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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관(史官)과 필사하는 목각기계

 

이경희

 

 

―명종 일년 일월.

 

  "자네, 리(理)와 기(氣)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안(安)에게 손(孫)이 물었다.

  "세상을 이루는 구조에 대한 이론이 아닌가. 명에서 돌아온 이(李)에게 기본을 조금 배웠네만."

  안의 답을 들은 손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는 내가 겪은 신묘한 일인데…"

 

 


오 년 전, 춘추관의 사관으로 임명받은 손은 업무를 심히 귀찮아하였다. 일과를 마치고 저자를 거닐 때면 입버릇처럼,

  "임금의 하루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이 일정하니, 사관의 일이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무엇이 다른가? 사초를 꾸미는 매일이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날은, 마침 거리를 지나던 토정(土亭) 이지함 선생이 이를 훔쳐 듣고는 그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 자네의 딱한 사정을 들었네. 이에 새로운 기계를 하나 발명할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이 기계가 자네를 대신하여 세상의 사건을 보고 듣고 기록하게 될 것이네."

  하였다.

  한 달 뒤, 과연 그의 말처럼 붓이 달린 목각기계가 완성되었다. 기쁨에 가득 찬 손은 곧바로 기계를 짊어지고 등청하였다. 허나 기계는 점과 선만을 무작위로 번갈아 그릴 뿐, 임금의 말씀을 한 자도 옮기지 못하였다. 화가 난 손은 토정 선생에게 따졌다. 그러나 선생은 허허 웃으며,

  "고장이 아닐세. 점은 ‘없음’을 선은 ‘있음’을 의미한다네. 따져보면 세상 만물이 모두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도가에서는 이를 무(無)와 유(有)로 이야기하고, 불가에서는 공(空)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실은 같은 본질을 상통하는 것이네."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실망한 손은 창고 구석에 기계를 처박아놓고 몇 년 동안 이를 잊고 살았다.

 

 


"우스운 이야기로다. 아마도 토정 선생은 게으른 그대를 놀려주려 한 것이 분명하네. 그런데 그 사연이 성학의 이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안이 물었다. 그러자 손은 말없이 그를 이끌고 창고로 향하였다. 창고의 문이 열리자 안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방 안에는 정연하게 배치된 온갖 기계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거대한 물항아리로부터 흘러나온 물줄기가 태엽이며 구슬을 복잡하게 굴려 동력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바로 그 기계일세."

  손이 기계를 가리켰다. 붓이 매달린 기계는 그의 말처럼 끊임없이 종이에 점과 선을 그리고 있었다.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모두가 곡림하던 때, 나는 문득 전하의 말씀 한 구절을 떠올렸네. ‘하늘이 소리로 만물을 창조하였으니, 응당 이 세계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저 기록은 천상의 언어를 필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네."

  손은 또 다른 기계를 가리켰다. 이전의 기계와 비슷해 보이는 기계에는 붓 대신 팔괘(八卦)가 그려진 목판이 장치되어 있었다. 기계는 상하로 빠르게 움직이며 종이에 괘를 찍어내고 있었다.

  "이는 있음과 없음의 나열을 우주의 표상인 팔괘에 맞춰 여덟 개씩 하나의 단위로 묶어 표현해본 것이네."

  "여덟 괘중 어떤 괘는 찍히고, 어떤 괘는 찍히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순번에 따라 있음인 경우에는 괘를 찍고, 없음인 경우에는 괘가 찍히지 않네. 이를 계산해보니 하나의 팔괘를 가지고도 256가지 경우가 표현되어질 수 있네."

  "언어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개수가 아닌가."

  안이 반박했다. 그러자 손은 팔괘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팔괘의 가운데에는 태극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또한 음(陰)과 양(陽)이 번갈아 찍혀 있었다.

  "역법에 의하면 팔괘는 상괘와 하괘로 나누어지네, 두 개의 팔괘, 즉 열여섯 개의 괘는 65536가지 경우를 표현할 수가 있네. 자휘(字彙)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한자가 3만 가지를 조금 넘으며, 세종께서 창시한 소리 문자의 조합 또한 대략 1만 가지에 불과하니, 서역의 온갖 문자까지 모두 합하여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이처럼 한 쌍의 팔괘가 모여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담아내니, 이것이 언어의 기본 단위가 되는 것이네."

  안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0부터 65535까지의 수가 어떤 문자를 의미하는지 일일이 대조하여 알아내었네. 그 결과가 이것일세."

  손이 그리 말하며 비단 장막을 걷어내니, 그곳에는 빼어난 솜씨로 직조된 목각 동자 인형이 삼베옷을 입고 정좌하여 붓을 놀리고 있었다. 안은 놀란 눈으로 동자가 쓰고 있는 글귀를 보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은 놀란 눈으로 동자가 쓰고 있는 글귀를 보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은 놀란 눈으로 동자가 쓰고 있는 글귀를 보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은 놀란 눈으로 동자가 쓰고 있는 글귀를 보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안은 놀란 눈으로 동자가 쓰고 있는 글귀를 보았다. 종이에는…

  두려움에 빠진 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보시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제(上帝)의 말을 훔친 것이네. 이제 이 언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것이야."

  "자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자네를 원숭이로 바꾸어볼까? 아니면 스스로 왕이 되어볼까? 전부 시시하지 않은가. 나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지워버릴 생각이네. 천상의 서고를 전부 ‘없음’으로 덮어 처음부터 새로 써내려갈 것이야."

  "자네는 사관이 아닌가! 어찌 역사를 날조하려는 것인가!"

  안이 소리쳤다. 그러자 손은 노하여 더 큰 목소리로 답했다.

  "하늘이 이 붓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왕을 독살한 호로자식들이 배불리 잘사는 역겨운 세상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 붓을 쥐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손은 그리 말하며 동자인형의 정수리를 눌렀다.

  끼이이익- 히잇- 끼이이- 인형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붓을 던져버리고는 등 뒤의 서고에서 서첩을 하나 꺼내 펼쳤다. 그런 다음 고사리같은 손에 먹을 묻혀 글귀 가득한 종이를 퍽, 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내 더는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안은 반상을 집어 들고 인형을 부수려 하였다. 그런데 손에 쥔 반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후엔 대들보가 사라져 지붕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앞의 세상이 지워지는 모습을 보며 손은 광인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니다! 이게 아니다!"

  퍽, 퍽, 동자가 먹을 칠 때마다 그의 팔과 다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이내 몸통만 남은 것이 바닥에 툭 떨어져 펄떡 거리며 울부짖었으나 이마저도 한 움큼 한 움큼 지워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안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말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그가 의금부 장정들과 함께 다시 손의 창고에 들이닥쳤으나, 창고는 깨끗이 비어있었다.

  손이 사라지게 된 연유에 대하여서는, 하늘이 노하였기 때문이라 이야기되기도 하고, 역사를 지우려다 그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서첩의 끝(E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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