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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정원의 여자들 - 세 장

2021.04.06 22:2104.06

남자가 노란색 상사화를 지나쳐 걷는다. 그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호흡으로 거칠고 박한 소리가 철없이 날뛴다. 발들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정원은 숨죽여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도 그를 듣지 못한다.

 

Well Life 사의 제품이 저택으로 옮겨진다. 차에서 내려 걸음을 걷는다. 조신하게 또각 거리는 구두와 수수한 옷차림. 검은색 스카프가 얌전히 가슴께에 얹어져 있다. 노인은 그녀를 받아 제 집으로 들였다. 그녀가 살아있는 숨을 쉬고 살아있는 말을 한다.

 

[彼はどこにいますか。]

(그는 어디 있죠?)

 

​노인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え, お待ちください。]

(그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몇 남정네가 여자의 주위로 둘러싸 기기판을 만지작거렸다. 여자는 볼멘소리를 하였다.

 

​[何してるんですか?]

(지금 뭐하시는 거죠?)

 

십 수 번을 두드리던 자판으로 남정네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 쳤다.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통역 문제는 사람을 쓰면 될 텐데요.]

 

​까칠한 말투에 노인은 허리를 숙여 사과하였다.

 

​[면목 없습니다.]

 

​노인이 앞장서 여인을 환대한다. 하녀 안드로이드들이 여자의 옷을 받고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가 드러날 때까지 하녀들은 몇 번이고 옷을 받고 물러나 다시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요?]

 

​클러치 백을 양손으로 곱게 잡고서 턱을 든다. 노인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즐겨 놀았던 곳에 있지요.]

 

​[아.]

 

​여인이 홀을 빙 둘러본다. 홀을 빠져 나가 익숙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난다.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인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시로?]

 

​정원의 문을 연다.

 

​[시로 씨?]

 

​옛날부터 듣기 싫어했던 애칭. 남자를 자주 놀려먹을 때 썼던 별명. 그 이가 자주 정원으로 산책할 때마다 이 별명을 부르면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자신을 안아주었던.

 

​[백 씨?]

 

​그런 기억.

​[주인님을 찾으시나요?]

 

​은이가 요코의 앞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풀밭으로 자란 돼지 풀들을 솎아내던 은이는 요코를 멀뚱히 바라본 채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풀을 솎으려 쭈그린 다리와 지저분한 앞치마.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오는 장갑과 밀짚모자. 은이의 행동에 요코는 얼굴을 구겼다.

 

​[이 저택 안드로이드들은 예의범절도 모르나보지?]

 

​그녀가 당황해한다. 눈을 굴리던 은이의 시스템으로 뒤늦게 그녀의 정보가 전달된다.

 

[아, 죄송합니다.]

 

​은이가 금방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치마를 손에 꼭 쥐고서 차분하게 말한다.

 

​[Well Life 사에서 오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나노하 가문이야.]

 

​요코는 맞은편 안드로이드의 실수를 고쳐주었다. 은이가 그녀의 입을 따라 말을 바꾼다.

 

​[나노하 가문의 아가씨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요코는 은이를 내려다보며 숨을 내었다. 그녀가 가진 인내심이 간신히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올라가있었다. 그녀는 은이를 풀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은이가 공손히 대답을 꺼내어준다.

 

​[아직 정원에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요코가 휙 등을 돌린다. 정원에 홀로 남겨진 은이가 밭으로 주저앉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또각또각.

 

​단색 구두의 소리가 저택을 차분히 돌아다니고 있다. 요코는 허 백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 샅샅이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어머, 흉내는 제법 내었네요.]

 

​요코가 몸을 돌린다.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가 있다.

 

​[사진에서 봤어요, 어릴 적 친구였다죠?]

 

​단정한 차림은 아니나 퍽 얌전하게 다려 입은 긴 치마와 하얀색의 작업용 앞치마. 가위는 없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보아왔었던 안드로이드 중 하나. 요코의 인내심 잔이 막 차고 흘러넘친 참이었다.

 

​[정원 쪽 인형들은 예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나보죠?]

[아님 낡아서 수리를 해야 하는 건가.]

 

​단이가 요코에게로 쏘아붙인다.

 

​[당신 안드로이드죠?]

 

​요코의 클러치 백이 바닥으로 팽겨쳐 진다. 하녀가 달려와 그녀가 내던진 백을 줍는다. 단이는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다.

 

​[칩을 엉뚱한 데에 꼿았나 보군요.]

 

​요코는 애써 웃어보였다. 그 애처로운 모습으로 단이는 더욱 의기양양해진다.

 

​[댁만큼은 아니죠.]

 

​얼굴로 잔뜩 열이 오른 요코는 하녀의 손에 들린 클러치 백을 사납게 낚아채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정원에서 멀뚱히 앉아만 있는 그 년이나, 무례하게 대드는 년이나. 정원용 안드로이드야 얼마든지 구하면 된다. 요코의 숨 가쁜 걸음이 활짝 개방되어 햇빛을 받는 다과실로 멈춘다. 요코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기침을 하였다.

 

​허 백이 고개를 돌려 요코를 본다.

 

​[오랜만이에요, 시로 씨.]

 

​허 백은 여전히 불안했다. 자신을 사랑했고 얼마간 깊게 빠지었던 서로의 밤에서 자신 역시 좋아하였던 그녀를, 허 백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을 줘.]

 

​땀에 식힌 차가운 손가락 마디로 그가 요코를 밀어낸다. 요코는 다가가지 못한다.

 

​[이따 저녁 식사에서 만나자.]

 

​그의 말에 요코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허 씨 집안의 세 남자와 나노하 가문의 여식 하나가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하였다. 칼과 포크질을 하는 접시들 위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허 훈이었다.

 

​[실례.]

 

​훈이 요코에게로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요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의 고요함만큼이나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다. 작은 콩 한쪽을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눈다. 노인이 입을 연다.

 

​[우리 백이가 마음을 바꾸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네.]

 

​[로봇 타령이나 하며 볼멘소리를 어찌나 하던지.]

 

​요코의 포크가 빈 접시를 두드린다.

 

​[그래도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들뜨기는 했었나봅니다.]

 

​노인의 조용한 파안대소에 요코는 짤막히 고개만 끄덕였다.

 

​[잘 먹었습니다.]

 

​허 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인이 웃음을 뚝 멈추고 요코는 하릴없이 접시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백이 그녀의 팔을 찌른다. 그녀가 말한다.

 

​[먼저 가있으세요.]

 

​노인의 시선으로 요코가 미소를 건넨다.

 

​[우리 허 씨 가문의 당주와 할 얘기가 있으니.]

 

​백이 금방 등을 돌려 식당을 나간다. 노인이 입을 닦고서 천천히 단어들을 짚어주었다.

 

​[가문이 아니고 집안입니다.]

[그리고 당주가 아니라 어른이라고 해야 하죠.]

 

​요코는 공손하게 제 문장을 고친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허 씨 집안의 어른과 할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이다마다요.]

 

​요코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분명히 말한다.

 

​[이 저택의 정원용 안드로이드들을 전부 폐기해주세요.]

 

​[아가씨?]

 

​[저도 왔으니, 저택을 새로이 가꾸어야하지 않겠어요?]

 

​요코의 부탁에 노인은 자상한 미소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이다마다요.]

 

​훈은 숨죽여 대화를 듣고는 얼른 정원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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