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고양이와 마녀

2008.02.26 15:3202.26

고양이와 마녀



창 너머의 새벽하늘은 칠흑처럼 어둡다. 골목에 하나 남은 가로등마저 죽어가는 실낱같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창 안쪽의 어둠도 만만치 않았다. 불이 들어와 있다면 스타워즈 광선검 같은 굉음을 낼 누런 천장 한가운데의 형광등은 지금 침묵하고 있다. 책상위의 먼지 쌓인 스탠드만이 유일한 빛이다. 나는 그 유일한 빛 아래서 광휘에 미쳐버린 나방처럼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흰 원고용지 위로 팽팽하게 긴장한 팔이 오가고, 금세 두 인물의 형태가 그려진다. 후끈, 하고 다시 열기가 온몸을 감았다. 겨울 초입에, 보일러를 꺼둔 방임에도 몸이 땀을 뿜어낼 기미가 느껴졌다. 나는 주저 없이 하나 남은 런닝을 훌렁 벗어던졌다. 뒤로 던져 올린 런닝이 땅바닥에 사뿐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몸이 식을세라 다시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루뭉술하게 그려진 두 남녀의 알몸 위로 잽싸게 옷이 입혀졌다. 여자의 옷은 고풍스러운 문양이 들어간 두툼한 귀족풍 드레스, 남자는 조금 허름한 복장의 바지와 셔츠였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마녀와 고양이의 모습까지. 나는 복잡한 모양을 한 드레스와 떡갈나무 숲의 세심한 묘사를 참고자료 없이도 해내는 나 자신에게 희열을 느꼈다. 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인가. 고작 40페이지짜리 만화를 그리기 위해 배경이 되는 중세 유럽 시골 마을, 복식자료, 나무와 고양이 사진을 1000장 가까이 보고 따라 그린 덕분이었다.

“후우······.”

팔이 저려오고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밑그림을 거침없이 완성한 김에 펜선까지 입혀서 마무리를 지으려는 결심이 흔들렸다. 밤새 연필을 쥐느라 지나치게 힘을 쓴 오른손도 조금씩 떨려왔다. 젠장, 이 상태라면 바로 작업하기는 무리다. 나는 잠시 몸을 쉬게 해 주기로 했다.

쉴 땐 확실히 쉬어야 한다지만 드러누우면 잠들어 버릴까봐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의자에서 허리를 길게 빼고 앉아 내 작업물을 집어 올렸다. 총 40페이지의 원고용지에 그려진 단편만화, ‘고양이와 마녀.’ 내용은 이러했다. 귀족가의 딸을 사랑한 평민 청년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마녀를 찾아온다. 마녀는 고심하다 둘의 사랑을 이루어주고, 얼마 후에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된다. 마녀는 그 청년의 사랑을 얻어야 살아날 수 있는 저주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마녀의 곁에서 지혜를 주던 고양이가 그녀의 주검을 쓰라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고양이 역시 마녀를 사랑한 죄로 저주에 걸려 있던 인물임을 암시하는 내용과 함께.

이루어진 사랑의 빛에 가려진 빗나간 사랑을 담은 연이의 이야기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갑작스레 단편을 그려야 할 일이 생겨서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나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내 부탁을 반기며 콘티를 만들어 주었다. 40페이지의 연습장 위에 인물의 배치와 배경의 대략적인 묘사, 말풍선과 대사들이 빼곡히 그려진 콘티. 소설과 더불어 만화 콘티까지 오랜 취미로 가져왔던 그녀이기에 나는 그 설계도로 바로 작업을 했다. 꼼꼼한 성격의 그녀가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만든 콘티였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라곤 그것을 보고 원고용지에 옮겨 그리는 것 밖에 없을 만큼 수월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녀의 이야기 자체는 충분히 마음에 들었지만 내 그림체가 그녀가 쓴 이야기의 정적인 분위기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역동적인 그림에 자신이 있는 편인데, 연이의 이야기에선 그런 부분이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 그림의 장점을 부각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게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단편을 그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고작 2달 전인지라 직접 이야기를 쓰고 콘티 작업까지 거쳐 그림을 그릴 시간은 없었다. 아쉬운 대로 배경이나 의복 같은 부분에 철저한 고증을 거친 노력을 기울였으니······.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작품에 대한 의욕이 다시 충만해졌다. 이번 작품으로 반드시 그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내 나이 스물일곱. 만화 그리는 것이 마냥 좋다며 순수하게 웃어도 되는 나이에서 이미 한참 지나있었다.







위이이잉-. 오랜만에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나와서 미술 서적을 뒤적거리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대학시절 동아리 동기 현석의 전화였다. 나는 들고 있던 투시원근법 책을 왼쪽에 끼고 핸드폰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요새 뭐하냐?”

“어, 성진이 너 바쁘냐? 아니면 단편 하나 그려라.”

“단편? 뭐야, 잡지에 싣는 거야? 이야, 드디어 너희 형 덕 좀 보는구나!”

나는 갑작스런 단편 제의에 만화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는 현석의 형을 생각했다. 보통 일주일, 또는 격주 단위로 출판되는 만화 잡지는 연재되는 작품들의 재미에 따라 판매 부수가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작품의 재미를 검증받지 못한 신인 작가들은 연재 자리를 따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공모전을 통해 어느 정도 실력을 검증받고 나서 그 다음에 연재하게 되는 경로를 거치는데, 때때로 편집부 기자들이 추천한 신인들이 덥석 연재 자리를 얻게 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지겹게 현석의 뒤를 따라다니며 편집부에서 일하는 형에게 입김 좀 넣어 달라고 졸라댔다. 몇 차례에 걸친 공모전에 모조리 떨어졌기 때문에 했던 부탁이었다. 겉으로는 장난처럼 굴었었지만, 속으로는 꽤나 진지하게 했던 부탁이었다.

“아, 새끼. 아직도 그 소리야. 그게 아니고, 너 배세준 작가 알지?”

현석은 내가 그렇게 부탁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손사래 치듯 말하며 어떤 이름을 꺼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아마 요즘 만화가 지망생이면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3년 만에 만화가 자리에 오른 사람. 그가 그 3년간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는 그가 성공하고 나서 조금 뒤에 알려졌기 때문에 이제야 슬슬 그의 작품이 수입되어 출판되는 참이었다. 빈손으로 3년 만에 타지에서 성공했다는 사실보다 만화대국인 일본에서 만화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놀라워 그의 작품을 사서 읽어보았지만, 생각만큼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내용은 이랬다. 아내에게 주눅 들어 사는 어느 샐러리맨은 일에 치여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면 일보다 더 무서운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자식과 집안 일, 그리고 급기야는 자신까지 쥐고 흔드는 아내 앞에서 그는 발기 부전증에 시달리고, 그런 증상이 만성이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섹스 없는 부부관계가 지속되던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되고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 분노와 함께 짜릿하게 샘솟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분노와 함께 되찾은 자신의 욕망 안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 작품의 마지막은 남자가 아내의 섹스를 훔쳐보며 자위를 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에 도사린 내밀한 욕망에 전율했다. 하지만 배 작가는 이야기 구성 능력이 너무 거칠었다. 이야기를 쓰고픈 욕구가 낳은 그의 감정은 작품 안에서 꿈틀거리는데, 그게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결국 그의 농도 짙은 그림은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은 채 장면 장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작품을 그린 사람이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워낙 시장이 넓은 일본인지라 이런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았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응, 알지.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지금 다음 작품 자료 수집 차 한국에 와 있는데······.”

뒤이어 들려온 이야기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배 작가가 각 출판사의 인맥들을 통해 예비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달라고 했단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작품 중에, 가능성 있어 보이는 작품을 선별해서 그 작가를 자신이 직접 키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직접 키우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성공한 작가가 키워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일본 출판사에 몸담고 있는 배 작가가 키워준다면 일본 만화계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게. 나 할 거야. 근데 작품 언제까지 그려야 돼?”

“좀 빠듯해. 12월 중순까지니까 2달 정도 남았는데, 너 나중에 못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배 작가가 신인들 작품만 모아 달래서, 다른 데선 다들 만화가 문하생들 중에서 괜찮은 사람들로 내보내는데 형도 그러려는 걸 내가 졸라서 너 한번 시켜 보라고 한 거란 말이야.”

“알았어, 새끼. 설마 내가 그럴까. 일자리 때문에 목을 매게 생겼는데······. 어쨌든 고맙다, 현석아. 잘 되면 한턱 쏠게.”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끊으려다,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근데 스토리 짤 시간이 될까? 시간이 너무 빠듯한데······.”

“연이 씨한테 하나 써 달라 그래. 소설도 쓰시고 콘티도 해 보신 적 있다며.”

아차, 연이. 갑작스런 연이 이름에 멈칫하는 사이 현석의 전화는 끊어졌다. 연이······. 나는 망설였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연이에게 스토리를 얻는 게 정답이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게 취미인 애니까. 가끔 보여주곤 하는 연습 삼아 쓰는 소설도 재미있었고, 종종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오곤 하는 콘티 자료의 구성도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만화로 그려 보라며 자신이 만든 콘티를 넘겨주었을 때, 우리는 심각하게 싸웠다. 나는 그렇게나 오랫동안 글을 써 왔으면서 문단에 등단하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고 고등학생 논술 강사나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태도가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소설로도 앞길을 제대로 닦아 놓지 않은 주제에 만화 분야에까지 손을 뻗치려 하다니. 그녀가 한 우물을 파지 않고 여러 분야에 조금씩 손을 대는 모습을 참기 힘들었던 나는 화를 터뜨렸고, 그녀는 충혈 된 눈으로 내 말을 묵묵히 듣다 콘티가 그려진 노트를 모질게 쓰레기통에 처박고 돌아섰다. 그 순간에 나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흥분이 식자 평소에 받은 스트레스를 애꿎은 그녀에게 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 나는 졸업에 임박해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한 우물만 파고도 공모전에 수차례 떨어진 나로선 그녀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가 정성스레 작성한 콘티가 사실은 내 생일 선물이었던 것을 알게 되고 나자 몸둘바를 모르게 되었다. 2주일을 매일같이 찾아가 용서를 구한 끝에 그 일은 마무리 되었지만, 그 뒤로 그녀와 나 모두 그 콘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때 일을 생각하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 연애사에 다시없을 실수였다. 그게 영원히 묻혀있을 과거라면 좋으련만 그 때 거절한 콘티를 지금 와서 다시 구걸해야 하다니······.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가 직접 이야기를 쓰면 너무 늦다. 나는 흉터를 남기고 아문 옛 환부를 다시 갈라 보기로 마음먹었다.  





연이에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했을 때 그녀는 마침 집에 있었다. 그녀는 논술 강사 아르바이트가 아니면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나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파스타 요리점으로 그녀를 불러냈다. 연락을 넣고 1시간 반 쯤 지나자 그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연인인 우리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음식을 시켰다. 얼마 후에 종업원이 갖고 온 크림치즈 스파게티는 곁에 놓인 무거워 보이는 수저와 포크 덕분에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우유처럼 잔잔하게 담긴 스파게티 속으로 포크가 들어가고, 수저에 대고 파스타를 감아올리면 그것은 이내 뚱뚱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입 속으로.

“너 나한테 뭐 미안한 거 있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용건을 말하기 위해 천천히 포석을 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갑작스러운 전개라니.

“너랑 사귄 3년 동안 여기 온 게 딱 5번인데, 맨 처음에 내가 데리고 왔을 때 빼곤 다 네가 뭐 잘못해서 사과하러 나 불러냈던 거 모르는구나.”

사실 그랬다. 이 가게는 맛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다. 아껴뒀다 큰돈을 쓰는 마음으로 오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큰돈을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가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좀 부끄러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그 횟수와 계기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게, 음······.”

“뭔데, 말해 봐.”

연이 특유의 내뱉는 말투가 괜스레 모질게 느껴졌다. 점점 줄어가는 그녀 앞의 접시에 비해 내 앞에 놓인 접시는 내용물을 그대로 남긴 채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무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나 스토리 하나 줄 수 없을까 해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나는 그 사소한 변화를 느끼곤 긴장했다. 그래, 알고 있다. 씨발놈이라고 하고 싶겠지. 1년전에 니가 팽개친 선물은 그 쓰레기통에서 직접 찾아가라고,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는 오감을 바짝 세우고 폭풍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정말?”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폭풍이 아니라 산들바람이었다. 나는 화창한 날씨 아래 무장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망연한 기분으로 걸쳐 입은 우비를 매만졌다. 일기예보가 잘못됐나?

연이는 말없이 물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물 컵에 가릴 듯 말듯 삐져나온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식사를 마칠 때 까지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화는 ‘정말?’에서 끊어졌고, 그것이 다시 이어진 것은 한참 뒤 그녀의 집 앞에 다다라서였다.

“너는······.”

  침묵의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그녀는 짐짓 말을 끊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봄으로써 내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너는 참 특이한 애야. 나 같이 구는 여자애를 누가 감당하겠니. 나는 네가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어, 다른 애들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으로 묵묵히 말을 들었다. 그녀를 사귀고 나서 나는 내 이전에도 그녀에게 몇 명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 모두 그녀의 취미를 못 견디고 떠나고 말았다는 것도. 그녀는 주말에도 밖에 나가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손을 잡고 걷는다거나, 화창한 오후 햇살을 맞는 데이트 같은 것을 기대 했던 그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고 버둥대다 지쳐서 떠나버렸다.  

나는 그녀를 밖으로 불러내는 대신 내가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래서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 방의 책도 읽고, 주방의 과자도 꺼내 먹었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원래 활동적이지 않은 유흥거리를 좋아했다.

“네가 예전에 내 콘티 때문에 화냈을 때 정말 섭섭했어. 내 딴에는 그동안 중심을 너무 내쪽으로 가져온 것에 대한 사과였거든. 나도 너한테 맞춰서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었는데······.”

내 옆에서 걷던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의 집 대문 앞이다.

“고마워. 나한테 스토리 써달라고 해서. 사실 그 때 이후로 네가 나한테 그렇게 부탁하기만을 기다렸어.”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나는 치졸하게 옛날에 거절한 이야기를 구걸하러 왔는데 그녀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매만지자 샴푸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이렇게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요한 골목길에서 우리는 포옹한 채로 몇 번의 키스를 나누었다.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등을 돌려 골목길을 반대로 걸어 나오며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묵은 매듭에 대해 생각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채 시간의 무게만큼 단단해져 있을 거라 믿었던, 그러나 이렇게 어이없이 쉽게 풀려 버린 매듭을.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배 작가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파렴치하게 꺼내든 부탁을, 그녀는 다정한 사랑의 귓말로 여겨주었다. 마치 1년 전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지금껏 내내 가슴에 품고 있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과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큰 믿음을 기울여 주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녀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떠난 이전 남자들보다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남들처럼 밖에서 이루어지는 데이트를 고집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 욕구를 억제하며 그녀의 취미를 존중했다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취향이 비슷해서 그녀가 하려는 대로 따라가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어쨌건 나는 그런 그녀에게 차마 배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일하는 작가가 키워주겠다면 일본으로 데려가겠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고 슬퍼하는 그녀의 얼굴을 감당하는 난처함을 겪느니, 눈을 가리고 한 번 더 파렴치해 지는 길을 택했다. 그녀가 차라리 폭풍처럼 굴었더라면 마음이 편해졌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40페이지의 작품은 무사히 완성되어 편집부로 제출되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친절하게 현석의 형이 다른 지망생들의 작품까지 모두 모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며칠 전에 나에게 동의를 구하려고 연락이 왔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른 작품들도 모두 올라온 걸 보니 다들 자기 작품을 웹 상에 올리는 데 동의한 모양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블로그에 실린 8개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소문난 맛 집의 요리를 음미하듯 한 장 한 장의 그림을 자세히 감상하며 작품의 페이지를 모두 넘겼을 때,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나직한 환호성이었다. 예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나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각 편집부에서 추천한 지망생들의 작품인 만큼, 그림들은 다들 뛰어났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합격 여부를 결정할 면접관 같은 존재인 배 작가를 너무 의식했다. 애써 어려운 구도로 그림을 그려 자신의 그림 실력을 과시하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어려운 그림을 그리느라 내용의 설득력을 반감시키는 작품이 많았다. 나는 내 그림을 드러내려는 욕구를 최대한 아꼈다. 연이가 쓴 이야기를 믿고, 그 이야기에 완벽히 어울리는 그림만 그렸다. 그것은 모자라서도, 넘쳐서도 안 되는 작업이었다.

마우스 휠을 돌려 게시물 아래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현석의 형의 개인 블로그인 탓에 몇몇 지인들의 글 밖에 없었지만 감상평은 대체로 비슷했다. 연이와 나의 작품, ‘고양이와 마녀’가 가장 나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연이에게 마음 편하게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배 작가로부터는 아직 확실한 언질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가 내 작품에 대한 견해를 확실히 밝히면, 그때 가서 연이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나는 몇 걸음 앞선 무용한 고민을 하기보다 당장의 결과부터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몸이 달아오르는 그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배 작가는 나에게 저녁 10시경 강남 역 어느 술집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는 내 작품을 가장 괜찮게 읽었으며, 나를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밤이 저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시간에 맞춰 그가 말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강남 역 큰 도로변에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수록 상권이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KFC, 스타벅스에서 사골 해장국, 그리고 다음은 찬란한 밤의 거리로. 마지막 골목을 접어들자 네온사인이 즐비한 거리가 펼쳐졌다. 붉고 파란 네온사인이 휘청대는 가운데 그가 말한 가게의 이름이 보였다. ‘투웬티.’ 나는 그제야 그 상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임을 떠올렸다. 인터넷 성인 커뮤니티에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고급 룸싸롱 투웬티는 강남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 20명을 보유하고 있다는 광고를 내건 업소였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였고, 그 가게를 자주 들락날락하는 회원들은 가게 이름의 숨겨진 의미를 시시덕거리며 알려주곤 했다. 비싼 테이블 세팅비를 제외하고, 20만원을 더 쥐어주면 아가씨와의 2차가 그 룸 안에서 이뤄진다는 이야기였다. ‘강남 투웬티’라는 단어를 발음 할 때면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사창가’나 ‘안마방’을 말할 때와 비슷한 웃음을 흘리곤 했다.

배 작가가 잡은 약속 장소가 정말 저곳인가? 나는 당혹스런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잘못 찾아들은 것 같진 않았다. 역 출구를 나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헷갈릴 만한 갈림길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새삼 느낀 것이지만 투웬티란 이름은 룸싸롱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나는 다른 업종의 투웬티가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의미심장한 붉은 조명이 빛나는 가게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혼자 오셨습니까? 찾는 아가씨 있으세요?”

쾌할한 목소리의 웨이터가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나는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일행이 있는데요. 배세준 씨라고 예약을 해 두셨다는데······.”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웨이터는 가게안의 카펫 깔린 복도를 지나 구석의 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정중히 문을 열자 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룸이 드러났다. 나란히 앉으면 열 댓 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방이었다. ㄷ자로 놓인 푹신해 보이는 의자 앞의 긴 테이블 위에는 이미 양주와 과일안주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 과일을 하나 집어먹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일어섰다. 캐쥬얼 정장 차림에 짧게 기른 턱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등 뒤로 웨이터의 말이 남겨진 채 문이 닫혔다. 나는 커다란 룸이 주는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이성진 씨, 맞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하, 선생님은 무슨. 앉아요.”

그는 짙은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그의 차림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만화가 하면 떠오르는 구질구질한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굉장히 멋진 남자였다. 노란색의 반투명한 선글라스와 왼쪽 귀의 검은색 피어싱, 정장 재킷 안에 받쳐 입은 보라색 셔츠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잘 어울렸다. 나는 그가 미남형 얼굴이 아니었음에도 바람둥이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황송스럽게 자리에 앉는 나를 향해 그는 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나는 이름과 자기소개, 날씨 이야기 같은 의례적인 패턴을 밟지 않고도 초면인 상대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름도 모르는 양주를 손가락만한 잔에 따르고 또 따르면서 성공한 작가와 궁핍한 만화가 지망생 사이의 어색함은 그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빨리 사라졌다. 그는 화술이 좋았고, 아는 것도 풍부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식견이 좁은 내가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그런 그의 시도는 매우 자연스러워서,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나 역시 식견이 높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초대한 룸 안에서, 마치 안방처럼 편하게 술을 마셨다.





어느 새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대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술을 물마시듯 마시고 금세 뻗어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양주를 마셔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코를 갖다 대기만 해도 화악 느껴지는 알코올 기운은 쉽게 잔을 털어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술이 술인지라, 얼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열기가 후끈후끈 올랐다. 나는 잔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의자에 길게 기대앉았다. 배 작가도 열기가 오르는지 정장 재킷을 벗어 자리 한쪽에 내려놓았다.

사실 술 이외에도 열기가 오르는 이유는 있었다. 처음에 내가 받은 느낌대로, 그는 여성 편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전개된 여자 이야기는 그의 경험담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것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는, 거의 카사노바 수준이었다.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여자의 심리를 그는 정확히 꿰고 있는 듯 했고, 그것은 그의 이야기에서 정확히 실현 되었다. 그가 점찍었고, 목적을 달성한 여자들은 공통점이 여자라는 사실 밖에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동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출판사 경리 직원, 하라주쿠 번화가를 쏘다니는 여고생, 심지어는 마트에서 자주 마주치는 유부녀도 있었다. 나는 그의 다양한 편력에 한 번 놀랐고, 편력의 한 줄을 채우는 데 별로 도덕적으로 구애받지 않는데다 그걸 스스럼없이 말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적인 감흥을 주는 모든 매체가 그렇듯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그 흥미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도 높은 이야기라도 그것을 3번쯤 들으면 질려버리고 만다. 4번째 강도 높은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자신이 강도 높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술기운과 배 작가가 깔아놓은 이야기 탓에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집중력을 잃어 가는 것을 느끼는지, 내 얼굴을 흘끔 보더니 배 작가가 말했다.

“성진 씨. 내 작품 읽어 봤어?”

그는 어느 샌가 나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태도 전환의 명확한 시점을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예닐곱 살이 많았고, 나는 그의 하대에 전혀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아, 네. 읽어봤습니다.”

“어땠어?”

나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림체는 괜찮았지만 내용은 그저 그랬기 때문이었다. 아니, 줄거리 뼈대는 괜찮았는데 그것이 이야기로 재미있게 연결되진 않았다. 내밀한 욕망을 그린 그의 작품은 너무 난해했다. 나는 어떤 점을 부각시켜서 칭찬해야 할지 망설였다. 취기가 도는 탓에 매끄러운 문장을 구성해내기가 힘들었다.

“큭큭, 그거 별로지. 나도 알아.”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작품이 출판 되었고, 편집장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거지. 일본에서도 독자 평은 마찬가지야. 다들 어렵고 잘 모르겠다고 했어. 근데 왜 편집장한테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배 작가는 흐흐, 웃으며 뜸을 들였다.

“내가 편집장의 욕망을 읽었거든. 사실 이게 제일 짜릿한 경험담인데 말이야.······.”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욕망을 읽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설명하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양반이 좀 유약한데다, 마누라가 기가 좀 셌어. 최소한 회사에서 일 때문에 시달리고 나면 집에서는 편해야 하는데, 이게 또 마누라 때문에 그렇지가 않은 거야. 출판사에 자주 얼굴 비추고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모조리 챙기면서 따라다니고 나서 한 2년쯤 되니까 그런 말을 하더라고. 자기가. 사실은 발기 부전이라고. 근데 그게 신경성이야. 원래 그런 게 아니라. 한 마디로 마누라 때문에 기가 죽어서 발기도 안 되는 상태라 이 말이지.”

나는 그래서요?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배 작가 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다시 내 눈을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양반이 누군가 자기 마누랄 범해주길 바라고 있다고 느꼈어······.”

순간 불쾌한 기분이 엄습했다. 아니, 이게 불쾌한 기분일까? 나의 머리는 황급히 ‘불쾌’라는 딱지를 내밀었지만, 나의 아래쪽은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를 꼬치꼬치 캐묻는 타입은 아니지? 굳이 대답하라면, 몰라 나도. 그냥 그렇게 느꼈어. 그리고 그 느낌에 빠져들수록 강한 확신이 들었지. 마누라 기에 눌려서 물건도 서지 않는 남자가, 다른 누군가가 마누라를 여자로서 깔아뭉갠다고 상상을 한다면 어떨 것 같아? 솔직히 나는 짜릿할 것 같았어. 그런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서 더욱 그렇겠지. 그래서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양반을 부추겼어.”

나는 배 작가의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분은 조마조마한 선택의 순간과 비슷했다. 어두운 비상계단에서 몰래 키스를 하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뚜벅거리는 신발 소리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내밀한 욕망을 충동질 했지. 결코 성급하게 이야기 꺼내는 법 없이, 그가 간절히 열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들부터 공략해 나갔어. 생각 해 봐, 성진 씨. 자네가 갖고 있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욕망을. 가령 옆집의 유부녀랑 미치도록 자고 싶다고 생각해 봐.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찾아와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자기 욕망에 대해 아는 체를 하면서, 그 바람을 이뤄줄 수 있다고 한다면 성진 씬 어떻게 할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그 양반의 욕망에 대해 이해하고, 그 바람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행동했어. 그건 정말이지······, 오래 뜸 들인 만큼 짜릿한 작업이었어. 그 만큼 그 양반의 반응도 확실해졌지. 발정난 동물의 생식기를 건드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는 오래전에 저질렀을 그 일을 되새기듯 눈을 감고 이마를 감싸 쥐며 낄낄낄 웃었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쾌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는 편집장과 모종의 계약을 맺고 직장 부하 직원인양 그의 집에 드나들며 부인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 달도 되지 않아 편집장의 아내를 함락시켰다. 그의 분위기, 그의 감각, 그의 화술 정도면 충분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음탕한 계약의 마지막은 집에서만큼은 안 된다는 편집장 아내를 기어코 거실로 끌어내 소파에서 질펀한 정사를 갖는 것이었다. 물론 편집장은 숨어서 배 작가가 자신의 아내를 범하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방구석에 숨어 몇 번이나 자위를 했다고 한다. 분노에 가까운 희열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는 결국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되찾은 욕망 안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그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의 내용임을 깨달았다. 맙소사, 이 이야기가 경험담을 그린 것이었다니. 이런 짓을 저지르고, 거기다 만화로 만들어 출판까지 했다고?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로서 이보다 경악스러운 케이스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편집장은 제정신인 사람일까. 자신의 그런 이야기를 그린 배작가의 작품을 출판할 생각을 하다니. 아니, 아니면 배 작가가 설마 협박이라도? 눈살을 찌푸린 내 얼굴을 보는 배 작가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왠지 지루한 표정을 짓던 나를 한순간에 돌려놓은 것에 대해 승리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아까 편집장은 내 작품에 호평을 했다고 했지. 그는 그 이야기에 도사린 욕망에 충분히 공감했던 거야. 왜냐면 자기 이야기니까. 그 양반은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치부가 될 수 있는 자기 이야기를 그린 작품도 기꺼이 출판되게 추진해 주었지. 성진 씨라면 그럴 수 있겠나? 내 장담 하건데, 성진 씨는 그렇게 못할 걸. 성진 씨 작품 읽어보니 딱 알겠더군. 중요한 부분이 텅텅 비었어.”

나는 갑작스레 나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솔직히 말해 어이가 없었다. 그가 나를 향해 이런 나를 이해하겠냐고 도덕적인 비난이 쏟아질 것을 우려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도 부족할 판에······. 오늘 모임에서의 내 위치는 배 작가 앞에 최대한 공손해야 하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작가 지망생다운 태도로 공손히 그 이유를 묻기에 앞서 어째서 그러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했다. 양주처럼 화끈거리는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텅텅 비었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흐흐, 자네 표정을 보니 남의 지저분한 사생활로 작품 그린 사람이 다른 사람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이 있냐는 투로군. 맞나?”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사실이었다. 그의 작품에 어둡고 뜨거운 열정이 담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편집장 밖에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난잡한 작품을 쓴 사람이 연이가 쓴 이야기를 비난하다니······. 그렇지만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한 번 더 던졌다.

“제 작품이 어때서요? 비판이야 듣겠지만,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배 작가는 킥,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술잔을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더니 말했다.

“이 봐, 성진 씨. 내가 저지른 일들을 기억 하면서 작품 그리는 내내 어떻게 했는지 알아? 머릿속으론 그 여자랑 뒹구는 상상을 몇 십, 몇 백번을 했어. 당장 그 집으로 다시 달려가서 뒹굴고 싶었다고. 상상만으론 무슨 짓을 못하나. 아예 편집장을 옆에 앉혀놓고 마누라 신음소리를 들려주는 상상을 했지.”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갈증과 아찔함을 느꼈다. 물 대신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중요한 건. 머리는 해방시키되 몸은 구속하는 거야. 눈이 벌개지고 마른침이 바삭바삭 넘어가도 거시기엔 손가락 하나 갖다 대면 안 돼. 어때, 상상해 봐. 미칠 것 같지?”

배 작가가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걸어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작품에 욕망이 묻어날 수 있었던 건, 내가 작품을 그리는 내내 편집장과 나, 그리고 편집장 마누라에 대한 끈적한 상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야. 작품을 그리는 내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당연히, 몸을 만족시키면 절대 안 돼. 자위를 해서 사정해 버리면, 며칠간 아무 의욕도 없어져. 몸이 만족하니까 아무 생각이 안 들지. 욕구 불만에 가득 차있어야 그걸 풀고 싶다는 절박한 감정이 작품에 진득하게 배어 나온단 말이야.”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배 작가를 보았다. 그는 느멀느멀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자위를 참는다니. 그의 이야기가 변태같이 느껴졌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내용은 허술했지만 그의 만화에서 욕망이 느껴졌던 이유가 이것인가.

“미칠 것 같은 스트레스. 그걸 품고 있는 게 중요해. 화를 꾹꾹 참아도 좋고, 슬픔을 들이마셔도 좋아. 자기를 학대해도 돼. 그런데 가장 확실한 건. 바로 이거지. 시시때때로 고개를 드는 본능 말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충전되는 건 이것밖에 없거든.”

그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곤 뚜벅뚜벅 걸어가, 테이블 앞에 서서 나를 보고 돌았다.

“성진 씨 작품 스토리가 참 풍부하고 좋아. 이야기는 잘 만드는데 말이야, 이야기에 혼이 없어. 특히, 마지막에 마녀 시신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모습이 전혀 슬프게 느껴지지가 않아. 사실 이 장면이 이야기의 백미 아닌가? 다른 장면은 몰라도 그 부분에선 저릿하게 눈물이 날 만큼 슬펐어야지. 그런 중요한 장면에 감정이 비어 있다는 건, 성진 씨가 어떤 절박함을 품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야.”

나는 배 작가의 지적에 변명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쓴 건 연이니까 절박함을 품어 보지 못한 건 내가 아니라 연이라고 소리치는 것은 치졸하기도 하거니와, 이 분위기에 적절치 않았다. 배 작가가 자신의 치부일수도 있는 과거를 드러내며 전한 가르침을 들은 것은 그녀가 아닌 이 자리에 있는 나였다.

내가 묵묵히 서 있는 사이, 그는 테이블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복도를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룸으로 훤칠한 키의 여자 2명이 들어왔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배 작가와 여자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나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술자리 처음부터 들어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술자리가 거의 파할 무렵에 연락을 받고 들어온 여자들이라면 그 이유가 뻔했다. 그래, 이곳은 투웬티였다. 20만원에 늘씬한 아가씨를 품을 수 있는 투웬티. 나는 목덜미가 후끈해 지는 것을 느꼈다.

배 작가가 한 여자를 부르더니 귀에다 뭐라고 길게 설명을 했다. 그 여자는 갸우뚱 거리며 배 작가를 연거푸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냥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고, 다른 한 여자는 배 작가에게로 가서 안겼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살포시 웃음을 흘리며, 여자는 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배 작가는 자기 허리에 감긴 여자와 소파에 드러눕듯 앉으며 말했다.

“성진 씨 쓸 만해. 내가 키울 테니까, 오늘 욕구를 참는 것부터 배워 보라고. 오늘 일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작품 그릴 때 끊임없이 상상하라고. 끝내주는 작품 하나 완성하고 나면 이렇게 자신한테 상을 주는 거야.”

당황하는 나를 슬며시 밀어 의자에 눕힌 여자는 셔츠를 벌리고, 런닝을 올려 유두 위에서 혀를 놀렸다.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밀쳐내려 했지만 여자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아까 귀에다 대고 배 작가가 말한 것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거절해도 애무를 할 것. 억지로 고개를 들어 배 작가를 보려는 사이에 다른 손은 벌써 벨트를 끌러내고 있었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곳에 닿자 성기가 폭발하듯 발기했다. 여자의 짙은 향내 나는 입술이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귓불, 목덜미, 치골, 그리고······. 배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상 받는 동안 성진 씨는 참는 연습 하는 거야. 아, 혹시나 싸 버리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할 거야. 진심이니까 성진 씨도 진지하게 하라고. 알았지?”

그의 말 뒤로 큭큭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물어져 가는 정신 속에서 그의 의도에 깨닫고 경악했다. 그는 나를 성 노예처럼 잔뜩 달아오르게 만들되 결정적인 허락은 절대 내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이 변태적인 상황에, 게다가 그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점점 강해지는 여자의 애무가 머릿속에서 진한 감정만 남기고 이성의 산물인 언어를 제거해가고 있었다.





“후욱······, 후욱······.”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면서 연필을 움켜쥐었다. 단편 ‘고양이와 마녀’에서 새로 고쳐 그리기로 한 5페이지 중 아직 한 장도 완성하지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짓누르며 그 때 그 룸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길게 늘어진 소파위에 엎드린 배작가의 입과 손은 능란하게, 그리고 쉴 새 없이 여자의 몸 위를 움직였다. 배 작가 아래의 여자는 거의 실신할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철퍽, 철퍽,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생생한 그 현장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각이 차단되면 다른 모든 감각이 증폭된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해진 성기를 휘감은 혓바닥을 더 견뎌낼 수 없었다. 한계점에 다 달아 황급히 여자를 제지하면, 그녀는 잠시 몸을 뗐다 다시 다른 곳부터 애무를 시작했다. 내가 그만둘 것을 조용히 부탁해 보아도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 작가가 얼마를 줬길래, 썅년! 그러나 나는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는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발 멈추지 마, 이 썅년······.  그 굴욕적인 분열 앞에 나는 완전히 좌절했다. 여자는 미리 모든 일에 대한 언질을 받은 듯, 나를 아슬아슬하게 올렸다 내렸다 하며 긴장의 최고조를 유지시켰다. 명성 높은 투웬티의 아가씨다운 솜씨였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느끼며 억제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맞은편 의자에서 떠나가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사정을 마친 배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룸 안에는 흡족한 한 마리 악마와 모든 일을 함께 겪었음에도 욕구 불만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짐승이 하나 있었다.

피폐해진 상태로 옷가지를 주워 입을 생각도 못하는 나에게 배 작가는 말했다.

“성진 씨. 그 이야기 조금만 고쳐 봐. 내가 말한 마지막 부분 좀 더 진한 느낌이 나게. 응?”

나를 내버려 두고 룸을 나가는 그의 등 너머로 한마디가 더 들렸다.

“그거 완성되면 연락해. 그리고······, 완성하면 자기한테 상이나 한 번 주라고.”

예의 큭큭대는 웃음과 함께 그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날 집 근처 운동장을 10바퀴를 달리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주변 여자들이 모조리 투웬티의 아가씨처럼 보였다. 연이에게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연이를 만났다간 당장 자취방으로 끌고 와 요도 끝까지 차오른 정액을 싸질러 버릴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그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냥 그렇게 풀어버리기에는 룸에서 받은 굴욕이 너무나 아까웠다. 어떻게든 한번은 시도해 보고 싶었다. 지금 혈관 곳곳에 가득 들어찬 절박함을 작품을 통해 짜내어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당장 연습장을 펼쳐 마지막 5장의 콘티를 짜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려야 하지? 의욕은 넘쳐 나지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다른 작품을 그린다면 배 작가의 것처럼 짐승 같은 분위기의 작품은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미 남이 써 놓은 이야기에서 연결되는 5페이지를 그려내야 한다. 이미 완성된 앞부분의 등장인물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다른 느낌이 나도록 작품을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나의 욕구 불만을 쏟아 부은 고양이는 연이의 고양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되고 말았다.

“······.”

나는 이를 악물며 원고용지 한 장을 우지직 구겨 방구석에 팽개쳤다. 또 다시 룸에서의 광경을 상상했다. 그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내가 적극적으로 그 여자를 공략하는 상상이었다. 여자는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지하수가 용출하듯 신음을 터뜨린다. 여자의 그 곳은 젖다 못해 물이 흘러넘치고, 시뻘겋게 솟아오른 나의 페니스는 정확한 각도로 G-SPOT에 적중한다. 기관차 같은 움직임에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지르다 기절해 버린다······.

침이 뚝 흘렀다. 아래쪽에 꼿꼿이 서 있는 그것이 느껴졌다. 다시 이를 악물고 연필을 잡으면서, 나는 작품이 완성되면 통장을 털어 나에게 상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위이이잉-. 코앞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음에 나는 잠을 깼다. 머리가 지끈한 게 수면부족이 정도를 넘었음을 알렸다. 욱신거리는 머리 외에도 어깨와 등, 허리가 저려왔다. 나는 내가 책상에 앉은 채로 잠들었음을 알았다. 잠을 깼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정신이 금세 돌아오지 않아 잠시 허둥대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잤어?”

내 갈라진 목소리에 머뭇거리는 반응. 연이다.

“어, 조금······.”

“잠깐 얘기 좀 해.”

“말 해.”

“전화로 말고. 씨에스타로 나와.”

씨에스타. 연이가 좋아하는 그 파스타 요리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3시 20분. 나가기 싫었다. 대강 아무거나 집어먹고 다시 원고에 매달릴 시간이다.

“안되겠는데. 나 원고해야 돼.”

“······그럼 너희 집 앞에서라도 만나.”

사이를 두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짓누르는 듯한 콧소리가 느껴졌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그녀의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마지막으로 연이에게 연락한 때가 언젠지 생각해 보았다.

배 작가와 만난 후 뜸하게 전화를 한두 번 했을 뿐, 그 뒤로는 연락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3시 25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되는데······. 짜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삭히기로 했다. 억누르는 만큼 작품을 통해서 표출 되니까. 흐흐, 웃음이 났다.  

나는 연이가 올 때 까지 씻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으로 새로 그린 5페이지에 대해 생각했다. 배 작가가 권해준 그 방법은 환상적이었다. 처음 며칠은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욕구가 절박해짐에 따라 몸이 자연스레 살 길을 찾듯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다 주었다. ‘그럼, 네가 살 길은 기막힌 작품을 그려내는 것 밖에 없어.’ 나는 내 물건을 향해 그렇게 말을 걸었다. 원하는 걸 얻고 싶으면 기막힌 작품을 그려라. 그 전까지는 자위는커녕 스치는 정도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벌써 며칠 째 자위를 참은 건지 모르겠다. 간혹 몽정이라도 한 날에는 나는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다. 제멋대로 연료를 쏟아낸 무의식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탕탕탕.

“나야, 문 열어.”

연이가 왔나 보다. 나는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나가 철커덕, 잠금장치를 돌렸다.

“너······, 흡!”

숨을 쌕쌕거리며 거칠게 들어오던 연이가 순간 호흡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다. 냄새 탓인가? 그러고 보니 달랑 하나 달린 창문을 열어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덕분에 기세가 흐트러졌지만 다시 입술을 깨물며 연이가 말했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무슨 말?”

너무도 태연한 나를 연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깜빡이며 눈썹을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는 연이의 표정 위로 촉촉이 눈물이 맺혔다.

“어쩜······. 너 왜 그거 말 안했어? 안 그럼 내가 부탁 안 들어 줄 것 같아서?”

“그거?”
“공모전 말이야 나쁜 놈아! 그거 당선되면 일본 가는 거라며!”

기어코 그녀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다 알고 있다고, 아는 커뮤니티 사이트 친구가 알려 줬다고 말했다. 현석의 형의 블로그에 업로드된 작품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연이가 소설을 올리는 커뮤니티 사이트 회원이 그걸 발견해서 알려준 모양이었다. 어디어디 올라온 만화가 연이 네가 예전에 썼던 이야기랑 똑같던데, 그거 표절 아니니? 이런 식이었겠지. 전파라는 막강한 운송 수단 덕분에, 발 없는 말과 글은 이제 천리 따윈 우습게 넘나든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있자 그녀가 악이 받친 듯 더욱 소리를 쳤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말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녀가 나를 찾아와 닦달하는 지금 이 상황이 그 증거다. 그런데······, 내가 왜 말을 안했더라? 나는 무거운 머리가 생각을 빨리빨리 꺼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 부탁이라고 정말 열심히 콘티 짜서 넘겨 준건데, 너는 어떡할려고 그랬어? 당선 됐으면? 그대로 가지고 일본으로 가려고? 너 내 기분 생각은 해 봤어?”

갈수록 급박해지는 그녀의 말투와는 달리 내 정신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틈입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그 사이에 꾸역꾸역 들어오는 무언가가 그녀가 쏟아내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다. 수면 부족 탓인가······. 나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으려고 생각했지만 화를 내며 열변을 토하는 상대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급히 행동을 억제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은 멈추지 않는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그녀의 말은 너무 빠르다. 지금 내 상태를 설명하고 싶지만 그 문장을 생각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아득한 정신 너머로 일본, 출세, 배신 등등의 단어가 들렸다. 젠장할, 화가 치민다. 너무 빠르다. 날 좀 보란 말이야. 조금만 멈추고 네 말을 이해할 시간을 줘. 머리가 복잡해진다. 눈앞에 프렉탈 기호 같은 잔상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속이 메스껍고,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왜, 왜 이래?”

그녀가 발갛게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본다. 당황한 눈빛이다. 아래쪽으로 고개를 떨구니 내가 그녀의 양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너······, 가.”

“뭐라고?”

“좀 가······. 부탁이야.”

“야!”

그녀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격한 감정이 일렁대는 그 현장 속에 있으려니 이리저리 요동치는 나룻배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그녀의 얼굴 위에 토해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 그녀를 현관 너머로 밀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가벼운 그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다 밀려났다. 눈물, 콧물, 상기된 얼굴, 기가 찬 표정을 너머로 황급히 현관문을 닫았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이 몰려왔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너 그러고 얼마나 잘 되나 보자, 씨발놈아!”

쓰러져 기댄 현관문 너머로 쿵, 쿵 발길질이 느껴졌다.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애처롭다. 그녀답지 않은 ‘씨발놈아’ 란 글자가 머릿속에 이물질처럼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을 때 까지 현관문에 기대 있었다. 등 뒤의 차가운 감촉이, 그나마 울렁거리는 내 정신에 현실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며칠 후, 나는 드디어 작품을 완성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당장 몸을 깨끗이 씻고 근처 현금 인출기로 나가 돈을 찾았다. 배 작가와 갔었던 그 투웬티를 생각하며 20만원을 뽑으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곳은 화대를 제외하고도 술값이 드는 곳이었다. 아무리 나에게 주는 상이라지만 생활비가 왔다 갔다 하는 큰돈을 쓸 수는 없었다. 술값까지 합치면 50~60만원은 우습게 깨지는 곳이다. 나는 일찌감치 단념하고, 룸 대신 정육점 불빛이 빛나는 숨겨진 쪽방을 찾았다. 으슥한 골목에서 손님을 찾는 호객꾼의 뒤를 따라 슬라이드 도어를 열고 들어섰다. 투웬티의 반도 안 되는 화대로 계약을 맺고, 1평 남짓한 침대 방에서 계약을 이행했다. 10분도 채 안 되는 계약이었다. 그 동안 머릿속에서 꿈틀대던 상상과 같은 장면은 없었다. 여자는 계약을 이행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손도 못 대게 했고, 절정의 순간에 신음을 터뜨린 것도 그 여자가 아닌 나였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여자는 관계가 끝나자 박카스 한 병을 쥐어주고, ‘이제 가. 오빠.’ 라고 말했다. 나는 누나가 아니라 이모쯤 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오빠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에 황송해 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허탈했지만 워낙 오래간만의 일이라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다음번엔 더 큰 상을 줘야지, 하고 생각하니 창작욕이 더 불타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 작가에게 완성 소식을 알리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핸드폰은 갖고 나오지 않았다. 연이가 다녀간 이후로 짜증스러울 정도로 울어대서 꺼둔 채 방 구석에 팽개쳐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공중전화의 딱딱한 버튼을 누르며 배 작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연결음을 듣고 있으려니 조바심이 났다. 당신이 가르쳐 준 그 방법은 정말 최고라고,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여 작품을 완성한 다음, 지금 막 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오는 길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는 나의 스승이요, 나는 그의 도제였다. 남들이 들으면 손가락질하며 눈살을 찌푸릴 그 사실에 대해, 그는 마음을 다해 기뻐해 줄 것이다. 도제의 성장은 당연히 스승을 기쁘게 하는 법이니까. 어차피 그것은 스승과 도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파를 통한 대화 연결에 실패한 모든 이들을 상대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는 그와 직접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음성으로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짧게 남기곤 부스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배 작가의 그 방법을 다시 음미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들었다. 한계까지 내몰린 육체와 정신은 그 억눌린 엑기스 같은 욕구를 작품이라는 유일한 구멍으로 분출시킨다. 이름 있는 예술가들이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삐딱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이해를 더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다들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며 많은 것을 내부에 쌓아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품을 통해 표현해 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 비해 평범한 환경에서 태어난 내가 그들처럼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퀴퀴한 방 냄새와 옷가지와 책들, 쌓인 먼지들이 풀풀 날리는 방이 보였다. 나는 작품도 끝냈으니 내일은 청소를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나는 먼지구덩이 방 속에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났다. 이게 얼마만의 긴 잠이던가. 아침에 눈을 뜬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정신을 차린 후, 어제 계획했던 청소를 시작했다. 창문과 현관을 열고,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불을 털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데, 그제야 연이 생각이 났다. 묘하게 기분이 편했다. 기를 쓰며 원고를 꺼냈는데, 아직도 연이와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다면 정말 피곤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연이는 그런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떠났다. 결과야 어찌됐든. 나는 이불을 크게 한번 털었다. 겨울 이불이라 그 무게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사실 그렇게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끝까지 거짓말할 생각도 아니었고, 이야기도 듣지 않고 그녀를 집 밖으로 몰아 낼 생각도 아니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을 때 찾아왔다. 그 순간에 나는 다른 곳에 집중해 있어야만 했다.

나는 현관문 밖으로 밀려날 때의 연이 표정을 떠올렸다. 기가 막힌 듯한,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는 배신에 맞닥뜨린 여자의 표정을. 나는 조금 침통한 기분이 되었다. 왜 하필 그 때 찾아왔어, 연이야. 그러나 그녀로서는 그게 당연한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 한마디 없이 끝까지 미루기만 했지 않은가. 연이에게 부탁하기 전에 이야기를 해 두었다면, 아니, 그녀가 찾아 왔을 때 짧게라도 말했더라면. 작품이 완성될 때 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이것만 끝나면 다 설명하겠노라고······.

이미 늦은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연이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이대로 끝낸다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배신을 자행하고도 그녀를 집 밖으로 쫓아낸 남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것은 다 용서 받지 못하더라도 그 행위 하나 만큼은 본심이 아니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았다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았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고.

나는 털던 이불을 담장에 대충 걸고 도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물건들이 제멋대로 깔린 바닥을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전원을 켰다. 그날따라 유난히 핸드폰 화면의 로딩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멀리 횡단보도 너머로 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얼굴은 마주하고 있었지만 신호등 불은 빨간색이었고,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먼 거리를 두고 우리는 그저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을 피하고 싶은 어색함이 없는 상대라면 좋은 친구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신호등 불이 바뀌고, 나는 현석을 향해 걸었다.

“왔냐.”

“오래간만이다. 밥은?”

“감자탕 어때.”

“니가 사는 거지?”

현석은 픽 웃으며 등을 돌렸다. 낮 시간의 감자탕 집은 한산하게 선풍기만 돌아가고 있었다. 하긴 초여름이라곤 하나 벌써부터 한낮엔 땀이 흘러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날씨에 감자탕을 먹으려는 사람은 드물 테지. 우리는 어느 테이블에 앉을까  고민하다 종업원 아주머니가 손짓하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일은, 할 만해?”

“죽겠다 야. 형 따라 이것저것 열심히 해 보려고 하긴 하는데······.”

현석은 피곤한 듯 어깻죽지를 주무르며 인상을 썼다. 녀석은 올해 자기 형을 따라 같은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다. 원래 출판사 일에 관심이 있고 성적도 괜찮은 현석이었지만, 형이 하는 일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어깨너머로 일을 익힌 것도 입사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형이 바쁠 때면 용돈을 조금 받고 형의 일을 도와주곤 했었다.

“그럼 난 이제 너한테 징징대면 되는 거야? 너희 형은 내가 몇 년째 칭얼대는데 그렇게 무심하냐.”

“웃기시네. 네 만화 연재 시켰다가 잡지사 말아 먹을라고. 안 그래도 지금 출판사 경기가 안 좋은데······.”

현석은 킥킥대며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셨다. 녀석은 자기 형을 닮아 고집이 철통같다. 하긴 그런 녀석이니 편집 기사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정성껏 그렸다고 가져온 만화가들의 작품을 자기 눈에 차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소신이 짙고 고집이 있어야 한다. 자신도 출판사로 작품을 들고 찾아온 예비 작가들을 상대로 몇 번 상담을 했었는데, 나이 삼십대 중반에 애까지 딸린 만화가의 작품을 거절할 때면 정말 죄 짓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출판사의 수익이 달린 문제니까. 전망 없는 작가의 작품을 실어 주는 건 자기 월급으로 남의 배를 채워주는 격이다. 따라서 편집 기자들은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을 것인지를 예측할 줄 알아야 한다. 현석은 지금까지 자신이 상담을 했던 5명중 1명만 연재를 제의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야, 너희 출판사 뭐 그렇게 깐깐하냐. 이건 뭐 친구 하나 출판사에 둬서 사정 좀 나아지나 했더니 그런 게 전혀 없어.”

“저번에도 말 했지만, 너는 스토리가 너무 딸려. 그러게 스토리 작가 하나 붙여준다고 했을 때 그냥 연재 하지······.”

그 5명중 1명이었던 나의 불평에 현석은 여전히 자기주장을 고집할 뿐이다. 그러나 나 역시 남이 쓴 이야기로 그림만 옮겨 그리는 수동적인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구성한 스토리로 직접 그림을 그려 작품을 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연이만큼은 궁합이 맞아야지. 나는 이야기랑 그림이 따로 노는 작품 만들고 싶지 않다.”

내 입에서 나온 연이의 이름에 현석이 움찔 한다.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이 길어지려는 찰나, 우리 둘 사이로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감자탕이 나왔다. 현석은 짐짓 웃으며 농을 꺼낸다.

“고매한 작가 하나 나셨네·······. 먹어 짜샤. 이 형이 너 사주려고 벼르던 감자탕이다.”

피식, 우리는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감자탕에서 나는 김이 얼굴에 닿자 촘촘히 땀이 맺힌다. 후루룩, 후룩. 감자탕 국물이 속 시원하게 퍼졌다. 그렇게 그릇을 비워내고 있는데, 현석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하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만화책이었다.

“자, 이거······.”

나는 갑자기 웬 만화책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현석은 대답 대신 다시 눈길을 감자탕으로 가져갔고, 그래서 나는 직접 만화책에 래핑된 비닐을 뜯었다.

‘기묘한 이야기 - 배세준 단편집.’

나는 몸이 조금 굳었다. 하긴. 이제 슬슬 책이 출판될 때였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벌써 6개월이 되어간다.

“이 바닥이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니고······. 일부러 말 안한다고 네가 모를 일도 아니라서 그냥 먼저 말 해주려고 갖고 왔다. 우리 출판사에서 일본 쪽이랑 계약 했어. 배세준이 그린만화 우리 쪽에서 수입한다는 얘기 듣고 먼저 한 권 구한거야. 아마 서점엔 조만간 들어가겠지.”

나는 묵묵히 끄덕이며 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밥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물이 만화책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화책이 음식물을 훼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맛 좋게 식사를 끝내고 싶었던 나는 나중에 만화책을 보기로 했다.

“기분 상한 건 아니지? 혼자 서점에서 책 고르다가 문득 발견하는 것 보다 이렇게 내가 전해주는 게 낫잖냐. 너 빨리 갖다 주려고 책에 손도 안댔다.”

나는 대답 없이 감자탕 국물을 계속 펐다. 그러자 머쓱했는지 현석이 한 번 더 말했다.

“고마운 줄 알어. 편집 기자도 안본 책을 니가 먼저 보는 거야.”“

나는 그냥 눈으로 웃어준 다음에 감자탕을 얼굴을 박았다. 현석이 가라앉은 얼굴로 기어코 묻는다.

“야······. 괜찮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현석은 출판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나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잘 먹었어’ 하고 소리쳤다.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 주는 친구다.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느라 만화가 지망생인 친구에게 연재 자리를 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다른 부분에서 만회하려는 것처럼. 나는 녀석의 마음씨에 고마워하며 등을 돌렸다.

6월의 햇살은 이미 기세등등하게 올라 있었다. 5월부터 조짐을 보이던 열기는 6월이 되자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나는 매년 이맘때면 느끼곤 하는 절망감을 다시 우물거렸다. ‘7, 8월엔 도대체 얼마나 하려고 벌써 이러나.’ 해가 갈수록 여름은 더워지고, 나는 지쳐간다. 그러나 한여름 땡볕을 생각하면 6월 햇살 정도는 즐기듯 맞아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네에 다다른 나는 나무 그늘이 진 나무 벤치를 찾아 앉았다. 담배를 하나 빼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기에 앞서 연이 생각이 먼저 났다. 결국 일본으로 배 작가와 떠나게 된 연이.

내가 연이에게 사과하고자 연락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현석과 그의 형을 통해 배 작가에게 찾아간 뒤였다. 내가 제출한 작품이 자기가 쓴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녀가 건네준 이야기는 연이의 블로그에 올려진 무수히 많은 습작 소설 중 하나였고,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많은 지인들이 내 만화가 그녀의 이야기를 표절했다는 주장에 대해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장담했다. 나의 표절 혐의를 벗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저 연인에게 선물을 받듯 이야기를 넘겨받았고, 따라서 그녀가 자기 의사로 이야기를 넘겼음을 증명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었다.

연이가 내 진로를 틀어막고 나를 파멸시킬 생각이었던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출판사와 배 작가 앞에서 난리를 쳐서 나의 인간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배신을 하고도 자신을 집 밖으로 쫓아낸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약 내 작품이 유명한 작가의 초 히트작이고, 그것이 알고 보니 어느 무명작가의 소설을 훔쳐다 만든 만화였다고 하면 커다란 표절 시비 사건이 되겠지만 내 만화는 그저 만화가 지망생의 40페이지짜리 단편이었다. 그녀가 벌인 소동은 그저 실연당한 여자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히스테리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배 작가만 아니었더라면.

배 작가 앞에서 난리를 치는 그녀의 사정을 듣고, 배 작가는 그녀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배 작가와 그녀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양쪽에다 핸드폰이 닳아 없어져라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내 작품은 완성된 채로 그곳에서 정지해 버렸고, 내 작품을 받아 그것을 평가해 줄 나의 스승은 도제의 부름을 매정하게 무시했다. 얼마 후, 나는 배 작가가 연이를 일본으로 데려가 스토리 작가로 키우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석이 전해준 바로는, 출판사 직원들과 편집 기자인 자신의 형, 그리고 기타 등등의 사람이 모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만화가를 발굴한다고 해서 예비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줬더니 엉뚱하게 스토리 작가를 뽑아서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그러나 배 작가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이 가능성을 발견한 작품은 ‘마녀와 고양이’ 뿐이고. 그것도 그림이 아닌 스토리에서였다고.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침착할 수도 있었다. 연이 또한 나의 경쟁자였고, 나의 그림이 연이의 이야기를 압도하지 못해 연이가 이겼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러나 룸에서의 그 비밀스런 사건을 배 작가와 공유한 나로선, 그가 내가 아닌 연이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이가 갈리도록 질투심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배 작가에게도 질투심이 들었다. 그가 새로이 도제로 선택한 사람이 연이니, 그녀에게도 그만의 가르침을 줄 것이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질퍽한 방법으로 욕망과 표출에 대해 연이를 가르칠 생각을 하니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 둘은 일본으로 떠나는 날 까지 철저히 나를 무시했다. 가장 마음을 얻기 쉬운 여자는 실연당한 직후의 여자라는데, 마치 하나가 된 듯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배 작가가 그의 음험한 매력으로 연이의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두었다는 환상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 뒤로 몇 번인가, 그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작품을 그리려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그 사건으로. 내 눈앞에서 배 작가와 연이가 몸을 섞는 장면을 상상하며 나는 그 미칠 것 같은 비통함을 에너지로 작품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피폐해진 정신과 한 가득 올려낸 토사물을 남기고 끝났다. 왠지 그가 떠난 한국 땅에선 그의 비밀스런 방법이 효력을 잃은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나는 그의 도제가 아니었다.  

몇 달 뒤, 결국 나는 그를 만나기 이전의 만화가 지망생으로 돌아갔다. 이제 한 살을 더 먹어 28살의 만화가 지망생. 나는 만화책을 펼쳤다.

5개의 단편들이 묶여진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들이 모두 연이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던 단편 소설들을 만화로 각색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이야기들은 더욱 흥미롭게, 만화적 요소들을 살려 배 작가의 그림으로 재구성되었다. 배 작가의 그림도 더욱 성장했다. 맨 처음 접했던 그의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던 욕망이 그림 속에서 잘 갈무리 된 느낌이었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야수 같았지만, 미쳐 날뛰지 않고 차분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5편을 모두 읽은 나는 양손으로 책을 덮고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성장했다. 방향 없이 욕망을 드러내기만 하던 그의 이야기는 이제 갈 곳을 정확히 알고, 그곳을 향해 독자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는 연이가 쓴 이야기가 배 작가라는 염료에 적절하게 물이 들어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 작가다운 그림체에, 배 작가다운 카리스마, 배 작가다운 이야기······. 그런데, 이 책에서 연이는 어디에 있지?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연이는 어디 있지? 이 책에서는 연이의 향기가 나지 않았다. 연이가 제공한 이야기의 뼈대에서 그 모태를 추측할 수 있을 뿐, 그 뼈 위에 입혀진 근육이며 살점, 혈관과 그 속을 흐르는 핏물까지 모두 배 작가의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책 표지의 저자 부분을 살폈다. ‘글·그림 배세준.’ 연이의 이름이 없었다. 표지에도, 작품 중간에 챕터의 구분을 알리는 페이지에도, 작품 후기에도,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라는 감사 인사를 담은 페이지에도 연이의 이름은 없었다.

“허억······.”

나는 숨을 헐떡였다. 눈물이 고였다. 연이가 사라졌다. 연이는 어디로 갔을까. 배 작가를 따라 일본으로 간 연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최초에 이야기를 내어 주고 한 번 배신당한 연이는, 또 다시 자기가 품었던 이야기를 내어 주고도 자기 이름을 잃어 버렸다. 나는 연이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그 책에서 입양된 자식을 만나 보는 것을 거절당한 생모의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연이가 낳은 이 이야기는 당당히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는데, 생모인 연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땅히 글 - 김연 이라고 쓰여 있어야 할 것을. 왜 연이가 잉태한 이야기에 연이의 이름이 없단 말이냐, 왜······.

나는 배 작가가 처음부터 스토리 작가를 구하러 한국에 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과 뜨거운 욕망을 그림으로 그릴 줄 알았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구성할 능력이 없던 배 작가. 그런 그가 연이에게서 빨아낸 양분으로 이렇게 성장해 있었다.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빨아낸 연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팽개쳐 두고서. 나는 고개를 젖힌 채 흐느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게 취미였던, 이야기를 모두 뺏기고 사라져 버린 미혼모 연이가 가여워서 자꾸 자꾸 울었다.

늑대늑대
댓글 3
  • No Profile
    야키 08.03.01 13:41 댓글 수정 삭제
    오랜만에, 오랜만에 멋진 단편하나를 읽고 갑니다.

    무엇보다 공감가는 글쟁이들-혹은 작가라고 불리는 우리세계의 감성을 이끌어나가는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 저도 하나의 습작가로써 너무나 공감가고, 또한 동화감이 절실히 묻어나는 글입니다.

    마치 원고지를 쓰윽 훑었을때 늘 자신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고나 할까요. 다른작품에 비해 꽤 긴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답니다.

    자- 그나저나 결말도 예사롭지 않군요. 사실 말씀드리자면 결말부분에서 약간 개연성이 부족했습니다. 배작가의 성공담에 도취되어 자기 자신을 황폐화 시켜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외설적으로 그리면서도 전혀 위화감없이 집필하시는데는 성공하신것 같지만, 그 이후 연이의 대한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다소 연관성이 부족합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연이를 임신시켰다거나, 아니면 배작가가 연이를 디딤돌로 성장하는 과정에 그녀가 버려지게 된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으로썬 둘중 어느 플롯이라고 해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군요.


    전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연이와 주인공 사이의 거리감 입니다.
    주인공과 연이는 가까운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멀고,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주인공과 중심인물의 성격이 자주 바뀌어서 혼란스럽다고나 할까요.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 부분, 연이가 일본으로 간 후 연이의 말로를 보기까지 주인공의 시점은 단지 연민이나 동정을 담고 있을 뿐이지 그녀가 자신의 여자친구 였고, 그로인해 일어났던 그녀와의 갈등에 대한 회상은 전혀 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약간 아쉬웠던 것 같네요.

    하나 덧붙이자면, 배작가라는 요소와 연, 그리고 주인공과의 관계가 너무 암묵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서 오히려 여운을 주기보다는 알아볼 수 없을정도로 묻혀있는 것 같습니다.



    필자분께서는 아직 과실을 맺지 못하신 나무입니다.
    이제는 더욱 자랄 가지도 없습니다. 단지 수십년을 버텨내며 꽃을 피워야 하는 책임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렸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넓은 황무지에 혼자만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가 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만큼 당신은 멋진 나무이니까요.
  • No Profile
    볼티 08.03.04 11:50 댓글 수정 삭제
    미혼모란 표현은, 스토리 작가로서 작업에 참여 했으나 스토리를 빼앗긴 연이의 처지를 나타낸 상징적인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 성진이도 있을 때 잘 하지...;;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No Profile
    늑대늑대 08.03.05 22:48 댓글 수정 삭제
    두분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나 나무에 비유한 칭찬이 과분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056 단편 시간은 언제라도, 주파수는 몇이라도2 디안 2008.01.31 0
1055 단편 [고양이] 검은 고양이2 roland 2008.01.31 0
1054 단편 Joshua Tree5 유진 2008.01.31 0
1053 단편 어린왕자의 우주6 세이지 2008.01.30 0
1052 단편 잃어버린 화요일4 해파리 2008.01.27 0
1051 단편 망령의 외출3 구르토그 2008.01.27 0
1050 단편 설녀5 세이지 2008.01.22 0
1049 단편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을 찾아서3 해파리 2008.01.19 0
1048 단편 까마귀를 위하여4 세이지 2008.01.18 0
1047 단편 용의 알2 세이지 2008.01.05 0
1046 단편 호수에서2 해파리 2007.12.31 0
1045 단편 도깨비 숲1 노유 2007.12.30 0
1044 단편 가래 노유 2007.12.30 0
1043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세뇰 2007.12.24 0
1042 단편 Velouria 파악 2007.12.24 0
1041 단편 뮤즈의 속삭임(본문 삭제) Inkholic 2007.12.20 0
1040 단편 하지 파악 2007.12.12 0
1039 단편 즐거운 나의 집 파악 2007.12.11 0
1038 단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9 Mono 2007.12.03 0
1037 단편 웃음 스위치2 Mono 2007.12.03 0
Prev 1 ...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