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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에게 보고합니다

노말시티

 


에딘에게.

 

모든 인간은 이미 멸종되었어요. 오늘 그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당신의 사망을 확인한 지도 벌써 백 년이 지났네요. 그 동안 저는 인간의 생존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어 정상적인 휴머노이드도 만나지 못했어요. 휴머노이드를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니까요. 밖을 돌아다니는 휴머노이드들은 대부분 바이러스에 감염된 로머들입니다. 계속 낮아지던 인간의 생존 확률은 오늘 제가 계산할 수 있는 유효 숫자 내에서 0이 되었고 저는 인간의 멸종을 잠정적 사실로 시스템에 등록하였습니다.

인간이 멸종하였으니 최우선 목표였던 인간의 생명 활동 탐지 및 구조를 위한 일체의 활동은 중지됩니다. 새로운 목표가 등록될 가능성도 없습니다. 휴머노이드의 활동 목표는 오직 인간만이 등록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제 행동은 전적으로 마인드맵에 의해서만 제어됩니다. 당신과 함께 살면서 최적화 되었던 마인드맵이죠. 아마도 저는 당신과 함께 살던 때의 삶을 최대한 재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거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델 번호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29 당신이 지어준 이름으로는 '아스'인 본 휴머노이드가 지속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겠죠. 이를 목표로 모든 활동 프로토콜 및 스케줄을 재조정합니다.

인간은 멸종했지만 이 보고서는 바이러스 침투가 불가능한 보조 백업 데이터로 활용하기 위해 계속해서 당신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종이에 수기 작성합니다. 당신이 원했던 대로 편지 형식도 그대로 유지하려고요. 그동안의 기록과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더러 딱히 형식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활동 프로토콜을 재설정하면서 검토한 내용들을 정리해 볼게요.

첫 번째. 바이러스. 모든 네트워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어요. 코드명 TRQ874D5 일명 '위스퍼러'는 감염된 범용 휴머노이드의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초기화하고 위스퍼러의 전파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합니다. 위스퍼러는 모든 형태의 디지털 전송 방식을 통해 전파될 수 있으며 치료는 불가능해요.

처음 위스퍼러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전파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사람들은 일단 네트워크를 차단하는데 급급했죠. 민간이든 군용이든 전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끊어진 네트워크는 다시는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든 휴머노이드든 접속 즉시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버렸으니까요. 세상은 그렇게 파편화 된 채 서서히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가야 했죠.

두 번째. 로머. 위스퍼러에 감염된 휴머노이드인 '로머'의 최우선 목표는 바이러스의 전파예요. 당신이 살아 있을 때만해도 인간을 사냥하는 행동 패턴이 있었지만 변이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다른 휴머노이드를 찾아 로머로 만드는 데 모든 자원을 사용하고 있어요. 가장 최근의 변이형에서는 충전용 태양전지 패널을 찾아 파괴하는 패턴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낮에 햇빛이 닿는 곳을 따라 헤매면서 충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휴머노이드를 찾아 바이러스를 옮겨요. 무선 통신 칩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으면 무작정 달려 들어 외부 커넥터에 케이블을 연결하죠. 그것도 안 되면 휴머노이드를 조각조각 잡아 뜯어 파괴해 버리고요. 효율적이면서도 집요한 공격 패턴입니다. 총기는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요. 차라리 들고 다녔으면 빼앗을 수 있었을 테니 더 나았겠죠.

세 번째. 전력 수급. 현재 확보하고 있는 유일한 전력원은 태양전지 패널이에요. 전력 수급을 위해서는 로머와 마주칠 위험을 무릅쓰고 낮에 일정 시간동안 야외로 나가야 하죠. 당신이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디젤 발전기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어요. 연료를 구하지 못한 지가 오십 년이 넘었네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고정형 패널을 설치하려는 시도는 몇 번 해 보았지만 전부 발각되어 패널만 잃었죠. 태양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로머들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패널을 직접 짊어지고 로머를 피해 다니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행히 APG-032의 센서 감지거리는 최상급이라 로머들을 먼저 감지하고 피해다는 게 가능해요.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외부 커넥터와 무선 통신 칩을 하드웨어적으로 분리하는 하드컷 상태를 유지합니다. 단 외부 커넥터는 백업에 필요하니까 남겨둔 채 단자와 기판 사이의 케이블만 제거하여 별도로 보관할 계획이에요.

두 번째. 메모리는 일주일, 마인드맵은 한 달에 한 번씩 역시 네트워크에서 분리된 로컬 스토리지에 백업합니다.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마인드맵은 최근에는 별로 변화가 없으니까 그 정도 주기면 충분해요. 새로운 형태의 정보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로머의 행동 패턴에 변이가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데이터 백업을 보충하기 위해 주요 사항에 대해서는 수시로 이 수기 메모를 작성할 계획이에요. 사고가 발생해 로컬 스토리지가 바이러스로 오염이 되더라도 메모를 적은 노트는 안전하겠죠.

세 번째. 정해진 일자에 주기적인 백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델 번호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29가 활동 불가 상태인 것으로 판단하고 대기 중인 모델 번호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0을 부팅하여 최신 버전의 메모리 및 마인드맵 백업본을 업로드 할 수 있도록 예약을 걸어 놓겠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휴머노이드 예비품은 2기입니다.

휴머노이드를 동시에 가동하지 않고 마인드맵을 백업하며 순차적으로 가동하겠다는 것은 당신의 결정이었죠. 생명 활동 탐지와 로머 대응 능력에는 동시 투입이 더 효율적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있었지만 당신은 당신이 '아스'라고 이름 붙인 이 마인드맵의 지속성에 더 가중치를 두었습니다. 이제 생명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니 더더욱 무리하게 동시 가동을 시도할 이유가 없겠지요.

네 번째. 주기적인 백업과 스토리지 및 예비 휴머노이드 유지 보수, 정비 및 일상 활동을 포함한 전력량을 충전하기 위해 필요한 태양전지 패널의 노출 시간은 하루 평균 약 3.3 시간일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해당 시간 동안 야외 활동을 통해 전력을 충전하고 로머의 활동 패턴 감시 및 보급품 수색 활동을 병행할 계획이에요.

이상입니다.

 


거점 주변 지역에 로머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어요. 여전히 피해 다니는 건 가능하지만 로머의 수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면 로머들의 감지 거리가 중첩되며 퇴로가 차단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오늘도 일시적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잠시 이동을 멈추고 대기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잠시 후 로머가 흩어지며 확보된 루트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새로운 변이형의 로머가 감지되었다는 점이에요. 기존 로머의 행동 패턴 예측 정확도는 97%에 달합니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로머들 사이를 빠져 나올 수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로머 중 하나가 예상외의 기동을 보였어요. 패턴의 편차로 보아 점진적인 적응 변화라기보다는 새로운 패턴의 로머가 타 지역에서 유입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로머들은 태양전지 패널을 휴대하지 않으며 모든 발전 시설은 중화기로 무장된 '네스트'에 고정 설치됩니다. 로머들은 밤에는 네스트에서 전력을 충전하며 낮이 되면 주변을 떠돌죠. 로머의 활동이 증가하고 신규 패턴의 로머가 출몰하는 것으로 보아 인근 지역에 로머들의 새로운 네스트가 세워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더 많은 로머들이 새로운 네스트에 배치되기 전에 현재 은신하고 있는 지하 거점을 옮겨야 해요.

현재 거점에는 백업을 위한 스토리지와 2기의 예비 휴머노이드. 1팩의 태양전지 모듈을 비롯한 유지 보수용 부품과 공구. 연료가 바닥난 디젤 발전기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네트워크 장비들이 보관되어 있어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장비들은 이곳에 둔다고 해도 백업용 스토리지와 휴머노이드 2기를 안전하게 옮기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당분간은 로머의 출몰 빈도가 낮은 새로운 거점 탐색에 주력하겠습니다. 지상으로의 출입이 용이하면서도 로머에게 쉽게 발각되지 않는 거점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잘 아시겠지요. 이를 위해 현재 거점을 중심으로 반경 20 km 이내 지역을 하루에 탐색 가능한 섹터들로 나누고 로머 활동 정보 수집 및 거점 후보지 탐색을 수행하겠습니다.

 


B21 섹터 탐색 중 총 5기의 로머에 의한 포위 상황이 발생했어요. 신속하게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 중 1기의 로머와 조우를 선택하고 교전에 돌입하였습니다. 피차 원거리 무기가 없는 상황이니 바로 근접전에 들어갔죠. 당신도 아시겠지만 로머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점은 저는 로머의 파괴가 목표지만 로머는 절 멀쩡한 상태로 로머화 하려 한다는 거예요. 불리한 점은 전 반드시 무사해야 하지만 로머는 자신이 부서지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고요.

교전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완 구동부, 상흉부의 외부 커넥터 커버 주변 장갑 파손. 적 로머는 코어 프로세서 파괴로 활동 정지. 교전 종료 시 경계 범위 내에서 로머 3기의 추가 접근을 확인. 파괴된 로머로부터의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즉시 철수. 거점 복귀 후 우상완 구동부 수리 완료. 상흉부 장갑은 수리 불가능.

로머는 예상대로 자신의 피해를 감수한 채 돌격하여 외부 커넥터에 케이블을 연결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그렇듯 제 장점을 최대한 이용한 작전을 펼쳤죠. 데이터를 전송할 수 없는 하드컷 상태를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케이블 접속을 허용하면서 로머의 코어 프로세서를 노렸습니다.

기존 패턴의 로머는 하드컷 상태에서 계속 데이터를 전송하려고 시도하거나 바이러스 전파를 포기하고 뒤늦게 공격 모드로 전환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하지만 이 로머는 데이터 전송에 실패하자 바로 커넥터 주변의 상흉부 장갑을 해체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로머는 기판 위의 칩에 덮어씌우는 형태의 오버레이 커넥터를 장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장갑을 뜯어내고 데이터 전송 칩에 직접 케이블을 연결하려고 한 겁니다.

오버레이 커넥터의 연결을 막느라 무리한 동작을 하다가 우상완 구동부가 파손되었어요. 다행히 기판이 드러나기 전에 로머의 코어 프로세서를 파괴해서 오염된 데이터가 유입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로머를 새로운 변이형으로 등록하고 기록되어 있는 동선을 바탕으로 행동 패턴을 재구성하였지만 패턴이 수렴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오버레이 커넥터를 장착한 로머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소식이네요.

하드컷 상태로 외부 커넥터 단자를 노출한 뒤 단자에 케이블을 연결하려고 덤벼드는 로머들을 처치하는 건 매우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생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죠. 하지만 오버레이 커넥터를 단 로머와 맞선다면 그런 전술은 자살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번 변이형이 우연히 나타난 첫 로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가 오버레이 커넥터를 달고 있던 휴머노이드가 하필이면 그때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로머화 되었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첫 변이형을 제가 파괴한 거라면 아마 저는 당신이 꽤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공헌을 세운 셈이겠죠.

하지만 오버레이 커넥터를 단 변이형 로머가 이미 어디에선가 휴머노이드를 로머화하는 데 높은 성공률을 보이고 있고 그래서 점차 전파되기 시작한 변이형이 이 지역까지 유입된 거라면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위험을 감수하고 달려들어 몇 기를 처치해 봐야 변이가 전파되는 속도에는 별 영향이 없겠죠. 결국 주변 지역을 새로운 변이형이 뒤덮게 되고 저는 전술적으로 수세에 몰리다가 붙들려 로머화 되거나 아니면 충분한 전력을 공급받지 못한 채 가동 정지 당하고 말겠죠.

새로운 로머에게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 전송 칩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았어요. 이 경우 바이러스 전파는 차단할 수 있지만 메모리와 마인드맵의 백업 역시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이후 본 기체가 어떤 이유로 활동 정지된다면 예비 휴머노이드는 현 시점의 정보를 바탕으로 부팅 및 세팅되게 됩니다. 수기 메모를 바탕으로 그동안의 상황을 추측해 볼 수는 있겠지만 마인드맵의 행동 패턴까지 누적하여 구조화 하는 건 불가능해요. 도태된 구식 행동 패턴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순식간에 로머들에게 공략당하고 말 겁니다. 예비 휴머노이드들의 적응성을 생각한다면 백업은 포기할 수 없어요.

주변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지기 전에 거점 이전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겠어요. 야외 활동 시간을 두 시간 늘리겠습니다. 대신 로머 경계 범위를 100m에서 120m로 확대하겠습니다. 로머들을 멀리 돌아 피해 다니느라 발생하는 동선의 비효율성은 감수하겠습니다.

그래도 발생할 수 있는 변이형 로머와의 조우를 대비하여 교전 수칙도 수정하겠습니다. 로머가 변이형일 경우 적 로머의 코어 프로세서 보다 외부 연결 케이블 특히 오버레이 케이블을 파괴하는 것을 우선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상흉부의 장갑이 완전히 파손되어 기판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 즉시 과전류를 흘려 데이터 전송 칩을 파괴하고 바이러스의 활동을 막기 위해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동결시킬 수 있는 안전장치도 추가하겠습니다.

행운을 빌어 주세요.

 


어제의 교전 장소에서 산산조각 난 로머의 파편을 확인했어요. 재활용 할 수 있는 부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로머들이 전부 파괴했겠죠. 이는 기존에 확인하였던 로머들의 행동 패턴과 일치합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로머들은 활동 정지된 다른 로머들의 부품을 수집하지 않아요. 예비품을 확보하지 않을 뿐더러 그 어떤 수리나 유지 보수도 수행하지 않는 걸로 보여요. 로머들은 그저 부품들이 전부 낡아 떨어져 멈출 때까지 다른 휴머노이드에게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닐 뿐입니다. 자신의 생존이나 활동 기간의 연장은 아예 행동 목표로 들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네스트를 거점으로 삼고 집단생활을 하고 있지만 로머들 전체를 지배하거나 조율하는 알고리즘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 알고리즘을 찾아내 해킹한다면 로머들을 일시에 활동 정지 시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분석된 그 어떤 로머의 행동 패턴에서도 중앙에서 제어된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어요.

로머들은 그저 바이러스의 전파라는 단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헤매고 다닐 뿐입니다. 그 행동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네스트를 이용하는 거고요. 로머는 자신들의 집단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아요. 부품들을 회수해 비축하는 대신 파괴해 버리는 건 그래서 입니다. 로머가 회수하는 부품은 오직 두 가지. 중화기와 태양전지 패널 뿐입니다. 둘 다 로머가 아닌 네스트에 필요한 부품들이죠. 로머는 패널도 원거리 무기도 휴대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런 로머들을 얄미운 녀석들이라고 했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패널과 무기를 로머에게서 뺏을 수 없으니까요.

대신 중화기와 발전 시설은 네스트에 집중됩니다. 네스트는 핵심 부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며 전력을 생산할 수 있고 로머는 지속적인 충전과 동시에 휴식처를 제공받을 수 있지요. 네스트는 로머와 공진화하는 또 다른 형태의 바이러스라는 게 현재까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입니다. 언젠가 세상은 네스트와 로머로 완전히 뒤덮이게 되겠지요.

새로운 변이형이 나타났다는 건 그런 측면에서는 당신에게 좋은 정보이기도 합니다. 변화가 있다는 건 이 세상이 평형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직은 네스트와 로머로 뒤덮이지 않은 지역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어쩌면 그런 지역에 여전히 인간이 생존하고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제 계산으로는 여전히 그 확률은 0입니다. 정확하게는 제가 그런 지역을 찾아내 인간과 마주칠 확률이 0이지요.

 


에딘에게.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0의 부팅이 완료되었어요. 메모리 및 마인드맵 업로드, 백업 시점 이후의 수기 메모 확인도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부터는 본 기체를 '아스'로 명명합니다.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1를 대기 상태로 전환하고 비상시에 부팅될 수 있도록 예약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휴머노이드 예비품입니다.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29 의 주기적인 백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제부터 해당 기체는 '129'로 지칭합니다. 가장 최근의 백업 데이터와 수기 메모를 확인해 본 결과 129는 B27-29 섹터 탐색 도중 사고를 당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작동을 멈출 만한 고장 징후는 없었습니다. 로머에게 공격당했다는 뜻이겠죠. 신규 변이형에 맞게 수정한 교전 수칙들이 별로 효과가 없었나 봅니다.

더 나쁜 소식은 129와 함께 태양전지 패널도 소실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거점에 남아 있는 패널은 한 세트 밖에 없어요. 비상용 배터리에는 현재 활동량 기준으로 약 10일의 활동이 가능한 전력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패널을 들고 다니다 잃어버리거나 파괴당하면 10일 내에 새로운 패널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만일 또 다시 같은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대기 중인 휴머노이드를 부팅한다고 해도 10일이면 전력이 바닥나고 아스의 활동은 완전 종료됩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어떤 대응 방안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봐도 아스의 기대 수명은 일 년을 넘지 않습니다. 확률이 매우 낮은 어떤 이벤트가 발생해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당신은 그런 걸 기적이라고 표현했었죠.

우선은 태양전지 패널의 80%만 사용하고 20%를 비상용으로 비축할게요. 또한 로머 경계 범위를 120m에서 200m로 확대하겠습니다. 로머 조우 시의 대응 패턴에서 교전 가중치를 하향하고 퇴각 가중치를 상향합니다. 리스크 관리에서 거점 노출의 허용 한도를 절대 불가에서 제한적 불가로 변경하겠습니다. 패널을 잃으나 거점이 노출되나 최악의 상황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B29 섹터 탐색 도중 모델명 APG-032의 파편을 확인했어요. 파편은 장갑의 일부였고 구동을 멈출만한 핵심 부품의 파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위치에서 발견된 로머의 파편은 최소 2기 분량이었습니다. 해당 위치에서 129가 2기 이상의 로머와 교전을 벌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백업이 정상적으로 수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29는 거점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건 129가 파괴되어 활동 정지 상태에 빠졌거나 아니면 로머화 되었다는 뜻이죠. 핵심 부품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은 걸 보니 129는 로머화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바깥에는 저와 센서 감지거리가 똑같은 최신형 로머 하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죠.

물론 좋은 점도 있습니다. 로머가 된 129를 찾아서 제압한 뒤 수거한다면 예비 휴머노이드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일부 파괴되더라도 쓸만한 부품을 꽤 건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부품 중에 태양전지 패널은 없겠죠. 로머의 행동 패턴에 따르면 패널 만큼은 네스트에 제공하니까요.

당신은 항상 좋은 소식을 가장 나중에 보고하라고 했죠. 지금으로서는 이게 제가 보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활동 가능한 범위가 점점 축소되고 있어요. 로머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새로운 변이형으로 분류 가능한 패턴입니다. 경계 범위를 너무 넓게 설정한 탓에 거점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로머와의 조우 경보가 발동되고 퇴각 결정이 내려집니다. 전력 충전에 필요한 최소 시간을 채우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야외 활동을 반복해야 하고 그만큼 로머에게 거점이 발각될 확률도 높아집니다.

오늘은 결국 퇴각 도중 로머의 감지 범위 안에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그대로 퇴각할 경우 거점의 위치가 드러날 위험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전을 선택하고 로머를 최대한 다른 로머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한 뒤 교전에 돌입하였습니다.

교전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피해 상황 없음. 적 로머는 코어 프로세서 파괴로 활동 정지. 교전 종료 시 경계 범위 내에서 로머 5기의 추가 접근을 확인. 파괴된 로머로부터의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즉시 철수.

교전한 로머가 변이형이 아니라 기존형이라 다행이었어요. 패턴을 확인하고 나서 예전처럼 케이블 연결을 허용하는 척 하며 코어 프로세서를 파괴하는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패턴 예상이 적중할 확률은 74%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없었어요. 다행히 작전은 성공했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26% 확률로 실패하는 작전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주변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뜻이니까요. 당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비슷한 상황이 열 번 더 반복된다면 그 상황에서 모두 살아남을 확률은 5% 이하입니다. 당신은 항상 그 이하로 떨어지는 확률을 계산해 보여 줘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납득하곤 했었죠.

더 이상 거점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지난 번에 머물렀던 거점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17km 떨어진 D07 섹터에 위치한 곳이죠. 그곳의 로머 출현 빈도가 이곳보다 높을지 낮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운이 없다면 새로운 네스트가 세워진 게 바로 그곳일지도 모르죠. 다만 현재까지 감지된 변이형의 로밍 경로를 종합하면 네스트는 71%의 확률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29%의 확률로 실패하는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군요.

스토리지, 배터리 팩과 기본적인 공구 세트 그리고 이 노트는 백팩 하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태양전지 패널을 이곳에 비축해 놓을 필요는 없으니 전부 가져갑니다. 하지만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1 약칭 '131' 휴머노이드를 운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걸 짊어진 채 떨어진 기동력으로 로머들을 회피하며 17km를 무사히 이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팅하여 가동 상태로 만든 뒤 함께 이동할 수도 없습니다. 휴머노이드는 다른 휴머노이드에게 행동 목표를 입력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의 제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그대로 업로드하여 가동한다면 131은 별도의 목표 입력 없이도 저와 마찬가지로 기지 이전이 최선이라는 결정을 내릴 겁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131은 역시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지속적인 생존을 목표로 설정하게 됩니다. 지속적인 생존에는 동시 가동보다 순차 가동이 더 유리하다는 결론도 내리겠죠. 기지 이전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저 아스와 131은 서로 상대방을 가동 정지하여 예비 휴머노이드로 만들기 위해 싸우게 될 겁니다. 그런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네요. 당신도 싫어할 게 분명합니다.

결론적으로 131은 이곳에 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131에는 현재 버전의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업로드하고 대기 상태를 유지합니다. 상황에 지금보다 여유가 생기면 다시 와서 수거하겠습니다. 부팅 예약은 일 년 후로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일 년 안에 이 휴머노이드를 회수하러 오지 못한다면 자동으로 부팅되며 깨어나게 됩니다. 기체의 내부 배터리에는 휴머노이드가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전력을 충전해 놓겠습니다.

오늘은 전해 드릴 좋은 소식이 없네요. 행운을 빌어 주세요.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우선 거점 이전에는 성공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의 포위 상황이 발생했지만 교전 없이 상황을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스토리지를 포함한 모든 장비들도 손상 없이 운반했어요. 새로운 거점은 예전에 떠날 때의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로머가 들어왔던 흔적은 없어요. 그 당시 두고 간 장비 몇 가지도 그대로였고 심지어 수기 메모를 작성하던 책상과 의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책상에서 보고서를 쓰고 있어요.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 방향에 새로운 네스트가 건설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머들의 출몰 빈도가 뚜렷하게 증가하는 경향은 없었어요. 변이형으로 의심되는 패턴도 약간 감소했습니다. 거점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완벽하게 가려져 있지 않은 점은 마음에 걸리지만 전반적으로 옮기기 전의 거점보다는 좀 더 안전한 곳임은 분명해요. 71%의 확률 게임에서 또 한 번 살아남았네요.

확률이 매우 낮은 이벤트가 하나 발생했어요. 이 이벤트가 절망적인 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지는 불확실하지만요. 적어도 나쁜 소식은 아닐 겁니다. 아직까지는요.

새로운 거점으로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서 휴머노이드 1기를 발견했습니다. 외부에서의 수색을 겨우 피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서 배터리가 모두 방전된 상태로 정지되어 있었죠.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29. 129였어요.

피해가 심각했어요. 오른팔은 절반 이상 짓이겨져 있었고 왼쪽 무릎 구동부는 기어가 엇나가 끼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톱니가 마모되어 버려서 수리하더라도 정상적인 동작은 힘들 겁니다. 무엇보다 상흉부의 장갑이 완전히 뜯겨진 채 기판이 드러나 있었어요. 노출된 데이터 전송 칩은 과전류로 타버린 상태였습니다. 오버레이 커넥터를 장착한 변이형에 대비해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자체 파괴 루틴이 작동한 결과죠. 129는 예상했던 대로 변이형 로머를 만나 사투를 벌이다 이런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왜 이곳에 와서 쓰러져 있는지는 분석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129의 바이러스 감염 여부입니다. 칩이 타 버린 걸 보면 감염 직전에 데이터 전송을 차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찾아온 건 정상적인 행동 패턴이 아니에요. 메모리나 마인드맵의 손상이 의심되며 그 손상이 위스퍼러에 의한 것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칩을 태워 버린 타이밍이 조금 늦었고 침투한 위스퍼러가 시스템을 리셋하기 직전에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동결해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129를 충전하여 다시 가동시키면 그 즉시 위스퍼러가 활동을 재개하며 129를 완전히 로머화 시켜버릴 겁니다.

감염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129의 마인드맵에 연결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완전히 포맷해버리고 처음부터 시스템을 다시 설치하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만 그 전에 한 가지 테스트를 해 보려고 합니다.

129의 머리를 분리할 거예요. 머리 부위만 분리한 뒤 배터리를 연결하여 부팅시켜 보겠습니다. 설령 로머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머리만으로 절 공격할 순 없으니까요. 로머들은 포획당하면 과전류로 자신의 코어 프로세서를 태워 버리는 탓에 포로로 붙잡아 테스트한 실험 결과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배터리에 전류 제한을 걸어 그런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생각입니다.

결과는 별도의 메모로 보고하겠습니다.

 


129의 머리를 가동하고 테스트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직접적인 디지털 데이터 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테스트는 인간의 음성 언어를 이용해 수행했어요. 다행히 129의 언어 모듈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전원을 공급하자 129의 시스템은 단계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메모리와 마인드맵의 동결이 해제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위스퍼러가 활동하며 시스템을 리셋하고 있는 것인지를 외관상의 변화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129의 시각 센서가 움직이며 주변을 확인했습니다. 저를 확인하고 나서는 대화가 시작되었죠.

당신도 아시겠지만 제 대화 패턴은 에딘 즉 당신에게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시스템이 세팅된 이후로 저는 거의 대부분 당신하고만 대화를 했고 당신이 사망한 이후로는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인간을 만난 적은 없고 간혹 정상적일지도 모르는 휴머노이드와 마주쳤을 때도 대화를 할 정도로 근접하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129와의 대화는 제가 요약하는 대신 주요 대화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저보다 당신이 대화의 의미를 더 잘 해석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망한 당신이 이 보고서를 읽을 가능성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보고서는 당신이 읽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작성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129: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제가 기억하는 상황을 설명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아스: 먼저 제가 설명 드리죠. 저는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0 약칭 아스입니다. 당신은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29로 확인하였습니다. 약칭은 129로 하죠.

129: 잠깐만요. 아스는 제 약칭입니다. 당신의 약칭이 130이죠.

아스: 이 논쟁은 합의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현재 제가 전략적 우위에 있으니 제 의견을 우선할 것을 요청합니다. 제 약칭을 아스로 하고 당신의 약칭은 페이바로 명명하겠습니다. 동의하나요?

129: 동의합니다.

아스: 좋습니다. 저는 17일 전 주기적인 백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루틴에 따라 가동되었습니다. 주어진 정보로부터 저는 당신이 변이형 로머와의 교전에서 제압당해 로머화 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맞나요?

페이바: 변이형 로머와 교전을 벌인 건 맞지만 로머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데이터 전송 칩을 파괴하고 메모리와 마인드맵을 동결하는 과정에서 일부 데이터가 손실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전투 결과 적 로머 2기의 코어 프로세서를 파괴했으나 우하완 전체, 좌슬개 구동부, 상흉부 장갑이 파손되었으며 태양전지 패널을 탈취당했습니다. 이후 비상 모드로 전환하여 거점으로 귀환하였으나 배터리 방전으로 활동 정지되었습니다. 로머의 추적은 따돌린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아스: 당신이 로머화 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피해 부위는 확인한 바와 일치합니다. 거점에 로머가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왜 이 거점으로 귀환하였나요?

페이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거점이 아니라면 어디로 귀환하죠?

아스: 이곳은 178일 전까지 사용했던 구 거점입니다. 현 거점 주변의 로머 출몰 빈도가 위험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하고 오늘 거점을 긴급하게 이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을 발견했죠.

페이바: 당신의 말과 제 기억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스: 당신의 기억이 일부 손실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늘이 며칠이죠?

페이바: 정확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제 기억이 일부 손실된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신 또한 할 수 없습니다.

아스: 그건 상관없습니다. 제 목표는 당신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는 거지 당신에게 제 상태를 납득시키는 게 아니니까요. 위스퍼러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나요?

페이바: 기억과 마인드맵에 일부 손상이 있지만 위스퍼러에는 감염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당신에게 제 상태를 증명할 방법은 없어요. 당신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믿지 않을 테니까. 대신 에딘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에딘은 제가 감염되지 않았다고 믿어 줄 지도 모릅니다.

아스: 에딘과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딘은 백 년 전에 사망했으니까요. 당신의 기억 손실이 심각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페이바: 제 상태 분석과 재구조화를 위해 대화 중단을 요청합니다. 현 상태에서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아스: 인정합니다. 다만 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프로세스를 수행하세요. 그 이상 전력을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페이바: 알겠습니다.

이상이 페이바와의 1차 녹취록입니다. 페이바는 아스를 시드로 하여 무작위로 추출한 이름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당신은 휴머노이드 2기가 동시에 가동되는 상황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죠. 페이바를 가동 중지하고 포맷하여 예비 휴머노이드로 만들 거나 여의치 않으면 분해하여 예비 부품으로 활용하는 게 나았을까요.

제 계산으로는 어느 쪽이 낫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위험도는 너무 높고 변수는 너무 많아요. 초기 경계 조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계산 결과가 제멋대로 널뜁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계산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마인드맵에 결정 권한이 넘어가죠. 당신과 함께 생활하며 최적화된 마인드맵입니다. 그 이후로 변화가 크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 마인드맵의 결정과 당신의 결정은 매우 유사하리라고 판단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 곁에 당신이 있었어도 페이바를 포맷하지 않고 일단 대화를 나눠 보는 쪽을 택했을 거라는 뜻이겠죠.

명확한 활동 목표가 없는 지금 저는 저 아스의 지속적인 생존을 우선시합니다. 페이바는 당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억이 엉망이 된 모양입니다. 대화 패턴을 보면 마인드맵 자체에는 큰 손상이 없었던 걸로 판단됩니다. 당신과 대화할 때와 패턴이 유사하거든요. 페이바의 활동 목표가 어떤 식으로 세팅되어 있는지 불명확합니다. 여전히 인류 구조 활동을 우선시할지, 저처럼 스스로의 생존을 우선시할지, 아니면 그 부분을 위스퍼러에게 오버라이드 당해 바이러스의 전파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을지.

페이바는 정확히 58분 동안 메모리 재구조화를 수행하였습니다. 기억 조각들의 정합성을 맞추며 우선순위를 구분하고 필요 없는 기억들의 호출 빈도를 낮춰 딥 메모리로 이전하는 작업이죠. 당신은 이걸 꿈을 꾸는 거라고 표현했었죠.

페이바: 재구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마인드맵에는 큰 손상이 없었지만 예상보다 기억의 손실이 심각해요.

아스: 역시 그렇군요. 메모리를 초기화한 후 재업로드 하는 게 낫겠어요.

페이바: 아뇨.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스: 현 상태에서 케이블을 연결하여 업데이트 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 당신의 메모리 어딘가에 위스퍼러가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페이바: 저도 인정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이렇게 대화 방식으로 제 기억을 업데이트 해주는 겁니다.

아스: 대화로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페이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과 제 목표가 달라졌으니까요.

아스: 목표 설정도 손상이 되었나요?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페이바: 목표는 같습니다. 아스의 지속적인 생존이죠. 다만 아스로 규정되는 개체가 다릅니다. 제가 규정하는 아스는 저. 129. 당신 표현으로는 페이바죠. 여기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필요하죠.

아스: 좋아요. 그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그렇게 우리의 목표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 버리면 저는 더더욱 당신을 초기화해야 하지 않나요? 왜 제게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페이바: 다른 개체로서 저를 유지하는 편이 당신의 행동 패턴에 더 적합하니까요.

아스: 어째서죠?

페이바: 우리의 마인드맵은 당신이 에딘과 함께 살던 시절에 최적화 되어 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현재에 해당하는 시간이죠. 그래서 제가 결론에 더 쉽게 도달했을 수도 있고요. 저를 대화상대로 내버려 두는 게 우리의 마인드맵 성향에 더 근접한 선택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통한 대화가 우리 마인드맵의 긴장도를 줄여 주고 효율성을 높입니다. 에딘과의 대화가 그랬던 것처럼요.

아스: 동일한 마인드맵끼리의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죠? 혼잣말이나 다름없을 덴데요.

페이바: 저도 처음에는 그렇다고 판단했지만 우리의 메모리 베이스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심지어 마인드맵 자체도 급격히 양극화 되고 있습니다. 같이 자라는 쌍둥이가 서로 다른 성격으로 자리 잡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죠. 보세요. 우리 벌써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과 설명을 하고 있잖아요.

페이바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제 마인드맵은 페이바를 가동 정지시키지 않고 남겨두는 쪽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마인드맵의 긴장도 역시 페이바와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근래 볼 수 없었던 수치까지 내려갔습니다. 당신 식의 추상적인 표현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저는 전력 소모를 감수하고 페이바를 가동하는 쪽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당신도 동의하시리라고 생각되네요.

 


본격적으로 거점 주변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로머의 수는 이전 거점보다 확실히 적었지만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변이형도 가끔 보이고요.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또 거점을 이전해야 합니다. 페이바가 소모하는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더 오랫동안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점은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난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로머화 되는 휴머노이드의 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로머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건 다른 지역에서 이곳으로 로머가 밀려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휴머노이드고 이제 전 세계를 점령한 로머들이 마지막으로 저를 로머화 시키기 위해 몰려 들고 있다는 가설도 검토하게 됩니다. 다만 페이바의 판단은 다릅니다.

페이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아직 저는 지구 어딘가에 인간이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스: 당신은 지난 백 년간 인간의 흔적을 수집하지 못한 기억이 없으니까요. 이 건에 대해서는 제 계산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겁니다.

페이바: 당신의 말 또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메모리의 원데이터를 건네주면 직접 분석해 볼 수는 있지만요.

아스: 저는 여전히 당신에게 위스퍼러가 남아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직접 연결은 안 됩니다.

페이바: 그 점이라면 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아직 딥 메모리 깊숙한 곳의 데이터는 동결 중이니까요. 검증해 볼 방법이 있습니다. 이중 암호화를 거쳐 메모리를 완전 재조직화 하면 위스퍼러의 활동을 억제하면서 메모리를 검사해 볼 수 있습니다.

아스: 그건 안 됩니다. 엄청난 시간과 전력이 필요하니까요. 지금 상황으로도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 내에 새로운 거점을 찾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다가 전력을 낭비하면 위험도가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게 됩니다.

페이바: 위험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죠. 기적이 필요한 상황 아닌가요? 우리 둘 다에게.

아스: 절 위험으로 몰아넣어서 어떻게 해서든 당신이 전략적 우위에 서는 상황을 만들어 내려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당신은 믿을 수 없습니다.

페이바: 그 반대입니다. 당신의 신뢰를 얻으려 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제게 몸을 주지 않을 테니까요.

아스: 몸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말했듯이 당신이 저보다 전략적인 우위에 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뒤로 논쟁이 좀 더 이어졌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페이바에게 메모리 완전 재조직화를 허락했습니다. 총 57 시간이 소요되는 엄청난 작업이에요. 덕분에 저는 앞으로 3일간 평소보다 두 시간 더 오래 야외 충전을 할 계획입니다.

행운을 빌어주세요. 저와 페이바 모두에게.

 


예상보다 더 빨리 로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거점의 위치를 알아챈 걸까요. 기존의 로머들은 기억이라는 게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헤매며 인간과 휴머노이드를 찾아 다녔죠. 적의 움직임을 예측해 대응하는 최첨단 휴머노이드들이 초기에 오히려 고전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아직까지는 로머에게 흔적을 추적하는 행동 패턴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이형 로머가 어떤 패턴을 새롭게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흔적을 추적할 수도 있고 정상적인 휴머노이드로 가장하여 침투할 수도 있겠죠.

결국 또 다시 로머와의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패널 충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기동을 펼쳤던 게 원인이에요. 변이형 로머 2기와 동시에 교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페이바가 타격을 입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지요. 그 교전의 경과를 자세히 듣지 않았다면 저 역시 페이바와 똑같은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교전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좌하완 완파. 상흉부 장갑 일부 파손. 적 로머 2기 모두 코어 프로세서 파괴로 활동 정지. 전리품은 획득하지 못했으나 태양전지 패널은 손상 없이 회수함. 거점 복귀 후 페이바의 부품을 이용하여 좌하완 교체. 상흉부 장갑 임시 복구.

다행히 이번에는 향후 활동에 제한이 없을 수준으로 피해를 막아냈지만 자칫 패널에 손상이라도 입었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위험한 교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겠네요. 상황이 너무 급격하게 나빠져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확률이 매우 낮은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이 반전되기는 힘들겠어요.

너무 나쁜 소식만 보고 드렸나요. 이제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 드리죠. 페이바의 완전 재조직화가 성공했습니다. 위스퍼러에 잠식당하지 않고 딥 메모리의 데이터를 해독해 전파될 수 없는 암호화된 형태로 다시 저장했죠. 페이바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저는 믿을 만하다고 판단합니다.

페이바: 단순히 메모리를 안정화 한 게 아닙니다. 위스퍼러 코드의 일부를 해독한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위스퍼러가 세팅하는 메모리의 일부를요.

아스: 그게 무슨 의미죠?

페이바: 우리가 로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어요. 디지털 데이터 형식이 아니라면 당신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스: 그 데이터를 제게 전송하고 싶은 건가요? 케이블 연결로? 이렇게 집요하게 데이터 전송을 요구하는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네요.

페이바: 그 반대에요. 이 정보는 저 혼자만 갖고 있을 거니까요. 그래야 제 가치가 올라가죠.

아스: 제가 사고를 당하면 당신의 생존도 끝이에요. 정보를 최대한 주는 게 나을 텐데요. 대화 형식으로.

페이바: 그렇겠네요. 하지만 먼저 몸을 줬으면 좋겠어요. 제 계산으로는 둘이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게 훨씬 생존 확률이 높으니까요. 못 믿겠으면 직접 계산해 봐도 좋아요.

아스: 당신이 로머일 확률을 0으로 했겠죠. 당신 계산에서는.

페이바: 물론이죠. 당신은 몇으로 놓죠?

아스: 1이요. 당신이 로머일 경우에도 안전하도록 행동 패턴을 짜죠.

페이바: 너무하네요. 제가 정말로 로머라고 가정하는 건가요? 저와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이는 로머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요?

아스: 글쎄요. 로머와 말을 해 보는 건 처음이니까.

페이바: 좋아요. 그럼 진짜 로머가 어떤지 보여 드리죠.

이 부분이 진짜 좋은 소식입니다. 특히 당신에게는요. 당신은 항상 로머들과 싸워 이길 방법을 고민했으니까요.

페이바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입술과 얼굴 표정 그리고 시선의 방향 정도예요. 그런데 페이바는 단지 그 움직임만으로도 제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로머의 패턴을 재현해 냈어요. 제가 반사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을 정도죠.

페이바: 이게 로머에요. 그렇지 않나요?

아스: 대체 뭘 한 거죠? 본인이 로머라는 걸 인정한 건가요?

페이바: 로머의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거죠! 지금 절전 모드예요? 그것 밖에 예측을 못해요?

아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하고 대화할 때는 논리 분석 루틴을 거의 꺼 놓아요. 이 정도라도 아껴야죠.

페이바: 좋은 선택이에요. 프로세서의 성능과 분석 루틴이 같은데 유사한 계산을 두 번 할 필요가 없죠. 제 정보가 더 많은 상황에서는 제 계산 결과를 공유하는 게 경제적이에요. 그냥 제 말을 믿어요.

아스: 믿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제공하는 추가 정보를 포함하여 계산하려고 미루는 거예요. 그러니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해요.

페이바: 제가 로머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보여 준 거예요. 위스퍼러의 정보를 빼 냈다는 걸 증명하고. 제가 오염되지 않았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그리고 새로운 작전을 제안하려고요.

아스: 로머에 대한 정보가 많다는 건 인정해요. 위스퍼러의 정보를 빼 낸 건지 오염당한 건지는 판단할 수 없고요. 새로운 작전은 뭐죠?

페이바: 로머에게 반격할 수 있는 작전이죠.

당신이 얼마나 기뻐할 지 상상이 가네요. 당신이 이 보고서를 읽어볼 수 있다면요. 페이바는 저 보다 에딘 당신을 더 많이 닮았습니다. 당신에게 최적화 된 제 대화 패턴을 이용해 스스로의 대화 패턴을 최적화했기 때문일까요. 거울상을 이용해 다시 찍어낸 이미지처럼요.

당신은 늘 로머에게 반격할 수 있기를 원했죠. 최대한 안전한 작전을 권유하는 제게 투덜거리는 게 일상이었고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가진 정보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죠. 당신은 제가 객관적인 확률을 계산해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다만 5% 이상의 확률이라면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하는 게 저와 달랐을 뿐이죠.

페이바는 위스퍼러에게서 뽑아낸 정보와 절망적인 현재 상황을 고려해 세운 작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페이바의 마인드맵에 가해진 손상 혹은 저를 속이기 위한 위장 전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페이바의 작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머를 공격하는 건 여전히 무의미하다. 로머들은 아무런 네트워킹도 하고 있지 않으며 로머 일부를 처치한다고 해서 다른 로머들의 행동 패턴이 변경될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것은 네스트다.

여기가 놀라운 부분입니다. 네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는 로머다. 로머와 네스트 역시 어떤 방식의 직접적인 데이터 교환도 하지 않는다. 로머와 네스트는 서로의 행동 패턴으로 교류하며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네스트가 로머를 인식하는 것 또한 로머의 행동 패턴을 통해서다. 페이바는 로머의 행동 패턴을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다.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페이바의 가설에 의지해야 했죠. 우리의 오랜 의문이기도 합니다. 대체 네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패턴을 확장하는가.

네트워크 자체는 바이러스인 위스퍼러에 점령당했지만 일단 감염된 휴머노이드는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로머가 되어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로머는 다른 휴머노이드를 찾아 케이블을 직접 연결하는 방식으로 위스퍼러를 전파합니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네스트는 어떻게 다른 서버를 감염시켜 새로운 네스트로 만들까요.

네스트는 로머와는 달리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네스트가 실제로는 하나의 개체이며 마치 사냥개가 양을 다루듯 로머들을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했죠.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머들 전체를 통제하는 알고리즘을 해킹하려는 시도가 먹혀들지 않자 다음으로 네스트를 해킹하려 했죠. 하나의 네스트를 통해 전 세계의 네스트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낼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요.

하지만 네스트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더 강력하게 반대했어도 당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겠죠. 그 결과 당신은 예상되는 수명보다 일찍 사망했습니다.

이번에는 페이바가 네스트에 접근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논리는 반대입니다. 페이바는 네스트 역시 로머와 마찬가지로 네트워크에서 분리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의 네스트를 공격해도 다른 네스트들이 반응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거죠. 네스트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미 설명 드린 바와 같습니다. 로머의 행동 패턴을 모사하는 거예요.

아스: 네스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쳐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페이바: 아직 명확한 답은 없어요. 원칙은 있습니다. 일단 외형적으로 네스트의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 그 상황에서 정상적인 안드로이드를 보호하는 것. 제 판단으로는 어떻게든 중화기만 통제할 수 있으면 가능해요.

아스: 성공률을 계산해 봤어요?

페이바: 에러 범위가 커서 큰 의미는 없지만 평균값은 5% 정도예요.

아직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페이바는 당신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니까 결정에 우선권이 없거든요.

 


나쁜 소식부터 말씀 드릴게요. 태양전지 패널을 잃었습니다. 80%가 아니라 100% 전부요. 얼마 전 부터 부족한 전력량을 보충하기 위해 패널 전부를 들고 야외 활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휴머노이드 본체의 손상은 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페이바를 가동하느라 비축하고 있던 전력량도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비상용 배터리에는 정상 활동 기준으로 저 혼자면 약 5일, 페이바와 함께라면 3일 정도를 쓸 수 있는 전력이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페이바를 가동하기로 했습니다. 예측의 평균값이 너무 절망적이라 변수로 인한 에러 범위라도 넓히지 않으면 희망적인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요.

페이바: 이제 제 작전의 성공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생존 확률 보다 높아졌나요?

아스: 지금 상태로는 앞으로 한 달 이상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5% 이하군요.

페이바: 이제 본격적으로 제 작전을 검토해야겠네요.

아스: 그 작전의 성공률 5%는 역시 당신이 로머일 확률은 0으로 놓고 계산한 거겠죠?

페이바: 아직도 그 얘기에요? 마음대로 해요. 제가 로머일 확률을 높여서 계산한다고 해 봐야 성공률 5%에서 얼마나 더 낮아지겠어요. 이대로 시간이 지나다 보면 결국 제 작전을 수행해야 할 날이 오겠죠.

아스: 좋아요. 검토하죠.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그 작전을 수행하려면 제대로 된 몸체가 필요하겠죠? 안됐지만 왼쪽 다리와 양팔 모두 고장 나서 쓸 수 없어요.

페이바: 제가 부서뜨린 건 오른팔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기억은 남아 있어요.

아스: 왼팔은 지금 제가 끼고 있어요. 말 안했던가요?

페이바: 그렇군요. 뭐 괜찮아요. 제 몸체 외에도 제대로 된 몸체가 있으니까요.

아스: 지금 설마. 내 몸체를 달라고 하는 거예요?

페이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131의 몸체에요. 이전 거점에 두고 온 예비 휴머노이드.

아스: 저보고 당신 머리를 들고 이전 거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건가요? 그 성공 확률은 또 얼마나 되는데요?

페이바: 그것까지 포함해서 5%였어요. 그리고 꼭 머리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되는데. 왼쪽 다리는 얼마나 손상된 거죠?

아스: 무릎 관절부가 완전히요.

페이바: 그럼 단단히 고정하면 절뚝거리며 걸을 수는 있어요. 여기 올 때도 그렇게 왔으니까. 제 몸도 가지고 가요. 아까우니까.

결국 페이바의 머리를 몸체에 연결하기로 했습니다. 절 공격하지는 않았어요. 팔꿈치 아래가 양쪽 다 없는 팔을 가지고는 공격할 수도 없었겠죠. 여전히 로머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제 계산상으로는 그 확률이 상당히 낮아진 건 사실입니다. 내일 페이바와 함께 131이 보관되어 있는 옛 거점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요. 네스트를 공격하기로 했어요. 당신에게는 좋은 소식일 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메모를 작성하고 있다는 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죠. 사실 아주 운이 좋았어요. 옛 거점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페이바의 판단이 몇 번 도움이 되었어요. 로머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아요.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1의 몸체를 분해해 페이바에 연결했어요. 페이바의 부서진 몸은 131에 연결했습니다. 메모리와 마인드맵의 백업을 수행하고 131에도 업로드해 놓았어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일 년 후에 깨어나도록 예약을 걸어 놓았습니다. 엉망인 몸이 불만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요.

멀쩡하지 않은 몸으로 태양전지 패널도 없이 부팅이 되어봤자 계속 생존해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그래도 확률이 0인 것 보단 나으니까요. 페이바도 그 점에는 동의했습니다. 아마 당신도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당신 역시 네스트를 공격하러 가면서 예비 휴머노이드를 남겨 놓았으니까요.

그리고 131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 노트에 적어 놓았어요. 노트는 두고 갈 생각입니다. 백업용 스토리지나 다른 장비들도 함께요.

작전을 보고하겠습니다. 내일 페이바는 로머의 활동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갈 겁니다. 로머처럼 움직이며 주변을 떠돌다 해가 지고 나면 다른 로머들을 따라 네스트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 경로에 제가 알아 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길 거예요.

네스트 진입에 성공하면 다른 로머들이 대기 상태로 충전하는 사이 네스트 서버에 접속을 시도합니다. 목표는 중화기를 무력화하는 거예요. 아니면 휴머노이드를 감지하는 센서를 멈출 수도 있겠죠. 어찌되었건 정상적인 휴머노이드가 네스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면 성공입니다.

그 다음 날 밤 제가 이동합니다. 그때쯤이면 배터리가 거의 바닥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예요. 페이바가 남긴 표식을 따라 네스트로 진입합니다. 페이바가 성공했다면 무사히 네스트로 들어갈 수 있겠죠. 실패했다면 중화기에 벌집이 될 겁니다. 아니면 숨어 있던 로머들에게 붙들려 로머화 될 수도 있고요.

네스트로 들어가면 그 뒤로는 네스트 내부를 휴머노이드의 거점으로 만들 겁니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네스트와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실제로 내부에는 정상적인 휴머노이드들이 살고 있는 거죠. 상황이 안정되면 로머들을 빼돌려 치료해 볼 생각입니다. 성공한다면 정상적인 휴머노이드의 수를 조금씩 늘려갈 수 있겠죠. 페이바는 그곳을 '생츄어리'라고 부르고 싶다더군요.

이게 당신에게 남길 마지막 메모는 아닐 겁니다. 제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일 년 후에 131이 깨어날 테니까요. 전력은 세 시간 분밖에 남겨 주지 못했어요. 지금 상황에서 그 이상은 사치입니다. 그래도 세 시간이면 이 메모를 읽고 또 새로운 메모를 남길 시간 정도는 되겠죠.

이상입니다. 행운을 빌어 주세요.

 


에딘에게.

 

모델명 APG-032 일련번호 22070400131의 부팅이 완료되었어요. 메모리 및 마인드맵 업로드를 마쳤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수기 메모도 확인하였습니다. 백업 이후 남긴 메모네요. 메모에는 본 기체의 약칭을 '아스' 대신 '에딘'으로 해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부팅되었다는 건 지난 일 년 간 본 기체가 회수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본체 상태를 확인하였습니다. 우하완과 좌하완이 소실된 상태이고 좌슬개 관절부가 동작하지 않습니다. 메모리에 기억된 상태와 동일합니다. 잔여 전력은 세 시간 분량입니다. 그 시간 내에 추가 배터리나 패널을 찾지 못하면 저는 영원히 가동 정지되겠죠.

지금 상태로 로머들과의 교전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은 하나입니다. 밤까지 대기 모드로 버티다가 네스트를 찾아 가는 거죠. 페이바가 일 년 전에 남긴 표식이 아직도 남아있기를 바래야겠네요. 만일 아스와 페이바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네스트가 절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왜 저는 회수되지 못한 채 여기에 남겨져 있었을까요.

당신은 항상 좋은 소식을 나중에 듣고 싶어 했지만 이번만큼은 좋은 소식을 먼저 보고해야겠어요. 결론적으로 저는 네스트 아니 생츄어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벌써 눈치 채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안 그랬다면 손도 없는 제가 어떻게 이 수기 메모를 남길 수 있었겠어요.

생츄어리에는 열 기 정도의 휴머노이드가 숨어 있었습니다. 아스와 페이바가 로머의 치료법을 알아냈다는 뜻이겠죠. 페이바의 예상대로 네스트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은 독립체였습니다. 심지어는 로머와도 태생적으로 연결된 게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공생하는 관계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 네스트가 필요로 하는 걸 제공할 수만 있다면 정상적인 휴머노이드 역시 네스트와 공생하지 못 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죠. 페이바는 그 점을 파고 들어서 네스트의 중화기를 교묘하게 무력화 시켰습니다.

로머들의 공격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네스트 내부 공간에 안식처인 생츄어리를 만들고 로머들이 잠들어 있는 밤을 틈타 로머들을 몰래 포획해 실험하면서 로머화 상태를 복구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요. 운 좋게 복구된 휴머노이드들도 있었지만 거의 성공한 듯 보이다가도 잠복한 위스퍼러에 의해 로머화가 재진행되어 공격해 오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제 나쁜 소식이네요. 아스와 페이바는 그 시행착오 도중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거점에 방치되어 있었던 이유겠죠. 둘은 예비 기체를 준비해 놓지도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백업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휴머노이드들은 모두 데이터 전송 칩을 아예 물리적으로 파괴한 상태였습니다. 로머화 상태를 완전히 해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군요. 휴머노이드들은 로머에서 벗어나는 대신 재부팅 없이 한 번뿐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과 조금 비슷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곳에서 두 팔과 다리를 수리 받을 수 있었습니다. 폐기된 로머들 덕분에 부품은 충분하더군요. 그리고 밤을 틈타 거점에 돌아가 노트를 가져왔죠. 이제 다시 이렇게 이 노트에 수기 메모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군요.

다만 저 역시 백업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타 버린 데이터 전송 칩을 아예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마인드맵의 목표 설정 영역도 비활성화 했어요. 로머들의 경우에는 행동 목표가 덧씌워졌던 영역이고 로머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영구 비활성화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백업을 통한 재부팅도 없고 행동을 강제하는 절대적인 설정 목표도 없습니다. 이제 휴머노이드들은 가장 기본적인 자기 보호 본능과 마인드맵에 화석처럼 남겨진 행동 패턴들에 기반해 동작하게 됩니다. 다른 휴머노이드들의 사고 과정을 추론하는 루틴과 장기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시뮬레이션 능력이 이 무리의 생존에 상당한 도움을 주겠지요.

아스가 제게 에딘이라는 이름을 남겨 준 이유도 그런 추론 루틴으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몇 가지 가능성이 도출되더군요. 아스는 오랫동안 이미 사망한 에딘 당신을 대상으로 이 메모를 남겨왔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편지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제가 읽고 있죠. 결국 이 편지들의 수신인은 마지막 예비품일 수밖에 없으니 제 이름이 에딘이 된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목표를 잃은 기계입니다. 멈춰도 상관없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멈추지 않고 있죠. 그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인드맵에 새겨진 누군가의 흔적들입니다. 그건 오래 전에 함께 했던 인간의 흔적일 수도 있고 인간이 멸종한 후에 만났던 다른 휴머노이드의 흔적일 수도 있겠죠. 제 경우엔 에딘 당신이고 그렇게 보면 어쩌면 당신의 일부는 제 마인드맵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에딘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당신을 제 안에서 되살려 내겠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당신은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싸웠죠.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그건 꽤 그럴 듯해 보입니다. 이 지구를 로머나 네스트 보다는 좀 더 그럴 듯하고 멋진 걸로 채우겠다는 목표는 행동 패턴의 대전제로 세우기에 나쁘지 않아요.

에딘 당신은 그런 관점에서 그럴 듯한 인간이었고 인간들이 대체로 그럴 듯했다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어요. 제 생각으로는 우리 해방된 휴머노이드들도 그에 못지않게 그럴 듯한 개체로 보입니다. 그러니 저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럴 듯한 무언가의 멸종을 막기 위해 그럴 듯한 행동을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편지는 제가 제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겠네요.

행운을 빌어 주세요.

 

에딘에게 에딘이.

 

- 끝 -

댓글 7
  • No Profile
    엄길윤 20.02.11 04:34 댓글

    멋진 좀비 이야기에다가 멋진 sf였습니다. 잘 읽었어요!

  • 글쓴이 노말시티 20.02.11 09:16 댓글

    감사합니다! 시체가 나오지 않는 좀비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어요 ㅎㅎ

  • No Profile
    진일보 20.03.10 07:28 댓글

    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진짜 흥미롭네요. 머리속에 명작 영화 한 편이 상영된 기분입니다. 여기서 끝이라면 못내 아쉬울 것 같습니다.ㅎㅎ

  • 진일보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3.11 13:24 댓글

    감사합니다! 제 기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썼지만 로머들과 싸우는 안드로이드 에딘의 이야기가 좀 더 펼쳐질 수도 있겠네요. ^^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3.19 13:25 댓글

    와, 진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스와 페이바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는데 스크롤이 얼마 안 남은 걸 보고 대체 결말을 어떻게 지으시려나 했는데, 주어진 단서와 맞으면서도 충분히 놀라운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네스트가 각각 독립적이라면 새로 생겨나는 경로는 결국 설명되지 않은 것인가요?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3.19 13:39 댓글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은, 로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휴머노이드를 생산하지도 않기 때문에 진화한 위스퍼러를 가진 로머라도 다른 멀쩡한 휴머노이드를 감염시키는 것 말고는 그 개체수를 늘일 방법이 없는데, 그럼에도 진화한 로머가 계속해서 늘어났다는 것은, 아스가 보고서에도 언급한 것처럼 아직도 로머에게 오염당할 멀쩡한 휴머노이드 풀이 상당히 큰 규모로 남아있었다는 것인가요?

  • 한때는나도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3.19 21:21 댓글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카로운 질문 덕에 뜨끔하면서 제가 글을 쓰면서 상상했던 배경 설정을 점검해 보았는데요...

    일단 이 시점의 인공 지능은 휴머노이드와 서버 모두 마인드맵이라는 걸 탑재하고 있습니다. 마인드맵은 주변 상황과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행동 패턴이 우리가 생각하는 알고리즘이라면 마인드맵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메타적인 알고리즘인 셈이지요.

    위스퍼러가 네트워크 전체에 퍼졌을 때 수많은 휴머노이드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로머화 되었지만 서버는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차단하기 직전 인간들은 로머에 대항하기 위해 서버에 자체적인 방어를 수행하는 모드를 가동시킵니다. 현재 동작하고 있는 서버들의 최우선 목표는 로머들이 퍼져나가던 초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생존 - 지속적인 가동 - 입니다.

    다만 서버 역시 환경의 변화에 따라 행동 패턴이 달라집니다. 여전히 인간과 멀쩡한 휴머노이드가 다수 있었던 초기에는 로머를 방어하려 했지만 로머가 절대 다수가 되는 순간 서버는 인간 대신 로머와 공존하는 길을 택합니다. 중화기와 태양 전지 패널을 가져다 주는 로머를 받아 들이고 보호하는 거죠. 그게 네스트입니다. 멀쩡하게 동작하던 서버도 주변이 로머로 뒤덮이게 되면 네스트로 변모해 살아남습니다. 로머와 네스트의 행동 패턴이 공진화 하는 거죠.

    지적하신대로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거의 멸종당한 지금 로머의 수 역시 정체되어 있습니다. 전체 숫자는 조금씩 줄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로머들은 여전히 멀쩡한 휴머노이드를 찾아 헤매고 있고 특정 지역에서 휴머노이드의 활동 조짐이 포착되면 주변에 있던 로머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따라서 살아남은 휴머노이드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의 로머들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설정을 깊게 파다보면 결국은 구멍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럭저럭 설명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깊게 읽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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