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INA - 거짓말쟁이들

2020.12.07 17:4512.07

다음날, 날이 밝고 베스와 시장을 돌아다녔다. 생선 몇 마리와 과일을 산 그녀는 시장 가운데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을 밖과 여관이 있는 곳을 번갈아 가리켰다. 나는 여관을 가리켰다. 그녀가 나를 지나쳐 죽 걸어간다. 끼니를 해결하고 방에 앉아있으니 지루함이 몰려왔다. 베스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나른하게 살랑거린다.

 

[그가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베스가 나를 흘깃 보더니 다시 감았다. 나는 심술이 났다.

 

[간단한 대답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게 아무 말도 안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탁.

 

고개를 홱 돌려 보았다. 그녀가 벽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시험 삼아 질문을 던져 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베스인가요?]

 

탁.

 

[그럼 당신은 날 지켜주는 건가요?]

 

탁.

 

[그가 우릴 찾아올까요?]

 

탁.

 

[어떻게요?]

 

베스는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 대답은 오직 네와 아니오, 로만 답할 수 있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저는 잡혀 온 건가요?]

 

베스는 늘 짓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을 보았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였지만 답하지 않는다.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산책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같이 가주시겠어요?]

 

그녀가 눈을 굴린다. 나른하게 누워있던 널찍한 선반 위로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곧바로 문을 열어 나갔다. 그녀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고양이 인간에게로 다가가 나를 가리키며 상대의 손바닥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고양이 인간은 천진한 얼굴로 반가운 듯 반대 손을 흔들었다. 베스가 몸을 비키고 고양이 인간이 나에게로 와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인간.]

[나는 캐시 슈가. 이름을 알려줘.]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나예요.]

 

[이나. 좋은 이름이야.]

 

그가 나의 손을 덥석 잡고는 여관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베스를 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른하게 서있었다.

 

캐시는 나를 숲으로 끌어 주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어 겁이나 물었다.

 

[왜, 이쪽으로 가는 건가요?]

 

[그야.]

 

캐시는 고개를 올리며 갈색 줄무늬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쁜 곳이 거기 있으니까.]

 

[네?]

 

캐시는 내 팔을 붙잡아 걸음을 재촉했다. 나뭇잎의 푸른색들 사이로 향긋한 향이 풍겨왔다.

 

[여기야!]

 

색색의 꽃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처음 보는 꽃들이 대부분이었다. 빨간 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잎들과 하얀 줄기를 가진 빨간색 꽃, 다른 꽃에 엉겨 붙어 사는 꽃과 잎 하나 없이 솜털만 있는 꽃도 있었다. 캐시는 나를 보며 꽃들이 피어난 숲속의 작은 정원을 거닐었다.

 

[예쁘지?]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작지만 색들이 꽉 찬 정원에 넋이 빠져 입을 벌린 채 구경하였다. 나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슬쩍 다가와 두 손을 맞잡는다. 그가 빙글 돌았고 나도 그를 따라 발을 맞추었다. 우리는 꽃밭 위에서 함께 돌고 돌았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오른 쪽으로.

 

[저기, 저건.]

 

나는 캐시의 손을 뿌리쳐 뒷걸음질 쳤다. 어제 식인 애벌레를 만난 작은 보라색 굴이 꽃밭 밖에서 천천히 땅 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캐시의 뒤로 몸을 숨겼다. 캐시는 보란 듯 폴짝 뛰며 보라색 굴 위로 올라탔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위험해요!]

 

캐시는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보라색 굴 위로 폴짝폴짝 재주를 넘었다. 그가 외친다.

 

[이건 땅벌레라고 하는 거야.]

 

[애벌레가 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랍니다, 그냥 평화로운 생명체랍니다.]

 

캐시의 장난에 몸이 굳은 듯 보라색 생명체는 땅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높이 뛰어올라 내 앞으로 착지 하였다. 내 손을 끌어 그 굴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안돼요, 싫어요!]

 

그가 나를 잡아 당겼다. 굴속으로 함께 떨어진 나는 두 눈을 꼭 감아 몸을 움츠렸다. 고요한 침묵으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굴속에는 위험한 애벌레나 사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어둠과 부드러운 털 뭉치만이 손에 잡혔다. 그리고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귓가로 퍼진다.

 

[땅벌레는 아주 작게 태어나서 엄청 크게 자라.]

 

어둠 속으로 캐시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나는 손에 잡힌 털 뭉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꼭 손에 잡아 쥐었다.

 

[여행객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오거나.]

[집을 잃은 종족들이 둥지를 틀기 위해 살기도 하지.]

[무서워 할 녀석이 아니야.]

 

나는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얼굴을 찡그렸다.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서 나가요.]

 

톡톡.

 

캐시가 땅벌레의 껍질 안을 두드리자 작은 생명체들이 점점이 빛을 내며 주위를 맴돌았다. 하얀색과 파란색이 섞여 날고 있었다. 발 아래로 흙을 갉아 먹으며 땅 속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캐시가 노래를 부른다.

 

빛으로 가는 그대여.

꿈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천국은 없지만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어둠으로 가는 그대여.

꿈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천국은 없지만

지옥 역시 존재하지 않죠.

 

가고 있다면 불러요.

마녀가 없는 곳으로

슬픔이 없는 곳으로

 

[미안해. 역시 처음에는 무서울려나?]

 

캐시의 얼굴이 작은 벌레들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굳어있는 표정을 보이기 싫어 다리를 그러모았다. 내 행동에 당황을 했는지 캐시는 빠르게 말을 더듬었다.

 

[여긴 내가 자주 오는 곳이야.]

[혼자 있기에도 좋고 또..]

 

말을 뜸들이며 분위기를 풀려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든다. 꼬리가 부자연스럽게 경직된다. 나의 반응에 긴장을 한 걸까.

 

[예쁘거든.]

 

나는 나와 캐시만이 있는 작은 밤의 가운데로 얌전히 숨을 골랐다. 하얀색과 푸른색의 빛을 뿜어내는 벌레들이 느리지만 고요하게 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노래 다시 불러줘요.]

 

[물론이지.]

 

그가 노래를 부른다. 복슬복슬한 그의 솜뭉치 같은 손을 잡고 있으니 잠이 올 것 같은 편안함이 밀려왔다.

 

[너희는 이 벌레를 반딧불이라고 부른다며.]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그는 금방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듯 내 눈을 피하며 딴소리를 시작하였다.

 

[여기 음식은 어때, 입맛에 맞아?]

[자는 건 역시 좋지?]

[그 여관이 이래봬도 가장 인기 있는..]

 

[당신이 어떻게 반딧불이를 알죠?]

 

아차 싶은 얼굴. 나의 간절한 눈동자에 그는 아무도 없는 땅벌레의 좁은 어둠 사이로 목소리를 죽였다.

 

[그냥 알아.]

 

눈을 부라렸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 아니면 저 수인들은 다 알고 있는 걸까.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너처럼 잡혀온 노예이지.

 

부랑자로 만난 소녀의 말. 길을 잃었던 숲에서 그 아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었다. 복슬복슬한 털을 한 움큼 세게 쥐었다. 내 손아귀에 아팠는지 캐시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가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비밀이야, 정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리 둘만 있는 공간에서 자꾸 뒤를 훔쳐다 보았다. 누군가가 들을 것을 경계라도 하는 양.

 

[인간을 만나서 너처럼 함께 놀았던 적이 있어.]

[그게 다야.]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죠?]

 

내 질문에 캐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입방정을 저주라도 하듯이. 괜한 소풍에 후회라도 하듯이.

 

[사라졌어.]

 

다음 말을 꺼내야 할까. 왜 사라졌는지 물어야 할까.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가는 거야?]

 

내 뒤를 애처롭게 따라오며 캐시는 주눅이든 목소리로 내 뒤를 종종 따라 걸었다. 그가 소개해준 땅벌레의 껍질 속에서 나와 마을로 걸었다.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저기, 이나?]

 

베스에게.

그녀에게.

꼭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고 있다는 말. 그 편지. 그것조차 다 거짓은 아닐까. 마을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 베스와 내가 머물던, 판자와 돌로 얼키설키 지어진 건물의 문을 밀어 젖혔다. 수인들이 모두 나를 돌아본다. 움찔했지만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그녀를 보자 용기가 샘솟았다.

 

[베스.]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내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캐시가 손을 허공으로 휘젓는다. 베스가 내 뒤로 시선을 던져 캐시에게로 고개를 빼었다. 캐시가 침을 삼켰다.

 

[다 들었어요.]

 

베스가 바로 일어나 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이야기해요!]

 

뒤를 돌아보는 베스. 늑대의 발톱과 은빛 갈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계단에 선채로 나의 말을 기다린다.

 

[대답해주세요.]

 

그녀의 눈과 나의 눈. 이상한 세계와 낯선 이방인. 처음 보는 편지. 그리고 거기에 적힌 처음 들어보는 말들. 딸아. 나의 딸아. 나를 찾으러 와주렴.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친 거죠?]

 

말들이 쏟아진다. 가슴 속이 데인 듯 뜨거웠다.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 거짓말이죠?]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죠?]

 

혹시나 했다. 오두막과 작은 나무 숲. 나무들을 건너 베스가 보여준 풍경.

 

[베스, 당신이 저를 속인 거죠?]

 

회색 늑대는 그곳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나만을 보고 있다. 그녀가 나를 위해 고개를 저어주지는 않을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나를 붙잡아 주지는 않을까. 내가 들었던 얘기들이 전부 헛소문이라고 나를 안아주지는 않을까.

 

탁.

 

소리 하나. 튕기는 손가락 하나. 그리고 박동 하나.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 다 거짓말이었구나. 날 속인거구나. 이 세상에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나는 여관을 박차고 나와 흙길 위를 달려 나갔다. 모두가 나를 찾지 않길 바랐다. 그냥 이 모든 게 한낱 꿈이 되어 마음 편히 죽어 버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 나는 역시나 혼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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