대도, 아가씨의 선택만큼 처절한 절망은 내 생에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만약 그가 자신을 보게 된다면 어린 소녀의 절망을 빼다 박은 노인의 절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림자에 짓눌린 노인의 모습은, 달빛조차 파고들지 못하는 암흑에서 자신을 숨기기에 바쁠 뿐이다.
노인의 말처럼, 남자가 무슨 말을 한들 그 절망 앞에 다가가지 못하고 깊이 가라앉아 침묵만을 낼지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을 먼저 말하죠. 그 아이는 살아있습니다.」

확실히, 이 말은 그의 마음 깊숙한 곳을 스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잠시 그의 백발이 어둠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그것은 달빛을 피해 다시 숨어든다.
현명하여 우둔한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발목을 잡은 죄책감과 자신의 처지를.
그래서 결국, 어둠을 채 빠져나오지 못한 그의 모습이 회색빛 눈동자만을 빛내어 대신 대답을 전한다.

「마지막에라도 마음을 바꾸게 해 주신 모양이군요. 고맙습니다.」
「나쁜 소식입니다. 그 어린 소녀는 지금 한 괴한의 손에 납치되어있습니다.」

그 순간,

틈도 보이지 않고 어둠 속을 뛰쳐나오는 모습은.

「..무슨 소리요?」

그 나이가 무색해지도록, 숨 막힐 듯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챈 노인의 억센 손등.
주름살 사이로 불거진 핏줄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달빛에 하얗게 도드라지어 빛나고 있다.




소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자신의 눈앞에 물고기 떼나 커다란 고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실망해했다.
하지만 자신의 드레스와 고운 금발이 젖지 않은 채, 여전히 하얀 모습으로 달빛에 빛나는 것을 의아해했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문득 어둠 속에서 그려지는 검고 커다란 실루엣을 마주치고는 경악해야 했다.

순간 낮선 모습에 놀랐던 소녀는, 어둠이 눈에 익어가며 같이 모습을 드러내는 실루엣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에 건장한 체구. 하지만 얼굴을 뒤덮어 흐르는 산발의 머리칼은 마치 광인이나 괴물처럼 보였을 듯하고.
그와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피부. 분명 그 피부를 몇 달 전 이 대륙에서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서 반짝이는, 달빛을 삼켜 검은 윤택을 빛내는 칼집은 신대륙의 무사들이 차고 다녔을 법한.

그가 눈을 넌지시 떴다. 소녀는 초승달을 닮은, 가늘고 매서운 눈빛에 잠시 온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낀다.
등줄기를 훑어내리는 차가운 땀방울은, 그제서야 그간의 자초지종과 남자의 정체를 심각하게 의심해본다.
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가지지 못한 소녀의 작은 몸은, 남자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괜히 움츠러들곤 하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소녀는 사그라드는 눈매가 아무런 적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바닷속 세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하며 그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커다란 체격에 검은 머리칼을 제외한다면, 붉은 피부와 가는 눈매는 상상속의 인어와는 많이 다를 모습.
소녀는 자신이 며칠 전, 그리고 방금 전에도 마주쳤던 외지인의 모습이 그와 꽤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훨씬 건장한 체격 때문일까, 쉽게 그에게서 외지인의 이미지를 떠올려내긴 어려울 것 같아보인다.

어쨌든 남자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녀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져만 간다.
아니, 그 전부터 소녀의 머리 속은 이미 많은 질문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곳은 어디이고, 자신이 어떻게 젖지 않은 모습으로 있으며,
이 외지인의 정체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그녀가 이곳에서 이 자와 같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하지만 막막한 문제, 이 많은 질문들을 어떻게 이 사람에게 물어볼 것인가.

답답한 가슴을 표현할 길이 없어, 소녀는 무턱대고 손부터 올려본다. 손가락 하나가 소녀 그 자신을 가리켰다.
뒤이어 그 손가락이 드레스를 들어올렸다. 젖지 않은 하얀 드레스가 소녀의 가는 손끝에서 나풀거린다.
그 다음 소녀는 검지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고, 자신의 발아래를 가리킨 후, 어깨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던 몸짓에도, 남자는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 소녀는 애를 써 가며 더욱 과장된 몸짓으로 행동을 취해보인다.
하지만 과장된 손가락이 남자의 얼굴을 가리킬 때, 그는 귀찮은 듯 그 손가락을 치워버리고는 말했다.

「말해라.」

분명 남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어눌하지만, 소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진 말이다.
적잖이 놀랐던 소녀는, 언짢은 눈초리가 가리키는 시선에, 그제서야 뻣뻣이 세우고 있었던 손가락을 내렸다.
소녀는 어눌한 발음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번에는 말로써 이방인 남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말을 할 줄 아세요?」
「알아듣는다. 조금, 말한다.」

쉬운 문장들로만 구성된 언어는, 남자가 외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자식에게서나 막 튀어나왔을 법한 말이다.
그렇다 해도 소녀는 기대하지 못했던 의사소통의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에 상당히 기뻐해야 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이제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차근차근히 풀어 줄 수 있는 대답을 들을 차례이다.

「묻고 싶어요. 괜찮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짓도 언어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다를지 모르나, 지금 것은 긍정의 표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소녀는 대화의 흐름을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첫 질문으로 무엇을 물어볼까 고심하다가, 작은 입술을 떼었다.

「여기, 어디죠?」
「네가 더 안다.」

중요한 첫 질문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이런 어두운 곳에 있어요?」
「어둠, 몸을 숨긴다.」

소녀는 고개를 돌렸고, 어둠이 배어든 벽과 벽 사이에 걸려 빛나는 하얀 달빛을 보았다.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남자와 자신이 건물 사이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의 대답과 상황에서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그는 '어두운' 건물 틈새로 들어와 '몸을 숨기기'로 한 듯하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왜 몸을 숨기는지는 알 수 없고, 그 것들을 물어볼 생각에 소녀의 머리는 지끈거린다.

거기다 이 굼뜬 의사소통을 더욱 방해하는 짧은 어휘력. 아무래도 그는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어색한데다 짧기까지 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느라 소녀가 힘들어 한다는 것을 과연 그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소녀는 일단 자신이 생각했던 중요한 질문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은 누구죠?」
「바다 건너, 사람.」
「왜 제가, 당신과 함께 있는 거죠?」
「밤하늘, 떨어졌다.」

그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먼저 자신의 기억부터 다시 떠올려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과 배신, 그리고 절실히 느꼈을 슬픈 절망감 또한 같이 떠올려버렸다.
순간 그녀도 모르게 볼을 적시는 눈물방울 하나, 그리고 어둠 속에서는 남자의 어눌한 목소리가 다가온다.

「너, 별인가.」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별처럼. 빛난다. 흐른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볼에 다가가서, 별처럼 빛나며 흐르는 소녀의 눈물을 살짝 닦아내었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젖은 얼굴을 작은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손목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방울. 그것이 별똥별처럼 빛을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는 묻는다.

「왜 떨어졌나.」
「..사정이 있어요. 믿었던 사람, 배신했거든요.」
「대륙 사람들, 배신 잘하는가.」

그러자 소녀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그 전까지만 해도 에멘시 가문의 집사라고 불렀을 한 백발 노인의 모습.
하지만 그가 뒤돌아섰을 때, 영원히 그녀를 지켜줄 것만 같던 현명한 노인의 모습은 거짓처럼 흐려지고.
칠흑선의 남자가 뱉어낸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아련하게 떠올라, 소녀의 상처를 울리어 아프게 만든다.
소녀는 무심결에 가슴께를 손으로 감싸 짓눌렀다. 고통이 배인 표정은 터져나오는 감정을 삼키며 말한다.

「배신 잘해요. 돈 좋아하는 상인들이라서 그래요.」
「하지만 배신은 누구나 한다.」

돌아오는 냉정한 대답에 소녀는 고개를 들었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남자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산발의 머리칼 사이에 가려진, 매섭고 긴 눈매에서 섬뜩하게 비치는 두 눈은 너무도 차갑고 까맣게 빛난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서, 문득 소녀는 그 속에 비춰 반짝이는 가늘고 둥근 초승달의 모습을 보았다.
소녀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초승달을 닮아 날카롭게 빛나지만, 상당히 깊고 새까맣다고 생각하였다.

「모두가 그렇게 산다. 나도 그렇다. 너도 그럴 것이다.」
「..전 싫어요. 왜 모두가 행복할 순 없죠?」
「행복하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저 배는 그렇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달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건물 사이의 틈새로 어른거리는 어두운 바다를 가리켰다.
소녀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아직도 볼 수 있는 섬뜩하도록 어두운 선박의 모습을 기억한다.

「너도, '쿠로센'에 당했나.」
「'쿠로센'이라뇨..?」

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선박의 이름까지는 알아듣지 못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이 집사라고 불렀을 노인의 입에서 무심결에 들었던 한 단어를 생각해내었다.
순간, 소녀는 남자의 어눌한 발음이 쏟아내는 말이 조금 심상치 않은 사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저 검은 배, 바다 건너에서 만든 게 아니었나요?」
「아니다. 어느 날 밤, 처음 봤다.」

자신의 기억을 덧씌워, 소녀는 신대륙에서 처음 모습을 나타냈을 칠흑선의 위협적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분명, 그 거대한 배는 아무리 짙은 밤바다보다도 더욱 어두운 위압감을 품고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어눌한 발음에서 나오는 몇 마디의 문장은, 간단하지만 너무도 엄청난 진실을 흩뿌려놓는다.

「밤어둠. 안 보인다. 공격,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당한다.」
「배 안에는 누가 타고 있었죠? 도대체 저 배가 뭘 한 거에요?」
「군대. 불 뿜는 총, 위협적 움직임. 학살, 약탈, 유괴.. 수없이 많다.」

조각이 점점 모여 그림의 윤곽이 잡혀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보게 된 소녀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소녀가 바다 건너, 자신의 또래뻘되는 소녀의 눈으로 봤을 칠흑선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것을 상상하였을 때,
이방인 남자의 짙은 눈동자는 그 모든 기억을 담을 만큼의 깊이를 빛내며 어둠 속에서 외로이 반짝이고 있다.
소녀는 그 눈 깊숙이 담겨있을 기억의 조각들이 얼마나 엄청난 모습을 보여줄 지 두려워하며 질문을 꺼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된 거죠?」
「보았기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의 마지막 대답은, 소녀의 기억이 만들어낸 잔혹한 이미지들을 결국 그 기억 속으로 돌려보내고야 말았다.
자신이 검은 바다로 내몰렸듯이, 뱃전의 어두운 아가리로 떨어져버린 수많은 외지인들에 대해.
잔혹하도록 검은 총구가 불을 뿜을 때, 절망을 향해 뜨거운 눈물을 흘린 소녀와 붉은 심장을 흘리던 사람들.
그녀의 기억과 합쳐져 칠흑의 선박 이면에 있는 조각들은 너무도 잔혹하고, 두렵고, 지독한 본 모습을 드러낸다.

「..확실히, 모두가 행복할 순 없는 거군요.」
「너 같은 사람도 있었다.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죽었다.」

남자의 발음은 어눌하지만, 그 목소리가 품은 서늘함은 소녀를 소름끼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녀는 남자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가는 달빛은 그 속을 어느 때보다도 깊게 비추는 듯 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잠시 이 남자가 자신이 모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너를 닮았다. 에멘시, 남자 이름이다.」

하지만 더욱 엄청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 이름을 그의 어눌한 발음에서 들을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을까.
달빛이 잠시 스치어 더욱 창백하게 보이는 얼굴은, 여러 감정이 섞이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드러내었다.




노인의 백발이 밤바람을 가르며 빛나고 있다.
거칠게 내뿜는 숨이 하얗게 흩어지고, 두 다리는 숨 가쁘게 항구 위를 뛰어다니기에 바쁘다.
광인처럼 빛나는 회색빛의 시선이 찾아다니는 것은 너무도 명확하지만, 어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빠르게 몰아쉬는 맥박과 숨소리만이 아쉬운 메아리로 돌아올 뿐인 도시는 너무도 차가워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자, 무색한 열정보다 먼저 지치는 것은 몹쓸 나이가 되어버렸다.
노인은 터질 듯 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듯 땅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그 모습이 피라도 토할까 두렵다.
쓰러지자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오는지라, 벌써 하얗게 흐려지는 두 눈이 어지럽고 역한 내까지 들이쉬고 있다.
하지만 세월에 바랬을 두 눈은, 여전히 흐릿한 시선으로 빛나는 별과 사람의 눈동자를 구별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자, 그 눈에 잠시 빛나지 않는 별빛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노인은 이를 악물어 쓰러진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는, 아득히 먼 곳처럼 보이는 상에 초점을 맞추려 애를 썼다.
시선이 점점 선명해지자, 어둠 속에는 누더기를 덮어쓴 회색빛의 머리칼과 그 뒤를 따르는 작은 몸짓이 있다.

노인의 숨은 거칠다. 싸늘한 바람에 부딪혀 호흡은 부서지고, 심장의 박동은 아직도 귀를 멍멍하게 울려온다.
빛 바랜 눈동자는 불안정한 호흡에 잘게 흔들리지만, 그 끝에 맺힌 초점은 절대 놓치지 않을 듯 한 기세이다.
거친 숨결을 따라 바닥에 뉘어놓았던 몸을 일으키자, 휘청이는 몸은 아직 회복하지 못한 티를 내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몸을 가다잡고,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초점 끝의 모습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숨소리는 점점 멎어 들어가고, 심장조차 뛰지 않는다.
노인의 발자국은 몸뚱이의 가벼움만큼이나 조용하지만, 세월의 무거움만큼 신중하다.
밤하늘을 가리고 있던 흐릿한 구름이 걷히자, 달빛은 누더기를 둘러멘 남자의 얼굴을 날카롭게 비추었다.
노인은 메아리조차 쉬지 않을 어둠이 되어, 실패하면 끝일지도 모를 한 순간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바람이 멎어들었다.

그것은 한 순간이었다.


노인도 그 자신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인은 남아있지도 않았을 모든 기력을 순간적으로 두 다리에서 폭발시켰다.
순간 심장을 매섭게 뛰게 하던 움직임은, 순식간에 초점을 좁혀 그 끝에서 맥박과 함께 멈추었다.

고요하였던 밤의 흐름은, 갑작스런 발자국의 짧은 비명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 모습을 예상치 못하였던 남자도, 자신의 등 뒤를 낚아채는 팔 끝의 가는 손가락들을 보았을 것이다.

「아가씨! 빨리..」

찰나라도 늦어진다면, 그 결과는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은 긴박한 목소리를 눈으로 토해내며, 남자의 손 끝에 잡혀있던 작고 가녀린 손을 낚아채었다.

야속하게도, 달빛은 그제서야 거친 주름으로 물든 손이 잡은, 작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노인이 바랐을 곱고 길게 빛나는 금발은 보이지 않고, 대신 달빛이 보여주는 빛깔은.
어깨를 건드리지도 못하는 짧은 단발에, 소녀의 오렌지 빛 머리칼은 한껏 노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하고,

그 순간, 그림자는 노인의 발에서 잠시 떨어져있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의 늙고 가벼운 몸뚱아리를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서 빼내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숨이 막혀 아득해지는 시선에서, 겨우 눈을 떠 마주한 남자의 두 눈동자는 아무런 색도 담아내지 않는다.
어떤 고통과 희망도, 초점과 삶도, 하다못해 주변의 모습마저도 담아내지 못하는 그런 눈을 노인은 본 적이 없다.

「남아있을 생을 한 손으로 세다가 결국 미쳐버린 건가.」

숨은 점점 막혀오고 심장 뛰는 소리가 멎어 들어간다. 노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눈동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득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섬뜩한 목소리는 늙은 노인의 몸을 심장에서부터 뒤흔드는 것만 같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노인은 아무것도 비추어내지 못하는 눈동자에 삼켜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멎어드는 심장과 함께, 밤공기에 하얗게 빠져나오는 마지막 숨은 영원한 침묵을 노인에게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 순간, 해진 누더기 옷을 잡아끄는 가늘고 작은 손가락들.
남자는 움켜쥔 손가락에서부터 작은 어깨, 그리고 고운 얼굴까지 이어지는 실루엣을 마주하였다.
달빛을 한 가닥씩 짜넣은 흐름이 마치 고운 비단같이 느껴진다.

하얀 달빛 속에서, 작고 아름다운 실루엣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오렌지 빛의 머리카락이 고개의 움직임을 따라 흩날린다.

힘없는 노인의 몸뚱이가 바닥에 먼저 던져졌고, 그 위로 그림자가 먼지를 날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소녀가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가자, 노인은 잔기침을 쿨럭이며 땅을 짚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빨갛게 부어오른 목덜미와 온 몸에 달라묻은 흙먼지는, 노인의 노쇠해보이는 몰골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가 지금 자신의 늙고 추한 몰골 따위를 신경 쓸 수 있었을까.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발걸음은, 노인으로 하여금 마지막 자존심까지 꿇어않게 만들어버린다.

「살려주십시오!」

애처롭게 들리었을 그 목소리도, 달빛을 등지고 다가오는 검은 침묵으로 인하여 사그러질 뿐이다.
노인은 자신의 눈 앞에 있을, 하지만 그의 세월 속에는 본 적이 없었던 아득한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해 내었다.

발자국이 멈췄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더욱 몸을 움츠러들고 땅바닥으로 숨어들었다.
아득한 그 질문은 여전히 귓전이 아닌 긴장을 삼키는 숨에 섞여, 심장을 울리며 더욱 확실하게 질문한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 왜 갑작스레 달려든 건가.」

목소리는 아직 약동하는 심장에서부터,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 노인의 몸뚱이를 흔들어놓았다.
노인은 회색빛 누더기 남자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세월보다 더 깊고 아득한 영원처럼 퍼지는 무게를 느꼈다.
자비롭지만 잔혹하고 가볍지만 깊다. 이제껏 맛보지 못한, 마치 다른 세상에서나 들렸을 법한 목소리.
노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떨리는 입술을 떼었겠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침묵과 공포에 삼켜진다.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제발 이 늙은이의 목숨을..」

애처로운 노인의 목소리는, 끝을 제대로 맽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면서 결국 침묵에 삼켜지고 말았다.
달빛에 흐려진 새하얀 어둠, 한참동안 침묵에 파묻혀 숨을 먿었던 노인, 모든 것을 삼키었던 남자의 목소리.
그 순간이 지나자 초승달은 날카롭게 어둠을 찢어놓았고, 남자는 차가운 숨을 섞어, 명령처럼 대답을 내뱉었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목숨을 굳이 빼앗고 싶지는 않다. 꺼져라.」

남자가 돌아섰다. 소녀는 노인의 초라한 몰골과 남자의 뒷모습을 번갈아보다가, 결국 남자의 누더기 옷을 잡았다.
달빛에 사라지는 하얀 초점 너머로, 노인의 초라한 얼굴에는 문득 별처럼 빛나며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 순간, 오렌지 빛의 머리카락이 그 어둠에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남자는 발길을 잡아채는 소녀의 시선을 잠시 바라보았지만, 더 관심은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뒤돌아섰다.
차가운 어둠은, 그 속에 널부러진 늙고 하얀 별빛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오렌지 색의 별빛,
그리고 그 둘과의 공간에서 아득히 멀어져가는 걸음을 걷는, 빛이 없는 별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하지만, 결국 어둠에 흔적처럼 박혀있던 별빛은 다시 뭉쳐야 했을 것이다.
뒤돌아선 남자는, 작은 소녀의 작은 주먹을 살포시 쥐었다. 누더기의 옷이 작은 주먹과 손목을 살포시 감싼다.
그 별빛을 뒤에 달고, 남자는 노인이 쓰러졌던 공간으로 천천히 발을 놀렸다. 달빛이 그 발길을 비춘다.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군요.」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자신을 삼키는 그림자 앞에서, 주름살 사이로 스며든 별이 빛나고 있다.
노인은 그것들을 손으로 훔쳐 닦아내고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꺾여있던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한 두 눈동자는, 보이지 않게 하는 어둠에 섞여 아득히 떨어져있을 별을 마주한 모습처럼,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겠지만, 절대 그 것에 닿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며 노인은 입을 떼었다.

「..늙은이의 크나큰 실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묻습니다.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물어보시오.」
「두 분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코모도에서 왔소.」
「혹시, 도피중이십니까?」
「..용건만 말하시오.」
「혹시라도, 일행이 있는지 여쭈어보고 싶은 겁니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세월에 색이 바랬을 회색 눈동자를 응시하였다.
주름 속에 끼어 빛이 바랜 눈동자는. 하얀 달빛과 그로 인해 두드러진 굴곡을 깊숙이 담아내고 있다.
그 깊이를 마주한 남자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짓으로 오렌지 빛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이 소녀뿐입니다.」

간결한 대답은 노인을 체념하게 만든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의 밤눈이 침침하여, 사람을 잘못 본 것 뿐이군요.」
「왜 이 커다란 항구도시에서, 젊은 사람들을 버려두고 늙은이 혼자서만 사람을 찾는 겁니까.」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둘 사이를 채우는 것은 하얀 달빛과 그 사이로 흐트러지는 하얀 한숨 뿐이다.
침묵이 공기를 삼키던 순간, 달빛은 오렌지 빛깔의 머리 위로 잘게 부서져,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짙푸른 어둠과 대비되어, 아름답게 빛나는 그 모습은 노인의 눈 속에서 익숙한 다른 소녀의 모습을 그려낸다.

「나이를 먹다보니,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더군요.」

확실히,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이 거대한 도시의 때 아닌 고요함은 그 누구의 방해도 원치 않는다.
특히 한탕주의와 상업성에 지독히도 취해있을, 위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더러워지기엔 너무도 아깝기에.

노인은 돌아섰다. 왜소한 어깨와 등에는 쓰러질 때 묻었던 흙먼지가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쓸쓸해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소녀의 손가락은 잠시 흐릿한 달빛을 붙잡으려 했던 것도 같다.

「조금 시끄러워지는 것도 괜찮겠지요.」

한 발자국을 채 떼지 못하고 돌아선 노인은, 그 사이 아득히 멀어진 듯 종잡을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흐릿한 초점 끝에 잡히는 그의 모습은 어둠을 삼키는 뿐, 속내조차 쉽사리 뱉어내지 않는다.
여전히 비추는 색도, 모습도 없는 눈동자는 어둠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짙고 깊을 뿐이라서.

노인은 자신의 오감이 순식간에 망가져버리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존재였다.
노인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듯한, 아무것도 닮지 못하는 누더기의 남자를 향하여 말하였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일순 공간은 달빛에 흐려지고, 적막 속에 불어오는 스산함이 차갑게 느껴질 때, 다시 어둠으로 젖어들었다.
다시 흐려지는 달빛이 오렌지 색의 빛깔 위로 잘게 부서졌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이 아름답게 빛나 보인다.




「미안해요. 당신을 못 믿는 것은 아닌데.. 」

소녀는 긴장을 머금어 바싹 말라버린 침을 조심스럽게 삼키며 말을 꺼내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은, 그 어떤 소리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메아리를 흔적처럼 맴돌게 한다.
소녀는 자신의 목소리도 몇겹으로 울려, 달밤에 취한 누군가의 귓전으로 흘러들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그 사람의 살해가 왜 같은 상인들의.. 그러니까 뒤통수라는 거죠?」
「노련한 칼잡이, 일격. 하지만 시체, 난도질. 아니라면 무뢰한에게 맡겼을 뿐.」

그의 어눌한 발음은 '무뢰한'이라는 단어에 경멸스러운 감정을 채워넣는다.
하지만 그가 아마도 그 '방법'을 경멸하고 있었다면, 소녀의 경멸은 그 '사실' 자체에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푸념처럼 소리를 덧붙인다. 그 소리를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누군가가 들을까 무섭다.

「착하지만 욕심 없다. 자기 위치를 몰랐다. 그는 바보였다.」

그의 입에서 꺼내어 짜 맞춘 조각들은, 결국 그 간단한 사실을 참혹한 조각으로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었다.
기회의 땅에 만연해있는 한탕주의가 만들어낸 천칭은, 인정보다는 욕망의 가치를 향해 천천히 기울고 있다.
단지 더럽게 빛나는 황금빛 욕망에, 자신의 내장을 쏟아내어 바닷길을 만들었을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이용당했다. 구실이 되었다. 결과는 말했다.」
「확실해요?」
「안 믿는다. 그것도 좋다.」
「어떻게 알고 있죠?」
「소문, 많은 것을 알려준다.」

참이든 거짓이든, 이 모든 이야기들은 소녀의 기분을 한없이 불편하게만 만든다.
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불편해지는 진실은 선뜻 받아들이기가 두려워진다.
검은 눈동자 속으로 문득 칠흑의 선박이 스쳐가는 것 같아, 소녀는 순간 불편한 역겨움을 게워내야 했다.

침묵 속에서, 그는 조용히 하늘에 수놓인 달빛을 눈 속에 담아내었다.
달빛은 어느 새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둘의 은밀한 대화까지도 적나라하게 비추어내려 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초승달은 침묵 끝에 입을 떼는 소녀의 표정에 배인 고통까지도 보고 있을지 모른다.

「저희 아버지에요.」
「알고 있었다.」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눈을 감자, 눈동자에 비친 초승달도 모습을 감추었다.
굳게 닫힌 그 모습이 불편한 침묵을 읊는다. 남자의 침묵은 어둠 속에서 섬뜩하도록 검게 반짝인다.
소녀는 끔찍한 고요함을 두려워하며, 굳게 닫힌 그 모습을 없애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말을 꺼내었다.

「당신은, 왜 이 곳에 온 거죠?」
「말할 필요는 없다.」
「수많은 외지인들을 구하러 온 건가요?」
「난 영웅이 아니다.」
「가족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온 건가요?」
「가족 아니다, 복수할 사람, 감정,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혼란스러운 도시에 찾아온 거죠?」
「강한 것, 찾을 뿐.」

달빛이 기울어 소녀의 머리칼을 살짝 적시었고, 금발의 머릿결을 따라 밝히는 빛은 남자의 허리춤에서 부서졌다.
소녀는 그 곳에 시선을 대었다. 자세히 보니, 어느 새 그의 오른손은 칼집의 허리춤에 지그시 올려져있다.
허리에 매어놓은 기다란 칼집은, 여전히 달빛을 머금어 매섭도록 새까만 윤택을 빛내고 있었다.

「대륙인 강하고 교활하다. 나의 상대, 끝까지 베어 넘긴다.」

소녀는 그의 오른손이 짚고 있는 것이 신대륙의 무사들이 대부분 차고 다닐 칼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속에 시퍼렇게 날을 세운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사실은 영원히 볼 기회가 없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아버지를 집어삼킨 칼날은 얼마나 흉측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일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시간 되었군.」

날카롭게 아름다운 달빛에 정신이 팔려, 소녀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달빛이 나막신을 신은 그의 쪽진 발을 하얗게 비추고서야, 소녀는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아야 했다.

「어디를 가려는 거에요?」
「헤어진다. 안녕.」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아무 미련도 느낄 수 없다. 없었던 사람처럼 떠나버릴 뒷모습을 소녀는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소녀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에 담긴 절망한 소녀의 처절한 모습.

「가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내 역할, 이미 끝났다.」
「왜 죽으려던 저를 살려주신 건가요?」
「단지 내게 떨어진 것뿐이다.」
「어디로 가는데요? 같이 갈 수는 없나요?」
「짐이 된다. 네 집 돌아가라.」
「저는 돌아갈 곳이 없어요.. 제발..」

다시 한 번 별이 흘렀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
하지만 남자의 손은 더 이상 그 별을 잡지 않는다. 거친 손길은 그녀의 미련마저도 뿌리치고 돌아설 뿐.
발자국이 원망스러운 메아리가 되는 곳에서, 소녀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절규처럼 울부짖었던 마지막 목소리.

어둠 속으로 별이 떨어진다. 고운 별은 빛을 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원망스러운 달빛은, 저 날카로운 모습으로 소녀의 희망을 두번이나 잘라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 소녀는, 별빛에 지친 몸을 뉘여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끔찍하게 그녀를 난도질한 초승달이 남은 것 하나 없는 소녀의 몸까지도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서,

「이제야 혼자가 되셨군.」

하지만, 그 생각조차 끝을 맽기 전에 달빛을 가로막고 소녀의 불안감을 뒤덮은 소리가 있으니.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지만, 소녀는 아무리 메아리쳐도 가시지 않는 차가운 음성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보다 검은 그림자들 속에서 소녀는 거대한 선박의 위협적인 칠흑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가운데에 있던 그림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달빛이 잠시 그의 턱수염 끝에서 부서졌다.
느린 발걸음은 좁은 골목의 모든 공간을 울리어, 소녀의 초조한 맥박까지도 흔들리게 만든다.

「성가시게 구는 집안이지. 아버지와 딸에, 이젠 집사까지..」

소녀는 자신의 이마 한가운데에 닿은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권총의 공이가 당겨지는 '찰칵' 소리를 들었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감촉은 세번째로 소녀의 시선과 숨, 차가운 달빛까지도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난도질당한 머릿속만은 홀로 빠르게 그의 말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분명 차가운 메아리 끝에 맛갖지 않게 배어나온 그 이름. 소녀에겐 그것이 미련이 된다.

「집사님은 어디 계시죠?」
「손녀같은 아가씨 찾는다고 집나갔지. 치매에 걸려 착각한 줄도 모르고.」

현명하기에 우둔하듯이, 노인이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에 소녀의 마음은 더욱 슬프다.
최소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그녀가 죽는 모습이라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원망도 죄책감도, 하다못해 노인의 확고한 결정조차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소녀는 한탄하였다.

이마에 닿은 총부리가 섬뜩하도록 차갑다. 손가락이 걸린 방아쇠는 금방이라도 굉음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소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려, 허공에 그 시선을 멈추었다.
어둠에서 부서져 흩어지는 빛은 가는 그녀의 가는 목에 부딪혀 고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총구가 불을 뿜을 것이다. 메아리는 귀를 멍멍하게 울릴 것이고 짧은 소란 속에서 소녀는 쓰러질 것이다.

침묵 속에 가려져 있던 얼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절망 속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창백한 피부 가운데.
붉게 서린 두 눈동자, 그리고 아직도 흐를 듯 남은 흔적. 하지만 소녀는 그것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 늙은이에겐 잘 말해두지. 아버지처럼 외지인에게 찔려 목숨을 잃었다고.」

아침이 찾아오면, 항구는 다름없이 떠들석해지고 언젠가는 칼에 난도질당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겠지.

그녀의 숨이 마지막을 쉬는 것을 밤하늘의 기다란 틈새가 흘겨보았을까.
젖어들기 전 모든 어둠속으로 흩날리던 금빛에 바람이 시샘했을까.

부친과 같은 음모설, 책임은 이방인들의 몫이고 노인은 여전히 속아가면서 그들을 팔아넘길 배를 띄우겠지.

어둠의 부드러운 포근함이 그녀의 온 몸을 감싸주었을까.
잠겨드는 메아리가 그녀를 맞이해줄까.


하지만,

아스라이 젖어야 했을 긴 침묵의 소리는 잠시 멈추어야 했다.


「뭐하는 거요?」

그 순간, 소녀의 귓전을 맴도는 목소리는 너무도 낮익고 친근하게 들렸을 것이다.
칠흑의 그림자 너머에서 초대받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집사 노인은 그 곳에서, 턱 밑으로 부서진 달빛이 달라붙은 세로 턱수염을 마주하게 되었다.
몰아쉬는 한숨은 어둠 속에 찢겨져버리고, 달빛이 침묵의 위협을 갈라낼 때 차가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된다.

「일찍 오셨군요. 하지만 여기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입니다.」
「그 총은 뭡니까?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익사나 총살이나 죽는 것은 똑같지요. 소녀의 선택을 도와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총을 버리시오! 꼭 피를 보아야 되겠습니까?」

남자가 손짓을 하였다. 곧이어 수많은 무리들이 노인을 둘러싸, 늙은 그림자를 어둠에 삼키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양 손에는, 시퍼런 총신을 번뜩이는 권총과 억센 손길에 끌려오는 금발이 쥐어져있다.
가늘고 작은 몸은 바닥 길을 이리저리 끌려와서는, 짐짝처럼 노인의 앞에 던져진다.
노인은 달라진 그의 태도를 살가죽으로 느끼며, 인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였다.

「저희가 집사님을 찾아갔던 것은, 그나마 대화가 통할 사람이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 중 두세명의 사람이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저항할 새도 없이, 늙은 노인의 몸은 젊은 무리들의 위협적인 그림자들 아래로 내동댕이쳐진다.
그의 앞에는 눈물과 상처투성이인 아가씨가 어둠 사이로 날리는 흙먼지를 삼키며 널부러져 있었다.
남자는 그 둘의 앞에 쭈그려앉았다. 총구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주름진 노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섭섭하지 않게, 연장자부터 차례차례 보내드리죠.」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마주하기 두려운, 차가운 메아리와 비열한 미소를 띄고 있다.
하얀 숨이 노인의 얼굴에서 흩어져, 더운 김이 노인의 얼굴을 끼얹는다. 시야가 불쾌하게 흐려진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쳐진다. 찰나의 시간이 노인이 살아온 세월보다 긴 침묵을 지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어짜피 늙은 몸뚱이가 남긴 목숨은 한 손으로 세어보아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다.
다만 빛 바랜 눈동자는, 섬뜩한 총구에 모든 것이 삼켜질 불쌍한 아가씨를 한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

이마에 닿는 차가운 촉감. 그리고 방아쇠가 당겨지기 전, 찰나의 시간.
달빛이 차갑게 부서지고, 시간은 하얗게 숨을 멎어버렸으며, 고통은 마음 속에서부터 울려온다.

「그 연장자 대우를 나도 좀 받아보고 싶군.」

아득한 메아리처럼 울리었을 낮선 목소리에 놀랐던 것은 노인뿐만이 아니다.
턱수염의 남자는 노인의 이마에서 권총을 거두고, 어느 새 저 먼 어둠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를 보았다.
회색빛의 머리칼과 온 몸을 덮은 누더기의 모습은 마치 자신을 감추는 어둠처럼 그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다.
턱수염의 남자는 점점 다가와서는, 이내 그 앞에 서게 된 누더기의 남자를 향하여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나가던 부랑자.」
「그러면 지나가십시오.」
「길을 잃어버렸다.」
「길을 찾아가십시오.」
「자네가 비켜줘야 할 것 같은데.」

남자가 자신의 턱수염에 손을 가져갔다. 턱을 매만지는 표정이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인다.
그 모습은 오래가지 않는다. 남자는 턱에서 손을 놓고 무언가를 알았다는 표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누더기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총성이 울렸다.

메아리에 미쳐버린 귀가 조금씩 잠잠해지자, 주변은 숨소리조차 굉음에 쓸려나가 고요해진다.
회색 빛의 누더기가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남자는 총신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황금에 미친 도시가 이제 정신병자까지 만드는군.」

그가 돌아섰다. 섬뜩한 광경에 잠시 비어있었던 노인의 눈동자 속에는 다시 섬뜩한 총부리가 담겨 있다.
핏빛의 굉음을 온 몸으로 끼얹은 두 사람은, 숨 죽이며 반짝이는 총신이 불을 뿜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냉혈한의 눈매는, 창백한 달빛을 받아 핏기조차 사라져보인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 있다면. 알베르타의 항구를 장악한 칠흑의 선박, 그 어둠보다 검은 음침함.

「예의는 없는 것 같군.」

하지만 냉혈한의 섬뜩한 총신은, 여전히 낮설게 울리는 메아리에서 멈칫해야 했다.
일어서는 회색빛 누더기는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모습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럽다.

「쏘겠다는 말은 해야 할 거 아닌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예삿일처럼 털어버리는 모습에, 그를 제외한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그가 쓸어내린 누더기는 등쪽에 불을 뿜었던 총알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믿기지 않는 기적같은 상황 속에서, 누더기의 남자는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잠시 후, 가슴을 쓸어내린 그의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며 굴러가는 작고 둥그런 총알.
그가 손을 놓아버리자, 은빛의 철구슬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림자 사이를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다가오지 마!」

소녀의 이마 위로 총구가 반짝인다. 당황하여 겁까지 먹은 듯한 턱수염 남자의 표정이 볼만하다.
누더기를 향한 그의 목소리는 이미 몇겹의 메아리로 갈라져, 질겁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었다.
그는 소녀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천천히 풀린 다리를 일으켜세웠다. 남자는 그 모습을 멀찍이 보고 있을 뿐이다.
식은땀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걸음으로, 발걸음은 조심스럽게 누더기의 공간으로 다가간다.

순간, 달빛에 빛나는 총신은 소녀의 이마가 아닌 누더기 남자의 이마에서 반짝이고 있다.
턱수염의 남자는, 아직도 엄청난 긴장을 뱉어내지 못해 요동치는 손으로 총의 공이를 뒤로 잡아당겼다.
장전이 된 것을 확인하자, 어둠을 채우는 메아리는 경악한 표정 그 위에 어설픈 안도감을 덧씌운 듯 하다.

「이번엔 제대로다. 그 누더기 옷 속에 뭘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남자의 눈이 감긴다. 체념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 모습에선 어떤 불안도 느낄 수 없다.
누더기조차 펄럭이지 않는다. 오히려 요동치고 있는 것은 이마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조준점.
미칠듯이 요동치는 그 모습이, 허투루 방아쇠의 불을 뿜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침묵으로 물든 어둠이 쓴 숨을 삼키고, 그로 물들었던 시간이 더욱 흐려져 달빛조차 구름이 덮어버린다.
순간 찾아온 불안같은 암흑 속에서, 회색빛 누더기는 사방을 덮어버릴 메아리를 나지막히 내뱉었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뭐?」

그리고, 검은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자,

「그가 왔어.」

남자는 하얀 달빛에 비춰, 마치 초승달처럼, 아찔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 서걱

자신의 손 끝으로 매섭게 떨어지는 은빛의 칼날을 보게 되었다.


「끄아아악!」


소리는 메아리를 남기지 않는다. 잔인하도록 날카로운 달빛 잔영을 남길 뿐이다.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그 차가움은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않는다.
다만, 어느 손목이 검은 그림자로 가득찬 바닥 위에서 새빨간 자신의 색을 사방에 흩뿌릴 때,
물들어가는 시선 속에서 그는, 자신의 총이 그 손목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남자는 방금 전까지 손이 붙어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휑한 손목을 황급히 다른 손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하지만 사이의 틈을 통해서 지독히도 쏟아져 나오는 핏물은, 속절없이 바닥으로 흘러 모든 어둠을 물들였다.
핏빛을 따라 두 무릎도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힘 없는 상체가 마지막으로 고꾸라졌다.

뒤늦은 핏빛의 비명은, 골목을 울리는 메아리때문에 몇겹으로 사방을 난도질하였다.
그는 잇몸이 부서질 듯이 이를 악물어 신음을 토해냈다. 온 몸에 묻은 피가 아직도 사방으로 흩날린다.
바닥을 가득 채우는 핏자국은 그의 시선까지도, 비명까지도, 악취까지도 검붉게 물들이고 만다.

잘려나간 그의 손은 여전히 총을 잡은 그대로, 핏자국으로 물든 바닥 한가운데 꼬리를 남긴 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손이 처절한 모습으로 기어들어 그 손에 닿으려 할 때, 꿈틀대는 손가락들을 무참히 짓밟는 나막신.

「내 것이다.」

그 목소리는 다소 어눌하고 부정확한 발음을 지녔지만, 간단한 말 한마디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넣는다.
손목이 잘린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고, 그림자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눈은 마치 검은 밤하늘을 찢어놓는 초승달과 닮아, 남자의 공포까지 도려내는 가늘고 매서운 눈빛.
검은 선박 아래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아내었던, 섬뜩한 괴한의 형상은 끔찍한 악몽처럼 매섭게 떠오른다.

남자의 일행 중 몇몇이, 바닥을 자신의 피로 흥건히 적셔야 했던 그를 들쳐업었다.
턱수염에까지 피가 묻어든 남자는 자신의 손조차 되찾지 못한 채, 누군가의 등 위로 피범벅의 몸을 옮겨야 했다.
비명이 점점 멀어져간다. 좁은 골목을 지독하게 채우는 피비린내도 바람에 씻겨 가시고 있었다.

「아가씨!」

시선을 가득 채웠던 붉은 광경이 조금씩 씻겨나갈 즈음, 일어선 노인은 소녀를 향하여 달려갔다.
하얀 피부 가운데서 빛이 났을 두 눈은 꼬옥 감겨있지만, 오똑한 코 끝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숨이 느껴진다.

노인은 팔을 뻗어, 작고 어린 아가씨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아 올리고, 빛나는 금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금발에 묻은 피는 그 모습을 조금 더럽게 할지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머리칼에 닿는 감촉을 느끼자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집사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드레스가 핏빛으로 더러워졌군요.」
「제 피가 아니에요. 살아난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해야겠죠.」

사방으로 흩날렸을 핏빛을 뒤집어써야 했던 드레스는, 이미 원래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듯 하다.
하지만 핏자국이 온 몸에 묻고 지독한 피비린내가 번져감에도, 노인은 그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작은 몸뚱이를 안은 늙은 가슴은 고즈넉한 숨소리를 세어 편안해진다.
붉게 물든 달빛조차도, 따뜻한 가슴으로 덥히어 소녀는 그 품에서 따뜻한 홍차의 향기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고 감정에 젖어 있을 때, 검은 남자는 주변을 서성거리며 상황 정리를 하고 있다.
은빛에 비친 초승달은 검은 칼집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그는 바닥에 널부러진, 아직도 총을 쥔 손을 집었다.
깨끗하게 잘린 손목에서는 아직도 핏덩이가 뚝뚝 떨어지지만, 남자는 필요없다는 듯 손을 바닥에 던져버린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빨간 살덩이 대신, 그는 아직 총알이 남은 권총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고선 품 안에 넣는다.

「섬뜩하군요. 혹시 아시는 사이입니까?」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였고, 섬뜩한 한 마디로 베어버린 손을 주인에게서 빼앗아버리고,
그 손을 무심한 듯 던져버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피비린내가 지독히도 풍기는 권총을 품에 넣는 모습.
집사 노인은 총을 맞고도 멀쩡히 살아나는 사내와, 그 총을 든 손을 베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는 사내.
그의 늙은 일생에서 볼 수 없었을 사내를 달빛에 취한 어둠 속에 두번이나 마주치게 되었다.

「저를 살려주신 분이세요. 두번이나 신세를 지게 되었네요.」

하지만 소녀는 노인이 가리키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대뜸 손부터 흔들어 그를 불렀다.
노인은 그녀의 손까지도 베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였지만, 번뜩이는 달빛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안심할 수 있었다.
소녀는 노인에게 자신과 이방인 사내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잘려나간 손목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노인은 남자의 커다란 체격에 조금 놀랐고, 어눌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발음에 한번 더 놀랐다.

「어떻게 다시 온 거죠?」
「굉음을 들었다.」

소녀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남자의 품 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손가락이 노인의 얼굴을 가리켰다. 노인은 순간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소녀를 붙잡았다.
아직 마음의 경계가 덜 가신 노인은, 언제 다시 한번 그 섬뜩한 칼날이 자신에게 피를 토할까 두렵다.
하지만 남자는 노인의 품에서 앙탈을 부리는 소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입을 떼었다.

「돌아갔군, 집으로.」

달빛이 노인의 품으로 떨어지고, 새하얀 빛은 소녀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사랑스럽게 비추었다.
문득 노인은 남자의 희미한 웃음에서, 어렴풋이 아버지가 딸에게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착각일까, 그 모습은 돌아가신 주인님과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자그마한 입술은 잠시 침묵을 담는다. 시간을 남기고 창백한 피부 위로는 하얀 숨이 깨져서 흩어진다.
소녀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한 걸음을 조심스레 달빛에 디디어 노인의 품에서 천천히 벗어난다.
노인은 문득 느낀 불안이 두려워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이미 소녀는 손을 뻗어 닫지 않는 곳에 있다.

「제가 태어난 이 도시는 언제나 시끄럽고 활기찬 바다의 모습으로 반짝여요. 하지만 바다의 그림자가 이렇게 검고, 어둡고, 잔인하다는 것은 미처 몰랐어요.」
「아가씨..?」

노인의 놀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발걸음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은 무엇을 결정하려는 걸까, 반나절의 짧은 시간동안 소녀는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일까.
그 모습이 낮설기까지 하다고 생각한 노인에 반해, 검은 남자는 입술을 떼어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볼 뿐이다.

「왜, 너는 생각하지?」
「강하고, 교활하지 못해서, 이용당하고 결국 목숨까지 팔릴 뻔한 사람이니까요.」

남자는 짧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노인은 고개를 떨군 채 잘못된 선택을 했던 자신의 못난 결정을 후회해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노인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스러운 표정은 노인을 향해 더욱 활짝 피어난다.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떨지 못하는 노인을, 돌아선 소녀는 말없이 그 품으로 감싸안는다.
탄력이 없는 뺨에 소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닿고, 그 심장의 맥박은 어느 소리보다도 편안하게 노인을 잠재운다.

「집사님, 잠시 여행을 다녀올게요.」

듣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가 내뱉으리라 예상했던 말을 들은 노인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러 물어본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요.」

노인은 고개를 들었고, 하얀 달빛이 배어 더욱 깊어진 눈동자를 마주하였다.
아가씨의 모습은 더 이상 에멘시 가문의 어리고 약한, 보호받아야 할 상속자의 것이 아니다.
굳건한 성과 괴물, 황금의 보물 뒤에 숨어 용사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 떠나려는.
그 눈에 비치는 대답을 보고 있자니, 노인은 더 이상 자신이 끼어들 수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선 소녀는 남자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같이 가요.」

부러질 듯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발길을 붙잡을 수나 있을까.
하지만 움켜쥔 손가락 사이에서 삐져나와, 소매로부터 어깨까지 난 몇겹의 주름은 남자의 팔 전체를 덮었다.

「부탁이에요.」

남자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녀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본다.
새하얗게 떨어지는 달빛에 서로의 표정이 비치고, 침묵으로 물들어가는 어둠은 수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몸짓도 언어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다를지 모르나,

결국 남자는, 자신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제일 먼저 소매를 감싸던 수많은 주름들이 스스르 풀어진다. 소녀는 고개를 떨구고 작게 흐느꼈다.
순간 그녀도 모르게 볼을 적시게 되는 눈물방울 하나, 하지만 그것은 애잔한 감정을 훔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볼에 다가가서, 별처럼 빛나며 흐르는 소녀의 눈물을 살짝 닦아내었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젖은 얼굴을 손으로 살짝 가렸다.
손목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방울. 그것이 별똥별처럼 빛을 내며 떨어지는 것을 달빛이 보았다.

「다 끝난 건가?」

그리고 모두가 감동에 젖어, 한참동안이나 잊고 있었을 목소리가 침묵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제서야 노인은 감동에 젖은 세 사람과는 저만치 떨어져, 오랫동안 그 모습을 주시하였을 남자를 찾아내었다.
노인의 시선을 발견하자, 회색의 누더기 남자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세 사람을 가로질러 말문을 연다.

「노인, 페이욘으로 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고 있소?」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페이욘으로 가는 길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노인이 일어서자, 소녀의 시선도 잠시 그 뒤를 따라간다.
사정을 모르는 소녀는, 낮선 남자의 누더기 옷에 뚫린 작은 구멍을 바라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걸음을 따라 움직이는 날카로운 달빛은, 의아한 궁금증을 소녀에게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다려라.」

뒷덜미를 잡는 어눌한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산발의 머리칼 사이에 가려진, 매섭고 긴 눈매에서 섬뜩하게 비치는 두 눈은 너무도 차갑고 까맣게 빛난다.


「찾았다, 강한 자.」

검은 산발의 남자가 허리춤에 손을 대었다. 검은 윤택을 품은 칼집은 그의 손 끝에서 날카로움을 토해내었다.
새하얀 달빛이 칼 끝을 내리치자, 그 속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은빛 초승달이 창백한 모습을 번뜩이고 있다.
모든 것을 삼켜들어가는 어둠 속에서 스산한 달빛이 차갑게 번뜩일 때, 어눌한 그의 목소리는 섬뜩하게 퍼진다.

「무기를 들어라.」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 섬뜩함에 화들짝 놀란 노인은, 갑자기 벌어진 이 살얼음같은 상황을 수습해보려 애를 써본다.
하지만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를 삼키려는 그들만의 사나운 분위기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회색빛의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비추는 색도, 모습도 없는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욱 짙고 깊을 뿐이다.
마주한 검은 눈동자 속에서, 회색빛 남자는 그 속에 비춰 반짝이는 가늘고 둥근 초승달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새까만 눈동자가 초승달을 닮아 깊고 새까맣게, 또 섬뜩하도록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새, 어둠이 검게 젖어들고 달빛이 차갑게 부서진다.

남자는 온 몸을 뒤덮은 누더기의 어깨에 꽃힌, 특징 없는 수수한 모습의 브로치에 손을 가져갔다.
브로치를 잡은 손이 조용히 어깨에서 멀어질 때, 그 속에 감춰진 본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브로치의 가늘고 뾰족한 바늘을 세워서는 손 끝으로 가볍게 쥘 뿐이었다.

「마땅한 것이 이것밖에 없군.」

아름답고 긴 곡선을 자랑하는 칼날에 비해, 손가락보다 짧은 바늘은 노인조차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총알을 맞고도 태연하게 일어나는 남자에게는 그런 무기도 엄청난 흉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노인이 보기에 회색빛의 남자는 장난을 할 생각은 없어보이고, 검은 이방인 남자 또한 그래보였다.
오히려 칼날을 쥔 남자의 손이 칼자루를 더욱 세게 쥐어보인다. 노인은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을 꺼내본다.

「서로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를 또 다른 소란으로 물들일 셈입니까?」
「늙은이, 방해된다.」

어눌하지만 차가운 목소리가, 단칼에 노인의 쓸데없는 노파심을 쳐낸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가 자신까지 베어넘길까봐, 노인은 황급히 누더기의 남자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정말 싸울 생각이십니까?」
「물러서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눈동자는 확실한 대답을 남기지 않는다. 노인은 이 사내가 그를 상대할 것인지 확신마저 서지 않는다.

이제껏 그의 늙은 인생에서 본 적이 없는 두 사내들이 서로에게 적의를 겨누고, 서로를 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길지도 예측할 수 없다. 밤하늘에 드리운 달빛과 그림자처럼, 서로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다만 노인은 서로를 마주보는 잔혹한 침묵에서, 다시 한번 풍겨올 피비린내를 예감할 수 있었다.

일순 공간은 달빛에 흐려지고, 적막 속에 불어오는 스산함이 차갑게 느껴질 때, 다시 어둠으로 젖어들었다.
시간은 끔찍한 침묵을 꼬리처럼 남기고, 그 속에서 서로는 영원과도 같은 찰나를 세어 서로를 느낀다.
하얗게 흐트러지는 한숨조차 조심스럽고, 그 속에서 그 어떤 소리도 방해가 되는 기나긴 고요함.
적의를 머금은 침묵이 어두워져가는 밤의 시간을 점점 조여갈 때, 초조해하던 노인은 결국 소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무슨 말이라도 하십시오. 또 다시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게 생겼습니다.」

그 광경을 말없이 보고 있던 소녀는, 검은 이방인 남자를 향하여 한마디를 던진다.

「꼭 이겨요.」
「..오, 신이시여.」

노인은 신에게 빌어야 했다.


달빛이 차갑다.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초승달에 얼어붙은 먹이를 절대로 놓지 않을 기세이다.
어둠 또한 자신의 모습을 함부러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달빛을 삼킬 시간을 세어나가고 있다.
침묵이 날카롭다. 시간은 얼어붙고, 공간은 숨을 죽인다. 누구도 어설픈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달빛이 잠시 어둠에 젖어든다.

먼저 떨어지는 것은 은빛의 칼날이었다.


폭풍같은 공격이 사정없이 회색빛의 남자를 향하여 불어닥친다.
아찔한 은빛의 초승달이 몇번이나 어둠 속에서 춤을 추었고, 날카로운 불꽃을 뱉어내었다.
하지만 눈으로 쫓기에도 어려운 공격은, 그것을 받아내는 상대의 모습때문에 더욱 엄청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는 단지 손 끝의 바늘만을 이용하여, 세차게 날아오는 칼날들을 한치의 실수도 없이 모두 흘려내고 받아쳤다.
모든 사람들의 상식과 예상을 무시하는 광경은 단지 그의 손가락에 쥔, 아주 짧은 바늘 끝에서 펼쳐진다.

그러자, 오히려 쫓기게 되는 것은 은빛의 칼날이었다.
노련하고 정확한 움직임은 모든 칼날의 폭풍을 받아치고, 다시 불어닥치기 전에 폭풍의 눈을 날렵하게 찌른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바늘은 위협조차 되지 않지만, 치명적인 급소를 향해 달려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결정적일 일격은 매차례마다 폭풍을 비집고 노련하게 들어와, 승패의 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다.

그 때 다시 한번, 폭풍의 눈을 뚫고 들어오는 일격이 있다.
엄청난 기세로 파고드는 공격은, 피하려는 그의 뒷걸음질보다 더욱 빠르게 목구멍을 뚫어버릴 것이다.


피할 수 없다.

순간보다 빠르게 밀어닥치는 공격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바늘은 이방인 남자의 왼손 손바닥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바늘이 뚧은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날카로워, 남자는 자신의 왼 팔이 통째로 마비되는 느낌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왼 팔이 부서질 듯한 감각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고통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
요동치는 손가락들은 황급히 빠져나가려는 손가락을 붙잡는다. 브로치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은빛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손잡이를 굳게 움켜쥔 그는, 신음이 섞인 목소리로 승패를 판가름한다.

「..끝이다.」

검은 이방인 남자가 칼날을 들었다. 가느다란 초승달은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예리한 날은 회색빛 누더기의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단 하나의 붉은 선을 그어 두 동강을 낼 것이다.
힘줄과 뼈까지 베어넘기는 날카로움을 손 끝에서 떠올려내며, 내리치는 칼날이 잔인한 빛을 번뜩인다.


찰나는 승패를 좌우한다.

망설이던 자는 결국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 순간, 끊어질 듯한 통증은 칼날을 내리치는 그의 어깨 전체를 짓누르고.
노련한 상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순간, 달빛을 가리는 어둠이 있었다.

엄청난 손아귀의 힘에 모가지가 잡혀, 이방인 남자는 숨이 막히고 몸이 들어올려지는 고통을 느낀다.
누더기 자락이 걷히자, 상대를 번쩍 들어올린 회색빛의 남자는, 다른 손으로 누더기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잠시 그의 시선을 가렸을 누더기 옷의 끄트머리는, 회색빛 남자의 발치 앞에 제 자리를 찾아 부드럽게 떨어진다.

그는 남자의 한 팔에 매달려, 자신의 몸을 그 억센 손아귀에서 빼내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애써 발버둥 칠 수록 모가지를 조여드는 손아귀는 금방이라도 그의 목뼈를 부숴버릴 것만 같다.
숨이 막혀 아득해지는 시선에서, 겨우 눈을 떠 마주한 남자의 두 눈동자는 아무런 색도 담아내지 않는다.
어떤 고통과 희망도, 초점과 삶도, 하다못해 주변의 모습마저도 담아내지 못하는 그런 눈을 그는 본 적이 없다.

「이 쯤에서 포기한다면 살려주겠다.」

아득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섬뜩한 목소리는 그의 몸을 심장에서부터 뒤흔드는 것만 같다.
밤공기에 하얗게 빠져나오는 마지막 숨은 영원한 침묵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숨은 점점 막혀오고 심장 뛰는 소리가 멎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잡은 칼날을 놓지 않았다.


검은 어둠은 치명적인 틈새를 가진다.

달빛이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선을 다시 반짝인다.


검은 이방인 남자의 몸뚱이가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진다.
노인이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자, 칼날을 지팡이처럼 세워 땅을 짚은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고통에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왼쪽 팔은, 볼썽사나운 그의 몰골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모습으로, 다른 팔을 들어 칼날을 허공에 내리친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잔영, 그 속에서 뛰쳐나와 바닥을 물들이는 것은 분명 지독하게도 검붉은 빛깔.

회색빛의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상처를 틀어막은 손바닥 사이에서, 은빛 칼날의 끝을 장식했을 검붉고 진한 핏빛은 그의 손을 어둠처럼 물들인다.
하얀 달빛이 그의 젖은 손바닥을 비춘다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상해도 남기지 못했던 총상과,
그 상처에 어느 새 파고든, 손가락 길이정도로 짧지만 깊숙하여 피가 쉼없이 배어나오는 칼자국도 보여 줄 것이다.

서로 일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숨통을 끊어놓지는 못하였다.
회색의 누더기 남자는 무기를 잃어버렸고, 검은 산발의 남자는 무뎌진 왼쪽 팔으로 불리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지독한 피와 땀으로 분위기는 무르익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노인은 이제 자신의 노파심으로도 막아낼 수 없을 광경을 보며, 숨조차 조심스럽게 삼켜야 했다.

이젠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두 남자이건만, 한번 발톱을 섞은 맹수는 절대 상대를 놓치지 않는다.
아마 두 남자는 자신의 모습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미 그 눈은 서로의 상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눈동자는 자신의 사지가 뒤틀리는 모습보다, 상대의 티끌만한 상처에 담긴 핏자국을 더욱 잘 잡아낼 것이다.

비틀거리는 발자국이, 땅바닥을 기듯이 걸어가며 거리를 좁혀간다.
상대는 묵묵히, 지친 맹수가 어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숨이 섞여 부서지는 거리에서, 서로는 모든 것이 깊숙히 짓눌려진 침묵을 기다리고 있다.
은빛의 칼날이 먼저 빛을 토했다. 그 선은 상대의 회색 머리칼에서부터 어깨로, 그리고 목으로 떨어진다.
아찔한 은빛 칼날의 아름다운 선은 그 끝을 붉히며 가장자리를 흘러 떨어지는 핏빛때문에 더욱 도드라져보인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숨을 베어넘기는 칼 끝, 여전히 남아 물들어있는 핏자국은 마지막 일격을 암시한다.


누더기의 남자는 눈을 감았다.

먼저 쓰러진 것은 검은 남자였다.


무력한 몸뚱이는 마치 누군가가 잡아당긴 것처럼, 옆에서부터 힘 없이 쓰러졌다.
침몰의 충격을 받아내야 했던 바닥은 잔먼지와 타인의 핏방울로 섞인 흔적을 사방에 퍼트렸다.
끝에 서린 달빛은 구름에 잠겨 사라져간다. 칼날은 결국 끝을 긋지 못하고, 속절없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누더기의 남자는 한참동안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폭풍을 일으키고, 일격을 날렸지만, 결국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숨소리만을 몰아쉬게 된 상대의 지친 모습.
엄청난 경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온 몸. 지금껏 땅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만도 대단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쓰러진 상대를 향해 걸어갔다. 노인과 소녀는 어둠에 잠기는 뒷모습에서 불안을 느낀다.
소녀는 문득 누더기 속에 감춰진 그의 손 끝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말리고 싶었겠지만, 어둠에 붙어버린 발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누더기가 바람을 맞아 펄럭인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심상치않은 몸짓이 불안하다.
그리고 그 팔이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소녀는 그의 손 끝에서 다시 한번 반짝이는 브로치를 보았다.
결투는 끝났다. 결국 가쁜 숨을 몰아쉬는 패자 위에는 승자가 치명적인 송곳니를 반짝이고 있다.


치명적인 송곳니가, 상대의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작은 날을 반짝인다.

그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를 잡아끄는 가늘고 작은 손가락들.


남자는 움켜쥔 손가락에서부터 작은 어깨, 그리고 고운 얼굴까지 이어지는 실루엣을 마주하였다.
달빛을 한 가닥씩 짜넣은 흐름이 마치 고운 비단같이 느껴진다.

하얀 달빛 속에서, 작고 아름다운 실루엣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오렌지 빛의 머리카락이 고개의 움직임을 따라 흩날린다.

「악연이겠군.」

그 목소리는 하얀 숨처럼, 어둠 속을 하얗게 기어오르다가 어느 순간 달빛에 부서져 흩어진다.
그는 손 끝에서 마지막을 번뜩였을 브로치를 품 속에 숨겨넣고, 누더기처럼 해어진 몸을 이끌고 돌아섰다.

그 순간, 오렌지 빛의 머리카락이 그 어둠에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남자는 발길을 잡아채는 소녀의 시선을 잠시 바라보았고, 상대에게 더 관심은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차가운 어둠은, 지친 숨을 몰아쉬는 검은 은빛의 달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오렌지 색의 별빛,
그리고 그 둘과의 공간에서 아득히 멀어져가는 걸음을 걷는, 빛이 없는 별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결국 어둠에 흔적처럼 박혀있던 별빛은 서로를 등지고 돌아선다.
뒤돌아선 남자는, 작은 소녀의 작은 주먹을 살포시 쥐었다. 누더기의 옷이 작은 주먹과 손목을 살포시 감싼다.
그 별빛을 뒤에 달고, 남자는 자신이 나타났던 공간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달빛이 그 뒷모습을 비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검은 달빛 위로, 별처럼 빛나며 흐르는 금발이 떨어진다.
소녀는 초라한 몰골의 패자에게 보내는 아쉬움과, 결국 살아났다는 안도감을 한데 섞어 두 눈동자로 떨어트린다.

그러자, 그의 떨리는 손가락은 하얀 볼에 다가가서, 별처럼 빛나며 흐르는 소녀의 눈물을 살짝 닦아내었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젖은 얼굴을 작은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손목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방울. 그것이 별똥별처럼 빛을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는 웃는다.

쓰러진 검은 초승달의 그림자를 노인과 소녀가 천천히 짊어지고, 침묵의 달빛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숨막히는 광경을 자아냈던 그 손 끝이, 이제는 작은 손 끝에 붙들려 부드러운 잔영을 남기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뒷모습, 한참동안 그 침묵을 더럽힐까 누구도 부서지는 숨조차 꺼내지 못하였다.


알베르타의 밤이 침묵과 달빛에 물들고, 부서졌다.

길고 차가운 밤이 날을 새고 또 다른 하루가 흐른다.





알베르타의 동쪽 항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다.
수십 척의 배가 바다 건너에서 들어오고 있고, 항구의 공기는 평소와 같이 소란스럽기만 하다.
짐을 나르는 선원들의 표정은 밝고 시끄럽고 떠들석하며, 그 속에서 상자들이 착실하게 옮겨져 창고에 쌓인다.
바다 사나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고, 평소보다 많은 양의 짐을 실어오는 배들은 환호의 경적을 울리고,
무사한 항해에 기뻐해야 할 사람들은 축제를 열어 다 함께 떠들석한 분위기를 즐겼다.
모두가 마치 도시의 행복을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알베르타 항구의 소란 속에서 포말도 경쾌하게 부서진다.

그리고 한 소녀가 서 있다.
부서질 듯 가느다란 하얀 발목 아래에는 순수하게 빛나는 하얀 단화가 그녀의 작은 발을 아름답게 감싸고 있다.
소녀의 가는 다리를 살며시 가리는 드레스는,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리본에서 정갈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곱게 다려진 드레스의 라인을 따라 올라가면. 아, 가까이 한다면 포말처럼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너무도 하얀 피부.
심술궂은 바닷바람이 소녀의 앞머리를 잠시 휘둘러놓았다. 소녀의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부시게 순수한 하얀 금빛의 햇살처럼 밝은 금발이 걷히고, 그 햇빛을 온 몸으로 머금은 바다처럼 빛나는 눈동자.

한 남자가 그 옆에 서 있다. 커다란 키에 건장한 체구.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피부.
분명 그 피부는 이제 이 항구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을,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하대할 수도 없는 색깔일 것이다.
얼굴을 뒤덮었을 산발의 머리칼은 에멘시 가문 하녀들의 솜씨로 전혀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다.
거칠고 헝클어졌을 머리털은 몇번의 헹굼질과 빗질로써 단정해지고,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리본을 달려 하는 아가씨의 움직임을 겨우 저지하고, 뒤로 넘긴 머리칼을 묶자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남자와 소녀의 등 뒤에는 커다란, 하지만 검다기보단 티 없이 새하얀 선박이 항구 한가운데에 떠 있다.
남자가 고개를 들자, 검은 눈동자는 시선 앞에서 아가씨의 무사한 항해를 바라는 선원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눈매는 작고 가늘지만, 매섭지는 않은 눈동자. 그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품에 안은 노인의 거친 손등을 보았다.

「집사님.」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가볍게 안은 손. 소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손에 무수히 난 주름들을 알고 있다.
소녀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시선속에서는 정리된 검은 머리칼을 모두 이마 뒤로 넘긴 남자가 보인다.
커다란 체격을 가진 남자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소녀의 작은 두 어깨를 살포시 덮어주었다.
커다란 외투 속에서 소녀는 마치 외투 속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작고 귀여운 동물처럼 보일 것이다.

「아가씨와 주인님의 가문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승무원의 손짓에 따라 여행객들은 작별인사를 하고, 두 손 가득 짐을 챙겨서는 서둘러 배에 승선하였다.
아가씨도 가슴 가까운 곳으로써 노인과의 마지막을 따뜻이 안아보이고, 남자를 따라 배 위에 올라섰다.
모든 정리가 끝난 후, 배가 마지막으로 경적을 울렸고, 선원들은 그 소리에 따라 배의 닻을 끌어올렸다.
포말과 바람만이 부서지는 소리 속에서, 노인은 바람을 향해 손을 들고 소녀는 바람을 피해 얼굴을 파묻는다.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고, 소녀는 남자의 커다란 외투 속에 몸을 구겨 넣었다.
외투에 거의 집어삼켜진 소녀의 작은 얼굴은 고운 얼굴을 반밖에 내밀지 못하고.

「집사님이 끓여주신 홍차의 맛은 잊지 못할 거에요.」



노인이 천천히, 팔을 흔들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배는 그 도시에 매달린, 남은 미련을 일제히 떨어트렸다.

소녀는 커다란 외투 속에서, 부서지는 마지막 눈물을 떨어트렸다.




Chaos 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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