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효소의 작용

2021.02.08 23:2102.08

"삐삐"

강우의 손목에서 택시 도착 알람이 울렸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좁고 지저분한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강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홉시간짜리 대수술을 마친 뒤라 팔다리가 무거웠다.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강우에게 다른 간호사가 인사를 건넸다.

"이간호사님 수고하셨어요"

"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병원 후문에서 무인택시에 타자 방송을 볼 것인지 묻는 메시지가 나왔다. 강우는 수면 모드를 택하고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운전석도 엔진도 충돌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는 자동차의 내부 공간은 넓고 쾌적했다. 사람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하는 법안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지만, 일단 통과되고 나자 도로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모든 자동차의 출발지와 목적지가 통합 도로네트워크에 공유되고 신호체계와도 상호작용하여 교통체증이란 과거의 개념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자동차간의 충돌사고도 없어져 더 이상 충돌을 대비한 범퍼공간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절약된 생산비용과 공간은 모두 승객편의를 위한 것이 되었다.

무인택시 회사간 경쟁시스템을 도입한 것이 주효했다. 택시를 호출하는 승객은 출발지와 목적지는 물론 택시회사도 고를 수 있었고, 각 회사의 차량관리 상태는 고객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었다. 강우가 애용하는 택시회사의 이름은 타고였다. 처음에는 택시를 렌트카라고 주장하며 택시 면허값을 아끼는 꼼수로 출발한 회사였지만 서비스 자체의 신뢰성은 좋았고, 강우는 타고 택시를 불러서 서비스에 실망하거나 목적지에 늦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느새 잠이 든 강우를 태우고 달리던 택시는 경찰서 앞에 멈춰섰다. 자가운전이 금지되면서 자가용 승용차도 시장에서 멸종 위기에 처했고, 개인 차고지 외의 주차장이란 찾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경찰로부터 특별 운전면허를 받은 일부 구세대 사람들은 여전히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유독 경찰공무원 중에 그런 비율이 높았다.

한별이 근무하는 경찰서에도 30대가 설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한별은 비싼 자가운전 옵션을 넣은 국산 중형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강우는 평소 그가 기상용으로 설정해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선잠에서 깼다. 택시요금은 물론 호출과 동시에 자동으로 결제된 상태였다. 강우가 택시에서 내리자 한별이 벌써 정문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 강우가 가까워지면서 한별에게 알람이 울렸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단말기를 이용한 서로의 실시간 위치추적에 동의한 상태였다.

“이간호사님!”

한별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 오늘만큼은 병원 밖에서 그 소리 듣기 싫다”

“그렇게 힘들었어?”

“있다가 얘기할게”

한별의 자동차에 탄 강우는 익숙한 안락함을 느꼈다. 개인용 승용차는 집이 확장된 공간이었다. 아무리 무인택시가 편리하고 안전하더라도 그것이 집이 주는 소속감과 밀착감을 줄 수는 없었다. 운전사 한별 또한 인공지능보다 운전이 미숙할지는 몰라도 강우의 기분과 생각은 훨씬 잘 만져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한별은 눈치 빠르게 아무 말 않고 운전에 집중하는 척 했다. 한강 다리의 가운데를 지날 때쯤 마침내 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원래 후두암 제거 수술이었는데 말이지”

“오늘 한 수술?”

“그게 뜬금없이 대장으로 전이가 되어 있더라 이 말이야”

“그게 뜬금없는 거야?”

“응. 그런 전이는 윤쌤도 처음 본댔어”

그렇게 해서 원래 3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수술을 10시간 만에 마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강우는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한별은 그 뒤에 숨어있는 다른 많은 이야기를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80세 입원환자의 회진이 늦어지면서 그 아들이 의사에게는 화도 내지 못하고 큰소리로 간호사를 찾다가 39세의 건장한 남성인 강우가 나타나자 다시 공손해졌다는 얘기라든가, 배달예약한 점심 주문을 취소하지 못해 단골식당 사장에게 쩔쩔매며 사과했다는 얘기, 그리고 어쩌면, 후두암에 이어 대장암까지 수술했지만 결국 환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 말이다. 한별은 슬슬 자기가 말을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역시 성환이는 편집하길 참 잘했어”

“그래. 유전자 몇 개 떼어낸다고 암에 안 걸리는 건 아니지만, 확률이 낮아지긴 하니까”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동성혼이 허용되었어도 남성부부가 둘 중 하나의 배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무척 고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렇게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강우와 한별은 기꺼이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과학의 발전은 그런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자궁처럼 복잡한 기관을 만드는 데에 어떤 유전자가 작용하는지 모두 알아내고 이미 모든 기관 발생을 마친 성체에 새로 자궁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자궁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계를 만들기가 훨씬 쉬웠던 것이다.

강우와 한별에게 인공자궁을 제공한 업체는 유전자편집 회사와 고객인도 계약이 맺어져 있었다. 인공자궁 고객에게 유전자편집을 권유해 실제로 실행을 하게 되면, 그 순수익의 30%를 다시 인공자궁 업체가 받았다. 물론 강우는 그런 사정을 짐작도 못했지만 형사인 한별에게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는 일에 잡음을 만들기 싫었던 한별은 잠자코 있었고, 간호사인 강우가 유전자편집에 괜찮은 반응을 보이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성환이 녀석은 자고 있으려나”

“주미 쌤한테 전화 안 해봤어?”

“이간호사는 본인 수술만 바쁜 줄 알지요? 남편 유형사도 나름 사람 찾는다, 증거 찾는다, 행사 치른다 정신이 없답니다”

한별이 시비조로 능청을 떨자 강우는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마음까지 편하게 누인 기분이었다. 한별은 강우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오른손을 팔걸이에 놓인 강우의 왼손 위에 얹었다. 서로 잡은 손이 따뜻했다.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초등학교 방과후 돌봄교실은 지난 수십년간 정부가 쏟아낸 저출산대책 중 강우와 한별이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제도였다. 물론 정말 9시에 아이를 찾으러 오는 부모는 많지 않았고, 오후 4시부터 돌봄근무를 시작한 교사 주미는 네 어린이의 파상공세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10분 전 집에 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성환이 가한 최후의 공격은 똑같은 홀로비전 만화 주제가를 여섯번 연속으로 부른 것이었다. 특별히 큰 소리로 부르거나 노랠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이 주미의 신경을 매우 거슬렀다. 결국 주미가 다른 동요를 제안하려고 할 때였다.

“아빠! 아빠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교실 출입문 바깥에 강우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주미가 나와 문을 당겨 열자 강우가 문을 붙잡으며 인사했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죠.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버님. 딱 맞춰 오셨어요”

“아빠! 할 얘기가 많이 있어. 오늘 축구도 했고 영어 받아쓰기 3등도 했어”

“그래? 골 넣었어?”

그러나 강우는 질문을 하면서도 별로 많은 얘기를 듣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성환은 차에만 타면 잠이 드는 아이였다. 그래도 강우는 차를 타러 가는 동안 성환이 그날 체육시간에 엄청 빠른 상대편을 막아냈고 영어 받아쓰기에서 Gene유전자라는 단어를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쉽게도 한별은 그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했다. 성환의 학교에도 주차장은 따로 없었고, 길가에 차를 세운 한별은 만약을 위해 차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역시 성환은 차에 타며 한별에게 인사를 하고 3분만에 잠이 들고 말았다.

세 사람을 태운 차는 이제 밤거리를 조용히 달려갔다. 잠든 성환의 얼굴에 대형 디스플레이 전광판의 불빛이 번쩍였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강우는 그 얼굴을 보며 성환을 가질 때 인공자궁 착상에 수백번 실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요새 인공수정을 하는 부부들이라면 기가 막힐 이야기였지만 그들이 그렇게 쉽게 착상에 성공하는 데에는 강우와 한별 같은 이들이 노하우를 쌓을 만한 선례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100번째 착상이 실패했을 때(한번에 수정란을 8개 가까이 투입하므로 실제 일을 시도한 것 자체는 12번이었다) 강우는 포기할 뻔 했었다.

그러나 강우와 한별은 인생이 걸린 중요한 선택을 서로에게 미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입이 간질거리고 속이 답답했지만 결국 둘 중 어느 쪽도 아이갖기를 포기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고, 어느덧 배아를 만들기 위한 그 모든 과정이 오래된 일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지구에 최초의 탄소화합물을 탄생시킨 벼락처럼 갑자기 성환이 찾아온 것이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할 것이고, 강우는 자기가 특별히 더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강우가 처음으로 한별에게 비밀을 갖게 된 데에는 그런 마음이 일정부분 작용했다.

***

 

성환의 세번째 생일이 지난 뒤부터 유전자편집이란 강우에게 별다른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편집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유전병의 첫번째 증상은 만2세 즈음에 나타난다고 했다. 강우는 그때부터 1년간 14가지 유전병 의심 증상(그중 가장 중대한 것은 손가락 사용이 충분히 숙련되자마자 코를 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을 발견했고, 성환의 주치의인 박원장이 진료실에 들어오는 강우의 얼굴만 보고도 한숨을 쉬게 될 때쯤 마침내 한별은 강우를 설득할 수 있었다. 성환은 어떤 유전병도 없었고, 강우와 한별은 더 이상 유전자편집의 부작용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강우가 편집회사에 대한 관심을 잃은 뒤로 강우의 뉴스 인공지능은 관련 소식을 강우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강우는 병원 탈의실에서 나온 뒤 동료 간호사 연서한테서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쌤은 그 뉴스 봤죠?"

"그 효소 디자이너요? 보긴 봤는데 결국 컴퓨터가 죽어라 노가다한다는 얘기 아니에요? 아 물론 대단하긴 해요. 화학반응을 입력만 하면 컴퓨터가 거기에 맞는 효소를 디자인한다니"

"아, 맞다. 저도 그거 놀랐어요. 근데 그거 말고 그 편집회사가 털렸다는 거요"

"네?"

"어머, 쌤 못보셨나봐. 그 편집회사가 9년전에 사보타주랑 도난사고를 당했대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완전 난리 났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도 대충 봤는데 자세한 건 모른단 거 같아요. 뭘 도난을 당했다는데 뭔지 회사에서 말을 안 한대요. 사보타주도 무슨 일인지 모르고"

강우는 신경세포의 신호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9년 전이면 성환의 배아가 유전자편집 시술을 받을 때였다. 그때 회사에 정체불명의 사고가 발생했고, 회사는 지금까지 이를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화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우는 외부인 방문시간에 맞춰 회사에 갈 수 없었다. 오늘의 수술환자도 암이 엉뚱한 곳에 전이해 있었던 것이다. 그 메마른 남자는 목구멍에서 발생한 암이 다리사이로 전이한 것도 모자라 두 군데 모두 매우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었다.

집도의 윤선생은 두 군데의 암을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최초의 근대 의사들은 모든 병의 진단과 모든 부위의 수술을 대충 알아서 했다. 이후 삼백년간 의학지식과 수술경험이 축적되면서 의사들은 전문화의 필요성을 점점 크게 느꼈고, 십년전의 의사들은 인체의 부위별로 수술을 하여 각자 수술할 수 있는 부위가 피부 기준 500제곱센티미터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의료 AI의 본격 도입과 함께 의사들은 다시 수술범위를 넓히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술 도중에 새로 수술할 질병이 발견되어도 한꺼번에 수술이 가능한지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맨 처음 계획은 3시간, 전이된 암을 처리하는 시간까지 더해도 6시간이면 끝날 수술이었다. 결국 그 시간을 더욱 잡아늘인 것은 강우의 실수였다. 하루 종일 편집회사 뉴스에 정신이 팔려있던 강우가 절개부위를 잘못 입력한 것이다. 사고를 낼뻔한 강우는 당장 사실을 알아야 일에 다시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우는 외부인 방문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회사의 정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지금같은 비상상황에 연구팀, 홍보팀, 법무팀 할 것없이 저녁까지 회사에 남아있을 것이 빤했다. 결국 강우를 맞이한 사람은 9년전 성환의 담당자였던 윤중이었다.

"아버님,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성환이가 아들 같습니다. 제가 시술한 아이들이 전부 제 아이 같다고요. 성환이한테 절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알았으니까 대체 회사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좀 알려달라니까요"

"성환이하고 상관 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영업비밀이고요"

"그런 큰일을 9년동안 숨겼는데 제가 뭘 보고 회사를 믿어요? 전부 알려주세요. 안 그러면 아무 말도 못 믿습니다. 성환이한테 문제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은 제가 합니다"

강우와 상담실에 마주앉은 윤중의 모습은 9년전과 똑같았다. 얇은 금속테의 안경, 뒤로 묶은 머리, 갸름한 얼굴과 몸매. 잠시 회사의 다음 사업은 노화방지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정도였다. 강우는 다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다.

"선생님, 성환이 둘째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아시죠"

강우는 굳이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더 나이가 많은 자신을 첫째 아빠, 한별을 둘째 아빠로 불렀다. 물론 윤중은 한별이 남의 잘못을 캐고 다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회사의 후원자나 로비 상대 중에는 한별에게 누구의 잘못을 캘지 정해주는 사람, 혹은 그렇게 정해주는 사람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윤중이 강우의 협박에 화도 겁도 내지 않은 것은 그런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윤중이 성환을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아요, 아버님. 안 그래도 이미 경찰에서 수사 중입니다. 그런 말씀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아니,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방금 저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사실 강우는 윤중에게 한별의 직업을 들먹이고 나서 곧장 후회하는 중이었다. 강우의 성격이 급한 편이기는 해도 공정과 합리에 대한 믿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윤중이 전혀 흔들린 기색도 없이 강우의 말이 부적절함을 지적하자 오히려 화가 났다. 결국 강우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내가 무슨 말을 했냐구요. 왜 당신네는 아무 말도 안 해주면서 내가 한 마디 한 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을라 그래요?"

"제가 언제 꼬투리를 잡았다 그러세요. 그냥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마주 일어서서 대답한 윤중의 음색에도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뭐하자는 거야, 진짜!"

결국 강우는 머리를 흔들며 발을 굴렀고, 의자가 한개 더 쓰러졌다. 강우가 윤중의 멱살을 잡자 윤중은 경비원을, 경비원은 경찰을 불렀다. 경찰은 강우의 이름을 부르고 무슨 권리라는 것을 읊어준 뒤 강우와 함께 순찰차에 타고 그곳을 떠났다.

***

 

강우는 경찰서에서 많은 반성을 했다. 회사가 너무 불성실하게 대응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한별을 들먹이는 것은 유익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행히 회사는 고객에게 세시간어치 이상의 곤란을 가하기는 원치 않았고, 강우는 담당 형사의 조사를 받은 뒤 곧장 귀가할 수 있었다. 이제는 회사를 찾아가지 않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할 모양이었다.

강우는 집에 먼저 와 있던 한별의 반기는 표정을 보고 과연 그가 오늘 일에 대해 연락을 받았을지 궁금해했다. 수많은 흉악범과 거짓말쟁이를 상대하며 단련된 한별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별은 집안에서는 그런 업무용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오늘 강우가 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도 어느 샌가 한별에게는 근무중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강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간호사님"

한별은 환영의 미소를 하며 강우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강우와 한별은 모두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에 그런 직업은 더 많은 돈을 벌어다주어야 마땅했지만, 사실 둘의 재정적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한별은 강우한테서 받아든 겉옷을 곧바로 다시 작은 방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내일쯤 시간제로 대여받는 안드로이드 가정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강우와 한별의 집은 항상 하루치만 어질러졌다. 물론 8살 남자아이의 하루치 어지름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3배의 시간효율성을 가진다고 평가받는 안드로이드 가정부가 4시간은 일해야 수습이 될 정도였다. 안드로이드 시대 이전에 어린이의 양육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였다.

집안의 공기는 수도 및 도시공기정화시스템과 직접 연결된 인트콘(Integrated Air Conditioner)이 수면에 적합한 습도와 온도로 조절하고 있었고, 조도도 야간에 맞게 전반적으로 낮아져 있었지만 강우와 한별이 가는 방향은 항상 환했다. 강우는 문득 무대를 걸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스웠다. 사실 대부분 인공지능 회사의 목표가 그 사용자에게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주려는 데 있기는 했다.

한별은 성환이 잠든 틈을 타 같이 침대로 가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공 행세를 하기로 결심한 강우는 한별의 눈치를 모른 척 하며 잠시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컴퓨터를 켰다. 어차피 한별은 강우가 일을 마치고 방으로 갈 때까지 기다릴 가능성이 높았다.

강우은 편집회사의 유전자 편집기술에 대한 설명서를 검색해보았다. 만능 유전자가위로 손쉽게 원하는 유전자를 찾아서 잘라낸다. 유전자가위의 생산은 유전자가위의 아미노산 서열을 코딩한 DNA를 발현시켜서 이뤄진다. 유전자가위 생산용 DNA를 특정 세균의 유전체에 포함시켜 그 세균을 배양하기만 하면 유전자가위가 계속해서 생산된다는 것 까지가 강우가 이해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강우는 편집회사 도난사고에 대한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뉴스를 보아도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 즉 '영업비밀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도난당한 물건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전자 편집 시술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메시지 외에 새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때 어느 홀로비전 브이로그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레드 피스Red Peace가 편집회사 도난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척봐도 뜬소문 혹은 누군가의 망상이나 떠들 것 같았지만, 썸네일에서 출연자가 쓰고 있는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면은 어떤 단백질의 4차 구조를 모델링한 그림을 담고 있었다.

"클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인류의 진화를 막지 마라! 레드 피스입니다"

아마도 생물의 진화를 진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유사과학 신봉집단 같았다. 시간과 정신건강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당장 영상을 꺼야 했지만, 오늘 경찰서를 다녀온 강우는 자기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편집회사 도난사건에 대하여 다들 관심이 많으실 겁니다. 아직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것은 저희가 한 일입니다. 인류진화를 촉진하기 위해서지요"

도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다였다. 이후로는 인류는 진화를 멈췄다, 바로 지금의 인체에 최적화된 현대문명의 모든 산물은 더 이상 인류에게 선택압을 가하지 않는다, 인류는 이렇게 고착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예상대로 멍청한 소리였다. 자기네가 도난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포함하여 영상의 그 어떤 부분도 말이 되는 내용이 없었다. 마치 몇십년전 세계 어딘가에서 테러가 벌어지기만 하면 자기네 소행이라고 주장하던 무장집단들 같았다.

그럼에도 강우는 이번 도난 사건에 관한 한 가지 착상을 얻을 수 있었다. 강우가 다시 검색을 해보려 할 때 등 뒤에 누군가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느새 다가온 한별이 강우를 느리고 부드럽게 안마하기 시작했다. 결국 강우는 그 손을 붙잡고 함께 침실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며 강우는 그날밤의 유희와 다음날의 일에 대하여 몇 가지 계획을 떠올렸다. 그러나 한별과 함께 침대에 눕자 곧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

 

다음날 강우는 다시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늘도 후두암 수술이었고, 오늘은 아예 수술 시작 전에 전신스캔을 해본 결과 역시 엉뚱한 곳, 이번에는 위로 전이한 암 조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우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폐기물팩을 넉넉하게 챙겼다. 수술이 끝나면 수술 과정에서 발생한 무언가를 가지고 나올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을 규칙대로 폐기할 생각은 없었다.

두 군데를 수술하는 것은 힘든 일이긴 했지만, 미리 계획하고 들어간 것이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집도의가 먼저 수술실을 나서고 보조의와 간호사들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선반은 내가 할게"

강우의 말에 다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강우가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약간 의아하게 생각한 간호사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선반에 다가간 강우는 맨위칸에 올려진 위암 조직을 보았다. 원래는 그대로 폐기물팩에 넣어야 하지만 강우는 메스를 들고 조직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냈다. 이미 몸에서 떨어져 나와 양쪽서 당겨지는 탄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날카로운 메스라도 자르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스테이크라도 자르듯이 톱질을 하고 있으면 금세 동료들의 눈길을 살 것이었다.

강우가 한번 더 힘을 주어 메스를 꾹 누르자 마침내 조직이 완전히 갈라지며 금속끼리 부딪히는 팅 소리가 났다. 강우는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지만 원래 선반을 정리할 때는 그런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강우는 얼른 암조직을 폐기물팩에 집어넣었다. 이제 그것을 바지춤에 끼우기만 하면 되었지만, 앞치마 형태의 수술복을 입은 채로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강우는 과감하게 수술복을 들추었지만 마침 도구함을 정리하던 오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오간호사는 강우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강우가 게이인 것도 알았다. 만약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면 강우의 행동을 성희롱으로 오해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바지춤에 넣으려던 작은 암조직 팩은 계속 오른손에 든 채였다. 강우는 급한 김에 왼쪽 겨드랑이에 팩을 끼고 급히 수술복을 내린 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한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있기는 불편했지만 일을 못 끝낼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강우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탈의실로 향했다. 오간호사를 포함한 그 누구도 강우의 겨드랑이 안쪽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분쇄기와 원심분리기였다. 강우가 근무하는 곳은 한강에서 멀지 않은 대학병원으로, 당연히 실험실을 갖추었으나 연구직이 아닌 강우에게는 사용 권한이 없었다. 의과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담당의사에게 부탁할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실험을 하려는 것인지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결국 강우는 아무런 권한도 없이 실험동으로 향했다. 어차피 모든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항상 그곳에 있었다.

 

강우는 실험동 출입장치에 얼굴을 갖다댔다. 출입장치는 강우의 얼굴 형태와 홍채 패턴을 모두 인식하여 신원을 파악한 뒤 대답했다.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강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강우의 예상대로 기계의 대답은 이번에도 변하지 않았다. 강우가 세번째로 얼굴을 내밀자, 강우가 기대했던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직원이세요?"

실험동 강경비원의 물음이었다.

"아, 네, 선생님. 정확히 여긴 아니고 병원쪽 간호사입니다"

"그럼 여기 출입 안 돼요"

경비원의 목소리는 약간 공격적이었다. 강우의 평상시 성격이라면 분명히 그 태도에 대해 항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눈길을 끌지 않고 실험실에 들어가야 했다.

"아, 몰랐어요 저는. 그냥 교수님이 시키신게 있어서요. 실험동에서 하라고 하셨는데"

"어떤 교수님이요?"

교수를 운운하자 경비원의 목소리가 약간 누그러졌다.

"윤종수 교수님이요. 저한테 시키신 게 있는데"

경비원은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초리로 강우를 쳐다보았다. 강우는 웃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원이 계속 말이 없자 초초해진 강우는 손이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암조직이, 왼쪽에는 잘 접힌 종이조각 몇장이 들어 있었다. 고민하던 강우가 왼손을 주머니에서 꺼낼 때였다.

드르륵. 실험동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얼마나 있을 거예요?"

"한 너댓시간은 걸릴 거 같은데 그때까지 문 안 닫으시죠?"

"빨리 하고 나오세요"

경비원은 끝까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강우는 왼손에 쥐었던 지폐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는 실험동 출입구에서 가장 먼 실험실로 갔다. 경비원을 속이고 통제구역에 들어온 것이 그리 마음 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우는 실험실문 앞 복도에서 괜히 한번 더 좌우를 살핀 뒤 마침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강우가 한 일을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암조직을 DNA 염기서열 분석기가 분석할 수 있는 용액의 형태로 만든 뒤, 이를 분석기에 집어넣고, 몇십분 뒤 전체 염기서열 분석결과를 출력한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암세포의 유전체 정보를 획득한 것이다. 강우는 집에 가서 그 정보를 인간의 정상세포의 유전체 정보와 비교할 생각이었다.

 

***

 

그 다음날 아침 강우는 다시 편집회사로 향했다. 마침 병원 근무는 비번이었다. 강우를 알아본 정문 경비원은 곧바로 무전기에 손을 대며 강우를 노려보았다. 강우는 양 손바닥을 앞으로 들어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저,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오늘은 정말 짧게 간단한 이야기만 하려고 왔습니다"

"회사 민원 게시판이나 우편을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그냥 사장님께 세균을 도난당하셨냐고 여쭤봐 주시면 안 될까요?"

"돌아가십시오"

"제발 무전 한번만 해봐주세요"

강우는 애걸하는 투로 말했다. 경비원은 강우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지만, 다시 경찰을 부르는 것보다 그냥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모두에게 더 간편한 일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비원은 무전기를 가까이에 대고 뭔가를 말했다.

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이지 이 회사의 보안시스템은 구시대의 유물로 이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무전기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경비원은 약간 의아한 눈빛, 그리고 크게 놀란 눈빛, 마지막으로 강우를 쳐다보며 공손한 눈빛을 지었다.

"저, 사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시네요"

경비원은 양손을 출입문으로 향해 강우를 안내했다.

 

사장을 만나는 것은 성환의 유전자편집 계약을 체결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회사의 규모가 작아 모든 고객과의 최종 계약은 사장이 직접 담당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상담실에서 계약을 했으므로, 사장실에 온 것은 이번이 아예 처음이었다. 사장실에 와보니 회사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구시대적 아이템이 누구의 취향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손으로 쓰는 메모지와 공책, 볼펜과 연필이 널려 있었고 그 중에는 심지어 단정하게 필통에 꽂힌 만년필도 있었다. 전화기도 손에 들고 얼굴에 가져다 대야 하는 구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의 정리 상태에서는 도우미 안드로이드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과 같은 경제적 여건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방이 마음에 드십니까?"

겨우 인사만 하고 사장과 얘기하거나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은 채 몇초동안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강우는 사장의 말에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아, 네. 옛날식 물건이 많네요"

"제가 정보기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자리에 앉으시지요"

사장이 자기 책상 앞에 따로 떨어져 있는 원탁과 소파를 가리키고는 자기도 그쪽으로 다가왔다. 강우는 사장이 오는 방향을 보고 그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회사에서 뭘 도둑맞으셨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게 단지 회사만의 큰일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사장의 눈이 아주 잠시 크게 떠졌다.

"저희가 뭘 도둑맞았다고 생각하시죠?"

"정말로 제가 쭉 얘기해드리면 좋겠어요?"

"들어보고 싶습니다"

강우는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도난당한 건 유전자가위를 생산하는 세균이에요. 사장님은 회사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핵심기술재산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그동안 숨겨오신 거고요. 그런데 문제는, 누가 훔쳤는지는 몰라도 10년 동안 그에 대한 소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아주 나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어떤 일 말입니까?"

"잠깐 제 직업 얘기를 할게요. 저는 간호사예요. 암수술 보조를 주로 합니다"

"아"

"역시 무슨 말인지 아시는군요. 그럼 더 얘기 안 해도 될까요?"

긴장할 수록 말이 빨라지는 강우는 더 이상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장은 강우의 빨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오히려 더 여유있는 태도를 취했다.

"아뇨, 강우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강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요새 수술하면서 이상한 환자들을 많이 봤습니다. 자꾸만 암이 엉뚱한 부위로 전이를 하는 거예요. 당연히 암덩어리에 가까운 조직과 기관부터 전이가 돼야 하는데, 목에 암이 걸린 사람이 갑자기 대장에서 전이된 암이 발견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특이한 전이경로를 따르는 새로운 암인가보다 했죠. 그런데 그런 암 환자가 하나가 아닌 데다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야 그렇게 전이가 되는건지 짐작이 안 됐어요"

"전이된 게 아니었으니까요"

"네, 한쪽 기관에서 생긴 암세포가 다른 기관으로 전이한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기관에서 동시에 암이 발병한 거죠"

"그 원인도 아셨습니까?"

"유전자가위요"

사장은 흥미롭다는 듯 작은 콧소리를 냈다.

"회사는 유전자편집에 만능 유전자가위를 사용하지요. 이름처럼 그 어떤 유전자라도 잘라낼 수 있지만, 잘 통제된 환경에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유전자만 정확하게 집어서 잘 잘라냅니다. 그래야 여기서 유전자가 편집된 아이들이 기형으로 태어나지 않겠지요. 맞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유전자가위는 세균공장에서 생산하시죠? 유전자가위도 아미노산의 1차, 2차, 3차 구조로 만들어진 하나의 단백질이니까 그것을 DNA로 코딩할 수 있고, 그 DNA를 적당한 세균의 유전체중 적당한 위치에 집어넣어주기만 하면 세균이 알아서 유전자가위를 계속해서 생산하는 겁니다. 결국 이 유전자가위를 코딩한 DNA, 그리고 그 DNA를 품고 있는 세균이 회사의 핵심적인 재산일 거예요. 그것만 있으면 누구라도 아주 쉽게 유전자가위를 만들 수 있고 그럼 유전자 편집도 할 수 있으니까요. 맞죠?"

"유전자가위가 있다고 편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편집할 유전자를 정확히 잡아내는 능력이나, 인공자궁 기술의 완성도도 저희 만한 회사가 없습니다"

"아, 그야 그렇겠죠"

강우는 자신의 말이 방해받아서 귀찮다는 투였다. 잔뜩 말이 빨라진 강우는 얼른 다음 말을 해야 했다.

"아무튼 그런데 회사가 10년 전에 도난당해 어디선가 떠돌며 진화하고 적응하고 번식하던 세균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숙주를 찾아낸 거죠"

"인간 말씀이시군요"

"네, 유전자가위의 DNA를 가진 세균이 인체에 감염되기 시작하고, 인체 내에서 유전자가위를 생산하는데, 인위적인 통제가 안 되니 유전자가위가 아무 유전자의 아무 군데나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세포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죠. 일반적인 돌연변이는 우리 몸의 면역반응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멸하지만, 어떤 돌연변이는 사멸하지 않고 계속 번식합니다"

"그게 암이죠"

"네, 유전자가위 세균에 감염된 사람들은 유전자가위가 온 몸에서 아무 유전자나 잘라대기 시작하면서 유전자에 손상을 입은 세포 일부가 암세포로 변하기 시작한 겁니다"

마침내 결론을 말한 강우는 약간 지친 표정이었다.

"맞나요?"

사장은 감탄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모두 어떻게 아셨습니까?"

"암이 이상하게 전이한 환자의 암조직을 떼어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을 해봤습니다. 보니까 당연히 돌연변이가 있는데, 그게 수가 상당히 많고, 또 하나 같이 일부 염기가 다른 염기로 치환된게 아니라, 일부 염기서열 자체가 뭉터기로 빈틈으로 남아있더군요. 그래서 다른 원인이 아니라 유전자가위에 의한 돌연변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죠"

"대단하십니다. 그 정도라면 우리 유전자가위 세균이 암을 일으키는 것 말고 또 어떤 일을 할 지도 짐작되지 않으세요?"

"무슨 말씀이시죠?"

"아까 강우씨가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원래 돌연변이 세포는 면역반응으로 사멸하는 게 일반적이고, 예외적으로만 암으로 변한다고"

"그랬죠. 사멸하고 나면 정상세포만 남아 우리 몸의 조직과 기관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죠"

"그런데 유전자가위 세균에 감염되면 돌연변이가 쉬지 않고 일어나거든요"

강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돌연변이 세포가 사멸하고 나머지 세포들이 조직과 기관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돌연변이 세포가 다수가 되고 그것들이 죄다 사멸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장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강우는 서로 상대방의 말을 완성해주는 모양새가 심각한 상황에 우스꽝스런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사장의 말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조직이 괴사하겠군요"

 

이제 강우는 다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사장의 말은 유전자가위 세균에 감염된 사람은 암에 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서 조직이 괴사하여 다발성 장기부전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다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저희가 수집한 감염자 발생 현황을 보면 이 세균의 감염성은 매우 높습니다. 거의 감기 수준이에요"

"그럼 지금 치명적인 암이 감기처럼 전염되고 있다는 거예요?"

사장은 강우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 세균이 각종 조직의 괴사를 일으킬 때 뇌부터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아마 유전자가위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질 때, 뇌로 공급되는 혈류량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그 결과로 감염자들이 판단력과 분노조절능력이 약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들이 여럿 발견됐습니다"

이쯤 되면 허접한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보던 좀비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럼 대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사람들 다 죽는 데 가만 있을 거예요?"

"그럴 리가요. 저희도 치료제를 만드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일단 사람들에게 알리기라도 해야 무슨 조치든 하죠!"

"안 그래도 곧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원래는 치료제 개발 후에 하고 싶었지만, 이제 강우씨도 있고 하니 저희도 발표할 수밖에 없겠네요"

너무나도 엄청난 대화를 거쳐온 강우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한별과 성환을 생각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힘은 생겨났다. 강우가 가야겠다고 말할 때 사장의 한 마디가 강우를 붙잡았다.

"강우씨도 자녀분이 유전자편집을 받으신 거죠?"

"그런데요?"

"그럼 아마도..."

그때 사장이 남긴 마지막 말은 강우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혔다. 절망과 희망, 기대와 걱정이 뒤섞이는데 그 하나하나의 감정이 강우가 살면서 느껴본 가장 강한 수준이었다.

강우는 한별에게 무조건 반차를 내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가 직접 운전하는 차가 반드시 필요했다. 성환의 학교에는 강우가 들를 생각이었다.

무인택시를 타고 천천히 가는 강우는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 봤다. 행인은 거의 없었다. 어디선가 경찰차가 출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의 눈에 처음으로 띈 행인은 강우의 시선을 마주봤다. 강우가 탄 차가 움직이는데도 끝까지 강우를 따라왔다. 행인이 강우쪽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앞서나가는 택시의 시야에서 행인이 사라졌다.

성환의 학교에 도착한 강우는 누구에게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성환이 수업중인 교실로 향했다. 아들의 학급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강우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임교사만이 강우를 쳐다봤다. 학생들은 모두 가상현실 안대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어, 성환이 아버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성환이좀 데려가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큰일이신가요?"

강우는 대답하지 않고 성환의 자리가 어디인지 물었다. 담임교사가 어색하게 가장 뒷자리를 가리키자 강우는 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성환아, 아빠 왔어"

성환은 어리둥절해하면서 안대와 이어폰을 벗고는 강우를 보고 기뻐했다.

"아빠!"

성환의 큰 목소리에 다른 아이 몇 명도 무슨 일인지 보려고 안대를 벗었다. 강우는 모두를 무시했다.

"성환아, 집에 가자"

"이것만 다 하고. 지금 지구 핵에 다 왔단 말이야"

성환이 다시 안대를 쓰며 말했다. 성환이 학교에 있겠다고 할 줄 몰랐던 강우는 당황했다.

"그만 하고 빨리 일어나"

"그럼 나 태양계 탐험 사줘"

안대를 다시 벗은 성환이 강우에게 말했다. 물론 성환은 상황의 급박함을 몰랐지만, 그 와중에 거래를 시도하는 모습에 강우는 속으로 입을 딱 벌렸다.

"알았어, 일단 가자"

마침내 성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따라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 동작은 민첩했다.

집으로 온 강우는 성환에게 홀로비전을 틀어준 뒤 방으로 들어가 먼저 와 있던 한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우린, 일단 병이 가라앉을 때까지 사람 없는 데 있어야 돼. 도시 한 가운데 있으면 순식간에 감염될 거야. 아니면 감염자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고"

한별은 심각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한별은 여러번 되묻지는 않았다.

"암환자의 세포에서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회사에 가봤더니 회사에서 자기네 유전자가위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인정했고, 또 그게 감염성이 높다고 했단 말이지?"

"그래"

"무슨 얘긴지는 알았어.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도망가면 안 돼"

"너, 설마..."

"그래, 나는 경찰이잖아. 남을 공격하게 만드는 전염병이 돈다면 일단 보고를 해야지. 그리고 질서유지 인력으로 투입되겠지"

"안 돼. 그냥 나랑 도망가"

"빨리 보고를 해야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더 안전하지. 너와 성환이도 마찬가지야. 만약 교통통제가 시작되면 내가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줄게"

"됐고, 그냥 우리랑 가자니깐!"

"정말 미안해"

그때 거실에서 홀로비전을 보던 성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만화 틀어줘! 이상한 게 나오잖아!"

"성환이 너 채널 바꿀줄 알잖아. 네가 만화 틀어"

"안 돼. 만화 채널 틀었는데도 이상한 게 나온단 말이야!"

하는 수 없이 강우와 한별은 거실로 나갔다. 홀로비전에는 남자 뉴스 앵커가 나와 있었다.

"이 병원체는 호흡기와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외출을 삼가시고 불가피한 외출시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며, 귀가 후 즉시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으시기 바랍니다.

몸의 여러 부위에서 동시에 이상을 느끼거나 까닭없는 공격성 등 이 병의 의심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국가감염병관리센터 또는 회사로 연락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치료와 예방책에 대하여서는 그 수단의 안전성이 확인되는 즉시 추가로 알리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상으로 뉴스 특보를 마치겠습니다"

화면은 성환이 보고 있던 만화로 돌아갔지만 하단에는 계속해서 감염을 조심하고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신고할 것을 당부하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강우가 한별을 다시 보챘다.

"이제 적어도 보고할 필요는 없겠네. 제발 우리랑 가자"

 

한별은 조심스럽게 차를 운전했다. 강우는 계속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한별은 이런 때일 수록 공황에 빠져 교통질서를 어기는 사람이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강우는 재촉하기를 그만 두고 성환의 옆자리에 몸을 뒤로 눕혀 깊이 앉았다.

그러자 마침내 긴장이 풀렸다. 한별이 업무용으로도 쓰는 이 차는 아주 튼튼했고 강우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찰장비도 몇개 달린 것 같았다. 한별의 운전실력은 물론 최고였다.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어디에 가 있을지가 가장 문제였지만, 강우와 한별은 별장에 가 있기로 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더라도 아빠들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성환도 조용했다. 어린 아들의 긴장한 모습을 보자 강우는 그 상황 중에도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강우는 언제나 성환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각오를 다져야 할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그때 차가 급정거했다. 성환이 악 소리를 지르고 강우는 한별에게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눈 앞에 서 있는 두 여자의 모습에 강우의 말문이 막혔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어떤 노인의 머리를 붙잡았고, 노인은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젊은 여자한테 쫓기던 노인이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며 한별이 급정거한 것이었다. 한별은 그 모습을 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뭐하는 거야?"

한별은 강우가 어차피 말릴 것을 안다는 듯이, 굳이 강우를 쳐다보며 설득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금방 다녀오겠다고 앞을 보며 말했을 뿐이었다.

"야! 한별아, 유한별!"

한별은 차에서 내리자 잽싸게 젊은 여자의 옆으로 다가가 노인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손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젊은 여자가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잡은 손을 놓는 게 보였다. 갑자기 머리에 가해지던 힘이 없어진 노인은 앞으로 넘어졌다. 한별이 노인에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몰라도 노인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났다. 그 동안 젊은 여자는 계속 한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애쓰고 있었다. 입으로는 뭔가 욕설을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한별은 마침내 여자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여자는 아픈 손목을 잠시 돌볼 법도 하건만 아랑곳않고 이번엔 곧바로 한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별은 능숙하게 손을 피하며 다시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엔 다른 손으로 주머니의 수갑을 꺼냈다. 여자를 체포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제복차림의 경찰관 2명이 한별에게 다가왔다. 한별이 신분증을 보이며 여자를 두 사람에게 넘기자 곧 그 중 한명이 여자를 순찰차 뒷좌석에 타게 했다. 나머지 한명은 한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한별이 차로 다가왔으나 운전석이 아닌 강우가 앉아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기부터 네가 운전해야 할 거 같다"

"무슨 말이야?"

"내가 잠시 좀 도와줘야 될 거 같아"

"이거 네 일 아니잖아? 그리고 두명 출동했으면 됐지 뭘 또 도와줘"

"신고가 이거 한건이 아니야. 공격성 어쩌고 하는 말이 맞나 봐"

"어쨌든 이거 네 일 아니야. 빨리 가자"

"몰랐으면 몰라도, 지금 이 두 사람이 출동해야 되는 신고만 여섯건이야. 미안하지만 나는 도저히 못 가겠다"

이제 강우는 말 없이 한별을 노려보았다.

"정말 미안해"

"중요할 때 도움도 안 되는 새끼"

어느새 강우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한별은 고개를 흔들고는, 숙였다. 그러고 잠시 있다가 조끼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위성전화야. 원리는 모르지만 배터리만 있으면 같은 위성전화끼리는 무슨 상황에서도 통화가 된댔어. 하나 가져가"

강우는 말 없이 전화기를 받고 차에서 내렸다. 강우가 운전석으로 가자 한별은 차 안에 얼굴을 넣어 성환에게 인사를 했다.

"성환아, 아빠 잠깐 회사 다녀올게. 최대한 빨리 올 거야. 알았지?"

"언제 오는데?"

"빨리, 빨리 올 거야"

"오늘 밤에 올 거야?"

"그건 모르겠어. 아무튼 빨리 올 거야. 진짜야"

"진짜야? 약속?"

"그래, 약속"

"알았어, 그럼. 나쁜 사람 많이 잡고 와"

"그래, 아빠 갔다올게"

한별은 그 사이에 운전석에 앉은 강우에게도 인사했다.

"남편, 나 갔다온다"

"그래라"

한별은 강우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제는 일하러 가야 했다. 한별이 차문을 닫자 강우는 바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엔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강우와 성환은 세시간여를 달린 끝에 가족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산속에 있는 오두막 같은 작은 집 하나였다. 수도도 전기도 없었고 다만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샘이 하나, 그리고 태양광 발전기가 하나 있었다. 한반도 통일 직전 약 5년간 간헐적으로 전쟁위기가 고조될 때,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피난처를 마련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접근성은 낮은 곳에 지하벙커를 마련했고, 전기와 수도도 연결했다. 단독주택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집 안에 패닉룸을 마련했다. 그리고 강우 같은 이들은 산골에 있는 싼 집을 샀다.

당시 남한 주민으로서 북한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산 것이기에 위치는 당연히 남쪽 끝, 경남 지방이었다. 과거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서 활약했다고 했다. 아마 강우와 한별 외에도 이번 위기에 각자의 피난처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호흡기로 전염되고, 상당한 잠복기를 가진 이 병을 과연 지하벙커가 막아낼 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상당규모의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병증이 나타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잠복기가 길 수밖에 없는 병이었다.

강우는 성환을 차에서 내리고 우선 차에 실린 트렁크를 집 안에 넣었다. 차 안에서 잠들었던 성환은 가끔 여름별장으로 쓰던 곳에서 깨자 놀러온 기분이 나는 모양이었다.

"별장이다!"

성환은 곧 마당을 뛰기 시작했다. 짐을 모두 옮긴 강우는 잠시 마루에 앉아 성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치가 빠른 성환은 강우가 일을 마친 것처럼 보이자 아빠도 빨리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강우는 지쳐서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굳이 같이 뛰놀지 않아도 쏟아지는 햇살 아래 푸른 나무를 배경으로 뛰노는 성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강우를 부르는 성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아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강우가 성환을 붙잡겠다고 뛰기 시작하자 성환이 깔깔대며 도망쳤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에서 시원한 숲향기가 났다. 고개를 들자 부신 햇살에 눈이 감겼다. 너무 밝았다. 다시 고개를 내렸지만 암순응이 되지 않아서인지 성환이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는 대체 언제까지 도망다닐 생각인가. 도망을 다니더라도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시야에서 벗어나면 어쩐다는 말인가. 강우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성환아, 이제 그만하고 나와"

"이성환!"

"빨리 나와, 이성환!"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우를 약올리는 느낌이었다. 강우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웃음소리가 들리는 나무를 찾았다. 물론 나무 옆으로 성환의 옷자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강우가 성큼성큼 그쪽으로 향하자 다시 성환이 깔깔거리며 다른 나무로 도망쳤다. 강우는 뛰어가서 성환을 붙잡았다.

"벌써 잡으면 어떡해! 이거 놔 줘"

그러나 화가 난 강우는 오히려 어깨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빠, 놔 줘"

주눅든 성환의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떨렸다. 곧 울 것 같았지만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 아파. 놔 줘"

"누가 그렇게 숨으래"

"원래 숨바꼭질은 숨는 거잖아"

성환의 말대꾸에 강우는 성환을 강하게 밀쳐 넘어뜨리고 다시 손을 쳐들었다. 그 손을 내리기 직전 마침내 성환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우가 정신을 차린 순간이었다. 강우는 문득 암환자를 수술할 때는 수술진에 대한 감염 예방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야 물론, 암은 감염성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고전적인 암은 그랬던 것이다.

 

***

 

삼주가 지났다. 강우는 점점 자신의 공격성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병증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감정을 조절해서 가까스로 성환을 때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나머지 장기들도 기능 저하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신장과 방광이 약해져 자주 소변을 보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물론 근육 조직도 괴사하여 힘 자체가 약해지고 있었다. 가져온 식량은 반년치는 되고 물과 전기도 있었지만, 더 이상 성환을 돌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별에게 맡길 생각을 해야겠지만 일주일째 한별과 통화가 되지 않았다. 휴대폰의 인터넷 연결은 그 전에 끊겼다. 사회기간 기능이 정지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강우의 몸이 건강하고 사회기능이 정상이라고 하더라도, 성환을 돌보는 것은 일반적인 아이 양육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최대한 조심했지만 결국 성환도 감염된 것 같았다. 한밤중에 갑자기 열이 오르는가 하면 먹은 것을 모두 토하기도 하고, 몇시간이 지나면 다시 멀쩡하게 뛰어놀았다. 아이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지만 하루이틀 간격으로 계속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몸 어딘가가 변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하게 말하긴 힘들지만, 눈이 조금 커졌다거나 손가락이 가늘어졌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강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인간 사회를 찾으러 가보기로 했다. 이제 성환은 예전처럼 강우를 살갑게 따르지는 않았지만 혼자 남는 것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성환은 조용히 뒷좌석에 탔다. 강우는 트렁크에 남은 식량과 말통에 담아온 물을 실었다. 성환의 힘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내려가는 비포장도로는 울퉁불퉁했지만 원래도 그랬기 때문에 특별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길이 끝나고 평지의 4차선 도로가 나타나는 순간 강우는 성환에게 눈을 감으라고 해야 했다.

자동차가 불타고 곳곳에 시체가 널부러져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구의 시체는 있었다. 강우는 시체를 피해 중앙선을 넘어갔다. 교통체증은 없었지만 언제 뭐가 나타날지 몰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강우는 성환에게 계속 눈을 감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결국 마을까지 가는 1시간 동안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하자 정말로 불타는 자동차가 몇 대 있었다. 마을 초입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 고깃집과 토산물 판매점이 늘어서 있어 비교적 유동인구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그곳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시체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스럽기는 해도 다소 의아한 노릇이었다. 강우는 어차피 죽을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각자 집안에서 평화로운 최후를 맞이한 것이리라 희망했다.

시내로 들어선 뒤에도 사람도 시체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끔씩 골목 안쪽을 들여다보면 단독주택이나 4~5층 규모 빌라 건물 앞에 사람의 형체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집안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고 들어가려 했으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결국 명이 다한 모습이었다. 강우는 룸미러로 성환이 계속 눈을 감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성환은 잠이 든 모습이었다.

강우는 이제 시내를 외곽부터 한 바퀴씩 돌기로 했다. 성환을 맡길 만한 생존자가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약 20분 정도 지나 어느 허름한 극장 건물 앞에 자동차끼리 부딪힌 곳을 피해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강우의 진행방향 왼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몰고 가까이 갈수록 커지는 소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지역 초등학교 담벼락 안쪽이었다. 강우가 찾던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아이'들'. 강우는 성환을 깨웠다.

"성환아, 일어나 볼래?"

성환은 자는 척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곧장 눈을 떴다.

"이제 차에서 내려야 할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작은 아빠한테 전화 한 번 해볼까?"

"응"

"그래, 오늘은 좀 받았으면 좋겠다"

강우는 위성전화를 꺼내 한별이 전화기에 함께 건네준 메모지에 있던 위성전화 번호를 눌렀다. 지난 삼주 동안 수백번을 누르며 외우게 된 번호였다. 전화벨이 여섯번째 울려 포기할 때 쯤,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어, 강우야"

지친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는 건 아닌 모양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쪽에도 아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강우는 왈칵 눈물이 났다.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았어"

"미안해. 알겠지만 너무 바빠서. 죽지 않은 사람들을 최대한 모아서 보호하고 남을 공격하면 격리하고 있어"

"그럼 아직 경찰력은 남아있는 거야?"

"하하하"

한별의 웃음소리는 쓸쓸했다. 하지만 굳은 각오가 담긴 소리였다.

"지금 내 시야에 경찰력이라 할 건, 그때 너도 보았던 순찰경관중 한 명 뿐이야. 확실친 않지만 나 아무래도 경찰서장 정도로는 승진한 거 같아"

"하하하, 그래. 아이들을 많이 보호하고 있나 보네"

"응, 감염된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면 우선적으로 공격하거든. 그런데 이제는 어른 자체가 거의 없는 것 같다"

"맞아. 나도 마을로 내려왔는데 여기도 아이들 빼곤 아무도 없어"

"그래"

잠시 둘이 아무 말 없자 성환이 끼여들었다.

"아빠! 나쁜 사람들 많이 잡았어?"

"그래, 성환아!"

"몇 명이나 잡았어?"

"백명!"

"백명이나? 우와!"

"아, 잠깐. 저기 또 나쁜 사람 온다. 아빠 갈게. 성환아 사랑해! 강우야 사랑해! 곧 집에 갈게"

강우는 한별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전화가 끊긴 뒤였다. 강우는 한별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이제는 신호가 가지 않았다. 강우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한별의 전화기가 망가졌다는 뜻이었지만 강우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성환을 보내야 했다.

강우는 성환과 함께 차에서 내려, 초등학교 교문으로 다가갔다. 운동장에 아이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철창으로 된 교문은 닫혀 있었지만 성환 정도의 작은 아이들은 틈새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환아, 저기 친구들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볼래?"

"내 친구 아닌데?"

"이제 쟤네들이 성환이 친구야"

"영주랑 은진이는? 그리고 현상이도 생일에 보기로 했는데?"

"이제 그 친구들은 만나기 어려울 거야. 저기 친구들이랑 잘 지내야 해"

"싫어. 난 영주랑 은진이랑 현상이랑 놀래"

"저 친구들도 착한 애들이야. 같이 놀면 재미있을 거야"

"싫어. 쟤네들은 이상하게 생겼잖아"

강우는 최근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져 운동장 가운데 있는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달리 키가 크거나 덩치가 작은 아이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애들이 어떻게 이상하게 생겼는데?"

"애들마다 다 달라. 어떤 애는 손이 너무 크고 어떤 애는 키가 너무 커. 어떤 애는, 어, 팔이 아예 없는 것 같아. 진짜 이상해"

"성환아, 괜찮아. 원래 사람들은 다 조금씩 다르게 생긴 거야. 또 어떤 사람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르게 생긴 경우도 있어. 그리고"

강우는 갑자기 밀려올라오는 기침에 말을 잠시 멈췄다. 십초도 넘게 기침을 하던 강우를 성환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강우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성환이 너도 지금하고 생긴 게 조금 달라질 수도 있어"

강우는 사장이 마지막으로 해준 말을 떠올렸다.

 

"아드님은 유전자편집을 받으셨죠?"

"네, 맞습니다"

"그럼 아마 아드님은 감염되어도 암에 걸리거나 조직이 괴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 설마. 유전자편집할 때 면역 유전자를 집어넣은 건가요?"

"엄밀하게 면역 유전자는 아닙니다. 그런 걸 만들 능력은 없었어요. 하지만 세포의 돌연변이율이 높아질 경우 그만큼 세포분열과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게 조절을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거죠?"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 결과에 불과한 얘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체실험을 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시뮬레이션이 어떻게 됐는데요?"

"일반적으로는 세포에 무작위 돌연변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날 경우, 암에 걸리거나 조직이 괴사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 속도를 뛰어넘을 정도로 세포분열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암이 더 빨리 커지고, 괴사하는 조직도 쓸데없이 커지는 거 아닌가요"

"저희도 그런 걸 생각했는데,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정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미 아실만한 개념에 빗대어 설명해보자면, 신체 내에서 조직과 기관의 자연선택이 일어나는 거죠"

"뭐라고요?"

"저희 유전자 가위는 세포에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킵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각자 다른 유전형질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럼 유전자편집을 받은 아이들은 저희가 심어놓은 대응 유전자의 영향으로 전체적인 세포분열 속도가 빨라집니다. 각자 다른 형질을 가진 세포들끼리 경쟁적으로 분열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한 세포가 우연히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는데, 이게 조직과 장기의 기능에 영 맞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장기가 기능하지 않는 개체는 허약해지겠죠. 물론 그럼 그 세포가 속해있는 장기도 약해집니다. 모든 세포가 함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 동안 눌려있던 세포에게는 전반적인 세력변화가 새로운 기회가 되는 거죠.

그리고 만약 그 틈을 치고 나간 세포가 조직과 장기의 기능에 도움이 된다면? 개체의 체력이 강화되고 세포들도 함께 세력이 커집니다. 결국 여러 돌연변이 세포들 중 그 세포가 속한 개체를 살리는 쪽의 세포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하지만 어쨌든 돌연변이니만큼, 조직과 장기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게 변해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기가 변형되기는 하지만, 개체는 생존한다는 말이네요"

"네, 게다가 그 장기의 변형은 꼭 한번으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지만, 유전자가위는 아직도 활약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유전자편집이 된 아이가 유전자가위 세균에 감염될 경우, 그 아이의 몸은 끊임없이 변형될 겁니다. 어떤 직원들은 신인류라고 표현하고 싶어 하더군요"

 

그때 강우는 또 사장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성환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성환아, 그러니까 가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 알았지?"

"그럼 나 이제부터 이 학교에 다니는 거야? 끝날 때는 아빠가 데리러 오는 거지?"

그제야 강우는 아이들이 하필이면 초등학교에 모여 있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데리러 올게. 얼른 가봐"

"그런데 나 혼자 들어가? 몇 반인지도 모르는데?"

"응, 일단 저기 친구들에게 가봐. 친구들이 가르쳐줄 거야"

성환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빠 말대로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알겠어. 그럼 아빠, 있다 봐"

"그래, 잘 다녀와"

강우는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이미 어른없는 세상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과연 저들끼리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을 하자면 끝이 없었지만, 이제 강우는 더 걱정할 힘도 없었다. 병이 최종단계에 이르는 것이 느껴졌다. 강우는 흐려진 시야로 성환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강우는 이제 곧 핸들을 돌리고 가속페달을 밟아 어딘가의 담벼락이나 물 속 같은 곳으로 돌진할 생각이었다. 그 전에 강우는, 창문을 열고 마지막 힘으로 소리를 질렀다.

"성환아, 아빠가 사랑해!"

성환이 잠시 뒤돌아 강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성환은 다시 몸을 돌렸다. 계속 새로워지고 있는 그 아이는, 운동장의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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