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대한민국 또는 나이키 운동화를 위하여.

0. 프롤로그

  2006년 8월의 첫째 주 목요일 날짜는 5●일. 나는 한숨을 쉬며 정체불명의 검은 얼룩이 묻은 달력에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찾아야 하는 물건이 뭐라고 하셨죠?”
  “나이키 운동화요!”
  양손에 젓가락을 쥐고 초조하게 주방을 바라보던 놈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니까, 운동화라고요.”
  “그냥 운동화가 아니라고요! 나이키예요. 나이키 운동화 조던 시리즈죠! 뒤꿈치에 에어쿠션이 들어가 있고 천연가죽이라 가벼운데다가 밑창에는 조던 로고도 박혀 있다고요!!”
  흥분한 말투로 떠들어 대면서도 놈은 주방 쪽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아마 저 속편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불편해지는 게 나 하나는 아니겠지.
  “그러니까…….”
“짜장 하나, 짬뽕 하나 나왔습니다!”
  도널드 덕처럼 생긴 점원이 내 말을 자르며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말을 자른 것에 대한 답례로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보자, 대낮부터 아저씨 둘이 한심하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어린놈이 버릇이 없다는 시선을 보내줄까 하던 차에 놈이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그만 두기로 했다.
  “남수씨, 그 나이키 운동화는 아주,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아주’를 두 번이나 강조하며 놈은 자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젓가락 아래에서 검게 물들어 가는 면발만큼 대화의 긴장을 떨어트리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하는 내 머리위로 놈의 말이 이어졌다.
  “그 나이키 운동화를 사흘 안에 찾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사라질 겁니다.”
  콰광!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지금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들은 거지?
  “예?”
  무심결에 소리를 지르자, 도널드 덕이 여전히 떫은 표정으로 흘끔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묻자, 놈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사흘 안에 나이키 운동화를 못 찾으면 한국이 사라진다고요.”
  댕댕댕댕댕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중국집에 앉아있고, 눈앞에서는 쓸데없이 매운 짬뽕이 불어가고, 정년까지는 아직 13년이나 남았는데, 사흘 후면 한국이 사라진다고? 입을 벌리고 앉아있는 나에게 놈은 입안에 가득 든 면발을 삼키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남수씨, 그 짬뽕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어도 될까요?”

1. 첫째 날

  “그런 이유로, 이제부터 우리는 운동화를 찾아야 하게 됐네.”
  부하직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내 꼴이 우스워 보일 거라는 점은 알지만, 지금은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남수씨, 그냥 운동화가 아니라니까요. 그건…….”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부터 찾을 것은 그냥 운동화가 아니라 나이키 운동화로, 조던 시리즈고, 에어쿠션이 있고, 발 등인지 밑창인지에 조던 로고가 들어있다고 하네.”
  “밑창이에요.”
  “…로고는 밑창에 있네.”
  아까의 말은 철회다. 지금의 상황에 비하면 방금 전의 말 같은 것은 바보 같은 축에도 못 낀다. 아마.
  “우와, 나이키 조던 시리즈요? 그거 비싼 건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 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은 이 부서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된 신참이었다.
  “이봐, 자네. 지금은 회의 중일세. 관계없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게.”
  “부장님…제 이름 또 잊어버리셨죠? 이젠 좀 기억하시라고요. 게다가 그렇데 관계없는 이야기도 아니에요. 운동화 값이 필요경비보다 싸면 그냥 하나 사는 게 낫잖아요?”
  시끄러 인마. 그런 얘기는 최소한 물건을 찾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라. 그리고 어차피 니들이야 상사를 이름으로 부를 일 없으니 기억할 필요도 없잖냐. 그러니까 부하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건 상사의 특권이라고.
  “아니, 문제는 나이키 운동화가 없어졌다는 게 아니라 이분의 운동화가 없어졌다는 걸세.”
  “에?”
  신참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놈을 바라보았다. 하긴, 아무리 봐 봐야 건실하고 평범한 30대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놈을 보고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맞추라는 것도 꽤 난감한 일이기는 하다. 이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닐 때의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놈은 양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그 나이키는 그냥 운동화가 아니라 레벨 7 운동화예요.”
  “…예?”
  좁은 사무실에 얼빠진 하모니가 울려 퍼졌다.
  레벨 7이니 뭐니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기술 수준이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정확히는 역사라던가, 시간이라던가, 아니면 개체 수 대 행성 면적 비율이라거나 하는 복잡한 요소들이 섞여 있어 한 마디로 기술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듣는 입장에서 보면 결국 기술 수준 등급이다. 그리고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현장에서 일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LV.7이면 우리보다 두 등급이나 높네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한 것은 우리 사무실에 유일한 여자 직원인 지영씨였다. 아니, 희영씨였던가?
  참고로 처음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수준을 LV.2라고 하고 우리의 기술 등급은 LV. 5이다. 그리고 우리-그러니까 지구 등급보다 높은 LV. 6부터는 지구 바깥, 외계의 기술이라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느냐고 하면, 이런 것을 다루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급이 높은 게 뭐가 문제죠?”
  신참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다. 저런 녀석에게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타박을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너야말로 기본 수칙정도는 좀 외워둬라.
  “외계외교부서 기본 수칙일세. 기술 접촉은 아래에서 위로만 가능하지 상위 등급으로부터 하위 등급으로의 접촉은 금지야. 처음에 배우지 않았나?”
  외계외교부서. 그것이 내가 20년간 일하고 있는 이 부서의 이름이다. 사실 하는 일로만 보자면 외계외교부가 아니라 외계관광부로 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아, 깜박했어요.”
  어이, 너 정말로 괜찮은 거냐?
  “아무튼, 상위의 기술이 함부로 전해지면 행성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기술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금지라는 모양이야.”
  “예, 전 우주가 모두 그 규정을 따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우주에서 지키고 있는 규정이죠. 저희별도 지키고 있고요.”
  사실 저 말은 규정을 무시하는 외계인도 있다는 뜻이지만 그런 일이 문제가 된 적은 아직까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제가 생기는 것은 대게 그 규정이란 것을 통해서이다.
  “응? 그런데 나이키면 지구산 메이커잖아요? 그게 어떻게 LV. 7이 되요?”
  “아, 그게 말이죠…….”
  대답하며 놈은 다시 한 번 양 손을 펼쳐 보였다. 아무래도 저 동장 나름대로 멋쩍다는 표시인 것 같다.
  “그 운동화는 제가 만든 거거든요.”
  “…예?”
  지영씨(어쩌면 희영씨)의 표정이 중요한 외계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사람의 표정에서 점점 사고를 친 학생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으로 변해간다. 딱 중국집에 있을 때의 내 표정이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이놈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게 나이키 운동화가 엄청 갖고 싶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지구인 발에 맞춘 운동화는 제가 신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살짝 만들어 봤어요. 그게 또 회심의 역작이라서 말이지요. 제가 봐도 만든 거라는 걸 모를 정도라니까요? 아니, 정말로.”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놈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 지금 상황을 알기나 하는 거야?
  “저, 나이키는 유명 메이커란 말입니다. 전 지구적으로요. 당연히 저작권도 있지요. 회사의 허락 없이 상호가 붙은 상품을 제조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옆에서 지영씨(희영씨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어떤 이름이 맞는지 기억 날 것 같지 않으니 지영씨라고 부르도록 하자.)가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지만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상황은 상황이고 원칙은 원칙인 법이다.
  “아무튼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건 간에 LV. 7 물건은 LV. 7 물건이에요. 이게 평범한 지구인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는 조약 위반이죠. 2등급이나 높은 레벨이면 접촉범위를 소거처리할 거예요.”
  놈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이미테이션 문제는 이대로 넘어갈 셈인가.
  “소거처리요?”
  질문한 것은 이번에도 신참이었다. 이제 슬슬 저 녀석이 정말로 연수를 받고 이 부서에 배치되었는지 의심이 된다. 그래서 소거처리가 뭐나고? 그런 것을 나에게 묻지 말아 주기 바란다. 단지 지금까지는 소거처리를 해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만은 말해둔다.
  “…부장님도 모르시는 거예요?”
  어른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모름지기 공무원이란 사용되지 않는 항목은 기억하지 않는 법이다.
  “음, 저, 소거처리라는 건 말 그대로 금지 기술과 접촉한 인물이나 지역을 통째로 ‘소거’해서 기술의 전파를 막는 처치예요.”
  그거 굉장히 안 좋은 처치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얘기는…….
  “에, 그리고 꽤 말하기 힘든 이야기인데요. 이 경우 소거지역은 지역을 특정 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한국 전체가 되네요.”
  아하, 그랬군. 그래서 한국이 사라진다고 한 것인가. 확실히 이거라면 이야기의 앞뒤도 맞는다. 그런 일이라면 나이키를 찾지 못하면 한국이 사라진다는 이 상황도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LV. 7이고 뭐고, 뭐냐, 그 규정은. 이 부서에서만 20여년을 일해 온 나지만 소거니 뭐니 하는 규정은 기억에 없다 아니, 들어본 적도 없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라는 말을 내가 하기 직전-
  “그게 다 무슨 소리예요? 저기, 뭣이냐, 기술 접촉인지가 있었다고 나라를 통째로 없앤다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말 잘했다 신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거였다. 하지만 내 잎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런 내 심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이봐 자네, 말을 조심해서 하게.”
  이것이 20년이 넘는 공무원 생활 끝에 얻은 슬픈 천성인 것이다. 하지만 놈도, 신참도, 지영씨마저 내 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길.
  “그게, 우주의 높으신 분들이 정하신 규칙이라 저도 잘 모르거든요. 실제로 쓰인 예가 거의 없기도 하고.”
  그 한 마디에 사무실에 있던 우리 세 사람의 입은 딱 다물어지고 말았다. 우주나 지구나 이런 점은 마찬가지다. 전 우주가 이런 식이라면 외계인과 지구인은 틀림없이 형제가 될 수 있다.
  “저,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소거되는 건 남한뿐일 거예요. 북한은 남는 거죠.”
  위로 안 돼! 내가 마음속으로 외치는 동안 신참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소거라는 건 너무 무식하잖아요. 좀 더 온화한 방법 없어요? 기억 조작이라거나.”
  나는 한숨을 쉬며 그가 잊고 있는 사실은 지적했다.
  “자네, 현실은 맨 인 블랙과는 다르네.”
  “그래도 말이죠, 저기 바밤바밤바바바씨도 지구인으로 변신하잖아요. 비현실적이기로 치면 저것도 충분히 비현실적이라고요?”
  …네가 어린애냐. 우긴다고 될 일이었으면 나도 같이 우기고 싶다. 덤으로 바밤바밤바바바라는 것은 외계인씨의 본명이다. 말머리성운인가 근처에 있는 바밤바 행성에서 왔다는데, 그게 무슨 별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참고로 모 하드 회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진짜로 아무 관계도 없나?
  “아, 그런 건 무리예요. 제가 지구인 모습으로 보이는 건 사실 변신 같은 건 아니거든요. 그냥 지구인처럼 보이도록 시각 정보를 조작하고 있는 거죠.”
  그 뒤에 이어진 놈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것은 전 우주-정확히는 조약에 따르고 있는 전 우주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 실제로는 외계인 체형 그대로이지만 뇌가 받아들일 때 가짜 정보에 속아 넘어가서 지구인을 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마주보고 대화는 할 수 있어도 직접 접촉하는 건 불가예요. 속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시각 정보뿐이고 촉각이나 뭐 그런 걸로 가짜 정보와 명백히 다른 정보를 얻어버리면 지금 휴대중인 장비로는 속일 수 없게 되거든요.”
  그 말은 추가 장비나 추가 시간이 있어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지금은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그 나이키 운동화가 LV. 7된 것도 그런 이유예요. 지구에는 제 발에 맞는 신발이 없으니까요-사실 그 나이키도 제 발에 맞게 되어있어서 지구인이 원래 형태를 본다면 꽤 이상한 형태로 보일 거예요.”
  하지만 LV. 7의 기술을 이용하여 시각정보를 수정하고 있으므로 진짜 형태가 들통 날 염려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복잡하게 설명해도 역시 놈이 ‘나이키 운동화가 같고 싶다’같은 중학생 남자애나 할 것 같은 생각만 안 했으면 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운동화가 민간인 손에 들어가서, 만지는 순간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까? 찾아내도 이미 기술 접촉이 발생한 후라면…….”
  “아, 일단 나이키는 가방에 들어있으니까 가방만 열어보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 가방이란 것에도 필시 나이키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겠지. 그런 가방을 줍고도 열어보지 않을 놈이 있다면 꼭 좀 만나보고 싶다. 뭐 사실, 소규모 기술 접촉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흘이란 것은 그 자체적 해결을 위한 최종 기한이고, 72시간이 지나면 이미 기술 전파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우주 행성연합인가 뭔가가 개입 한다-라고 연수 시 받았던 지침서에도 쓰여 있었다. 그 ‘개입’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아무튼,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나이키 가방이 지금 어디의 누구에게 가 있느냐다. 원인은 물론 놈에게 있지만 지금은 놈을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니, 최악의 경우 조약에 반대하는 외계인이 배후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최악에 또 최악, 수습할 길이 없다.
  “그럼 질문이 좀 늦긴 했지만 어쩌다가 나이키 운동화를 잃어버리셨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놈은 답지 않게 주저하는 태도를 보인다. 저놈이 주저하며 말한 것 치고 그럴싸한 말이 나온 적이 없지만 설마…….
  “아, 그게요. 지하철에 놓고 내렸어요. 그 , 지하철이란 걸 처음 타봐서 말이지요. 내려보니까 손에 가방이 없더라고요.”
  전부 다 네놈 탓이잖냐!!!
  나는 마음속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지만 이번에는 신참도 별 다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2.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천장을 바라본다. 익숙한 천장이다. 방 두개, 거실과 부엌, 화장실이 갖춰진 27평 아파트의 10년 이상 바라봐 온 천장이다. 재수가 없다면 이 천장을 볼 기회도 앞으로 하루밖에 안 남은 것이 된다. 설마 그렇게 되진 않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전자렌지에 돌린다. 반찬은 저녁에 남은 계란국과 김치. 진수성찬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혼자 사는 남자가 제대로 된 아침을 차려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식탁에 앉아 신문을 집어 들기 전에 잠깐 어제의 일을 생각한다. 바밤바밤바바바씨의 말대로라면 한국 멸망까지 앞으로 이틀. 그래서 그런 대위기의 첫날이었던 어제 무슨 일을 했냐고 하면-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의논하고(“나이키 운동화를 찾아내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요!” “그러니까 어떻게?”)…그리고 그게 다였다. 최소한 바밤바밤바바바씨에게 대체 어느 역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는지 라도 물어보려 했지만 놈이 한심할 정도로 기억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정말로 몇 호선인지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 파란색 선이었어요!” “어떤 파란색 선 말씀이시죠?” “에, 이건가? 숫자가…2호선이요.” “…그건 초록색 입니다!”)수색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범위 이전에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딘가의 역에서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내라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가 차라리 낫겠다. 김서방은 주민등록은 되어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 주민등록 미등록자라고 해도 김서방은 부르면 대답은 하겠지. 이런 눈앞이 캄캄한 상황을 앞에 두고 별다른 소득도 없는 회의를 계속하기를 반나절. 마침내 하루치의 패배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이 한국을 구해낼 기사회생의 아이디어를 불러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침이 와도 머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공백상태. 머리와 마음에 들어차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놈을 한대 쳤으면 좋겠다거나, 놈을 발로 차줬으면 좋겠다거나, 놈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것 정도뿐이다. 실행할 수 없는 희망에 낙담하며, 나는 신문을 펼쳤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한국 소멸까지의 카운트다운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겠지만 방법도 없이 허둥대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신문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다음 순간 입안에 든 계란국을 그대로 뱉어낼 뻔했다. 신문에는 큼지막한 광고가 실려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이랬다.

  <잃어버린 나이키 운동화를 찾습니다. 저는 해외 입양아로 스무살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습니다만, 작년 한국에 살던 친아버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버린 아버지를 용서한 수 없어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 아버지가 암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를 만날 결심을 한 저에게 아버지는 한번쯤은 아버지다운 선물을 하고 싶으셨다며 제게 나이키 운동화를 사 주셨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인 그 운동화를 저는 지하철에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저는 그 운동화를 꼭 찾고 싶습니다.
  찾고 있는 운동화는 나이키사의 조던4레이저 모델로, 미국 현지에서 한정 발매된 것입니다. 운동화 몸체에는 레이저 문양이 들어가 있고 밑창에 조던의 로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테이션이 아닌 정품 나이키입니다. 분실 당시에는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푸른색 스포츠 백에 들어 있었습니다. 운동화의 소재를 아시는 분은 02-50X-29XX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동화를 찾아주신 분께는 사례금을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모두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절박하다고 해도 하필이면 저런 아이디어를 내고 진짜로 실행에 옮긴 놈이 누구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솔직히 어느 놈이 저런 광고를 썼는지 보다 어떻게 저런 광고가 그대로 신문에 실린 건지가 더 궁금하다. 뭐냐 저건 아침 드라마 스토리냐. 게다가 아버지는 투병중인 게 아니었냐. 이미 죽은 것도 아닌데 왜 벌써 마지막 선물이라고 쓰는 거야.
  차라리 우연히 같은 시기에 다른 사람이 나이키를 찾는 거라고 생각할 수라도 있으면 좀 편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몹시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다-그런 식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기에는 신문에 실린 전화번호가 너무나 명백히 사무실 직통 번호이다. 내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이라서 이게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건 진심이다. 기왕이면 어제 낮부터 죄다 꿈이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사무실의 풍경은 너무나도 확실히 이 모든 사태가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아, 부장님 나오셨어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언제나처럼 인사를 한 것은 지영씨 뿐이었다. 그 외의 녀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하면…….
  “예? 예 물론 좀 더 조심했어야죠. 예. 저도 멍청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운동화가…예? 아, 53만원 정도였는데요. 아, 아뇨 정확히 53만 2천원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지하철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파란색 선이었는데요. 아-제 주소요? 그러니까 말머리성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 이렇게 전화가 걸려온 일이 이때까지 있었던가. 이건 마치 생방송 도중에 두 유명 연예인이 사실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우연히 밝혀버린 방송국 같잖아-랄까 그보다 왜 너까지 전화를 받고 있는 거냐?
  “바밤바밤바바바씨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예? 아, 다들 바쁜 것 같아서 저도 같이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요.”
  부탁이니 그만둬라. 200% 확신하건데, 네놈이 수화기를 들고 있는 동안은 들어와야 할 정보도 들어오지 못 할 거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이 상황. 전화번호가 있는 지나 의심스러웠던 사무실에 전화벨이 연타로 울려대고,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일은 방법도 정보도 없는데 어째서 사무실에 나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 밖에 없는 거냐? 아, 약 한명이 더 있기는 하지만 놈은 사람이 아니니까 숫자에서는 빼기로 하자.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세 명 밖에 없나? 이 바쁜 상황에.”
  내 질문에 대답한 것 역시 지영씨였다.
  “어제 로무로니안 로치 로물로스씨가 오셔서, 여기 남은 인원 외에는 전원 가이드 역할로 나갔습니다.”
  “그, 로무…론론씨를 가이드 하는데 여섯 명이나 필요하다고?”
  “로무로니안 로치 로물로스씨입니다. 로무로니안 로치 로물로스씨가 오신 로메린 행성은 지구보다 중력이 낮아서 혼자서는 지구에서 거동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한명이 가이드를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리어카를 밀고 있습니다.”
  론론인지 뭔지 와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올 건 또 뭐냐. 덕분에 원래 9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 3분의 1로 줄어버렸잖아. 평소에는 두어 달에 한 명씩 올까말까 한 외계인이 이럴 때만 동시에 둘씩이나 찾아오는 건 무슨 우주적 숙명이냐, 아니 농간이냐. 아니아니, 그보다…….
  “왜 하필이면 리어카인가?”
  “처음에는 승용차를 권해드렸는데 로무로니안 로치 로물로스씨가 하늘이 보이는 쪽이 좋다고 하셔서 하늘이 보이고, 자력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로메린인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는 탈것을 고르다보니 리어카 밖에 안 남더군요.”
  리어카에 타면 그야 하늘은 잘 보이겠지만 어마어마하게 느릴 텐데. 게다가 리어카를 타고 대체 한국의 어디를 돌아다닐 셈인 걸까?
  “그럼 그 중 몇 명만이라도 불러올 수는 없나?”
  “로무로니안 로치 로물로스씨가 안 좋아하실 텐데요. 지구에서는 혼자서 이동도 할 수 없는 분을 방치했다가는 나중에 로메린 행성에서 항의가 들어올 겁니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이 상황에 사람만 늘어나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는 하지만. 뭐, 사람이 있으면 최소한 전화라도 받아 주겠지.
  “그럼 추가 인력 지원 신청은?”
  “서류는 올렸습니다만, 그 서류가 내일까지 수리 될까요?”
  어림도 없다. 어제 서류를 올렸다면 결재는 일주일 후에나 떨어지겠지. 그것도 운이 좋을 경우에 한해서.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다.
  “…그럼 나도 전화나 받도록 하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려, 나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예, 여기는…….”
  「아, 거기가 그 무시기 신문 광고 낸 쪽이요? 내 할 말이 있는데, 좋은 국산 운동화도 쌔고 쌨구먼. 왜 하필 나이키여?」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튼 내가 한숨을 쉬건 외계인이 전화를 받건 지구는 돌고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나는 그 날 오전을 인생을 통틀어 받은 전화보다 더 많은 전화를 받으며 보냈고, 그래서 무슨 정보를 얻었는가 하면, 호의는 있지만 정보는 없는 격려 전화가 5통. 각종 흥신소의 광고 전화가 8통. 장난전화가 73통. 그리고 인터넷 서비스사의 회선 이동 권유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이렇게 전화가 걸려 와 대면 분명 상당수가 전화 불통으로 통화를 포기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인터넷 서비스사의 전화는 반드시 걸려오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메커니즘이냐.
  결국 점심시간이 지나고 다들 다시 전화통을 붙들고 있을 때쯤 나는 혼자 뒷문을 빠져나와 건물 틈으로 좁아터진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의 땡땡이인지. 대학 다닐 때 수업 빼먹어 보고 처음인가. 그게 대체 언젯적 일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죽음을 앞두면 감상적이 된다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다. 어라? 죽음? 이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
  “어? 부장님? 이런데서 뭐하고 계세요?”
  나의 사색을 태연히 방해하며 나타난 것은 신참이었다. 너까지 나와 버리면 사무실에는 지영씨와 놈밖에 안 남아 있다는 얘기인가. 나는 놈이 다시 전화 받기에 도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신참에게 물었다.
  “인마, 너 근무시간에 어딜 나와?”
  “그러는 부장님도 여기 계시잖아요.”
  야, 그건 경우가 다르지. 난 부장이고 넌 말단인데. 공무원 일하면서 먹은 밥그릇 수가 다르다고 밥그릇 수가.
  “됐다. 기왕 나왔으니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라.”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 것은 그다지 감상이라던가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냥. 어디까지나 그냥이다.
  치익-익숙한 소리와 함께 옆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내 손에 들린 담배에서 한 줄기. 신참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한 줄기. 그러고 보니 지난달 병원에서 담배 줄이란 소리를 들었었지. 이 나이 먹도록 입에 물고 산 걸 이제 와서 어떻게 떼 놓겠냐 싶어 이제껏 물고 있었지만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되려나. 폐가 어떻게 되거나 재수 없으면 내일이 한국이 남아있는 최후의 날일 테니.
  “지금 푹 쉬어둬라 오늘은 어차피 야근일 거 아니겠냐.”
  내 말에 신참은 은근슬쩍 두 개피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놈이 쉬란다고 정말로 푹 쉴 셈인가.
  “부장님도 야근 하세요? 늦으면 사모님이 걱정하실 텐데요.”
  “이혼한지 20년 됐다.”
  “아, 예.”
  혓바닥이 쓰다. 이 쓴 걸 왜 피우나 매번 생각하긴 하는데 역시 한번 물면 끄질 못하겠단 말이지.
  “근데 부장님. 부장님은 왜 여기 계세요?”
  “응?”
  어색해진 분위기가 신경 쓰였는지 신참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그렇잖아요. 내일이면 아니, 내일까지가 기한인가? 그럼 모레면 한국이 통째로 사라진다는데 미국이라든가 어디라든가로 훌쩍 떠서 살아야겠다거나 뭐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뭐야, 그 얘기였냐. 나는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쉬고 대답했다.
  “내가 이 나이에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 가서 뭘 하겠냐. 그냥 나 태어난 나라에서 살다가 죽을란다.”
  “말 안 통하는 게 문제면 월북은 어때요? 북한 남는다잖아요.”
  너나 해라.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그러는 너는 뭐 하러 여기 남아있냐? 너는 영어도 제법 떠들더만.”
  내 말에 신참은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요. 가고는 싶은데 돈이 없어서요.”
  맞다. 너 20대였지. 젊은 놈이 미리미리 돈 좀 안 모아두고 뭐했냐.
  “찾겠죠? 운동화.”
  “찾아야지.”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걸로 다시 전화전선 투입이다. 뭔가 쓸 만한 정보가 들어올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건물 틈으로 보이는 하늘이 짜증이 나도록 파랬다.

3. 셋째 날

사흘째 아침. 사무실 소파에서 눈을 떴다. 어쩐지 미묘하게 조용하다. 내가 잠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 전화벨이 정신없이 울리고 있었을 텐데…….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상상과도 기대와도 멋들어지게 어긋나는 광경이었다. 어이, 너희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고 있는 거야 전화벨이 전혀 울리지 않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무리 전화가 안 와도 그렇지 너희들 너무 풀어져 있는 거 아니냐? 아니, 그 이전에 어제까지 그렇게나 걸려오던 전화가 하루아침에 뚝 끊긴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면의 소파에서 자고 있는 지영씨였다. 그야, 지영씨도 자고 있을 수야 있겠지. 어제도 내가 잠들 때 까지 전화를 받고 있었으니 나보다 늦게 깨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그다지 없다. 아무리 그게 내가 봐온 동안 단 한번도 지각은커녕 조퇴도 없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야근 끝에도 멀쩡해서 사람 같지도 않던 지영씨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 앞 소파에 늘어져 있는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지영씨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한번 믿은 것을 바꾸기가 힘든 법이다. 랄까, 그보다 지영씨가 덮고 있는 저 이불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내가 알기로 사무실에 이불 같은 것을 가져다 놓은 적은 없다. 내가 그런 의문을 풀기 위해 출처불명의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지영씨를 깨워 내가 잠들어 있던 동안의 경과를 물어보려 할 때였다.
  “아, 부장님 혹시라도 지영씨 깨울 생각이면 그만 두세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채 말한 것은 신참이었다. 사람한테 말을 할 때는 고개라도 돌리고 해라. 그리고 나 일어난 것 알고 있었으면 인사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황이 급하니 이번만 특별히 눈 감아 주기로 했다. 그런데 너 지금 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냐? 컴퓨터에 대해 그리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열려있는 창은 보고서 양식이나 업무 관련은 아닌 것 같은데?
  “깨우지 말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솔직히 지금은 지영씨의 일보다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만.
  “아, 굉장했어요. 진짜, 저 그런 지영씨는 처음 봤다니까요.”
  저렇게 늘어진 지영씨는 나도 처음이다. 내 마음의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신참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부장님이 주무시고 얼마 후였는데요…….”
  신참이 말해 중 바에 의하면 내가 잠들고 얼마 후까지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단다. 그러다가 신참도 잠이 들었고, 아침에 신참이 깨어났을 때 지영씨는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상태가 안 좋다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지영씨는 하룻밤 만에 꽤 핼쑥해진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는 태도가 심상치 않더란다.
  “그게, 평소처럼 고개 끄덕이며 통화하고 있다가 갑자기 ‘닥쳐!’그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더라고요. 내려놓는다기보다는 집어던지다에 더 가까웠지만. 그러더니 ‘이제 더는 못해! 아니, 안 해!!’그러고는 전화 코드를 모조리 잡아 뽑고요.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 후 지영씨는 어디선지 이불을 가져오더니 신참의 표현대로라면 꿈에 나올까 무서운 표정으로 신참을 째려보며 “깨우지 마세요.”라고 한마디 던진 후 그대로 잠들었다고 한다.
  “정말, 그 소란 속에서 부장님 잘도 주무시데요.”
  소란이랄까, 그다지 시끄러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만. 어쨌든 지영씨가 잠든 경위는 알겠다. 내가 잠든 동안의 일이라던가 이불의 출처 같은 것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부장님은 못 보신 게 운 좋은 거예요. 정말로 얼마나 무섭던지 도저히 그 침착하던 지영씨와 같은 사람으로 안 보이더라니까요.”
  아무래도 지영씨의 모습이 상당히 쇼크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듣기로는 평소의 참하던 아가씨와는 꽤 거리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보다 아까부터 계속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런데 자네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아, 저요? 잠깐 웹 서핑 좀 하고 있었는데요.”
  내 질문에 신참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웹 서핑이면 역시 놀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지금은 근무시간인 것 같네만.”
  “부장님도 지금 일어나셨잖아요. 게다가 할 일도 없어요. 전화도 안 오고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그렇다만. 그보다 너 어쩐지 뭔가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은 거냐. 게다가 전화가 안 오는 건 코드를 뽑아놓았기 때문이잖아.
  “그럼 바밤바밤바바바씨는? 사무실에는 안 보이는데.”
  “아, 바밤바밤바바바씨라면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한국이 사라지기 전에 꼭 봐두고 싶은 게 있다’라던가 하는 말을 하던데요.”
  야, 외계인 아무리 그래도 네놈이 원흉인데 포기가 너무 빠르잖냐.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 좀 말 없이 나가라.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나이키사에서 전화 왔었어요.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됐다면서 운동화 한 켤레 공짜로 주겠다던데 그거 받을 거면 저 가져도 될까요? 조던4레이저모델이라던데.”
  “아서라. 운동화 받아먹었다가 취재라도 나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내 말에 신참은 명백히 실망한 태도로 다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신참에게 한 마디쯤 더 해 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맥이 빠져서 그만 두기로 했다. 내가 생각해도 할 일 참 없기는 하다. 영화 같은 데서는 하루 남았으면 무지하게 바빠야 하는 것 아닌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주인공이라니, 그런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하긴 이래서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겠지. 설마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 채로 한국이 끝장나는 건가. 그렇게 되더라도 내 탓은 아니지만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어제 간신히 전화가 쉬는 틈에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 문의 전화를 걸었던 것도 결국은 전부 헛수고로 끝났고.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어제는 하루 종일 전화만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사실 지금이라도 전화 코드만 다시 꽂으면 할 일은 생기겠지만 어제 내내 받은 것 같은 전화를 서너 통만 더 받으면 이번에는 지영씨가 아니라 내가 코드를 뽑아 던지게 될 것 같다.
  “어? 부장님, 잠깐만 이것 좀 보세요.”
  한도 없이 이어지던 내 생각을 중단시킨 것은 신참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의 만사 포기한 것 같은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나는 신참의 곁으로 다가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이거, 네이버 블로그인데요. 이 게시글 좀 보세요.”
  보라고 해도, 그 얼굴이나 이상한 어미 같은 게 잔뜩 붙어있는 글자는 난 영 못 읽겠던데. 더욱이 평범한 글씨가 아니라 꽃인지 지렁이인지 모를 글씨체로 쓰여 있기까지 하면 그 글을 해독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무슨 내용인데?”
  내 질문에 신참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얌마, 좀 진정해라.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네 상관이고 너보다 어른이다.
  “나이키 운동화요! 8월 6일, 그러니까 어제 서울역에 놀러 갔다가 왠 노숙자가 신발이 들어있는 것 같은 나이키 스포츠백을 안고 있는 걸 봤다고, 노숙자가 나이키를 가지고 있다니 우습다는 내용의 글이라고요!”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지금 서울역에 신발이 든 나이키 백이 굴러다닌다고요! 우리가 찾는 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인즉슨, 한국을 구할 수도 잇는 운동화가 지금 서울역에 있다는 뜻인가?
  “지, 지지지지지금 그, 바바바씨는 어디에 있나!”
  “이름이 이상한데요!”
  시끄러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냐. 잠깐 내 겉옷, 겉옷이 어디 갔지? 내가 소파위에 던져놓은 양복 윗도리를 찾아 막 밖으로 뛰어나가려 할 때였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우왓, 남수씨? 깜짝 놀랐잖아요. 어디 나가시는 길인가요?”
  평소 같으면 저 태연한 반응에 복장이 뒤집어 졌겠지만 지금은 이 시점에 돌아와 준 것만으로 저 하늘에 대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싶은 기분이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일단 갑시다!”
  나는 외치며 놈의 …뭔가를 움켜쥐었다. 넥타이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잠깐, 남수씨?”
  “택시!!”
  다행히 택시는 쉽게 잡혔다. 이럴 때는 사무실이 대도심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서울역까지 갑시다. 서둘러요!”
  “예-.”
  대답도 경쾌하게 택시가 출발했다. 여기가 광화문이니 서울역까지야 순식간에 도착하겠지. 운동화를 찾았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흥분했던 머리가, 택시에 타고 나서야 간신히 조금 진정되었다.
  “남수씨, 굉장히 서두르시네요. 혹시 나이키 운동화를 찾으셨나요?”
  “예. 100%라고는 못 하겠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그보다 바밤바밤바바바씨는 대체 어디를 돌아다니신 겁니까? 이 바쁜 판국에.”
  방금 전까지 몹시 한가했었던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이다.
  “한국이 사라지면 아쉬울 것들을 몇 가지 보고 왔어요. 기록도 좀 남기고요. 남수씨도 기록해 둘까요? 아직 메모리 여분이 꽤 남았는데.”
  “싫습니다.”
  “정말로요? 여차해서 한국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한국 최후의 국민으로 우주 영상기록에 자료로 남을 텐데요. 나중에 남수씨의 후손들이 우주로 진출해서 볼 수도 있다고요?”
  “사양하겠습니다.”
  …랄까, 한국이 사라지는 시점에서 우주로 진출할 내 후손들도 전멸하는 게 아닌가. 물론, 어족이라던가 뭐라던가를 따지면 인류는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학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방계 혈족은 필요 없다.
  아무튼 놈과 내가 멍청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택시는 열심히 달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서울역 앞에 도착해 있었다. 부디 택시 기사가 우리 얘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기를 빌며 택시에서 내리자, 내 앞에 서울역의 풍경이 펼쳐졌다. 운동화가 있다는 말에 무작정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서울역은 상당히 넓다. 여기를 다 뒤지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저놈은 물건을 잃어버려도 꼭 이런 귀찮은 곳에서 잃어버려야 했나.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이다.
  “바밤바밤바바바씨, 시간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아, 잃어버린 시간부터 계산하면…8시간 정도네요.”
  그건 물론 사후처리까지 그 시간 내에 다 끝내야 한다는 뜻이겠지. 8시간 안에 서울역 어딘가에 있을 노숙자를 찾아내 나이키 운동화를 돌려받고 사무실로 돌아가서 우주 행성연합에 연락해서 소거 처리 중지 신청을 해야 한다고? 그것도, 나와 저놈 단 둘이서? 이제야 왜 사무실을 뛰쳐나올 때 신참도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후회가 막심하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가만히 서서 푸념만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 일단은 주변을 찾아봐야겠지.
  “바밤바밤바바바씨는 주변을 둘러보시다가 잃어버리신 가방과 같은 것이 눈에 띄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예, 맡겨두세요.”
  대답은 시원스럽게 나왔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님, 부처님, 조로아스터님, 아니면 그 외 아무 신이나 다 좋으니 이번 한번만 좀 도와주십쇼. 내 인생에 기적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다. 어떤 종교의 어떤 신이든 지금 기적을 일으켜만 준다면 나는 그 종교에 당장 귀의할 용의가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눈앞에 나이키 백을 든 노숙자가 있다거나 뭐 그런 기적 말이다.
  “아, 남수씨. 저기 저 아래에 계신 분이 베고 있는 게 제가 잃어버린 가방이네요.”
  놈이 가리킨 곳에는 한눈에도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이 푸른색 나이키 스포츠 백을 베고 자고 있었다. 할렐루야! 아, 지금 도와준 신이 하나님인지, 부처님인지, 조로아스터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니 어떤 종교에 귀의할지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보다 정말로 있었구나. 나이키 가방을 줍고도 안을 확인하지 않는 사람이. 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놈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 노숙자씨께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잽싸게 가방을 빼냈다. 저놈, 늘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더니 빠를 땐 엄청 빠르구나. 그런데 다른 사람이 베고 있는 물건을 빼낼 때엔 먼저 그 사람의 머리를 치워야 한다고 아무도 안 가르쳐 준 건가. 아무래도 바밤바행성은 지구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의 수면 습관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쿵!!
  둔탁한 소리가 역 안에 울려 퍼졌다.
  “아우-씨, 뭐야? 아프다고 이거, 어? 뭐야, 응?”
  노숙자씨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한 방에 뇌진탕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재수 없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노숙자씨의 시선은 놈이 껴안고 있는 나이키 백에 가서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잠깐 기절이라도 해주는 쪽이 여러모로 일이 편했을 것 같기는 하다. 지금 와서 말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야, 너 뭐야? 뭔데 남의 물건을 가지고 있어? 야, 그 가방 당장 이리 못 내놔? 그거 내거라고!”
  “아니, 이거 원래 제가 잃어버린 물건이거든요.”
  “아, 씨 내가 주웠다고 그거! 주운 놈이 임자라고! 애초에 잃어버린 놈이 등신이지!”
  아니, 그건 아니지요. 분명 잃어버린 놈은 좀 바보 같긴 하지만 분실물을 주웠다고 그게 당신 물건이 되는 건 아니지요. 아니, 그러면 곤란합니다.
  “아, 어쨌든 내 가방 내 놓으라고!”
  노숙자씨는 무서운 기세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저거, 설마 내가 도우러 가야 하나? 저 상황에 내가 간다고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남수씨!”
  외침과 동시에 놈의 손에서 나이키 백이 날아올랐다. 푸른색의 가방은 여섯 개의 눈동자(놈의 눈이 사실은 두개가 아닐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농구시합이었으면 반드시 슛을 성공시켰을 법한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내 품 속으로 떨어졌다.
  “어이씨! 야, 뭐야? 너도 한패야? 엉?”
  아차, 깔끔한 포물선 따위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데 이 가방은 왜 나한테 주는 건데? 나보고 어쩌라고?
  “남수씨, 뛰어요!”
  놈의 외침과 이를 박박 갈며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노숙자씨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하던 생각을 모조리 접어두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가? 야, 서! 거기 못서?!”
  등 뒤에서 물어뜯을 듯한 외침이 들려온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어디에도 서란다고 서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도 역시 그 기본 법칙을 충실히 지켜 죽어라고 열심히 달렸다. 제기랄 이렇게 뛰어본 건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다. 별로 원하지도 않은 장면에서 뜬금없이 옛날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설마 이거 주마등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이 고등학교시절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몸이 말도 못하게 노쇠해 있다는 점이다. 내 신체 나이가 얼마정도더라? 실제 나이보다 젊지 않다는 건 확실한데. 아직 서울역이 멀쩡히 보이는 거리인데도 벌써부터 옆구리가 당기고 숨이 가쁘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노숙자씨의 몸 상태도 나보다 그다지 낫지 않을 거라는 점뿐이다.
  “이놈아! 가방, 가방 놔두고 가라아아아아!!!!”
  …가 아니잖아! 아니, 무슨 노숙자가 체력이 저렇게 좋아? 모름지기 노숙자란 아무 곳에서나 자고 술과 불규칙한 생활에 젖어 50m만 뛰어도 숨이 차는 몸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내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노숙자씨는 정말로 줄기차게 쫓아왔고.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팔자에도 없는 마라톤을 하게 되었다.
  옆으로 거리가 스쳐지나간다. 도로에는 초당으로 수십 대의 자동차가 지나가는데 대체 왜 나는 거기 타고 있지 않은 거냐. 전속력으로 달려 분수대를 지나고, 눈에 익은 건물들도 지나고, 나는 옆구리가 아프고, 다리는 무겁고, 숨이 차고,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쁘고, 뭐야 이건 죄다 숨쉬기 힘들단 얘기뿐이냐? 역시 의사 말 들어둘 것을 그랬다. 내 폐가 이정도 거리의 달리기도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담배 탓이다. 그리고 운동부족과. 덤으로 술도 포함해도 되고. 말하다보니 이미 담배 이외의 이유가 꽤 나온 것 같은데 그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머리가 멍하다. 어째 뇌 내에 산소가 부족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와 넥타이가 펄럭인다. 제기랄, 무슨 놈의 바람이 이렇게 후덥지근해! 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날씨가 이렇게 더운 건지. 8월이면 한창 더울 때인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런 것은 내 알바가 아니다. 발을 멈추고 보면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을 거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들이받을 뻔 했다가 간신히 멈춘 운전사가 인상을 구기고 얼굴을 내밀었지만 나는 무시한 채 계속 달렸다. 이미 빨간 신호등도 깨끗이 무시한 몸이시다. 운전사쯤 무시 못 할까보냐.
  “이 치사하고 드러운 놈들아아아-!! 가져갈 게 없어서 노숙자 물건을 가져가냐아아아아!!!”
  멀리서 아득하게 노숙자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오는데 해석이 되지 않는 느낌. 그보다도 지금은 다리가 너무너무 가볍다. 옆구리가 결리던 것도 호흡이 가쁘던 것도 거짓말 같다. 머릿속이 확 밝아지고 전류 같은 것이 흘러 온 몸이 찌릿찌릿 하다. 내 다리가 이렇게 잘 달렸었나? 계속해서 나를 앞질러 가던 자동차들의 속도가 이상하게 느려 보인다. 도로의 소음도 거리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고 흘러내린 땀방울마저 슬로 모션으로 보인다. 굉장하다. 지금대로라면 언제까지고 뛸 수 있을 것 같다!
  “남수씨? 남수씨!”
  익숙한 얼굴이 지나쳐간다 싶더니, 옷자락이 잡혀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고 보니 그다지 빠르게 달리고 있던 것은 아닌 것도 같다.
  “바…바밤…바밤바…밤바…바바…바바…바바바…씨…?”  말해두지만 이건 이름이 헷갈린 것이 아니다. 걸음을 멈추자마자 굉장한 기세로 옆구리가 아파와, 나는 두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쥐었다. 아까 계속 뛸 수 있다고 한 건 대체 어디의 누구냐. 숨이 차서 죽을 것 같다. 아까부터 가슴을 무식하게 두드리는 건 설마 내 심장이냐? 이러다가 진짜로 죽어버리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진짜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에-조금 한심한 이야기이지만, 그 뒤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설명을 듣자하니 나는 그대로 뛰어서 사무실을 지나치려다가 놈이 부르자 멈춰서 바로 기절한 모양인데
  “부장님도 평소에 운동 좀 하세요. 그거 뛰었다고 기절까지 하고 그러세요?”
  깨어나자마자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거라니? 이놈아, 나는 서울역부터 광화문에 있는 사무실까지를 숨 한번 못 돌리고 줄창 뛰었단 말이다. 나중에 시간나면 너도 한 번 해봐라. 그렇게 컴퓨터에만 붙어있지 말고. 내가 이번에 깨어났을 때도 신참은 여전히 웹 서핑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 덕분에 목숨 붙었으니 봐준다. 다음에도 이런 식이면 그때야말로 가만히 안 놔 둘 테다. 지영씨는 내가 깨어나기 전에 이미 일어나서, 내가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완벽하게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기절한 후, 우주 행성 연합에 연락을 하는 등 사후처리를 맡아서 한 것도 지영씨인 것 같다. 결국 나는 신참이 말한 것 같은 지영씨를 볼 기회는 없었던 셈인데, 가능하면 앞으로도 없었으면 한다.
  아무튼 이렇게, 한국은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째서인지 그 원흉과 함께 한강 고수부지에 나와 있다.
  “하하하, 이거 매번 올 때마다 남수씨한테 폐만 끼치고 가네요.”
  하하하 무슨 말씀을요. 평소에 끼치는 정도는 이번 일에 비하면 폐도 아니랍니다. …랄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각이 있으면 좀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이란 걸 해봐라.
  “이야-밤의 한강도 좋네요. 낮에밖에 본 적 없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요.”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며 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고르고 고른 장소니까.
  “이제 저도 돌아가야겠네요. 이번 일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체재가 길어졌거든요.”
  “저런, 많이 지체되셨습니까?”
  “3시간 정도요.”
  됐으니 가라. 빨리 가라. 그리고 다신 오지 마.
  “바밤바밤바바바씨.”
  내 부름에 놈은 내 쪽을 돌아보더니 나름대로 허물없이-그런 의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웃어보였다.
  “그냥 바밤바라고 부르세요.”
  사양하겠습니다. 그보다 너희 행성 이름이 바밤바아니었냐. 설마 바밤바행성에서는 친한 사이에서는 전부 바밤바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용케도 서로 호칭을 구별한다.
  “다음에도 또 한국에 들러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말에 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놈의 머리 위에서부터 빛이 비춰졌다. 놈은 1km밖에서도 보일 것 같은 그 휘황찬란한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가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라. 그보다 돌아가는 방법이 참으로 요란하기도 하다. 이래서야 일부러 사람이 없는 장소를 고른 보람이 없다. 이렇게 요란하게 돌아갈 거면 가방이나 운동화 정도는 민간인에게 보여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인 걸까. 한밤중에 한강변 하늘에서 빛이 비춰지는 것을 본 사람이 없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테니, 대신 목격자가 부디 이 광경을 심령현상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빌 따름이다.

4. 에필로그

  놈이 가고 며칠인가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보고서라든가 뒤처리 작업으로 몹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론론인지 뭔지도 드디어 자기 별로 돌아가 직원도 늘어난 덕분에 지금은 꽤나 한가한 상태다.
  한강변에서 있었던 수수께끼의 발광 현상에 대해서는 딱 한번 한강변 오로라 발광 현상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정말로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독교와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와 그 외 기타 종교들 중 어느 종교에 귀의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전부 다 믿는다고 하면 어떤 신도 안 좋아하겠지. 종교보다 먼저 헬스클럽에 등록할까 생각 중이다.
  바밤바씨가 돌아가던 날, 왜 다시 한국에 오라는 따위의 말을 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이었냐고 물으면 글쎄…….
  “부장님, 우주 행성 연합쪽에서 메일이 한 통 와있는데요”
  “무슨 내용인데?”
  “에-그러니까 <안녕하세요. 남수씨. 바밤바입니다. 이번에 다시 한국을 방문할 일이 생겨 연락드립니다. 이번에는 제 친구인 바밤바도 동행할 예정입니다. 여러분과 다시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그럼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라는데요?”
…일단 사표부터 내고 생각해야겠다.

-END-
댓글 1
  • No Profile
    야키 08.03.08 01:44 댓글 수정 삭제
    에헷..?


    즐거웠답니다 하하!


    이런 재밌는 글에서 문학성따위를 찾는 것도 참 할짓없고, 또한 주관적인 비평아닌 '비난'만 늘어놓는 한심하기 짝이없는 사설이 될것같아 『포기』하겠습니다.

    아마도 오늘밤 제 꿈에는

    바밤바와, 혹은 바밤바와, 어쩌면 바밤바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제발좀 그의 두 손에는 운동화 한켤레가 전부 들려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후후, 꿈속이라고는 해도,
    ....사표내기는 싫거든요. 그러면 더욱 유쾌한 단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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