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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음에서 우러나는

2020.11.08 18:2611.08

밥은 안 먹어요. 냄새를 맡는데, 그냥 그렇게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불러요.

- <후미족>, 모옌作

 

3번 출구의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나면 높다란 빌딩의 양수림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역전의 유동인구를 노리고 들어선 가게들과 줄지어 냄새로 호객하는 음식점들, 카페들. 그리고 그 위로 층층이 쌓인 병원과 상점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빼곡한 아파트들. 그리고 가로등과 전신주. 사람들이 발로 가득 메운 길바닥과 마찬가지로 하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야트막한 산을 깎아 만든 차도 또한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이따금 울리는 경적과 엔진의 배기음이, 사람들의 목소리와 음악이 새들의 울음을 두텁게 가린다. 초행자는 그 울창한 숲에서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낮의 풍경일 뿐. 일몰과 함께 새로운 분위기와 활력이 찾아드는 거리는 초행자들 또한 익숙함의 발걸음을 떼게 만든다. 서서히 문을 닫고 불이 꺼지는 건물들이 늘어가고 차로에는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밝힐 때, 사람들은 건물들 너머로 몰려든다. 불 꺼진 건물들 뒤의 골목으로, 골목으로. 언제나 이정표처럼 주인 없는 포장마차가 그 입구에 서 있다. 포장마차를 등지고 가만히 서면, 저 멀리에 이끼나 고사리처럼 웅크린 복층 주택과 낮은 빌라들이 보인다. 골목길 사이사이에는 24시간 편의점들이 흰 불을 밝힌다. 그리고, 똑같은 듯 다른 수많은 간판이 눈을 어지럽힌다. 술집들, 술집들, 그리고 술집들.

그날 3번 출구를 나와 붕어빵을 사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보았던 겨울의 골목 또한 그런 모습이었다. 어깨에 힘 빠져 울상인 사람들은 술집의 문을 열고 하나씩 들어가고, 한껏 취기가 오른 영혼들은 서로 비틀거리는 모습만 보고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길을 걷는 모두가 그랬다. 모두들 서로에게 무어라 말하고 홀로 중얼댔지만, 그 말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침묵. 그래, 키노의 음악을 평생 배운 적 없는 러시아어로 고함치듯 흥얼대는 사람 옆에서 한여름 월드컵 경기장에 온 듯 대표팀 응원가를 외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리는 고요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냄새였다. 그저 알딸딸하게 취할 듯한 알코올의 내음뿐만이 아니라, 캄차트카의 물냄새와 상암의 땀냄새와 온갖 잡다한 영광과 희망의 냄새가 골목길에 자욱했다.

그 흔들리는 길의 어딘가에는 서점이 있다. 두 술집 사이에 끼여 어색하게, 그러나 적절하게 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간판이 있다. 서점. 네온사인으로도, 전구로도 빛나지 않는 두 글자가 파란 바탕에 흰색으로 쓰여 있다. 과연 그렇군. 어느 서점을 찾아가면 되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그냥 서점을 찾아가라는 불친절한 대답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누구도 잘못 찾아갈 수는 없었다. 찾지 못할 수도 없고 엉뚱한 곳에 갈 리도 없었다. 이백 미터를 더 걷더라도, 이백 미터를 다시 돌아가더라도 서점이 있을 리 없는 거리에 그렇게 서점이 있었다.

서점의 통로는 입구만큼이나 좁았다. 문을 바로 열면 우측에는 화장실이 좌측에는 빼곡하게 책이 들어찬 책장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하게, 화장실과 입구라고 쓰인 두 명패가 각각 붙어 있었다. 카운터에는 불룩한 안경을 쓴 서점 주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저기, 차를 마시러 왔는데요?”

주인은 느릿하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책에 고정한 채였다.

“전공서적 칸으로 가 봐요. 쭉 들어가서 오른쪽이요.”

서점 내부는 미로와 같았다. 쭉 들어가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지만 겨우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책장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 책장을 우회하니, 길이 세 갈래가 나 있었다. 하나를 골라 들어가기를 몇 걸음.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사방이 꽉 막혀 있어 답답했다. 책장을 넘어갈 수도, 그렇다고 밀어 넘어뜨릴 수도 없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서 돌아나가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었을 즈음에, 익숙하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Neuroscience. 본과 2학년 내내 끼고 다녔던 녀석이 먼지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하로 빼곡한 의학 전문 서적과 그 앞에 등을 내미는 공학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문이 있었다. 하늘빛 커튼. 보랏빛 네온사인. 카페 센티멘탈. 굳게 닫힌 문틈으로 향긋한 내음이 흘러나왔다.

그곳은 밝았다. 서점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건물 속의 건물과 같은 구조인데도 창이 벽마다 트여 있었다. 고층의 건물에 둘러싸여 있으니 들어올 빛이 없을 텐데도 전등을 켠 듯 환했다. 볕이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칸막이가 있었고, 칸막이마다 테이블이 기댔다. 그렇게 네 개의 둥그런 테이블과 여섯 개의 1인용 탁자가 저마다의 각도로 빛을 받으며 휴식하고 있었다.

카페 센티멘탈. 그곳은 여느 카페와 다르다. 역세권의 대로변을 떡하니 차지하고 제 이름으로 행인을 호객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와도, 어느 지방 국도에 조망 좋은 곳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무명의 카페와도 다르다. 크기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도회의 잿빛뿐이다. 그곳의 디저트는 ‘수제’라는 관사가 붙어있다고는 해도 여타 카페의 케이크나 쿠키와 비교하자면 별 볼 일 없다. 그런 와중에 가격도 그다지 싸지 않다. 맛나고 달콤한 디저트와 편안한 오후의 휴식을 원한다면 카페 센티멘탈은 추천할 만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곳에 돌아오는가. 그런데도 왜 나는 이곳을 찾는가. 이곳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저 위치나 독특한 구조만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음료를 판다. 이곳의 음료는 특별하다.

현주 씨는 아이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아이는 맑게 웃었다. 차가 참 맛있었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의 낯은 흐렸다. 현주 씨가 카드를 받아 계산할 때, 아이는 창가의 화분을 구경했다. 한 줄기의 푸른 식물은 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듯이 유리문에 바짝 붙어 자랐다. 이건 뭐예요? 현주 씨는 그렇게 대답했다. 글쎄. 아줌마도 잘 몰라. 아이는, 그게 뭐야, 새실새실 웃으며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어른 둘은 서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뭐 드실래요?”

“카페가 참 예쁘네요.”

“불평은 못 하죠. 세 들어 사는 처지에.”

현주 씨는 메뉴판을 내밀었다. 디저트류와 음료와 아이스크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마시러 온 것은 그 목록에 없었다. 나는 말없이 명함을 내밀었다. 현주 씨의 눈빛은 이채를 띠었다.

“동종 업계 종사자네요?”

“의사들도 자주 오나요?”

현주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워낙 바쁘니까. 그리고 잘 안 찾아와요. 공부만 해서 그런지 이런 데 있는 줄도 모르죠.”

“저는 의사 추천으로 왔는데요.”

“신경과잖아요. 저도 그거 때려치우고 이거 하는 건데요.”

“좋습니까, 이 일?”

“질문은 보통 제가 하는 건데.”

“그럼 물어봐요.”

“아까 물어봤잖아요. 뭐 드실래요?”

나는 의료용 침대 위에 엎드렸다. 이마 받침대는 푹신했다. 그렇게 있으니 바닥의 무늬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름모를 머금은 정사각의 타일이 반복됐다. 병원 수술실의 바닥 같았다.

“자, 그럼 진짜로 시작할게요.”

현주 씨는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나 감정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일상적으로 회상하거나 감정을 느낄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질 거라고. 인위적인 것, 인공적인 것처럼 느껴질 거라고.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걸 지적하자 현주 씨는 그렇게 말했다.

“당해보는 건 처음이잖아요.”

정말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현주 씨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현주 씨의 눈에는 어떤 것이 보일 것인지 비교적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거의 매일 보던 것이었으니까. 나의 기억 속에서, 환자들은 내게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그러면 간호사는 뒷머리에 미리 표시된 여섯 곳에 마취제를 놓았다. 그리고 3분 뒤, 나는 환자의 목 뒤에 가로로 상처를 낸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살갗을 걷어올린다. 두개골의 간격을 따라서 아주 천천히. 두피가 모두 벗겨지면 톱으로 두개골을 잘라낸다. 대뇌가 모두 드러날 만큼 큼직하게 잘라낸다. 그러면서도 환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이미 두개골이 열렸다는 것을 모르는 환자로서는 그 시간이 지루할 뿐이니. 그때는 별 이야기를 다 쏟아낸다. 환자 자신과도, 의사인 우리와도 완전히 무관한 남들의 이야기를. 그러다 한 마디에 갑자기 숙연해진다. 그럼 시작합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현주 씨도 소뇌부터 빛을 비췄다. 모두가 그렇게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배에게 지적당한 대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상상한 느낌과 직접 겪는 것은 달랐다. 항상 이 단계에서 당황하고는 하던 환자들이 떠올랐다.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정상이니 너무 당황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그때 깨달았다. 여태껏 겪은 어느 어지러움보다도 어지러웠으니.

현주 씨는 소뇌의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연수와 교뇌를 타고 상승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뇌에서 환하게 빛나는 부분들이 많아졌다. 빛이 생성한 신호가 신경을 타고 상승했다. 그리고 그 신호는 각 뇌엽(腦葉)세포의 색깔로 빛났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들이 다채로이 섞이며 환자들의 뒷머리에서 퍼져나왔다. 그리고 뇌주(腦株)면 위에 또 조그맣게 결정화된 신경 축삭이 자라났다. 역시 주신경 이상으로 다채로운 색이었다. 겨우살이가 피어나듯이, 혹은 가지가 솟아나듯이 뇌는 그런 단순한 자극으로도 자라났다. 바닥이 서서히 환해지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마름모의 면들을 메웠다. 시상을 지나고 있는지, 뇌량에 벌써 닿은 건지, 아니면 후두엽을 건드리기 시작한 건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 반응검사는 끝났어요. 그 목소리가 흐릿했다. 현주 씨의 목소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후두엽부터 시작할게요.

“왜 어떤 기억이냐고 물어보지 않죠?”

현주 씨가 내어놓은 차에서는 기억이 아닌 향기가 났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여태 그렇게 했잖아요. 아닌가요?”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누구나 그래요. 처음에는 안 그렇죠. 나도 마찬가지였고.”

정신장애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는 오랜 시간 의학계의 화두였다. 상담을 통한 트라우마 해소가 가능하다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현병 같은 신경증에는 약물치료가 필요하다는 입장에 동의했으나, PTSD나 정도가 강하지 않은 강박증은 대화와 상담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약물치료에도 반드시 사회심리적인 요인들이 치료의 한 부분으로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상담심리학과 임상심리학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외과적인 해법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두개골을 손쉽게 여닫는 수술법이 개발되면서 실제 살아있는 사람의 뇌를 맨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절제술로 시작했다. 중증 조현병 환자들의 뇌에 광자극을 줌으로써 그들이 어떤 부위가 활성되었을 때 발작을 일으키고 환상을 보는지, 환청을 듣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 가지를 잘라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뇌엽세포가 자랄 수 있도록 자외선을 쬐였다. 85퍼센트 가량의 환자들이 수술 이후 급격한 차도를 보였으며, 7퍼센트 가량의 환자들은 환각이 확연히 줄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문제는 서서히 나타났다. 첫 수술이 마무리되고 3년 뒤, 환자들이 기억이 사라졌다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일상의 사소한 요소들이나 과거의 소소한 기억들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수술이 성공적이라 판단되었던 환자들마저도.

“아까 여자애 기억나요? 들어오자마자 봤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애를 만졌어요. 애는 아빠가 뭘 하는지도 몰랐죠. 병원에서는 삭제 수술을 포기했어요. 위험하기도 했고 자꾸 기억을 자극하면 오래 강하게 남으니까.”

현주 씨는 차를 마시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시상이랑 편도체가 시들어 있었어요. 거뭇하게 변해 있었죠. 그 부분을 중심을 뇌엽세포를 땄어요.”

환자들이 기억을 잃지 않도록 수술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의학자들은 뜻밖의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기억을 잃은 환자들에게 다시 기억을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심하던 학자들이 원하는 기억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바로 제거된 뇌엽세포와 가지들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술이 끝난 환자들에게 아무런 처리도 되지 않은 뇌엽세포를 먹였다. 그러나 결정화된 뇌엽세포는 침에 잘 녹지 않아서 입을 다칠 위험이 컸고, 흡수율도 떨어졌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는 환자는 극히 적었다. 곧, 기억 성분만을 추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었다. 의학자들은 물론이고,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이 이 연구에 참여했다. 끓이기, 굽기, 얼리기, 태우기, 중탕하기, 심지어는 뇌엽세포를 양분으로 자란 식물을 먹게 하는 실험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우러냈다.

“처음 와서 차를 마셨을 때, 한 잔 더 달랬어요. 참 맛있다고.”

우러낸 뇌엽세포는 흡수율과 재생률 외에도 부가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우려낸 물을 마신 환자들은 재생된 기억을 오래된 기억으로 받아들였다. 우려내는 과정의 변성이 영향을 끼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재흡수 과정 자체가 기억의 강도를 흐릿하게 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대체로 환자들은 재생된 기억을 더 오래된 것, 더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 애 아빠도 수술을 받았겠군요.”

“사흘 전에요. 사흘 전에 받았대요. 대수술이었겠죠.”

“그랬겠죠.”

연쇄살인범의 뇌엽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재섭취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재섭취 또한 아주 세심하게 이뤄진다. 사실상의 재활이자 교정인 셈이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수술은 더욱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담당의는 광자극을 줄 때마다 수감자에게 계속 물어야 한다. 거의 밀리미터 단위로 자극을 주는 위치를 바꿔가면서. 그것도 사건과 연관된 기억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기억인지까지도. 그 연쇄살인범은 자기가 죽였다고 확정판결이 난 네 건에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피해자를 물색했는지, 어떻게 그들을 꼬아냈는지, 어떻게 그들을 죽이고, 어떻게 사체를 유기했는지, 그때 뭘 느꼈는지 세세히 보고했다. 제대로 수술이 이뤄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회한 검사도, 선배를 돕던 우리도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장장 여섯 시간 반이 걸린 수술이 마무리되고 나서 선배가 그랬다. 그냥 대뇌를 잘라버리고 싶었다고. 선배는 그것조차도 인도적인 거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그때는 나도 그 말에 동의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선배도 생각이 달라졌고. 그건 인도적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능력의 문제였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만, 그 애는 그나마 나은 편이죠. 정도가 심한 아이들은 그걸 끝까지 끌고 가야 하니까. 적어도 그 일을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에요. 그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요. 차라리 그냥 잘라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른 걸로 채우면 되니까.”

“특이한 케이스 두 개를 맡은 적이 있어요. 하나는 알츠하이머 환자였죠. 머리를 열어보니 두개골 안에 부스러기가 쌓였더군요. 뇌가 완전히 시들어서 잎을 떨구고 있었죠. 겨울나무처럼. 묻고 자시고 할 게 없었어요. 낙엽을 전부 모아서 그나마 추출할 기억이 남아있는 것들을 분리했어요. 그게 가장 오래 걸렸죠. 거의 열두 시간을 현미경만 봤던 것 같아요. 하나 찾으면 일단 냉동고에 얼리고, 또 하나 찾으면 얼리고. 우리가 빠르면 빠를수록 환자가 더 많은 걸 기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걸 하고 막 추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환자가 심정지가 왔다는 얘길 들었죠. 그렇게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며칠 뒤에 돌아가셨어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죠. 헛짓 한 번 제대로 했구나.”

“다른 케이스는요?”

“기억중독자였어요. 중증이었죠.”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이후로, 우리 병원에서 기억중독자는 기억 중독을 앓는 환자 집단이 아니라 그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렸으니까. 기억중독자는 확실히 중증이었다. 그의 뇌는 생생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시들어버린 뇌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거라고는 수술실 타일뿐일 텐데도 그의 뇌는 황홀하게 빛났다. 그는 십수 가지의 인생을, 순간을 바로 지금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광자극을 줄 때마다 그는 자기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30대 청년인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미국에서 직관했으며, 광복적 당일 만세를 불렀다. 동시에, 그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드리블로 상대 선수를 제쳤던 포르투갈인 축구선수였고, 그 경기를 관람하던 초등학생이었다. 그는 우주정거장에서 롤러코스터를 탔고,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베이스를 연주했다. 네 권의 소설을 뒤섞어서 기억하고 있었으며, 찰리 채플린이 감독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한 무성 영화의 대사를 한 줄도 빠짐없이 읊었다. 심지어 그는 출산한 기억도 있었다. 어느 병원에서 얼마나 오래 산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아이를 낳았는지도 세세히 묘사했다. 우리는 질려버렸다.

“의술은 돈이 되죠. 그럴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의술은 돈이에요, 결국. 항상 그래왔어요. 이것도 마찬가지죠. 더 좋은 기억을 합성해서 이름을 붙이고, 가격표를 붙이고. 행복한 기억이 없더라도 괜찮죠, 이젠. 마시면 되니까. 라이브 에이드를 못 본 게 한이라고? 그러면 85년 여름을 마셔. 우주에 가 보고 싶다고? 세계 26개국 우주인들의 기억이 생생하게 들어 있는 미스터 블루 스카이를 추천하지. 이런 식인 거에요.”

기억중독자는 자기가 왜 그토록 기억을 열심히 마셨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원래 기억이 무엇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애초에 기억음료 없이는 다른 기억을 만들어낼 수도 없을 만큼 악화된 사람이었다. 보호자 또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기억중독자가 결혼하고는 만나지 않다가 그즈음에 어느 술집에서 처음 마주쳤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기억중독자에게 남은 선택지란 뻔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뇌를 통째로 잘라 버리거나 하던 대로 기억을 마시면서 살아가거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주 씨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기억음료를 만들 때요, 뭐가 가장 맛있는지 연구를 했을 거잖아요. 여러 기억 추출물을 놓고 맛, 색상, 향기 이런 걸 검사했대요. 그리고 사람들 데려다놓고 물어봤죠. 뭐가 가장 맛있게 생겼는지, 뭐가 가장 향기가 좋은지, 뭘 가장 먼저 먹어보고 싶고, 뭘 또 먹어보고 싶은지. 맛까지 다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좋은 기억을 골랐어요. 행복감을 주거나 열광적인 순간에 있는 기억을. 그런데 가장 향이 좋은, 가장 맛보고 싶은 기억은 달랐어요. 고통을 겪는 기억이었죠. 다치거나 넘어지는 건 당연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리거나 불에 타거나, 심지어는 죽는 기억들 말이에요. 그러니까 실험 참가자들 거의 전부가 처음 했던 선택을 바꾼 거죠. 그 실험을 비교적 최근에 다시 했어요. 이번에는 뇌파-광 측정기를 써서. 그랬더니 결과가 특이했죠.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맛보고 나서도 여전히 그 기억을 마시고 싶어했어요. 말로는 아닌 척했지만. 그래서 카페에서는 음료를 만들 때 좋은 기억만 넣지 않아요. 꼭 고통이나 통증이 들어간 기억을 첨가하죠.”

“우리는 자발적으로 고통을 찾는 생물이라는 거군요.”

현주 씨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는 생물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잘라내지 말라는 겁니까?”

“잘라내기 전에는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인지 말도 안 했는데요?”

현주 씨는 냉장고로 가더니 자그마한 병을 하나 가지고 왔다. 한 손에 감싸질 정도로 작은 병 안에는 파란 뇌엽세포 결정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아직까지도 써도 될 만큼 맑고 푸르렀다.

“이게 내 기억이에요.”

“어떤 기억입니까?”

“그걸 몰라요. 다 빼버렸으니까.”

“왜 이걸 보여주는 겁니까?”

“밤마다 이걸 한 번씩 보고 자요. 밤이 되면 혼자 남고, 혼자 남으면 그런 욕구가 불쑥불쑥 솟아오르죠. 오늘은 마셔볼까 하는.”

“그런데 왜 안 마셨습니까?”

“무서워서요. 어떤 기억인지 궁금한데, 알아버리면 또 그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 두렵고 또 잘라내고 싶을까 무서워서요.”

“좋은 기억이라면요?”

“잘라내기로 결심한 기억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

나는 예의 문 앞에 서서 뒷머리를 살짝 만졌다. 칼집이 난 부분은 생각 이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의 하늘색 커튼이 네온사인 위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카페 센티멘탈. 나는 다시 한참을 헤맸다. 어떻게 도착했는지 몰랐으니 어떻게 나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죽 가서 왼쪽으로 꺽으면 된다는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허리를 굽히고 책을 읽고 있는 서점 주인의 등과 마주칠 수 있었다.

해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골목은 저마다의 조명을 뽐내는 술집들과 간판으로 환했다. 그리고 행복과 희망과 열광과 열정의 냄새가 자욱했다. 나는 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소매에서 풍기는 향을 발아들였다.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맡았던, 카페 안에 가득했던 바로 그 내음이었다.

“이건 뭐죠?”

“맛있죠?”

“괜찮네요.”

“율무차에요. 율무를 빻은 다음 물에다 탄 거죠. 설탕도 넣고.”

현주 씨는 미소지었다.

“다음에 또 마시러 와요. 이건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카페 센티멘탈. 술집들 사이의 서점 안에 숨어있는 작은 카페. 주인조차도 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카페. 디저트는 별로인 카페.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음료를 판다. 이곳의 음료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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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음에서 우러나는 붉은파랑 2020.11.08 0
2643 단편 안개 속의 피사체 라그린네 2020.11.08 0
2642 단편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계수 2020.11.03 0
2641 단편 피는 물보다 진하다 미음 2020.10.31 4
2640 단편 징악 투인 2020.10.30 0
2639 단편 복잡한 열의 히로 2020.10.27 1
2638 단편 낙타만이 알고 있다 미예 2020.10.26 0
2637 단편 벽간소음상호결별부 이사구 2020.10.26 0
2636 단편 드라큘라 ㄱㅎㅇ 2020.10.21 0
2635 단편 무쇠인형의 복수 - 강철협객전 두영 2020.10.20 0
2634 단편 21세기 뮤지컬 로봇이 23세기까지 살아남은 것에 대하여 미믹응가 2020.10.20 0
2633 단편 아빠의 고향 키미기미 2020.10.20 0
2632 단편 이제 미래는 없다 붉은파랑 2020.10.17 0
2631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에필로그 키미기미 2020.10.1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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