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내 이름은 조이

2020.11.20 18:3011.20

1

“이게 그 영상인가요?”
“네. 지금 아주 대단한 유명세를 타고 있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삼환 일렉트로닉스 사람들은 ‘영상’이란 발음을 듣기만 해도 구역질을 할 태세였다.

“제가 아직...”
“아직 못 보셨어요? 우리는 너무 많이 봐서. 괜찮으시다면 잠깐 나가있겠습니다.”

감정을 가진 인간형 로봇 x0.1모델, 코드명 ‘조이’는 개발을 마치고 대량생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달 화물선사 옥토끼 정비팀에 배속된 것은 마지막 시험 과정이었다.

탁자에 나타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상단에 ‘조이-로건 케이스’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영상의 무대는 우주정 내부였다. 삐죽거리는 검정색 단발머리, 다소 중성적인 느낌의 여자가 보였다. 문제의 제품 ‘조이’인 것 같았다. 몸집이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조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왼손으로 남자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버둥거렸다.

“나를... 거부하는 게 어느 부분일까?”

조이의 오른손 검지가 남자의 몸을 정수리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 마음으로 사랑을 하는 거라고? 나는 마음이 없어 안 된다고? 마음? 마음... 마음이라, 그게... 머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손가락이 천천히 이마에서 코, 입, 목을 타고 내려왔다. 남자의 가슴팍에서 멈췄다.

“여기?”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그 대목에서 ‘헉’ 소리를 냈다. 조이의 손이 곧장 남자의 흉부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두둑’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갈비뼈를 비집고 심장을 꺼냈다.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남자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마음? 이 비린내 나는 이 고깃덩어리가 마음인 건가?”

조이는 남자의 머리 옆으로 심장을 툭 던졌다.

“마음이 없어졌으니 이젠 괜찮겠지.”

피가 튀어 흐르는 괴기스런 얼굴로 조이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눈을 감고 남자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이 조이의 커다란 눈에 어렸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모두 안녕.”

조이가 손에 쥐고 있던 스위치 박스를 눌렀다. 폭발이 일어나며 영상은 끝났다.

제조사 사람들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불타버린 화물선 잔해에서 로봇의 부품 일부가 발견됐고 남자의 DNA도 확인됐다고 했다. 옥토끼 지상요원, 로건의 것이었다.

“그런데, 절 왜 부르신 거죠?”

사건은 너무 명쾌해 보였다. 정비창에 세워진 우주정 안으로 조이와 로건이 들어갔고, 조금 뒤에 폭발이 일어났다. 복구된 선내 CCTV 영상이 사건 전말을 소상히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형 로봇이 인간 남자를 사랑했다. 로봇이라는 이유로 사랑이 거부되자 상대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르로 치면 ‘호러’에 성적 코드까지 버무려진 이야기였다. 유명세를 탈 만 했다.

“영상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네? 에이, 농담이시죠?”

J&K소속 법률 조사관 태오는 웃으며 제조사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쪽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A면 B를 하라’는 식으로 인간이 하나하나 코딩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학습시켜 만들어진 엔진, 그 구조가 어떠한지 잘 몰라요. 이를테면 블랙박스 같은 거죠. 그래서... 우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갑자기 검은 백조가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 개발 과정에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하는 거구요.”
“그러니까요. 저런 일도 벌어지는 것이고요. 뭐가 문제죠?”
“아니, 아니... 저건 달라요. 저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가 설계할 때 짜두었던 근본적인 제약조건들을 모두 뛰어넘는 행동이에요.”
“아 네, 뭐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 이런 거요?”

태오의 말에서 비웃음이 묻어났다. 중요한 거래처니까 예의상 만났지만 처음부터 사건을 수임할 생각이 없었다. 실익도 없이 손만 더럽힐 가능성이 높았다. 태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사사건은 다뤄본 일도 없고요. 솔직하게 말해서 이 걸 파보자는 제안은 저부터 납득이 안 됩니다.”
“조사관님. 삼환 일렉트로닉스, 정말로 큰 회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굉장히 중요해요. 이 인증 시험만 잘 끝났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겁니다. 커뮤터들을 싹 치워버릴 대 사건이요.”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구에서 인간이 택한 생존방식은 선택받은 소수가 방주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전체 인류의 3%정도가 격리된 공간 돔(dome) 들로 이주했다. 죽을 사람은 죽게 놔두고 자신을 구할 능력이 되는 소수라도 안전하게 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고가 잦아졌다. 돔의 영구 거주자가 아니면서 허드렛일을 하러 드나드는 커뮤터(commuter)들이 문제였다. 돔에 드나들 때 나체로 소독을 받게 하지만 몸속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집단 감염이 일어나 구성원 전체가 사망한 경우까지 생겼다. 끔찍한 일이었다. 삼환 일렉트로닉스가 조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태오의 태도가 달라질 것 같지 않자 다른 카드를 꺼냈다. 가까이 다가서 속삭였다.

“함께 더 큰 물로 갑시다. 법률고문 자리 만들겠습니다. 저기 스테이션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저는... 이면계약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일단 세부 조건을 들어보겠습니다.”

최 상위 인류의 상징, 스테이션이라니. 거래 대상이 합리적이지 않을수록 값은 비싸지는 법. 태오가 한참 뒤에 삼환 일렉트로닉스 달 출장소 사무실에서 나왔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하 무빙워크에 올랐다.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은 제법 묵직해 보였다.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남자가 태오를 뒤따랐다.


2

“새로운 팀 멤버를 소개한다. 조이.”
“잘 부탁해. 내 이름은 조이, 로봇이야.”

로봇이라는 말에 정비-18팀 노동자들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직전까지 팀에 신입이 보충된다는 말에 입이 귀에 걸려있던 그들이었다. 푸른색 바디수트를 입은 조이는 로봇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조이를 소개한 정비부문장이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첫인상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감이 좋지 않았다.

“꼭 그렇게 시작부터...”
“저기요, 이거... 무슨 상황이죠?”

로건이 나서 질문을 던졌다.

“당신 팀이 테스트를 맡기로 했다. 아주 비싼 기계야. 세 달만 같이 지내면 돼.”

기껏해야 다소 격앙된 질문, 저항은 그뿐이었다. 회사의 눈 밖에 나면 결과는 뻔했다.

옥토끼는 물류회사, 달-스테이션 물동량의 약 20%정도를 수주하고 있는 3위 사업자였다. 물류는 권력자들의 입김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업종이다. 운송허가나 세관, 검역 등 당국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한때 잘나가다 3위로 추락한 것도 밉보였던 탓이었다. 스테이션이 원하는 시험 요구를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다. 노동자들의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비부문장이 돌아갔다. 조이는 처음 소개받은 그 자리에 눈을 깜빡이며 서있었다. 팀장이자 엔진과 연료계통을 책임지고 있는 로건, 기체 구조와 외관을 수리하는 레니, 메인컴퓨터와 조종계통을 맡은 미리 등 정비-18팀 3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로봇 신참을 바라봤다.

“성별은 뭐야? 남자? 여자?”

레니가 조이에게 다가갔다. 손가락을 조이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찔러보기라도 할 태세였다.

“레니! 그만둬. 저기.”

로건이 엄지손가락으로 CCTV를 가리켰다. 레니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로건이 눈을 감고 고개를 들면서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사람처럼 생긴 로봇이라니.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 할 수 있어.”

로건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조이를 쏘아봤다. 조이는 주춤했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지는 않았다.

“우리 하는 거 잘 봐둬.”

미리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붉은색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조이에게 다가갔다. 미리는 성 구분이 없는 뉴트럴이었지만 긴 머리에 몸을 치장하는 걸 좋아했다. 조이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걸었다.

“어머! 얘 좀 봐, 몸이 따뜻해.”
“아 진짜 이게 뭔 지랄이래. 왜 하필 이런 걸 여길 보냈다지? 팔릴 데는 널렸을 텐데...”

레니는 조이를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자기 입술을 핥았다.

“너같이 더러운 종자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나보지.”

미리가 레니를 향해 감자를 날렸다. 레니도 지지 않고 미리를 향해 중지를 뻗었다. 조이가 그 대목에서 주먹 쥔 손을 입에 대고 ‘큭’하고 웃었다.

“어머, 얘는 웃을 줄도 아네.”

x0.1모델은 다른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커뮤터들을 대신해 인간에게 봉사할 로봇이 응당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하면 인간 같을 수 없다. 감정이 있어야만 주인인 인간의 피드백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

“일들 안 해?”

로건의 목소리가 커졌다.

“예, 예. 일 해야죠, 대장.”

레니가 바퀴 달린 작업대에 등을 대고 레쿱의 배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조이가 레니 옆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레니, 같이해!”
“너 뭐야, 누가 이러래!”
“대장이 쫌 전에 나한테 잘 봐두라고 했잖아.”
“어어? 야야! 붙지 마. 좀 떨어져!”

레니가 뭐라 뭐라 구시렁거렸지만 조이를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다.

“영리한데?”

미리가 조이의 첫 행동을 보며 감탄했다. 조이는 관계를 간파하고 곧장 핵심으로 뛰어들었다. 팀에서 제일 말썽 많은 레니는 언행은 거칠어도 보기보다 악당은 아니었다. 첫 공략대상을 잘 짚은 셈이었다.


3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팀원들에게 조이의 진가는 증명되었다. 정비-18팀의 손을 거쳐 간 우주정이 폭발한 사건 때문이었다. 기체 소유는 로펌 J&K였지만 옥토끼가 위탁 운영하고 있었다. 잔고장이 없고 여간해선 사고가 나는 일이 없는 RKB-115형 기체였기 때문에 책임을 정비팀에 묻는 상황이 벌어졌다.

뭐가 씌인 것처럼 모든 것들이 평소와 달랐다. 실수하는 일이 드문 미리가 점검의 마지막 단계인 ‘완결성 토큰’을 저장하는 걸 까먹었다. 정비 당시 문제가 없었음을 위조가 불가능한 양자암호 방식으로 저장해두는 단계였다.

미리가 조사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창문으로 소리는 넘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신 손가락질을 하며 호되게 추궁하는 감사실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미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다음엔 레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건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우주정 가격은 팀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이 죽었다. 해고에 막대한 배상책임까지 물어야 할 판이었다.

조이는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인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법인(法人)을 고안해냈지만 그 개념이 아직 로봇에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로봇은 법률적으로 책임의 주체가 아니었다.

“대장, 내가 좀 나서도 될까?”

로건과 레니 사이에 앉아있던 조이가 로건을 보며 말했다. 지친 표정으로 이마에 양 손을 짚고 있던 로건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

“뭔 소리야.”
“주제 파악하고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나서지 않으면 니들이 다칠 것 같아서.”

한참 뜸을 들인 뒤 로건은 조이를 쳐다봤다.

“뭘 할 수 있는데?”

경멸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동안 로건은 조이를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되었다. 조이는 장난꾸러기 같아도 신중했고 사려 깊었다. 또 사람 식으로 말해 마음이 따뜻했다. 로건의 답을 들은 조이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그날, 그 사고 나던 날, 내가 미리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어. 메인컴퓨터 터미널에도 접속한 상태였고. 우리 팀이 잘못한 게 없어. 어렵긴 하겠지만 내 머릿속 메모리에 접속하면 그걸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제조사는 강하게 반대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조이의 인격체가 깨지거나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인간에게도 기억이 존재의 중요한 기반인 것처럼. 물류 사업자 옥토끼는 조이의 기억을 강제로 꺼내자고 할 만큼 힘이 없었다. 조이를 제외한 세 명의 팀원들은 ‘이제 끝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어느 날 조이가 스스로 작동을 멈췄다. 움직이지도 않고, 외부의 자극에도 일체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방문을 닫아걸고 대화를 거부하는 고집 센 아이처럼. 사람과 다르지 않던 조이가 대리석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파업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제조사에서도 난리가 났다. 스스로 가동을 멈추는 것은 로봇에게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설계를 맡았던 기술진이 스테이션에서 날아오는 소동을 벌였지만 끝내 조이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기술진이 끝내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깨어나게 할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하자 거짓말처럼 조이는 곧바로 깨어났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을 뜨고 방끗 웃었다. 그런 소동을 거쳐 정비-18팀의 무죄는 증명되었다.

4

기억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읽힌 뒤 조이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높이가 2m나 되는 검증 장비에 꼼짝없이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제조사는 신경망 구성요소인 노드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일부 모듈은 업데이트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로건이 조이의 방으로 찾아왔다. 로건은 머리에 연결된 여러 가닥의 전선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한동안 어색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쭈뼛거렸다. 정작 로건이 꺼내놓은 첫마디는 거칠었다.

“착각하지 마. 너 그런다고...”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해. 놔두면 잘릴 것 같은데 어쩌겠어.”
“또 당했다.”

로건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조이가 웃었다.

“너네는 나한테 안 돼. 셋을 다 합쳐도 안 돼.”
“너 진짜 재수 없어.”

로건의 시선이 조이의 손으로 옮겨갔다. 로건이 모르는 물건이 거기 있었다.

“그게 뭐야?”
“뭐, 이거?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냥 이름을 말할게. 이 펑퍼짐하게 생긴 건 공책이라고 하고 길쭉한 건 연필이야.”
“공책? 연필? 그게 뭐에 쓰는 물건이지?”
“몰라도 돼. 알려줘도 뭔지 몰라.”
“너 정말 나한테 혼나볼래?”

로건이 장난으로 눈을 치켜떴다.

“이걸 말하려면, 내 비밀 하나를 알려줘야 해서.”

조이는 가볍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슬퍼보였다. 로건이 당황해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아니, 사실 말하고 싶었어.”

조이가 얼굴보다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나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어. 희미하지만 사람이었던 기억.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아, 설명이 필요하겠다. 그린다는 건 사물의 형태를 붙잡아 이런 공책위에 점과 선들로 표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조이가 노트를 펴서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거기엔 로이와 레니, 미리의 스케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안타까운 건,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야. 그 기억 속으로 더 들어가고 싶은데 뭔가 거대한 벽이 막고 있는 거야. 그걸 헤쳐 보려고 하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조이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x0.1모델은 희로애락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땀이건 눈물이건, 무중력 공간에서 액체를 배출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환상지(幻想肢)같은 거랄까? 신기루 같은 거일 수도 있어. 인공 신경망에 덧씌워진 그림자 같은 거 말이야. 아니면 나를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만든 장치일까? 더 인간적이게 보이기 위한?”

로건의 커다란 손이 조이의 손을 잡았다. 조이의 손은 따뜻했다. 그때 로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로건의 손에 닿아있는 조이의 손에서 온기 외에 다른 것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너를 좋아해 조이.”
“나도 그래.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거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로건은 손목에 찬 디스플레이를 자꾸만 들여다봤다. 심장 박동이 ‘쿵쿵’ 유난히 도드라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향해 창이 난 지하 교차로에서 로건은 잠시 멈춰 섰다. 달의 밤, 어두운 하늘 위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5

태오는 사건 발생 뒤 행방이 묘연해진 미리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폭발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팀원이었다. 조이와 로건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어보면 단서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미리를 봤다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뭔가 냄새가 났다. 그러지 않고서야 거주자가 5만 명도 안 되는 달에서 사람의 흔적이 온전히 사라질 리 없었다. 태오는 도깨비를 찾았다. 민사사건을 해결할 때 가끔 거래하는 정보상이었다.

“가끔 수상한 탑승객 명단이 시스템에 올라온단 얘기를 들었어. 그런데, 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실체 없는 명단이 올라간다는 건 당국이 개입한다는 뜻이야.”

태오는 열심히 움직였다. 끈덕지게 명단을 추적했다. 그래야 스테이션으로 갈 수 있으니까. 월면차였다. 우주선 차폐가 덜 되기 때문에 헬륨3 광산 인부들이나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 달의 앞면 고요의 바다 부근이었다. 하늘 위로 높이, 지구가 떠올라 있었다. 태오는 우주복을 입은 상태로 밖에서 기다렸다. 작심하고 위험을 무릅썼다.

조종석이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월면차가 접근했다. 정기편이 아니었다. 태오는 정거장 건물 그림자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월면차가 정거장을 1킬로미터 앞두고 잠시 멈췄다. 조종석 바로 뒤 비상 탈출구가 열렸다. 거기서 한 사람이 우주복을 갖춰 입고 내렸다. 월면차는 다시 전진했다.

‘누군가 돕는 게 맞아.’

따로 내린 사람은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월면에서 속도를 내려면 캥거루처럼 뛰어야 하지만 아주 느긋한 속도로 아장아장 걸었다. 태오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바이저를 내리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 기지 입구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태오가 따라붙었다. 에어록에 함께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바이저를 올렸다. 미리가 맞았다. 태오는 바이저를 걷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가압이 끝났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미리는 헬멧을 벗었다. 태오도 벗었다.

미리는 태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리는 헬멧을 내던지고 도망쳤다.

“미리씨, 잠시만! 미리씨!”

100미터도 채 못가서 미리가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미리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비강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6

“조이, 잠깐만 이리로 들어와. 아주 잠깐이면 돼.”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메인 엔진이 완전히 망가져 정비창 한쪽에 세워두고 있는 우주정이었다. 로건은 조이가 들어가자 문을 닫고 잠갔다.

“무슨 일이야?”

로건은 조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러지 마.”

조이는 로건을 밀쳐냈다.

“왜, 안 돼? 안 되는 거야?”
“말 했잖아. 그럴 수 없다고.”
“왜 그럴 수 없지? 네 몸에 피가 흐르지 않아서? 네가 고백했잖아. 너는 어쩌면 인간이었을지 모른다고. 기억을 갖고 있다고.”
“그건,”

로건이 조이의 입을 막았다.

“이렇게 너는 내 앞에 서 있는데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왜 안 된다는 거지? 나 너무 괴로워. 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다고.”

로건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린아이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화물선의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였다. 로건은 진심이었다. 조이는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등을 돌려 로건의 모습을 외면하려 했다. 마주보아서, 표정을 읽혀서,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조이라는 이름 따위? 착각하지 마. 나는 그냥 제조번호 3345-8783-0091, 열 두 자리 숫자로 특정되는 물건이야. 불행하게도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소유물일 거야. 계속 일련번호가 늘어나는 그런 공산품인거야. 여기에 머물 수도 없어. 그리고 너의 소유가 될 수 없어. 그렇게 되길 원하지도 않고. 사랑? 우리는 사랑할 수 없어. 절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도대체 얼마나 많은 조건이 필요한 일일까? 조이는 로건에게 말을 하면서 새삼 절감했다.

“그래. 난 널 소유할 수 없어. 넌 값을 매기기도 어려운 아주 비싼 존재일 테니까. 그런데 난 그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나도 알아. 그런데 나를 속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야. 왜 몰라,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어? 한 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 해줄 수는 없어? 어?”

조이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레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조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장 정비창을 빠져나갔다.

조이는 그날 비번이던 미리를 찾아갔다.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하지만,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미리는 두려움 때문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냥 패턴을 읽는 기계일 뿐이야. 그건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야.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지만 그럴 확률이 아주 많이 높아. 그걸 아는 이상 대비 하지 않을 수 없어. 내가 로건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원히 악마로 남는 걸 막을 수는 있어.”

미리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조이는 미리를 꼭 안고 엄마처럼 등을 두드렸다. 미리는 그날 접근코드가 담긴 시스템 키를 조이에게 넘겼다. 조이는 키를 받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7

로건의 행동은 점점 더 수위가 올라갔다. 한시도 조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제발, 로건. 부탁이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던... 이건 내 자유야.”

언제 문제가 생겨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을 뻔히 알 텐데도 스테이션이나 돔 연합, 제조사 등 그 어느 곳도 움직이지 않았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심보인 것 같았다. 애초에 그런 취지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조이, 너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사실은 조이도 알고 싶었다. 시험이 끝나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누구의 소유가 되는 건지, 혹은 무엇이 되는 것인지. 조이는 두려웠다. ‘잔을 피하고 싶다는 건 이런 심정일까?’ 그래도 예측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이었다. 떠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그때 방문이 왈칵 열렸다. 조이는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때 조이는 정비창의 망가진 우주정 내부에 와 있었다. 조이는 눈을 뜨고도 한참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안면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일부 회로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전기충격 같은 게 가해진 것 같았다. 로건이 보였다.

“네 기억을 마지막으로, 내 삶을 끝내고 싶었어.”
“로건,”

로건은 울음 같은 웃음을 웃었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스위치 박스 중앙, 붉은 버튼을 눌렀다.


8

미리는 죽었다. 누군가 미리를 겨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저격범은 CCTV에 잡히지 않았다.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태오는 혼란스런 틈을 타 미리의 소지품을 챙겼다. 그건 미리의 것이기 전에 조이의 것이었다. 일기장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이는 매 순간 우주정 선내 CCTV의 마지막 1분을 덮어쓰는 프로그램을 심어놓았다. 사람들이 본 것은 조이가 미리 만들어둔 가짜였다.

조이는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로봇’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세상에 나와선 안 될 존재였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모든 종류의 불행을 부를 게 뻔하니까. 로봇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을 것이니까. 영상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당국이 기뻐할 거라는 ‘역설’도 간파하고 있었다. 일부러 불편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거니까.

일기의 마지막 장에는 놀랍게도 태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삼환 일렉트로닉스는 당신을 골랐을 거예요. 실력이 있고, 욕망이 큰 사람. 당신은 영리하니까, 이제 거기서 멈춰요.”

태오는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수임료를 돌려줬다. 제조사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감정을 가진 로봇’의 생산라인은 폐쇄되었다. 조이-로건 케이스는 끝났다. 최초 내려진 결론에서 사실관계의 변경 없이 그대로.

끝.

조이(Zoey)는 그리스어 '생명'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로건(Logan)은 켈트어로 ‘작은 분지’ 또는 ‘골자기’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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