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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삼월이의 돌멩이

2020.05.31 00:2505.31

삼월이의 돌멩이

곽재식


1.
최 박사는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무슨 일이든 해 내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익힌 인물이라는 칭찬도 받고 있었다. 즉 떠돌이 박사후 연구원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막상 시간 여행 장치에 탈 사람을 뽑자니 최 박사 만한 사람이 없었다. 5년 짜리 정부 연구 개발 계획의 들러리로 세워진 연구소에서 높은 자리를 맡은 교수들은 실제 무슨 일이 돌아 가는 지 별로 아는 것이 없었고, 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은 박사 학위 논문을 마쳐야 된다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거는 시간 여행 장치잖아요. 오늘 12시에 출발해서 과거로 가서 10년 동안 여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돌아올 때 12시 5분으로 돌아 오면 5분 밖에 지나지 않는 거잖아요. 시간이 부족할 건 없어요.”
“뭐라고요? 최 박사님, 저 보고 10년이나 대학원생 생활을 겪으라고요? 그리고 나서 돌아 왔는데 5분 밖에 안 지난다고요?”

최 박사의 말을 들은 학생은 울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최 박사가 시간 여행 장치를 타야 했다.

시간 여행 장치에 들어간 최 박사는 천 몇 백년 전으로 시간을 맞추고 화면에 나오는 시작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기다리라는 뜻으로 모래시계 모양이 나왔다. 시간 여행 장치에 탄 채로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잠시 후 최 박사가 도착한 곳은, 아니 최 박사가 도착한 시대는 신라 시대였다.

 


2.
원래 계획대로라면 최대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멀찌감치서 관찰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간 여행 장치를 산 속에 설치해 둔 것이었다. 그런데 도착하자 마자 갑자기 커다란 곰이 나타났다. 곰은 시간 여행 장치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건드렸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장치를 마구 두들겼다.

“아니, 무슨 이런 동네 뒷산에도 곰이 나와?”

최 박사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얼핏 보니, 곰 앞발에 맞아 시간 여행 장치도 좀 부서진 것 같았다. 

산속에서 최 박사는 이리저리 해 맸다.

조금만 내려 가면 순환 도로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산길을 걸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런 길이 생겨 나라면 천 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았고 전봇대 같은 것도 없었다. 자주 보던 연구소 뒷산이었는데도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은 최 박사는 산을 헤매다가 탈진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려주세요” “물... 물...”만을 외치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 있게 되었다.

해질녘이 되자, 주위에서 다시 여러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최 박사는 애절하게 살려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반가워 하는 것은 호랑이들 뿐인 것 같았다.

최 박사의 살집이 고양이과 야생동물의 먹잇감으로 소모되기 직전 무렵, 어디에선가 요란한 꽹가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금속이 부딛히는 소리였다. 신라 시대에는 원숭이들도 지능이 뛰어나 금속을 제련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소리는 사람이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최 박사는 더 애절하게 소리질렀다. “살려 주세요!”

잠시 꽹가리 소리가 잦아 들었을 때, 어디선가 곰 소리가 다시 들렸다. 최 박사는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뭔가 확 덥쳐 오는 듯 한가 싶은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제대로 알게도 전에, 저 편에서 돌멩이 하나가 날아 와서 곰의 코를 맞혔다. 곰은 소리를 지르다 도망쳤다. 최 박사에게는 곰이 아파서 내는 소리도 무섭게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돌멩이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엿다. 돌멩이에는 선 세 개가 새겨져 있었다.

잠시 후 최 박사 앞에 산 속에서 나물과 약초를 캐던 사람 한 명 나타났다. 최 박사보다 열 살 쯤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렇지만, 옛날 사람들은 빨리 나이들어 보이는 편이라고 했으니 실제로는 두 어 살 정도 많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여튼 최 박사 보다 키와 덩치는 많이 작았지만, 훨씬 더 튼튼하고 산에 어울려 보였다.

“선생님, 선생님! 살려 주세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최 박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신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발음을 최대한 익혀 왔지만, 실제 신라 사람들의 발음과는 차이가 너무 컸다. 하는 수 없이, 최 박사는 전화기를 꺼내서 인공지능 언어 분석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한참 만에 최 박사의 전화기는 신라 발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최 박사를 발견한 신라 사람은 자신이 삼월이라고 이야기했다. 삼월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들어 보였다.

“내가 던진 돌이라는 표시로 석 삼(三)자를 새겨 놓은 거요.”

삼월이는 곰을 찾는 지 주변을 좀 살피더니 최 박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뭐하는 사람이오? 화랑이오? 아니면 외국에서 온 상인이오?”

최 박사는 과체중인 자신의 몸이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에 식량이 부족하던 시기였던지라, 어지간히 부유한 사람들이나 고위층이 아니면 다들 마른 체형이었다. 그런데 일단 최 박사는 커다랗고 굼뜬 몸집에 단추가 많이 달린 체크무늬 셔츠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많이 뜨일만 했다.

“원래는 여기서 사람을 이렇게 만나고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박사후 연구원인데요.”

최 박사는 한참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삼월이는 최 박사가 연구소에서 하는 일과 그 생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노비 같은 것이란 말이오?”
“아뇨. 그렇다고 제 신세를 노비라고까지 말하시면 곤란하죠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한데.”

최 박사는 서둘러 자신이 하는 일의 다른 측면을 설명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학문의 세계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며, 지식과 진리를 위해 돌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럼, 그대는 도 닦는 사람이란 말이오?”
“단지 닦는 것 뿐만 아니고, 이미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일종의 현자 비슷한 것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학위? 그게 뭐요?”
“그게, 종이로 된 것인데... PhD라고 적혀 있고요.”
“노비 문서 같은 거요?”
“아니오. 전혀 아니죠. 훨씬 좋은 거예요. 소중한 것이고. 굉장히 의미가 깊은 것인데.”
“음식을 사는데 쓸 수 있소?”
“뭐, 꼭 그렇지는 않죠. 워낙에 요즘 다들 연구비가 없다고 하니까.”

대화가 길어질 수록 삼월이는 최 박사가 비굴해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박사는 좀 아프고 지쳐 보았으므로 삼월이는 최 박사를 위로해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쨌건 최 박사를 현자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삼월이는 최 박사에게 같이 마을로 내려 가자고 이야기했으나, 최 박사는 시간 여행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하는 수 없이 삼월이는 호랑이와 곰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최후의 순간이 되면 돌멩이를 던져 싸울 수 있도록 돌 던지기를 연습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이런 정도가 적당한 돌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던 삼자가 새겨진 돌멩이를 몇 개 주었다. 

“아무래도 그대는 산 속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처럼 보이는데.”
“하는 수 없죠. 어쩌겠어요. 혼자 한 번 해 볼게요. 주신 돌멩이로 연습도 열심히 하고.”

삼월이는 떠나기 전에 근처의 어디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지, 배가 고플 때는 어떤 열매를 따 먹으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지도 최 박사에게 알려 주었다.

그렇게 삼월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최 박사는 다시 시간 여행 장치 곁으로 가서 그날 밤을 보냈다.

아침이 밝은 뒤에 보니, 시간 여행 장치의 핵심 연료를 채워 놓았던 탱크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꼭 필요한 중성미자와 고에너지 소립자가 모두 새어나가 버렸다. 어떻게 다시 그런 재료를 구해 대한민국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얼마 후, 삼월이가 산속으로 최 박사를 다시 찾아 왔다. 먹을 것을 좀 챙겨 온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기 한 명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내 아들이오. 혼자 기르고 있소.”

최 박사는 아기에게 인사했다.

“안녕, 나는 박사후 연구원이란다. 일종의 현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 말을 듣고, 삼월이가 물었다.

“풍채가 이렇게 좋은 것을 보니 과연 보통 사람은 아닌듯 하나, 진짜 현자가 맞기는 맞소? 도대체 무슨 현명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신비한 도술이나 법술 같은 걸 할 줄 아는 게 있소?”

최 박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음악을 과연 현자가 아니라면 갑자기 연주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VIXX의 노래 “다이너마이트”를 틀었다. 노래가 들리자 최 박사는 감탄스럽지 않냐는 듯 웃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그 노래를 유심히 들었다. 

“몹시 흥겹고 아름다운 노래요. 과연 이런 노래는 처음 들어 보오. 그렇지만, 음악을 연주한다면 가야금 연주 하는 것 같이 실제로 팔과 손을 움직여 연주하는 동작을 보여 주면서 그 모양이 같이 보여질 때에 제 맛이 나는 게 아니겠소?”

삼월이는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심드렁한 태도였다.

“가야금 연주도 검색하면 있을 거예요.”

최 박사는 인터넷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가야금 연주를 검색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곧 와이파이에 접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령 와이파이가 있다고 해도 음악 사이트 서버가 작동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최 박사는 삼월이의 말에 수긍하기로 했다. 그것이 삼월이가 가져다 준 음식을 얻어 먹는 예의이기도 했다.

“저는 미래의 음식을 다 아니까, 재료만 구하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진짜 현자라니까요.”
“예를 들어 보시오.”
“프렌치 프라이 같은 거요. 만들기는 별로 안 어려운데, 진짜 고소하고 맛있어요. 소금, 기름, 감자 정도만 있으면 돼요.”
“감자가 뭐요?”
“감자 모르세요? 그 왜, 땅 속에서 자라는 작물 있잖아요. 강원도에서 많이 나고.”
“강원도는 또 뭐요?”

최 박사는 우선 강원도라는 행정구역은 조선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감자라는 작물은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구했고, 그것이 유럽을 거쳐서 아시아로 전해졌다는 사실도 뒤늦게 기억해냈다.

“감자가 나오려면 6백년, 7백년을 기다려야 하네.”
“감자가 7백년 묵은 나무 뿌리에서만 나오는 신선의 식품이라는 뜻이오?”
“그게 아니라,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야만 감자를 구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감자도 없는 세상이라니. 아니지, 감자가 아예 이 세상에 없는 것까지는 아니잖아. 작심하고 감자를 구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지. 우선 북쪽으로 쭉쭉 가서, 연해주 쪽으로 간 다음에 계속 동북쪽으로 가서 캄차카 반도의 북쪽을 지나면 결국 아시아 대륙의 맨 동쪽까지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거기서 베링 해협만 잠깐 건너면 아메리카 아닌가? 일단 아메리카에 도착하면 만나는 사람들 만다 물어 보지 뭐. 혹시 감자 모르냐고. 북미쪽이면 영어로 물어 보면 되겠지? 참, 지금은 북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시대가 아니지.”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신라에서 북쪽으로 가면 발해가 있소. 나는 잘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라와 발해는 통교하고 있지 않으니, 육지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북쪽으로는 갈 수가 없다고 하오.”
“뭐라고요? 아메리카는 커녕 걸어서 다른 나라로는 아무데도 못 간다고요?”
“그대가 살던 곳은 다른가 보오?”
“뭐, 사실 제가 살던 때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죠.”

의외로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최 박사는 향가나 문학 시간에 배운 옛날 노래 가사 중에 혹시 삼월이가 아는 게 있는 지 물어 보았고, 삼월이는 그 노래를 직접 불러 주었다. 이를테면 의외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로 시작하는 “구지가”는 곡조가 매우 경쾌하고 비트가 강렬했다.

“그거 가사는 문학시간에 배웠는데, 곡조는 하나도 몰랐거든요. 곡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노래가 생각보다 상당히 좋네요.”

삼월이는 끝까지 미심쩍어 하긴 했지만, 결국 최 박사가 뭔가 이상한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특히 두 자리 수 곱하기 두 자리 수 셈을 흙바닥에 아라비아 숫자를 써서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삼월이는 높게 평가했다.

며칠 후, 삼월이는 다시 최 박사를 찾아 산 속에 왔다.

“지금 이웃에 있는 큰 성에 무서운 도술을 쓸 줄 아는 도적이 나타났다고 하오. 그대는 현자라고 하니 대적할 수 있겠소?”
“도적이요? 그리고, 도술? 무슨 도술을 쓰는데요?”
“그 도적은 허공에서 도술로 불덩어리를 만들어 내어 사방으로 날릴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소. 장풍으로 사람을 공격하듯이 불덩어리로 사람을 공격하는 도술을 부린단 말이오.”

마침 최 박사는 시간 여행 장치를 수리하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최 박사의 대답은 처음에는 건성이었다.

“속임수겠죠. 입 속에 기름 머금고 있다가 뱉으면서 불 붙이고 뭐 그 비슷하게 속임수 쓰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묘기를 부리는 재주꾼들은 서라벌 도성이나 큰 성에 가면 한둘씩 있어서 다들 잘 알고 있소. 그런데 이 도적은 그런 눈속임 재주를 부리는 게 아니오. 진짜 도술이오. 정말로 허공에서 불덩어리를 만들어 날린단 말이오. 이웃 성에는 눈속임 재주가 아닌 진짜 도술을 보여 주면 쇳덩어리로 백만 냥을 주겠다고 내걸고 내기를 하던 재주꾼이 있었는데, 지금 그 재주꾼이 백만 냥을 도적에게 내어 주어야할 판이오.”

최 박사는 계속 작업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하나하나 따져 봅시다. 일단 불덩어리가 그냥 허공에 생길 수는 없어요. 불이라는 것, 그러니까 연소라는 것은 어떤 물질이 산소와 빠르게 결합하는 화학반응을 말하는 거 거든요. 눈으로 보기에 불꽃이 일렁거리니까 꼭 불이라는 게 물처럼 무슨 덩어리인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불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질이 산소와 화학반응을 하고 있는 장면이 그 불 모양으로 보이는 것 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허공에서 아무것도 없이 딱 불만 덜렁 생길 수는 없는 거예요. 불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려면 뭐가 산소하고 결합하든 하여튼 뭐가 있어야 산소하고 결합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 도술 도적은 정말로 허공에서 불덩어리를 만들었소.”
“그러면 그건 불이 될 수가 없죠. 허공처럼 보이지만, 뭐가 되었든 산소와 반응할 물질이 있어야 불이 되는 거라고요. 무슨 초능력을 갖고 있든 간에 하여튼 뭘 갖다 태워야 불 모양이 나오는 거니까. 하다 못해, 공기 중에서 뭐든 불에 탈 수 있는 물질을 뭐라도 끌어 모으는 거겠죠.”
“공기가 무슨 말이오?”
“공기는 대부분 질소하고 산소거든요. 그런데 질소는 불에 타지 않고. 산소 말고 공기 중에 뭐가 또 있지? 아르곤이 있고. 그런데 아르곤도 불에 타지는 않고. 맞아요. 공기 중에는 보통 메탄가스가 0.0002% 정도 있거든요. 메탄가스에는 불을 붙일 수가 있죠. 그러니까, 그 도술 부린다는 놈은 어떻게든 공기 중에서 메탄가스를 한 군데에 끌어 모을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온도를 높인 뒤에 메탄가스에 불을 붙게 한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하겠죠. 주변 공기 100만 리터 쯤에서 메탄가스만 한꺼번에 확 다 모으는 게 성공한다면 어느 정도 타기는 탈 거니까.”
“기를 모은다는 거요?”
“아니오. 기, 뭐 그런 거는 아니고요. 하여튼 공기 중에서 갑자기 불을 만든다면 아마 공기 중의 메탄가스를 이용하는 게 맞을 거예요. 불이란 건 하여튼 뭐든 태우긴 태워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놈을 이길 방법이 있소?”
“그 놈을 메탄가스가 별로 없을 만한 곳으로 데려 가면 불덩어리를 잘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사람이나 동물이 뭘 소화시키면 거기에서 메탄가스가 나오기도 하고 뭐가 썩으면서 메탄가스가 나올 때도 있으니까, 그런 게 없는 데로 그놈을 유인하는 거예요. 사람도 없고 가축도 없고 뭔가 썩는 쓰레기도 없으면 메탄가스도 별로 없겠죠. 황무지라든가. 뭐 그런 곳.”
“생명의 기운이 없는 곳으로 도적을 유인하라는 뜻이군.”
“무슨 기운하고는 상관이 없기는 한데...”

얼마 후 최 박사는 삼월이가 불꽃 괴물로 악명 높은 도적을 퇴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삼월이는 상금이나 벼슬은 거절했다고 했다. 산나물 캐는 가난한 사람이 골품도 낮은데 갑자기 큰 재산을 갖게 되면, 분명히 그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길 것이고 그러면 자신과 아기의 삶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골품 낮은 사람이 갑자기 잘 살게 되면 그렇게들 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고 했다.

얼마 후, 최 박사가 우주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방사선 중에서 무엇인가를 포착해서 시간 여행 장치의 연료로 쓸 수 있겠다는 착상을 해 냈을 즈음이었다.

삼월이는 다시 최 박사에게 요즘 골치거리가 생겨 났다고 이야기했다.

“이상한 신령을 믿으라고 하는 교주가 있는데, 그 교주는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오.”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요? 무슨 가느다란 줄로 몰래 위에서 당긴다거나 사람 비슷하게 생긴 인형을 공중에 띄우거나 하는 거겠죠.”
“이번에도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로 그 교주는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오.”
“그러면 뭐 그냥 날아 다니라고 하죠, 뭐. 어차피 무슨 하늘을 함부로 날아 다니면 비행기 운항에 방해가 되는 시대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놈이 자기는 하늘을 날 수도 있으니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니까 모두 믿고 복종하라고 한단 말이오.”
“하늘을 날 수 있는 재주가 있으면 신기하다는 이유로 그 놈이 하는 말이면 뭐든 다 믿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데?”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런데 그 놈의 말을 따르는 이상한 무리들이 갑자기 근방에 많아지고 있소. 곧 우리 마을에도 위협이 될 지 모르오. 그대가 산 속에 사는 현자라면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도 하늘을 날고 어쩌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뭘 알겠어요?”
“그대는 박사 학위라는 훌륭한 종이 조각도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최 박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정말로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면, 어떤 힘을 이용해서 하늘에 떠올랐는지 살펴 보아야 해요. 그 놈이 하늘을 날 때 머리카락이 어떻게 되는 지 한 번 잘 보세요.”
“머리카락이 그 놈의 약점이란 말이오?”
“그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보면 그 놈이 무슨 힘을 써서 떠오르는 지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놈이 선한 힘을 사용하는 지, 악한 힘을 사용하는 지, 부처님의 힘을 사용하는 지, 귀신의 힘을 사용하는 지, 그런 것을 본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힘은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 네 가지 거 든요. 그 중에 전자기력과 약력은 사실 전약력 한 가지니까, 세상에 힘은 전약력, 강력, 중력 세가지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전약력하고 강력도 하나로 통일될 수 있을 거 같다고들 하거든요. 아직은 대통일 이론이 입증된 게 없어서 정확히 그런지 어떤지는 확인은 안 되었다고 하지만. 하여튼 그렇다고치면, 세상에 힘은 전자기력과 비슷한 힘과 중력, 두 가지 밖에 없는 거죠.”
“바로 선한 힘과 악한 힘이로구만.”
“그건 아닌데요. 하여튼 그 놈이 하늘로 날아 오른다면 무슨 힘을 이용하든 몸을 밀어 올리는 건데, 세상에 이용할 수 있는 힘은 하여튼 전자기력 비슷한 것 아니면 중력, 두 가지 중에 하나예요.”
“선한 힘과 악한 힘!”
“만약에 그 놈이 중력을 어떻게 이용해서 공중으로 떠오른다면, 머리카락까지 위로 당겨지거나 머리카락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하늘거리면서 하늘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중력을 이용했다는 말은 무게 자체를 없앴다거나 반중력으로 중력 반대로 힘을 받게 했다는 거니까요.”
“선한 힘을 사용하면, 머리카락조차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해서 무게를 잃고 마치 물 속에 들어 간 것처럼 하늘거리게 된다, 그 말이로군.”
“그리고 만약에 전자기력과 비슷한 힘을 사용한다면 중력은 그대로인데 다른 힘으로 몸을 당겨 올리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 방식이라면 아마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일일이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 거든요. 그러면 분명히 머리카락은 그대로 아래로 쳐져 있겠죠.”
“악한 힘을 사용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득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은 하늘로 떠오르더라도 머리카락만은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뭐, 중력을 조절한다는 게 확실히 더 어려운 경지처럼 보이기는 하죠. 중력을 양자이론으로 표현하는 게 확실히 어렵기도 하고. 사실 제가 시간 여행 사업단에 처음 지원한 것도 중력 양자화 이론의 시간 차원 방정식 연구를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런 연구는 연구비 받기가 어렵다고 해서...”

삼월이는 기뻐하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다음날 삼월이는 최 박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그 놈은 악한 힘을 사용하고 있소! 머리카락은 보통 때와 같았소.”
“그러면, 무슨 초능력이든 간에 하여튼 전자기력과 비슷한 힘을 써서 자기 몸을 들어 올리고 있는 거예요. 반자성을 이용하는 것 아닐까요? 물의 반자성을 이용하기 좋으니까, 아마 강력한 자력을 어디서든 어떻게든 뿜어 내서 몸의 수분을 자력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몸을 공중에 띄우는 걸 거예요. 양자이론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죠. 방정식을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실험적으로는 반복하다 보면 경험칙에 의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과연 사악하게 들리오.”
“그러니까, 만약 자력과 반자성 같은 것을 이용한다면 몸의 수분이 많은 곳이 밀려서 올라가는 것이고 몸의 다른 부분은 거기에 딸려 올라 가는 것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러면 수분이 별로 없는 뼈 같은 부분은 살가죽에 걸려 있게 되어서 아플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그런 부분이 약점일 거예요. 얼굴 부위 같은 데는 뼈는 많은데 살은 적으니까 날고 있는 동안에 분명히 뼈 무게 때문에 꽤 아플거라고요.”
“그대는 얼굴에도 살이 많지 않소? 특히 목과 뺨 같은 곳에.”
“아니면 철로 된 바늘 같은 것을 많이 구해서 던져 보세요. 강한 자력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면 분명히 바늘이 자력이 있는 쪽으로 끌려서 막 날아가 꽂힐 거라고요.”

그렇게 해서 삼월이는 사람들이 교주를 물리치는 일에도 공을 세우게 되었다. 주변 마을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하늘을 마음대로 펄펄 날아가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얇은 천의 성질이다. 그런데 천을 이기는 것은 바늘이기 때문에 바늘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교주를 물리쳤다.”

최 박사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점도 있었다.

“그런 괴상한 기술을 가진 놈들이 어디에서 자꾸 나타나는 거지? 뛰어난 기술을 가진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로 찾아 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전에 실험용으로 보낸 로봇들이 돌아 오지 않고 사람인 척 하면서 여기에서 자기 기술로 신라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걸까?”

하여간 이후로도 최 박사는 삼월이에게 미래의 맛 있는 요리법이나 재미있는 놀이 같은 것을 가르쳐 주며 돕고 지냈다. 특히 끝말잇기나 서라운드 게임 같은 것은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굉장히 파격적인 놀이였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한편으로 삼월이는 최 박사가 산 속에서 혼자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나물을 먹거나 풀뿌리를 캐 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곰과 싸우는 방법이나 호랑이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을 알려 주기도 했다. 최 박사가 얼마나 잘 따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다른 극복과제였지만.

그리고 얼마 후 무슨 인연인지 최 박사와 삼월이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마도 최 박사가 다섯번째로 곰에게 습격 받아서 시간 여행 장치 속으로 숨었을 때, 삼월이가 다시 돌을 던져 구해 주었던 때가 결정적인 시점 아닌가 싶다. 다만 삼월이의 주장에 따르면 최 박사는 신라 시대에 도착해서 삼월이를 처음 만난 순간 반했음이 틀림 없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박사는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뿜어내는 중성미자가 지구에 도달할 때 그것을 잘 포착하면 시간 여행 장치를 다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다행히 초신성이 지구쪽을 향해 중성미자를 뿜으면서 폭발하는 날이 얼마 후 찾아 온다는 사실을 컴퓨터에 남아 있는 과거 기록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최 박사는 어쩌면 그것이 몇 십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시간 여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 박사는 삼월이에게 말했다.

“대한민국 시대로 같이 가자고요.  지금 시대보다는 살기가 좋을 거예요. 골품제도도 없어졌고, 도적떼들이 길가에서 말타고 다니면서 막 떼거리 약탈하고 그런 시대도 아니고요. 헬조센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사실 조선시대도 벌써 지났고. 전염병이 가끔씩 돌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지금처럼 막 천연두도 돌고 흑사병도 돌고 그런 시대는 아니거든요. 손 자주 씻고 사회적 거리 두기 하고 그러면 괜찮아요. 병원도 있고요.”

그러나 삼월이는 아무래도 망설였다.

“나는 산동네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소. 어찌 사람이 붐비는 성 안에서 살겠소?”
“어차피 새로 생기는 정부 연구소들은 다 사람 없는 외진 동네에 생기잖아요. 집을 산속 마을에 짓고, 삼월이는 집 근처에서 지내고 저는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고 그래도 되고요. 적적하다 싶으면 귀촌한다는 사람들에게 삼월이가 아는 것 알려 주면 되고요.”
“하긴, 산에서 일할 때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을 때 호랑이 물리치는 법이라면 나만큼 잘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요.”

최 박사는 1920년대에 이미 호랑이가 멸종되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충 서로의 뜻은 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로 돌아가기를 며칠 앞두고, 삼월이가 울면서 시간 여행 장치 앞에 달려 왔다. 최 박사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절망한 표정이었다. 최 박사는 삼월이가 그런 얼굴로 나타날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었다.

삼월이가 말했다.

“도적놈들이 아기를 잡아갔소.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재물을 빼앗아야겠다면서 들고 일어난 도적떼였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공을 여러번 세웠으니 분명히 숨겨 놓은 재물이 많을 거라고 하자, 도적떼들은 아기를 잡아 가서 숨겨 놓은 재물을 내어 놓으라고 하고 있소. 숨겨 놓은 재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제 어쩌면 좋소?”

최 박사는 황급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주변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면 오늘 초신성에서 쏟아지고 있는 중성미자를 저장해 놓은 연료통 뿐이었다. 그렇지만 신라 도적떼들이 상호작용도 잘 하지 않고 질량도 적은 입자를 좀 받고 아기를 순순히 내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삼월이가 다시 물었다.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술법을 부릴 수는 없소? 현자라면 그런 도술을 부려서 몸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몰래 도적떼 소굴에 들어 가서 아기를 데리고 나올 수 있을 거 아니오?”
“그런 수법은 불가능해요.”
“그대는 현자가 아니오?”
“약을 먹어서 몸을 투명하게 바꾸는 방식이라고 해 보자고요. 그러면 몸만 투명해질테니 일단 옷을 다 벗고 다녀야 된다고요. 그런데 몸만 투명해진다는 것 자체도 이상하잖아요. 만약에 음식을 먹으면 음식은 언제부터 투명해지는 거예요? 소화가 되면서 점점 투명하게 변하는 건가? 그러다가 화장실에 가면? 말이 안돼요. 다른 말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돼요.”
“도적떼들 소굴에는 지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몸을 숨기는 방법 말고 무슨 더 말이 되는 방법이 있겠소?”
“투명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투명해진 쪽도 위험해지는 거라고요. 투명하다는 이야기는 빛과 작용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킨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빛을 받아서 무슨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라고요. 뭔가가 투명해지면 그 물체는 빛을 느낄 수는 없게 되는 거죠. 투명해지는 상자 같은 것을 만든 뒤에 그 속에 들어 가면, 그 상자 속에 있는 사람은 바깥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그러자, 삼월이가 탄식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박사 학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최 박사는 갖고 있는 모든 장비와 도구들을 다 꺼내 놓고 뭐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투명물질로 만든 상자 속에 들어 가고, 나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주변 영상을 무선으로 송신 받아서 주변을 보면서 움직이면 어떨까? 안 돼. 인공위성이 없잖아. 아니면, 이런 방식은 어때? 가시광선은 모두 투명하게 통과시키지만 적외선은 감지하는 물질을 만들어서 그걸로 투명물질을 만들면? 그러면 맨눈으로 보기에는 가시광선이 모두 통과하니까 투명해 보일 거고. 그리고 그 투명물질 상자 속에 들어간 뒤에 적외선 카메라로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물질이 있나?”

최 박사는 한참 이리저리 장비들을 뒤졌다. 그러더니 그는 몇 가지 약품과 기계 장치 꾸러미를 들고 길을 나서겠다고 했다. 삼월이가 물었다.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비술을 터득했소?”
“아니오. 아무래도 그런 방법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면 뭘 어쩌겠다고 몸집만 크지 싸움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도적떼 소굴로 나선단 말이오? 그대는 반달곰 한 마리조차 대적하지 못하지 않소?”
“내가 투명해져서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은 너무 어려워요. 그렇지만, 만약에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만들면 투명인간이 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거죠. 제가 보기에 투명인간 효과를 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것 뿐이에요. 내가 투명해 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을 막는 거죠. 가는 길에 약품을 하나 만들어서 그걸 도적떼 소굴에 뿌린 다음에, 이 기계로 ASMR 음파 자극을 줄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지역 도적떼들의 뇌를 공격할 거라고요. 그러면 도적들은 내가 지나가는 모습을 잘 인식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바로 눈앞에서 지나가도 도적떼들의 뇌가 제대로 못 움직여서 그냥 먼지 바람 같은 게 잠깐 스쳐가는 느낌인 것 같기만 할 거라고요.”
“그게 제대로 되겠소?”

삼월이의 마지막 질문은 최 박사 스스로도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고 있는 질문이었다.

다행히 그날 저녁 최 박사는 무사히 아기를 구해서 마을로 돌아 왔다. 그러나 도적들 중에는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해 애초에 뇌가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던 자가 하나 있었다. 그 도적에게만은 최 박사의 술법이 완전히 통하지 않았다.

곧 최 박사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요술쟁이니 교주니 하는 작자들 중에 하나가 그 취한 도적의 모습을 보고 상황을 눈치 챘다. 

그러자니 이제 곧 도적떼들이 최 박사와 삼월이를 쫓아 올 형편이었다.

최 박사가 삼월이에게 말했다.

“일단 아기랑 같이 도망치세요. 저는 도적떼들을 유인해서 산 속으로 도망칠게요. 도적떼들을 도저히 못 따돌릴 것 같으면 제 시간 여행 장치로 들어 가서 숨으면 돼요. 그리고, 나중에, 나중에 우리는 다시 만나면 되는 거고요.”

삼월이가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는 언제를 말하는 거요?”
“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잖아요. 제가 어디 갔다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10년이 걸린다고 해도 내일 도착하는 날짜로 돌아오기만 하면 삼월이가 보기에는 내일 아침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거예요. 길게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그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은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오늘 만큼 답답한 날이 없었소. 그래서 도대체 그대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해 줄게요. 앞으로 살다 보면 전쟁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온갖 악당들이 득실거리는 시대가 올 지도 몰라요. 그러면 궁예, 견훤, 뭐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할텐데, 그때 꼭 왕건이라는 사람 쪽에 붙으세요. 그래야 일이 잘 풀려요. 그리고 물이랑 음식은 끓여 먹고요. 농사 지을 때 썩은 걸 거름으로 식물 위에 뿌려 주면 더 잘 자라니까 그렇게 하고요. 하늘에 일식, 월식이나 새로운 별이 나타나거나 해도 아무 징조 같은 거 아니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고요. 또 뭐가 있지? 아, 제가 전화기 줄테니까 아기한테 이거 보여 주세요. 사용하기 쉬우니까 금방 어떻게 쓰는 지 아기는 알 수 있을 거예요. 여기에 몬테소리 교육법으로 어린이 교육하는 거, 그런 앱도 깔려 있거든요. 전화기 앱이 이런 똑똑한 아기한테 정말 좋을 거예요. 얘는 정말 엄청 똘똘하잖아요? 분명히 멋지게 자라날 거라고요.”

최 박사는 삼월이에게 전화기를 건내 주었다. 삼월이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소. 그대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소?”
“내일이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내일 제가 안 나타나면, 음. 어디에서 만나면 좋지?”

최 박사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십원 짜리 동전이 하나 있었다. 최 박사는 삼월이에게 그 동전을 건냈다.

“만약에 내일 제가 삼월이를 안 찾아 오면, 서라벌 도성에 가서 불국사라는 절에 가요. 그 절에 가면 이렇게 생긴 탑이 있어요. 그 탑 앞에서 만나요. 제가 최대한 빨리 거기로 갈게요.”

삼월이는 동전을 들여 다 보았다. 그리고 잃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주어 손에 쥐었다.

그날 밤, 최 박사는 도적들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갔다. 곰이나 호랑이를 물리치는 데는 한 번도 익힌 것을 써 보지 못했지만, 삼월이가 알려준 방법대로 돌을 던지는 것은 도적들을 따돌리는 데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 박사는 시간 여행 장치가 숨겨져 있는 곳으로 밀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최 박사는 별자리의 위치마저 달라 보이는 먼 옛날의 하늘을 마지막으로 올려다 보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착한 때는 최 박사가 시간 여행 장치를 처음 작동시킨 후, 고작 5분이 지난 후였다. 5분 동안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하던 연구소의 교수들이 시간 여행 장치 곁으로 모여 들었다.

사방이 긁히고 부서지고 낡아 빠진 모습으로 돌아 온 시간 여행 장치와 그 속에서 나온 최 박사의 모습을 보고 교수들은 웃었다.

“아이고, 최 박사, 이게 뭐야? 시간 여행 실험 한 번 하더니, 진짜 옛날 사람 다 됐네.”

최 박사는 터널터널 기계 장치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유리벽 밖에서 다른 교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라 시대에서 유명한 사람도 만나 보고 그랬나? 최치원이라든가, 그런 사람도 만났어? 최치원 아버지가 황금 돼지라는 전설이 있잖아? 최박사, 황금 돼지도 정말 있던가?”

최 박사는 유리벽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황토색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은 기운이 빠져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노랗게 물들였던 머리카락에 부연 먼지가 내려 앉은 모습도 보였다.

 


3.
과거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묻혀 왔을 지도 모른다고 해서 최 박사는 2주일 동안 격리 되어 있었다. 격리 기간 동안 최 박사는 인터뷰도 했고 인터넷으로 갖가지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격리 기간이 끝나자 마자 최 박사는 모든 다른 일정을 젖혀 놓고 경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다보탑에 대해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 보던 중에, 다보탑 해체 수리 사업에 대한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를 보니, 수리 중에 다보탑 바로 앞의 바닥에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신라 시대의 유물이 이것저것 발굴 되었다고 했다.

그 중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진 돌멩이도 하나 나왔는데, 거기에는 기다릴 “대(待)”자가 적혀 있었다고 했다.

 

- 2020년, 반포에서
 

댓글 7
  • 심너울 20.05.31 01:25 댓글

    재미있어요! 곽재식 작가님 특유의 매력이 너무 잘 드러난 단편이예요. “안녕, 나는 박사후 연구원이란다. 일종의 현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같은 대사는 그저 아름답네요.

  • 심너울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5.31 09:20 댓글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멀쩡한 소설을 써 올려 보겠습니다.

  • No Profile
    윤새턴 20.06.01 14:10 댓글

    마지막이 좀 소름끼치네요. 만일 최박사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 결심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돌로써 시한부 선고를 받은 셈이 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6.01 15:28 댓글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쓰기 시작할때만해도 별로 결말에 이런 말 붙이는 것은 생각 안했는데 쓰다보니 옛날에 환상특급 같은데 나오던 시간여행 이야기가 생각난 영향인지 문득 이렇게 끝내야겠다 싶어 이렇게 써버렸습니다.

  • 빌린 20.06.07 01:25 댓글

    박사후가 뭔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닥터 후의 패러디였군요 ㅎㅎ

  • 빌린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6.07 21:39 댓글

    그건 아닙니다. 실제 있는 직종입니디.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 빌린님께
    No Profile
    윤새턴 20.06.09 16:25 댓글

    굉장히 기발한 오해네요 ㄷㄷ;;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도 일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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