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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블러드
임태운, 시공사, 2020년 12월

좀비를 양산하는 특수 광견병이 전 지구적으로 창궐하자 생존자들은 좀비를 피해 프랑스령 기아나의 '대방벽' 안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지구 탈출을 위해 방주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건조하여 이주 행성 '카난'으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게르솜이 발사된 직후, 탈출선에 함께 오르지 못한 생존자들은 질투심에 발진 위치인 라그랑주 포인트로 가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폭파해버린다. 곧바로 게르솜을 뒤따를 예정이었던 엘리에셀은 그렇게 무려 40년이나 지체되고 만다.

임태운의 『화이트블러드』에서 독자는 세대 우주선 안에서 펼쳐지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좀비 아포칼립스의 매력적인 결합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주에서의 조난과 대립, 냉동 수면과 시간 왜곡, 강화 시술로 거듭난 '백혈 인간'과 강화복을 입은 '전투 사제', 단분자 블레이드와 레일건, 전투망치 등 중심 캐릭터의 장르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무기들, AI 홀로그램과 행성 테라포밍에 관한 언급까지 작품 속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요소들이 지닌 폭넓은 스펙트럼에 놀라게 될 것이다.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소재와 소품들이 임태운의 세계에서는 아무 위화감 없이 그야말로 짜릿하게 녹아들어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특히 임태운은 SF계에서 매체 간 장벽을 가장 잘 넘나드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이경희,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2020, 35쪽

 

매체 간 장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는 평가는 그가 서브장르와 소품을 다루는 솜씨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화려한 소재의 라인업과 스펙터클을 선보이면서도 작가는 자기만의 서사를 단단히 구축해나간다. 방주 게르솜 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통해 하나둘 밝혀지는 과거의 일들은 그 자체로 독자를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고, 틈틈이 삽입되는 플래시백에도 흔들림 없이 전체 서사를 밀고 나가는 스토리라인의 동력은 독자가 지루하게 느낄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의 거침없는 자신감은 곧장 작품에 대한 흡인력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 이야기에서 방주의 이름으로 쓰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은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성서 속의 모세는 박해받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지만, 끝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광야에서 유랑한 40년이란 시간은 이 이야기에서 방주 엘리에셀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지구에 체류하는 시간으로 변주된다. 주인공 '이도'의 나이 또한 40세이고, 그것은 이 인물이 태어난 해가 방주 게르솜이 발진한 해이며 곧이어 엘리에셀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한껏 부푼 희망이 꺾여버린 때로부터 40년. 지구에서 이도의 삶은 평생에 걸쳐 죽고 죽이는 생존 투쟁의 시간으로 흘러갔다.

물론 그 40년 동안 인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발사되지 못한 두 번째 방주 엘리에셀은 '소방벽' 안에서 축소된 형태로 새로 만들어졌고, 대방벽이 무너지던 날 우주로 발진했다. 극도로 열악한 7구역에서 살아남아 좀비들의 이빨받이 취급을 당하던 F급 시민 이도는 강화 시술을 받는 조건으로 엘리에셀에 탑승할 자격을 얻는다. 소방벽의 수뇌부가 그를 필요로 한 이유는 엘리에셀 발진을 위한 핵심부품이 여전히 달과 지구 사이 라그랑주 포인트에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궤도 엘리베이터가 끊긴 지점을 돌파하려면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강화 인간이 필요했고, 그런 위험한 시술과 임무를 맡기기에는 이도와 같이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F급 시민이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도는 강화 시술을 받고 생존하여 엘리에셀 발진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어렵사리 발진한 엘리에셀의 동면 캡슐에서 이도가 깨어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엘리에셀이 카난으로 향하던 중 우주에서 표류 중인 첫 번째 방주 게르솜을 발견한 것이다. 엘리에셀의 AI '마리'는 게르솜의 AI '아론'에게 메시지를 보내지만 응답받지 못한다. ―아론은 모세의 형의 이름이기도 하다. 방주와 그 안에 탑재된 AI에게까지 모두 형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세계관에 속한 인간들이 개척 행성에 품었던 아득한 희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첫 번째 방주가 뒤따르는 동생을 약속의 땅으로 무사히 인도해주길 바랐던 게 아닐까.― 조사를 위해 마리는 엘리에셀에 탑승한 백혈 인간 중 '이도', '카디야', '보테로'를 깨워 게르솜에 팀으로 파견한다. 세 백혈 부대원이 게르솜 선내로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비상 셔틀을 타고 건너간 게르솜에서 이도, 카디야, 보테로는 내부 폭발의 흔적과 피로 얼룩진 중앙관제실을 맞닥뜨린다. 극단적인 대립과 전투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게르솜 내부의 모습은 초반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도 일행은 수색 작전을 통해 폭력적인 흔적에 얽힌 내막을 하나둘 파헤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주 행성을 개척하는 인류사적 과업을 짊어진 우주선에서 발생한 사고의 원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욕구를 직면하게 된다.

처음에 방주 게르솜을 멈추게 한 것은 '수면파'와 '비행파'의 대립이었다. 게르솜의 탑승자들은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두 파로 나뉘었는데, 이들은 인간의 삶과 인류 문명의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갈등은 이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과 집단 간 분리로 이어졌고 탑승자들은 기약 없는 나날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흘려보냈다. 엘리에셀과 백혈 부대원들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던 게르솜의 시계를 다시 움직였고, 정체되었던 두 집단의 대립은 이야기의 결말부에 이르기까지 서사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독자로 하여금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인간의 자격'이란 정말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자유 의지는 삶 안에서만 유효한 것인가. 자신의 의지대로 끝맺음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
노래는 끝이 나야 완성이 되는 법.

137쪽

 

"…… 눈이 빨갛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이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분히 의도된 동작이었다.
"너희가 좀비와 무엇이 다르지?"

207쪽

 

"바다가 이렇게 넓은 이유는 여행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거야. 감히 건널 생각을 하지 말라는 계시라고 생각하지 않아?"
……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끝 모를 여정을 견뎌내야 할 만큼 간절한 쥐들만 바다에 뛰어들라는 계시야. 배 안에서 서로의 꼬리를 잡아먹지 않을 수 있는 쥐들만이 새로운 대륙에 갈 수 있는 거라고.'"
……
"'그래서 바다는 넓고, 이토록 푸른 거야.'"

271-273쪽

 

결말부에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서사가 비중 있게 묘사된다. 행성 테라포밍이라는 발상 자체가 결국 다음 세대의 희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가 그리도 힘겹게 싸워야만 했던 이유와 맞물리면서, 이야기는 우주에서만 가능한 어떤 부자 관계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남는 자와 다시 길을 나서는 자의 어색한 듯 담담한 이별까지. 스스로 숙주의 목숨을 앗아갈 '병균'이라 칭하던 인물이 되려 그 숙주를 떠나보내는 모습에서 비로소 독자는 인간다움의 한 찰나를 스치듯 목격한다. 어쩌면 이들의 목적지는 카난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긴 여정 위에 놓인 하나의 이정표로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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