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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 고양이

2008.03.29 14:5503.29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히려 나가기가 귀찮곤 한다. 아마, 이런 날 우연히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말끔히 방청소를 하고 커피 한 잔에 기분 좋게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보면 나가게 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통 일어나는 시간은 정오를 전후로 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밥을 먹고 하다보면 서너시는 가볍게 넘어 버리고 만다. 조금은 무거운 몸을 침대에 털썩, 하고 누워버리면 이제 나가기는 아주 귀찮아진다.

침대에 누워 창문 밖으로 조각난 하늘을 본다. 정말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의 새파란 하늘이 창살에 걸려 있다. 구름은 시선의 끝자락에 조금 흩어져 있다. 새어 들어와 몸에 내려앉은 바람의 가벼운 무게를 느낀다. 내 방에서 이렇게 아직은 이른 저녁이랄까, 아니면 약간 늦은 오후랄까─ 햇빛이 적당히 밝은 이 때즘에는 언제나 새소리가 들려온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고, 몇몇의 새들이 작게 짹짹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확성기에 대고 달걀이니, 고물이니 파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린다. 골목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누는 잡담 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게 부서지고, 아주 멀리서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음이 파도소리처럼 섞여 온다.

그럴 때면 왠지 내가 있는 곳이 매우 모호해지는 듯한 기분을 받는다. 현실은 어디즘에 있고, 나는 다시 어디즘에 발 디디고 있고, 지금이 어느 때인지,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이고, 지나온 시간은 얼마인지,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일들은 앞과 주변에 얼마나 펼쳐져 있는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그런 온갖 고민들이 뭉퉁하게 일그러져 몽롱한 기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묘한 평화는 도저히 그대로 깨질 것 같지 않으면서도, 흩어질 연기처럼 때론 불안하다. 코 끝을 찌르는 구수한 향기, 손 끝에 닿는 이불의 감촉, 속눈썹을 건드리는 선풍기 바람, 온갖 소리들, 밝은 어둠, 어느새 사라지는 몸의 윤곽─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뭐랄까─

지금 이 순간이 왠지 어떠한 필연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매번 다음 순간의 우연에 의지하며 한 발을 내딛는데, 그건 또 모두 이전 순간에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주 위태로운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상상한다.

갑자기 지축을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서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난 눈을 부릅뜨고 내 위로 떨어지는 돌덩이를 노려본다. 그 순간, 난 몸을 굴려 바닥에 떨어지고 재빨리 침대 밑으로 숨어 들어간다. 발가락 하나를 침대 안으로 완전히 넣는 바로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날카로운 돌조각이 떨어져 바닥이 움푹 패인다. 주변의 온갖 바닥이 갈라지면서 용암이 솟아 오르는데 침대 아래인 이 땅 만큼은 안전하다. 천장은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조각들이 떨어져도 침대가 부서질 만큼은 아니다. 그러므로 난 완전히 안전하면서도, 또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난 막, 음료수를 먹고 있었던 탓에 몇 일간 버틸 수분이 있고, 침대 밑에 있던 가방에는 마침 초콜렛이 가득 들어 있어서 아마 몇주는 족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여차하면 오줌이라도 받아 먹고, 내리는 비를 담아서 먹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버티면서 겨우 남은 휴대폰의 배터리에 의지해서 가족들과 눈물을 흘리며 연락을 한다. 하지만 난 참사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연락을 해서 위치를 알려주어도 언제 어떻게 구조될지는 알 수 없다.

터널을 지날 때도 이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나도 왜 그런 상상을 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뭔가 인상적인 변화를 바라는 걸까, 라고 일단락 지어버리기엔 왠지 씁쓸하다. 그런 걸 정말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종 하곤 하는, 기쁨에 가득 찬 공상들도, 우울에 젖은 몽상들도 그저 그 순간 빠져드는 감정 속에서의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 주변의 빈약한 감각들은 얼마나 기만적인지, 알 사람을 알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겨우 버티며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수없이 많은 그물망을 주변에 이어놓고 의지하며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여하튼, 난 말했듯이 언제나 삶은 우연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것은 또 다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상을 끝내고 조금은 설레이고, 두렵고, 조마조마한 느낌으로, 약간은 흥분한 상태로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내 곁에 어떤 여자가 내 팔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고, 예쁘고, 부드러운 머리결을 가진 여자였다. 내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왠지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고 있는 건 아니다. 자는 척 하는 것이다.

넌 누구냐, 고 물어볼까봐 관둔다. 누구인지 정말 제대로 알려면 한참이나 답변을 들어야 될테고, 짧은 답변은 정말 누구인지 알기엔 그다지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여기 왜 왔어?" 그녀의 온기가 조금씩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그대로 웅크린 채로 조금 눈을 떠서 날 올려다 보았다. 동그란 눈과 코의 윤곽, 그리고 조그마한 입술만 보이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눈이 지나치게 크게 보여 정말 고양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추워서."

예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여름이잖아? 냉수 마찰을 하고 팥빙수를 먹은 뒤에 발가벗고 집 안에 에어컨을 18도 희망으로 맞춰두고 하루종일 돌리지 않는 이상 추울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있었더니 추웠어."

"그랬군. 그래서 넌 지금 발가벗은 채로 여기 안겨 있는거군."

"응."

그러고보니 확실히 그녀는 발가 벗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그건 어떤 성적 흥분을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때 난 그런 생각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냥, 이 여자 벗고 있군, 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벗고 있으니 춥겠군. 누구나 종종 너무나도 이상한 현실 앞에 담담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끊임없이 사소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이다. 오직 그 뿐이다.

그런데 왜 벗고 있을까? 더워서 벗었을 것이다. 그런데 벗으니 추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 꽤나 멀리까지 날 찾아와서 안겨 있는 것이다. 그럼 더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녀가

"계속 안겨 있으니 덥다."

라며 데굴데굴 굴러 내 품을 벗어났다. 그러더니 내 옆에 엎드린 채로 발을 굴렸다.

"더워, 더워, 더워."

"그러다가 또 추워지겠지."

"응, 그 말 들으니까 금새 추워졌다."

라며 그녀는 다시 내 품에 안겨 들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달이 떴다. 그녀는 계속 나에게 벗어났다가 안겨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그 탓에 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이제 막 방학이 시작했고 그다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밤 새도록 뒹굴뒹굴 거리다가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하고 혼자서 뭔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휴대폰을 들고 친구랑 전화를 하기도 했다.

난 여전히 가만히 누워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이젠 완전히 쌀쌀한 공기가 주변을 둘러싸자 그녀는 푹 안겨 들었다. 나도 팔을 접어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안긴 채로 말했다.

"따뜻해. 언제나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체온을 유지해야 해."

"그렇지, 사람은 채온을 유지해야 하지."

"응, 넌 잘 아는구나. 채온을 유지하기란 참 힘든 일이야."

"그렇지, 채온을 유지하기란 참 힘든 일이지."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나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고 그녀의 새끈새끈하는 숨소리를 듣더니 천천히 잠이 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난 곧 잠들었다.


다음 날, 찌르는 햇살에 눈을 떴다. 먼지가 빛나며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햇살이 빛의 줄기가 되어 방 안을 관통해 바닥에 내려 앉아 있다. 방 안은 온통 투명한 누런색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 비현실적일 정도로 투명한─ 샛노란 햇살만이 방 안에 있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 그녀는 없었다. 난 그럴 줄 알았지, 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아니,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차갑에 얼어 움직이지 않았다. 팔도, 다리도,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단단히 그 곳에 매여 말그대로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정말,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그 때의 지금을 바라보며,

필연이지, 그래, 라고 생각했다.
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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