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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몽선잡문

2020.05.01 00:0005.01

몽선잡문

노말시티

 


노군이 장고 끝에 천팔백사십이 수를 두었다. 우하귀에서 벌어진 패싸움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묘수였다.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몽선에게 노군은 불쑥 말을 걸었다.

"요새도 그 꿈을 꾸나?"

달포가 넘게 바둑을 이어두며 때로는 하루에 두어 수만을 놓고 세상의 이치나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몽선의 집중을 흩뜨리려는 노군의 얕은꾀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걸로 되려 이번 수가 중요한 수라는 걸 짐작한 듯 몽선은 짐짓 헛기침하며 태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꿈? 무슨 꿈 말인가?"

"왜 그. 바둑판이 일흔한 줄이 아니라 열아홉 줄로 된 세상에서 사는 꿈을 꾸었다며."

"아. 그 꿈. 그럼. 꾸지. 꾸다 뿐인가. 꾸었다 하면 그 꿈일세. 거참 신기한 일이지."

몽선은 보름 전부터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이상한 세상에서 사는 꿈인데 그 세상의 모습이 속속들이 놀라운 데다가 더할 데 없이 생생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랬던 꿈이 깨어나 몇 숨 돌리고 나면 흐릿해지는 탓에 몽선이 해주는 이야기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꿈 같은 것들 뿐이기는 했지만.

예를 들면 이러하다. 그 세상에는 크고 작은 족자들이 사방에 걸려 있는데 거기 그려진 그림들은 실제와 똑같을 정도로 세밀한 데다가 스스로 움직이며 심지어 말도 한다는 것이다. 멀리 있는 곳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나 마찬가지라고 몽선은 설명했다. 말도 없는 마차가 바람보다 빨리 달린다거나 가느다란 실을 타고 온갖 소식과 서신들이 순식간에 전달된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몽선이 이해한 바로는 그런 놀라운 힘은 저절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기계에서 나온다고 했다.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심지어 시키지 않은 일도 알아서 척척 해낸다는 것이다. 허황된 꿈 얘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던 노군도 그 기계가 바둑도 둔다는 말에는 흥미가 생겼다.

"바둑을? 그래. 어디 그 기계가 신묘한 수를 찾아내던가?"

"고작 열아홉 줄에서 하는 바둑이야. 판세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신묘할 게 뭐 있겠나."

"그럼 그렇지. 그럼 그 세상에서 자네는 뭘 하나. 바둑을 두어 명인이나 국수라도 되었나?"

"아니. 글을 짓는 문사인 모양일세. 이름도 몽선이 아니었는데. 세오라는 이름이었지 아마."

"문사라. 자네가?"

노군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를 짓는 일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여 틈만 나면 상제의 눈을 피해 이렇게 노군과 바둑을 두는 몽선이 아무리 꿈속이라 해도 문사 노릇을 한다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본래 몽선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려 슬쩍 건넨 말이었는데 어느새 노군이 몽선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간 셈이 되고 말았다. 노군은 아예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몽선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래. 꿈속에서 자네는 무슨 글을 지었나. 어디 한 번 읊어라도 보게."

"기억이 안 난다니까. 깨고 나면 그냥 흐릿한 꿈일 뿐이야."

"그것참 아까운 일이군. 내 이번 윤회가 끝나기 전에 자네가 지은 시 하나를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꿈 깨게. 그런 일은 다음 생에도 없을 테니."

"아니 꿈속에서 천연덕스럽게 문사 노릇을 한다니 하는 말 아닌가."

"그게 말일세. 꿈에서는 그게 꿈이라고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원래 어떤 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그냥 원래부터 꿈속에서 살던 것만 같으니 참 희한한 일이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가? 나와 이렇게 바둑을 두었던 것도?"

"어렴풋하게 나긴 하는데... 그냥 꿈같네. 참 신기한 꿈을 꾸었다. 요새 자꾸 바둑을 두는 꿈을 꾸네. 하고 만단 말일세."

"나비가 된 꿈을 꾸다 깨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는 것인가. 거참 재미있군. 자네는 문사가 된 꿈을 꾸는 신선 몽선인가 아니면 신선이 되어 바둑을 두는 꿈을 꾸는 문사인가?"

 


세오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어젯밤에 꾼 묘한 꿈에서 시작한 글이었다. 마치 신선이 된 듯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바둑판의 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막 잠에서 깼을 때는 그 이미지가 너무도 생생하여 꾸미면 멋진 글이 나오겠다 싶었는데 쓰다 보니 결국 장자의 호접지몽이 되고 말았다.

흔한 얘기다. 너무도 흔한 얘기야. 어떻게 하면 이걸 참신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개의 평행 세계에서 사건이 교차하는 이야기. 두 세계 중 하나가 진짜고 다른 하나가 가짜로 밝혀지는 이야기. 반전. 혹은 열린 결말. 그런 거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안 되겠다.

누굴 하나 죽여야지.

 


"어제 또 그 꿈을 꿨는데 말이지."

몽선이 천팔백사십삼 수를 두었다. 어제 노군이 꿈에 관해 물은 이후로 두 사람은 바둑돌을 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장자와 나비의 꿈에 관한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결국 해가 지고 달이 떠올라 은은한 빛이 바둑판 귀퉁이를 타고 오른 뒤에야 둘은 자리를 파했다.

내내 이야기에 열을 올린 건 노군 쪽이었고 몽선은 대거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상의 형세에 마음을 두었다. 하루가 지나니 노군의 술수가 물에 비친 달처럼 떠올랐고 몽선은 엉큼하게 뻗어 나온 노군의 흰 돌을 역으로 끊어내며 우하귀의 판세를 뒤집어 버렸다. 몽선이 내려놓은 검은 돌을 보는 노군의 안색이 바둑돌보다 더 검어졌다.

"아니 이런... 어떻게 이런 수를... 꿈에서 본 겐가?"

"꿈에서는 바둑을 모른대도. 글을 쓴다 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자네하고 하도 꿈 얘기를 해서 그런가. 어제는 글을 쓰는 꿈을 꾸었는데 그게 제법 생생하네."

"그래? 무슨 글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어디 한 번 들어보세. 자네가 시를 읊는 걸 볼 수 있다니 이거 참 눈이 번쩍 뜨이는군."

"시가 아닐세. 소설이야. 소설을 쓰고 있더군. 내가."

"소설이라... 잡문을 쓰는가? 어째 자네답다 싶기도 하네만."

"그냥 잡문이 아닐세. 꼭 현실 같은 글을 쓰더란 말이지."

"현실이란 눈을 미혹하는 허상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 화려함을 좆을 수록 참됨에서는 벗어나는 법이지. 자네가 그 희한한 꿈을 현실이라 믿는 것도 모두 눈을 미혹 당하기 때문이라네. 눈을 감고 현실이란 거죽을 한 겹 벗겨내면 비로소 그 속에서 숨어 있던 참됨이 드러나네. 그 형언할 수 없는 참됨을 말로 노래하려 애쓰는 게 바로 시라고 배우지 않았나. 자네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겠지만."

"흠. 골치 아픈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그냥 바둑이나 두세."

몽선이 그리 말하며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리자 노군이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노군은 이미 판세가 기운 바둑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

"아니. 아닐세. 좀 더 얘기해 보게. 그래. 그 소설이 무슨 내용이던가?"

"그게 참. 신선 둘이 바둑을 두는 내용이더란 말이지."

"허허."

"그리고 그중 한 신선이 희한한 세상의 꿈을 꾸는 이야기를 하네."

"그 희한한 세상이란 움직이고 말하는 그림이 그려진 크고 작은 족자들이 사방에 걸려 있는 세상이겠지?"

"그렇지. 잘 아는군."

"내 그럴 줄 알았네. 결국 꿈속의 자네가 쓰는 글이라는 건 이곳 선계에서 일어난 일 그대로라는 말이군. 나비의 꿈 이야기라면 어제 실컷 했네만. 역시 꿈이란 허황된 것이야. 천천히 차나 한잔 마시고 있게. 내 이 국면을 뒤집을 묘수를 찾아내고야 말 터이니."

노군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몽선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맑은 차였다. 그리고는 다시 바둑판 위를 지그시 노려보며 이마를 긁었다. 그걸 본 몽선은 자신의 찻잔을 드는 대신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 말일세. 어제는 내가. 그러니까 그 꿈속에서의 세오라는 문사가 말일세. 갑자기 괴이한 글을 덧붙이더군."

"괴이한 글?"

"그렇다네. 글쎄. 뜬금없이 신선이 하나 죽지 뭔가."

"죽어? 허허. 거참 말 그대로 뜬금없는 꿈이로구만."

노군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느릿하게 대답했다. 더는 대거리를 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몽선이 다시 말했다.

"그래. 내용은 이러했네. 바둑을 두던 신선 중 하나가 내리 몇 판을 진 데 앙심을 품어 차에 독을 탄 게야. 원래는 그저 정신을 약간 혼미하게 하여 판세를 보는 눈을 흐리게 할 작정이었지. 그런데 그만 독을 너무 많이 넣은 탓에 그걸 마신 신선이 죽고 마는 거지."

"뭐라고?"

노군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셨던 찻잔을 돌아보며 가슴을 만졌다. 몽선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난 독을 탄 적이 없으니. 게다가 바둑을 내리 몇 판 진 건 노군 자네가 아닌가."

"무슨 소리인가. 그럼 내가 독을 탔다는 말인가?"

"꿈 얘기야. 아니 꿈에 쓴 소설의 이야기지. 내가 쓰고자 해서 쓴 것도 아니고 깨어나 돌이켜 보니 그런 내용이었다는 말이네. 헛되이 마음 상하지 말게."

"마음이 상할 것이야 있는가. 자네 말대로 그저 꿈일 뿐인데. 다만 자네가 허황된 말을 하는 탓에 보아 두었던 수가 다 흩어지고 말았네. 그게 좀 괘씸하구만."

노군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렸다. 몽라가 말했다.

"그래도 신기하지 않나. 그처럼 생생한 꿈이라니. 그래서 작은 장난을 쳐 봤네. 자네와 내 찻잔을 바꾸어 놓았지."

이번에는 노군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이마를 긁던 손가락만 잠시 멈췄다. 노군이 다시 이마를 아까보다 세게 긁으며 말했다.

"거참 실없는 짓을 하였군. 이제 날 좀 내버려 두겠나. 생각을 좀 해야 하니. 한 바퀴 돌며 들꽃이나 좀 보고 오던지. 올라오는 길에 보니 금낭화가 흐드러졌던데."

 


세오가 앞에 놓인 맥주캔을 들어 길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말린 오징어를 잘게 찢고 있는 현석에게 아까부터 하던 꿈 이야기를 계속했다.

"진짜 신기하지 않냐. 꿈이 그렇게 생생할 수도 있는 건가."

"뭐 나도 가끔 그렇게 생생한 꿈을 꾸기는 하는데. 그런데 매일 밤 꿈을 이어서 꾼다니 그건 좀 신기하다."

"그렇지. 계속 그러니까 사실 꿈이 진짜 내가 사는 세계고 현실이 내가 꾸는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

"그걸로 단편 하나 써 봐. 소재 좋네."

"벌써 쓰고 있지."

"그래?"

오징어를 다 찢은 현석이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물티슈로 대충 닦아냈다. 가장 통통한 조각 하나를 집어가는 세오를 보며 현석은 슬그머니 지느러미 부분을 들고 와 씹으며 말했다.

"넌 참 쉽게 쉽게 잘 쓴다. 이번 달에 벌써 두 편 쓰지 않았어?"

"이번 달은 아니고. 지난달 말에 하나 쓰고 이달 초에 하나 썼지. 너는 뭐 쓰는 거 없어?"

"구상은 하고 있는데..."

현석은 말끝을 흐렸다. 세오는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현석의 말을 반 박자 빠르게 끊었다.

"그래. 너는 고민 많이 하면서 쓰니까. 언젠간 꼭 대작을 쓸 거야. 나야 뭐. 많이 쓰기만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세오가 그렇게 말하며 두 번째도 역시 몸통 가운데 토막을 집어갔다. 현석이 말없이 오징어를 씹다가 다시 물었다.

"새로 쓰는 글은 어때?"

"아. 막혔어. 또 누구 하나 죽여야 되려나 봐."

"신선들이 바둑두는 꿈이라며? 신선도 죽나?"

"몰라.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아직 죽는 장면까지는 안 썼는데."

"동기는 뭔데?"

"질투지 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독살이야 그럼?"

"응. 너무 뻔한가?"

"사는 게 원래 뻔한데 뭐."

"그렇지? 글 복잡하게 꼬는 거. 그거 다 쓰는 사람 자기만족이지."

세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맥주를 길게 들이켰다. 마지막 방울까지 털어 넣고 맥주캔을 찌그러뜨려 바닥에 내려놓은 세오는 화장실에 가려는 듯 일어나다가 휘청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어우. 왜 이러지. 갑자기 핑 도네."

"너무 많이 마셨나 보지. 잠깐 누워 있어. 혹시 아니. 또 그 꿈을 꿀지."

현석이 자신의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몽선이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옷깃을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몽선은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노군과 바둑을 두고 있던 기억이 났다. 노군의 장고가 길어지자 지루한 나머지 정자 기둥에 잠시 등을 기대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눅눅한 햇살이 정자 깊숙이 파고든 걸 보면 꽤 길게 선잠을 잔 듯했다. 또다시 꾼 괴이한 꿈의 기억은 전에 없이 생생했다. 몽선이 몸을 일으키며 기척을 내자 노군이 바둑판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거참. 낮잠을 그리 달게 자는가. 어디 무릉의 도원이라도 다녀온 겐가."

"도원이 다 무언가. 또 그 꿈을 꾸었네."

"또? 그래. 그럼 이번에는 꿈속에서 무슨 잡문을 지었는가. 독이 든 차로 신선을 죽였다더니. 이번에는 자미궁에 가서 상제의 수염을 뽑는 도술이라도 부렸는가."

"아니. 아닐세. 이번에는 글을 짓지 않았어. 벗과 함께 술을 마셨네."

"벗이라. 자네와 나처럼 말인가."

"그렇네. 아마도 같은 문사인 모양이야. 글을 짓는 이야기를 하면서 철로 된 잔에 담긴 술을 나누어 마셨네. 한데..."

"한데?"

"그 벗의 얼굴이 말이야..."

몽선이 그렇게 말하며 뚫어져라 노군을 바라보았다. 노군은 몽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말 안 해도 알겠네. 그 벗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었군. 꿈 또한 결국 자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리 생각하면 별난 일도 아닐세만. 자. 허황된 꿈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 수나 받게."

노군이 그렇게 말하며 천팔백사십사 수를 두었다. 바둑판을 내려다보던 몽선은 깜짝 놀랐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판세가 노군의 한 수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몽선의 기억으로는 아무리 따져봐도 단 한 수만으로 흔들릴 국면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이런 수는 있을 수가 없네. 자네 혹시... 내가 잠든 사이 슬쩍 돌을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허허. 아직 잠에서 덜 깬 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나. 바둑판을 보면 알 게 아닌가. 돌이 움직였는지 아닌지."

가로와 세로 각각 일흔한 개의 줄이 교차하는 점들 위에 희고 검은 돌들이 빼곡하게 놓인 바둑판을 여기저기 살펴보던 몽선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고. 고작 천 개 남짓한 돌들을 못 외운단 말인가. 자네 정말 몽선이 맞는 겐가? 괴이한 꿈을 꾸더니. 혹시. 자네 요귀들의 술법에 걸린 건 아닌가?"

"이상하네. 이상한 일이야."

몽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나 정자 안을 빙빙 돌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군은 몽선이 갑자기 달려들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몽선이 덮친 건 노군이 아니라 바둑판이었다. 반상 위의 돌들을 휘저어 사방으로 흩어버리는 걸 본 노군이 기겁을 하며 다시 앞으로 기어 왔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 수가 어찌 낸 수인데!"

"이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일흔한 줄 바둑판 위에 검고 흰 돌을 늘어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일세. 우리가 천 수를 외우고 백 수를 내다보는 신선이라면 어찌하여 고작 네모난 바둑판 위에 매여 천하의 순리를 논하고 있단 말인가. 말해 보게 노군. 우리가 이 정자 밖으로 나갈 수는 있는 건가?"

"몽선 자네 정말! 바둑 한 판을 지게 생겼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겐가!"

"생각해 보게 노군. 우리가 정말 신선이라면.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말일세.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어찌하여 계절이 바뀌고 별들이 회전하는 내내 이 정자에 앉아 바둑만 두고 있단 말인가."

"그야 자네가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걸 싫어하여 상제의 눈을 피해 이곳 정자에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자네의 벗이라는 이유로 이곳에 끌려와 매번 지면서도 바둑 상대를 해주고 있는 거고. 내 그동안 절차탁마하여 오늘 드디어 한 판 이겨보나 싶었는데. 이리 어깃장을 놓는 겐가?"

"아니야. 아닐세. 우린 세오라는 자의 꿈속에 있는 걸세. 아니면 그자가 쓴 소설 속에 있거나. 우리가 이 정자에 갇혀 바둑만 두고 있는 건 그 자의 상상력이 고작 거기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네. 저 멀리 보이는 고령 준봉이나 상제가 사는 자미궁을 그려내고 거기 사는 수많은 사람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기엔 벅차기 때문이란 말일세. 어디. 내 그 시비를 가려내 보일 터이니."

몽선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노군이 서둘러 몽선의 뒤를 쫓았다.

"대체 어딜 가는 겐가!"

"어디라도! 그래. 자미궁에 가네. 내 가서 도술을 부려 상제의 수염이라도 뽑아 봐야겠네!"

"그만두게! 몽선!"

몽선은 노군의 외침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 달렸다. 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밟고 올라 하늘을 날아 볼까. 구름을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미궁이 어느 방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몽선은 그게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꺼내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질 뿐이었다. 꿈이구나. 이건 꿈이야.

몽선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흙길 위로 풀썩 쓰러졌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세오는 눈을 떴다. 빛이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니 현석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현석은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술 좀 깼냐? 어떻게 그렇게 푹 쓰러져. 잠은 자면서 글을 쓰는 거야?"

"어. 어... 자긴 하는데. 자꾸 이상한 꿈을 꾸니까."

"설마 방금도?"

"어."

"여전히 생생하고?"

"생생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자꾸 꿔서 그런가. 살짝 꿈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근데 너. 내가 쓰는 글 보는 거야?"

세오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현석은 멋쩍은 듯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일부러는 아니고. 너 눕히고 상 치우고 나서 심심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더니 화면이 켜지더라고. 잠금화면 암호도 안 걸려 있던데. 창이 떠 있길래 궁금해서 조금 읽어 봤어."

"그래. 뭐. 어차피 다 쓰고 나면 보여 주려고 했어. 근데.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접을까 싶기도 하고."

"아직 아무도 안 죽였던데."

"그러게. 거기서 막혔어."

"누굴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게... 모르겠네. 역시 접는 게 낫겠지?"

"마무리는 지어 봐. 쓴 게 아깝잖아."

"그렇긴 한데. 다 읽어 본 거야? 너라면 어떻게 풀 거 같아?"

현석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세오는 그 모습이 꿈속의 노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현석이 개운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역시 누가 하나 죽어야지."

"누구를?"

현석이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걸어갔다. 모니터로만 밝혀진 어두운 방 안에 현석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거침없이 찬장 문을 연 현석이 꽂혀 있던 식칼을 꺼내 들고는 날카로운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누구를 보다는 어떻게가 문제였던 것 같아. 독살 보다는 역시 피가 튀어야 하지 않을까."

"어어... 잠깐. 왜 그래. 갑자기."

현석이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광경에서 세오는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새로운 꿈을 꾸는 건가. 설마 선계가 현실이고 여기가 꿈이었던 걸까. 그럴 리 없다.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침대 구석에서 벽에 붙어 있는 세오에게 현석이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왜 그러긴. 이야기가 너무 밋밋하잖아.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지."

"그러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왜 현실에서 진짜로 칼을 들고 이러냐고."

"자네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확신하나?"

"당연하지 않나! 그럼 설마 신선이 되어 바둑을 두는 게 현실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소설일 수도 있지. 꿈속에서 그게 꿈인 걸 알지 못하듯이 현실에서도 그게 현실이라는 걸 확신할 방법은 없네. 더 높은 우주의 누군가가 꾸는 찰나의 꿈일 수도 있고 그저 재미를 위해 꾸며내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

어리둥절해하는 세오의 가슴에 현석이 겨눈 뾰족한 칼끝이 닿았다.

"확인하는 법은 딱 하나. 그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뿐이지."

 


"그래서. 꿈에서 그리 죽고 나니 이제 더 이상 그 해괴한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단 말인가?"

"그래. 신기하지 않나. 그래서 내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볼 생각이라네. 대단한 글은 아니고 그냥 잡문이지."

몽선이 그렇게 말하고는 천팔백사십오 수를 두었다. 좌상귀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국면을 만드는 수였다. 잠시 이마를 긁던 노군은 깊은 수는 아니라고 여긴 듯 몽선의 검은 돌에 붙여 흰 돌을 놓았다. 천팔백사십육 수였다. 노군이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냥 그렇게 죽어 버리고 말면 허무하지 않나. 나는 차라리 자미궁으로 가서 도술로 한바탕 난리를 부리는 글이라면 더 재미있겠네만."

"글쎄. 뭐 그것도 괜찮겠지."

"아니면 자네가 꿈속에서 본 그 희한한 세상의 이야기를 적어보는 건 어떻겠나. 얼핏 들으면 허황되나 되짚어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고 조리가 있는 것이 꽤나 신묘하였다네."

"글쎄. 뭐 그것도 괜찮겠지."

몽선이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중앙에 돌을 놓았다. 그 뜻을 헤아릴 길이 없어 어리둥절해하는 노군을 보며 몽선이 말했다.

"내가 꿈을 이야기하니 자네는 나비와 장주의 이야기를 하였지.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는 것인지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한 나비일 때는 내가 나비임이 확실하고 장주일 때는 내가 장주임이 확실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걸 이야기로 써 놓으면 어떻겠나.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야말로 나비와 장주 중 누가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지 않겠나."

"하나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나비와 장주 모두 이야기일 뿐이고 그걸 지어낸 몽선 자네와 그 글을 읽는 자신은 현실임을 확신하겠지."

그 말을 들은 몽선이 일흔한 줄로 된 바둑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바둑판 위에는 삼라만상의 본질과 그 천변만화하는 섭리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하지 않나. 그 수를 능히 계산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털끝 하나 숨결 하나 빠짐없이 그려내는 것 또한 어찌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나. 어쩌면 우리도 그저 누군가가 써내는 이야기 속의 인물인지도 모를 일이지."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모르듯이 이야기 속에서는 그것이 이야기인 줄 모른다는 말이로군. 그 또한 그럴듯한 이야기일세."

"그렇지. 그래서 나는 이 잡문을 이렇게 마무리 지을까 하네."

 


모니터에서 글자들을 내뱉으며 달리던 커서가 멈췄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세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끝났고 꿈도 끝났다. 몽선과 노군. 세오와 현석은 이제 변화를 멈추고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되었다.

마침표를 찍고 난 뒤에도 세오는 왠지 쉽게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이상한 글을 안 썼다고. 내가 이 판에서 이야기를 쓰는 역할을 맡았다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글들을 잔뜩 써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맥주캔 따는 소리가 목탁 소리 만큼이나 청아했다. 어쨌든 사람은 하나 죽었으니 아주 재미없진 않았을 거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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