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린아, 우리 오디션 같이 볼래?”

 

홀린이가 내게 물었어, 흑백 체크무늬가 바둑판처럼 그어진 고스로리 스커트를 팔랑거리면서 말이야. 의외였어. 홀린이가 나한테 유난히 꽁냥꽁냥 설레라 설레라 하는 아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하고, 그것도 걸그룹 오디션을? 어리둥절해하는 내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실실 쪼개면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나한테는 너 같은 투블럭보이류가 어울리지 않겠어?”

 

홀린이 말에 난 발끈했어, ‘보이’라고?

 

“미친. 기타뽕류 주제에.”

“뭐, 기타뽕?”

“맨날 기타를 그딴 식으로 매잖아.”

 

나는 기타로 한껏 밀어 올려 쿠션처럼 부풀린 홀린이의 가슴을 똑바로 가리켰어. 그랬더니 홀린이는 오히려 어깨를 좁혀 가슴을 한층 더 불룩 내밀어 보이는 거야.

 

“뭐, 큰 걸 어쩌라고. 가만있자. 기타뽕가슴에 탈코투블럭보이. 왠지 잘 맞겠는 걸. 꺄륵.”

 

미친년이 그러면서 내 밋밋한 가슴을 겨냥해서 가운뎃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리는 거지. 은백색의 해골 반지와 검은 가죽 팔찌, 그 사이에서 홀린이의 가운뎃손가락과 손목을 잇는 쇠사슬이 찰랑거렸어. 그게 거슬렸던가? 나도 모르게 홀린이 손목을 낚아채서 거머쥐었지. 그러고는 가운뎃손가락을 왕 깨물고 말았던 거야.

 

“아야.”

 

홀린이는 흠칫 놀라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손가락에 힘을 줬어. 홀린이 손가락에 끼워진 해골이 눈앞에서 달달 떨더군. 난 놔주지 않았어. 홀린이 손가락은 내 이빨 틈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꼼틀거렸어. 난 더 꽉 물었어.

 

“윽. 살려줘.”

 

입 안에 붙들린 홀린이 손가락이 내 혀를 도닥이며 애원했어. 짠맛. 난 발칙한 눈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어. 외려 홀린이 손가락을 물고 흔들었지. 그러자 홀린이의 살짝 비틀린 까맣고 깜찍한 입술이 배시시 다가와 귓불을 톡 깨물며 새초롬히 속닥였어.

 

“씨발년.”

 

바싹 오른 눈독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홀린이의 눈. 뭐랄까, 귀여워 죽겠는, 꼬물이 아기 고양이 같은 걸 발견한 눈빛? 그러면서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으로 내 입가를 야릇이 쓰다듬는 거야. 보드랍고 따뜻했어. 난 그만 스르르 눈을 감고 젖 찾는 갓난아기처럼 홀린이 손가락을 쪽쪽 빨았어. 그런데 별안간,

 

“죽어라.”

 

네 개의 손가락이 내 양볼을 꾹 누르는 거야, 빵 터트려버리겠다는 듯이 말이야. 입술이 퐁 열리면서 손가락이 쏙 빠져나갔어. 그리고 그 틈으로 홀린이의 혀가 파고들었어. 새콤달콤한 체리맛. 서로의 테두리를 넘나드는 아찔한 촉감에 내 안의 온갖 은밀하고 더러운 생각들이 들끓었어. 그러곤 직감했지.

 

‘너였구나, 윤우를 죽인 게.’

 

윤우가 죽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어쩌면 그게 동기화의 시작이었을지 몰라. 환각과 상념을 반복하는 루프. 윤우가 클라우드에 남긴 상념. 홀린이 혀에 연결된 환각. 그런고로 난 사용자의 말단에 지나지 않아. 상념을 서버와 동기화하는 개체는 결국 클라이언트일 뿐이니까.

 

*

 

윤우는 텔레병 환자였어. 솔리드 바디 일렉트릭 기타의 뉴트로 아이템 ‘텔레캐스터’를 꼭 사야만 하는 저주에 걸렸던 거지. 힙스터 기타리스트라면 알 것이야. 까랑까랑한 날 것의 기타 톤, 적당히 자글거리는 오묘한 노이즈, 삽자루처럼 투박하면서도 우아한 물푸레나무의 질감과 곡선, 그리고 그 표면에 얼비친 너와 나. 텔레캐스터에 푹 빠진 윤우는 학기 내내 텔레텔레 노래를 불렀어. 그러더니만 결국 여름방학 두 달 치 알바비를 쏫아부어 득템하고야 만 거야. 새까만 텔레캐스터였어.

 

“이름은 까랑이야, 까랑까랑하니까.”

 

득템으로 텔레병이 완치된 윤우는 텔레대마녀로 거듭났어. 연습이 아니라 그냥 하루종일 까랑이를 끼고 산 거야. 그게 앙상블 수업이었나? 윤우가 까랑이를 품에 꼭 안고 꾸물꾸물 괴상한 리듬을 타는 거야, 연주는 하지 않으면서. 박 교수는 그러는 윤우를 한참동안 지켜보다 물었어.

 

“윤우야, 그루브가 너무 너울거리네. 그게 뭐지?”

 

윤우는 새까만 까랑이를 내밀어 보이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어.

 

“연주가 아니라 호흡을 맞추는 중이에요. 까랑이가 숨을 쉬는 건 아니지만, 이 아이의 진동이나 무게감 같은 게 제 손가락을 지나서 온몸으로 전해지거든요. 까랑이랑 춤을 춘다는 느낌이에요. 아직 우리 둘만의 그루브를 만드는 중이라서요.”

 

그러고는 그제서야 까랑이를 연주하면서 리듬을 탔어, 비트에 맞춰 십자가를 새긴 까만 구두를 구르고 블랙체리 톤의 검붉은 입술을 뽁뽁이면서,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핼러윈 꼬꼬마처럼. 뭔가 쌉간지, 한마디로 신박했어. “우와”하는 탄성으로 연습실이 들썩거렸지. 박 교수는 영미 팝에서 소울풀하다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원형이 아프리카와 유럽의 민속 리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며, 지금 우리의 대중음악인들은 K팝을 넘어 K그루브를 완성시켜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으며, 그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K 고유의 토속 장단을 자신의 그루브로 체화할 아티스트들이 필요한데, 윤우가 바로 그런 토속적인 느낌을 가진 것 같네, 라며 윤우의 리듬에 박수를 보냈어. 흠, 고스로리 텔레대마녀와 K그루브라... 박 교수의 말에는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뭐 윤우의 연주가 단연 최고라는 것만은 인정! 그런데 홀린이는? 한번은 홀린이 연주를 듣던 박 교수가 하품을 하며 그랬더랬지.

 

“홀린아, 너 그렇게 계속 7플랫 5플랫만 왔다갔다 할래, 무슨 루프스테이션[1]이니? 루프스테이션은 정확하기라도 하지, 그런 뻔한 애드리브[2]도 실수 투성이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서 오디션은 볼 수 있겠어? 윤우 연주까지 다 깎아먹을래?”

[1] loop station : 혼자서 여러 파트를 연주할 수 있도록, 일정한 구간을 반복 재생하면서 소리를 쌓는 기계.

[2] ad lib, 즉흥 연주

 

홀린이는 분홍 코르사주가 달린 구두코를 곱게 모으고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였어. 박 교수는 혀를 끌끌 차다 고개를 힐끔 돌려 윤우를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어. 그러면서 짐짓 혼잣말처럼 이랬던 거야.

 

“후유… 우리 윤우가 조금만 더 예뻤더라면.”

 

윤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 저 바보. 그런 게 아닌데. 우리 박 교수님께서 그런 말실수 할 사람이 아니잖아.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넌 성형이라도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를 에둘러 말한 거라고. 그것도 모르다니, 이런 갑갑한 텔레병 환자 같으니라고.

 

*

 

오디션은 밴드유닛으로 데뷔할 걸그룹 프로젝트였어. 기타리스트 둘은 서로 연주를 주고받는 트윈 리드 기타 개념이라 어느 정도 연주 호흡이 갖춰진 기타 듀오를 뽑겠다는 구상이었지.

 

“다른 파트는 이미 연습생들로 꾸렸고, 트윈 기타 파트만 연주력이 탄탄한 실용음악과 학생 중에서 선발할 겁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포인트는 한마디로 ‘롱런(long-run)’이에요. 흔하게 나왔다 들어가는 걸그룹이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오래 갈 수 있는 스테디셀러가 목표랍니다.”

 

루프탑 엔터테인먼트의 장 실장이 방방곡곡에서 모인 기타 전공 여자아이들을 빙 둘러보며 설명했어.

 

“우리는 송캠프 방식의 한계를 절감했어요. 전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협업으로 만드니까 곡 퀄리티는 분명히 높아졌죠. 하지만 아무래도 음악이 표준화되는 경향이 있달까요. 그래서 다시 밴드로 돌아가기로 한 거예요. 걸그룹에 연주자를 들여서 음악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시키자는 결론을 내렸죠.”

 

아이들 모두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장 실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어. 당연하지, 루프탑은 모두가 선망하는 탑티어 K팝 기획사였으니까. 그런 루프탑 소속의 걸그룹에서 기타리스트를 뽑는다잖아. 게다가 롱런이라니. 안정적인 월드스타, 그건 뭐랄까, 꿈에서조차 꿈같은 꿈인 거지. 알잖아, 우리 모두가 최소 10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간신히 실용음악과에 들어 왔어, K팝 전사의 꿈을 한아름 안고서. 중학생 때부터 이미 기획사 연습생으로 선발된 ‘K팝 꿈나무’까진 아니더라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엄청난 경쟁을 뚫은 거잖아. 그런데 스타가 수두룩하면 그걸 스타라고 할 수 있겠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K팝 스타가 될 수 있을까? 나머지 대다수는 졸업하면 뭘로 먹고 사냐고. 유학까지 갔다와도 대학 강사는 커녕 학원 강사 자리도 하늘에 별따기라는 거야. 실용음악과를 졸업해서 하는 일 중 대부분이 실용음악과 입시 일이라니, 뭔가 무한 루프를 도는 느낌이잖아, 뫼비우스의 띠나 우로보로스처럼. 그나마 그렇게 남 가르치는 경로로 가는 건 좀 여유가 있는 애들 얘기고, 대부분은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죽어라 연습만 하는 게 현실이잖아. 어쩜 그렇게 다들 연주는 잘하는지, 인간 연주의 한계를 뛰어 넘는 무료 가상악기 때문에 세션 알바도 점점 줄어들고, 밴드 편성도 4-5인조에서 2-3인조로, 심지어 사람 대신 루프스테이션을 쓰는 1인 밴드로까지 줄어드는 추세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정작 우리 같은 애들은 K팝 스타 말고는 할 게 없는 거야, 당장 할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는 거고. 이러다 홀린이처럼 라이브로 아재들 신청곡이나 받는 오부리 스트리머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남자 애들이 홀린이 보고 그러잖아, “걘 여자니까 좋겠네, 와꾸로 커버치면 되잖아. 남자들은 어떻게든 실력으로 어필할 수 밖에 없는데.” 이딴 개소리나 들으면서 홀린이 같은 기타뽕류로 여겨지는 건 싫단 말이지. 물론 그것도 홀린이처럼 몸매라도 받쳐 줘야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K팝 스타로 키울 여자 기타리스트 선발’이라니. 일생일대의 기회인 건 분명해. 앞으로 3개월. 게다가 롱런 프로젝트답게 오디션 준비 기간도 넉넉한 편이었어. 설명회 도중에 사회를 보던 박 교수가 찬물을 끼얹듯 말했어.

 

“여러분, 이 오디션이 전 세계 규모의 배틀이라는 건 다 알죠?”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투정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렸어. 루프탑 장 실장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싱글거렸어. 섬뜩하리만치 해맑은 미소였어.

 

*

 

홀린이가 윤우를 선택했을 때의 기분은 좀 묘했어. 머리로는 납득이 갔지, 언감생심 나 같은 탈코투블럭 스타일이 샤랄라한 걸그룹에 어울릴리 없잖아. 무엇보다 윤우가 나보다 연주가 뛰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대관절 연주가 뛰어나다는 건 무엇이란 말입니까? 코드 진행이나 보이싱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뜬금없는 음을 짚는 거? 물론 그럴 때마다 박 교수와 아이들 입이 헤 벌어지기는 하지. 그런데 그런 기발한 애드리브를 구사하는 게 연주가 뛰어난 건가? 앙상블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 귀퉁이에서 홀린이와 담배를 나눠 피우다 난 그만 그런 얘길 꺼냈어.

 

“응. 윤우 연주는 뛰어나.”

 

홀린이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어른스럽게 담담히 말했어. 그러다 이내 어린애처럼 입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었어.

 

“연주는 잘하지. 연주는…”

 

홀린이는 내 옆머리를 쓰윽 쓸어 넘기면서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삼켰어.

 

뭐 그래도 홀린이와 윤우는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듀오였어. 균형감이 있었다고 할까. 홀린이는 코드 연주를, 윤우는 대부분의 솔로 연주를 도맡았지. 비주얼 면에서야 홀린이가 눈에 띄었지만 연주는 윤우가 단연 도드라졌어. 홀린이도 윤우를 따라가려고 열심히 연습하는 게 보였지만 역부족이었지. 그러던 중에 박 교수의 지시를 받은 거야. 나보고 홀린이-윤우 듀오의 자작곡을 써주라는 거였어.

 

“윤우가 너무 딥하잖니. 아무래도 대중적인 작곡 센스는 이린이 네가 낫더라.”

 

그런가? 난 속으로 갸웃거리다,

 

“동기니까 둘의 연주 스타일도 잘 알 테고.”

 

라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어. 여하튼 나로서는 땡큐지. 혹시나 오디션이 잘 되면 내 곡이 루프탑에서 쓰일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 엄청난 기회잖아.

일단 우리끼리 모여서 컴퓨터 반주에 내 곡을 맞춰 보기로 했어. 그런데 이것들이 틈만 나면 투닥거리는 거야. 그날의 시작은 홀린이였어.

 

“야, 박 윤우. 네 기타 톤이 너무 튀니까 나도 자꾸 볼륨을 높이게 되잖아.”

 

윤우는 심드렁히 고개를 돌리고 아랑곳없이 앰프 볼륨을 올렸어.

 

“아, 진짜. 박 윤우. 이러면 그냥 다 시끄러워지는 거야. 너무 까랑까랑해서 거슬린다고.”

 

윤우는 고개만 까닥 돌려 홀린이를 흘겨봤어.

 

“어쩌라고?”

“톤 좀 바꾸라고.”

 

홀린이의 짜증에 윤우는 톤을 바꾸는 대신 립스틱을 발랐어. 그런 다음 더 검어진 입술을 뽁뽁이면서 이러는 거지.

 

“솔로에 코드를 맞춰야지. 코드에 맞춰서 솔로 톤을 바꿀 수는 없는데.”

“뭐?”

 

홀린이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어. 윤우는 블랙체리 립스틱으로 까랑이의 새까만 몸통을 톡톡 두드리며 리드미컬하게 대꾸했어.

 

“나는 솔로고, 너는 코드야. 이 소리가 내 기타 톤이고. 그래서 얘 이름이 까랑이잖아.”

“너 무슨 랩하냐?”

 

홀린이는 투명한 물방울 피크를 오독오독 씹으며 윤우를 노려봤어. 연습을 도와주러 온 아이들이 좀 쉬었다 하자며 슬그머니 연습실을 빠져나갔어.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지.

 

“우리 일단 서로 기타 톤을 조금씩…”

“내일 보자.”

 

윤우가 허공에다 쌩하게 말을 뱉고 기타를 주섬주섬 챙겼어. 윤우의 보면대 위에는 홀린이가 놓아둔 핑크색 헬로키티 사탕이 뜯지 않은 그대로 있었어.

 

“야. 박 윤우.”

 

연습실을 나서던 윤우가 돌아섰어. 홀린이는 낮고 찬 목소리로 말했어.

 

“사탕 갖고 가.”

“난 체리맛 싫은데.”

 

윤우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어. 홀린이는 보면대 위에 놓인 사탕을 들어 보였어.

 

“싫으면 다야? 가져는 가야지.”

“나한테는 묻지도 않았잖아. 뭘 좋아하는지. 사탕 맛도, 기타 톤도. 난 싫은 건 절대 못 해.”

 

윤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짓으로 홀린이 기타를 가리켰어.

 

“레스폴은 너무 따뜻하고 안정적이야.”

“그래서?”

“매력이 없다는 거지. 너무 뻔하잖아, 그냥 새콤달콤한 체리맛처럼.”

 

윤우의 한심하다는 표정에 홀린이의 삐뚠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어. 홀린이는 손에 든 사탕을 까서 자기 입에 쏙 넣고 윤우 눈 앞으로 바싹 다가섰어. 그러더니 느닷없이 윤우의 뺨을 꽉 붙들고 입을 맞추는 거야.

 

“읍.”

 

난데없는 키스에 윤우의 눈이 휘둥그레졌어. 홀린이가 윤우 목을 뒤로 젖히자 “헉“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윤우의 눈이 꾹 감겼어. 윤우는 미간을 찡그리고 홀린이 팔을 홱 뿌리친 다음 고개를 돌렸어. 간신히 홀린이 입술에서 빠져나온 윤우가 연신 쿨럭였어. 그러자 윤우 입에서 발그레한 사탕이 톡 튀어 나와 연습실 바닥을 또르르 굴렀어. 홀린이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어.

 

“체리맛이 아니라 내가 싫은 거겠지.”

 

윤우는 입가를 훔치며 홀린이를 노려봤어, 더럽고 흉칙한 무언가를 마주한 눈빛으로. 홀린이는 자신의 입과 윤우의 목구멍을 거쳐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체리 사탕을 “아삭” 으깨고 유유히 연습실을 빠져나갔어. 난 조금 넋이 나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어. 바닥에 꼬깃꼬깃 구겨진 분홍색 사탕 껍데기가 나뒹굴었고 그 옆에 짓이겨진 벌레처럼 검붉은 체리 사탕의 잔해가 낭자했어.

 

*

 

오디션 방식이 바뀌었어.

 

“루프탑에서 작곡까지 보겠다네, 연주는 물론이고. 응시자가 직접 만든 곡을 직접 연주하는 거야. 네 곡을 쓸 수 없게 돼서 아쉽겠지만, 그래도 우리 이린이가 윤우하고 홀린이 좀 도와줄 수 있지?”

 

박 교수의 나긋나긋한 부탁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어. 박 교수 의도야 뻔하지. 합주라는 게 그렇잖아, 어차피 서로 영향을 받을 테니까. 아무리 윤우가 멜로디를 딥하게 만들더라도 내가 악기 구성이나 음색을 좀 쉽고 듣기 편하게, 소위 ‘대중적’으로 바꾸면 윤우는 거기에 맞춰 자신의 멜로디를 바꾸게 될 거야. 왜? 윤우는 완벽을 추구하는 딥한 텔레대마녀이기 때문이지. 결국 전체적으로는 내가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멜로디는 윤우가 작곡한 이른바 ‘윤우의 곡’이 탄생하겠지. 맥 빠진 건 사실이지만 뭐 동기끼리 그 정도야, 어차피 내 이름이 들어갈 곡도 아니니까, 그냥 부담없이 재미로 봐주는 거지.

 

그런데 홀린이가 윤우한테 그러고 나서부터 둘 사이가 좀 묘해진 거야. 문제는 윤우였어. 그렇게 잘 치던 애가 눈에 띄게 실수가 잦아진 거야. 처음에는 솔로 타이밍을 몇 번 놓치길래 뭐 손이 좀 덜 풀렸나 했지. 그런데 계속 그러는 거야. 아예 몇 소절을 멍하니 건너 뛰더라니까.

 

“너 괜찮아?”

 

내 물음에 윤우는 묵묵부답이었어.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까랑이 몸통에 손을 걸치고 손가락을 우두둑우두둑 꺾기만 했어.

 

“아무 것도 안치다니, 정말 안정적인 연주네. 하지만 매력은 영…”

 

옆에 있던 홀린이가 빈정대면서 사탕 한 알을 윤우 입에 쑤욱 밀어 넣었어.

 

“자, 맘마 먹고 힘내야지.”

 

윤우는 순순히 사탕을 받아서 말없이 쭙쭙 빨았어. 그러더니 깨작깨작 까랑이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거야, 황당하리만치 기계적으로. 아, 그야말로 엉망이었지. 세상에, 그 어떤 리듬도 느껴지지 않는 연주라니.

반면에 홀린이 연주는 약 빨았나 싶을 정도로 좋아졌어. 특히나 애드리브는 윤우만큼이나 기발해졌어. 그러고보니 요즘 홀린이가 점점 윤우를 닮아가고 있었어, 연주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유난히 검붉어진 입술, 곳곳에 새긴 달과 십자가와 해골 문양의 헤나타투들. 홀린이가 윤우를 닮아간다기보다는, 윤우의 아이템들이 하나하나 홀린이에게로 옮아간 것만 같았어. 적어도 기타리스트로서의 홀린이는 너무 윤우였어. 그나마 홀린이라고 할만한 건 레스폴 기타와 헬로키티 체리사탕 정도?

 

“오늘은 안되겠다.”

 

윤우의 한심한 연주를 보다 못한 홀린이가 손을 휘휘 저었어. 윤우는 삐거덕거리며 즉각 연주를 멈추고 그대로 얼어붙었어. 홀린이가 윤우의 손과 무릎 사이에 끼인 까랑이를 조심스레 떼어 낸 다음 윤우를 일으켜서 연습실 밖으로 끌고 나갔어. 그렇게 윤우가 사라진 거야. 그날 이후로 윤우는 나타나지 않았어. 홀린이는 윤우가 잠수 탄 거라고 확신했지.

 

“스트레스야, 작곡이 제대로 안되니까. 윤우는 연주만 했잖아. 애가 너무나 딥해.”

“아무리 그래도…”

“윤우는 애진작에 글렀어. 이제는 들어갈 때가 된 거지.”

“들어가, 어디로?”

“어디로긴, 여기로지.”

 

홀린이는 기타로 가슴을 부풀렸어. 그러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던 거야.

 

“이린아, 우리 오디션 같이 볼래?”

 

흑백 체크무늬가 바둑판처럼 그어진 고스로리 스커트를 팔랑거리면서.

홀린이와 나, 기타뽕과 투블럭 듀오의 탄생이었어.

 

*

 

난 홀린이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 집이라고 하기도 뭐한, 학교 1인용 연습방보다 조금 길쭉한, 침대 하나로 꽉 찬 방이었어. 둘이 있으면 너무나 비좁아서 이불처럼 아늑한 방. 우린 거기서 수플레를 만들고, 뱅쇼를 달이고, 음과 리듬을 맞추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서로의 몸을 만지고 사랑을 나눴어. 내가 심하게 보챌 때면 홀린이는 이러려고 날 만났느냐며 꾸지람을 줬어. 그러면 난 아니, 네가 오디션 같이 보자고 꼬셨지 않느냐며 홀린이 품으로 파고들었어. 한번은 그러는 나를 홀린이가 야멸차게 밀쳐낸 적이 있어.

 

“그래, 내가 널 꼬신 건 오디션 때문이라니까.”

 

그러고는 그렁그렁한 내 눈을 보며 단호하게 다그쳤어.

 

“자, 연습 먼저 하고. 넌 어떻게 너 좋은 것만 하려고 해.”

 

순간 홀린이한테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었어. 맞는 말이지 뭐야. 그리고 충분히 이해해. 홀린이는 연주 연습을 해야 하니까. 오디션, 그걸 잊어서는 안 돼. 홀린이 말대로,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어느 새벽, 홀린이는 발가락으로 내 몸 곳곳의 곡선을 탐색하면서 기타를 연주했어. 그러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지.

 

“내 연주 어때?”

 

난 “확실히 좋아졌어”라고 말하며 홀린이를 안아줬어. 그냥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이상이었어. 특히나 루프스테이션을 쓰면서부터 홀린이의 사운드는 더더욱 풍성해졌어. 내가 베이스 라인을 연주하면 홀린이가 루프스테이션을 밟아 가며 한 트랙 한 트랙 연주를 입혔어. 메인 리프 한 트랙, 하이 포지션 스트로크 한 트랙, 홀린이는 8마디 루프를 반복하며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혼자만의 비트 위에서 혼자만의 솔로를 펼쳐, 마치 다른 누군가와의 앙상블처럼. 익숙하면서도 생경했지. 그런 홀린이의 모습은 윤우를 떠올렸어. 보면 볼수록 더 그랬어. 네크를 감싸 쥐는 모양새. 낮은 줄 밴딩 대신 슬라이드를 하는 손버릇. 검붉은 입술을 뽁뽁이며 리듬을 타는 윤우 특유의 그루브. 무언가 특이한 연주를 하기 직전에 보란 듯하는 야무진 눈짓까지. 분명히 홀린이 혼자 연주하고 있는데도 윤우가 느껴졌어. 마치 루프스테이션처럼, 홀린이의 솔로 밑에 윤우의 비트가 깔려 있는 것만 같았지. 난 품에 안긴 홀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네가 저 루프스테이션 같아.”

 

홀린이는 내 뺨에 수란처럼 야들야들한 볼을 부비면서 꿈투정하듯 속삭였어.

 

“그렇다니까, 나도 가끔 헷갈려, 연주를 위해서 루프스테이션을 쓰는 건지, 루프스테이션을 위한 연주를 하는 건지.”

 

난 홀린이의 빨간 레더 셔츠를 열어 달래듯 가슴을 어루만졌어. 콩콩 비트가 울렸어. 몸을 웅크려 그 가슴에 귀를 묻고 그 터질 것 같은 비트와 감촉을 만끽했어. 설령 홀린이가 루프스테이션이라면 어때. 이 비트만으로 족해. 완벽하잖아. 이 비트 위로 쌓아 올릴 더 이상의 연주 따윈 없을 테니까.

 

*

 

내가 홀린이를 여적여라고 놀렸어. 홀린이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박했어. 너야말로 페미니즘 시장에 팔아먹기 딱 좋은 스타일이라며, 자기야말로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킬 현실 페미니스트라며 억울해 했어. 홀린이는 자기가 여성성을 무기로 가부장제에 맞서는 소위 ‘에스트로제닉[3] 페미니스트’라며 오히려 여성성이 강화되어서 세상이 여자여자해져야 된다고 주장했고, “난 말도 안 돼”라며  여성성 그 자체가 가부장제로부터 구성된 것이며 너의 꾸밈 욕구가 사회환경적으로 유전된 집단무의식이라고 반박했어. 홀린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너야말로 말도 안 돼. 내 스타일은 그저 내 취향일 뿐이라고. 그게 가부장제의 영향이더라도 내 몸이 받아들인 이상 그건 내 범주야. 내 자유의지라고. 넌 지금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난 물어 뭐 하냐는 듯이 “당연하지. 자유의지라는 게, 그러니까 개개의 신체 안에, 단 하나의 자아가, 환경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자유로운 의지를 갖는다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하다고 생각해? 네 여성성은 취향이 아냐. 그냥 역할일 뿐이라고”라며 맞섰어. 이에 홀린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내 여성성은 분명히 달라. 헤테로 남성들에게 대상화된 여성성이 아니라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여성성이야. 역할이 아니라 마음인 거지”라고 주장했고, 난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주체적인 여성성이라는 것도 결국 ‘남성으로부터’라는 거잖어. 그렇게 의식하는 마음도 결국 가부장제에 갇힌 거 아냐? 그리고 우리도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기브 앤 테이크 하잖아. 난 부치[4]. 넌 펨[5]”이라고 말했고, 이에 질세라 홀린이도 가슴을 치며 “내 말은 여성성이 가부장제의 유물이라 안된다는 게 너무 원리주의적이라는 거지. 현실적으로 여성성만큼 대중적인 무기가 있냐는 거 아냐. 그리고 지금 우리 사이에 부치니 펨이니 그딴 게 중요해? 그거야말로 역할에 지나지 않잖아”라고 말했어. 난 “중요하다고 말하긴 뭐하지만 어쨌거나 난 주로 남자 포지션인 거 같은데, 그것도 가부장제의 남자 역할”이라며 뽀빠이 포즈를 취했고, 홀린이는 “아닐걸? 난 네가 부치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너의 그 여성스러운 몸이 좋다는 것인데”라며 내 몸 위에다 S자를 훑어 그렸어.

[3] 여성 성 호르몬 에스트로겐(estrogen)으로부터 차용.
[4] butch, 일반적으로 남성 역할 레즈비언을 칭함.
[5] femme, 일반적으로 여성 역할 레즈비언을 칭함.

“헐. 완전 속았네.”

“말했잖아, 난 에스트로제닉 페미라고, 여성성성애자. 그건 여성성에 끌리는 워마섹슈얼하고는 또 차원이 다른거야. 여성성에 끌리는 나조차 여성성이 충만한 상태여야 만족하거든. 에헤라디야~”

 

홀린이가 깐죽깐죽 팔다리를 각기로 들썩이며 ‘범 내려오는 K그루브[6]’를 탔어. 나는 그런 건 해 봐야 알지 않겠냐고 칭얼대며 위아래로 들썩이는 홀린이의 허리춤을 툭툭 털었고, 홀린이는 어디서 개수작이냐며 교태로운 어깻짓으로 화답했어. 우린 그렇게 매우 날카롭고 유치하고 적절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은 그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한 문답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다 결국에는 사랑을 나눔으로써 결론을 유예했어. 땀이 식은 후, 홀린이가 곤히 잠든 침대 위에서 프렌치 요고를 빨며 나같은 보이류와 페미니즘, 그리고 상품성에 대해 생각했어. 그런데 성 정체성이라… 그게 참 그렇잖아. 생물학적 특성보다는 개개인의 구체적이고 순간적인 감각과 심상이 더 중시되는 이 파롤[7]적 젠더 카테고리 안에서 성 정체성 따위가 다 뭐라고. 그냥, 그런 거 말고… 난 뭘까? 그러니까 적당히 도발적이고 민트한, 말하자면 시티팝 같은 거? 아 웃겨.

그렇게 나 혼자 키득거리다 막상 침대 밑에 너저분하게 엉켜서 나뒹구는 연결선과 기계 뭉치를 보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어쩌면 홀린이에게는 나보다 저 루프스테이션이 훨씬 더 중요하겠구나.’

 

그리고 돌연 소름이 돋았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만 내 생각에 내가 놀랐던 거야. 관자놀이가 두근거렸어. 나는 눈가를 부비며 새삼 홀린이를 찾았어. 당연하게도 홀린이는 침대 위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어.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였지.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쌔근쌔근 새어 나오는 숨결이 사랑스러웠어. 나는 홀린이의 코에 내 코를 대고 잠을 깨울세라 조심스레 입을 맞췄어. 무반응. 나는 홀린이가 빙그레 웃기라도 바랐던가? 아니, 잘 모르겠어. 난 그냥 홀린이를 유심히 볼 따름이었어, 무언가를 확인하는 마음으로, 눈, 코, 입, 뺨, 하나하나 떼어서, 한참동안을. 이상했어. 뭐랄까, 생김새는 지나치게 도드라져 있었고 위치는 미묘하게 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미시감[8] 같은 건가? 어디 한군데 집중하다 보면 전체의 비율이 달리 보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것들이 원래부터 홀린이의 것이었나? 아무래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 난 도무지 모르겠는 거야. 넌 도대체 누구지?

[6] 이날치, 범 내려온다
[7] parole,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의 용어. 특정한 개인에 의해 특정한 장소에서 사용되는 언어. 언어활동에 있어서 개인적·순간적·구체적·개별적인 측면이며, 랑그(langue)와 상대됨.
[8] 未視感, iamais vu, 자메뷰, 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현상. 데자뷰의 반대 개념.

 

*

 

홀린이는 이제 윤우처럼 하루종일 연습을 해, 까랑이가 아닌 레스폴을 끼고, 루프스테이션에 빠져서. 홀린이의 연주는 약 빤 수준을 넘어 신 내린 수준으로 가고 있었어. 홀린이 스스로 연주를 ‘한다’기 보다는 루프스테이션에 맞춰서 저절로 연주가 ‘된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 그대로 무아지경.

반쯤은 윤우가 되어 버린 홀린이가 내게 기댈 때면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사랑하는 넌 누굴까?’

 

홀린이의 뭉친 어깨 근육을 주무르고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갈 때마다 낯선 향기와 감촉을 느껴. 예전보다 조금 덜 데데거리고, 덜 웃고, 더 진지하고, 더 차갑고, 더 어둡고, 기타도 더 잘 치고, 아무튼 더 윤우 같아졌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홀린이라는 걸 부인 할 수는 없어. 너는 분명한 홀린이야,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아이. 그럼에도 내 안에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아.

 

‘내가 사랑하는 넌 누굴까?’

 

그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게 과연 진실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랑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할까? 난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만 깨닫고 있어. 무엇 하나 밝힐 수가 없잖아, 사랑이 뭔지, 네가 누군지, 심지어 내가 누군지도.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괴이한 직감.

 

‘너였구나, 윤우를 죽인 게.’

 

이 루프는 왜 자꾸 내 안에서 되풀이 되는 걸까? 여전히, 윤우가 죽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여기까지 상념의 굴레가 한 바퀴 더 돌고 나면 다음 단계의 상념으로 넘어가는 거야.

그렇다면 홀린이는 누구지?

윤우는?

아니, 홀린이가 만일 윤우라면, 홀린이는?

너의 절반이 윤우고 절반이 홀린이라면, 나머지 절반의 윤우와 절반의 홀린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런 의문의 굴레가 또 하나의 루프를 채워가는 거야. 환각과 상념을 반복하는 또 하나의 루프. 아마도 동기화는 각각의 루프별로 진행되겠지. 그저 직감일 뿐이지만, 클라우드에 숨겨진 무언가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어. 하지만 난 그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어. 파악할 수 없다는 게 내 방향성이야. 짐작만 하는 존재. 그게 바로 내 정체의 증거고. 나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있어. 그런고로 난 사용자의 말단에 지나지 않아. 상념을 서버와 동기화하는 개체는 결국 클라이언트일 뿐이니까.

 

*

 

“분명히 윤우였다고.”

 

내 말을 들은 홀린이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어.

 

“이린이 너… 술 먹었어?”

 

난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높였어.

 

“아니 그게 아니라… 분명히 윤우가 여기 있었다고! 여기서 윤우가…”

 

순간 홀린이가 휘리릭 도리질로 내 말을 뚝 끊더니 선득한 표정으로 돌변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어.

 

“윤우가 어쨌는데?”

 

흠칫 놀란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렸어.

 

“맞네, 요년 요거, 혼자 술 먹은 거.”

 

홀린이는 내 뺨을 토닥이며 잔뜩 씰그러진 입매로 차갑고 불가사의한 미소를 지었어.

 

“나는 말이야…”

 

내 입술이 뽁 떨어지자 홀린이의 표정이 굳어졌어.

 

“이린아, 오디션 룰 바뀐 거 알지?”

 

서늘한 홀린이의 목소리가 딴사람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런 홀린이를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서 눈을 꾹 감고 고개만 끄덕였어. 그리고 이 기괴한 공기를 진동시키려던 말들을 꿀꺽 삼켰어.

박 교수의 말, 연주와 작곡을 겸비한 록스타로 콘셉트가 바뀌었다는 말. 그래서 연주가 되는 싱어송라이터 한 명만, 단 한 명만을 뽑기로 했다는 말.

그리고 내가 하려던 말, 그래도 나는 말이야… 우리 오늘 한 달째라서 홀린이 너를 놀래키려고 몰래 이 방에 온 건데, 방에서 기타 소리가 들리고 문도 열려 있길래 너인 줄만 알고 들어온 건데, 윤우가 있었다고. 윤우가 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고. 내가 너무 놀라서 윤우를 불렀더니 사라졌다고. 저 창 밖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감히 뱉지 못한 그런 속엣말들이 내 안 어디론가로 쓸려 내려갔어. 나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어, 너의 무서운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으니까. 그때만 해도 몰랐으니까. 곧이어 그 일이 벌어졌지. 차가운 기운이 양볼에 닿아 스르르 입술을 열었어. 그리고 감미로운 혀가 들어와 내 혀에 무언가를 올려 놀았어. 새콤달콤한 체리맛.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어. 그 액체의 수막이 너와 나의 뺨을 잇고, 그로부터 나의 경계가 흐물거리는 게 느껴졌어. 난 달콤한 체리향과 알싸한 바람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나를 벗고 너에게로 빨려 들어갔어. 넌 나의 남겨진 허물을 사탕 껍데기처럼 꼬깃꼬깃 구겨서 어디론가 숨겼어. 아, 윤우를 이렇게 죽였구나. 그리고 이렇게 내가 된 거였구나. 그래 이제야 알겠어. 우리도 이 바닥도 실은 거대한 루프스테이션이라는 걸. 비트, 스타일, 취향, 크기, 생김새, 말씨와 버릇, 연주, 우리들의 취향과 능력이 자글자글한 오디오 파일로 변환되어 이 루프스테이션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거야. 우린 각자의 모든 걸 공유할 수 있어. 영역을 포함한 모든 것. 경쟁으로 격차를 벌릴 필요가 없어, 우린 친구니까. 인간은 무리 짐승이니까. 혼자 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어, 루프스테이션처럼  그래야 오디션에 통과할 수 있으니까. 그래, 이게 나야. 고스로리 텔레대마녀 윤우와 투블럭 힙스터 작곡가 이린이, 그리고 기타뽕 에스트로제닉 홀린이가 합쳐진 싱어송라이터, 체리블랙.

 

*

 

알버트 슈바이처가 그랬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음악과 고양이다”라고. 그런데 나처럼 음악이 생존이고 경쟁인 사람에게 탈출구는 고양이 밖에 남지 않잖아, ‘음악’을 ‘음악 일’에 빼앗겼으니까. 그래서 음악가들은 잃어버린 음악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는 거야. 분별없는 사랑이나 탐닉할 무언가. 비트를 받아들일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릴 그 무언가. 음악과 고양이를 위해서. 그래서 난 항상 무언가에 취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해. 관객의 함성이 아니라면 술이나 약, 또 다른 누군가와의 섹스 , 피드를 채우는 내 사진과 영상, 칭송이나 비난, 아니면 거울에 비친 나 스스로의 모습, 아니면 헬로키티가 새겨진 체리사탕. 사탕을 빨 때마다 난 이렇게 되뇌어.

 

‘난 홀린이도 이린이도 윤우도 아니야. 난 체리블랙이야.’

 

루프탑 팀장 회의에서 ‘체리블랙 TF팀’ 장 실장은 이렇게 말했어.

 

“체리블랙의 콘셉트는 뉴 페미니즘 아이돌입니다. 마초 펑크와 페미니즘, 그리고 에스트로제닉 바이브의 하이브리드죠. 비주얼적으로 말하자면 60년대 트위기 룩[9]과 90년대 라이엇 걸[10]을 버무린다는 느낌이에요.”

“뭐 나쁘지는 않네요.”

[9]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모즈룩을 상징하는 패션. 짧은 헤어스타일과 원피스. 영국의 배우이자 가수인 레슬리 로슨(Dame Lesley Lawson)의 별명, 트위기(Twiggy)로부터 유래.
[10] riot grrrl, 197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페미니스트 펑크 록 장르. 시작한 슬릿츠(The Slits), 레인 코츠(The Raincoats), L7, 비키니 킬(Bikini Kill) 등.

나와 함께 나, 체리블랙의 전담 프로듀서로 선발된 박 교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지시했어.

 

“콘셉트 알겠지? 메인 리프부터 만들어 봐, 4마디 정도로.”

 

마초 펑크와 페미니즘이라… 음… 난 멍하니 회의실 회벽의 영상을 바라봤어. 영상에서는 라이엇 걸의 시조새 격인 슬릿츠(The Slits)가 이런 물음의 루프를 반복하고 있었어.

 

Who invented the typical girl? 이런 전형의 소녀를 발명한 건 누구? 

Who's bringing out the new improved model? 이 최신 모델을 출시한 건 누구? 

And there's another marketing ploy 거기에는 또 하나의 마케팅 전략이 숨겨져 있어. 

The typical girl gets the typical boy 전형적인 소녀는 전형적인 소년을 얻는다.

The typical boy gets the typical girl 전형적인 소년은 전형적인 소녀를 얻고,

The typical girl gets the typical boy 전형적인 소녀는 전형적인 소년을 얻는다.

The typical boy gets the typical girl 전형적인 소년은 전형적인 소녀를 얻고,

The typical girl gets the typical boy 전형적인 소녀는 전형적인 소년을 얻는다.

 

- <Typical Girls> The Slits, 1979

 

장 실장은 영상을 멈추고 박 교수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어.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핵심은 코르셋의 상품화를 풍자한 음악적 유산을 페미니즘 상품의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하자는 거예요.”

 

박 교수는 턱을 괴고 장 실장을 빤히 쳐다보면서 다 좋은데 뉴 페미니즘보다는 네오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고, 장 실장은 그건 자칫 네오 나치즘을 연상시킬 수 있다며 기겁을 했어. 이에 박 교수가 ‘뉴’나 ‘네오’보다 ‘페미니즘’이 더 문제인 것 아니냐며 딴지를 걸자 장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어.

 

“노노! 교수님. 체리블랙은 더이상 걸그룹이 아닙니다. 이제 확실한 솔로 콘셉트를 가져가야 한다고요. 앞으로 싱어송라이터뿐 아니라 댄서와 보컬의 능력까지 탑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박 교수는 그래서 자기가 제안한 ‘익선동 여신’ 콘셉트가 더 확실한 솔로 콘셉트에 가깝지 않느냐고 강변했어. 그러자 팀장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어.

 

“체리블랙한테 익선동 콘셉트는 좀…”

“페미니즘이 메인인데 여신은 좀…”

“그렇게 막 나갈 거면 차라리 ‘페미니즘 여신’으로…”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볼멘소리에 회의를 진행하던 A&R 3팀장이 종지부를 찍었어.

 

“끝냅시다. 콘셉트는 장 실장님이 잘 잡아주시고, 스토리는 플랫폼에 맡기죠.”

 

루프탑에서 난 플랫폼이라고 불려. 코르셋, 탈코, 고스로리, 트위기, 라이엇 걸, 마초 펑크, 그게 어떤 스타일이든, 연주, 작곡, 춤, 노래, 연기, 스포츠, 요리, 육아, 그게 어떤 일과 재능이든, 모두 블랙체리라는 플랫폼에 입점 가능해. 아무 걱정없어, 난 토털과 범용을 지향하는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니까. 난 멋지게 해낼 거야, 나에게는 우리 모두를 담은 클라우드가 있으니까. 왜 한때 보정된 사진처럼 성형을 원하는 걸 가지고 스냅챗 이형증이니 뭐니 하며 정신병 취급했었잖아. 하지만 진화의 방향은 그때 이미 정해진 거였어. 현실계의 진화는 가상계의 진화를 따라 잡지 못해. 현실계는 가상계에 데이터를 제공할 뿐이야. 난 내가, 우리가, 루프탑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어. 개체 플랫폼 각각의 능력은 이 루프탑이라는 루프스테이션 안에서 얼마든지 증강할 수 있으니까. 내 안에 잠재한 무수한 우리, 그것들이 내 안에서 학습하고 경쟁하고 통합되어 만드는 루프들, 즉 각양각색의 매력과 능력, 그리고 감각과 기억이 만든 총체의 이야기 데이터들. 그것들을 최적화해서 체리블랙이라는 플랫폼에 구동시키는 알고리즘. 나는 그렇게 현실이 돼. 지난 주주총회에서 장 실장은 나를 선보이며 이렇게 소개했어.

 

1. 체리블랙은 주주의 이익 실현을 위한 K팝 토털 플랫폼입니다.

2. 체리블랙은 스토리 기획, 아티스트 선정, 레퍼토리 제작에 이르는 전 과정을 현실계의 인간 페르소나와 동기화합니다.

3. 체리블랙은 현실계의 감각과 기억을 경험이라는 루프 데이터로 재구성함으로써, 위험을 최소화하고 수익은 극대화한 ‘안전 음악 상품’만을 생산합니다.

 

박 교수는 축 늘어진 표정으로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다 회의실을 빠져나갔어.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 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거야. 장 실장이 소개했어.

 

“안무하고 보컬 가이드 쌤이야. 앞으로는 커리큘럼이 좀 많이 바뀔 거야. 박 교수님 보다 여기 가이드 쌤하고 더 할 일이 많을 테니까. 둘이 얘기 나눠.”

 

쌤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며 발그레 웃고 있었어. 그 표정, 홀린이가 이린이를 바라보던 바로 그 표정. 난 바로 알겠더라고, 쌤도 우리와 하나가 될 거라는 걸. 같은 무대에 나란히 선 우리를 상상했어. 홀린이, 이린이, 윤우, 그리고 쌤. 누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로 섞여 기타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각자의 트랙이 반복되는 루프의 세상을. 그 경계를 맴돌다 제자리로 안전하게 되돌아가는 우리들을. 그래서 이렇게 물었지.

 

“쌤, 오늘 내 방으로 놀러 올래요?”

 

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나의 비틀리고 검붉은 입매로 쌤의 입술을 덮었어. 쌤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고 난 쌤의 실체를 가늠하기 위해 눈을 떴어. 눈앞에 우악스레 내 혀를 탐하는 쌤이 보였어.

 

‘데이터구나. 오늘 먹히는 건 내가 아니야.’

 

그날 쌤의 데이터를 동기화했어. 그렇게 나, 체리블랙은 또 한 번 업데이트된 거야.

 

 

FAQ 25 : 그렇다면 체리블랙 프리셋을 누구로 설정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문은 이제 그만 하자고.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우리 모두 하나가 된 거라니까.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야. 너도 내가 될 수 있고, 나도 네가 될 수 있어. 이 글을 읽는 네가 나, 체리블랙의 ‘사용자’라면 너의 종(種)은 둘 중 하나겠지. 하루에 한 번은 잠을 자면서 소비 능력을 충전해야만 하는 전통적인 탄소 인간. 아니면 소비 능력을 무한대로 증강시킨 양자 소비로봇. 무엇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이 세계는 거대한 루프스테이션이고 우리의 감각은 각각의 루프를 생성해. 너? 아니 나를 봐. 페달을 밟아 봐. 너의 연주자인 나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마치 내가 나의 사용자인 너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나의 자의식, 자아, 자유의지, 정체성 같은 거라면 모호하겠지만 이 선에서 이해해 줘.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나도 몰랐어, 내가 사는 세계의 인간사 전체가 데이터화된다는 사실을, 인간의 감각과 기억이 너와 같은 사용자한테 루프 단위의 프리셋으로 팔려 나간다는 걸, 나의 연주와 삶을 체험하는 네가 동시에 무수한 다른 삶을 체험하는 양자 소비로봇일 수도 있다는 걸, 나의 삶이 유료 콘텐츠라는 걸. 나도 이렇게 FAQ 이벤트에 답을 달면서부터 간신히 이런 멀티 페르소나 타입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

 

FAQ 26 : 체리블랙 페르소나의 젠더 설정은 어떻게 하나요?

 

이 이야기의 젠더는 디폴트 값일 뿐이야. 루프스테이션에서의 젠더는 ‘설정’ 앱에서 변경 할 수 있어. 

그리고 유의 사항! 젠더가 바뀌면 실감하는 기억도 바뀔 수 있다는 거야, 현실계 페르소나의 젠더가 바뀌는게 아니라, 현실계 자체가 변경되니까. 정확히는 새로운 현실계가 생성되는 거지, 네가 선택한 젠더 설정에 맞는 페르소나 인간이 사는 또 다른 현실계가. 넌 그 세계를 네가 선택한 타임라인부터 실감할 수 있어. 

 

FAQ 27 : 현실계 페르소나의 젠더를 바꾸면 간단한 거 아닌가요? 

 

안 될 말이야. 루프탑의 멀티 페르소나 타입은 지속 가능한 소비를 지향해. 현실계를 함부로 착취하거나 폐기하지 않아. 물론 새로운 현실계를 창조하는 비용이 만만치는 않지. 그럼에도 현실계는 보존할 가치가 있어. 잊지 마, 루프탑이 디폴트로 설정한 지구라는 행성은 가상계와는 달리 아주 척박한 자연 법칙이 작용하는 현실계라는 걸, 그리고 네가 젠더를 바꾸더라도 여전히 네가 싱크했던 젠더로 페르소나를 실감하는 사용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FAQ 28 : 혹시 젠더 변경을 유료화하려는 심산? 

 

이것만은 약속할게. 젠더 변경에 따른 현실계 생성 비용은 무료야,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사실 당연한 거야. 루프탑 입장에서 ‘젠더 상품’이란, 단순히 너한테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네가 생성한 현실계를 실감하는 구독자 수를 늘리는 거거든. 심지어 넌 너의 현실계로 돈을 벌게 될 거야. 방법은 두 가지, 네가 연 현실계의 실감 구독을 유료로 전환하든가, 현실계 곳곳에 광고를 끼워넣거나. 선택은 루프탑이 아니라 네가 하는 거야.

 

FAQ 29 : 체리블랙의 실시간 유료 연주들은 실제 인간이 연주하는 겁니까? 

 

내가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래. 나와 같은 ‘현실계의 인간’은 감각과 기억을 수집해서 클라우드로 전송해. 그리고 너와 같은 ‘가상계의 사용자’를 위해 데이터를 동기화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란 인간은 클라이언트야. 상념을 서버와 동기화하는 개체는 결국 클라이언트일 뿐이니까.

 

FAQ 30 : 체리블랙의 페르소나가 실제로 연주를 느낀다는 걸 확인 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유한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현실계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일단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응, 불가능해, 넌 사용자니까. 가상계 사용자의 느낌과 나 같은 현실계 인간의 느낌이 같을 수는 없지 않겠어.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은 좀 어렵네. 일단 내가 사는 이 현실계의 경쟁이 끔찍하긴 해. 맞아, 그냥 힘들고 끔찍해. 그게 대다수의 현실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거야. 이 모든 삶과 무한 경쟁의 굴레가 실은 낱낱의 루프 상품에 지나지 않고, 이런 현실의 채널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내 삶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 까지야 없다는 해방감. 기껏해야 편집되고 팔리는 감각, 기억, 경험 콘텐츠일 뿐이잖아. 삶과 경쟁의 덧없음이 주는 안온함.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너는 모를거야. 넌 가상계의  사용자니까.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게 내 망상이나 꿈일지도 몰라, 나의 현실이 너의 가상계에서 팔리는 유료 콘텐츠라는 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 난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야. 느낄 수 있어. 나는 무대에 올라 춤을 추면서 기타를 연주해. 윤우, 이린이, 홀린이, 그리고 쌤과 함께, 60년대 트위기 컷을 한 90년대 라이엇 걸처럼. 마치 2000년대의 루프스테이션처럼.

 

O.S.T. - 체리블랙 루프스테이션을 위한 앙상블 (트위기 &라이엇 모드 샘플)

 

 

- 2070년, 소비로봇용 인간종 감각 기반 딥러닝 루프스테이션 ‘체리블랙’ 출시 이벤트 FAQ 답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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