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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네거티브 퀄리아

2020.05.01 00:0005.01

네거티브 퀄리아

(Negative Qualia)

pilza2


예전에 저 옆동네에 김영준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몇 년인가 전에 불의의 사고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이 되었는데, 가방끈도 짧고 가진 기술이라곤 운전 면허밖에 없지만 새벽에는 도매시장에서 농산물 운송, 낮에는 택배 배송보조,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갔다.
그 남자는 원체 숫기가 없고 낯가림이 심했지만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일터에서 만나는 주위 어른들은 모두 남자를 아끼고 좋아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비록 말뿐이긴 해도 딸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인데, 지금도 화재로 크게 다쳤을 때 살려준 병원에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찾아가서 헌혈을 하고 있다. 병원에 대한 은혜 갚기도 되고 예전의 자기처럼 피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도 되니 일석이조가 아니냐고 말하니 정말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가.
남자는 혼자서 살기에 딱히 돈 쓸 일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원체 씀씀이가 적어서 집세와 식대 같은 최소한의 의식주를 위한 지출 이외에는 꾸준히 저축을 하여 그간 모은 돈도 제법 되었다. 마흔이 되면 이 돈으로 개인택시를 장만하고 착한 여자 만나 결혼해서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살자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하루의 대부분을 차를 타고 다니며 보내던 남자가 점차 운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얼핏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정말로 일어난 이상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행위부터 끝없이 이어진 듯한 긴 도로, 앞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차량의 행렬,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가차 없이 경적을 울리거나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는 거친 운전자들…… 이 모두가 남자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는 어부가 바다를 혹은 심마니가 산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가령 옆 차선에서 달리던 차량이 깜박이도 켜지 않고 머리부터 들이밀며 막무가내로 끼어들거나, 신호대기를 위해 착실하게 멈춰 섰는데도 빨리 안 가고 뭘 하냐며 뒤에서 재촉 경적을 울려댈 때마다 남자는 미안함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나가던 옆 차에서 거칠고 사나운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힐 때면 남자는 상대에게 보이지도 않을 사과를 연거푸 하며 고개를 숙이곤 했다.
아무리 평소에 겁이 많고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주눅이 드니 어디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원인을 찾아보면 한 해에 자동차 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지 알려준 뉴스를 보고 난 후부터가 아닐까 싶다.
남자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운전과 지나가던 도로와 스쳐 지나던 차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아찔하며 공포스러운 요소인지를. 그들은 언제라도 사고가 나고 차가 부서지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위험인자인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작두의 칼날 위를 걷는 셈이었고, 포화 속을 헤매는 병사에 다름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를 헤쳐 나가는 외줄타기였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남자가 모는 차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며 주춤거리기 일쑤였고, 사자가 배 채우고 물러나기만 기다리던 하이에나들이 얼룩말 시체에 모여들 듯 다른 차들이 그 자리에 마구 끼어들곤 했으니 결과 남자의 운송은 종종 늦어지곤 했다. 그러면 기다리던 고객들이 화를 내고 불편해하니 그게 또 미안해서 거듭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 다음부터는 더 빨리 달려야지 생각하며 속도를 올리다가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다시 늦추다 바짝 따라오던 뒷차랑 부딪칠 뻔하여 또 놀라고, 어쩌다 정지선을 살짝 넘어가기라도 하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죄스러워 하고, 그래서 또 차의 속도가 줄어들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계속 되면서 남자는 운전으로 먹고 살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후 남자는 자신을 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싸늘하고 날카로워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전부 내가 못나고 형편없기 때문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이 심해지자 남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비는 일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과할 정도로 큰 잘못이 아니라고 달래거나 웃으며 위로해주기도 했으나 어떤 사람은 됐다며 무뚝뚝하게 사과를 받아들이거나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사과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남자는 사과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을 상대하기마저 귀찮아서 받아들인 척만 했던 것이고, 사과를 거부한 사람은 아예 자신의 사과를 받을 생각도 없기에 그랬던 것이며, 웃거나 위로한 사람은 상대가 꼴도 보기 싫어서 억지 웃음이나 마음에 없는 소리로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상대방이 남자에게 어떤 표정과 몸짓을 보이며 무슨 말을 해도 남자는 전부 다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혹은 감추기 위한 어색한 연기라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무심한 눈길을 포함해 타인의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그들은 모두 본심을 감추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나에게 보이는 눈빛, 표정, 말, 몸짓은 전부 거짓된 혹은 꾸며진 것이다. 사실 그들은 모두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 얼마나 추악하고 혐오스러운가, 인간이란 존재는!

남자가 집에 틀어박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도피를 시작한 것은 그런 결론에 이른 후부터였다. 집 밖으로 나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당연히 일도 하지 않으니 통장의 잔고는 조금씩 줄어들었으며, 그에 반비례하여 남자의 슬픔과 괴로움은 날로 늘어만 갔다. 마치 돈과 시간을 지불하여 죄책감을 사들이는 것처럼 남자의 인생은 우울하고 무거워졌다. 그의 삶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수감생활에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예금 통장을 펼쳐보면 점점 적어지는 숫자에 한숨만 나온다. 빼가기만 하고 넣지를 않으니 통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갔다.
“이런 한심한 놈. 내가 너 같은 녀석 먹여 살리려고 살점과 같은 돈을 떼줘야 하니?” 통장의 페이지가 펄럭거리며 이런 말을 내뱉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남자는 항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구멍에 대가리를 처박는 타조처럼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겨우 인출한 지폐들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면 남자는 기겁을 하며 지폐를 바라보았다. 세종대왕님께서 당장이라도 수염을 휘날리며 일갈하실 듯했다. 아니나다를까 이황 선생님이 벽력처럼 고함을 질렀다. “이 천하에 쓸모없는 밥버러지 같은 놈아! 네놈이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런데도 감히 나를 팔아서 네 잇속을 채우려 드느냐?”
편의점에 가니 젊은 아르바이트가 감정 없이 어서 오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남자의 귀를 통해 한 번 통역되면서 이렇게 들렸다. “아이 씨…… 조용히 책 좀 읽으려고 했더니 어디서 저딴 인간이 나타났담. 안 팔아줘도 되니까 꺼져줄래?” 남자는 굽신대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컵라면과 소주를 들고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소주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돌리니 비명소리가 남자의 귀를 찌른다. “소주 살려! 이놈이 날 빨아먹으려고 해!” 컵라면의 뚜껑을 여니 면발들이 진저리를 치며 중얼거린다. “내 몸을 바쳐서 너 같은 놈 배나 불려줘야 하다니, 나도 참 한심한 면(麵)이구나.” 물이 끓자 주전자 주둥이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꽥! 여기 인간쓰레기가 있어요! 살 가치도 없는 놈이 그래도 살겠다고 날 불에 지지고 있어요! 아악!”
남자는 이제 눈물을 글썽거리며 간청을 한다. 살고 싶다고, 배가 고프다고, 술을 안 마시면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엎드려 절을 하면서 제발 먹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누가 보면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이 소주와 컵라면을 놓고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으로 여길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서 남자는 하루에 한 번뿐인 식사를 시작한다. 소주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병째로 입에 대어 한 모금 마시면 병이 저런 인간과 입맞춤을 했다고 퉤퉤 침 뱉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라면을 입에 넣고 씹으면 고통스런 단말마가 입 안 가득히 울려 퍼진다.
한숨을 쉬며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면 소파가 진저리를 치는 바람에 도로 일어나곤 했다. 베개를 베면 베개가 몸을 비틀며 싫다고 난리를 쳤다. 무엇 하나 자신을 받아주는 대상이 없으니 남자는 하다못해 집 안에서조차 편안함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는 지옥의 형벌 같아졌고 그를 바라보는 모든 대상들, 이를테면 창문이나 꺼져 있는 TV화면, 냉장고와 밥솥, 마침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시무룩한 얼굴마저도 그에 대한 미움과 악의, 거부의 감정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고통과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가던 남자는 자포자기의 단계로 넘어갔는지 이제 세상의 종말이 와도 상관없다는 심정이 되었다. 사실 이 세상은 언제 멸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TV를 켜고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면 지옥은 거기에 있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교통사고나 화재가 일어났고, 살인·절도·강도·폭행·성범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시위를 하면 진압을 하고 파업을 해도 진압을 하고, 의견을 말하면 고소를 하고…… 여하튼 결과는 무조건 때려잡고 가둬넣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정치가들은 헛소리를 하고 뒤가 구린 위정자들은 큰소리를 친다. 청소년과 노인의 자살률은 높아지고 출산율은 낮아진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는 곧 절멸할지 모른다. 남은 소수의 사람은 짐을 싸들고 이웃 나라로 망명을 떠나 구걸이나 하면서 살아갈지 모르지.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괜찮을까? 택도 없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핵실험이 행해지고,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이 창고 안에 가득 넘쳐나고 있다. 화산과 지진, 해일과 산사태, 폭염과 폭설, 환경오염과 온난화……. 지금이라도 망해버리라며 세계를 향해 퍼붓는 저주만이 남자의 절망과 비탄을 해소하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렇게 현대판 탄탈루스처럼 살던 남자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생기게 된다. 그는 다음날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집을 나섰고,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상태임에도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는 김유신의 말처럼 곧바로 어느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는 목적지에 도달했고, 몽롱해진 상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남자는 차가운 병실에서 눈을 떴다. 한기가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진한 소독약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천장에 늘어선 원형 형광등에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을 추스르고 뻣뻣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몸을 일으켜보니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딱딱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참으로 흔하디흔한 광경이었다. 아마도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은 겪는 일이 아닐까. 돌연 기절했다가 깨어난 곳이 온갖 모니터며 오실로스코프며 의료기계로 보이는 것들이 전선을 주렁주렁 연결한 채로 늘어서서 불빛을 번쩍이고 윙윙 찍찍 삐삐 울어대고 있는 장소라면 인체 개조든 냉동 수면이든 하다못해 스케일링이라도 하는 곳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자신이 또 무언가를 잘못하여 누군가의 미움을 사서 잡혀온 게 아닐까 걱정했다. 혹은 자신에게 불치병이나 희귀한 질병이 생겨서 격리되었지 모른다는 추측도 들었다. 안 그래도 세상에 폐만 끼치고 있는 주제에 전염병이라도 생겼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어느 병원 수술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갑고 건조한 공기, 밝은 불빛, 얇은 이불과 인조 가죽 침대의 뻣뻣한 촉감에 이르기까지 병원이라기엔 환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하고 살풍경한 환경이었다.

이제 그 다음 순서로 들어간다. 보나마나 지금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사람은 탐욕스러운 눈을 번득이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임에 틀림없다. 역시나 “깨어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신지?” 같은 의례적인 인사를 반쯤 중얼거리듯 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고 바짝 마른 초로의 남자가 들어오자 긴장으로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흰 가운을 입고 있긴 했으나 손님 없는 오래 된 시골 병원 원장처럼 보이는 남루한 외모였다.
“자자,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일어나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 들어보고 나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더 물어보고. 알았으면…… 어디 보자, 오른손 검지를 살짝 들었다 놓아요. 알아 들었지요?”
남자는 즉시 들었던 머리를 다시 베개 위로 떨어뜨리고 오른손 외에는 전신 마비가 된 사람처럼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마취가 덜 깬 듯 어질어질한 점만 빼고 딱히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았지만, 무서운 분위기에 압도되고 공포와 죄악감으로 가득 찬 심장이 차마 의심이나 반발이 생기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릴까. 여기가 어디냐? 미안하지만 그건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그냥 여기는 정부에서 지원을 하는 아주 아주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연구소라는 것만 알고 있도록 해요.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그것도 설명하자면 길어지는데, 일단 헌혈을 하러 병원에 왔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계시겠죠? 거기서 당신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래서 여기로 옮겨졌다. 지금은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돼요. 그 다음에는…… 어디 보자, 왜 여기에 왔느냐? 이놈이 가장 중요하고도 놀라운 부분인데 말씀이지, 이것도 좀 있다가 찬찬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결국 명쾌한 해답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셈이었다. 답답하고 궁금해서 몸 안에 부풀어 오른 궁금증이 풍선처럼 빵하고 터질 지경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얌전하게 마비된 상태였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안경을 쓴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평범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금연초를 입에 물고 있었다.
“박사님, 깨어났죠?”
“음. 하지만 아직 안정을 취해야……”
“안정은 무슨. 그냥 뇌 스캔 좀 한 걸 가지고. 일어나라고 그래요. 뜸 들일 게 뭐 있어요? 그냥 내가 다 얘기하죠.”
“그건 안 되지, 이 사람아. 보통 충격을 받을 일이 아닌데…….”
늙은 소아과 의사처럼 보이는 박사는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으나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남자 곁으로 바짝 다가오며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김영준 씨? 편하게 일어나 앉아도 돼요.”
여자는 손을 뻗어 남자의 겨드랑이에 꽂아둔 체온계를 꺼내고 자기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펜라이트로 눈과 입 안 등을 살펴보았다. 그 능숙한 행동을 보자 차림새와는 다르게 진짜 의사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재빠르게 진찰을 마치고 입술을 움직여 금연초를 고쳐 문 다음 말을 이었다.

“우선 말씀드리는데 김영준 씨의 육체엔 아무 이상이 없어요. 헌혈하다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기절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을 발견하여 급히 입원시킨 것도 아니고, 전염병을 발견해서 격리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멀쩡하다는데 쓸데없는 예시를 들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다니 의사로서 좋은 태도가 아닌 것 같지만 두 사람 다 외모든 언행이든 의사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얼마 안 가 그의 짐작은 정답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보다 그쪽이 가진 문제는 정신적인 측면이에요. 본인도 자각하고 있겠죠? 자신에게 고민이 있다, 문제가 있다, 자신은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르다, 라는 것을?”
남자는 오른쪽 검지를 움찔거렸다.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말로 하시라니까요.”
당황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더 빨리 여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남자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아니, 사과하실 것 없어요. 이미 우리는 김영준 씨의 문제를 대부분 파악했거든요. 일단 그쪽이 평범한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니까. 그냥 시금치를 많이 먹으라든지 프로작을 삼키라는 식의 간단한 처방을 해줄 수 없는 문제임은 확실해요.”
마음의 각오를 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박사라 불리는 늙은 남자처럼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뜸을 들이는 태도도 답답하지만 이 여자처럼 대놓고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쪽도 가혹했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무리가 오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는 두 가지 다 견딜 수 없었다. 유리를 쇠못으로 긁든 한 번에 깨버리든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시금치야?”
뒤에서 박사가 물었다.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뽀빠이 몰라요? 먹으면 기운이 넘치잖아요. 사실 근육 생성에는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시금치에는 엽산이 많아서 우울증 예방에 좋답디다. 저도 뭐 그 분야는 관심이 없어서 시금치랑 브로콜리 정도밖에는 몰라요. 귀찮으니까 더 물어보지 말아주실래요?”
박사는 나이는 많지만 직급은 낮았는지 여자의 건방지게 느껴질 정도로 쏘아붙이는 말에도 군말 없이 물러났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자, 김영준 씨. 얘기를 계속 하죠. 우린 사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원이에요. 여기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연구시설이고요. 당신이 헌혈하러 왔던 종합병원의 지하에 있지요. 연구 분야는 기억과 감정, 연구 부위는 사람의 두뇌예요. 인간의 특정한 기억과 감정을 지우거나 바꾸는 일이 가능한지 연구하고 있죠. 이런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왜 비밀로 하고 있는지는 나중에 차차 얘기하도록 하고, 일단 궁금하실 내용부터 알려드릴게요.”
여자는 잠시 입에 문 금연초의 위치를 바꾸느라 말을 멈췄다. 어린애가 사탕을 입 안에 굴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습관인 것 같았다.
“그쪽은 자기 이름을 김영준이라고 알고 있죠? 그리고 3년 전에 사고로 가족과 기억을 잃었다, 이렇게 알고 있을 테고요. 화재로 가족은 모두 죽었고 당신은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는 바람에 화마로부터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렇게 말이죠. 그쵸?”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려다가 말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박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자, 이제부터 놀랄 차례이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게나.”
“어차피 기억에 없는 일이니 놀랄 것도 없어요. 사실 그쪽은 화재도 머리 다친 일도 겪지 않았어요. 바로 여기, 이 연구소에서 그쪽의 기억을 인공적으로 지웠거든요. 하지만 안심하셔도 되는 게, 이 모든 조치는 당신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일이에요. 연구소에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동의서만이 아니라 그쪽과의 대화를 영상으로 녹화해서 보관하고 있으니 원하면 언제든 보여드리도록 하죠.
그러면 왜 기억을 지우기를 원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건 바로 그쪽의 정체, 그러니까 기억을 지우기 전의 본래 당신을 알면 해결되는 문제라 이거죠. 김영준 씨, 당신의 진짜 이름은 김영준이 아니에요. 황용순, 이게 진짜 이름이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물어보지 않아도 듣는 순간 확실히 어디선가 들은 듯 본 듯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본 사건기사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듯한…… 하지만 그런 뉴스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설마 그가 당사자일 리는 없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겠지. 이제는 전혀 친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느껴진다. 듣자마자 사라졌던 과거의 기억이 번뜩 되살아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 들어보셨을 걸요. 5년 전에 우리나라를 그야말로 뒤흔들었던 연쇄살인마 황용순. 약 2년에 걸쳐 젊은 여성 7명을 납치해서 잔인하게 살해하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피해 여성의 신고로 체포당해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란 말씀이죠.
그런데 3년 전 새 정권 출범과 함께 내세운 법질서 확립 기조에 따른 대대적인 사형 집행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도된 황용순이 왜 여기에 있느냐? 그게 바로 지금 들려드릴 이야기의 핵심인 거죠. 조금 길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잘 들으세요. 이래봬도 국가기밀이니까.”
갑작스럽게 김영준에서 황용순이 되어버린 남자는 혼란으로 인해 이야기를 잘 들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자가 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은 이랬다.
지금 그 두 사람이 포함된 연구소는 인간의 두뇌가 기억을 저장하고 떠올리며 감정을 발생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연구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나노 머신을 이용하여 기억을 지우거나 만들고 감정을 조종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으로만 실행할 뿐, 실제 인간의 두뇌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은 위험성이 높고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어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급하는 분야의 민감함으로 인해 법제도의 미비, 윤리적 비난, 종교단체의 반발 등의 문제로 연구소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국가 기밀이 된 이유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사실 원래 이 연구를 발족할 당시 추진했던 최초의 목적은 기억 상실, 알츠하이머병, PTSD,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의 치료였고 이때까지만 해도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공두뇌 연구소 측에서 진행하던 나노 공학 분야의 성과와 결합한 결과, 나노 머신을 이용해 뇌의 완전한 구조와 매커니즘을 파악할 수가 있고 이를 통해 특정 성분 혹은 국소 부위의 신경전달물질을 통제하여 궁극적으로는 뇌를 조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자 연구 방향이 급전환되고 만 것이다. 기억뿐만 아니라 특히 공포와 같은 감정을 만들어 내거나 특정한 사물에 대한 반응이나 행동을 통제하는 등 결과적으로 인간을 조종할 수도 있어 군사적 목적으로 응용 가능함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박사는 쇠락한 마법사 같은 굽은 손가락을 들어서 천장을 가리키며 예를 들었다.
“저 하늘로 조그만 미사일을 하나, 아니 들키지 않으려면 작은 기구나 하다못해 풍선 하나라도 띄워서 공격 대상국의 하늘 위에서 터뜨린다고 가정합시다. 그 안에 집어넣은 수억, 수조, 그 이상의 셀 수 없이 많은 나노 머신이 뿌려져 사람들의 코나 입 등을 통해 뇌로 흘러 들어갈 거요. 그 나노 머신이 편도체를 자극하여 공포의 감정을 일깨우고 아세틸콜린을 파괴해서 몸을 늘어지게 만들면, 다음에 할 일은 간단하지. 그냥 탱크를 몰고 고속도로를 나아가듯 적의 심장부로 쳐들어가면 그만이요. 적들은 맞서기는커녕 두려움에 떨거나 자고 있을 테니까. 전쟁은 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지.”
뇌 연구에 이런 위험할 정도의 가공할 힘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 정부는 연구소의 소속을 KRIBB(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ADD(국방과학연구소) 산하로 바꾸고 연구 내용 역시 대외비로 전환했다. 다만 당시의 연구 성과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시뮬레이션의 결과일 뿐, 아직 복잡다단한 실제 인간 두뇌를 통한 실증 데이터는 전무했기에 연구원들은 무기력증에 빠졌고 특별한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연구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 교체와 함께 들어선 새 정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추진력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의 과거 및 선거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숱한 문제와 의혹도 정권 차지라는 목적이 이루어지자 모두 덮어버렸고 정치적 숙적들은 하나둘 처단되기 시작했다. 부와 권력에 치중하다보니 자연히 인권과 문화 같은 분야는 밀리고 짓밟히게 되었다. 사회는 갈등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에 휩싸였지만 연구소는 지하라는 위치에 걸맞게 지상의 풍파에도 아랑곳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마침 권력자와 그 친인척들, 그리고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와 비리가 연이어 드러나자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정부는 사회의 법질서를 바로잡겠다며 장기간 행해지지 않던 사형을 일괄적으로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실질적 사형 폐지국가라는 명예를 잃게 되겠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연구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자에게 로비를 하며 접근했다. 과학기술의 중요함이야 새삼 강조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동안 찬밥 신세였고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은 자명했다. 따라서 소장은 그들의 연구가 얼마나 큰돈을 벌어다 줄 것이고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며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얼마나 크게 떨치게 될 것인지를 허위와 과장을 섞어서 설파했다. 국익과 국위선양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이 연구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주는지에 대해 알리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일사천리로 연구소는 막대한 예산과 함께 사형수라는 안정적인 실험용 기니피그를 손에 넣게 되었다. 예산 심의를 위한 서류상에는 나노 머신을 활용한 정신 질환 치료를 연구하는 사업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진상은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이었다. 그것은 기억과 감정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조종하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실험에 다름 아니었다. 당연히 피실험자들의 기억은 사라지거나 엉망이 될 수도 있고, 치료는커녕 정신 이상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사형수들이라고 해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을까. 본인이 아닌 이상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이 실험은 분명히 상대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사형수들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조건인 ‘범죄에 연관된 기억이 성공적으로 소거될 경우 죄도 사라진다’, 즉 전과가 완전히 없어진 새로운 신원을 얻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다는 약속에 홀려 수술 동의서를 쓴 후 실험에 참여했다. 물론 수술의 실패와 부작용으로 인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 역시 포함되어 있었지만.

피실험자가 된 사형수들은 MRI를 찍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대뇌 구조를 스캔 받았다. 사전에 삭발을 하고 마취된 채로 원통형의 기구 안에 누워 있으면 헬멧처럼 생긴 스캐너가 머리를 감싼다. 헬멧 내부에 가득 찬 글리코사미노글리칸 합성 세라믹이 피실험자의 두피 모양에 딱 맞게 밀착되면 수십 개의 철사처럼 가느다란 전극이 두피 아래로 삽입되고 이를 통로로 수천 개의 티타늄 이산화물 나노 튜브(직경 4~5나노미터)가 뻗어 나와 두개골의 세포 사이를 지나 대뇌피질 안까지 내려온다. 마치 주사바늘이 살을 뚫듯 나노 튜브가 두뇌 내부로 들어오면 나노 머신(직경 2나노미터) 수억 개가 튜브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나노 머신은 목적에 따라 몇 개의 종류로 나뉘어져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나노 머신을 이용하면 뇌의 완전한 3차원 지도를 그릴 수 있어요. 기존 MEG(뇌자기도 촬영법)나 PET(양전자 방사 단층촬영법) 같은 구닥다리 방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확하고 상세하게 뇌의 구조와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죠. 나노 머신이 제각기 발산하는 신호를 포착하면 뉴런의 개수와 위치 하나하나까지 다 셀 수 있을 정도예요.”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나노 머신은 주로 측두엽 내부의 해마와 후내야 부위로 몰려 들어가 특정 신경세포의 활동을 정지시키거나 신경전달물질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 또한 시냅스를 경유하여 교신을 하는 일반적인 뇌세포와 달리 나노 머신은 대뇌피질에 주로 많은 신경아교형세포를 통하여 직접 뉴런과 교신을 함은 물론 세포의 자극을 통제하여 감마 아미노낙산의 분비량을 조절할 수도 있다.
남자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감을 잡진 못하지만 그저 뭔가 굉장하다 싶어서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시뮬레이션처럼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험의 1차 목표는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사건 혹은 일시적인 기간의 기억만을 지우거나 덧씌울 수 있는가 여부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기억이란 비유하자면 수많은 실을 뒤섞고 뭉쳐서 만드는 입체 조형물이었다. 색과 굵기와 질감이 다른 실들이 뒤엉키고 붙었다 떨어지면서 반죽처럼 뭉쳐져 있기에 어느 한 가닥만 뽑아내려 하면 전체의 모양과 순서가 뒤틀리거나 꼬여서 다른 실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결과 피실험자들은 중증 치매 환자와 같이 의도하지 않은 기억도 잃어버렸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언어 장애를 겪는 등 갖가지 부작용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실험이 실패로 끝난 건 아니죠.”
박사는 강조하듯 덧붙였다.
“일단 당신이 김영준이 되어 세상에서 3년 동안이나 살아온 것부터가 성공했다는 증거 아니겠소. 비록 이렇게 다시 연구소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영준 씨가 축적하고 가져온 데이터는 우리 연구소에 매우 소중하고 놀라운 선물이 되었지요.”
비록 실험 실패로 회복 불가능이 된 피실험자도 있었으나 연구소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기억의 조종 분야에서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으나 인간의 감정과 성격 조절 쪽에는 가시적인 성과물을 얻은 것이다. 여자 연구원은 이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술과 담배, 항울제나 마약 같은 놈들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그런 말을 하는 연구원을 신용할 수 있을까? 비록 니코틴과 타르 등이 없는 담배 대용품 금연초이긴 했지만.

한편 실험은 충실한 데이터를 얻으며 소정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기억이 엉망이 되었거나 알츠하이머를 앓는 피실험자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어차피 그들을 교도소로 돌려보내봤자 교수대나 전기의자가 기다리고 있을 테고,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연구를 위해 희생한 그들의 마지막 소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동의한 수술의 보상을 주는 것이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대한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실험자 중에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증상이 심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기억 전체를 소거하는 시술을 실행했다. 낱말의 의미와 같은 지식 분야에 해당하는 사실 기억 부분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시간과 장소에 연관되는 사건 기억 부분을 지우는 시술인데, 물론 이들 둘이 칼로 두부 자르듯 정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의 사실 기억도 잃게 되겠지만 그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소한 갓난아기처럼 백지상태가 되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할 수 있었다.
기억이 소거된 피실험자는 여섯 명이었다. 두 사람은 미취학 아동 수준의 기억밖에는 남지 않을 정도로 기억 손상이 심해서 연구소에서 언어와 사물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다른 네 사람은 기본적인 지식을 상당수 보존한 상태에서 자신의 이름과 과거와 같은 사실 기억만 잃어버린 상태라 약간의 재활 훈련을 받고 퇴원했다. 그중에 황용순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쪽, 황용순 씨는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꿨고 새로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어요. 물론 정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여러분은 국정원의 비밀 정보원에 맞먹는 대우를 받은 셈이에요. 그쪽이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병원에서 깨어나면 의사로 위장한 우리 연구원이 말해주는 거죠. 화재나 교통사고 같은 사고로 가족은 다 죽었고 당신 혼자 살아남았지만 기억을 잃었고 어쩌고 하는 날조된 과거사를요. 여섯 명이 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셈이에요. 단지 일정 기간의 차이를 두고 깨웠으니까 당장 서로 만날 일도 없고 들킬 위험도 없다고 판단했죠. 여섯 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마주쳐도 서로 못 알아볼 테니까요.
그래도 일단 이상이 생겼나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니까 여러분에게 공통적으로 주입한 기억이 하나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자신이 깨어났던 병원에 가야만 한다는 건데, 그냥 오도록 만들려니 이상하고 기억시키기도 어렵고 해서 치료해준 보답으로 헌혈이라도 해야겠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심어준 거죠. 아직은 최면술 수준의 초보적인 암시밖에 안 되지만, 매달 새로이 주입하고 있어서 여태껏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어요.”
“……여섯 명이요?”
남자가, 갑자기 김영준에서 황용순으로 돌아온 남자가 연구소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무려 여섯 명’이라는 당황스러움과, 나 말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약간의 안도가 섞인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댁 같은 연쇄 살인범 말고도 가족을 살해한 주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내란죄로 복역 중이던 전직 장성도 있었지. 모두 사형이 확정된 흉악범들이었다오. 어차피 죽을 목숨, 기억이 사라질지라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렇게 기억을 잃은 대신 삶을 얻은 그들에게 아직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조사를 받는 이유 중에는, 그들 자신의 육체와 두뇌만이 아니라 뇌 속에 들어있는 나노 머신의 이상을 점검하는 목적도 있었다. 기억을 소거한 나노 머신은 자신의 역할이 끝난 후 몸 밖으로 배출되도록 만들었다.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 계속 기억을 지우거나 뇌세포에 이상을 줄 수도 있는 위험이 있으니 필수적인 조치였지만, 여전히 남겨놓은 것들도 있으니 바로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나노 머신이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억을 지웠다 해도 무의식 안에 남은 범죄 충동이나 사악한 본심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혹은 범죄를 일으키는 인자가 별도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주입한 나노 머신으로, 주로 전두엽과 편도체와 시상하부에 위치하며 범죄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을 느끼도록 작용했다.

잠시 말없이 금연초를 피우던 연구원이 말했다.
“덕분에 여섯 사람은 상당히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 되었지요. 사람의 감정을 완벽하게 프로그래밍한 듯이 짜 맞출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황용순 씨, 당신의 흥미로운 데이터가 우리의 눈에 뜨인 거죠! 그야말로 확 들어왔다고나 할까요.”
“저의 데이터……? 그럼 제 이 성격이, 얼마 전부터 세상 모두가 절 미워하는 것 같아 두렵고 숨이 막히던 이 느낌이, 세상이 곧 무너지고 망할 것 같은 이 비관적인 생각이 전부 그 나노 뭐시기가 만들어낸 감정이란 말인가요?”
이미 그는 자신을 자연스레 황용순이라 불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이 감정, 지금이라고 해서 사라질 리가 없는 이 두려움과 절망감이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기계가 억지로 만들어낸 가짜 감정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이 실은 내 것이 아니라니, 쉽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개념이 아니었다.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 하는 남자의 얼굴을 본 박사가 얼른 나서서 달래려 했다.
“저기, 흥분하지 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게나. 그러게 내가 찬찬히 설명한다고 하지 않았나.”
뒤의 말은 연구원을 돌아보며 한 꾸지람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금연초를 이리저리 입술로 굴리면서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진정하시게. 석방된 여섯 사람이 모두 황용순 씨처럼 된 것은 아니요. 안타깝게도 모두들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말이지……. 한 사람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고…… 이분은 원래 고령이라 실험 시에서 별로 안 좋은 결과를 보여줬지만. 존속 살해범이던 여자는 심한 우울증 때문에 통원치료를 받고 있고…… 그래도 나머지 세 사람은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으니까. 다들 약간 대인공포증이 있고 겁이 많아 쉽게 놀란다든지 하지만 그 정도야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저는 뭡니까, 부작용인가요? 치료는 가능합니까? 가능할 리가 없겠죠. 그 나노 머신이 이미 제 두뇌에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저는 평생 그 조그만 요정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살아갈 운명이군요! 이것도 사형 당해야 마땅할 연쇄 살인범에게는 감지덕지가 아니냐는 목소리가 귀에 선합니다. 네, 그렇겠죠.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죠……!”
발작이 일어난 듯 몸을 뒤틀며 설움을 토로하는 남자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박사는 계속 진정하라는 말을 했다.
“글쎄 진정하시라니까. 내가 다 말씀드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것은 그러니까, 〈퀄리아〉의 문제요.”
남자는 돌연 낯선 낱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어 눈만 껌벅였다. 뜻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출생의 비밀부터 시작하여 새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 너무 많아서 정리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박사는 일단 안정을 취하고 며칠 동안 진찰을 하자며 상황을 정리하고는 연구원과 함께 방을 나갔다. 갑자기 나타나서 감당 못할 말을 쏟아놓고는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을 생각하니 남자의 마음속은 태풍이 휩쓸어간 바닷가처럼 엉망인 상태였다.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머리를 던지고 차라리 전신 마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뇌까지 함께 마비된다면 이 복잡하고 무서운 마음도 멎어버릴 텐데. 하지만 나노 머신은 자신의 일부가 아니니까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에 이에 이르자 끔찍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두뇌 안에서 나노 머신이 우글거리며 끊임없이 공포와 절망을 생성해내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겪어본 중에서도 최고의 악몽이었다.


이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듯 지루한 나날이 이어졌다. 남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다른 남성 연구원이 날라준 밥을 먹고 발치에 있는 TV를 보았다. 밥과 반찬은 식판에 담겨져 있었는데 특별히 환자식처럼 보이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케이블 방송을 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박사가 들어와 TV를 끄고 마주앉았다. 침대 옆에 있던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남자는 박사의 지시에 따라 로르샤흐 테스트를 받았다.
박사가 보여준 것은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색 잉크를 써서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만든 의미 불명의 그림이었는데, 흔히 알려진 나비나 개 모양 외에도 독자적으로 만든 듯한 그림도 다수 있었다.
“용순 씨,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이 떠오릅니까? 정답은 없으니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멍한 눈으로 그림을 굽어보던 남자는 숨을 훅 들이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이마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박사는 그림에 대한 빠르고 강렬한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자, 말씀을 해보세요. 무엇이 보이지요? 무엇을 느끼시죠?”
“괴물, 괴물이……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려 하고 있어요.”
“괴물이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괴물인가요? 자, 이 부분은 무엇으로 보이지요?”
박사가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부분을 펜끝으로 가리켰다.
“날개요. 박쥐의 것 같이 시커멓고…… 끝은 날카로운 악마의 날개가 달려 있어요.”
이번엔 가운데 윗부분을 가리켰다.
“머리입니다. 아래쪽으로 늘어진 것들은 꿈틀거리는 촉수고, 양옆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날카로운 손톱입니다. 왠지 얼굴이 제가 아는 분을 닮은 것 같고요. 항상 저보고 굼뜨다고 구박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상상 속 괴물의 외형이 대충 완성되었다. 평소에 두려워하던 사람이 괴물로 변신한 듯한 모습인데, 흐릿하고 두루뭉술한 얼룩 덩어리의 목격담이라기엔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인 외형 묘사가 이어졌다. 이후로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괴물과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칼과 무거운 바퀴와 단단한 바위가 자신의 몸을 조각내고 짓이길 것처럼 튀어나왔다.
어떤 때는 죄인들이 불가마 속에서 들끓는 지옥이 그려지기도 했다. 둥그런 얼룩은 원자폭탄이 그려낸 버섯구름이고 점점이 흩어진 작은 얼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사일의 비였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빗금은 번개와 지진이고 일렁이는 사선은 화산과 해일이었다. 어느 그림이든 괴물과 죽음,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했다. 무의미한 비대칭 얼룩들이 그의 입을 통해 뭉크와 보슈도 울고 갈만 한 지옥도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그림 10장으로 검사를 마친 박사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검사는 그림에 대한 사실과 감상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박사가 알고자 한 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남자의 심상과 감정이니까.
이후에도 낱말을 보고 연상되는 말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맞히는 등의 실험이 이어졌다. 남자는 무엇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성의 있게 임했다. 실험은 주로 박사 혼자 혹은 박사와 연구원 두 사람이 같이 와서 진행했다. 가끔 연구원 혼자 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박사가 주관했고 틈틈이 남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로 두뇌의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나노 머신에 대해서 말을 했으며 한 번 들은 후로 뜻을 알지 못해 궁금했던 퀄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이때 나왔다.

“퀄리아? 아차, 모를 거라는 생각은 얼핏 했는데 마땅히 번역할 말도 없고, 그때는 워낙 다른 중요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아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요. 근데 아는 것과 알기 쉽게 가르쳐주는 건 다르니까 잘 설명이 되려나 모르겠네. 이게 이제 일본에서는 감각질(感覺質)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만 아직 적절한 우리말은 없으니까 말이지요. 이 퀄리아가 무엇이냐를 얘기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만……”
“몰라도 딱히 상관없으니 넘어가죠?”
뒤에서 귀찮음이 묻어나는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어서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금연초를 문 연구원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하지만 박사의 표정이나 조바심 내는 태도를 보니 가르쳐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연구원이 단정 짓듯 말했다.
“저 사람의 퀄리아 문제가 아니라, 나노 머신이 퀄리아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인가가 문제잖아요?”
그래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무료한 생활을 달래주는 유일한 낙은 호기심의 충족이니까. 남자는 사정하듯 말했다.
“제발 가르쳐주세요. 저에게 일어난 문제잖아요? 그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뭐든지 알고 싶습니다.”
“문제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연구원은 포기했다는 듯 금연초를 씹는담배처럼 질겅거리며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박사는 이제 훼방꾼이 없어 신이 났다.
“자, 그럼 퀄리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간단한 질문을 하지요. ……자, 이건 무슨 색깔이죠?”
박사의 굽은 손가락이 남자가 입은 환자복을 가리켰다.
“파란색입니다.”
“어째서 파란색이죠?”
“그야…… 그렇게 보이니까요. 조금 연한 파란색, 하늘색에 가깝겠네요.”
“하늘색이라. 실제 하늘의 색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그냥 시안(cyan) 계통의 색명을 가리키는 건가요?”
“보통 둘 다의 뜻으로 쓰지 않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새벽이나 해질녘의 하늘은 주황색이 되기도 하니까요. 밤의 하늘은 검고요.”
갑자기 박사가 왜 색깔 이야기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색깔이 파랗든 검든 빨갛든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람?
“자, 계속해서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저 바지의 색깔, 저게 무슨 색으로 보이죠?”
이번엔 잠깐 두리번거리던 박사가 연구원의 다리를 가리켰다. 제법 오래 입어서 색이 바랜 청바지였다.
“그것도 뭐 파란색인데요.”
“환자복과 청바지, 둘 다 파란색이라? 이 둘이 똑같은 색으로 보이지는 않을 텐데요?”
“뭐 푸르죽죽하다거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충 비슷하니까 파랗다고 해도 되겠죠.”
“그런가요……? 그럼 이번엔 화제를 바꿔서, 저는 무엇으로 보이죠? 역시 사람으로 보이겠죠?”
”그렇지요.”
박사는 이번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연구원을 가리켰다.
“그럼 저 사람도? 남자냐 여자냐 외모가 어떻다 나눌 수도 있겠지만 일단 사람으로는 보이지요?”
“예.”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구별하는 건가요? 가령 제가 개인지 늑대인지 알아보기 힘든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개라고 대답하셨다면 대상을 개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든 있겠죠?”
“네, 있겠죠.”
“그러한 색깔이나 대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뭘까요? 그걸 누가 정하는 걸까요? 눈이 정하는 걸까요? 눈에 파란색이 비치니까 저건 파란색이라고 느끼는 걸까요?”
“그렇겠죠.”
“그런데 사실 답은 ‘아니오’가 되겠습니다.”
“네?”
“쉽게 말하자면 그건 눈이 아니라 뇌가 정하는 겁니다. 그런 뇌의 신경계에 의해 생겨나는 주관적인 속성이나 감각을 퀄리아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파란색은 누가 봐도 파란색이잖아요?”
“물론 색상 같은 경우는 빛의 파장이라는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정해지지요. 가령 파란색의 경우 가시광선 중에서 440에서 490나노미터 사이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색약이라 특정 색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저 청바지가 회색이나 갈색으로 보여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는지?”
물론 청색약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 색약은 적색약과 녹색약이지만요, 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박사의 말은 남자에게 있어 새로운 충격이었다. 박사가 하고 싶은 말, 퀄리아가 왜 중요한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퀄리아라는 녀석은 단순히 색깔의 판단에만 쓰이는 데 머무르지 않아요. 시각, 후각, 촉각 같은 기본적인 감각체계는 물론이고 어떤 말을 듣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어떤 사건을 보고 놀랄지 화를 낼지를 판단하는 것도 퀄리아의 영역에 속하지요.
즉 당신은, 그리고 나는 이 세상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이 두뇌, 요놈이 받아들이고 해석하여 만들어낸 결론을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 세계는 내 뇌가 해석한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라고요.”
피식 웃는 연구원의 콧소리가 들렸지만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연구원들에게 꽤나 무시를 당했던 박사는 오랜만에 진지하게 경청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기색이었다.
“자, 이제 왜 용순 씨에게 퀄리아가 중요한 문제인지 아시겠지요? 색상이야 과학적인 기준이 있으니 색약이나 색맹인 사람이 제대로 보지 못해도 그 색상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사람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보고 있는 색이 진실인 셈입니다. 괴테의 색채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나 할까요? 방금 황용순 씨 당신이 환자복과 청바지 양쪽 모두 파란색이라고 말한 이유는 두 대상의 색에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는 무시해도 될 정도의 작은 차이라고 당신 두뇌가 해석을 한 것이지요. 이런 뇌의 주관성이 인지과학의 큰 테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전에 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한 내용이 생각나지요?”
박사는 자신의 서류철에서 잉크 얼룩 그림을 꺼내 보여주었다. 남자가 괴물과 재난과 지옥을 떠올렸던 그림들이다.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연상해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파란색인지 빨간색인지, 개인지 고양이인지를 구별하는 과학적인 기준은 있지만 로르샤흐 테스트에는 정답도 가이드라인도 없지요. 사람들은 흔히 똑같은 말을 듣고도 웃거나 화를 내는 등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디까?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며 도와주려 달려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랑 관계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괜히 구해주려고 갔다가 나까지 빠질까 무섭다 싶어서 도망가는 놈도 있고, 그것 참 고소하다고 쌤통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고, 되레 다가가서 놀리거나 욕을 하는 쓰레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반응이란 실로 다양하다 이 말씀이지.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받아들이고도 다른 반응을 내보내는 것 또한 퀄리아라 할 수 있지요.
그럼 이제 용순 씨의 퀄리아에 대해 말해볼까요? 가해망상, 피해망상, 죄책감, 세상 사람은 물론 사물에 이르기까지 세상 전체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만 같은 생각, 우울함,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시야와 전망, 기(杞)나라 사람 같은 끝없는 근심 걱정, 두려움과 공포……!
용순 씨의 이러한 감정, 그 부정적인 감각과 경험을 저는 〈네거티브 퀄리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정답은 없다고 하지만, 이토록 대상을 공포와 절망으로만 해석하는 〈네거티브 퀄리아〉가 발생한다는 얘기는 뇌의 어떤 부분에 이상이 생겼거나 뇌 안에 있는 나노 머신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행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요. 이를 지금 우리가 찾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가시는지?”
남자는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 말은 고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우린 아직 나노 머신이 직접 그러한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연구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노 머신이 원인인 것만은 분명해요. 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일 수도 있죠. 뉴런의 손상이 일어났기 때문이거나, 인위적으로 일으킨 역향성 건망증에 대한 두뇌의 자정작용에 따른 부작용일 가능성도 있고요.”
“하긴. 이건 지극히 비과학적인, 그냥 내 망상에 가까운 가설이긴 한데 뇌가 외부에서 침입해온 나노 머신이라는 이물질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박사의 가설에 연구원은 다시 콧방귀로 응수하곤 말했다.
“어떻게 됐든, 그쪽에게 한 감각 실험이나 여러 테스트의 결과에 의하면 아직까지 이렇다 할 회복 증세를 보이지 않고 있어요. 그동안 우린 황용순 씨 모르게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의 방출을 늘리는 나노 머신을 주입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거든요. 단순한 감정의 변화나 신경전달물질의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란 말이죠.”
“그럼 저는 계속 이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곧 밝혀낼 테니까.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연구원은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연구에 자신이 있는지 그런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박사도 오래지 않아 푹 자고 많이 먹으라는 둥 틀에 박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뒤를 따랐다.

정확히 며칠인지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시간이 지난 후 남자는 새로운 퀄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름도 〈포지티브 퀄리아〉! 멋지지 않아요?”
남자는 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퀄리아 저 퀄리아 갖다 붙이기만 하면 그만인가. 무엇보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평범한 퀄리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둘만의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한 후에 흥분한 얼굴로 말하는 노인의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박사는 기다렸다는 듯 가지고 온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내었다.
“이건 우리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특히 걔한테는 말이오.”
‘걔’가 누굴 말하는지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이 연구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지금까지 단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박사를 제외한다면 금연초를 물고 다니던 그 여자 연구원을 말하는 거겠지.
“지금 걔나 연구소장이나 생각이 다 똑같아요. 당신의 두뇌를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채운 〈네거티브 퀄리아〉의 생성 매커니즘을 알아내어 군사 무기로 쓰겠다는 속셈이지요. 아니면 이걸 먼저 뿌리고 치료약을 팔아먹겠다는 심보인지도 모르고.
난 높은 분들의 생각 따위는 몰라. 소장이 예산 따오고 자기 업적 늘리려고 하는 로비 따위에도 관심 없고. 오직 나는 인류의 행복을 위한 연구와 발명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내 비록 머리가 세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졸업 문집에 장래희망으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썼던 그 마음은 아직 그대로 있어요. 노벨상도 타고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처럼 인류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그런 과학자가 되고 싶은데…… 뭐, 가공할 힘? 궁극의 무기? 다들 그 무기를 끌어안고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난 절대 이 연구 결과를 보고하지 않을 거요!”

남자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나노 머신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기계적인 느낌과는 달리 인공 세포로부터 추출, 합성하여 만드는 일종의 인조 바이러스라고 한다. 세포막과 유사한 레시틴 멤브레인에서 추출한 기포에 각종 반응물을 삽입하고 짧지만 강력한 전기자극을 주어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으로 만들게 되는데 크기는 직경 2나노미터 안팎으로 최대 4나노미터를 넘지 않는다. 여기에 DNA와 세포의 복제를 활성화시키는 인자로 작용하는 DDK 단백질을 삽입하고 조니본(JohnnyVon)이라 불리는, 가상 DNA의 자가복제 시뮬레이션을 응용한 자가조립 매커니즘을 입력시켜 스스로 살아 있는 세포처럼 복제를 통한 증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박사는 보습코계에 작용하는 나노 머신이 〈네거티브 퀄리아〉의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인간의 보습코 기관은 페로몬을 수용하는 후각 기관으로 이미 퇴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두뇌에는 이를 관장하는 부분인 보습코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박사는 동물의 페로몬이 단순한 성적 유혹만이 아니라 호감 등의 감정, 나아가 집단의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음에 착안하여 인간도 보습코계를 자극하면 자기 주위의 대상에 대한 감정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타인에게서 미움 받고 있다는 남자의 생각, 이 세상이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생각도 이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확증을 내리기에는 아직 일렀기에 다른 연구원과 공동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단계였으나 이를 기다릴 수 없던 박사는 독자적인 판단 하에 남자의 보습코계에 위치한 나노 머신을 직접 추출하여 설계도를 작성했다고 한다. 문외한이 보기에는 삼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 다양한 다각형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패치워크와도 같은 형상인데, 다만 평면이 아니라 케플러-푸앵소 다면체를 닮은 3차원 구조였다.
물론 이 설계도를 단순히 좌표만 반전해서 반대 성질을 구현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일일이 설명하진 않았으나 박사가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완성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가 말년병장처럼 멍하니 누워서 밥 먹고 TV만 보던 동안에도 박사는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를 거듭하여 가시적인 성과물을 얻어낸 것이다.

“용순 씨, 난 이 연구로 돈과 권력을 얻을 생각은 없어요. 그저 인류를 위해 기여한 과학자로 내 이름 석 자 남기는 게 꿈이오. 조너스 소크 박사라고 알아요? 못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각별히 존경하는 분이지. 바로 소아마비 백신을 최초로 개발한 분이요. 소크 박사가 백신을 개발한 후에 한 일이 뭔지 아시오? 특허를 신청? 회사를 차려 대박을 내? 다 아니지. 백신의 제조법을 무료로 공개한 거요. 그 결과 오늘날 소아마비는 이른바 퇴출된 질병이 되었지.
소크 박사를 모른다면 에드워드 제너는 압니까? 천연두 백신을 만들어내고 이를 역시 무료로 공개했지요. 덕분에 유럽을 휩쓸었던 난치병이었던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사라졌잖아요.”
박사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했다.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실험에 매달린 이유, 그 결과를 둘만의 비밀로 부치겠다는 이유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포지티브 퀄리아〉 생성 나노 머신을 이 세상에 무상으로 뿌릴 생각이에요. 좀 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이도록 이름은 〈포지티브 바이러스〉라고 지었어요. 따지고 보면 나노 머신도 인공적으로 만든 바이러스라 할 수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지요. 이 나노 머신은 한번 사람에게 전파되면 자가 복제되어 타인에게로 전파됩니다. 좋은 의미의 전염병처럼 말이지요. 왜 ‘행복 바이러스’라는 말이 유행했잖아요? 곧 사람들은 〈포지티브 바이러스〉라는 낱말을 흔하게 입에 올리게 될 겁니다. 그러면 나 역시 제너와 소크처럼 인류에 기여한 성인으로 존경받게 되겠지요.”
남자는 종교에 심취한 전도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꺼림칙함을 느꼈으나, 다른 어떤 말보다도 해서는 안 될 언급임이 분명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박사는 나름대로 남자의 감정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섣불리 그를 자극해서 화나게 만들었다가 그 해결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남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박사의 말을 듣고만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지요. 소장이랑 정부의 높은 사람들이 안다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으니까! 나는 또 다른 마약이나 항울제 따위를 만들 작정으로 연구를 해온 게 아니니까 말이오. 생각해봐요, 전 세계 사람들이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단 우울증과 무기력증 같은 증세는 사라질 테고, 모두가 기쁨과 당당함과 적극적인 마인드로 가득 찬 상태로 살아가겠지요!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요?”
그래, 딱 나의 반대가 되겠지. 남자는 씁쓸함을 곱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포지티브 뭐뭐는 완성이 되었습니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남자는 물어보았다. 어쩌면 그에게도 희망적인 생각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 포지티브 힘이 자신의 네거티브를 몰아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길지도.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박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사실은 완성된 시제품이 이미 당신의 뇌 안에 있습니다. 시제품을 가장 먼저 나 자신에게 투여했으니까 말이지요.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포지티브 바이러스〉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좋은 기분을 맛보고 있는데, 불행히도 용순 씨 당신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군요? 어때요, 두려움과 비관이 사라졌나요? 기쁨과 당당함을 느끼는지?”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고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 뇌를 그려보았다.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사진이나 그림에서 본 모습을 기초로 만들어냈다. 그 안을 상상해본다. 신경 세포들이 잔뜩 뒤엉킨 밀림과 같은 모습?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대상을 그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뉴런의 수풀 사이를 아주 조그만 입자들이 돌아다닌다. TV 광고에서 본, 장(腸)까지 살아서 간다는 캡슐처럼 통통 튀어 다니며 두뇌 속을 헤집고 다닌다. 그놈들이 여기저기를 찌르고, 시냅스에 끼어들고, 수상돌기를 때린다.
어쩌면 이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박사가 했던 망상이야말로 가장 진실에 근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남의 뇌를 자기 집 안방인양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나노 머신. 이들을 보고 공포와 절망과 우울함을 느끼는 뇌세포들. 그렇다. 〈네거티브 퀄리아〉야 말로 인간 두뇌의 가장 진실되고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다! 나는 나 자신의 의지로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신념의 발현이라고나 할까.
박사는 남자의 이토록 ‘네거티브’한 주장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듣자마자 나노 머신을 몸 밖으로 배출하듯 다른 귀로 흘려버렸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연구는 성공한다고 고집했다.
“용순 씨는 〈네거티브 퀄리아〉가 기존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럴 거요.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그렇듯 〈포지티브 퀄리아〉로 전환이 되겠지. 조금만 기다려요. 남아 있는 네거티브가 모두 밀려나 사라지면 포지티브가 될 테니까. 이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요.”
박사도 연구원처럼 시간만 주어지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그의 〈포지티브 퀄리아〉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일지도. 어느 쪽이든 남자는 시간이 흘러도 좋아질 일은 없고 결국 나빠질 뿐임을 알았다. 그 자신이 포지티브로 전환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증거가 아닌가. 앞으로 얼마나 더 연구소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보다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박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정부가 원하는 가공할 병기일지도 모르니까. 두뇌 속에 무기를 가득 담은 살아 있는 샘플 말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이렇게 숨어 지내는 쪽이 세상을 위해 이바지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만이 남자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비록 핵폭탄 폭발 후의 낙진처럼 세차게 쏟아지는 절망을 막아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박사의 소망 대로 〈포지티브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세계에 걸쳐 확산되었다. 예상 이상으로 빨랐으며 범위는 넓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전염병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럽을 덮친 천연두나 흑사병보다도 빠르고 에이즈나 에볼라보다도 더 넓었다. 호흡기를 통한 전파이기 때문에 바람이 실어다 뿌려주니 직접 만나 접촉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 한 나노 머신의 침투는 시간 문제인 셈이다.
그 결과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극소수의 은둔자를 제외한 인류 구성원의 두뇌 속에 나노 머신이 침투했고 〈포지티브 퀄리아〉가 발현했다. 이로써 인류는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희망에 차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과연 박사가 바라던 궁극의 유토피아는 실현되는 걸까.
처음에는 얼핏 그리 될 법했다. 사람들의 표정에 활력이 가득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망설임과 두려움과 의기소침과 불안과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전망 같은 것들은 나노 머신이 갉아먹은 듯 말끔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근거도 없는 자신과 용기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감이 차지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거나 신호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곧장 달렸다. 옆 차가 끼어들거나 보행자가 무단횡단을 하려고 하면 가차 없이 경적을 울리며 엑셀을 더 밟았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거나 사고 직전의 상황에 처해 운전자끼리 싸우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누구도 겁을 먹거나 먼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옳고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에 당당했다.
회사원은 자신의 기획이 옳고 실적이 뛰어나며 업무 처리가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부하직원은 무능한 상사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기에 상사의 질책에 낯빛 하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맞섰다. 마찬가지로 사원은 회사 대표와 사장에게 자신이 더 유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싸우다가 회사가 파산이나 합병 위기에 처하면 서로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질책하기에 바빴다.
노조와 사측은 서로 자신들이 이긴다고 생각하여 극한투쟁으로 맞섰으며 일체의 물러섬과 협상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부는 역시나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회사의 피해나 사상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전쟁을 하듯 화기까지 앞세우며 일방적인 공격을 펼쳤다. 이를 비롯한 사회의 사건과 문제, 현황과 전망에 대해서 모든 언론매체는 저마다 자신의 논조가 절대로 옳다고 자처하며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가장 활발하게 활약한 쪽은 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이전부터 ‘포지티브’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기에 어쩌면 가장 변화가 없는 부류일지도 몰랐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 더는 속셈을 감추거나 위선으로 포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놓고 자신들이 특정 부류를 위한 이익집단임을 밝혔다. 말만이라도 번지르르하게 서민을 위한다고 하던 대변인조차 이제는 자신들이 기업주와 땅부자와 바로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활동한다고 당당하게 천명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서 사람들은 마음 깊이 감추었던 분노와 욕망을 드러내고 행동에 옮겼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용기와 결단력이었다. 분노와 절망은 테러라는 형태로, 욕심과 이기심은 범죄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폭력과 약탈이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돋아나고 태풍처럼 휩쓸었다. 당연하지만 누구도 죄의식과 미안함 같은 ‘네거티브’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피해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는 연민의 손길 역시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범죄자를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고자 망설임 없이 행동했다. 군대와 경찰은 제 역할을 잃어버리고 세계 각지의 도시를 중심으로 국지전과 테러가 끊임없이 빈발했다.
마침내 자신감에 충만한 강대국의 대통령이 당당한 목소리와 자신 있는 태도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연설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눈엣가시로 여기던 적국과 독재자가 군림하는 나라들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고 원자 폭탄을 투여하겠다고 밝히는 자리였는데, 기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오가고 찬반을 주먹으로 겨루기라도 한 듯 난투극이 벌어지며 연설장은 곧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혼란 속에서 잇다른 총성이 울려 퍼졌다. 기자들은 미리 짠 듯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예정에 없던 특종을 놓칠세라 촬영과 기록에 몰두했다. 대통령은 가슴에서 몇 개의 피분수를 뿜으며 천천히 쓰러졌고 경호원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을 손에 쥔 부통령이 중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여 연단을 대신 차지했다.
그는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한 밝은 얼굴로 전쟁을 일으키고 핵폭탄을 남발하려는 자는 대통령의 자격이 없어 제거했다고 당당하게 말한 다음 자신이 대통령에 더 걸맞은 인물이니까 그 자리를 이어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연설은 더 오래가지 못했고, 저마다 자신이 이 나라의 지도자감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장성과 고위관료가 군대나 지지자를 이끌고 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우왕자왕하며 도망가기에 바빴고, 수도는 이내 전쟁터로 탈바꿈했다.
결국 그 나라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전에 내전에 휩쓸려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와중에도 정의감에 불타는 군인들이 대통령의 생전 목표였던 위업을 이루고자 잔뜩 쟁여놓은 핵탄두들을 일제히 세계 각지로 뿜어내었다. 적국들도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비밀리에 혹은 과시용으로 개발해서 보유하던 핵미사일을 있는 대로 쏘아 올려 그에 맞섰다.
얼마 안 가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와 대도시는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의 이빨을 피해가지 못했고, 세계 종말을 그린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세계는 핵구름 아래에 휩싸이고 있었다. 열대우림에 자생한 독버섯 밭처럼 핵폭탄이 빚어낸 수많은 버섯구름이 지각 위를 뒤덮으며 피어났다.
이렇듯 두려움을 잃어버린 무모한 인류는 미처 대피하지도 못한 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런 상황을 전혀 예견하지는 못했으나 지하 깊숙한 보호시설에서 안전하게 몸을 숨긴 채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인류 유일의 〈네거티브 퀄리아〉 소유자 김영준이다.


남자는 하나하나 사라지는 TV 채널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각국의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를 덮친 참극을 목격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보안실에 있는 수많은 CCTV 단말기의 채널을 위성방송으로 바꾸어서 세계 각지의 상황을 지켜보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화면은 차차 하얀 점들이 부글대는 노이즈로 바뀌어갔다. 그 모습이 남자에게는 흑백으로 찍은 지옥의 가마솥처럼 보였는데, 간신히 남아 있는 방송들도 그에 못지않은 아비규환과 혼란을 그려내고 있었다. 내전으로 얼룩진 도시,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 행렬, 핵폭풍과 낙진, 무너지는 건물과 갈라지는 도로, 바람에 나뒹구는 시체…….
그는 자신이 최악의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이 전쟁과 핵폭발로 고통 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지내야만 하는 형벌. 참을 수가 없는 고문의 나날이기에 당장이라도 TV와 라디오를 끄고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은 간절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도피법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전 집에 틀어박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형벌을 달게 받아들였다. 간을 쪼아 먹으러 오는 독수리를 기다리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고독하고 쓸쓸하게.
비록 영혼을 물들이는 것이 절망과 죄의식의 색채밖에 없다고 해도, 최소한 그는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리고 세계를 불꽃과 연기로 둘러싼 이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이것이 작지만 너무나도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렇게 전 인류를 대신하여 참회와 고통으로 점철된 수감생활을 보내고 있던 때, 연구시설 지하 창고에 묻어 놓은 비상식량은 물론 실험동물용 사료까지 탈탈 털어 먹어치우면서 연명했지만 마침내 그마저도 거의 다 떨어지고 절망밖에는 남은 것이 없던 무렵, 작은 손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텅 빈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외계인이 쳐들어온 걸까. 아니면 아직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지하까지 약탈을 하러 온 걸까. 픽션에나 존재하던 세기말의 살풍경한 약육강식 세상이 펼쳐지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허겁지겁 도망갈 길을 찾았으나 지하의 폐쇄된 연구소에 도망칠 수 있는 길이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출입구는 오직 하나, 병원과 연결된 지하 통로밖에 없다. 적들이 그쪽을 통해 들어오는 이상 도망칠 방도는 없었다.
엄이도령식 현실도피를 하려는 건지 남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인간의 청력은 그리 나쁘지 않아서 손으로 막는 정도로는 소리를 전부 차단할 수 없다. 희미하게나마 두세 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의 이름, 원래의 이름이었다. 황용순 씨! 황용순 씨!
응답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숨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를 찾아내었다. 비닐봉지와 빈 깡통이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은둔자의 처소에서.

“이제야 만났네요, 황용순 씨.”
헬멧이 열리면서 마른 체구에 긴 곱슬머리를 한 중년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를 보며 반갑지만 조금은 쑥스러운 듯 히죽 웃고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낯선 얼굴이었다. 혹시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는 존재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학교 동창, 친구, 친척, 혹은 사귀던 애인? 그렇다고 해도 황용순이라는 저주스런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른다는 점이 이상했다. 전 국민의 치를 떨게 한 연쇄 살인범을 보면서 저렇게 꾸밈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남자는 처음에 떠올렸던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역시 저들은 외계인이야! 여자를 비롯해서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우주복과 비슷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에 침대 밑에서 그들의 허벅지 이하 하반신만 보았을 때부터 남자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왔구나! 인류가 멸망하고 주인 잃은 지구를 접수하기 위해 왔다가,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음을 알아내고 ─그들의 과학력은 당연히 지구인을 아득히 능가할 테니까 간단한 일이다─ 숨어 있던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분명 지구인의 연구를 위해 해부를 하든지, 자기네 별에 데려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가둬놓고 구경거리로 삼으려 하겠지. 혹은 박제로 만들어서 기념품으로 전시할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를 침대 밑에서 끄집어낸 우주복을 입은 인물이 헬멧을 벗어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지구인의 얼굴을. 그가 지구인이 맞다면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까? 이미 이 도시도 핵폭탄의 직격을 맞아 허물어졌을 텐데. 여자 뒤로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 모두 헬멧을 뒤로 젖혀서 얼굴을 보인 상태였는데, 머리가 벗겨진 노인도 있고 잘생긴 젊은 남자도 있었다. 대표로 보이는 여자가 주저앉아 있던 그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는 물었다.

“황용순 씨, 당신의 지금 이름은 뭐에요?”
“김……영준……이요.”
아직 상대가 지구인이 맞는지 파악하지 못한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기억은 여전히 자신이 황용순이 아니라 김영준인 상태였다. 여자가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영준 씨. 알았어요, 앞으로는 영준 씨라고 부를게요.”
갑자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연구소로 들어온 이후 황용순이 되어버린 자신을 다시 김영준이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왠지 잃었던 자신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잃어버린 이름과 기억은 황용순이었지만, 지금 그는 오히려 김영준이라는 이름과 지난 3년의 기억을 되찾은 듯했다. 이쪽이 진짜인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영준 씨, 우린 초면이겠지만 사실은 서로 아는 사이일 거예요. 다들 뉴스에서 봤던 사람들이죠. 저는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하고 사형 판결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이쪽은 연쇄 살인마, 이분은 쿠데타 일으킨 장군, 저쪽 뒤의 아저씨는 아이들을 유괴해서 살해한 유아 살해범.”
뒤의 세 남자는 입에 담지도 못할 끔찍한 죄목을 언급하며 자신들을 소개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순박하게 웃고만 있었다. 듣고 나니 새삼 모두 낯이 익은 이름이다. 뉴스를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던 범죄자들이 아닌가. 모두들 당연한 듯 사형을 언도받았고, 사형 폐지론이 무게를 더해가던 추세에 맞추어 집행이 계속 연기된 채로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모두들 일시에 사형에 처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자신을 포함한 다섯 사람은 모두 이 연구소의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인간 기니피그들이다. 자신의 이름과 얼굴과 기억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뇌 안에 남아 있던 나노 머신의 부작용으로 알츠하이머나 우울증 등 저마다 고통을 겪은 불운한 사람들이다.

남자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졌음을 안 여자는 안심한 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박사님을 통해 당신의 데이터를 알게 되었어요. 영준 씨는 박사님이 만든 〈포지티브 바이러스〉를 투입 받고도 〈포지티브 퀄리아〉로 전환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왜 그런지 아세요? 영준 씨 안에 있는 〈네거티브 퀄리아〉가 이를 중화시키고 결국엔 무력화시키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영준 씨의 〈네거티브 퀄리아〉를 지금 〈포지티브 퀄리아〉에게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쉽게 생각해서 포지티브가 산성, 네거티브가 알칼리성 용액이라고 쳐요. 두 용액을 같은 양으로 섞는다면……?”
중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나노 머신의 자가 복제를 멈춰야만 할 텐데.
“영준 씨의 뇌 안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나의 실험실? 공장? 같이 된 거죠.”
공장,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이었다. 여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들어봐요. 사실은 저도 영준 씨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렸어요. 정신병원의 진찰결과는 우울증과 피해망상 같은 판에 박힌 얘기였어요. 화재로 가족과 기억을 잃었다고만 알고 있던 전 그래도 홀몸으로나마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점점 세상이 비관적이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모두에게서 버려지고 미움받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지요.
그 다음은 영준 씨와 비슷해요. 박사님의 진찰을 받고 진실을 들었고 제 뇌 안에 있는 나노 머신이 하는 역할에 대해 알게 되었죠. 그렇지만 영준 씨와 저에게는 차이가 있어요. 저는 〈포지티브 바이러스〉 제작 실험에 참여했고 그 결과로 이렇게 되었어요. 음…… 뭐라고 할까? 표현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저는 ‘제’가 된 거예요.”

여자는 무척이나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된 나. 나를 되찾은 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기억을 잃고, 두뇌가 멋대로 감정을 만들어내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퀄리아를 갖고 살아갔던 이들이다.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어떤 것이 원래의 나일까? 무엇이 진짜 나일까? 무고한 여성들을 마구 죽이던 살인마가 진짜 나일까? 지금 이렇게 무기력과 절망에 찌들어 있는 후줄근한 인간이 진짜 내 모습일까?
내 눈에 비치는, 내 귀에 들리는, 내가 받아들이는 세상 모두가 진짜일까? 나노 머신이 만든 왜곡된 필터로 걸러진 거짓된 퀄리아가 아닐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진실은 안개처럼 흐릿하여 손을 내밀어도 잡히지 않았다.
“박사님의 실험 덕분에 제 두뇌에서는 포지티브도 네거티브도 아닌 중화된 감정이 생겨나고 있어요. 적당히 자신 있고 용기 있고 낙관적이면서 적당히 두렵고 불안하고 비관적인 그런 존재요. 이걸 저는 〈뉴트럴 퀄리아〉라 이름 지었지만, 사실 이름은 뭐든 상관 없어요. 따지고 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걸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지금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이라곤 여기에 있는 네 명이 전부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여자는 자신과 뒤에 있는 세 남자를 가리켰다. 뉴트럴이 네 명, 네거티브가 한 명이라니, 불균형이 심한 구성이었다. 그런데 실험에 참가한 사형수는 여섯 명 아니었던가? 남자는 문득 남은 한 사람의 행방이 궁금했다.
“저는 박사님의 실험 결과를 연구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유지를 이어받을 작정이죠. 비록 그의 선의와는 다르게 실험의 결과로 인류가 큰 피해를 입고 말았지만,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이 연구를 계속 해야 되겠죠.
저는 뇌생리학이든 나노 공학이든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기억을 잃은 대신 굉장히 기억력이 좋아졌거든요. 용준 씨와 만난 적은 없지만 저도 여기서 연구를 도와주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우리 두 사람이 만났다가 안 좋은 영향이라도 받을까 우려해서 박사님이 막은 거예요. 사실 별다른 근거는 없지만 둘 다 〈네거티브 퀄리아〉의 소유자니까 그랬겠지요.”
여자는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믿을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수긍이 갔다. 갑작스레 기억을 잃어버려 한 구석이 비어버린 뇌라면 그 자리에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지 않을까.
“예전의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몰라요. 영준 씨가 뉴스에서 보고 들은 내용이 전부예요. 평범한 주부지만 생활고와 투병중인 시아버지 뒷바라지와 폭력 남편에게 질려서 가족들을 죽인 잔인한 여자였대요. 하지만 그것뿐인 걸요. 제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친구를 사귀었고 누구를 사랑했고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 아이는 딸인지 아들인지 가르쳐주질 않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예요.”

여자는 잠시 한숨을 쉬기 위해 말을 멈췄다. 얼핏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을 본 듯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쾌활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전 열심히 공부했어요. 기억은 잃었어도 어느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더라고요. 식당에서 일하면서 고입 검정고시부터 준비했죠.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외운 건 잘 안 잊히더라고요. 예전의 제가 이토록 머리가 좋았을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그랬다면 진작 고시에 통과하거나 전문직이 되어 잘나갔지, 가난한 집에서 구박받는 며느리로 살진 않았겠죠, 안 그래요?
참, 희진 씨는 만난 적 있죠? 항상 금연초를 물고 있는 연구원 말예요. 그 사람이 여섯 번째 인물이에요. 여기에 모인 우리랑 희진 씨까지 합친 여섯 명이 바로 뇌 실험을 받은 사형수들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의 동공이 부풀어 터질 듯이 확장되었다. 금연초를 입으로 굴리며 아버지뻘인 박사에게 거친 말을 던지던 건방진 연구원, 그가 자신과 같은 사형수이자 실험체였다니. 그렇다면 그의 뇌 속에도 나노 머신이 바글대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그렇게 차갑게 말할 수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희진 씨도 본명은 따로 있어요. 의사였는데 병자들을 몰래 마취시키고 살해해서 개인적인 실험을 했다나 봐요.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도 있고 해서 당시에 꽤나 화제가 되었죠. 그런데 기억을 지웠지만 의사로서의 지식이 조금 남아서 여기서 보조 연구원으로 일했대요.
만나봤으니 알겠지만 입에 늘 담배 비슷한 걸 물고 있는데 그게 금연초가 아니라 나노 머신이 들어있는 주입기였다나 봐요. 우리와 달리 그에게는 나노 머신이 금방 무용지물이 되는 부작용이 있어서 끊임없이 보충을 해줘야만 했었대요. 그 자신이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었던 셈이죠. 뭐랄까…… 성격이 대단히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서 연구원들이 다들 조심했대요. 나노 머신을 주기적으로 주입하고 있어서 안정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은 존재였죠. 그러니 연구소에서 데리고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본인은 아마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연구원인 동시에 연구 대상이었던 셈이네요.
그래도 희진 씨 덕분에 저는 〈포지티브 바이러스〉의 치료법을 알아냈어요. 현재 상태에서 〈포지티브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자가 복제를 하고 체외로 배출되어 공기를 통해 전파되고 있어요. 하지만 희진 씨가 배출한 나노 머신은 중화되어 아무 역할도 못하는 상태였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포지티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뇌에 우선 〈네거티브 퀄리아〉를 만드는 나노 머신을 주입하여 중화시킨 후, 희진 씨에게서 얻어낸 무력화 기능을 넣어서 외부로 전파되지 않도록 만들었지요.”
여자는 잠시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남자는 직감적으로 희진에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조심스레 물어보니 역시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불행히도 희진 씨는 소장님과 함께 권력자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연구소를 나갔다가 핵폭발에 휘말려 숨을 거두었어요. 안에 남은 연구원들은 나노 머신을 멋대로 만들어 유출시켰음을 알아내고 박사님에게 린치를 가했지요. 그리고 이 사태를 누구의 책임으로 돌릴지, 연구 성과는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다투다 결국 모두들 목숨을 잃었죠…….”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세 남자는 이미 각자 침대나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모두들 온화하고 순박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자요 반란자였을까. 하긴 남자가 그랬듯 성형수술을 받았으니 거리를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자, 이제 영준 씨 당신 차례예요.”
여자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노 머신은 우리 두뇌 안에서 활동을 시작해요. 자가 복제를 위한 재료를 얻는 행위는 살아 있는 세포의 증식 과정과 다를 바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분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나노 머신을 뿌려대는 번거롭고 시간 많이 걸리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 한, 누군가의 뇌 안에서 만들어 뿌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지요. 그런데 여기 있는 우리 네 명은 이미 〈뉴트럴 퀄리아〉로 이행된 상태예요. 당장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니 어쩔 수 없었죠. 당시엔 훨씬 미래의 일까지 생각하진 못했거든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던 거죠.
저는 연구소에서 전파를 발신했어요. 나노 머신을 자극하여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 병원으로 오고 싶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죠. 우리가 이 병원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도록 프로그래밍되었음을 기억해요? 바로 그 장치를 그대로 이용한 거예요. 다행히도 핵폭탄이 이 도시에 떨어지기 전에 우리 넷이 모일 수 있었죠. 저는 우선 뉴트럴 상태가 되도록 조치한 후 우선 대피했다가, 영준 씨가 방치되어 있었음을 깨달은 거예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죠. 우린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던 〈네거티브 퀄리아〉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까요. 이제 아셨죠? 영준 씨는 이 세상에서 〈네거티브 퀄리아〉를 가진 유일한 사람, 〈포지티브 바이러스〉를 중화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백신이에요. 제너가 소의 고름에서 뽑아낸 최초의 우두라고나 할까요?”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긴장되어선지 목이 뻣뻣하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딱히 영준 씨가 어떻게 할 일은 없어요. 대신 미안하지만 영준 씨는 앞으로도 당분간 이대로 살아야만 해요. 그동안 마음고생하신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우리처럼 뉴트럴로 전환시켜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 돼요.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요!
지금부터 영준 씨의 나노 머신 증식 속도를 높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번엔 ‘네거티브 바이러스’가 퍼질 차례인 거죠. 그와 동시에 희진 씨에게서 얻은 자가 복제를 억제하는 처리를 거치면, 그 사람의 두뇌는 뉴트럴 상태로 고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영준 씨는 만지기만 해도 앉은뱅이를 일으킨 예수님처럼 숨만 쉬어도 주위에 있는 사람을 치유시키는 성자요 구세주가 되는 셈이죠.”
남자는 그저 멍한 상태였다. 갑자기 구세주가 되라고 말한들 아무런 흥분이나 감동을 느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세상이 이미 그가 저주했던 그대로 멸망해버린 이상, 누굴 구하고 누굴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부질없는 짓 같았다. 남자가 원하는 건 그저 안전하고 조용한 혼자만의 장소였다. 먹을 것이 떨어져서 그렇지 지금의 연구소도 그리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이 멋대로 쳐들어와서는……

“자, 이걸 입어요.”
뒤에 있던 노인이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우주복 비슷한 은빛 옷을 내밀었다. 여자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사선 방호복이에요. 방사능도 충분히 막아줄 수 있어요. 아직 거리는 핵폭탄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곧 낙진이 떨어지는 잔인한 핵겨울이 다가오겠죠.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해요. 일단 생존자들을 모아서 피폭된 사람은 격리 치료를 해고, 무사한 사람들은 재건을 위해 힘을 합쳐야만 하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이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영준 씨가 필요해요. 당신이 가진 두려움과 비관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야만 해요. 사람의 마음은 낙관과 용기와 자신감만으로 완벽해질 수 없음을 이번 일로 배웠으니까요.”
이제야 이들을 처음 외계인으로 오해했던 이유가 밝혀진 셈이었다. 이 촌스러운 우주복처럼 보이는 옷은 방사능을 막기 위한 방호복이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고도 남자는 결국 군말 없이 주섬주섬 방호복을 껴입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는 잘못 입을 때 바로잡아주고, 보통 옷과 다른 헬멧의 접속부분을 점검하고, 틈이 벌어진 곳은 없는지 첫 출근하는 아들의 양복을 살펴보는 엄마처럼 세심하게 점검했다.
남자의 준비가 끝나자 여자는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며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학생처럼 밝고 활기차게 말했다.
“자, 그럼 가볼까요? 세상을 구하러요. 세상에 절망한 사람이 세상을 구하러 가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나요?”


연구소를 나서는 남자의 종아리에 바람에 떠밀려 날아온 종이조각이 달라붙었다. 주워 들고 보니 5,000원 지폐였다.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나간 세상에서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불운한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거기에 그려진 율곡 이이 선생이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밥버러지 같은 놈이 길을 나서는구나. 그래 이번엔 밥값을 좀 하려느냐?”
아직 〈네거티브 퀄리아〉는 건재하고 있었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박사의 말마따나 이 세상은 남자의 뇌가 해석한 결과물일 뿐이니까. 그래서 남자는 그저 스쳐 지나간 나비의 자취를 좇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율곡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긴 해도 이전 퇴계에 비하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하긴 주리론을 설파한 퇴계보다야 율곡의 일도설 쪽이 남자에게는 더 위안이 되는 사상이 아닐까. 포지티브든 네거티브든, 결국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리오. 하나가 물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릇이다. 그릇이 없으면 물을 담을 수가 없고 물이 없으면 그릇은 필요가 없을지니, 둘이 같이 있음이 가장 좋음이라.
딱히 잘 될 거란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고요.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나비 표본을 채취하는 곤충학자처럼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지폐를 잘 접어서 옆구리에 달린 조그만 주머니 안에 갈무리하고 난 후 일행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2010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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