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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07-2020 특별판
황세연 외, 나비클럽, 2020년 12월

일반적으로 범죄에는 다스리지 못한 충동이 묻어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흉악한 범죄에는 너무 어두워서 차마 꺼내놓지 못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거친 욕망은 흔적을 남긴다. 참혹한 범죄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길고 복잡한 사연을 찾아 남은 욕망의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그 흔적들이 하나의 인과적 설명으로 수렴할 때 범죄는 소명되고 보통의 사람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07-2020 특별판』은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2007년에 신설하여 해마다 인상적인 단편 추리소설에 수여하고 있는 '황금펜상'의 역대 수상작 열두 편을 모두 실었다. (햇수에 비해 작품수가 두 편이 적은 이유는 2008년과 2009년에 수상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걸출한 단편들은 고전적 추리물에 익숙한 독자와 새로이 장르에 진입한 독자 모두에게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서사를 제공한다. 특히 한국 추리소설의 구성과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를 손수 경험해보고자 하는 새로운 장르 독자들에게 이만큼 호화로운 기획은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2007년 제1회 수상작 김유철의 「국선 변호사 - 그해 여름」에서 주인공 '김'은 애인을 살해했다고 자백한 현직 경찰관 '이 순경'의 국선 변호를 맡아 사건을 파헤친다. 애인과 함께 모텔에 투숙한 이 순경은 다음 날 오전 7시에 객실을 나섰다가 오전 10시에 돌아와 죽은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다. 유력 용의선상에 오른 이 순경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범행을 시인하지만, 국선 변호인 김은 냉정하게 단서를 추적하여 해당 모텔에 설치된 몰래카메라와 관련한 정황을 밝혀낸다.

4회 수상작, 박하익의 「무는 남자」는 JTBC 드라마로도 제작된 장편 『선암여고 탐정단』 시리즈의 출발점이 되는 단편이다. 주인공 '안채율'은 선암재단에 속한 사립학교인 선암여고의 학생이다. 어느 날 등굣길, 채율은 '무는 남자'에게 팔목을 물린다. '무는 남자'는 근방에서 선암여고 학생들만 노려 팔목을 깨무는 정체불명의 남성이다. 채율은 3반 친구들이 만든 '무는 남자 체포 수사대'에 합류하면서 사건을 둘러싼 진실에 다가간다. 그에 따라 천천히 밝혀지는 관련 인물들의 이해와 부패에 얽힌 사연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놀랄 만큼 치밀하다. 독자는 이 이야기에서 학교와 교육이라는 번듯한 이름 아래 숨죽인 온갖 욕망과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5회 수상작은 황세연의 「스탠리 밀그램의 법칙」이다. 그리고 14회 수상작 「흉가」도 황세연의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의 개성이 뚜렷이 묻어난다. 「스탠리 밀그램의 법칙」은 살해된 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사건을 역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 우연과 필연을 가장한 모든 인과의 고리가 종국에는 절망적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고리의 시작점과 도착점이 포개어질 때 느껴지는 충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흉가」는 오래된 동네의 낡은 집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흉가'라는 타이틀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오싹한 쾌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작품 전체적인 뉘앙스, 최초 살인과 유기가 일어난 배경, 우발적 범행에 이르기까지의 묘사와 그로 인해 악화되는 사건의 전개, 수국의 색깔이나 습윤밴드 등의 소품을 적재적소에 가시적으로 끼워 넣는 솜씨까지 그야말로 발군의 작품이다.

6회 수상작, 송시우의 「아이의 뼈」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시신 없는 유아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건의 용의자 '김남호'에게, 피해자의 어머니(노파)가 접근하여 자기 딸의 시신을 돈 주고 사겠다고 말한다. 김남호의 국선 변호인인 화자는 둘 사이의 거래를 중개하는데, 훗날 김남호가 돈을 받고 알려준 위치에 시신의 두개골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남호는 추가 거래에서 노파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하려 했겠지만, 노파는 사라진 두개골에 대해 추가 거래를 제안하지 않는다. 그건 애초에 거래에 대한 노파의 목적이 범인의 짐작과 달랐기 때문인데, 결말에 드러나는 이유를 알고 나면 약간은 먹먹한 기분에 잠기게 될 것이다.

7회 수상작 「보화도」와 13회 수상작 「일각수의 뿔」은 조동신 작가의 작품이다. 「보화도」는 명량해전 이후 조선시대,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수군 기지 '보화도'를 배경으로 한다. 통제사를 만나려 보화도에 방문한 '유 현감'의 군관 '허삼석'이 살해당하고, 이순신의 군관 '장만호'가 사건의 조사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한국인에게 뜻깊은 역사적 배경 안에서 벌어지는 데다가 이순신 장군도 비중 있게 등장하여 서사의 흥미를 배가한다. 「일각수의 뿔」은 추리소설 마니아 '윤경식'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추리물인데, 여기에는 앞선 작품에 비해 전형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몇 가지 가미되어 있다. 사설탐정 역할을 맡은 윤경식이 사건의 흔적을 토대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추리가 퍼즐처럼 들어맞는 점, 후반부에 범인과 주인공이 살인의 이면에 얽힌 사연을 폭로하며 격하게 벌이는 설전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고, 역시 익숙한 만큼 확실한 재미를 보장한다.

8회 수상작, 홍성호의 「각인」에서는 굵직한 두 개의 플롯이 교차로 서술된다. 한쪽이 추리를 통해 조금씩 진실에 다가서는 동안 다른 한쪽은 담담히 예정된 결말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살인 사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 하나인 '복수'에 대해 매우 합리적면서도 따뜻한 견해를 드러낸다. 복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죄 없는 3자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9회 수상작 「낯선 아들」과 10회 수상작 「유일한 범인」은 공민철 작가의 작품이다. 「낯선 아들」은 주인공 화자가 죽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하지만 둘은 친모자 관계가 아니다. 치매에 걸린 노인과 노인을 속여 친아들 몫의 재산을 가로채고자 했던 전과자가 몇 달의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노인은 '낯선 아들'을 지키는 선택을 하고, 가짜 아들 노릇을 하던 화자는 안도하면서도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모든 일이 썩 잘 마무리되어감에도 끝내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은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유일한 범인」은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에서 정통 퍼즐 미스터리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다. 단편의 호흡을 살려 부수적인 요소는 과감히 배제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단서와 그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리에 오롯이 공을 들였다. 단절된 세대와 취약 계층의 현실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모종의 연대의식을 따뜻하게 드러낸 것 또한 이 작품의 훌륭한 점 중 하나이다.

11회 수상작, 한이의 「귀양다리」는 일본으로 가던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착한 시기의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청렴한 관리인 한편, 날카로운 시선과 상대의 심리를 압박하는 기술을 겸비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도 하다. 유배객 '송교명'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조사하던 이원진은 이 사건이 타살임을 알게 된다. 추리를 위해 본격적으로 단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원진은 관료들의 부패한 일상과 힘없는 백성들의 서글픈 삶을 마주하게 된다. 권력이 부패했을 때 백성들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힘 있는 작품이다.

12회 수상작, 정가일의 「소나기」는 황순원의 「소나기」(1953)의 일부 테마를 인상적으로 변주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이면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를 바라보던 소년의 아픈 기억이 자리한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던 플라타너스 이층집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빠진 것을 조명함으로써 작가는 이야기의 초점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열두 건의 범죄와 수십 개의 단서, 그로부터 출발하는 논리적 추론 외에도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기시감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에 묘사된 욕망은 저마다 현실의 일면을 적확히 포착하고 있고, 그것은 또다시 자기 내면의 욕구를 마주하고 성찰하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범죄와 추리 사이의 팽팽한 간극에서 진정으로 갈망하는 단 하나의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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