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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정원의 여자들 - 두 장

2021.04.06 22:1804.06

허 백은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였다. 깔끔한 양복차림의 사내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가방을 열고 종이들을 팔락인다. 무례하고 안하무인의 행동에도 사내는 익숙한 듯 영상 자료를 틀었다. 백은 고개를 돌렸다.

 

​[아시다시피 현재 안드로이드의 수준은.]

[예상보다 50년은 훌쩍 앞서 있습니다.]

 

손을 들고 어깨를 펼치며 강연을 하듯 번드르르한 말들을 전시한다.

 

[의사를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의적인 표현의 단계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죠.]

 

남자가 정장을 고치며 영상자료를 튼다. 빔 프로젝터가 빛을 뿜자 실내가 암전된다. 기업의 로고와 표어가 그럴듯한 장식 이미지와 함께 소개된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들에게 충족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내가 튼 영상으로 묘비가 비춰진다. 아들 하나가 세상을 떠났고 부모는 슬픔에 잠겨있다. 사내가 자신에 찬 미소를 짓는다. 허 백은 눈썹을 보란듯이 찌푸렸다.

 

[바로 죽은 이와 재회하는 것입니다.]

 

사내가 몸을 튼다. 영상으로 작은 칩셋 하나가 나와 어려운 문구와 전문적인 용어로 뒤덮인다.

 

[우리 Well Life 사는 고객이 가지고 있는 생전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안드로이드의 정보 집합 처리 개체로 활용합니다.]

 

​사내가 제 머리를 두드린다.

 

​[바로 뇌가 되는 거죠.]

[물론.]

 

영상은 칩셋이 꼿힌 안드로이드가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비추었다. 등장인물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부모도, 가족도, 심지어 그들을 비추는 햇살마저도 눈부시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떴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 팔을 벌린다. 그들은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듯 신나보였다.

 

[육체와 습관까지 전부 복사가 가능합니다.]

허 백은 지금 있는 이 자리와 눈앞의 남자가 가지는 자신감까지 모두 불편했다. 사내는 지지않고 허리를 펴 여유롭게 등받이 기대었다.

[원하시면 이상적인 몸으로도 바꿔드릴 수 있습니다.]

 

​능글맞은 말을 하는 사내의 얼굴은 순수하고 기대감에 차있다. 허 백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다 됐습니까?]

 

​허 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저기 허 백씨!]

 

​백이 뒤를 돈다. 사내는 여전히 여유로운 어투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다. 마케팅의 요령이라 써 붙인 책을 달달 외우기라도 한 듯이.

 

​[일단 사용해보시죠.]

 

​사내의 말투는 떨림도 없고 주저함도 없었다. 누구나 혹할만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허 백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사용만 하신다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훈은 가늘게 서서 제 손에 읽힌 글들을 둘루어 보았다. 어디선가 부는 바람으로 종이들이 팔락거린다. 시중을 들던 하녀 안드로이드가 재빠르게 다가가 종이들을 주우려 하는 걸 허 훈이 제 손으로 막아 세웠다. 허리를 피고 묻듯 물어 답조차 뻔한 질문을 던지었다.

 

[어때, 재밌어?]

 

하녀가 허리를 숙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답과 같다. 어중이떠중이들을 앉히어 글이란 건 거들떠도 보지 않던 그들. 허 훈은 멀리로 연기를 뱉었다. ‘잘 모르겠군요.’ 혹은 ‘너무 진부하지 않습니까?’ 허 훈은 담배를 튕겨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다. 꽁초의 끝으로 희미한 연기가 달아오른다. 하녀용 안드로이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허 훈!]

 

그 노인네가 부른다. 허 훈은 허리를 길게 뒤로 젖혀 고개를 빼었다. 허 씨 집안의 어른이 올곧이 서서 허 훈이 있는 곳을 건너다보고 있다. 그가 목청을 울려 내지른다.

 

[기둥은 번듯해야 한다.]

 

훈이 소매를 여메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씨 집안은 결코 가벼워서는 아니 된다.]

 

​고개를 끄덕인다.

 

​[집안의 대들보로 우뚝 서야하지 않겠느냐.]

 

​끄덕인다.

 

​[그 글 짓는 망상 놀이는 집어치우고 공부나 하거라.]

 

​훈은 가만히 섰다.

 

​[어서!]

 

​선다.

 

노인이 등을 돌려 홀을 나간다. 꼿꼿이 서려 노력하지만 기력이 쇠한 허리는 이미 굽을 대로 굽어 있었다. 꼿꼿이 걸을 수록 엉거주춤해지는 노인을 보며 훈은 천장을 보았다. 아크릴 전광판에 익은 그의 눈이 갈증을 느꼈다. 눈을 짚고서 훈은 동생이 있을 정원으로 걸어갔다.

 

정원이 있는 복도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살짝 귀를 대어 보았다. 허 훈의 귓가로 동생 백이의 목소리가 달라붙는다.

 

[내버려둬.]

 

정원용 안드로이드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럼 시들어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대화도 칩 속에 내장되어 있나?]

 

[죄송합니다.]

 

훈은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문틈으로 서서 한참을 귀만 기울여 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동생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갖은 초목들을 손에 닿게 하고 있었다. 잡초들 틈바구니에서 동생의 곁을 안드로이드가 지키고 서있다. 갈색 머리칼에 밀짚모자. 시골 처녀를 떠오르게 하는 풍성한 치마.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꽃은 시드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안드로이드가 말을 먼저 붙인다. 동생은 귀찮아하는 투로 답하였지만 그녀를 내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죽는 것과 시드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꽃은 죽지 않아.]

 

동생이 하늘로 고개를 올린다. 아크릴 전광판이 빛을 다물고 빈 하늘을 채운다. 날씨는 흐렸다. 허 훈 역시 그의 고개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들고 다시 피어나길 준비하지.]

[꽃에게 죽음이란 재회를 의미해.]

 

​동생은 안드로이드 앞에서 꽤나 감상적인 말을 하였다. 안드로이드가 묻는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건 무엇입니까.]

 

훈은 들키지 않도록 조심히 불을 피웠다. 꼬마 안드로이드가 멀리로 자신을 보고 있다. 훈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물뿌리개를 들고 있던 꼬마 안드로이드가 훈을 따라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다.

[과거에는 한때 겨울이라는 계절이 있었어.]

[모든 생명들이 잠에 들고 죽어가는 계절이었지.]

 

​[그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로군요.]

 

​[그런가.]

 

​동생이 고개를 숙여 잡초들을 하나씩 어루만진다. 이름도 모를 잡초에나 애정을 쏟는 그는 안드로이드와 혁신적인 기술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하였다.

 

​[시가 있어.]

 

​훈이 불을 당겼다. 시. 어릴 적 들려주었던 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동생과 함께 꿈을 꾸었던 시절. 그때에서 들려주었던 글귀들.

 

 

그는 하얗게 다린 무명천으로

옷을 짓고 밥을 지었네

들판으로 거니는 이가 없어

굴뚝으로 연기를 쏟아내건만

오는 것은 잠에든 숨소리들뿐이네

하얗게 다린 천으로

그가, 그가, 그가

따스하게 옷을 여미네

 

[무슨 의미인가요?]

 

[죽음이라는 건 탄생을 의미해.]

[겨울이 와야 봄이 오듯이.]

 

허 훈은 연기를 정원으로 보내며 멀거니 표정을 지웠다. 저 로봇이 동생의 말에 이해는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여 다른 감정이 들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안드로이드가 한참동안 같은 하늘로 시선을 보낸다. 훈이 지핀 불이 연기로 흩어지고, 숨으로 흩어진다.

 

[그 글을 들으니.]

안드로이드가 인간 앞에서 꽤나 감상적인 말을 한다.

[꼭 겨울이 어머니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동생이 벌떡 일어난다. 그가 걸음을 옮기고 안드로이드가 따라서 걷는다. 훈이 제 발치를 보았다. 글 짓는 망상 놀이라. 꽤나 그럴듯한 망상놀이가 필요하다. 그 노인네가 입도 벙긋 못할. 되돌아나가려는 그의 눈으로 또 다른 안드로이드가 밟힌다.

높게 자란 상록수의 가지 아래로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긴 흑발의 안드로이드. 차게 식은 금속과 색 하나 없는 표정. 훈은 나무의 끝자락에 선 안드로이드와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럴듯한 망상 놀이가 필요하다. 어릴 적 지은 시를 기억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건 드라마와 풍부한 이야깃거리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 기술은 늘 컨텐츠에 목말라 있다. 예술은 남는다. 재가 된 육체 위로 이름만은 남는다.

 

훈은 정원에서 나와 빈 홀들을 죽 따라 걸었다. 벽 한 켠에 설치된 기기로 다가간다. 하녀 안드로이드가 자리를 비킨다.

'대기 중인 물품 목록.'

허 씨 가문으로 선물을 조공하는 기업들. 그 기업들의 물건을 승인하는 곳으로 들어가 회사 이름 하나를 찾기 위해 손가락을 놀렸다. 아래로, 아래로.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기업들의 이름 사이에서 훈은 멈추어 섰다.

'Well Life co.'

그가 승인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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