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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대에게 고합니다

2008.03.22 14:4403.22

그대에게 고합니다.

진저.
당신이 미모사에 동화된 이후, 벌써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왕의 검이었던 미모사. 그 정령의 이름이었던 미모사. 내가 사랑했던 당신의 이름은 진저.

진저,
다정하며 여리고 연약했던 나의 아내. 당신은 그 때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던 건가요.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내게 환히 웃던 모습을, 마지막 인사를 던지던 목소리를, 손을 내밀면 잡힐 것처럼 기억합니다.

우리는 요정. 세상에서 가장 ‘근원’이 약한 존재. 당신은 근원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했지요. 그 일이 있은 이후, 미모사도 나도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남편인 나는 생에 대한 의지가 너무나도 강해 그대를 따라 정령의 심연에 뛰어들 수조차 없었기에 일족의 모든 생을 관장하는 왕의 의무를 안고서 미모사와 영원의 시간을 약속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나와 함께 영원의 시간에 묻힌 일족의 의지가 하나 둘 씩 사라지고, 미모사의 의지가 쉬어야 할 그들의 육신을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힐 듯 고통스럽습니다. 사죄해도 사죄해도 사라지지 않는 나의 죄.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의 곁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던 나만이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홀로 생의 의지를 태워 살아남아 힘겨운 사죄조차 어려운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진저.
당신은 이미 내 목소리조차 알 수 없겠지요.

당신의 영혼은 모닥불에 던져진 성냥불처럼 이미 하나가 되었기에, 나누어 진 것으로 생각하려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자의 우매한 기대에서 비롯된 바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우매한 바람으로 미모사에게 입을 맞추며 당신의 이름을 속삭입니다.

진저. 진저.
내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당신. 영원을 약속했던 이름의 주인이었던 당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어 함께 해왔던 200여년, 껍데기뿐인 일족을 이끌고 헛된 기대로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던 내가, 이제는 질기게 붙들고 있던 그대와의 인연을 풀어버리고자 합니다. 영원의 약속을 깨려합니다. 미련하게 매달린 어리석은 왕으로 인해 순리를 따르지 못했던 우리 일족이 허공으로 사라지면, 나는 당신과 미모사와 함께 했던 영원의 시간 밖에서 그대들을 지켜 볼 것입니다.

진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대로 저주를 내린다고 해도 나는 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이 영원의 시간으로 되불러 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이미 ‘생’의 시간으로, 그 생의 시간이 머무는 곳에 있는 그녀에게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모양인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그 것이 뱀처럼 스며들어와 내 심장을 움켜쥐고 독을 부어넣었을 때, 나는 뒤늦게 발버둥 치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썼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독은 이미 내 전신을 지배해버렸고, 나의 마음을 당신과 함께였던 영원에서 끌어내고 말았습니다. 위선과 자기만족의 시간에서 살던 나를 죽여 ‘삶의 영원’으로 돌아서게 하고 말았습니다.

진저.
나는 당신이 왜 근원에 대한 갈망에 빠졌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겨도 이 의문을 풀 수 없어 당신에게 영원을 약속했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왜 당신이 그래야 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게 주어진 짤막한 해답은 ‘시작과 끝’이라는 한 쌍의 운명뿐입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이 미처 끝날 때가 아니라고 발버둥 쳤어도 결국 난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대를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시작을 위해, 끝을 맞이하려 하고 있습니다.

진저.
나는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이 불행했다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200년이 넘는 그 시간동안 그대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언젠가 그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매하고도 위선에 찬 기대로 가득 차있었던 어리석은 나이지만, 그 기대가 기다리는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어 주었음을 부정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진저.
나는 아직도 미모사의 어딘가에 당신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길고도 지루한 변명을 들으며 눈물지을 당신. 나는 그 이별의 눈물로 나를 붙들지 못할 당신의 영혼을 믿습니다. 이제 남아있을 나의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미모사의 곁에 있게 된다면 당신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진저, 영원의 약속을 깨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그럼에도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다시 약속을 하는, 돌이키지 못할 사죄를 듣지 못할 그대에게 속삭이는 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당신의 남편을 부디 용서해주길…….

- 끝 -

편지입니다.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는 이야기라...;;
서양고전풍 글쓰기에 대한 도전이었달까, 뭐 그런 겁니다.
(이름을 계속 반복한다거나, 휘황찬란한 수식어구라든가.)
남자의 마음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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