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는 나를 잡아 벽을 올랐다. 세상이 기울고 달이 옆으로 긴 울음을 운다. 금이 간 낡은 벽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뒤를 돌아 나에게로 말한다.

 

[조심해요. 마법은 금세 사라지니.]

 

[어디로 가는 거죠?]

 

[당신이 받은 편지.]

[그 편지가 말하는 곳으로 갑니다.]

 

나는 무서웠다. 정말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발이 벽에서부터 떨어진다. 공중으로 몸이 떠오르며 아래로 넘어간다. 당황하는 내 표정을 그는 가볍게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반기었다.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손을 잡아주고 있는 그의 손.

 

[따라와요.]

 

그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더니 세상이 다시 옆으로 기울었다. 낡은 빌라의 벽을 오르며 그가 입은 검은 정장이 달빛에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나는 발을 디뎠다. 푹신한 들이 산들거리며 바람을 맞고 있다. 푸른빛의 달이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잠에든 작은 동물들의 숨소리가 소곤거리며 귓가에 닿고 있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이끈다.

 

[우선 집으로 가요.]

 

그를 따라 들녘으로 난 좁은 흙길을 요리조리 걸어갔다. 작지만 따뜻한 빛이 새어나오는 오두막으로 연기가 폴폴 올라오고 있다. 혹시 꿈은 아닐까.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문을 열어 나를 맞이한다. 오두막은 밝은 갈색으로 지어져있었고 한가운데에 솥이 끓고 있다. 스튜를 끓고 있는 솥에서 맛있는 냄새가 내 뱃속에 까지 흘렀다.

 

그가 나무로 깎아 만든 접시를 건네었고 얌전히 받았다.

 

[당신도 먹어요.]

 

그가 오두막 구석으로 말하였다. 솥에서 흘러나오는 스튜 냄새에 정신이 팔려 오두막에 있던 다른 사람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두 발로 걷고 부드러운 갈기들이 온몸을 덮은 존재가 가볍게 일어나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 왔다. 늑대의 얼굴을 한 그 존재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스튜를 자기 그릇에 담았다. 회색 갈기가 길게 늘어 뜨러져 찰랑 거렸다.

 

[베스예요. 이 근방에선 제일 힘이 쎈 전사랍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몸을 홱 돌린다. 그녀는 나를 못마땅해 하는 듯하다. 내가 소심하게 고개를 움츠리고 있자 그가 나에게 스튜를 담아 주었다. 접시가 따뜻하게 데워진다. 손에서부터 가슴에까지 온기가 퍼진다. 그가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그가 스튜를 먹은 나를 나무 침대가 있는 방까지 안내해주었다. 문을 닫으며 불이 꺼진다. 밝은 달빛이 이불보 위를 비추어 어둡지 않았다. 늑대 인간과 정체불명의 남자. 꿈이 분명하다. 너무 피곤한 탓에 집에 돌아온 기억도 없는 것이겠지. 스튜가 담긴 접시의 따뜻함이 너무도 생생해 괜히 손을 오므렸다 펴보았다.

 

 

 

남자는 없었다. 밝은 갈색의 빛깔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오두막도 그대로, 스튜를 끓였던 솥도 그대로, 게다가 회색 갈기가 찰랑이는 늑대도 그대로 있다. 멀뚱히 서있는 나를 그녀는 본채 만채 구석에 앉아만 있었다.

 

[저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나를 가로 질러 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를 따라 걸음을 뗐다. 문틈으로 번지는 햇살로 몸을 피며 볼을 감싸는 아침 봄볕을 느꼈다. 반지하 방에서 시멘트를 짚던 그때.

 

그녀는 나를 두고 저 혼자 들 사이를 죽 걸었다. 그녀는 언덕을 넘어 숲으로 들어갔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난 숲은 크지도 울창하지도 않아 곳곳이 비어보였다.

 

[앗!]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웠다. 금방 일어나 그녀를 따라 갔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멈추어 서지도 않는다. 뒤처지지 않게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 붙었다. 작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닿는다.

 

넓게 확 트인 공간. 잔디와 수풀이 낮게 흔들리는 작은 크기의 초원이 나타났다. 그녀가 너머를 보고 있다. 잔디를 밟으며 앞으로 가니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목초지와 마을 몇 개가 보였고 작지만 성으로 보이는 건물도 서있었다.

 

[와아.]

 

짧은 감탄을 그녀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손에 꼽다. 좁고 낮은 창이 전부였던 나에게 절벽 위에서의 하늘은 상쾌할 정도로 높았다. 넓고 예쁘다. 그녀가 삐딱하게 선채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나는 소곤거리듯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나를 흘깃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숲을 가로지른다. 나는 절벽 위에서의 넓게 트인 풍경을 눈으로 담으며 아쉬운 걸음을 떼었다.

 

작은 나무숲을 지나는 우리는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박.

 

앞서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고글. 갈색의 지저분한 재킷과 기다란 장대들. 사람 하나가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글과 입을 덮은 스카프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회색 갈기가 거칠게 찰랑거린다. 그녀의 복슬복슬 손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드러난다. 낯선 이가 등에 매달고 있던 장대 하나를 빼어 손에 든다.

 

나는 무사히 집으로 가고 싶었다. 낯선 이가 장대를 그녀에게로 향하며 달려들었고 그녀가 옆으로 몸을 돌려 공중을 날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살갗을 파고 든다. 나는 눈을 감았다.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약하지만 분명히 나고 있는 비린내. 손가락을 작게 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를 흘리는 낯선 이를 그녀는 어깨에 짊어 메 묵묵히 길을 걸어갔다. 겁을 먹어 다리가 떨렸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좆았다. 혹시 저 사람을 먹으려 하는 걸까. 그녀와 거리를 벌리고 멀리 뚝 떨어진 채로 돌아갔다.

 

피가 마루를 적시고 있다. 그녀는 굳은 피를 제 발톱으로 긁어내었다. 고글을 낀 낯선 이는 바닥에 눕혀진 채 신음을 흘렸다. 나는 불안했다. 그녀가 나를 덮치지는 않을까. 나를 해치지는 않더라도 저 사람을 솥에 넣고 끓이지는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초원 위의 작은 오두막이나 늑대인간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눈앞에 남아있다. 그 남자가 내 손을 이끌어 마법을 부렸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고 건물 벽을 타 눈을 감았다. 난 어디로 온 것일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것 같아 연신 깜빡거려 보았다. 횃불이 일렁거리며 늑대의 얼굴을 한 그녀의 옆모습이 노랗게 번지었다.

 

[베스라고 했나요?]

 

그녀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다. 불가로 울렁대는 그림자 두 개가 꼼짝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그 남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저기 여기가 어디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발톱을 핥는다. 그녀는 나에게 대답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입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그 남자 분 이름은 무엇인가요?]

[여기서 같이 사시나요?]

[베스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녀가 문으로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오두막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 발자국 소리. 불이 닿지 않아 문 주위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별일 없으셨나요?]

 

경쾌한 목소리. 밝은 웃음. 문이 열리자 하늘에서부터 잔잔하게 푸른빛들이 바닥으로 깔렸다. 외투를 털며 벽에 거는 그는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정장이 아닌 하얀색 셔츠에 갈색 조끼를 덧입고 있었다. 그가 솥으로 다가가 비어있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한다.

 

[베스는 요리를 잘 못해요.]

[금방 요리해드리죠.]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갈기들을 늘어뜨리고서 그녀는 곤히 눈을 감고 있었다. 창에 기댄 그녀의 몸 아래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거린다. 나는 오전에 있던 일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저기.]

 

[네?]

 

발신자도 찍히지 않은 편지로 온, 나를 찾는다는 내용 하나. 정말 나를 찾고 있는 걸까. 나는 오전의 일 보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정말 엄마, 아빠가 절 찾고 있나요?]

[그 편지는 부모님이 보낸 건가요?]

[여기서 두 분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아주 잠깐 정적이 흐른다. 그도, 말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도 대답하나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솥에 담긴 재료들이 들끓는 소리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럼요, 그럼요 이나 양.]

 

그는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655 장편 INA - 믿음과 영웅 키미기미 2020.12.23 0
2654 장편 INA - 생존자들 키미기미 2020.12.23 0
2653 장편 INA - 나를 믿으렴 키미기미 2020.12.21 0
2652 단편 섭식장애 ㄱㅎㅇ 2020.12.19 0
2651 장편 INA - 옛날 이야기 키미기미 2020.12.19 0
2650 단편 피아노 소리는 날카로웠다 두영 2020.12.18 0
2649 단편 꿈꾸는 시간여행자1 오메르타 2020.12.18 0
2648 단편 프타우스의 인형1 붉은파랑 2020.12.16 1
2647 장편 INA - 불안한 동행 키미기미 2020.12.16 0
2646 장편 INA - 수인들의 행군 키미기미 2020.12.14 0
2645 단편 갈림길이 없는 미로 붉은파랑 2020.12.14 0
2644 장편 INA - 맹세의 깃발 키미기미 2020.12.12 0
2643 장편 INA - 포프의 자식 키미기미 2020.12.11 0
2642 장편 INA - 전쟁 나팔 키미기미 2020.12.10 0
2641 장편 INA - 믿어선 안되는 것들 키미기미 2020.12.09 0
2640 장편 INA - 구원자 키미기미 2020.12.08 0
2639 장편 INA - 거짓말쟁이들 키미기미 2020.12.07 0
2638 장편 INA - 그애의 말이 사실인가요? 키미기미 2020.12.07 0
2637 장편 INA - 부랑자 키미기미 2020.12.06 0
장편 INA - 그럼요, 그럼요 이나양. 키미기미 2020.12.05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