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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아르테(arte), 2017년 11월

아기가 죽었다. (이것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아기의 누나도 곧 죽을 것이다. 두 아이를 살해한 사람은 보모다. 보모는 범죄를 저지른 후 자신의 두 팔목을 칼로 긋고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의식을 잃었다. 살인 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한 아이들의 엄마는 쇼크 상태에 빠졌다. 이토록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다름 아닌 보모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모는 누구이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소설은 프랑스의 어느 부부가 보모를 구하는 장면-이 모든 일의 뿌리를 찾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최초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리마니는 짧고 간결한 호흡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거칠면서도 대담한 방식으로 서사를 힘 있게 밀고 나간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의미심장한 사건들의 인과를 빠짐없이 연결하기보다 끊임없이 의문점을 남겨두는 방식을 택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서사의 감추어진 사연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여지를 허용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같은 이야기를 읽고도 꽤 다른 감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일 수 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이던 시절로 돌아간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불법 체류자는 안 돼, 알았지?" 부부가 보모를 채용할 때 가장 단호하게 정해놓은 기준은 내국인으로서의 법적 지위다. 뒤이어 그렇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나온다. "무슨 일이 있을 때 경찰을 부르거나 병원에 가는 걸 겁내는 사람은 싫어." 아이의 엄마인 미리암은 며칠 전에도 친구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다. "애가 있는 여자라면 자기 나라에 두고 온 게 나아." 미리암은 불편하다. 아무리 그럴 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다고 해도, '아이가 있다고 어떤 여자를 배척하는 건 끔찍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를 단호히 배척하는 남편 폴의 기준에 미리암은 오히려 안도한다. 내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는 일이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개선하는 일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두 생각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할 수 있을까. 그동안 사회적 지위나 체면, 품위, 윤리규범, 그밖에 어떤 이유로든 전면에 내세울 수 없던 차별적 기준이 집단 내부의 은밀한 논리에 의해 순식간에 정당화되는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므로.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제 일상의 영역에서 그걸 실천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다. 차별의 부당함을 부르짖는 목소리에는 윤리적 찬사가 보상으로 돌아오지만, 정작 그 목소리가 녹아든 실천에는 되려 불편과 위험이 따라붙는 지독한 현실의 반영이다. 『달콤한 노래』는 사회적 필요에 의한 처신과 일상에 녹아드는 인간 본성의 이중적 속성을 인상적으로 탐구하고 대조해낸다.

보모 루이즈는 폴과 미리암 부부에게 거의 완벽에 가까운 후보였다. 처음 만난 날 루이즈는 부부의 딸 밀라를 다루는 자연스럽고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이즈의 남편은 죽었고, 딸 스테파니는 다 컸다. 면접에 응하는 그녀의 태도는 침착하고 얼굴은 고요하다. 전 고용인은 루이즈를 보모로 잡아두기 위해 셋째를 가질 생각까지 했다며 그녀를 극찬한다. 미리암은 우리에게 요정이 찾아왔다며 기뻐한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흐르는 시간은, 부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루이즈에 대한 부부의 감정과 견해도 조금씩 익숙하게 바래진다. 루이즈가 부부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면서, 부부는-특히 미리암은- 육체적 안락함과 동시에 심리적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느낌도 콕 집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게 루이즈는 그들 삶의 일부가 되어 간다.

이야기의 주된 테마는 처음부터 둘로 나뉜다. 하나는 엄마와 보모가 여성으로서 다투게 되는 아이에 대한 소유욕(혹은 위기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지위나 위계에 따라 수직적으로 형성되는 계층구조(혹은 계급의식)이다. 보모 루이즈는 폴과 미리암, 그리고 그들의 아이인 밀라와 아당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실이 폴과 미리암의 심기를 거스른다. 한갓 피고용인에 불과한 루이즈가 그들 삶에서 점차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결과적으로 그들 행복의 한 부분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사실 말이다. 때문에 부부는 루이즈의 지위를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한다. 그녀는 필요에 의해 고용된 보모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 해고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므로 결국 칼자루는 부부가 쥐고 있다. 정말 그럴까.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바, 루이즈는 갈 곳이 없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월세 독촉을 받으며 살고 있는 열악한 원룸에서는 곧 쫓겨날 처지이고, 각종 세금 고지서와 대출 연체금 고지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녀를 따라다닌다. 폴과 미리암의 가족에게 환영받으며 새롭게 둥지를 틀었지만, 그녀는 결국 언제까지나 타인이다. 보모라는 것은 그녀의 직업일 뿐, 어떤 집단적 소속감을 안겨주지 않는다. 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모인 수많은 보모들이 제각각 눈치만 보며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연대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모들은 자기들끼리 연대하기보다 차라리 그들을 고용한 가족에 소속되기를 갈망한다. 그 조급한 갈망이 너무 앞선 루이즈는 마치 상류층 사교계 여성처럼 행동해서 다른 보모의 비웃음 어린 눈총을 받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행복은 폴과 미리암 가족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다면, 루이즈는 그야말로 서있을 땅 한 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절박해진 루이즈는 폴과 미리암에게 셋째 아기를 만들어주려 무리하게 애쓴다. 집안일과 아이들을 빈틈없이 케어하며 부부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공원에서 만나 가까워진 친구에게 곧 태어날 주인집 아기에 대해 말하며 행복감에 젖는다. 미리암을 위해 임신에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몸의 변화를 주시한다. 하지만 결과는 미리암이 사적인 공간에 주기적으로 남기는 생리혈의 흔적으로 돌아온다. 루이즈는 좌절한다. 이 이야기의 음울한 후반부에서 우리는, 어느 갈 곳 잃은 여인의 초상을 본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래서 루이즈는 두 아이를 끔찍하게 살해한 걸까. 확실치 않다. 이야기는 모든 독자가 가장 궁금해할 바로 그 장면을 여백으로 남겨둔다. 루이즈가 두 아이를 살해한 결정적 동기, 즉 비극의 도화선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 이 책에서는 묘사되지 않는다. 두 아이를 살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아기가 이미 죽어있는 사건 현장에 대한 담담한 서술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부분을 안갯속에 감추어 놓는다. 이 의도적 은폐가, 이야기의 완성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루이즈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에 대한 해답을 끝까지 해결하지 않고 남겨둠으로써 소설은, '미지의 인물에 대한 탐구'라는 과녁의 정중앙에 끝내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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