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그녀를 좆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성가신 말투로 홱 돌아보았다.

 

[계속 따라올 거야?]

 

나는 주눅이 들었다. 힘을 짜내어 말을 해보지만 형편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그를 만나러 가야 해.]

 

소녀가 앞서 걷는다. 내 말을 듣기는 한 걸까. 한참을 걷던 그녀는 충고라도 할 자세로 손을 허리에 짚으며 낮게 이르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

 

나는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나를 이 이상한 세계로 이끈 인도자. 매일 상냥한 미소를 짓는 다정한 남자. 그리고

 

[그가 나를 찾아왔어.]

 

[그렇겠지.]

 

소녀는 비아냥대었다. 나는 지지 않고 맞서서 말하였다.

 

[그가 말했어. 나에게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고!]

 

소녀도 함께 소리 질렀다.

 

[그딴 건 없어. 넌 그냥 속은 거라고!]

 

그녀는 내가 간직한 믿음과 희망을 갈가리 찢었다. 내가 어떤 세상에서 왔는지 알기나 한 걸까. 처음 그 메시지를 받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알기나 한 걸까.

 

[널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

[사탕발린 말에 혹해서는 넌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걸!]

 

나는 몸이 뻣뻣해졌다. 미웠다. 울분이 가슴 속에서 맺혀 울음들이, 터지듯 흘러넘쳐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숲으로 달려갔다. 미웠다. 세상이, 날 낯선 곳에 방치한 늑대인간이, 날 두고 홀로 사라진 그가, 그가 살던 오두막이, 그와 걷던 들판이, 내가 사라져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건너편의 현실이.

 

낯선 곳에서 달콤한 향이 나는 빛나는 호박색 돌들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곯은 배를 움켜쥐고 돌을 핥았다. 노랗게 빛나는 돌은 매끈했고 달콤한 향이 돌았다. 달다. 돌들이 죽 한 쪽을 향해 떨어져 있었다. 몸을 숨기기 위해 돌들을 따라 보라색 굴로 몸을 웅크렸다.

 

굴은 좁았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거기 누가 있니?]

 

작은 보라색 굴의 끝으로 목소리가 울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잘 곳이 필요해서요.]

 

[오, 이런 아가.]

 

목소리는 부드럽게 나를 빨아들였다.

 

[이리오렴, 모닥불과 달콤한 꿀이 있단다.]

[추운 밤이 되었는데, 꿀로 만든 차를 마시지 않으련?]

 

굴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입구가 너무 좁아 엎드려서 기어가야 했다. 보라색 굴이 푹신하게 내 몸을 감쌌다.

 

퐁.

 

나는 굴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굴의 아래는 작은 방이 있었다.

 

[괜찮니, 아가?]

 

길게 쭉 뻗은 분홍색 몸체, 짧고 앙증맞은 다리들이 꿈틀대는 거대한 애벌레가 상냥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렴, 차를 내올 테니.]

 

애벌레 다리가 꿈틀대며 무언가를 젖는 시늉을 하지만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차를 내오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계속 말을 걸 뿐이었다. 방의 구석마다 피어있는 커다란 꽃이 보라색 연기를 토해내고 있다. 머리가 어지러워 벽에 기대어 비틀대었다. 내가 대체 어디로 온 것일까. 출구를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얘야, 말을 해주지 않겠니?]

[이 할미가 눈이 멀어서 말이다.]

 

애벌레의 뒤로 문 하나가 보인다. 벽을 더듬어 천천히 움직였다. 애벌레가 몸을 기울였다.

 

[혹시 어디 아픈 거니?]

 

애벌레의 몸에 닿지 않기 위해 다리를 구부려 몸을 숙였다. 입과 코를 막고 숨소리도 내지 않도록 소리들을 죽였다. 애벌레가 허공을 가로 젓더니 섬뜩한 목소리를 내었다.

 

[너, 최면에 걸리지 않은 거로구나.]

 

다리가 떨린다. 기괴한 꽃이 토해내는 연기에 질식할 것 같아 토악질이 나왔다. 배를 쓸며 간신히 앞으로 나아갔다.

 

[너 내가 보이지?]

 

벽을 짚는 내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연기가 너무 독했다. 짙은 연기처럼 온 방안에 연기가 가득 피워 올랐다.

 

[걱정 마렴, 아파하기도 전에 먹어줄 테니.]

 

애벌레가 몸을 눕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서 도망치거라, 그래야 재미있지 않겠니?]

 

나는 몸을 굴려 맞은편 벽으로 굴러갔다. 애벌레의 꼬리가 내 발을 스친다.

 

[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독한 연기에 공기를 찾으려 폐를 열었지만 탁한 연기만이 목구멍을 덮을 뿐이었다. 애벌레가 몸을 든다.

 

[거기 있구나.]

 

나는 문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살고 싶었다. 문고리를 잡아 힘껏 밀어 젖혔다.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 문은 출구가 아니었다.

 

[이런 아가야.]

[내 수집품들을 보고 말았구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썩은 사체들. 반쯤 부패해 살점이 녹아내리고 있는 사체들은 수인들이 살고 있던 마을의 주민들로 보였다. 제 귀가 잘려나간 토끼 인간의 사체가 눈을 굴리며 신음소리를 낸다.

 

[살..려..줘...]

 

주저앉았다. 등 뒤로 점액질 소리가 다가왔다.

 

[걱정하지 마렴. 난 배가 고플 때 고통 없이 한 번에 먹는단다.]

 

머리를 조아리며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진다.

 

[그럼, 잘자거라 아가야.]

 

스릉.

 

진득한 액체들이 사방으로 튄다. 등으로 따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어둡던 굴의 지하로 달빛이 비친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은빛 갈기를 휘날리며 베스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애벌레를 토막 내고 있었다. 애벌레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이 반으로 잘려나가고 만다.

 

갇혀 있었던 보라색 동굴은 베스의 발톱에 부서져 위가 뻥 뚫려 있었다. 베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는다. 발톱이 들어가 부드럽고 푹신한 털이 손에 잡혔다. 나를 끌어 올리며 베스는 묵묵히 길을 앞서 걸었다.

 

[저기.]

 

애벌레의 굴에 사체들이 썩고 있다. 그렇지만 개중 누군가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을까. 내 발 및 언저리를 보며 흘깃 눈길을 주던 베스는 애벌레의 체액을 핥으며 관심 없다는 눈으로 금방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온 몸이 끈적하고 지저분하다. 게다가.

 

[저기 베스.]

 

그녀의 은빛 갈기를 살짝 잡아 당겼다. 그녀가 내 온 몸을 훑어본다.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고는 나를 번쩍 들어 올린다.

 

[잠깐만요!]

 

바람에 머리칼과 더럽혀진 옷들이 휘날렸다. 몸을 움츠려 추위를 막으려 했다. 나를 어깨에 메고서 내달리던 그녀는 나무가 울창한 호숫가로 우뚝 멈추어 섰다. 달빛이 그대로 비쳐진 맑은 호수는 차가웠다. 베스가 휘파람을 부른다.

 

휘익.

 

육중한 몸을 이끌며 온 몸이 돌로 둘러쌓인 거북이 한 마리가 맞은편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베스를 본 거북이는 제 등에 솟아난 분화구를 이리저리 흔들며 몸을 비틀었다. 붉은 구체 몇 개가 거북이의 등에 난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와 호수로 빠진다.

 

그것을 본 베스가 다시 휘파람을 분다.

 

휘익.

 

거북이는 그녀의 휘파람 소리에 만족을 한 듯 다시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조금 기다리자 호수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베스는 제 몸에 걸쳐져 있던 갑옷 조각들을 풀어 땅위로 내려놓았다. 갈기가 길게 늘어 뜨러져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 은은히 빛나는 윤기 있는 털을 혀로 핥으며 베스는 따뜻해진 호수로 몸을 담갔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옷을 벗어 호수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았다. 뜨거운 물이 몸을 감싸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나요?]

 

베스가 머리를 털며 눈을 감고 있다. 그녀는 대체 왜 나와 함께 있는 걸까.

 

[저도 알고 싶어요.]

[베스, 당신은 왜 말을 하지 않으시는 거죠?]

 

베스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녀의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내 뺨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나는 당황스러워 몸부림 쳤다. 물들이 사방으로 튄다.

 

베스가 내 앞으로 입을 벌리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보이는 잘린 혀 하나.

 

베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열기가 얼굴로 닿는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베스.]

 

그녀는 말없이 따뜻한 물에 잠기어 몸을 녹이고 있었다. 나는 몰래 방을 나와 숲을 떠돌다 부랑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녀 한 명.

 

[베스, 낮에 만난 아이를 다시 만났어요.]

 

[그녀가 얘기했어요.]

 

[자신은 이곳으로 잡혀왔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베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눈만을 떠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정말 날 기다리고 있던 가족이라는 건 없는 걸까.

 

[제가 노예인가요, 베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저희는 노예인가요?]

 

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몰에 홀딱 빠져 털이 착 붙어있었다. 베스는 온 몸을 흔들어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 대었다. 그녀는 갑옷을 다시 몸에 끼우며 등을 돌린 채 선다. 나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해줄 때까지 버텨 보았지만 그녀 역시 끈기 있게 버텼다.

 

시간이 지나자 호수는 다시 차가워졌고 나는 물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던 나를 꼭 품에 안고서 베스는 재빠르게 마을로 내달렸다.

 

정말 그 애의 말이 사실인가요, 베스?

 

나는 기도하듯 몸을 한껏 움츠리고 똑같은 질문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만약 그 애의 말이 사실이어서 나는 잡혀온 것이고 아무도 모르게 노예로 팔리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할까. 나를 안고 있는 이 늑대인간이 정말 나를 지켜줄까.

 

여전히 겁이 났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647 장편 INA - 수인들의 행군 키미기미 2020.12.14 0
2646 단편 갈림길이 없는 미로 붉은파랑 2020.12.14 0
2645 장편 INA - 맹세의 깃발 키미기미 2020.12.12 0
2644 장편 INA - 포프의 자식 키미기미 2020.12.11 0
2643 장편 INA - 전쟁 나팔 키미기미 2020.12.10 0
2642 장편 INA - 믿어선 안되는 것들 키미기미 2020.12.09 0
2641 장편 INA - 구원자 키미기미 2020.12.08 0
2640 장편 INA - 거짓말쟁이들 키미기미 2020.12.07 0
장편 INA - 그애의 말이 사실인가요? 키미기미 2020.12.07 0
2638 장편 INA - 부랑자 키미기미 2020.12.06 0
2637 장편 INA - 그럼요, 그럼요 이나양. 키미기미 2020.12.05 0
2636 장편 INA - 프롤로그 (판타지) 키미기미 2020.12.05 0
2635 단편 인류의 비극 투인 2020.11.30 0
2634 단편 FLY WITH ME 미믹응가 2020.11.25 0
2633 단편 차를 멈춰야 해요 2시59분 2020.11.25 0
2632 단편 미운 반지 장난감신부 2020.11.24 0
2631 단편 피부묘기증 ㄱㅎㅇ 2020.11.24 0
2630 단편 미아 양윤영 2020.11.22 0
2629 단편 내 이름은 조이 마음의풍경 2020.11.20 0
2628 단편 여섯번째 꿈의 감각 양윤영 2020.11.19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