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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월드
엄정진, 그래비티북스, 2020년 11월

엄정진의 장편 『레일월드』는 흥미로운 설정과 인상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이야기는 우주선 '임라나호'가 항해 중에 표류하는 동물들의 시체 덩어리를 무더기로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동물 개체의 외형은 파충류와 흡사하지만 눈이 세 개에 팔이 네 개 달려 있고 꼬리와 등 지느러미가 있으며 길쭉한 두 다리로 직립하며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어떤 사연을 거쳐 맨몸으로 우주를 떠돌게 된 것일까. 중력과 대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문명을 이루며 진화해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이야기는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임라나호가 속한 은하 연방의 세계관은 지구와 태양계의 스케일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은하 연방은 우리 은하계에 존재하는 약 2억 개 문명권의 연합체이며, 블랙홀을 이용한 웜홀 항법과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36곳이나 되는 수도 '워나스―마바이'를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세계관이 어떻게 일관성 있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어떤 이야기는 익숙한 현실의 감각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윤곽을 그려나갈 수 있다.

은하 연방에서 지성체는 행성에서 생명체로 태어난 '내추럴(인간)'과 연방에서 만들어낸 인공지능, 이렇게 둘로 나뉜다. 임라나호의 선원도 내추럴인 선장과 인공지능 부관으로 짝지어져 있다. 둘은 우연히 마주친 정체불명의 시체 덩어리에서 생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개체를 발견하고는 우주선에 싣고 수도로 돌아와 의료진에게 조사를 의뢰한다. 조사 결과 원래의 모습으로 살려낼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 선장은 그의 뇌를 스캔해 정보의식체로 재탄생시키는 절차에 동의한다. 선장 또한 과거에 은하 연방의 시민이 되기 위해 정보의식체로 재탄생한 경험이 있는데, 이때 본체는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고 기억과 정신은 정보의식이 되어 삶을 이어간다. 이렇게 탄생한 정보의식체에게 육체란 언제든 교환 가능한 부품일 뿐이다.

한편 정보의식체로 새롭게 태어난 정체불명의 조난자는 잠깐 동안 혼란을 겪고 난 뒤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우주의 변방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문명권 개체와의 첫 만남에서 선장이 곧바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은하 연방의 발달한 과학기술 덕분이다. 정보의식체는 언제 어디서든 연방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필요한 정보를 열람하거나 감각 기능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상대와도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도 이 종족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종족-씨족-가문-이름'의 형식으로 길게 명명되는데, 선장은 그의 이름만 따서 '유옌'이라 부르기로 한다. 유옌은 자신이 네모나고 납작한 별에서 왔으며, 임라나호가 만났던 덩어리는 고향별의 전쟁에서 희생된 동료들의 시신이라고 말한다. 연방의 과학 지식에 한참 어긋나는 유옌의 설명에 당황한 선장은 짧은 논쟁 끝에 함께 그의 고향별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장은 정말로 네모나고 평평한 행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건 항성 주위의 공전 궤도를 따라 건설된 레일 위에서 기차처럼 달리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다. 선장은 이 세계를 '레일월드'라 이름 짓는다.

이후 레일월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대와 고대, 과학과 미스터리, 첨단과 아날로그의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스펙터클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나간다. 실은 도입부에 나오는 우주를 유영하는 유기 생명체 덩어리부터도 대항해시대의 난파선이나 유령선을 떠오르게 하는 웅장한 스산함이 있었는데, 선장 일행이 레일월드에 도착하고부터는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세계관 자체가 끝없이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양가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레일월드』에 등장하는 모든 익숙하고 낯선 이미지들은 시종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이야기의 매력을 더해나간다.

레일월드에는 무려 수천조의 개체수를 이루며 살고 있는 종족이 셋이나 되고, 이들은 자기네 몸에 난 무늬를 통해 종족과 국가를 구별한다. 유옌이 속한 곳은 점박이 무늬 종족의 '에우더 합중국'인데, 민무늬 종족의 '에우딘 제국'과는 적대 관계에 놓여 있고 줄무늬 종족의 '에우들 연방공화국'과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각국의 수뇌부는 크고 화려한 지느러미 장식으로 높은 신분을 드러낸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대규모 세계전쟁을 치르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다. 레일월드는 폐쇄된 환경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 불안정한 대기와 토양 성분, 선로와 열차의 파손으로 인한 주기적 지진 등의 문제로 점차 악화되어 끝내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다. 총 개체수의 절반 이상이 참전하는 국가 간 총력전은 실상 인구를 줄여 세계 멸망의 시기를 늦추기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된 전쟁이다. 유옌이 우주를 떠돌다 임라나호에 구조된 것도 레일월드에서 일어난 14차 세계전쟁의 부수적 결과 중 하나였다. 선장은 전쟁을 막고 다양한 생명체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은하 연방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만다.

결국 선장은 부관, 유옌과 함께 임라나호를 타고 각국 정상을 방문하여 직접 설득을 시도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닌 과학기술과 교육, 문명의 힘으로 멸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선장의 말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강대국의 논리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기(큰 지느러미―레일월드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세력의 지도자)' 회담에서 한 광신도가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레일월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이 전쟁을 외부에서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 레일월드의 가장자리 벽을 타고 다니며 쓰레기를 제거하는, '큰손가락'이라 불리는 삼각뿔 모양의 거대 구조물. 분명 뚜렷한 목표와 의식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각 나라의 입장을 중재하지도 않고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는 신적인 존재. 하긴, 레일월드 자체가 처음부터 인공 구조물이었던 데다가 이들의 기술 역시 '신의 하사품'이라는 모종의 신화적 장치에 기반해 작동하지 않던가. 이들이 수준 높은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 이 세계를 관리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인데, 그 존재에 대해 탐구할 동기와 역량을 갖추기에는 이들의 지식 수준과 문명 수준의 격차가 너무 많이 벌어져 있다. 선장 일행은 임라나호를 타고 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어줄 큰손가락에게 접근한다.

일행은 이내 큰손가락의 내부로 들어가 '데미테서렉트(정십육포체, 4차원으로 확장된 정팔면체)'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3차원 좌표상에 존재하는 은하계를 한 단계 상위에서 관장하는 '의식주도기구'인 데미테서렉트는, 우리 은하와 이웃 은하가 충돌하는 시점의 전쟁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레일월드를 건설하고 관리해왔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 독자는 데미테서렉트를 통해 선장 일행과 함께 '고래 전쟁'이라 불리는 레일월드의 장대한 세계전쟁을 관전하게 된다. 이 책의 표지는 바로 이 장면의 스펙터클을 묘사하고 있다.

레일월드에서 전쟁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치러진다. 먼저 각국에서 수천 km의 고래 모양 금속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수천조의 종족 개체가 달라붙어 하나의 함선―또는 진형―을 만든다. 15차 세계 전쟁에는 세 국가를 모두 합쳐 1경 5천조의 개체가 참전했다. 전쟁은 세 마리 거대 고래의 육탄전으로 전개된다. 다만 레일월드에 피해가 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치열하게 싸운 뒤 우주 저편으로 던져진다. 우주를 유영하던 시체 덩어리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많은 개체들이 뭉쳐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복잡한 원리가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신의 하사품'인 금속 뼈대에 내재된 힘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레일월드에서 과학적,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현상은 대부분 신의 하사품에서 기인한다. 아마 긴 설명을 생략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충분히 많은 설명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최근 한국에서 SF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아직까지 하드 SF의 장르적 정체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공략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정교하면서도 매력적인 장치와 설정들이 필요하고, 그보다 더 정교한 설명이 뒷받침되어야만 이 세계관을 독자에게 겨우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의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장르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레일월드』 역시 그런 노력의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며, 타협에 있어서 뛰어난 균형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흠뻑 빠져서 읽을 수 있는 하드 SF를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오랫동안 이 작품을 권할 것이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주는 전쟁의 테마는 ―작가가 후기에서도 밝혔듯― 집체의 지성이 그를 구성하는 개체의 지성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아이러니에 있다. 레일월드의 종족 개체들은 독자적인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을 정도로 지성과 자부심을 지닌 존재이지만, 이들이 모여 만들어낸 전쟁용 고래는 고작해야 '싸우자', '내가 더 세다' 정도의 단편적이고 유아적인 메시지밖에는 전달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야기에서는 이들 집체의 지성을 '파편지성'이라 부르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비극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인민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검증되지 않은 집단 지성에 맡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관한 논의는 물론 21세기의 지구에도 유효한 고민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으나,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우리 사는 세계에 적용하며 한 번쯤 공상에 잠겨 보는 일은 여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야기의 결말은 밝힐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해도 좋을 듯하다. 유옌을 시작으로 해서 차례로 만나게 되는 얘물, 굥길, 샴하, 주믕, 볜희와 같은 이름들은 한국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매력을 지닌다. 특히나 외계의 파충류 종족에 대해 이렇듯 생경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작품이 추구하는 뉘앙스에 훨씬 더 직선적으로 가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선택이 되기도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작품의 인상을 차별화하는 데 독특한 이름들이 한몫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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