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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안개 속의 피사체

2020.11.08 17:3411.08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내가 보고야 말았던 안개 속의 피사체가 나타납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저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미 수 분 넘게 감지 못한 두 눈은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날 안개 속에서 제가 찍은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그 섬에 대하여...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내 뱃속은 뒤집어졌다. 갑판에 쓰러져 위액을 토할 때마다 육지만 밟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도를 태우는 듯한 감각에 익숙해질 즈음, 좌현 난간 너머로 섬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를 두른, 고파도.

 

그 기묘한 아름다움에 반한 나는 카메라를 꺼내 섬의 전경을 렌즈에 담았다. 찰칵, 갑판에 주저앉아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덕분일까? 마치 몽유도원도를 찍은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뜩 사진의 안개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친 손으로 두 눈을 부볐다. 사진 속의 안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배는 곧 목적지인 고파도에 도착합니다."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부우우, 뱃고동이 고요한 바다의 정적을 찢는다. 하지만 고파도의 안개는 가실 줄을 모르고. 외지인의 출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어쩌면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짙게 부유하고 있다.

 

나는 선장의 부축을 받아 선착장에 널브러졌다. 이른 아침의 콘크리트는 차가웠지만, 지구와 단단히 연결되어있었다.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뭍으로 나가려는 승선객 머릿수를 다 헤아린 선장은 내가 걱정되는지 말을 건넸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뭍으로 나가서 수액이라도 맞으시오."

"공모전 마감이 3일 남았어요."

"고집하고는… 그럼 우린 출발합니다."

 

선장은 다시 배에 올라탔고, 나를 싣고 왔던 배는 천천히 후진해 뭍으로 떠났다. 스크류가 바다를 찢으며 남긴 하얀 포말은 어느 사이엔가 파란 바다로 스미어 사라졌다. 나는 선착장에 홀로 남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파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철썩, 처얼썩. 그리고 저벅저벅.

 

점점 가까워오는 발자국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은 형체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뚜렷해졌고, 나는 안개 너머의 모습에 온 신경이 쏠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의 모습은 점차 사람에 가까워져 갔다.

 

“선장에게 연락받았슈, 외지인이라던디...”

“실례지만 누구시죠?”

“난 여기 이장인디, 여기는 안개가 심해서 초행은 위험해유.”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개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트고 갈라진, 뱃사람의 손바닥이었다. 선착장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이장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거친 감촉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회관으로 가서 쉬어유. 해가 더 오르면 안개도 걷힐 테니께.”

 

나는 아직도 울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이장의 뒤를 따라 마을로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흙을 즈려밟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짙던 안개도 서서히 옅어져 가고 좁은 길 양쪽에는 목가적인 정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두에는 밧줄에 꿰어진 가리비 껍데기가 무더기로 쌓여있었고, 오밀조밀 계단식으로 자리 잡은 밭에는 강낭콩이나 감자같이 소박한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집이라고 해봐도 서로 비슷비슷하게 허름한 벽에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을 뿐이다. 그러니 새로 지은 듯한 모던한 전원주택은 티가 안 날 수 없었다.

 

"저번 달에 귀촌한 서울 사람 집이유."

"그렇게 생겼네요."

 

이장은 잔디밭에 텅 빈 개집을 가리키며 '저 집 개가 도망을 가버렸다.' 고 부연했다. 적적할까 데려온 개가 하필 초복 즈음에 사라졌으니, 저 집 부인이 엄한 사람들을 의심하는 눈치라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장의 목소리에 울분이 실릴 무렵, 우리는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아무튼, 사진 찍으러 왔다고 했쥬? 돌아댕기다 개 살았거든 좀 데리고 와유."

"찾으면야 데리고 와야죠. 그런데 지금은 좀 누워있어야겠네요."

"냉장고에 생강 말린 거 있으니까 좀 자시고 누워유."

 

그렇게 말한 이장은 쭈꾸미 잡을 가리비를 손질한다며 다시 부둣가를 향해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이장은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경고를 던졌다.

 

"해 지면 또 안개가 끼니까 조심혀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방안이 캄캄해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생고생을 한 덕분인지, 하루를 잠으로 때워버린 것 같다. 나는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시침은 열두 시를 넘겼다. 이제 공모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편두통이 찾아왔다.

 

정신이 바짝 든 나는 담배 한 갑과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장의 말대로 깊은 밤의 고파도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고, 지상의 유일한 불빛은 내 입술 5cm 앞에서 타들어 가는 담뱃불뿐이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입상도 못 하겠네, 염병."

 

절로 나온 욕지거리 대신 끈적거리는 타르 연기를 폐속 깊이 욱여넣었다. 이 사진들을 SNS에 올린다면 꽤 좋은 평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과 공모전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사진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은 후였다.

 

"사진이 필요해. 이거보단 더 나아야 해...."

 

미친 듯이 앨범을 뒤지던 나는 SD카드를 모두 털어본 후에야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담뱃불은 입술에 닿을 정도로 붉게 타오르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나는 목숨을 부지한 필터를 안갯속으로 튕겨버렸다. 연기 속으로 사라진 꽁초는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담뱃불마저 꺼져버린 고파도의 밤거리는 내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내 미래처럼. 정확한 모습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흐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깊은 안개에서 불길한 환상을 떠올린다. 이번 공모전에서도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을 때의 시나리오. 비싸기만 했던 사진기는 중고시장에 팔아버리고, 나는 면접관에게 지난 3년간의 찍사질이 얼마나 업무스킬에 도움이 될지 어필하겠지.

 

"좆같네."

 

그러다 문뜩 안개의 흐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그 불투명한 연기 속에서 누군가 춤이라도 추고 있는 양 규칙적인 흐름이었다. 분명 환상 같은 이야기지만 내 두 눈에 비친 그 모습에서는 오묘한 감정이 차올랐고,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깊은 밤만큼이나 고요한 셔터음이 속삭였다. 여전히 안개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직도 그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 안개는 사라졌다. 어젯밤에 본 그 은빛 장막이 마치 처음부터 꿈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SD카드에는 고파도의 밤안개가 남아있었다. 나는 사진 찍으러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듯한, 안개. 그 오묘한 모습은 내 상상력을 흔들었고 마침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형태는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매어왔던 가장 완벽한 피사체가 아닐까?

 

"청년 안에 있나?"

"네, 이장님."

 

이장은 짧은 노크 후에 내 안부를 물었다. 어젯밤 안개가 유난히 깊었는데 밤에 나가지는 않았냐는 이야기였다. 나는 담배 피우러 잠깐 나갔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장은 '멀리 돌아다니면 도랑에 헛딛어 크게 다친다'며 신신당부했다.

 

"어쩌면 누렁이도 도랑에 빠졌을지도 몰르제, 그러니 꼭 해 저물기 전에는 돌아오게."

"제가 길눈이 어두워서요. 저녁 되기도 전에 올 겁니다."

 

안심하는 듯한 이장의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산책에 나섰다. 대나무숲 뒤편에 있던 폐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간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는데, 세상의 모든 날벌레가 다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한번 발을 들여놓은 벌레가 저 거미줄 속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겠지.

 

페인트가 벗겨진 정글짐은 마지막으로 올라탔던 아이의 얼굴도 잊은 것처럼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흔한 시골처럼 아이들은 자라나서 점차 도시로 떠났고, 이 섬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노인들만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섬에 오는 사람들이야, 하루 이틀 날 잡고 오는 낚시객들이거나 어제 들었던 '서울 사람들' 뿐이겠지.

 

찰칵, 나는 그 흘러버린 건축물을 렌즈에 담았다. 때마침 불어온 서풍이 때 묻은 깃발을 펼쳐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며 셔터를 누르던 나는 문뜩 운동장의 모래를 바라보았다. 작은 신발 자국은 없고 내가 남긴 큰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아니, 개가 남긴 듯한 발자국도 보였다.

 

어제 이장이 원통하게 털어놓은 개 이야기가 떠올랐다. 쾌활함이 느껴지는 발자국의 모습을 보아 분명 나무에 묶여 맞아 죽은 최후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너머의 산중을 뛰어놀다가 정 배가 고파질 무렵 주인의 곁으로 돌아오겠지.

 

이윽고 나는 해안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몽돌이 파도에 제 몸을 들썩였다. 갈대밭 너머로는 주인 잃은 폐염전 서너 곳이 모습을 보였다. 그 처량맞은 풍경은 애잔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였다. 아이러니했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풍경에서도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니.

 

폐염전과 바닷가를 오가던 나는 부쩍 따가워진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밑으로 숨었다. 아직 장마가 그치지 않은 초여름이라 햇볕만 피하면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이름 모를 풀떼기를 방석 삼아 앉은 나는 오전에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고파도의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이 사진들을 본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찍어왔느냐'고 물을 정도로 낡은 것 같으면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세련된 모습이 있었다. 마지막 출사지로 이 섬을 선택한 내 직감이 맞은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되짚어가던 나는 또다시 어젯밤에 찍었던 안개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아무리 봐도 이 사진은 형용할 수 없이 묘한 느낌이 왔다. 와인처럼. 아무리 눈을 감아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안개의 형상은 내가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저 안갯속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존재의 정체는 뭘까? 서울 사람이 잃어버렸다던 개가 다시 내려온 거였을까? 하지만 개의 키가 나만큼이나 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넓게 흐느적거릴 수도 없었다. 뼈를 긁는 듯한 호기심의 이면에서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해로운 감정에 삼켜지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능선을 따라 고파도의 정상에 올라볼 계획이었다. 서쪽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이 중천의 해를 가렸다. 다행이었다. 산길을 따라 오르는 중에도 그렇게 덥지 않았으니까.

 

갑판에서 본 고파도의 산은 낮은 언덕 같아 보였지만, 직접 두 발로 오르니 장가계를 등반하는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여기저기에는 가득한 이끼와 고사리, 마치 고대의 숲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찍혀있는 개의 발자국.

 

호기심이 동한 나는 개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숲길에는 이정표도 기준도 없었으니, 그나마 개가 먼저 간 길이 그나마 평평한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서울 사람의 개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

 

능선을 따라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서, 나는 고파도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었다. 등 뒤로는 푸른 능선과 마을이 너르게 보였고, 서쪽으로는 깎아지르는 해안절벽과 붉은 태양이 내려 보였다. 그리고 개의 발자국이 끝난 곳에는 피범벅이 된 바위가 있었다.

 

심장이 덜컹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주춤거리듯 옅어지는 발자국 끝에 선명한 피칠갑. 바닷바람이 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선명해 보였다. 한 주, 어쩌면 어제 흘린 피일지도 모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붉은 흔적을 만져보니 특유의 묘한 질감이 느껴졌다.

 

바위의 피칠갑은 한 두 방울의 핏자국이 되어 해안의 절벽으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끊겼다. 곧바로 바닥까지 이어지는 해안절벽. 바닷바람에 밀려 떨어질까봐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보이는 절벽 밑에서 개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줌을 당겼다. 개의 사체가 훨씬 더 자세히 보였다. 피칠갑이 된 바위에 안면을 박았던 것일까? 두 눈의 형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귀청을 찢을 것 같은 사이렌이 마을에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해가 서쪽 수평선에 잡아먹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늘은 그만큼 어두워지고 있었고, 구름처럼만 보였던 하얀 연기가 수평선에서부터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두려움은 등줄기를 타고 차오른다. 도망가야 한다, 어서 동쪽으로 가야 한다. 생각과 달리 발은 뎌디게 움직였다. 결국 박자를 놓친 나는 도랑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뒤를 보니 안개는 이미 섬의 서쪽을 삼킨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삼키러 오고 있다, 빠르게.

 

번개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어젯밤의 기억이,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달려야 한다. 안개의 옅은 끝이 손아귀처럼 다가와 내 발목에 이르렀다. 고사리도 이끼도, 숲 안에 가득한 색깔이 조금씩 채도를 잃어간다.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하지만 안개도 나를 삼켰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폐를 멈추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개를 들이쉬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달려야 했다. 심장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여기, 어여와유!”

 

이장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이장의 목소리를 향해 뛰었다. 얼마나 더 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안갯속에서 조금씩 사람의 형체가 짙어졌고, 나는 겨우 이장의 손을 잡았다.

 

“저녁 전에는 왔어야쥬.”

“산 정상에서 찾았어요. 그 개는 죽었어요.”

“그랬겠쥬.”

 

이장은 초연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래서 서울 촌놈들에게 개를 기를 거면 실내에서 기르시라 조언했는데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필사의 달리기 끝에 죽음에서 벗어난 내 분노는 이장의 멱살로 향했다.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안개는!”

“안개를 무서워하지 마유. 오히려 우리를 감춰주는 거니께.”

 

이장은 차분하지만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뱃일로 다져진 이의 악력을 버텨낼 수는 없었고, 산길을 뛰어 내려온 내 다리는 완전히 풀려버렸다. 얼이 빠져있는 나에게 이장은 내일 가장 이른 배가 떠나는 시간을 일러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이 짙어지며, 안개도 짙어졌다. 또다시 어젯밤과 같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엊그제도 또 어쩌면 내가 짐작할 수도 없는 머나먼 과거에도 이런 풍경이었겠지, 대체 이 섬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그동안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자리에 누워서 나는 창밖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며 떠올렸다.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비밀스럽게 안개로 감추어진 섬의 정체를 밝히고 공모전에 입상할 좋은 기회. 이 섬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인 지금 이 아니면 안 되는 기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메라를 들었다. 두려움에 고동쳤던 심장이 이번에는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이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스친다. ‘안개는 감추는 것.’ 그렇다면 플래시를 터뜨려 안개를 뚫고 비밀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회오리치는 안개 앞에서, 어디를 향해 초점을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동안이나 안개를 응시한 끝에 묘한 특이점이 느껴졌다. 목적지 없이 흐르는 안개가 다시금 휘말리는 그곳을 향하여

 

찰칵!

 

어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소리가 적막을 터뜨렸다. 나는 그 순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압박감에 짓눌렸다. 날카로운 야수의 발톱이 등줄기를 훑는듯한, 그 악의로 가득 찬 발톱이 척추의 한 단 한 단을 천천히 내려 긁는 듯한, 말도 안 되게 불쾌한 기분에 숨이 멈춘다.

 

눈이 마주친 것이다. 플래시가 장막을 찢자 그동안 감추어왔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것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를 휘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발견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듯이. 그리고 나와 결국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잃을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회관 안으로 기어들어와 문을 잠갔다. 두려움에 두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무언가 보이는 것 같은 기분. 그 형체, 검은 눈동자, 번쩍이는 섬광, 찢겨진 안개. 오히려 두 눈을 감을수록 그 짧은 눈 맞춤은 선명해지고 악의는 명백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눈을 뜰 수는 없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이곳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그다음 날, 저는 도망쳐 나오듯 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사진을 선별할 정신도 없어서 SD카드를 뽑아 그대로 주최 측에 제출했습니다. 횡설수설이었지만 면식 덕분인지 큰 무리 없이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발표 전까지 요양할 생각으로 편하게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잠에 들 수 없었고, 눈을 감으면 고파도에서 본 안개 속의 피사체가 나타나 정신을 뒤흔들어놓습니다. 휘몰아치는 잔상이 채찍처럼 뇌리를 찢어발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시적인 신경증으로 믿고 애써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안개는 점점 옅어져 가고 환상은 더욱 짙어져 갑니다. 깡마르고 길쭉길쭉한 사지를 가진 짐승, 그것은 짐승이겠지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그 날카로운 발톱과 눈동자, 그것은 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수면제를 들이키고 그대로 쓰러져 기절하듯 깨어있습니다.

 

의사는 저를 의심합니다. 그 많던 수면제가 다 어디 가고 벌써 왔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눈을 감으면 고통스러운 환상이 나타나 나를 죽이려는 것 같다고. 목을 비틀거나 숨통을 끊는 것이 아니라 비명에 잠겨 죽이려는 것 같다고.

 

의사는 붉고 작은 알약을 하나 더 줍니다. 하지만 천남성이 아프면 하얀색 콩닥콩닥 슬픈 것처럼, 그 약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국 그날 밤도 맨정신으로 사라진 안개를 끌어당기려 하지만 그 존재는 더 가까이 왔습니다.

 

그 짐승도 나를 보고 웃고 물을 마시는 것도 너무 힘이 듭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에 먹은 철판볶음이 즐거운 여행을 시작했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결국 초콜릿도 마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손에 쥐고 당근처럼 소리 지르려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이걸 썼다구요?"

"스틸녹스는 과다복용 시 환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나는 피곤한 두 눈을 부비며 형사들에게 수면제의 위험성을 증언했다. 하지만 의심병이 걸린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약을 어떻게 먹어야 스스로 두 눈을 파낼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대체 얼마나 먹어야 이렇게 환각을 보는 거죠?"

"개인 체질에 따라 약한 환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약을 처방한 의사는 누구입니까? 만나보고 싶습니다."

 

조사를 마친 형사들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수면제를 처방한 개인 의원에 쳐들어갈 것 같지만, 거기서도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이다. 적법하고 당연한 처방이었으니까. 나는 한참이나 제 두 눈을 파버린 불쌍한 사진사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재능이다.

 

"정신이 들어요?"

"...어두워요,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정말 죄송하지만, 환자분은 두 눈의 시력을 잃으셨어요."

 

나는 참 많은 종류의 환자를 보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손가락 한 마디만 잃어도 세상을 모두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두 눈을 잃은 사진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감정을 해야 할까?

 

"담담하시네요."

"이제 살았어요."

 

오후에는 정신감정을 해야겠다. 나는 불행한 천재 사진사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 놓었다.

 

"그... 유감입니다만, 눈을 잃기 전에 제출하신 사진이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랬겠죠."

"모두들 선생님 사진을 보고 감탄하더군요."

 

사진사는 붕대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다들 그 사진을 본 겁니까?"

"네, 뉴스에도 나왔었던걸요."

 

그 말을 들은 사진사는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피눈물이 붕대 너머로 스며들어 눈의 모습처럼 되었다. 나는 그 사진사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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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4 단편 21세기 뮤지컬 로봇이 23세기까지 살아남은 것에 대하여 미믹응가 2020.10.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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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1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에필로그 키미기미 2020.10.1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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