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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2020년 9월

황정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에는 총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앞의 두 편은 『창작과 비평』, 『자음과 모음』에 각각 발표된 바 있고 뒤의 두 편은 이 책에 처음 실렸다. 소설은 한세진과 한영진 자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이순일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세 모녀가 지금도 살아내고 있을 삶들의 '깊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 속 세계는 내 경험과 이해의 범위 너머에 있다. 황정은은 말했다. '『연년세세』를 쓰는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겠다'고.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단호하게 '잊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각각의 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삶을 살다 나왔'다고 말했다. 작품을 읽고 나면 작가가 얼마나 절절한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 모두가 얼마간은 작가와 같은 경험을 하고 나오게 되기 때문에.

「파묘破墓」는 한세진의 이야기이고, 「하고 싶은 말」은 한영진의 이야기이며, 「무명無名」은 이순일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들」은 다시 한세진의 이야기. 이 책에 남성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으므로. 남성들의 우악스런 힘은 여성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겼다. 이순일의 막내아들이자 장남인 한만수, 한영진의 남편 김원상, 이순일의 남편 한중언, 그리고 그들 모두를 둘러싼 전후의 한국이란 시간과 공간. 이순일은 이들 모두를 온몸으로 받아낸 전후세대의 상징적 인물이며, 한세진과 한영진은 그런 어머니의 일부를 제 안에 간직한 채로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파묘」에서 한세진은 어머니 이순일의 조부 묘를 파하러 가는 길에 동행한다. 이순일의 남편 한중언과 장녀 한영진은 처음부터 동행할 생각이 없었고, 막내이자 장남인 한만수는 뉴질랜드에서 유학 중이다. 46년생 이순일은 일흔둘의 나이에 비로소 조부의 묘를 파하기로 했다. 조부의 제사를 매년 꼬박꼬박 챙기기엔 이제 이순일도 너무 나이 들었다. 모녀는 파한 묘에서 퍼올린 조부의 마지막 유해 몇 점을 태우며 절을 올린다. 바다 건너 먼 곳에서 한세진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온 한만수는 웃으며 수고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43-44쪽)

한세진을 이순일의 파묘 일정에 동행하게 만든 것이 정말 효심뿐이었을까. 한만수의 눈에 한세진은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하는 착한 누나일지도 모른다. 한세진은 그게 아니라고 답한다. 효심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증조부의 파묘라는 아득한 행렬에 동참하도록 했을까. 감히 인간 삶의 깊이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세진은 아마도 적당한 효심과 적당한 가족애, 그리고 적당한 처세와 적당히 냉소적인 유머를 장착한 채로 살아가는 인물일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지극한 효심과 남다른 진정성을 발휘하여 파묘에 동참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누군가를 온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필요한 잠깐의 묵념 같은 것이었겠지.

「하고 싶은 말」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한영진은 백화점 침구매장의 유능한 판매원이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한 외국인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은 그는 남편 김원상에게 그 이야기를 메시지로 보냈다.

김원상이 즉시 답신해왔다.
ㅋㅋㅋㅋㅋ
Where is the toilet?
이 말을 니가 잘못 들은 거 아니고?

(53쪽)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김원상은 나쁘지 않은 남편이다. 한영진과 김원상이 살고 있는 5층짜리 단독빌라는 시가 재산이다. 김원상은 그 건물 4층에 장인 장모를 모시면서 이전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의 절반을 묵묵히 마련하고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친정 식구들과 함께 간 제주 오름에서 무릎이 편찮은 장모를 등에 업고 걷는 일을 별다른 의식도 과시도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어떤 정서에서 김원상은 완벽히 실격하고 만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쪽)

황정은의 세계에서 생각은 침묵이고, 침묵은 버티는 일이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남매 중 가장 먼저 취업해서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한영진을 기다렸다가 새 밥과 새 국으로 저녁밥상을 내 왔던 눈물겨운 이순일에게 끝내 하지 못한,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을 끝끝내 버텨내는 일.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81쪽)

중첩되는 생각은 삶의 깊이를 더한다.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어떤 질문에는 대답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도. 세상에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순일은 「무명」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린다. 1950년, 세 살 동생을 등에 업은 다섯 살 이순일이 끝내 피란길에 오르지 못하고 지경리 외조부에게 맡겨졌던 기억. 저녁밥을 짓던 아궁이에서 옮겨 붙은 불이 동생의 살을 태우고 끝내 목숨을 앗아가던 기억. 1960년, 열다섯의 나이로 고모를 따라 김포 송정리로 와서 그 집의 온갖 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동명, 동갑인 이웃집의 순자.

그게 누군데?
순자.
순자가 누구야?
순자를 몰라?
누군데?
니가 순자를 모른다고? 이순일은 어리둥절해 한세진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순자를 모르는구나.

(90쪽)

이순일은 결혼하기 전까지 제 이름을 모른 채 다만 '순자'로 불렸다. 그때는 왜 그리 순자라는 이름이 많았을까. 어쩌면 그건 무명無名일지도. '이순일'이란 버젓한 이름을 찾아줄 의지도 요량도 없이 ―그리고 찰나의 고민도 없이― 버릇처럼 '순자'를 입에 올리던 표정 없는 얼굴들처럼. 나도 순자였고, 이웃집의 그 아이도 순자였는데,  내가 순자의 뺨을 쳤고, 그때 그 아이는 울지도 않았었는데, 언제부턴가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고, 이제 사람들은 순자가 누군지도 모르는구나. 용서를 구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일들을 생각하며 순자는, 아니 이순일은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게 다 뭐야.
한만수는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4층 상태에 기겁했다. 이순일의 방과 부엌과 베란다를 채운 사물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다가 엄마, 좀 버리시라고,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111-112쪽)

남편과 오래전부터 각방을 쓴 이순일은 자신의 공간에 자신의 사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워 넣었다. 그건 당연하게도 이순일의 인생을 닮았을 것인데, 그런데 아들조차도 그 공간을 납득하지 못했다. 지나온 삶의 깊이는 다가오는 삶의 높이에 자기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다. 이순일과 한영진과 한세진 사이, 중첩된 삶의 이야기는 때로 너무나도 쉽게 압축되어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높고 화려하지 않으니까. 평면 위에 안주하는 사람은 다른 삶들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도 침묵의 깊이는 이어진다.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은 거제도에 피란을 갔을 때 만난 미군과 결혼해서 휴전 후 미국으로 갔다. 한세진이 북 페스티벌 일정으로 미국에 왔을 때 짧게 통화한 노먼은 윤부경의 아들이고, 직접 만난 제이미는 윤부경의 손녀다. 다음에 노먼과 같이 한국에 오라고 말하는 한세진에게 제이미는 고개를 젓는다.

노먼은 한국을 좋아하지 않아.
한국어를 좋아하지 않고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아.
(……)
노먼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176쪽)

나는 생각해.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177쪽)

노먼은 한국어를 할 수 있지만 영어가 서툰 한국인 사촌과 통화할 때조차도 그 언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를 구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발화되지 않는 말들. 노먼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랬을까. 그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지고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한세진 일행이 북 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작가 두 명과 진행한 대담이 끝나갈 때 한 여성 방청객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한시간 반을 여기 앉아 당신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국인 입양아, 한국의 입양아 수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 당신들은 한시간 반 동안 그것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Why?

(165쪽)

그가 보기에 한국과 미국의 작가들이 대화를 나누는 세션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란 다름 아닌 한국의 입양아 수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인생의 당사자에게는, 용서할 수 없어도 반드시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내게 이 소설은 그동안 체념처럼 마음에 쌓아두었지만 언젠가 꼭 꺼내져야 하는 삶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한세진은 이후 여자친구와의 통화에서 그 여성에게 받은 질문을 '평생 잊지 못할 부끄러운 질문'이라 말하며, 자신의 '무지를 사과'했다고 털어놓는다. 마땅히 알아야 할 타인의 깊은 고통을 외면하고도 삶을 누릴 수 있었다는, 그 자신도 깊은 고통에 신음해본 적 있는 자의 고백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가. 거칠고 얄팍한 세상 속에서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일들에 누군가 힘겹게 목소리를 낸다면, 나의 대답도 이처럼 진심 어린 고백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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