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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미운 반지

2020.11.24 23:5311.24

A의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왼손 약지에 끼운 결혼반지가 손가락을 약하게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A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큰 통증이 아니었을 뿐 더러, 굳이 반지를 빼보자는 생각도 않았다. 이 결혼반지라는 것은, 남편과 그녀가 맺은 서약의 증표인데 함부로 빼는 건 어쩐지 그 숭고한 약속을 깨는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이후 한번도 반지를 벗지 않았던 A는 자신에게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고, 10여년이라는 그 긴 기록을 이런 작은 통증 때문에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손가락에도 살이 찌기 시작한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상태를 단순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아무튼 같잖은 이유로 이 여자는 그날까지 반지를 움직일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A가 결혼이래 처음으로 반지를 빼보려고 시도한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아침부터 지속해온 통증도 그거대로 문제였지만, 약지가 반지를 주변으로 빨갛게 붓고 있었다. 반지 안에서 땀이 차는지 손가락은 미친 듯이 간지러웠고, 겉에만 살살 긁어보기 시작했더니 더욱 부풀러 올랐다. 그녀가 심각성을 자각했을 때는 -사실 너무 늦었지만- 심하게 부어있는 상태인지라, 손가락은 마치 중앙을 리본으로 싸 맨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았다. 피도 안 통하여 약지 손톱 부분은 보기 싫게 파란색으로 변색됐다.

손가락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A는 정신을 못 차리고 반지를 빼는걸 꺼려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벗겨야겠다는 아쉬움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슬쩍 하면 빠질 줄 알았던 반지는 마치 자기가 모태부터 약지와 한 몸이라는 것을 주장하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가해 손가락을 계속해서 잡아 당기니까 아픔은 더욱 증폭 할 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인터넷에 안 빠지는 반지 빼는 법을 검색하였다. 얼음물에 손 담그기, 수건에 비누 묻혀서 문지르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설명되었고 그녀는 착실하게 다 수행해 보았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다.

이쯤 되니까 A의 머리 한 켠에는 괴괴한 빈집을 홀로 지키는 꼬마가 느낄 법한 커다란 공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러다 반지가 영영 안 빠지는 건 아닐까? 평생 끼고 살아야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자, 이 조그마한 반지가 그녀의 인생을 약지와 함께 꽉 잡아 속박해버릴 것만 같았다.

전날에 진작 빼볼걸 하는 후회만 커졌다. 저녁에 손가락의 붓기가 빠져 반지 빼기가 쉬워진다는 말도 있었지만 A는 그때까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반지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결혼반지는 당시에 남편이 귀한 돈 주고 사준 비싼 것이었지만 겁에 쪄 든 그녀에겐 반지의 가격이든, 남편과의 증표 따위든 도무지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좀먹는 미운 반지를 당장 부셔버리고 싶었다.

A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그녀가 세웠던 최후의 수단, 즉 집 근처에 있는 소방서에 가기로 했다. 소방서로 걸어가는 동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 기억도 없었다. 빠르게, 그녀는 아담한 발을 알레그로 연주하듯 움직였다. 다행히도 A의 집 근처 소방서에는 반지를 잘라 줄 절단기가 있었다. 소방관들은 그녀의 사연을 듣고 비슷한 상황이 종종 있다며 웃으면서 A의 결혼반지를 쉽게 갈라 비닐 봉지에 담아주었다. 둥근 W 모양으로 쪼개져 담긴 순금반지는 그 황금빛을 잃어서 방금 전까지 이딴 것 때문에 자신이 겁에 질렸는지 쪽 팔릴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A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10여년 동안 눌려 하얗게 바랜 쪼글쪼글한 반짓자국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오랫동안 해오지 못했던 할 일을 완수한 것 같은 후련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전라가 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차가운 공기가 도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시원했고, 남편과 함께 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가벼운 발놀림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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