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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강탈자의 침과 입

이경희

 

 

1

손목을 붙잡힌 채 회의실로 이끌려가며, 수진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녀를 끌어당긴 사람이 바로 요한나 대리, 아니, 언니였으니까. 언니는 거친 숨을 억누르느라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셔츠 자락은 반쯤 열린 데다, 헝클어진 머리칼은 땀에 젖어 이마와 목덜미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귀엽게도, 눈동자에 불안한 떨림이 가득했으니까.

“어, 언니…”

“쉿.”

한나는 수진의 입술을 검지로 뭉개며 재빨리 눈동자를 좌우로 미끄러뜨렸다.

“여기 CCTV 없는 거 맞지?”

“네? CCTV요?”

짧은 질문에 심장이 쾅 하고 뛰어올랐다. 속삭일 때마다 귓불을 간지럽히는 야들한 날숨에 살갗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양 볼이 화끈해졌다. 자두 맛 캔디처럼 달착지근한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고막까지 깊숙이 닿는 호흡이 뜨거웠다. 수진은 빈 주먹을 꽉 쥐어짜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그러거나 말거나, 한나의 입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른 침을 달싹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수진은 두 눈을 꼭 감으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진아, 사…”

네, 저도요 언니.

“사…”

알아요. 어서 말해요.

“사장님이 아무래도 외계인인 거 같아.”

“네, 저도 사…… 잉?”

침묵.

어색한 침묵.

사장? 외계인?

뭐래니, 대체.

눈이 번쩍 뜨였다. 좋았던 기분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니 언니, 지금 이 분위기 어쩔 거냐고. 갑자기 짜증이 치솟은 수진은 눈썹을 팍 찡그리며 이렇게 되물었다.

“아침부터 그게 뭔 개소리세요?”

 

 

2

수진아, 일단 진정하고 내 설명 좀 들어봐.

그러니까 바로 어제 일인데, 어제 우리 부서 회식이 있었잖아. 너도 같이 갔었던 건 기억나지? 그래, 너 소주 한 잔 마시고 시작부터 뻗어버렸잖아. 어떻게 알았긴. 널 누가 집에 데려다줬다고 생각하는 거니?

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회식이 문제였어. 그놈의 회식이 문제였다고.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뭐하러 거기까지 따라가서 사장이 외계인이라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굳이 알게 됐겠어.

아무튼 시작은 천 부장 그놈이었어.

 

 

3

“부장님, 지금 저한테 잔 돌리시려는 거예요?”

한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모두 들으라는 듯이.

“아니이, 부장님. 요즘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잔을 돌리시려고요. 술잔에 묻은 타액을 서로 교환하게 된다고요. 타액 뭔지 모르세요? 침이요, 침. 부장님 저하고 침 섞으시고 싶은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 간염 있어요. 헬리코박터랑 인플루엔자도 있고요. 또… 아무튼 국민 보건을 위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과학적으로 다 증명된 거라고요.”

이미 코가 울긋불긋 붉어진 부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나 씨, 이거 괜찮아. 내가 이렇게 쓱쓱 닦아서 돌린다니까아.”

부장은 손바닥으로 소주잔을 벅벅 문질렀다. 니 손이 더 더럽거든 이 자식아. 한나는 튀어나오는 욕설을 꾹 참으며 다시 반박했다.

“으아! 부장님 그거 손으로 닦으시면 어떡해요? 부장님 손 언제 씻으셨어요. 에헤이 잠깐만, 휴지로 대충 닦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요, 악! 물수건 그거 부장님 손 닦으신 거잖아요. 그게 그거고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필사적으로 수비하자 부장은 이번엔 진짜라는 듯 회심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는 빈 맥주잔에 물을 붓더니 거기에 소주잔을 푹 담갔다.

“자, 물로 씻었어. 이제 괜찮지?”

저 맥주잔은 이제 감염균 배양 수조가 되어버렸구나. 한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부장님. 뭘 어떻게 하시건 안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한나 씨. 이거 그냥 술자리 아니야. 우리 멤버들 단합을 위해서, 응? 다음 달 오픈할 우리 신작 게임 대박나자고, 응? 업무의 연장이다 이말이야. 회사에서 거저 자네들 밥이나 먹이자고 이러겠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다 필요한 거예요. 이 조그만 잔이 대양에 띄워진 배처럼 돌고 돌면서 우리 부서 사람들을 끈끄은하게 하나로 이어준다 이말이야. 그러니까 이거는… 그래, 종교의식 같은 거라고.”

“아, 직원들한테 충성 서약을 시키시겠다, 뭐 이런 말씀이신 거죠? 내가 하사하는 술이니 싫어도 억지로 마셔라?”

“한나 씨! 무슨 말을 해도, 어? 그걸 그렇게 그래?”

흥분한 부장은 말을 버벅거리며 삿대질만 반복했다. 한나는 감정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하고요. 그래도 여직원 노조 위원장으로서 제가 할 말은 해야 해서요.”

“거, 노조 그거도 그래. 여직원 노조 그거는 공식 조직도 아니잖아. 명단도 회사에 안 밝히고. 뭐가 그렇게 꿀려서 꽁꽁 숨겨? 혹시 한나 씨 말고 아무도 없는 거 아니야? 으하하.”

혼자 말하고 혼자 웃겼는지 부장은 고개를 뒤로 꺾어가며 자지러졌다. 명단을 안 밝히는 건 그 사람들 다 자를까 봐 그런 거잖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한나는 다시 한번 거절했다.

“아무튼 잔 돌리기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럼 그 옆에 윤 대리이이이-”

“네, 부장님. 저는 조오옿습니다아아아-”

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은 윤 대리에게 잔을 건넸다. 윤 대리 자식은 또 뭐가 그리 좋은 건지 활짝 웃으며 그 잔을 넙죽 받아 삼켰다. 야. 윤 대리 너도 우리 조합원이잖아. 그냥 확 다 불어버릴까?

질려버린 한나는 수진을 찾았다. 수진은 애저녁에 뻗은 지 오래였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기절하는 주제에 뭐하러 회식에 따라와선. 한나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언니이 제가 좋…”

“어 그래, 그래, 어서 집에나 가.”

한나는 수진을 택시에 태워 보낸 다음, 택시 기사의 얼굴과 차량번호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다 들으라는 듯이, “이야, 사진 잘 나왔네! 서울 06 사 7676 등대콜 윤상택 기사님! 조심운전 부탁드릴게요! 수진아 도착할 때까지 전화 끊지 말고.” 하고 소리쳤다.

힘든 세상살이였다.

택시가 떠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 한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꾸깃꾸깃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냥 다시 들어가서 불판 확 엎어버리고 회사 때려칠까?

오만가지 상상이 떠올랐지만 한나는 꾹 억눌렀다. 전세금 대출이 오천이나 남아있었으니까. 그 돈을 갚을 때까진 인권조차 사치였다.

그대로 슬쩍 사라지려다가, 문득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윤 대리도 술 약한데. 부장이 슬쩍 허벅지에 손이라도 얹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에휴, 들어가서 2차전 다시 시작해야지. 그녀는 각오를 다지며 다시 고깃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식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윤 대리가 보이지 않았다.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어? 윤 대리 어디갔어요?”

“응? 한나 씨가 데려간 거 아니었어? 아까 나갔잖아.”

김 과장이 멍청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수진 사원이고요.”

“그럼 나는 모르겠는데.”

“부장님은요?”

“글쎄, 부장님이 데려가셨나? 집에 데려다 주시려나 보지.”

잘도 그러겠다.

한나는 초조해졌다. 옷과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계단 쪽에서 윤 대리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위쪽이었다.

“에이, 부장님. 그냥 맥주나 한 잔 해요. 2층 호프집이네.”

목소리를 보아 윤 대리는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걸로 되겠어? 윤 대리야 그냥 바로 3층으로 가자. 거기서 맥주 마심 되지.”

3층은 노래방이었다. 그리고 4층부터는 모텔이었고. 지옥 같은 빌딩 구조에 치를 떨며 한나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2층에서도, 3층에서도. 설마 4층까지 데려간 거야?

천 부장 너 오늘 나한테 제대로 걸렸어.

화가 머리끝까지 폭발한 한나는 오늘 기어이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모텔 카운터에 축 늘어져 있는 주인이 보였다. 한나는 카운터의 유리 벽을 쾅쾅 두드리며 그를 호출했다.

“방금 술취한 남녀 둘이 올라오지 않았어요?”

“어… 그런데요?”

“그 사람들 어디로 갔어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는데요.”

쾅! 한나는 유리 벽을 다시 내려쳤다.

“빨리 말해요. 공범으로 신고하기 전에.”

한참 눈싸움을 이어가던 그는 꼬리를 내리며 한나에게 객실 번호를 알려주었다. 사장에게 마스터키를 빼앗은 한나는 근처에 보이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객실로 향했다. 그리고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이 뭘 보고 있는 것인지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이 있었다. 비서도. 각 프로젝트의 본부장들도. 그리고 부장과 윤 대리도. 임원 회의라도 열린 것처럼 회사의 중역들이 모텔 침대 주위에 둘러앉아 요가 자세로 윤 대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술에 취해 잘못 본 걸까? 그들의 이마에는 달팽이처럼 가느다란 더듬이가 돋아있는 것도 같았다.

윤 대리의 모습은 더 이상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커다란 고무대야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양 손바닥을 다소곳이 가슴 위에 모으고 있었다.

대야 안에 점차 물이 차올랐다. 물은 윤 대리의 손톱과 발톱 아래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이 빠져나갈수록 윤 대리의 몸은 비쩍 말라붙었고, 부장은 그런 윤 대리의 입에 식용유를 부어 넣었다. 해맛 식용유. 상표까지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그 모습은 강렬했다. 윤 대리는 젖 빠는 아기처럼 꿀꺽꿀꺽 업소용 초대형 식용유 한 통을 삼켰다. 이윽고 대야가 넘칠 정도로 물이 빠져나가고, 윤 대리의 체액은 식용유로 가득 채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윤 대리의 이마에서도 똑같은 더듬이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번쩍 눈을 뜬 윤 대리가 입을 열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4

수진은 참지 못하고 빵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지금 연기하신 거예요? 쐐애애——? 아, 귀여워라.”

그녀는 한 번 더 한나의 흉내를 내며 그녀를 놀렸다.

“아니, 진짜 이랬다니까.”

“알겠어요, 알겠어. 아침부터 진짜 재밌으셔.”

“장난 치는 거 아니래도.”

한나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정말 안 믿어줄 거야?”

이거 진심인가? 농담인가? 아님 그냥 미친 건가?

“술 먹고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이리 와요 제가 토닥여줄게.”

“에이씨,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한나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내가 너무 심했나? 언니 화났으면 어쩌지? 수진은 조금 겁이 났다. 토닥여준다는 말은 하지 말 걸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1분도 채 지나기 전에 한나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윤 대리와 함께.

“어? 수진 씨 여기 있었네.”

“윤 대리님?”

뭐야, 멀쩡하잖아. 역시 장난이었네. 수진은 마음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한나가 윤 대리의 뒤통수를 빗자루로 내려쳤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바닥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윤 대리의 울음소리는 한나가 흉내 낸 것과 정말 비슷했다. 한나는 침착하게 손수건으로 윤 대리의 입을 막았다. 둘이 짜고 치는 장난이라기엔 너무 지나치잖아.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며 소리치는 윤 대리의 모습이 연기처럼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분장이라기엔 더듬이가 너무 실감 나게 돋아있었다. 더듬이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수진은 얼어붙었다.

한나는 무릎으로 윤 대리의 꺾인 팔을 단단히 제압한 다음, 턱짓으로 바닥에 흐른 침을 가리켰다. 사람의 체액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샛노란 색깔. 발끝으로 슥슥 문지르자 미끈거리는 것이 마치 식용유 같았다.

“이제 믿어?”

한나가 물었다. 수진은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좀 도와줘.”

한나와 수진은 멀티탭으로 윤 대리의 팔다리를 꽁꽁 묶은 다음 회의실 구석의 캐비넷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안에서 쾅쾅쾅 소리가 들렸지만, 두 사람은 애써 무시하며 캐비넷에 청테이프를 몇 겹이나 발랐다.

“이걸로 될까요?”

수진이 물었다.

“당분간 시간은 벌어주겠지. 회의실 문도 안에서 잠가버리자. 아무도 못 들어오게.”

“그런 다음에는요?”

“일단은 사무실로 돌아가. 점심때까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하고 있어.”

“이 상황에 일을 어떻게 해요!”

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한나는 떨고 있는 수진의 어깨를 붙잡아 그녀를 진정시켰다.

“수진아, 진정해. 평소랑 다른 모습 보이면 의심을 살 거야. 갑자기 출근을 안 하거나 사표를 내면 더 의심받을 거고. 어쩌면 집까지 쫓아올지도 몰라. 회사에 우리 주소랑 전화번호도 다 있잖아.”

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일단 업무로 복귀. 점심 식사 후에 몰래 7층 계단에서 만나. 알겠지?”

“네, 언니.”

두 사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5

의심하자니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스럽고, 의심을 안 하자니… 아니, 어떻게 이 상황에 의심을 안 해?

수진은 일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멍하니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기억만 팽팽 맴돌 뿐이었다.

‘부장이 끝까지 잔을 돌리려고 한 거 보면 거기다 무슨 약이라도 발라놓은 거 아닐까? 아니면 무슨 바이러스 같은 게 침으로 전염되거나 그런 걸지도 몰라. 실제로 윤 대리가 그 잔 받아먹고 이상해졌고.’

헤어지기 전, 한나는 그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알겠지, 수진아. 아무것도 받아먹지 마, 만지지도 말고.’

어떻게 그래요.

수진은 고개를 돌려 책상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달콤한 과자와 캔커피가 진수성찬처럼  쌓여있었다. 모두 오늘 아침에 직접 구입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피 같은 월급으로. 직장인의 유일한 낙을 포기하라고? 그럼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고요. 수진은 침울해졌다.

그녀는 모니터에 엑셀과 포토샵을 띄워놓고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의심스러운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일 의심해야 할 사람들은 위생 관념 없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한나는 그렇게 말했다. 수진은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옆자리의 과장이 치실을 뽑아 이에서 이물질을 빼내고 있었다. 으엑, 저런 건 좀 화장실 가서 하지. 과장은 치실을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두었다. 나중에 다시 쓰려는 모양이었다. 건너편 대리는 생수통 주둥이를 닦지도 않고  냉온수기에 뒤집어 얹더니, 습관처럼 “우리 팀 여직원들 나 아니었음 오늘 커피도 못 마셨네.” 운운하며 입에 침을 묻혀 종이컵을 빼냈다. 나머지 컵에도 침이 묻었을 것 같았다. 팀장은 책상 아래로 몸을 푹 숙이고 있었는데,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아하니 무좀 걸린 발가락을 긁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일어나 쓱 코를 훔쳤다.

그들 중 누구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물티슈로 닦는 사람조차 없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평소엔 들리지도 않았을 희미한 방구소리까지 전부 신경 쓰였다. 수진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위생만으로는 부족해. 더러운 놈들이 너무 많아서 이걸로는 구별이 안 되잖아.

어쩔 수 없이 수진은 한나가 알려준 두 번째 기준으로 외계인을 선별해보기로 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다음으로 의심스러운 건 비인간적인 놈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감정도 없이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나 했어. 이제 보니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이었던 거야, 빌어먹을 놈들.’

제일 의심스러운 건 팀장이었다. 그는 여직원들만 골라 있는 트집 없는 트집 다 잡아서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다음, 등에다 대고 “이래서 여직원들이랑 일하면 불편해.” 운운하는 변태 자식이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남자 직원들에게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아, 혹시 그 놈들도 전부 외계인인 건가? 그래서 상냥하게 대해준 건가? 어쩐지 항상 지들끼리 술 마시러 다니더라.

건너편 기획팀의 차장은 또 어떻고. 몸살감기로 앓아누웠을 때 계속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오늘까지 홍보 시안 꼭 넘겨줘야 한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부친상을 당한 외주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가서 왜 프로답지 않게 작업 기간을 넘기냐 닦달하기도 했었고. 그런 놈을 에이스라고 부둥부둥거리는 그 위의 팀장은 또 어떻고.

의심하자니 끝도 없었다. 수진은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메모지에 차분히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수진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식당으로 향했다. 직원들이 식판을 하나씩 들고 배식용 음식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저기 침 다 들어갔겠지? 신경 쓰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밥맛이 떨어진 수진은 다시 식판을 내려놓고 곧장 7층으로 향했다.

 

 

6

그녀와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한나도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어떤 거 같아?”

한나가 물었다. 수진은 쪽지를 건네며 말했다.

“의심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언니, 이제 어쩌죠?”

“어쩌긴, 하나씩 조져야지. 뒤통수 때리면 정체 드러나는 거 봤잖아.”

“때렸는데 외계인 아니고 사람이면요.”

“음…”

한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놈들은 좀 맞아도 되잖아.”

“하나씩 해치우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텐데요.”

“맞아. 일단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부터 모아야겠어.”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한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어.”

“누구요?”

“개발팀 조미주 대리. 절대 입에 술 안 대는 걸로 유명하거든.”

“아, 술이 저보다도 약하신가 봐요?”

“아니, 자기는 술이 너무 세서 한 번 억눌러둔 봉인이 풀리면 세상에 큰일이 벌어진다나 뭐라나.”

뭐야 그게.

한나의 설명에 따르면 조미주 대리의 정신세계는 4차원을 훌쩍 넘어 주변 직원들과도 딱히 소통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고, 당연히 회식에 참여하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헤드폰을 눌러쓴 채 과묵하게 일만 했다. 게다가 문고리 하나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 결벽증까지. 현 상황에선 회사 내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말을 믿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혹시 그분이랑 친하세요? 저는 안 친해서…”

“응, 괜찮아. 미주 씨도 우리 조합원이거든.”

든든한 위원장 한나가 말했다.

한나와 수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미주가 일하는 13층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미주는 양반다리로 의자에 앉은 채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광대뼈까지 내려앉은 다크서클을 애써 무시하며, 한나는 미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미주 씨. 할 얘기가 있는데.”

“……”

“미주 씨?”

미주는 말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한나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한나와 수진은 함께 메시지를 확인했다.

—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알고 있으니까 소란 피우지 마세요.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썼다.

— 응. 근데 왜 문자로 해요? 말로 하지.

미주는 한숨을 쉬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 지금 다들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 거 모르시겠어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한나는 긴장하며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지잉.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 티내지 말라니까.

“어느 부서에서 오셨어요?”

누군가 그들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얼굴을 본 적 있는 프로그래머였다. 한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감추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지원팀 요한나 대리입니다. 이쪽은 홍보팀 인턴 한수진 사원이고요.”

“아 그러시구나. 커피 한 잔씩 하세요.”

남자는 활짝 웃으며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를 건넸다. 얼떨결에 컵을 받아들었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나와 수진이 컵을 들고만 있자 남자는 재촉하듯 물었다.

“안 드세요?”

“아, 네. 밑에서 마시고 와서요.”

한나가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러시구나. 전 또 믹스 커피 같은 건 안 드시나 했죠. 요즘 그런 분들이 많아서요. 아니면 카뉴로 다시 타 드릴까?”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한나와 수진은 꾸벅 인사했다. 하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쭉 종이컵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안 드세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커피가 이게… 종이컵이… 환경이… 그치, 수진아?”

“네? 네! 그렇죠! 이게 환경 호르몬이… 이, 이게 아닌가?”

두 사람이 뜸을 들이자 직원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목석처럼 서서 조용히 응시하는 시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나는 미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함정인가?

의심이 떠오른 순간 다시 핸드폰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한나는 곧장 화면을 쳐다보았다.

— 3초 후에 복도로 뜁니다. 실시.

에라 모르겠다. 한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셋. 둘. 하나.

“수진아 뛰어!”

그녀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13층 모든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피부에 물이 닿자 외계인들은 일제히 “쐐애애애애애애애액———!” 소리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한나와 수진과 미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13층입니다.

땡. 땡. 땡. 땡. 땡. 땡. 복도에 몰려 있는 여섯 개의 엘리베이터가 일제히 열리며 무표정한 직원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더듬이가 돋아있었다. 미주는 손에 쥐고 있던 노트북을 재빨리 두드렸다. 머리 위에서 또 한 번 수돗물이 쏟아졌다. 세 사람은 비상문을 열고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아래 쪽에서 “쐐애애애액———“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위로 갑시다!”

한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미주와 수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14층, 15층, 이윽고 20층까지 올라왔지만 다시 복도 쪽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체강탈 외계인들이 어디에 얼마나 숨어있을지 알 수 없었다.

“좀 쉴까요?”

한나는 멈춰서서 호흡을 회복하며 아래쪽에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더는 쫓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한나는 미주의 헤드폰을 벗기며 물었다.

“…두 달쯤 전?”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회사 그만두면 월급을 못 받잖아요.”

“아니이, 지금 월급이 문제가…”

하긴, 문제는 문제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보안 팀 CCTV 기록을 좀 훔쳐봤는데. 감염된 사람이 30퍼센트 정도 되요. 아마 오늘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더 늘어나겠죠.”

“물이 약점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도 손을 안 씻더라고요. 물을 싫어하는구나 싶었죠.”

“그 외에 알아낸 건 없어요?”

“저도 딱히… 일하느라 바빠서요. 우리 팀 지금 크런치 모드거든요.”

망할 헬조선. 지금 프로젝트가 문제야? 미주의 4차원성에 질려버린 한나는 다시 그녀의 귀에 헤드폰을 씌웠다.

“언니들, 이제 어떡하죠? 아래쪽은 그 괄태충들이 다 지키고 있을 텐데…”

한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장실로 가야지.”

“네?”

깜짝 놀란 수진은 한나의 팔을 꽉 붙잡았다.

“보스 잡고 엔딩 봐야지.”

“저도 동의해요. 어차피 달리 방법도 없고.”

미주가 말했다.

— 나도 동의.

세 사람의 핸드폰에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010-8888-XXXX? 누구 번호지? 아는 사람 있어요?”

한나가 물었지만 다른 두 사람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 23층으로 와요. 여긴 안전하니까.

메시지를 읽은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진이었다.

“혹시 함정일까요?”

“음…”

한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23층이면 재무실이군요.”

미주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세 사람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어.

“갑시다.”

한나가 말했다. 다른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7

세 사람은 23층까지 올라가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23층은 텅 비어있었다. 한나는 곧장 목적했던 방으로 향했다. 재무실장실. 문을 열자 메시지의 주인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요한나 위원장님.”

“심 실장님.”

한나는 꾸벅 인사했다.

“에이, 인사는 무슨. 나도 일개 조합원인데.”

185센티미터가 넘는 늘씬한 숏컷 머리의 여성이 미소지으며 한나를 맞이했다. 왜 언니 앞에서 저렇게 웃는 거람. 저 키에 슬림핏 바지 정장은 좀 반칙 아니야? 수진은 그녀를 견제하듯 한나의 곁에 단단히 들러붙었다.

“한나 씨, 이거 받아.”

심 실장은 사무실 한쪽에 서 있는 기사 모양의 마네킹에서 오각형 방패를 뽑아 한나에게 건넸다. 다음 달에 출시할 신작 게임의 홍보용으로 제작된 소품이었다. 가짜여도 묵직한 무게감만은 진짜였다.

“어, 이거. 제가 디자인한 건데…”

디자인을 알아본 수진이 쑥스러워하며 방패를 쓰다듬었다.

“음… 수진 씨는 이거?”

수납장 서랍에서 권총이 두 자루 튀어나왔다. 작년에 출시한 모바일 게임의 인기 캐릭터가 사용하던 소품이었다. 수진이 당황하며 손사래 치자 심 실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거 물총이니까.”

심 실장이 단단한 손길로 권총을 양손에 하나씩 쥐여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손등에 닿자 수진은 혼이 쏙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붕붕 휘둘렀다. 정신 차려 한수진, 한나 언니가 옆에서 보고 있잖아.

“미주 씨는 뭐가 좋을까?”

“저는 이거면 됩니다.”

미주는 점퍼 주머니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 보였다.

“좋아. 그럼 가볼까?”

심 실장은 세 사람에게 KF94 등급의 마스크를 한 장씩 나눠준 다음, 마네킹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아 어깨 위에 둘러맸다.

“잠깐만요!”

한나가 모두를 멈춰 세웠다. 한나는 사무실 문을 막아서며 매섭게 심 실장을 노려보았다.

“실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한나 씨랑 별 차이는 없을걸?”

“그래도 일단 말해주세요.”

“좋아. 가면서 설명할게.”

네 사람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장실이 있는 47층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걸음을 옮기며 심 실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사장이 이상해진 건 석 달쯤 전이었어. 임원 회의에서 갑자기 정수기 회사를 인수해야겠다는 거야. 우린 게임 회사인데 갑자기 왜 정수기 사업을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어. 그래서 좀 뒤를 캐봤지.”

그녀가 말했다.

“그랬더니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더라고. 나도 모르게 회식비 집행은 열 배나 늘어나 있지, 직원들은 매일같이 술판이지, 거기다 임원들이 겁도 없이 모텔이랑 룸살롱 비용까지 법인 카드로 싹싹 긁었더라고. 내 허락도 없이 전부 뒤질라고 진짜.”

심 실장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놈들을 한 번 따라가 봤어. 그리고 실체를 알게 됐지.”

“술자리에 따라가셨다고요?”

한나가 끼어들어 물었다.

“응.”

“누가 술잔을 돌리거나 하진 않았고요?”

“응? 누가? 감히 나한테?”

심 실장이 대검을 어깨에 얹은 채 되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걱정 마. 1차에서 중간에 빠져나온 다음에 조용히 사장을 미행했어.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아마 다들 알고 있는 눈치인데.”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내가 꽤 오랫동안 지켜봤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건 이렇게 셋뿐이더라고. 좀 긴가민가한 애들도 있긴 한데, 걔들은 영 미덥지가 않아서 제외했고.”

심 실장은 ‘바이러스’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바이러스 감염이 확실한 건가요?”

“응. 대외협력 본부장이 직접 실토했으니까 거의 확실할 거야.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인데 이름이 무슨 ‘순수’라던가. 이걸 감염시키는 게 외계인 놈들한테는 종교의식 같은 거라더라고.”

대외협력 본부장이 어디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한나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사장을 잡으면 뭘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조져야지.”

“그다음에는요?”

“조져보면 알겠지.”

아, 그러시구나.

한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8

이십 층 가까이 계단을 올랐더니 허벅지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한나는 방패를 지팡이처럼 짚다시피 하며 네발로 빌딩을 기어올랐다.

“그러게 한나 씨, 주말에 등산 가자고 할 때 같이 가지.”

심 실장이 말했다.

“그러게요.”

한나는 숨을 헐떡이며 한참 늦은 후회를 뱉었다. 이제 거의 도착한 듯싶었다. 최상층 스카이라운지 바로 아래, 사장실이 있는 46층 복도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바로 출발?”

턱에 매고 있던 마스크를 끌어 올린 심 실장은 손수건으로 문고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나머지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포지션을 잡고 마스크를 썼다.

문을 열자마자 네 사람은 사장실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텅 빈 복도를 꺾자마자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직원이 보였다. 한나는 방패를 끌어당긴 채 왼쪽에 서 있는 놈에게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쓰러진 놈의 얼굴에 수진이 물총을 분사하자 놈은 “쐐애애액——“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천천히 걸어온 미주가 전기 충격기로 놈을 기절시켰다. 그러는 사이 반대편에 서 있던 직원이 심 실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 실장은 대검의 옆면으로 상대의 몸통을 후려쳐 한방에 기절시켰다.

심 실장은 잠긴 유리문에 화분을 던졌다. 와장창 깨지는 파편을 밟고 네 사람은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비서뿐이었다.

“당신들! 지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비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들에게 따져 물었다.

“사장 어디 갔어?”

“오늘 출장이세요.”

“어디로?”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묶어.”

심 실장이 턱짓으로 지시했다. 한나와 수진은 비서의 입에 마스크를 씌우고 팔을 묶었다.

“사장 컴퓨터에 신도 명단이랑 증거가 남아 있을 거야. 미주 씨, 부탁해.”

미주는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나는 비서를 끌고 미주의 뒤를 따랐다. 뒤이어 심 실장과 수진도 안으로 들어왔다. 수진은 문을 걸어 잠갔다.

“비서님, 이거 암호가 뭐죠?”

미주가 물었다. 하지만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나는 비서의 귓가에 방패를 대고 사장의 명패로 쾅쾅 두드렸다. “쐐애애애애액————!” 더듬이가 튀어나오도록 몇 번이나 징을 울렸지만 비서는 완강히 버텼다. 결국 심 실장이 앞으로 나서서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한나 씨, 달팽이가 반으로 쪼개지면 둘이 되던가?”

“그건 플라나리아고요.”

“똑같은 거 아냐? 한번 해보자.”

“자, 잠깐!”

그제야 놈이 반응을 보였다.

“나, 나는 컴퓨터 같은 거 쓸 줄 모른다! 쐐애애액———!”

“뭐?”

“사, 사장 놈이 알아서 켰다. 암호 같은 거 나는 모른다!”

“아무래도 진짜 같은데?”

심 실장이 말했다. 미주는 난처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해킹으로 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요.”

“그럼 이제 어쩌죠?”

수진이 물었다.

“키보드 밑에 한 번 보세요. 모니터 옆이나.”

한나가 말했다. 미주는 키보드를 뒤집었다. 과연 거기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내가순수짱123**’

“이게 IT 회사 CEO가 쓸 암호야?”

미주가 혀를 차며 키보드에 입력하자 화면이 열렸다. 바탕화면에 무슨무슨 계획서니 무슨무슨 등급표니 하는 파일들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미주는 곧장 USB에 파일들을 복사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수진이 말했다.

“너무 조용해요. 왜 아무도 없죠?”

“다 예배하러 갔나 보죠.”

미주가 답했다.

“예배요?”

미주는 자신의 노트북을 조작해 2층 대강당의 CCTV를 보여주었다. 오백 명 가까운 직원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항상 4시만 되면 이렇게 모여요. 그동안엔 인원이 적어서 별로 티가 나지 않았는데, 오늘  확 늘어난 것 같네요. 공격적으로 감염시킨 모양이죠.”

“저 사람들이 전부 감염자라고요? 회사 사람 절반은 되는 거 같은데…”

수진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사람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연단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천 부장이었다.

“오오 순수여!”

그가 외치자 모든 이들이 ‘순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순수! 순수!”

“이제 곧 우주의 가을이 온다!”

“순수! 순수!”

쐐애애애애애———! 외침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튀어 오른 침이 다시 서로의 입으로 떨어졌다. 어찌나 많은 습기가 뿜어나오는지 천 명을 수용하는 대강당에 뿌연 안개가 낄 정도였다. 천 부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안개를 들이마시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등 뒤에 PPT 화면이 띄워졌다.

“본 예배에 앞서 여러분들이 가장 기다리는 기쁜 순서가 찾아왔다.”

천 부장이 말했다.

“바로 가챠 타임!”

천 부장의 등 뒤에 커다란 QR코드가 떠올랐다. 샛노란 테두리를 보아하니 코코아톡 송금을 위한 결제 코드인 모양이었다.

“우주의 가을이 찾아오면 지구는 멸망하나니! 오직 6성 S-S-R 순-수-레어 카드를 소지한 진짜 신도만이 안드로메다 은하의 중심인 ‘순수’ 본성(本星)으로 이주할 수 있다! 어서 가챠를 돌리거라! 한 번에 100만 원!”

천 부장이 소리치자 신도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 QR코드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휴대폰에 번쩍번쩍 카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별 하나부터 여섯 개까지 제각각 다른 등급의 카드가 뽑혀 나왔다. 여기저기서 기쁨의 환성과 슬픔의 탄식이 쏟아졌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참을 돌리는 신도들도 있었다. 맛이 간 눈빛으로 “으헤헤 100연참 감다!” 하고 소리치며 주위의 박수 세례를 받는 사람마저 나올 정도였다. 천 부장은 이 모든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신도들! 이제 충분히 신앙을 증명했느냐?”

“쐐애애애애애액————!”

“내일도 또 예배가 있으니 어서 결제할 금액을 마련해 오거라! 너희 옆의 신도들은 벌써 다들 6성 카드를 마련했다. 이제 우주의 가을이 머지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쐐애애애애애액————!”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천 부장은 QR코드를 내리고 업데이트 공지를 띄웠다.

“자 그럼 다음 달부터 적용될 새로운 시스템을 공지하마! 바로———”

등 뒤의 화면에서 화려한 그래픽이 펼쳐졌다.

“7성 U-S-S-R 울트라-순-수-레어 카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휴거 때 타고 갈 안드로메다행 방주의 크기는 정해져 있으나, 6성 카드를 가진 신도가 너무 많아지고 말았다. 해서, 앞으로는 7성 카드를 가진 신도만 데려갈 것이다!”

거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미 6성 카드를 가진 자들인 모양이었다. 반면 아직 6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새로운 기회라 생각하며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한가지 업데이트가 더 있다!”

천 부장이 소리쳤다.

“바로 한계돌파 시스템! 6성 카드를 6장 모으거나, 신규 신도 100명을 데려온 신도는 7성 카드 한 장으로 교환이 가능하다! 기회는 너희 모두에게 열려있다!”

“쐐애애애애애액————!”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음 달엔 8성 카드가 나오겠는데?”

심 실장이 말했다.

“완전 미쳤어…”

한나는 치를 떨며 비서 앞으로 다가갔다.

“너희들 원하는 게 뭐야?”

비서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아아.”

비서는 중2병에 걸린 듯한 연극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크큭, 미개하고 불행한 자들이여. 순수를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우주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너희는 씻을 죄를 지었다. 물과 계면활성제라는 우주에서 가장 사악한 두 가지 물질을 숭상한 죄! 순수를 파괴하는 끔찍한 악마의 물질을 뿌리 뽑지 못한 죄 말이다! 이제 곧 우주의 가을이 찾아와 너희 종족을 모조리 멸할 것이다! 오직 씻지 않는 자만이 방주를 타고 안드로메다의 천국에 가리라!”

진심인 모양이었다.

“오오 순수! 순수!”

놈은 점점 자기 역할극에 몰입하더니 알 수 없는 외계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걸 좀 보셔야겠는데요.”

미주가 손짓하며 말했다. 네 사람은 함께 사장의 컴퓨터로 다가가 화면을 보았다. ‘순수 선교단 지구 행성 단기선교 계획.docx’ 라는 이름의 파일이었다. 내용을 전부 읽어내려간 네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계획서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조잡했기 때문이었다.

 

X월 X일

지역 자경단에 발각되어 우주선 추락함. 다행히 현지인을 만나 ‘순수’를 전도할 수 있었음. 그것도 ‘사장’이라는 고위 신분. 역시 모든 것은 위대한 ‘순수’의 뜻대로.

순교라면 두렵지 않다.

 

미주는 다른 페이지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X월 X일

사장 놈을 시켜 천 부장에게 ‘순수’가 섞인 술을 먹였음. 취하면 우리 편.

정수기 회사를 사야겠다. 정수기 필터에 ‘순수’를 바르면 한 번에 끝.

 

또 다른 페이지도 있었다.

 

X월 X일

정수기 회사 못 삼. 나쁜 심 실장. 대신 회장을 우리 신도로 전도시켰다. 이제 그 회사 내 꺼.

사장이 국회의원을 예배에 데려오기로 했다. 나중에 대통령 되면 이 나라 내 꺼. 개꿀.

 

“이게 대체…” 한나가 말했다.

“뭐야…” 수진이 이어받았다.

“이미 늦었나.”

심 실장이 비서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이거 니가 쓴 거냐?”

“크큭, 그렇다.”

“사장은 언제 돌아오지?”

“크큭, 이미 돌아왔다. 이 건물은 완전히 폐쇄됐어. 너희는 못 빠져나간다.”

미주는 곧바로 CCTV 화면을 확인했다. 1층과 지하 주차장 출입구마다 셔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심 실장은 비서의 뺨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얼굴 피부가 뜯겨나가며 괄태충의 끈적한 본체가 드러났다.

“네가 진짜였군. 사장은 바지였어.”

심 실장은 비서를 바닥에 팽개치고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크큭, 이제야 눈치챘느냐. 내가 바로 안드로메다에서 온 ‘순수’의 재림 선교사다! 오오! 위대한 순수여! 우주의 가을이여! 크큭!”

“크큭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둘로 쪼갠다?”

심 실장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크… 포기해라, 이교도들아.”

CCTV를 살피던 수진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 여기요. 고에이 정수기 회장이에요. 역시나…”

예배당 맨 앞줄에 정수기 회사의 오너 일가가 앉아 있었다. 계획서에 쓰여있는 대로 이미 감염이 끝난 모양인지, 그들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너희가 눈치채는 바람에 일정을 앞당겼지. 오늘 드디어 ‘순수’의 성전을 시작하기로 말이다. 조용히 지내는 건 오늘로 끝이다. 오늘 밤 이 건물 안에 있는 인간들 전부 신도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를 통째로 ‘순수’께 봉헌할 것이다! 크…”

“사장이 왔어요!”

화면 속, 수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사장이 보였다. 그는 미래보수당 소속의 지역구 국회의원과 손을 잡고 연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의원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게 될 것인지도 모른 채,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신도들에게 인사했다.

“여러분 다다음 달에 선거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에도 꼭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제가 ‘순수’를 정식 국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꼼짝 마!”

감염자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의원은 그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신도들은 들뜬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정말이지 못 볼 꼴이었다. 한나는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이제 어쩌죠?”

수진이 물었다. 한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심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 실장도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미 직원들 절반 이상이 넘어갔고, 탈출로는 놈들에게 봉쇄되었다. 설령 도망칠 수 있다 해도 그게 능사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회사의 전 직원은 물론 국내의 정수기 공급망과 국회마저 외계인들 손에 넘어갈 터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저기, 제가 작전이 하나 떠올랐는데.”

정적을 깨고 미주가 말했다.

“미주 씨, 정말요?”

한나가 되물었다. 미주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 쪽으로 다가와 그의 몸을 뒤졌다. 미주는 예상이 맞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물건을 끄집어냈다. 지혜의 고리처럼 복잡하게 생긴 장치였다. 미주는 장치를 내밀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걸 사용합시다.”

장치를 유심히 살피며 한나가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9

“자, 의원님! 이제 의원님과 우리 사이의 끈끈한 우정을 증명하기 위해 사장님과 입맞춤을 거행하시겠습니다!”

천 부장이 크게 외쳤다.

의원은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표를 얻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양치도 하지 않은 입을 내밀며 천천히 다가왔다. 의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씻지도 않은 손이 후보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무대 뒤에서 직원들이 커다란 고무 대야를 갖고 들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잠깐!”

그 순간, 한나가 연단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뒤따라 수진이 나타나 사장의 얼굴에 물총을 쏘았다. 비명을 지르는 사장을 방패로 날려버린 다음, 한나는 연단을 향해 외쳤다.

“순수 같은 소리 하네, 이 계면활성제들아! 무기한 서버 점검이나 당해라! 7성 카드 롤백 돼라! 우주에 가을은 무슨, 여름만 평생 계속 되라!”

“쐐애애애애애애애액——————!”

흥분한 신도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노트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주가 원격으로 스프링클러를 조작했다. 대강당에 소나기처럼 물줄기가 쏟아지자 신도들은 한층 더 흥분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튀어요! 죽기 싫으면!”

한나는 의원의 팔을 붙잡고 강당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진도 권총으로 엄호하며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신도를 발로 걷어찬 다음, 곧장 복도 끝으로 향했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미주가 대기하고 있었다.

“빨리 타!”

다 함께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자마자 한나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다, 당신들 뭐요?”

“저희는 의원님 편입니다.”

“웃기지 마! 얼굴도 전부 마스크로 감춘 수상한 놈들이…”

수진은 의원의 입을 마스크로 틀어막았다.

“맞다, 의원님도 쓰세요. 감염되기 싫으면.”

“이, 이게 무슨…”

의원이 웅얼거렸다. 한나는 후보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의원님, 잘 들으세요. 오늘 제가 구해드린 겁니다. 이게 다 목숨 빚이다 생각하고 앞으로 재선 성공하시면 주 4일제로 노동시간 단축도 좀 하시고, 공휴일도 두 배로 늘리고, 최저임금도 만 오천원으로…”

“최저임금은 안 돼!”

참다못한 수진이 그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흥이다! 어차피 나도 너 찍어줄 생각 없었거든!”

엘리베이터가 금세 47층 최상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심 실장이 꽁꽁 묶인 비서와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심 실장은 비서를, 나머지 세 사람은 기절한 의원을 질질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쫓아온 감염자들이 계단 아래쪽에서 쐐애애애애애액———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서둘러!”

비서의 더듬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심 실장이 소리쳤다.

“아니, 왜 기절을 시켜가지고. 무겁게.”

투덜대는 미주를 쏘아보며 한나가 수진을 변호했다.

“아니 미주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차피 협조 안 할 놈인 거 미주 씨도 봤잖아. 차라리 기절한 게 낫지.”

“그쵸? 언니? 그쵸?”

“시끄러워, 빨리 올라가기나 해!”

심 실장이 옥상 문을 열며 소리쳤다.

헬기 착륙 마크가 그려진 널따란 옥상이 보였다. 그들은 옥상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어느새 쫓아온 감염자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미끼를 제대로 문 모양이었다. 감염자들은 몇 겹으로 원을 만들어 그들을 포위했다. 심 실장은 대검으로 괄태충 비서의 목을 겨누었다.

“가까이 오면 더듬이 잘라버린다.”

파지직. 미주도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대며 심 실장을 거들었다.

“전기로 지져버립니다.”

흐르는 콧물을 쓱 닦으며 천 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더 도망칠 곳은 없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순수’를 받아들이거라.”

윤 대리도 나서서 그를 거들었다.

“‘순수’는 진정으로 세상을 옳게 변혁하느니.”

“시끄러워!”

한나가 소리쳤다.

놈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사방에서 동시에 몰려드는 통에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놈들은 네 사람의 마스크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구름 속에서 한줄기 새하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어?”

수진이 놀란 표정을 짓자 감염자들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모두가 광선을 보았다. 광선은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커지는 게 아니라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폭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얼마나 높은 곳에서 쏘아지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광선은 빌딩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한나는 수진을 감싸듯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감염자들은 쐐액 쐐액 자기들끼리 불안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야?” “저게 뭐야?” “큰일이다.” “도망쳐!” 갑자기 패닉에 빠진 감염자들은 저마다 기도문 같은 것을 외계어로 줄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광선은 한 톨의 자비도 없이 그들을 향해 덮쳐들었다. 한나와 수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 빛에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옥상에는 한나와 수진, 미주와 심 실장, 그리고 기절한 의원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주위로는 텅 빈 옷가지들만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10

“자경단이었어요.”

“네?”

“자경단 모르세요?”

기자는 당황스럽다는 듯 볼펜으로 ‘자경단’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수첩에 덧입혔다. 한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다른 손으로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자는 수첩의 페이지를 넘겼다.

“우리 태양계를 포함해 은하계 7분면은 소위 말하는 인격신 계열의 종파들이 주류인 곳이에요. 감염신들이 아니라요. 말하자면 그 괄태충은 개척교회를 세우러 지구에 숨어들어온 선교사였던 겁니다. 그것도 종교적으로 아주아주 적대적인 지역에요. 제가 이메일로 자료 다 보내드렸는데, 안 읽어 보셨어요?”

“아아. 종교요…”

기자는 ‘종교’ 라고만 썼다.

“자경단을 부른 건 저였어요. 선교사가 가지고 있던 통신 장치를 제가 작동시켰거든요. 일부러 모든 주파수에 잡음 신호를 흘렸죠. 외계인 선교사와 그 추종자들은 모두 자경대에게 끌려갔어요. 혹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었다고 표현해도 좋고요.”

기자는 다시 ‘자경단’이라고 크게 썼다. 그건 아까 썼잖아, 이 사람아. 상대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의욕이 꺾인 한나는 빨리 결론만 정리해 알려주었다.

“사라진 분들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셨죠? 저도 몰라요. 아마 은하계 어딘가의 외계 행성에 감금되었겠죠. ‘순수’라는 감염신을 숭배한 죄로.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 기사로 쓰던지 말던지는 기자님 마음. 그럼 저는 이만.”

한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떠났다. 아마 기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한나는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사건이 일어난 후 네 사람은 직장을 옮겼다. 그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사건은 점차 잊혀져갔다. 국내에서 손꼽히던 회사가 하루 만에 망하고, 그 직원 중 수백 명이 실종되었어도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고, 최저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과 안주를 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골목길을 걸어 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녀는 현관문을 열었다. 조용했다. 그녀는 대충 외투를 던져두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수진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손 안 씻었죠?”

댓글 2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4.11 23:23 댓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주로 염두에 두고 쓰셨겠지만, 신체강탈자들과 주인공들의 역학관계나, 역겹지만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서 오랜만에 로드리게즈의 <패컬티>가 생각납니다.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 한때는나도님께
    글쓴이 이경희 20.04.12 08:41 댓글

    앗, <패컬티>를 알아봐주시다니 반갑습니다! 전작도 그렇지만 이 시리즈는 제가 좋아하는 한가지 장르를 골라 패러디와 클리셰 비틀기를 마음껏 집어넣고 있는데요. 외계인이 물을 싫어하는 건 <패컬티>의 설정을 뒤집은 것이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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