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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어리오의 전언

(A Message from Fairy-O)

 

 

 

영사면에 비치는 유재의 몰골은 막 고행길에 오른 수도승 같았다. 자외선에 얼룩진 검붉은 점들을 방치해 더욱 아파보였다. 수비는 선명한 홀로그램을 보며 인간 달마시안이 있다면 이런 몰골일 것 같은데, 생각했다.

「아시잖아요, 자연이 파일럿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드론 떼를, 제대로 된 엔진도 없는 활공기 따위로 피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수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유재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수비는 말  없이 입술만 씹어대는 유재의 면전에 다시 현실을 말했다.

「닥터 오, 우주생물학자로 15년을 일했어요. 그 중의 절반은 우주에 있었고요. 지구에서 비행기 만지는 거랑은 다른 거라고요.」

「제 말은, 적어도 활공기 로그데이터에 피하려고 한 흔적은 있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들이받았어요. 자연이, 그런 일이 있을 걸 예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이에요?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유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선체의 떨림이 느껴졌다. 수비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속력 조절을 위한 항법을 준비해야 했다. 유재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며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과거에 미련이 남는 건 좋지 않은데. 수비는 테이아 호 밖으로 보이는 붉은 지구를 말없이 응시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녀의 고향성을.

 

유재는 자연의 활공기가 구름강을 가르며 드넓은 호주 북부의 사막 위을 유영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대기환경연구소 전망대에 서면 보이곤 했던, 구름을 가르며 나아가는 위풍당당한 해적선, 패어리오 (Fairy-O). 강렬한 자외선에 금빛으로 빛나는 활공기 전면 창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자연의 얼굴. 말 그대로 ‘오존(Ozone)을 책임지는 요정’인 패어리오의 ‘오’가 ’오자연’의 ‘오’라고 할 만큼 자연이에게 잘 어울렸던 일.

대기 정화 프로그램의 일부였던 패어리오 프로젝트는 오존층 복구를 목표로 출범했다.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인 만큼, 테러의 위험을 피해 극비에 진행되어 한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그런 이유로 유재는 자연의 동료였음에도 자연의 임무와 관련된 정확한 사항들을 알지 못했다. 이따금 자연이 대기 중 미생물을 채집하여 분석한 보고서를 받아보았을 뿐.

퀸즈랜드 사람들은 마른하늘에 황금빛 활공기가 나타나면 운이 좋은 날로 여겼다. 바람을 따라 유영하는 활공기의 출연은 굳이 지구를 떠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소망을 상기시켰다. 실은 구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 목적의 비행이었지만, 퀸즈랜드 사람들은 그저 미신처럼 활공기가 뿌연 하늘을 청소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의 패어리오가 공중분해 되던 그 날, 퀸즈랜드의 하늘은 롤케익 모양의 모닝 글로리 구름으로 가득했다. 보송보송한 것을 포크로 콕 집어 먹으면 입에서 녹을 것만 같은 그런 구름. 자연은 패어리오를 타고 모닝 글로리 구름 위로 서핑하는 것을 좋아했다. 롤케익 같은 구름 근처에 생기는 상승기류를 타면 연료를 소진하지 않고도 몇 시간을 활공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가끔은 채집주머니를 열어 구름을 떠오곤 했다. 하얀 구름은 수증기와 함께 다양한 미생물을 머금고 있는데, 구름을 보면 대기의 상태와 오염도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에. 유재는 그 날도 자연의 채집주머니를 기다렸다. 변화하는 대기 오염도를 보고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따라 자연은 오랜 시간을 떠돌았고, 기다리다 지친 유재는 커피나 한 잔 하러 근처 카페로 가던 길이었다. 선명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모닝 글로리 구름은 옅어져 있었다. 좀 있으면 해가 넘어가 세상이 붉게 타오를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시간.

유재는 소음과 함께 허공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금빛을 보았다. 날파리 같은 드론 떼에 습격당해 날개가 꺾여 추락하다, 조종석 전면으로 날아든 공격형 드론에 순식간에 폭발한 패어리오를. 유재는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다. 민첩하게 대기를 가르는 드론 대형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대테러 프로토콜.

그것은 그가 군 복무 기간 동안 수도 없이 연습했던, 테러리스트 격추를 목표로 하는 무시무시한 공격 방법이었다. 그걸 왜, 왜 패어리오 같은 방어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기체에 사용한 걸까. 어째서 한낱 연구원인 오자연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한 걸까.

유재는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게워냈다. 기체 안에서 자연의 몸이 분해되어 불타는 장면을 상상한 탓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뾰족한 현실이 되어 유재의 가슴을 찔러댔다. 그래서 유재는 알아야 했다. 어째서 자신이 아끼던 동료가 그렇게 삶의 끝을 맞아야 했는지를.

다음날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도 자연의 죽음은 그 어떤 지상파 뉴스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퀸즈랜드 지역 방송 한 켠 부고란에 작게 나왔을 뿐이었다. 제2의 지구로 이주하는 물결인 ‘테이아 호’가 마침내 지구를 박차고 검은 우주로의 항해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피부암으로 죽어나가는 지구에서 작은 활공기의 폭파 따위는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새로운 고향에 정착해 살아갈 사람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야겠다고 믿을수록 테이아 호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 되었기에.

유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의 단서라도 들고 있을만한 인물을 떠올렸다. 사살 명령을 내렸을 군 사령부, 자연의 절친한 동료였던 수비, 유일한 가족인 오자형, 그리고 자연의 밑에서 일했던 보조 연구원 크리스. 군 사령부는 접근할 수 없을 것이고 수비는 전부를 알지 못했다. 크리스를 만나야 했다. 패어리오 프로젝트도 무산된 마당에 비밀 유지 프로토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크리스는 연구소 근처의 카페에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그는 연구소 생활을 마무리하느라 짐을 싸고 있다고 했다. 평소와 다르게 푸석한 몰골이었다. 유재는 패어리오 프로젝트의 세부사항을 알아야 했다. 자연과 그가 하던 실험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크리스는 가만히 듣다가 구겨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재, 네 마음은 잘 알지만 내 목숨도 소중해. 이해할 수 있지? 실은 나도 테이아 호에 탑승하려고 했어. 근데 닥터 오 밑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했다고.”

“그러면, 하나만 묻자. 진짜 하나만.”

“얘기해.”

“자연이가 너 몰래 단독행동 하거나, 그런 낌새라도 보인 적 있지.”

“그야, 닥터 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항상 그랬지.”

“가장 최근에는? 걔 그렇게 되기 직전에 말이야.”

“글쎄, 기억나는 건……. 예전에 했던 프로젝트 얘기를 가끔 하더라. 있잖아, 왜, 닥터 오가 명왕성 탐사 갔다가 이상한 박테리아 채집해 와서 호주로 좌천됐을 때의 이야기.”

“그걸 왜?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건 나도 잘 기억이 안나. 더 이상 묻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곤란하다고.”

“그래. 어쨌든 고맙다.”

크리스는 알래스카로 돌아갔다. 아무리 더워졌어도, 살인적인 자외선이 지구를 강타해도 아직은 살 만한 그의 고향으로.

 

삼 년 전, 자연은 퀸즈랜드 국제 대기환경연구소로 이직했다. 잔뜩 풀죽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채로. 우주생물학 전공의 우주 비행사였던 자연에게 연구소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유재는 그런 자연의 능력이 아까워 패어리오 프로젝트를 맡겼다. 로켓에 비해 아기자기한 활공기를 조종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 자연은 조금의 활력을 되찾았고 편집증 환자처럼 기록을 남기곤 했다. 그날그날 구름의 모양과 공기의 질감, 오존의 상태까지 꼼꼼하게 하늘을 돌보고, 기록했다. 오존층이 간당간당한 날은 활공기를 띄웠고, 비가 오는 날은 산성도를 체크해 얼마 남지 않은 지역 농경지에 산화 방지 비료를 보급했다. 그런 그녀의 행적이 담긴 개인 일지를 찾아야 했다. 연구원은 개인 일지를 보관할 수 있었는데, 작성자가 사망할 경우 자동으로 잠겨 접근하려면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연의 남동생 자형은 지구에 있지 않았기에.

유재는 다시 수비에게 연락을 취했다. 자연의 일지와, 그녀의 유일한 가족에 대해 알려야 했다.

「수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곤란한 건 힘들어요.」

「사람을 좀 찾아주세요. 오자형이라고, 아마 이코노미 선실에 있을 겁니다.」

「이제는 하다하다 탑승객 정보까지 갈취한 거예요?」

영사면에 비친 수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갈취라뇨, 원래 알고 있었습니다. 자형은… 자연이 동생이거든요. 누나 일이라고 하면 도와줄 겁니다.」

유재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봤다. 습관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 없이 올려다보는 뿌연 하늘을. 그래도 아직 퀸즈랜드의 하늘은 봐줄 만 하다 여겼던 그 하늘을. 쿵,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에 유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패어리오가 귀신처럼 스멀스멀 구름을 뚫고 연구소 쪽으로 날아오는 상상에 숨이 막혀왔다.

자형은 연락을 해줄 것이다. 자형은, 자형이라면…….

 

지구는 가시거리 안에 있지 않았다. 어느새 멀리 왔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수비는 마음을 다잡았다. 까만 어둠 안에서 무엇을 맞닥뜨릴지 모를 일이다. 언제 무엇을 만나든 그에 적합한 프로토콜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를 실행할 강한 심장을 준비해야 했다.

수비는 창밖을 확인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우주 쓰레기나 소행성의 잔해가 있지는 않은지를 육안으로 확인해야 했다. 작은 돌이나 금속판, 먼지……. 자연의 활공기도 자잘하게 부서졌을까. 수비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불편했다. 자연은 고된 파일럿 훈련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처음 우주선에 올랐을 때도, 수동 항법을 익히던 날도, 명왕성 탐사를 갔던 해에도 줄곧 함께였던 소중한 인연. 그녀의 활공기가 산산조각 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수록 수비의 상실감은 커져갔다. 아직 지구 어디선가 콕 박혀서 실험실을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데. 이제 추억을 함께 회상할 동료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무슨 일을 한 건데, 오자연. 유재의 말은 신경 쓰지 말자,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오자형을 찾아야 한다. 몇 천 명이 탄 우주선에서, 오자형이라는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 수비는 이코노미 선실 담당 승무원을 호출했다. 자다 깬 듯한 책임 승무원에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며 승객 한 명을 찾아달라고 했다. 보안과 관련된 사항이라면 세세한 이유가 필요 없었다. 한국인 승객 중 오씨 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곤 차분히 그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며.

“어쩐지 이상했어요. 지구에서도 자외선 피한답시고 우주복 입고 다니던 사람인데 급성 피부 종양이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죠. 그런데 활공기 추락사라니 뭐가 더 말이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

자형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이 눌러앉았다. 수비는 자형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입을 연다.

“연구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또 있어요. 이유재 연구원이라고…….”

“그래도 누나 개인 일지를 넘길 수는 없어요.”

“자형 씨, 그런 말이 아니라 접근 권한만 공유해 달라는 이야기예요.”

“같은 이야기죠. 어쨌든 죽은 사람인데, 지금 누나 기록을 파면 죽은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한답니까? 마지막으로 남긴 건데 이건 건드리시면 안 되죠.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요.”

자형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눌렀다. 콧방울이 붉게 부어올랐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수비는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사실을 말해줘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는 건 탑승자 보호 프로토콜을 위반하는 행위인데.

지구에서 일어난 재앙 및 기타 감정적 동요가 예상되는 정보를 공유하지 말 것.

완벽한 위반일 것이다.

“사실대로 말을 해 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이유를 알 것 아닙니까. 평생을 연구만, 연구만 하다가…….”

그는 눌렀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누나는 피부암으로 부모님을 여의고 유일하게 의지한 사람이었다. 자식은 더 이상 불타는 행성에서 살게 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테이아 호에 올랐고 그 모든 과정을 두 팔 걷어 도와준 사람이 누나, 자연이었다. 그런 누나의 임종은커녕 죽음의 정확한 이유마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자형을 뒤흔들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수비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만약 오자형이 소란을 일으키면 격리해 두면 된다.

“닥터 오는, 그러니까, 오자연씨는 공중에서 격추당했습니다.”

“예? 격추요?”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바람에 활공기가 폭파, 그러니까 그…”

그는 가쁜 숨을 쉬더니 오열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분노를 눈물로 뱉어냈다. 수비도 덩달아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오자형씨. 더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자연이는 제 친구이기도 했어요.”

수비는 이제 와서 지구의 인연에 집착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 이 일은 빚이었다. 자신이 자연에게 진 빚. 차마 갚지 못하고 평생 응어리로 남아있을 그런.

“권한은 드릴 테니 제발, 왜 그랬는지 제발 이유 좀 찾아주세요. 왜 멀쩡한 사람을, 왜…….”

자형은 또다시 울긋불긋한 손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재는 높은 대기권에 촘촘하게 수놓인 비늘구름을 응시했다. 얼마 만에 생긴 구름인가. 태양이 뿜어내는 자색 광선에도 꿋꿋하게 살아 헤엄치는 큰 물고기같이. 아름다운 구름 뒤에 다가올 날씨는 심상치 않을 것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비나 와라. 바람아, 쳐들어 올 거면 비도 몰고 오라고.

이렇게 구름한테 말 거는 게 취미였는데. 오자연에 대해 회상할 틈도 없이 유재의 알람이 울렸다. 테이아 호의 신호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전송된다. 자연의 일지일 것이다. 유재의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뒤져야 할까. 삼년 전, 아니면 일주일 전? 명왕성 탐사를 갔던 때를 먼저 봐야겠지?

 

*

지구가 멀어져서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지겹다가도, 없으면 보고 싶은 그런 거였어요.

 

*

우리는 언젠가 고향성을 떠나야만 하는 운명일까요. 명왕성까지 가는 이유가, 단지 살만한 다른 곳을 찾기 위해서일까요. 외계 생명을 찾아 수많은 과학자들이 검은 우주를 유영한 일이, 단지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함일 뿐이었을까요.

 

*

저는 믿지 않아요. 모든 것이 으스러지는 날이 올 거라는 건, 통계학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

누가 명왕성을 정의하려 했을까요.

오래 기다려 도착한 이 땅은 기이하고 아름다워요. 직접 두 눈으로 보면… 생이 어딘가 잠자고 있을 것만 같아요. 겸허한 입술로 숨을 참다, 내쉬는 순간 생의 에너지가 폭발할 것만 같이요.

 

*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온도에, 명왕성의 대지에 발을 딛기까지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어요.

 

*

발견. 생명의 씨앗을 발견했어요. 명왕성엔 생이 존재하고 있었어요.

오늘은 제 기억 속에서 영원히 떠오를 거예요. 이 미세하지만 미미하지 않은 존재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

우주 공간에서 새로 만난 박테리아와 노는 것쯤은 안보 프로토콜에 어긋나지 않겠죠? 해가 되어보이진 않아요.

 

*

그들은 높아진 온도 속에서도, 잘 살아있어요. 여전히 차가운 곳을 좋아하긴 하지만요. 생의 놀라움은 언제쯤 시들해지는 순간이 올까요. 제게 그런 순간이 오기나 할까요.

 

*

명왕성에서 발견한 작은 존재들이 실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었다면, 믿을 수 있나요?

오늘만큼 우주생물학자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어요.

 

유재는 일지를 껐다. 넘쳐흐르는 생각에 집중해서 활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정리하면 자연은 명왕성에서 미생물을 발견해 허락 없이 그녀의 우주선에서 실험을 했고, 그걸 지구로 들고 왔고, 그 후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선물이란 것은 미생물의 한 종류인데, 그것을 ‘생’이라고 부른 것도 ‘선물’이라고 부른 것도 그녀의 추후 행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패어리오로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까. 유재는 자연이 자신도 모르게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자연에 대해서라면 모두 안다고 자부해온 그였다. 활공기와, 패어리오가 채집해오는 구름과, 오존을 복구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수많은 보고서들.

결국 자연의 목적은 같은 것이었을까. 붉은 지구를 다시금 파랗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 희망을 갖고 명왕성에 갔다 왔고, 그런 시선으로 생명을 찾았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발견을 강요한 걸까. 그 누군가가 고위직에 있었고, 인류의 안보에 해가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면.

자연의 실험실. 유재는 폐쇄된 자연의 실험실로 뛰어갔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자연이 애지중지했던 미생물 샘플러. 초저온 동결기에 들어갔다 꽁꽁 언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외계 미생물. 실험실 접근은 할 수 없었지만 전원을 차단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초저온 냉동고만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자연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박테리아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폐쇄된 실험실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모든 전원을 차단해야했다. 침입 감지기에 자신의 행적이 찍힌다면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잠깐이라면 냉동고 안의 낮은 온도가 갑자기 상온으로 치솟지는 않을 것이다. 유재는 모든 전원을 껐다. 삽시간에 연구소는 암흑이 되었다. 유재는 신속하게 수동 개폐장치를 해제했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문을 열자, 탁한 실험실 공기가 콧속을 헤집었다. 유재는 나오려는 재채기를 꾹 누르고 다시 전원을 복귀시켰다. 이윽고 유재의 눈에 환하게 보이는 자연의 실험실. 자연이 부재하는 그녀의 탐구 공간.

알 수 없는 이질감이 유재를 덮쳤다. 내부는 일상적으로 어지럽혀진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대청소라도 한 듯 깔끔했다. 자연은 이렇게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먼지 한 톨 나오지 않게 치워뒀을 리가 없다. 찬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된 실험 기구들과 겹겹이 쌓인 보고서, 구석에 창백하게 서 있는 냉동고. 유재는 냉동고를 확인했다. 다행히 저온으로 잘 유지된 것 같은데…….

외계 미생물 샘플이 없다. 냉동고 안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유재는 냉동고와 동결기 안 곳곳을 확인했지만 남아있는 샘플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테러리스트의 자산은 국가의 소유였다. 얼굴 없는 참담함이 유재의 가슴 위로 쿵, 내려앉았다. 샘플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군 시설에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유재는 다시 수비를 찾았다. 테이아 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비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자연이 유산으로 남긴 미생물 덩어리를 되찾기 위해서. 자연이 하려고 했던 일의 전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닥터 리는 자연이를 잘 알지 못했군요.」

「제가 분명 다 확인했는데 없었습니다. 다 몰수당했어요.」

「자연이 호주로 좌천됐을 때. 정확히 왜 그렇게 됐는지 아세요?」

「아뇨, 구구절절한 내막은 잘…….」

「걘 정말, 하하하하…….」

수비는 난데없이 온정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흘렸다.

「그때는 정말 심각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웃음이 나오네요. 자연이, 외계 미생물 배양하다가 걸린 거였어요. 그것도 자기 오줌 얼려 가면서요. 채취 환경이랑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있는 장비 없는 장비 다 썼죠. 그렇게 명왕성에서 돌아오는 내내 연구했어요. 어떻게 그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 지를요. 아마 샘플 수준이 아니라 연구소 전체를 배양실로 만들어 놨을 사람이에요. 오자연은.」

그렇다. 자연이에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는데, 한 번에 빼앗길 리가 없었다. 유재는 다시 자연의 일지를 뒤졌다.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텐데. 수비의 말처럼 자연이 연구소 어딘가를 배양실로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되었다.

 

*

박테리아들은 참 다양한 것들을 먹고 자랄 수 있어요. 명왕성의 얼지 않은 바다 저 밑에서 발견한 생명은 놀랍게도, 탄소계 입자를 좋아하는데 산소에는 취약해요.

 

*

만약 지구의 다른 박테리아들과 한 팀이 된다면 어떨까요? 서로 힘을 합쳐 스러지는 오존을, 뿌연 우리의 숨을, 바스러지는 지구의 모든 생을 지킬 수 있게요.

 

*

우리는 언젠가 커다란 걸음을 한 발짝 앞으로 떼야 할지도 몰라요.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해요. 그렇지만 우리의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를 떠나는 이유가 되게 해선 더 안 돼요.

 

*

알아요. 지구의 대기는 사실 세포막처럼, ‘나’와 ‘타인’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걸요. 하지만 우리가 아프면 주사를 맞듯, 지구도 외부 물질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

우리는 같은 우주와, 같은 자연 속에 있지 않던가요. 외계는 자연의 일부일 뿐인걸요.

 

일지의 뒷부분에는 미생물 배양일지가 있었다. 명왕성에서의 미생물 채취 과정과 박테리아의 특징을 포함하여 최적의 배양 조건이 무엇인지, 완전한 살균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기록이 소상히 나열되어 있었다. 자연은 명왕성에서 발견한 박테리아를 크게 세 종으로 구분했으며, 그중 하나를 두고 다양한 실험을 강행했다. 우주선 안에서 할 수 있는 실험이라고 해봤자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탐사일지의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이 느낀 무력감과 절망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구 착륙 후에는 당분간 일지를 쓰지 않았을 정도로 우울감에 시달린 것 같았다. 자연의 발견을 학계에 제대로 알리는 것은 물론, 그것을 실질적인 해결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의사 결정자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몇몇 보수당 의원들을 포함한 정부 관계자들은 ‘위험한 외계 물질’을 지구로 운반했다는 점만으로도 자연을 구속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 여파로 자연은 더 이상 우주 탐사를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발견이 결국 지구를 구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어린 시선 속에 들어온 것은 배양에 성공한, 명왕성에서 자신과 함께 날아온 미생물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반문이 일었다. 자연이 구하고자 한 것은 지구였을까, 우주생물학자로서의 자기 자신이었을까. 자연이 우주선 안에서 행한 실험 결과를 가지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확신했던 것은 과학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무엇 때문에 자연은 그 정도의 확신을 했던 걸까.

유재는 며칠을 꼬박 연구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연구소 안에 있는 모든 샘플러들을 들여다보고, 자연의 일지에 적힌 내용과 대조하며 숨은 미생물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숨어있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친구들은 쉽사리 찾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지구에서 찾을 수 있는 이미 아는 미생물 뿐이었다. 한참을 뒤지는데, 후배 연구원이 다가와 유재에게 핀잔을 주었다.

“박사님. 정리 좀 하면서 찾으세요. 뭘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다 섞이면 책임지실 거예요? 이거 비싼 샘플러란 말이에요.”

“알았어, 조심할게. 한꺼번에 본다고 섞이진 않을…….”

잠깐. 만약 다른 것들과 섞여서 구분하기 어려워진 거라면? 불현듯 유재의 뇌리에 자연의 낱말이 스쳐갔다.

‘만약 지구의 다른 박테리아들과 한 팀이 된다면 어떨까요?’

한 팀으로 보관해뒀다면? 유재는 너무 뻔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샘플들을 다시 꺼냈다. 분명 이 어딘가에 평범한 지구의 생명과 뒤얽혀 숨어 있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유재를 흔들었다. 어딘가에… 분명 익숙한 것들과 함께……. 팀이 되기 좋은, 서로 상생할 수 있을만한…….

구름 채집본. 패어리오를 타고 날아가 구름을 한 움큼 떠서 어떤 미생물이 있는지 들여다봤던, 그 채집본. 자연이 외계 미생물의 실효성을 검증할 생각이었다면 정기적으로 채집하는 구름 속 미생물들과의 반응을 보려 했을 것이다. 각종 대기오염물로 가득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실험 환경. 구름 채집본은 그때그때 검사한 후 아카이빙만 해놓는 식이기 때문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에게 그런 무관심은 최고의 실험 환경을 보장했을 것이고. 유재는 채집본 보관소로 달렸다. 연구소의 가장 구석진 곳에 창고처럼 자리한, 그래서 더욱 눈에 띄지 않는 그 곳으로.

보관소 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유재는 흰 가운 자락을 여미었다. 뭐라도 더 껴입고 올 걸. 이건 너무 과한데. 유재는 날숨에 뿌옇게 피어나는 입김을 보며 보호 장비를 착용했다. 가장 최근의 채집본부터 확인할 예정이었다. 자연이 마지막으로 활공기를 띄웠던 날 이전의, 한 달도 되지 않은 샘플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냉동고 앞에서 유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자동으로 산성도를 측정하는 용기에 담긴 샘플은 항상 ‘강한 산성’ 이어서 붉은 색을 띄고 있어야 하는데. 냉동고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은 중성에 가까운 약산성의 연푸른빛을 띤 백여 개의 샘플러였다. 오염되기 이전 파랗게 존재했던 하늘 본연의 색처럼. 유재는 허겁지겁 가장 최근의 샘플을 꺼내어 현미경으로 진실을 확인했다. 자신의 육안으로 확인한 기이한 현상이 무엇 때문인지를 봐야만 했다.

너도, 이런 마음이었구나.

유재는 자연의 일지에 등장한 명왕성의 친구들을 보았다. 처음 마주하는 데에도 생경하지 않은 그 작은 생물들을. 다문다문 모여 구름의 수증기에 붙은 오염물질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모습을. 산소의 농도가 높아지자 천천히, 여유로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그렇구나. 이런 거였구나.

현미경의 초점이 뿌옇게 흐려졌다. 조용하던 유재의 눈물샘이 활발해진 탓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의 경이로움에 더해진, 떠난 이를 기리는 마음과 그가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지를 실감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종류의 슬픔이었다. 생물학자 오자연의 집념이 만들어낸 발견을 그저 일말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두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비탄에서 우러나오는 애도이자, 한. 동시에 반복되는 실험을 하며 작은 불씨로 남은 희망을 간직해준 자연에 대한 대견함과 고마움.    

유재는 격납고에 묵혀 두었던 구식 활공기를 꺼냈다. 녹은 슬었어도 비행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패어리오 시스템 장치는 하나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단순한 구름 채집 정도는 거뜬히 해낼 것이었다. 자연의 실험을 반복하려면, 희망을 확신으로 바꾸려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매일 새로운 샘플이 필요하다. 더 오염된 구름일수록 좋을 것이다.

네가 그랬구나. 그날도.

활공기를 띄우기 위해 앞선 비행기가 출발한다. 오늘도 그 날과 비슷한 모닝 글로리 구름이 적막한 퀸즈랜드 사막의 하늘을 채우고 있다. 위이잉, 기체가 바람을 가르기 시작한다. 지구의 얇은 대기막이 울리는 소리. 공기는 아직 존재한다. 뜨거운 자외선 아래에 살아남은 땅의 생이 드문드문 보인다. 붉은 지표면이 구름에 가려온다.

상승기류를 타. 상승기류를 타면 호주 밖으로도 갈 수 있어. 바다 위를 날아가다 보면, 아직도 파도가 철썩이는 게 썩 대견하지.

자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아래 모닝 글로리 구름이 가까워왔다. 불안정한 기류에 활공기가 가볍게 뒤집혔다, 돌아온다. 거꾸로 본 하늘, 창 안으로 스며든 때늦은 햇무리에 눈이 부셔왔다. 유재는 채집주머니를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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