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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엘리, 2020년 11월

한나 렌의 단편소설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는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야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저마다 실존에 관한 밀도 높은 질문을 담고 있다.

표제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 사람들은 의식만으로 평행 세계를 무한히 넘나들 수 있는 '승각'이라는 기관을 사용한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위험이나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나쁜 일을 겪어도 승각을 이용하여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쓱 건너가면 그만이다. 이토록 가볍고 매끄러운 세계에서 승각에 장애를 입는다면, 그래서 단 한 번의 인생을 부여잡고 살아가야 한다면, ―다시 말해 현재 지구에 사는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된다면― 그 선형적 삶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팔다리를 다치든, 시각이나 청각, 혹여 가족을 잃게 되어도, 우리는 사는 세계를 슬쩍 바꾸면 그만이다. 괴로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고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승각장애가 있다면 모든 '도망'이 불가능해진다. (26쪽)

'승각'의 체험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전복적이면서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승각을 지닌 개인은 다른 세계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평행우주와도 자유롭게 교감할 수 있다. 주인공 '하즈키'는 지인인 '시바미네'가 경찰관인 세계와 편의점 직원인 세계에 동시에 접속하여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건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단 한 사람과도 무수히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다. 이쪽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세계에 실시간으로 접속하여 도움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발상은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1998)에서 주인공이 시간을 넘나들며 현재의 해답을 미래의 기억에서 찾는 역설적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편 승각장애를 가진 '마코토'는 다른 세계로 의식을 옮길 수 없다. 장애가 없는 다른 세계의 수많은 마코토들로부터 단절된 채 오직 이쪽 세계의 인생만을 살고 죽을 운명인 것이다. 이로써 독자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삶의 기본 조건이 치명적인 장애로 뒤바뀌는 세계를 본다. 하즈키는 다른 모든 마코토들과 친구로 지냈지만 승각장애가 있는 마코토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승각을 지닌 채로는 온전히 마코토의 곁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달은 하즈키는 가능성과 실존 사이에서 고민하다 과감히 결단을 내린다.

"후회할 거라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쪽을 선택했어." (60쪽)

소중한 존재를 향한 선택은 때로 극도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결정을 요구한다. 모든 경우의 수에서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는 결정만이 최선으로 간주되는 세계에서, 하즈키는 반드시 후회하고 말 어떤 미래를 선택한다. 그 미래에 승각장애를 가진 마코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같은 존재로 숨쉬겠다는 강한 의지로. 모두가 어리석은 결정이라며 비난할 테지만, 영문도 모른 채 내던져진 세상에서 스스로 결정한 단 한 번의 실존적 행위에는 그 모든 비난을 초월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즈키가 선택한 마코토는 다른 모든 세계의 마코토들에게 없는 의미를 지닌 존재다.

「제로연대의 임계점」과 「홀리 아이언 메이든」, 그리고 「싱귤래리티 소비에트」는 대체역사소설이다. 「제로연대의 임계점」은 신화화된 일본 SF 1세대의 작가론을 그들의 작품과 사료에 기반하여 역사적으로 조명한다. 가공의 역사임에도 정교한 기술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현실감을 획득하며 충분히 있음직한 역사로 대체된다. 가이메이 여학교 동문인 '도미에', '후지', '오토라'는 이 대체역사물의 세계에서 1900년대(제로연대) 일본 SF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다. 이야기는 제로연대에 관해 알려진 거짓 일화로 시작하여, 세 인물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일화와 작품에 대한 짤막한 비평을 다루고는 결말부에 다시 신화적 영역으로 들어선다.

「홀리 아이언 메이든」은 죽은 동생 '고토에'가 살아있는 언니 '마리나'에게 생전에 부친 긴 편지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마리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후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편지는 동시에 거대한 역사를 움직인 사료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편지에 따르면 마리나는 간단한 접촉만으로 그 사람의 폭력성을 잠재우는 초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을 알아본 한 장교의 도움으로 마리나는 결국 평화교섭과 정전 협정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언니가 만들어낸 최고의 결과에도― 고토에는 한 가지 의문을 끝끝내 놓을 수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또다시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습니다. 만약 언니에게 포옹을 받고 올바른 심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그 올바름이 과연 나 자신의 것일까. (215쪽)

표제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 보였던 실존적 고민이 다시금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토에는 전능한 언니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평화의 나라에서 홀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전쟁과 폭력은 물론 끔찍한 비극이지만, 일생을 타인의 마리오네트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은 또한 얼마나 희비극적인가. 모두가 희비극의 배우로 사는 현실에서, 나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결정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렇지만 나는 여동생으로서, 언니가 세상을 구원하고, 언니가 사람들에게 추종과 존경을 받고, 언니의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언니의 기적을 받지 못한 유일한 한 사람이라는 배제된 존재로 살기를 거부합니다. (228-229쪽)

「싱귤래리티 소비에트」는 미소 간 냉전 체제가 우주개발 경쟁에서 인공지능 대결로 재편되는 대체역사를 다룬다. 달에 성조기가 꽂히는 익숙한 장면은 순식간에 소련의 국기와 거대한 스탈린 동상으로 대체되고, 소련의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싸늘한 연설로 자유주의 진영의 패배를 알린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연방의 싱귤래리티(특이점)' 시대가 열린다.

"우리 소비에트의 인공지능인 '보댜노이'는 기술적 특이점을 돌파했다." (240쪽)

이후 미소의 대결은 인공지능 대결로 재편된다. 소련의 보댜노이에 뒤이어 미국도 인공지능 '링컨'을 설계하고, 우주전쟁 패배로 인한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이버 공간에 낙원을 구축한다. 절망한 서방국가의 인민들은 자유주의 진영이 소비에트 진영에 승리를 거둔 가상현실로 이주하여 행복한 꿈을 꾸며 살아간다. 그에 반해 소비에트의 인민들은 서방국가에 계속해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뇌의 일부를 인공지능 보댜노이의 연산 자원으로 위임한다. 이렇게 묵직한 긴장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양 진영에 속한 개인들의 신경전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또다시 실존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은 한 인간의 정신적 기질을 영구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임플랜트'라는 의료기술을 가정한다. 여기에서 권총은 인간의 뇌에 임플랜트를 이식하는 수단이다. 이야기는 도입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식에 주목한다. 임플랜트를 통해 이식된 순도 높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정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자주 드러나는 주제의식은 여기서도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등장한다. 이식된 감정에 일말의 불확실성도 섞여있지 않다면 우리는 진실함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야기의 결말은 바로 그 기준을 암시한다.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신칸센 열차의 저속화라는 재난을 전제로 출발한다. 주인공 '하야키'의 친구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열차 '노조미 123호'가 갑자기 2600만 분의 1의 속도로 저속화되어버린 것이다. 계산대로라면 친구들이 다음 정차역에 도착하는 시기는 무려 서기 4700년. 이야기는 죽음에 가까운 저속화 현상을 둘러싸고 대중이 보이는 반응과 탑승자 가족의 분투와 집념, 주변인의 욕망과 망설임 등을 개연성 있게 묘사한다. 주인공 하야키는 원인 모를 재난의 주변부에서 10년을 서성이다 마침내 진실을 알아내고, 열차 안에 갇힌 친구를 원래의 시간대로 데려오기 위해 제의에 가까운 단독 작전을 실행한다. 그 과정에서 버젓이 눈앞에 있음에도 서로 다른 시간선에 묶여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의 존재성과, 그로 인해 혼란스럽게 얽히고설킨 주인공 내면의 심리가 인상 깊게 드러난다. 하야키가 과거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직면하면서 단호히 희생한 결과는, 유폐된 시간의 제약에도 끝까지 재회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또 다른 인물의 화답으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인간 존재성의 본질은 실존하는 개인들의 작지만 단단한 연대의 고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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