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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빈이와 흰 토끼 인형

해망재

 

"더러워."

갑자기 눈을 뜬 세빈은 3초정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화면에 떠오른 세빈의 얼굴이 나를 향해 낯을 찌푸렸다. 그냥 찌푸린 정도가 아니라 살면서 두 번 다시 못 볼 흉한 꼴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경멸, 환멸, 경악, 좌절, 뭐 그런 단어들이 잔뜩 어우러진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야, 이세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센서들이 뭐라고 기록했나 재생해 볼까?"
".....자기 방에 CCTV를 달다니, 이게 무슨 악취미야."
"CCTV가 아니라. 내가 평소같으면 그런 걸 왜 방에 달겠어!"

세빈은 있는 힘을 다해 짜증을 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있으니까 편하긴 편해."
"오."
"내 일거수 일투족을 나중에 엄마가 볼 수 있다는 게 좀 그렇지만."
"....그렇게 치면 병원에 있는 네 진짜 몸은 뭐."
"내 몸이, 왜."
"의사나 간호사들이 네 세포 구석구석까지 맨날 들여다보잖아. 프라이버시도 없지. 그에 비하면 나는.... 난 네 절친이잖아!"
"의사나 간호사는 의료진이고요."
"난.... 난 나름대로 너를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우리 가족같은 사이 아냐?"
"가, 족같은 사이? 그래, 가라, 가. 사람이 자고 있는데 갑자기 끌어안더니 엉덩이를 더듬거려? 변태같으니."
"....너무해."

세빈의 잔뜩 날을 세운 말에, 나는 나름 상처를 받은 얼굴로 우물거렸다.

"너무하잖아. 난 얘가 너인 줄도 몰랐다고."

***

....그러니까 문제는, 내 친구 세빈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거다.

학원 끝나고 나오는데, 그 앞에서 짐을 잔뜩 실은 택배 트럭이 과속을 하며 우회전을 하다가 그만 뒤쪽 문이 휙 열리는 사고가 있었다.

그때 나는 세빈이와 나란히 걷다가, 편의점 문 앞에 붙은 신제품 광고지를 보고 잠깐 걸음을 멈추던 참이었다.

"야, 세빈아. 이거 맛있.... 사과!!!!!!!!!!"

웬 사과냐 하면, 그 순간에 택배 트럭에서 사과 상자들이 튀어나왔다는 말이다. 설 명절을 앞두고 배송중이던 사과 선물세트의 사과상자. 아마 저런 상자에는 돈은 안 들었겠지, 하고 1초쯤 생각했고, 그리고 세빈이가 쓰러졌다.

나는 세빈이를 어린이집 때 부터 알았다. 같은 어린이집,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오고, 같은 중학교에 올해는 어쩌다 보니 같은 반에다 학원까지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세빈이와 오래 알았다 보니, 얘가 사과라면 환장을 하게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하느라 바쁜 세빈이 엄마가, 세빈이에게 늘 신경을 쓰고 있다는 표시로 아침마다 껍질 안 벗긴 사과를 깍두기같이 툭툭 썰어서 도시락통에 간식이라고 넣어 주는 것을 나는 그 오랜 세월동안 계속 보아 왔다.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 그러니까 세빈이네 아빠가 이혼하기 전, 세빈이네 할머니가 백설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세빈이는 깔깔 웃으면서 대답하곤 했었다.

"할머니, 거짓말 하지 마. 사과 때문에 사람이 왜 죽어."

하지만 사과를 그렇게 좋아하던 세빈이는, 결국 그 날아오는 사과 상자에 맞고 죽었다.

아니, 죽을 뻔 했다. 열심히 심장 마사지를 한 끝에 겨우 돌아왔다지만 일단 심장이 한번 멈췄고,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도 절반은 날아갔다지만, 여튼 세빈은 아직 살아 있었다.

세빈의 엄마는 뇌과학자였는데, 중요한 수술을 받기 전 사람의 의식을 복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전에 세빈에게 듣기로는 뭐, 5% 정도 기억의 손실이 있을 수 있다지만 대체로 괜찮다나? 뇌수술을 하고 나서 기억을 잃거나 성격이 바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했다. 그리고 세빈의 엄마는, 종종 세빈을 불러들여 뇌를 스캔하고 의식을 복제해 두곤 했다.

"아우, 우리 딸. 너무 예뻐서 더 크는 게 아깝네."

세빈의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빈의 의식을 복제해 두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엄마의 연구실 구석 캐비닛에는, 복제한 세빈의 의식이 들어있는 저장장치가 들어 있다나. 그리고 그런 일을 하고 돌아올 때 마다, 세빈은 한숨을 쉬며 내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실험 대상을 찾기 어려워서 그러나보다 했어. 아무래도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험하려면 가족이 만만하니까."
"그렇지."
"근데 요즘은 다른 생각이 좀 든다? 내가 사춘기라고 반항하고 그러면 덮어 씌우려고, 그나마 착하고 얌전할 때의 정신세계를 복제해 두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글쎄,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나중에 내가 갑자기 착하고 다정하며 선량한 마음을 가진 어린시절의 이세빈 성격으로 돌아가면, 우리 엄마를 의심하도록 해. 우리 엄마는 그러고도 남을 거야.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우리집에 있다고!"

매드 사이언티스트. 처음에는 그 말에 동의했다. 세빈의 엄마가 딸의 의식을 복제해 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정말 공포영화에나 나오는 미친 과학자의 크리피한 이야기를 들은 듯이 어깨를 움츠렸었다. 하지만 세빈이 그런 사고를 당하고, 세빈이 한달 전 복제당했던 의식이 눈을 뜨자, 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세빈의 엄마는, 늘 세빈을 잃을까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고.

세빈은, 자신에게는, 엄마 말고 다른 가족은 없다고 늘 말하곤 했다. 이혼한 아빠는 곧 재혼했고, 어릴때 자신을 그렇게 예뻐해주던 할머니도 아빠가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자 세빈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엄마 쪽 친척들은, 어째서인지 엄마와 연락하지 않았다. 어릴때는 용돈 주는 외할머니가 없어서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중학생 쯤 되면 슬슬 보이는 것들도 있다.

세빈의 엄마는, 자기 가족들 사이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세빈이 엄마에게도 가족은 세빈이 한 명 뿐이었다고.

그 진짜 가족을 잃지 않으려고, 혹시라도 무슨 사고가 나서 잃어버릴까봐, 세빈이 엄마는 그런 식으로 복제까지 해 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볼펜이나 지우개를, 꼭 두 개씩 사는 세빈이를 보면서 말이다.

어쨌든 이세빈의 몸은, 지금 세빈의 엄마가 일하는 연구소와 제휴한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세빈이 엄마는 세빈의 몸을 새로 복구하기 위해 세포 복원 치료를 선택했다고 한다. 보통은 뇌가 날아간 사람에게는 힘든 일인데, 뇌까지 새로 만들고서 원래의 의식을 밀어넣으면 된다나.

"왜, 이왕이면 반짝반짝한 새 뇌로 공부하면 입시 준비도 더 잘 될 지 모르지."

나를 불러 세빈을 부탁하며, 세빈이 엄마는 저런 무시무시한 농담을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아 잠시 긴장하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그럼 세빈이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요?"
"있어. 95%는."
"그건 진짜 세빈이에요?"
"진짜 세빈이야. 한달 전의 세빈이. 그리고 그간의 사고에 대해서는 설명해 두었으니까, 세빈이가 빨리 복구될 수 있도록 수아 네게 좀 도와주면 좋겠다."

세빈이 엄마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세빈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 줘."
"예?"
"정확히 말하면, 세빈이의 의식이 접속된 의체 말이야. 가서 수업도 듣고,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몸의 세포가 복구되려면 반 년쯤 걸리는데, 이 사고로 학년이 달라지면 나중에 적응하기 더 힘들 것 같잖니."

뭐, 그런 거라면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데려가면 되는데요...?"

***

"그 의체가 토끼 인형이라는 말은 안 하셨단 말야!!!!!"

나는 억울해서 소리쳤다.

"누가 토끼 인형을 의체라고 생각해!!!!! 이거 그냥 흔한 인형이잖아.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 인테리어 예쁘게 해놓은 집 사진에 흔히 나오는! 완전 예쁜!"
"그래. 작년 내 생일에 네가 선물한 거지."
"....그랬나?"
"넌 아는 게 뭐야?"
".....어쩐지 내 취향이긴 하더라."

세빈은 모니터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내가 그거 네가 준 거라고 맨날 안고 잤는데, 망할 우리 엄마가 그걸 내 의체로 개조해 버렸다고요."
"헐."
"거기 카메라 들어 있고, 와이파이 터지고 네트워크 다 잡히고..... 나랑 접속하면 내가 그걸로 말도 할 수 있어. 뱃속에 스피커 들어 있어서."
"설마.... 움직이는 것도 돼?"
"움직이는 건 안 되지만, 등에 지퍼 내리면 핸드폰만한 화면도 있어."
"미쳤어."

나는 진저리를 쳤다.

"내가 준 인형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희 엄마는!!!!!"
"그래, 근데 넌 내 의체를, 내가 접속하지 않은 동안 엉덩이를 주물주물 하고."
"토끼 꼬리라고!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마!"

아, 정말.
나는 사람 소리가 아닌 듯한 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세빈이 엄마는, 정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부탁했었다. 같이 학교에 왔다갔다 하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리게만 해 주라고 했지. 그리고 나중에 보상으로 내 의식도 샘플로 하나 복제해 줄 거고, 원한다면 입시 전에 내 뇌세포들을 어떻게 개선해 줄 거라며 이런저런 조건들을 이야기했었다. 아니, 그런 조건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세빈이와,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으니까. 사실 세빈이 엄마가 다소 무리한 부탁들을 했더라도, 아무 조건 없이 해 달라고 했더라도, 세빈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걸 어쩐담.
이 토끼를 학교에 데리고 갔을 때, 반 친구들이 일단은 귀엽다고 다들 꼬리며 엉덩이를 만질 것을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해졌다. 세상에는 이런 위험한 미친 과학자가 벌써부터, 사람의 의식을 의체에 담아 다니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잠자고 있는.... 그러니까 접속이 끊어진 의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나는, 세빈의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토끼 인형을 안아 올려야 할 지, 안아든다면 어떻게 안아야 하는 것인지, 이 인형은 이족보행 형태이지만 진짜 토끼를 안는 것 처럼 엉덩이를 받치고 귀를 잡아야 하는 것인지, 그러면 세빈이가 싫어할지 어떨 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만 세빈의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세빈아, 제발.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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