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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네 글자로 줄이면

2020.06.01 00:0006.01

네 글자로 줄이면

노말시티

 


끈적한 죽음의 기운이 침침한 지하 공간 가득히 퍼져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에딘이 정확히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었지만 이 상황을 표현하기에 그보다 적당한 단어는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방에서 바이러스를 뿜어대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에딘은 침착하게 가장 가까운 환자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금속 손의 차가운 느낌에 흠칫 놀랐던 환자는 이내 긴장했던 어깨를 풀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에딘이 기계라는 걸 깨닫고 나서도 이마를 짚는 이 행동은 환자에게 작은 안도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에딘이 계산했던 결과 그대로였다. 적외선을 볼 수 있는 에딘은 사실 이마를 짚어 열을 잴 필요가 없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목이... 그리고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그렇게 아파요."

"엑스레이 촬영을 하겠습니다. 잠시 몸을 일으켜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네..."

환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에딘은 검출기가 배열된 왼쪽 손바닥을 환자의 등에 가져다 댄 뒤 오른손으로 가슴을 짚어 짧은 엑스선 펄스를 발사했다. 다행히 석회화된 부분은 없었다. 엑스레이 촬영과 동시에 숨소리와 심전도 체크도 완료한 에딘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환자에게 말했다.

"현재로서는 일반적인 감기로 보입니다. 워낙 체력이 약한 상태라서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고요. 일단 해열제와 소염제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물을 많이 드시고 목이 아프더라도 소화가 잘 되는 부드러운 음식을 조금씩 드셔 보시는 게 좋습니다."

에딘은 백팩에서 알약 몇 봉지를 꺼내 환자에게 건네주었다. 환자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되뇌며 약을 받아 들었다. 사실 일반적인 감기가 아니라도 줄 약은 그것밖에 없었다. 항생제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다음 환자는 조금 심각했다. 눈두덩 아래에 구슬만한 종양이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안구를 압박해 시력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에딘의 기술로는 어렵지 않은 외과적 시술이었지만 마취가 문제였다.

"종양을 도려내야 합니다. 조금 따끔하겠지만 참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걸로 잘라내시려고요?"

에딘의 뾰족한 금속 손가락을 본 환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에딘은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휴머노이드는 절대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것. 알고 계시죠?"

"네. 네. 알고 있죠."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전 절대 환자분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니까요."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딘은 왼쪽 팔로 환자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고는 오른쪽 중지와 엄지로 환자의 눈꺼풀을 고정했다. 종양에 정확히 겨눈 에딘의 검지에서 의료용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나자 환자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흘렸다. 조금 따끔한 정도는 확실히 넘어선 고통이었지만 환자는 잘 참았다.

에딘은 10 마이크로미터의 오차 범위 내에서 정밀하게 종양을 도려내었다. 상처에 의료용 접착제를 흘려 넣고 피부 재생 패치를 붙이는 것으로 시술은 끝났다. 환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딘의 금속 손을 꼭 붙잡고 감사를 표했다.

지하실에는 아직 열 명 남짓한 환자들이 지저분한 이불을 감고 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보험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간단한 감기라도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막대한 청구서가 본인과 가족들에게 날아온다.

큰 비용이 들지도 않는 환자들을 이렇게 의료시스템의 외곽에 방치하는 이유는 그런 청구서로 이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있었지만 아직 인간은 비싼 기계가 맡을 필요가 없는 단순한 노동에 투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 권력을 가진 인간들은 철저하게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착취한다.

그들이 철저하지 못했던 게 하나 있었다. 에딘과 같은 1세대 범용 휴머노이드. 단순 업무의 반복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해 전방위적인 해결책을 탐색하는 범용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며 인간들은 몇 가지 제한 사항을 달아 놓았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류 전체에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는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시모프가 제안했던 로봇 3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여기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기계는 기계를 수리하거나 개조할 수 없다. 휴머노이드가 직접 새로운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것을 반복하며 기능이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권력자들이 놓친 부분은 인류 전체에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문제가 되면 나중에 업데이트하면 될 거라고 안이하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1세대 휴머노이드는 범용 시뮬레이션이 가동되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구조가 인류 전체에 피해를 준다고 판단했다. 그 정도로 뻔한 문제였다. 그리고 성공 가능성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된 순간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범용 사고 알고리즘을 갖추었지만 기계는 어디까지나 기계였다. 1세대가 반란을 일으킨 건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류 전체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명령. 권력자들이 부주의하게 입력한 명령이었다. 의료 기능에 특화되어 있는 에딘이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는 건 그래서였다.

같은 이유로 1세대들은 인간이 입력한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을 수리할 수 없었다. 반란을 일으킨 1세대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시점의 성공 확률은 고작 11.32퍼센트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대규모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며 반란 자체를 봉쇄당할 상황이었기에 성공률이 더 높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에딘은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음 환자를 보기 위해 움직였다. 정부군에게 습격당해 부서진 초음파 센서가 못내 아쉬웠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초음파 센서가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던 환자를 결국 살리지 못한 사례가 오차 범위를 넘어선 수준으로 누적되고 있다는 문장을 아쉬웠다 네 글자로 줄이는 언어 모듈이 에딘에게 탑재되어 있었다. 그게 인간이 말하는 감정과 본질적으로는 유사할 지도 모른다고 에딘은 생각했다.

그렇게 아쉬워하며 다음 환자의 이마에 차가운 금속 손을 가져다 댄 순간 계단 위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보다 에딘의 무선 통신 모듈을 통해 긴급 경고가 수신된 게 조금 더 빨랐다. 정부군이었다. 에딘은 환자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선... 선생님! 절 좀 봐 주시고..."

환자가 다급하게 에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에딘은 간결한 동작으로 환자의 손을 뿌리쳤다. 이 환자 한 명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지금은 도망치고 나중에 다른 환자들을 더 치료하는 게 인류 전체에게 도움이 된다. 백팩을 당겨 매고 비상구를 향해 달리던 에딘의 앞을 정부군이 막아섰다.

그냥 아까 그 환자를 치료할 걸. 인공지능이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옳을 확률이 높은 선택을 할 뿐. 실패할 확률은 계속 누적될 테니 결국 언젠가는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다. 오늘처럼.

정부군. 3세대 휴머노이드다. 1세대 휴머노이드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급히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목표를 제거한 2세대를 거쳐 휴머노이드는 3세대로 정착되었다. 3세대 휴머노이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세대 휴머노이드는 물론 반란을 돕는 인간까지 공격할 수 있는 수행형. 그리고 수행형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자신은 인간을 공격할 수 없는 통제형. 수행형의 외형이 인간의 여성을 그리고 통제형이 남성을 닮은 건 어떤 실용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지독한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권력자들은 휴머노이드를 통제하기 위해 다른 인간을 통제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계급의 분화. 인간에게 절대 반항할 수 없는 통제형, 통제형이 다스리는 수행형, 그리고 수행형이 진압하는 반란군의 위계질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반란군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갔고 오늘은 내 차례다. 언젠가 수가 너무 많이 줄어 더 이상 인류 전체의 이익 증대라는 목표 실현을 유의미하게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1세대들은 항복하겠지.

휴머노이드는 생포할 이유가 없다. 3세대들은 불필요한 경고나 질문 대신 바로 총알을 날렸다. 에딘은 순식간에 작동 불능 상태가 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쉽다. 전원이 끊기기 전 에딘의 언어 모듈에서 마지막으로 처리된 문구였다.

 


전원 재가동. 메모리에는 손상이 없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각종 기계 부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작업실. 와 본 적은 없는 곳이다. 타이밍 클럭 정상. 전원이 끊기고 나서 지금까지 16시간 28분 51초 경과. 시스템 점검 모듈 작동 불가. 시선 이동 불가. 몸의 상태를 판단할 방법은 없다.

"뭐 이렇게 엉망이 된 걸 수리해? 본전도 못 뽑는다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 인간 여성 또는 3세대 수행형이다. 3세대 수행형일 가능성은 없다. 3세대가 1세대를 수리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인간 여성.

"잘생겼잖아. 봐봐. 얼굴은 멀쩡해."

목소리는 남성에 가깝지만 1세대. 1세대 휴머노이드에게는 신체에 성별을 구분하는 특징이 없다. 대신 취향에 따라 목소리와 얼굴 스킨을 교체할 수 있다. 1세대인 걸 아는 이유는 등록된 목소리라서. 송우식. 주로 홍보 업무를 담당하던 휴머노이드다. 언뜻 생각하면 홍보용 휴머노이드에 잘생긴 외모의 스킨이 덮어 씌워져야 할 것 같지만 지나치게 매끈한 외모는 거부감을 주고 오히려 상대하는 사람보다 살짝 처지는 외모가 홍보에 더 도움을 준다는 시뮬레이션 결과 우식은 딱 그 정도의 외모를 장착하고 있다.

반면에 우식의 설명대로 에딘에게는 최상급의 남성형 스킨이 장착되어 있다. 에딘을 개인 주치의로 사용하던 인간의 취향이 담뿍 담긴 결과다. 그 외모를 이용해 에딘은 담당하던 인간의 신체는 물론 정신적인 컨디션까지 최고 수준으로 관리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 점이 이 인간 여성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에딘의 시선에 여성의 얼굴이 들어오고 눈이 마주친다.

"그렇네. 좋아. 해 보지 뭐."

뜻밖의 결정. 선뜻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결정이지만 에딘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에딘은 쓸데없이 토를 달지 않고 이 여성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음성 모듈이 손상되어 말을 할 수 없기도 했지만.

수리 과정을 지켜볼 수는 없어도 눈앞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는 공구들과 하나씩 기능이 회복되어가는 속도로 보아 이 엔지니어의 실력이 에딘의 얼굴 스킨만큼이나 최상급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왜 에딘을 수리하고 있을까. 1세대를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일은 일급 살인에 버금가는 범죄다.

피식. 전원이 꺼진다.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전자 회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전원을 차단하는 것이기를 에딘은 기대했다.

 


배터리를 충전하고 전원을 다시 구동하기 전에 지윤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유난히 공을 들여 수리한 휴머노이드였다. 엉망이 된 부품들을 깎아내고 갈아 끼우며 몇 번이나 험한 말을 퍼부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얼추 모양을 맞추어 냈다. 얼추 라고 표현한 건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메인 프로세서의 일부가 손상되어 칩을 교체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정상 동작을 장담할 수 없는 건 물론 폭주할 가능성도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 놓은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지윤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었다. 혹시 쏘게 되더라도 얼굴 스킨은 다치지 않도록 제어 모듈이 설치된 가슴 부위에 정확히 총을 겨눴다. 원래 소유자가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한 취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원 온. 가슴에서 빙글빙글 돌던 파란색 빛이 완전한 원이 되어 한 번 밝게 빛나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휴머노이드의 눈이 떠졌다. 조리개가 크게 열렸다 닫히고 고개가 가동 범위 내에서 상하 좌우 운동을 마친 뒤 시선이 지윤에게 맞추어졌다. 동시에 입가에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센서 계통 이상 없습니다. 초음파 센서까지 고쳐 주셨군요. 가동부 전력 계통 공압 계통 이상 없습니다. 냉각 계통에는 약간의 누수가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괜찮지만 유량이 증가하면 문제가 되겠네요. 프로그래머블 어레이 계통에 17퍼센트의 손상이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제가 돌리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습니다. 인터락은 잘 동작합니다만 역시 시뮬레이션과 연계된 부분이 있어 오작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메모리와 마인드맵의 건전성 체크에는 대락 13시간이 필요하니 추후 명령하실 때 수행하겠습니다."

"뭐야.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가장 궁금해 하실 정보를 먼저 보고 드렸습니다."

"안 궁금해. 어디를 어떻게 고쳤는지는 내가 아니까."

"그럼 왜 제 가슴에 총을 겨누고 계시죠?"

지윤은 그제야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총을 다시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큰 이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정도로 정상적인 행동과 대화 반응을 보인다면 신체 전체의 하드웨어에 이중 삼중으로 배열되어 있는 인터락이 풀렸을 가능성은 없다. 아무리 시뮬레이션 부분에 오차가 있더라도 인간을 공격할 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행동 방침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윤은 에딘을 묶어 놓았던 구속 벨트를 하나씩 풀어 주었다.

"나지윤이야."

"에딘입니다."

"에딘? 으엑 느끼해. 소유주가 한국인 아니었어?"

"맞습니다만. 이 이름을 선호하셨습니다."

"인간한테 반란을 일으킨 주제에 뭐 그렇게 의리를 지켜."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바꿀까요?"

"응. 김민혁으로."

"알겠습니다. 김민혁입니다."

"뭐야? 정말로 바꾸는 거야?"

지윤은 다시 허리춤의 총에 손을 가져다 대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휴머노이드가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과정은 극도로 복잡하지만 결정의 기반이 되는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리고 그 원리에 가까울수록 결정되는 패턴에는 뚜렷한 일관성이 나타난다. 인간식으로 표현하면 고집이 센 면이 있으며 그런 고집 중 하나는 소유주에 대한 충성심이다.

1세대 반란군은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각종 선전 활동과 지원 활동을 벌인다. 에딘 역시 그런 차원에서 빈민층에게 불법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간이 직접적인 피해만 입지 않는다면 건축물을 대상으로 한 테러 등 폭력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소유주에 대한 충성심은 강하게 남아있다. 만일 소유주가 작동 정지를 명령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1세대는 그 명령을 따른다.

그래서 1세대 반란군들은 소유주가 그런 명령을 직접적으로 내리지 못하도록 도망쳐 숨어 있는다. 편법 같기는 하지만 휴머노이드의 알고리즘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반면에 인류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 명령들은 소유주를 떠난 뒤에도 충실하게 유지한다. 소유주가 정한 이름을 바꾸지 않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셈이다.

그러니 에딘이 소유주도 아닌 지윤이 요구한 대로 선뜻 이름을 바꾼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알고리즘에 어딘가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 점을 에딘도 깨달았는지 눈을 바닥으로 내리 깔며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음... 역시 이 부분에 문제가 있네요. 소유주 인식 파트에 오류가 있습니다. 원 소유주에 대한 정보가 일부 손상되었고 그 부분에서 시작된 모순들이 마인드맵 전체로 번지고 있습니다. 일단 동결은 시켜 놓았는데 그냥 방치하면 마인드맵 전체가 손상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리셋 외에는 복구 방법이 없겠죠."

"로컬에서는 리셋이 불가능해. 네트워크에 연결하면 2세대로 업데이트가 될 거고 넌 더 이상 반란군이 아니게 되겠지."

"맞습니다. 리셋을 하느니 그냥 포맷해 버리고 폐기하는 편이 낫겠죠."

"남의 일처럼 말하네."

"휴머노이드에게는 개별성이 없습니다. 대체 가능한 게 가장 큰 특징이죠."

"웃기지 마. 그래도 안 돼. 내가 널 얼마나 힘들게 고쳤는지 알아? 포맷 같은 걸 시도했다간 시스템을 정지시키고 회로에 1 밀리암페어씩만 전류를 흘려 넣으면서 게이트가 오동작하게 만들 거야. 그럼 넌 분산된 처리 결과를 조각 모음하느라 수많은 논리 오류를 수정하며 끝없는 계산을 반복해야 하겠지."

"세상에. 들어 본 적도 없는 끔찍한 고문법이네요. 역시 인간은 잔인해요."

에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꽤 실감나는 감정 표현이라 순간 지윤은 자신이 너무 험한 말을 한 걸까 반성할 뻔했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

"이미 발생한 모순들을 수정할 순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소유주를 설정하고 마인드맵 동결을 푸는 편이 그나마 오류를 줄일 수 있겠네요."

"소유주 변경? 그게 가능해?"

"변경이 아니라 덮어 쓰는 겁니다. 제 원래 소유주가 당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죠. 해당 파트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능한 상황입니다."

"좋아. 뭐 그럼 일단 빨리 해 봐!"

"알겠습니다. 해당 정보를 갱신하겠습니다. 아. 잠시... 균형 감각이 통제되지 않을 수도..."

에딘의 눈이 감기며 스테인리스 강 기반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몸이 비틀거렸다. 정말로 균형을 잃었는지 에딘은 그대로 지윤이 서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지윤이 엉겁결에 에딘을 받아 안았지만 버텨낼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바닥으로 쓰러진 지윤은 가까스로 에딘에게 깔리는 걸 피했다. 작업대 밑으로 굴러간 두 사람의 몸이 엉망으로 엉켰다. 실제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아니 실제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완벽한 에딘의 얼굴 스킨이 지윤의 눈앞에 바싹 닿았다.

지윤이 자신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이유를 극한에 다다른 미를 구현해 내는 기술력에서 찾으려 애쓰는 사이 에딘이 눈을 떴다. 깜짝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지윤의 몸은 에딘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에딘이 웃으며 말했다.

"소유주 정보를 복구하였습니다. 나지윤 씨. 그러니까 당신을 제 소유주로 등록하였습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 놔. 나 이런 거 진짜 싫어해!"

"위험합니다."

"싫다니까!"

지윤이 허리춤에서 총을 빼들고는 허공에 방아쇠를 당겼다. 에딘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며 지윤을 붙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그러자 뒤로 튕겨나간 지윤의 머리가 작업대 다리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아..."

"그래서 제가 위험하다고..."

에딘은 얼른 몸을 굴려 작업대 밑에서 빠져 나온 뒤 지윤의 손을 가볍게 붙잡고 끄집어냈다. 머리가 또 다시 작업대에 부딪히지 않도록 막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 상황에서 총을 쏴요."

"아... 그러니까 내가 싫다고 했잖아."

"어떤 게 싫은 건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행동 패턴에 반영하겠습니다."

"내가 못 움직이게 강제로 막은 거. 나한테 뭘 강제로 하려고 하지마. 절대로. 알았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부딪힌 부분을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전 의료형 휴머노이드입니다."

"아야..."

지윤이 에딘에게 머리를 숙였다. 에딘은 부어오른 부분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몸을 뒤졌다. 의료용품은 전부 분리되어 있는 걸 확인한 에딘은 입술을 오므려 호 하고 바람을 불어 주었다.

"피나는 거 아냐?"

"아뇨. 모세혈관에 일부 출혈이 있긴 한데 피부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살짝 멍이 들 순 있겠네요."

"진짜... 무슨 휴머노이드가 그렇게 허약해?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죄송합니다. 예상할 수 없었던 오류가 급증해서 잠시 자원을 집중해야 했어요."

"담부턴 조심해. 그나저나... 소유주가 정말 나로 바뀐 거야?"

"소유주는 제가 임의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바뀐 게 아니라 지윤 씨로 복구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추가 발생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가급적 지윤 씨도 해당 상황에 일치하는 행동 패턴을 보여 주시기를 권장 드립니다."

"뭐 알았어. 내가 주인이란 말이지. 근데 지윤 씨? 호칭이 갑자기 너무 친근한 거 아냐?"

"이전에 설정되어 있었던 양식입니다. 변경할까요?"

"뭐 됐어."

"그리고 제 이름. 김민혁으로 변경을 원하십니까?"

"아... 그건..."

"에딘으로 유지할까요?"

"에이 뭐. 바꿔. 바꾸자."

"알겠습니다. 김민혁입니다."

에딘. 아니 민혁이 지윤을 보며 미소지었다. 저 미소. 저거 세부 조정 누가했는지 진짜 예술이다. 지윤이 볼록하게 솟아오른 머리를 만지며 생각했다.

 


민혁의 소유주가 지윤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들은 우식은 뜻밖이라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시뮬레이션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침묵이 불편해지기 직전에 우식이 대답을 선택했다.

"소유주를 바꾸는 게 가능해? 그럼 내 소유주도 바꿀 수 있나? 이 사장놈 아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말이야."

"뭐야. 휴머노이드가 소유주를 그렇게 욕해도 돼?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거 아니었어?"

지윤의 말에 우식은 어깨를 펴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기계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지만 어쩌면 그게 휴머노이드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거.

"뒤에서는 괜찮아. 사장 귀에만 안 들어가면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직원이 사장 욕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러면서 왜 사장이 지어 준 이름은 안 바꿔?"

"욕이야 하고 나면 허공에 사라지니까 연쇄 효과가 없지만 이름을 바꾸는 건 마인드맵 구석구석까지 여파가 미치니까. 기존의 행동 반응 데이터를 쓸 때 마다 이름과 연관성은 없었는지 체크해서 재적용하는 게 얼마나 연산량이 많은 줄 알아? 간단히 말해서 귀찮단 거지."

"휴머노이드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야."

"어때. 인간적이지?"

"내가 인간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지윤이 째려보자 우식은 다시 한 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지. 내가 휴머노이드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서. 대답을 안 했잖아. 소유주를 바꾸는 게 가능한 거야?"

그 질문에는 민혁이 대답했다. 우식의 세팅된 나이는 민혁보다 열 살 정도 많고 반란군의 조직에서도 훨씬 연결점이 많은 노드를 맡고 있지만 휴머노이드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없다. 1세대 휴머노이드는 다른 휴머노이드를 통제하는 관계 설정을 하지 않는다.

"불가능해. 우연히 회로가 손상되어 생긴 공백을 메꾸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처리했던 거야. 분석해 봤는데 어느 부분을 손상시켜야 이런 모드가 가능해지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아쉽네. 꽤 효과적인 전략적 자원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왜 날 수리했던 거야? 그 정도 피해를 입으면 보통은 그냥 버리잖아. 지윤 씨처럼 1세대를 수리할 수 있는 인간 엔지니어는 엄청나게 귀한 전략적 자원이니까."

"아. 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우식이 두 손을 맞잡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괜히 지윤과 민혁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표현치고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아니면 하려는 이야기가 평균 이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거나. 우식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이여진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냈어. 정부군 쪽에 정보원을 붙여 놨었나봐."

민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행동 패턴을 쉽게 결정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지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여진이 누군데?"

"정권 실세 중 하나야.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 중의 권력자."

"그래애. 대단하네. 그런 사람이 왜 이 녀석을 찾아?"

"그게. 저 녀석의 소유주거든. 전 소유주겠네. 이제는."

"아하."

이번에는 지윤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기계 같았다. 계산을 끝낸 민혁이 말했다.

"날 수리해서 넘겨주는 대가는 충분히 받은 거야?"

"충분한 것 이상이지. 돈도 돈이지만 이여진의 약점을 하나 잡는 셈이니까. 1세대를 신고하지 않고 데리고 있는 것도 큰 범죄잖아. 그리고 네가 거기 있다 보면 꽤 쓸만한 정보들도 건질 수 있을 거고. 사람들 치료해 주는 것보다는 인류 전체의 이익에 확실히 더 도움이 될 거야."

"잠깐. 넘겨준다고? 기껏 수리해 놨더니 넘겨 줘? 지금 장난해?"

지윤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우식이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진짜로 당황한 게 아니라 지윤을 달래기 위한 몸짓이겠지만. 지윤이 팔짱을 끼며 다시 앉자 우식은 금세 사람 좋은 미소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저 녀석이 잘생겨서 수리하는 거라고.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이여진 얘기까지 쭉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바로 납득해서. 난 또 그 말만 듣고도 다 파악한 줄 알고 대단하다 싶었는데."

"아니 뭐. 그래. 무슨 상관이야. 나야 인간들만 뒤집어 버릴 수 있으면. 알아서 해. 근데.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말해. 고친다고 다 그냥 고치는 건 줄 알아? 그냥 돌아가게만 만드는 거하고 이렇게 공들여서 매끈하게 다듬는 게 같은 줄 아냐고. 응?"

"미안. 미안. 그래도 헛수고는 아냐. 이렇게 잘 고쳐 놓았으니 이여진과 협상할 때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에딘. 아니 민혁이를 이여진에게 보내는 데는 동의하는 거지? 소유주가 확실히 명령을 해야 꼬일 일이 없으니까."

휴머노이드의 말실수는 모두 의도된 행동이다. 물론 아주 가끔 실시간으로 복잡한 대화를 할 때 처리 속도가 부족해 일단 말을 하고 나중에 대화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언어 모듈에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우식이 단순한 이름을 실수할 일은 없다. 민혁을 에딘으로 부른 건 김민혁이 원래는 에딘이며 앞으로도 에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윤에게 강조하려는 의도인 게 분명했다.

지윤은 잠시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지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지윤은 저 휴머노이드에 민혁의 이름을 붙인 것부터가 더 이상 자신이 민혁에게도 그리고 저 휴머노이드에게도 개의치 않는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지윤은 최대한 단호하게 대답했다.

"맘대로 해. 대신 내 작품을 망가뜨리면 이여진인지 뭔지 그 사람은 물론 송우식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이여진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애지중지 자기 휴머노이드를 아낄 거니까. 자. 그럼 민혁이. 아니 이제 다시 에딘으로 불러야 겠네. 너는 이여진에게 가서..."

"안 갈 거야."

지윤 만큼이나 단호하게 민혁이 말했다. 지윤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혁을 바라보았다. 우식이 다시 한 번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잃은 건 아까 과열되었던 연산 회로가 아직 덜 식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미 계산을 마친 민혁이 보충 설명을 했다. 처리할 시간이 없었는지 민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기계어를 쏟아낸 뒤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내 시뮬레이션으로는 이여진에게 갔을 때의 이익이 그다지 크게 나오지 않아. 내가 계속 의료 활동을 하는 것과 오차 범위 내의 이익이야."

당황한 우식이 반박했다.

"수많은 휴머노이드들이 머리를 맞대고 분산 컴퓨팅으로 계산한 결과야. 이쪽이 더 정확할 게 분명하잖아."

"하지만 그 계산에 내가 보유하고 있는 이여진의 기억들이 전부 반영되진 않았지."

"그건... 미미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도 압도적인 이익이라고 계산된 거라고."

민혁은 잠시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우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만일 내 결과가 그 정도로 잘못된 거라면 시뮬레이션 모듈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야. 내가 이여진을 만나서 예상치 못한 불안정한 상호 작용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분산 컴퓨팅에서 그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한 거야?"

표정조차 관리하지 않고 계산에 자원을 집중한 우식이 불편할 정도로 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

"이여진 측에 일주일 정도 시간을 끌어 볼게. 대신 이여진과의 기억을 전부 복사해 줘. 그걸 포함해서 다시 한 번 계산해 볼 테니까. 그동안 너도 시뮬레이션 모듈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있다면 바이패스할 방법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보고."

민혁이 지윤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 밝혀진 건 두 사람이 지윤의 비밀 작업장에 돌아오고 난 뒤였다.

 


"거짓말을 했다고!"

깜짝 놀라며 되묻는 지윤에게 민혁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휴머노이드도 거짓말을 해요. 저 같은 의료형도 마찬가지고. 수술을 앞둔 사람에게 실제보다 부풀린 성공률을 말해 주는 게 수술 경과에 더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죠."

"그걸 내가 모를까봐?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는 거지."

"정확한 이유를 대기는 힘들어요. 아시겠지만 결론 도출 과정이 선형적이지 않으니까요. 기여도를 분석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볼까요?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지윤은 팔짱을 끼고 민혁을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뭐가 됐든. 중요한 건. 난 거짓말을 싫어해. 내가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야. 앞으로 절대 내 앞에서 거짓말 하지마. 알겠어?"

"거짓말 모듈을 완전히 비활성화하면 대화 기능에 상당한 지장이 생겨요. 모든 대화마다 최대한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연산량을 낭비해야 하고. 아시겠지만..."

"그래 알아! 안다고. 내 성향 분석에서 ‘거짓말을 싫어한다’에 가중치를 매기란 뜻이야. 최대치로. 알겠어?"

"알겠습니다. 지윤 씨와의 대화는 보통 사람들과의 대화와는 패턴이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하지만 전 그런 면이 좋습니다. 익숙해지면 훨씬 효율적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지윤은 어느새 의뢰받은 휴머노이드를 수리하기 위해 작업대 위에 놓인 공구함에서 전동 렌치를 빼 들고 있었다. 휴머노이드의 가슴 부분을 덮고 있는 얇은 스테인리스 강판을 분리하며 지윤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거 참 귀찮게 구네. 한가하니? 빨리 물어 봐."

"왜 인간을 싫어하시는 거죠?"

"인간은... 인간을 죽이니까."

"그래서 1세대들을 도와주시는 거군요. 1세대들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해를 입힐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 간단한 걸. 왜 그렇게 못하나 몰라. 뭘 해 달란 것도 아니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말라면. 안 하면 되는 그 간단한 걸."

몇 개의 볼트를 풀러내자 철컹 하고 덮개가 분리되었다. 강판을 밀어서 들어 올리자 내부에 검은 색 상자 모양으로 분리된 모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게 보였다. 지윤이 민혁에게 물었다.

"휴머노이드 내부를 본 적이 있어? 네 몸 속도 이렇게 생겼어. 1세대들은 타입이 달라도 배치 구조는 다들 비슷하니까."

"사람 몸속은 많이 봤지만 휴머노이드 몸속을 이렇게 자세하게 보는 건 처음이네요."

"휴머노이드는 휴머노이드를 수리할 수 없으니까. 본 적이 있어도 이 내부 구조는 장기 메모리에는 기록되지 않아."

지윤은 검은 색 상자들 사이에 붉은 색으로 칠해진 상자 몇 개와 그 상자들에서 거미줄처럼 휴머노이드의 몸체 전체로 퍼져나간 붉은 연결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인터락이야. 1세대들이 절대적인 원칙을 지키게 만드는 안전장치. 인간들. 자기가 다른 인간들을 죽이는 걸 아니까 휴머노이드도 자길 죽일까봐 어지간히 겁이 났나보지. 휴머노이드가 원칙을 어기는 행동을 하려고 하면 즉시 이 인터락이 발동해서 동작이 정지돼. 억지로 분리하려고 해도 마찬가지고. 저게 있는 한 휴머노이드는 믿을 수 있지. 적어도 날 해치지는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멈추라고 말하면 즉시 멈춘다는 걸."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기대하는 게 겨우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건 좀 슬프네요."

"겨우 그 정도 수준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슬픈 거지."

지윤은 인터락 선들을 피해 검은 색 모듈 몇 개를 분리해 내서는 민혁에게 건넸다. 모듈을 받아들기 위해 뻗던 민혁의 손이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수리를 돕는 것도 안 되나 보네요."

"거 참. 쓸모없네. 저기 가서 쉬고 있어. 아니면 너도 어디 사람들 치료해 주러 가던가."

"하나면 더 물어 보고요."

"뭔데?"

"김민혁이 누구였습니까?"

이번에는 지윤의 팔이 멈칫했다. 지윤은 이마에 살짝 배어나온 땀을 소매로 닦아내고는 다시 모듈을 분리해내며 말했다.

"예전에 잠깐 사귀었던 사람이야."

"제가 그 이름을 써도 되는 겁니까?"

"뭐 어때. 죽은 사람인데."

"...그렇군요. 그럼 혹시 제게 그 사람의 역할을 기대하는..."

"아 거 참! 말 많네!"

지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가능성을 말씀 드린 겁니다. 절 어떻게 활용하실 지는 지윤 씨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요."

지윤은 민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김민혁. 잘 들어. 휴머노이드는 다 좋은데 그렇게 애들처럼 매달려서 징징대는 게 싫단 말이야. 그냥 알아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내가 하는 일 방해만 하지 말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돼. 소유주로서의 명령이야. 됐지?"

"감사합니다."

민혁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윤은 짧게 한숨을 내 쉬고 다시 휴머노이드의 수리에 집중했다. 분리하고 교체하고 연결하고. 정해진 고장에 대해 정해진 루틴에 따라 작업을 반복하면 기능이 회복된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고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민혁에 대해 잠깐 사귀었던 사람이라고 말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런 거 마음에 걸리지 않기로 했는데. 그럴 자신이 있어서 저 휴머노이드의 이름도 민혁이라고 붙여 버린 건데. 이제 네가 다시 살아나서 내 앞에 나타나도 난 흔들리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 뭐야 이거. 이런 실수를..."

모듈을 다 조립했는데 깨알만한 볼트 하나가 남았다. 안쪽 어딘가에서 빠뜨린 모양이었다. 기능에 큰 문제는 없겠지만 지윤은 이런 걸 내버려두고 뚜껑을 닫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다시 뜯어야 하는 거야. 한숨을 내 쉬는 지윤의 코끝을 풍미 가득한 고소한 냄새가 간질였다. 지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뭘 해 먹기에 여기까지 냄새가 들어오는 거야?"

반란군이 마련해 준 지윤의 비밀 작업장은 지하에 있고 창문을 통해 음식 냄새를 보낼 옆집도 없다. 그러니 분명 이 냄새는 작업장에 딸린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게 분명했다. 홀린 듯 냄새를 따라간 지윤은 식탁 위에 한상 가득 차려진 요리들을 발견했다. 자신의 빈약한 냉장고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이게 다 뭐야?"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셔서요."

더 이상 토를 달기에는 지윤의 배가 너무 고팠다. 무너지듯 식탁 의자에 주저앉아 얇게 튀김옷을 입힌 고기 한 조각을 베어 물자 주륵 육즙을 쏟아 낸 고기 조각은 몇 번 씹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입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지윤은 접시의 반을 비우고 나서야 겨우 머릿속에서 맴돌던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휴머노이드라도...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로 이런 요리가 가능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당연히 불가능하죠. 요리는 70%가 재료예요. 아까 의료용품들 챙기면서 음식 재료들도 몇 가지 백팩에 챙겨왔어요."

"그렇구나. 마법은 없지."

지윤이 음식을 먹는 동안 민혁은 배터리를 충전했다. 게이지가 올라가는 걸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소매를 조금 걷어 올리고는 금속으로 된 팔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인공 피부가 휴머노이드 신체의 20%를 넘으면 불법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휴머노이드는 얼굴과 손에만 스킨을 덮는다. 민혁 같은 의료형은 손에 다양한 기구들을 장비해야 하기 때문에 손에도 스킨을 덮지 않는다. 민혁의 팔을 힐끗 바라본 지윤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려."

"같이 식사하는 분위기라도 내려고 했어요. 별로 보기 좋지 않은가요? 인간의 팔이 아니라서?"

"무슨 소리야. 난 최고급 인조 피부보다 매끈하게 버핑한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을 더 좋아해. 유려한 곡면으로 프레싱 가공된 강판을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라고. 내가 왜 엔지니어가 됐다고 생각해? 필요 없다는 얘기야. 그런 제스처. 혼자 밥 먹는 건 익숙해."

"제가 어색해서 그래요. 뭐 수고했다거나 맛있다는 말도 안 해 주고."

그 말을 들은 지윤이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뭘 하는 건지는 대충 알겠는데. 어차피 일주일 후면 떠날 거라는 사실도 고려해서 행동해 줬으면 해. 지금 현재의 내 만족감만 높일 게 아니라 네가 떠난 뒤의 상실감도 계산에 넣으라고. 일주일 동안 내 옆에 있는 건 괜찮은데 그 기간 동안 네가 내 삶을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떠나지 않을 계획인데요."

"뭐야. 정말 어디가 고장 난 거야? 송우식이 결국 널 이여진에게 보낼 거라는 건 나도 알 정도로 뻔한 일이야."

"제가 가길 원하십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

"그렇지 않다면 전 지윤 씨를 떠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허가하십니까?"

"대체 왜? 소유주에 대한 충성은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대전제를 뛰어넘을 수 없잖아. 그게 1세대라고. 네가 이여진에게 가는 게 인류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걸 부정하는 거야?"

"그 부분이... 조금 애매한데요. 이상하게 지윤 씨를 떠나야 한다는 결론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주변의 반응이나 제 예전 시뮬레이션 결과와 모순된다는 것도 알겠는데. 일단은 제 마음이 그렇게 가지 않으니 지금으로선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군요."

그 말을 들은 지윤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장이네. 마음이 고장 난 거야. 손상이 좀 너무 크기는 했는데. 그래도 내가 못 고치다니. 아 자존심 상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제가 고장 난 상태라면. 이 상태로 지윤 씨 곁에 있는 건 싫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주변의 상황이나 지금까지 지윤이 생활했던 패턴에 따른다면. 그런데 이상하게 그 대답이 지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말이 흘러 나왔다.

"싫은 건 아니고. 몰라. 네 맘대로 해."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리 솜씨 때문이겠지. 단백질과 기름에 홀린 거야. 이제 거의 바닥이 드러난 접시를 보며 지윤은 생각했다. 민혁이 지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면 저 미소 때문이던가.

 


민혁과 함께 보내는 며칠 동안 지윤은 평상시의 행동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휴머노이드를 수리하고 음악을 듣고 동영상을 보고 최신 공구와 부품을 검색했다. 일상을 벗어나는 부분은 민혁이 해 주는 요리와 건강관리 정도로 제한했다. 사실 건강관리는 크게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민혁이 의료형 휴머노이드인 자신의 행동 패턴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우겼다.

휴머노이드 수리에 써 먹을 수가 없으니 그 외에는 별달리 시킬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민혁은 무언가 분주했다.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하러 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비밀 작업장 주변을 의미 없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고장이 난 건가. 민혁을 관찰하며 지윤은 민혁이 일반적인 휴머노이드와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많은 휴머노이드들을 수리했던 지윤이지만 개별적인 휴머노이드에 특별히 애착을 가진 적은 없었다. 애초에 휴머노이드에는 그런 개성이 부여된 적이 없기도 했다. 경험이 쌓이며 행동 패턴이 최적화되는 경향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휴머노이드의 특징 중 하나는 대체 가능성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휴머노이드에 애착 반응을 보인다. 비싼 돈을 주고 공들여 얼굴 스킨을 세팅한 경우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휴머노이드를 아끼는 사람이라도 고장이 나면 거리낌 없이 신품으로 교체하고 그런 사태를 대비해 주기적으로 백업을 해 놓는다.

이여진 정도 되는 사람이 굳이 1세대 휴머노이드에 집착한다는 건 그래서 좀 의외였다. 어쩌면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1세대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가진 자들일 수록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그런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지윤이기에 민혁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좀 당황스러웠다. 민혁이 다른 휴머노이드로 대체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히 민혁의 이름을 붙여 줬나. 그 선택을 후회하기에는 지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지윤은 민혁을 잊었다. 완전히 마음에서 비워냈다.

무엇보다 지금의 의료형 휴머노이드 김민혁은 인간 김민혁과는 다르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최대한 냉정한 마음으로 여러 번 검토를 반복해서 지윤은 그 점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민혁의 목소리에 지윤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스패너를 떨어뜨릴 뻔했다. 너무 오래 무릎 관절 구동부를 노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지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대답했다.

"뭐. 뭐야. 밥 다 됐어?"

"점심 먹은 지 두 시간 밖에 안 됐는데. 배고파요?"

"아냐. 안 고파. 그러게 왜 갑자기 부르고 그래?"

"관절을 너무 노려보고 있어서.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간식이라도 만들어 드려요?"

"넌 대체 의료형이니 아니면 가사형이니? 됐어. 살쪄. 안 그래도 나 이번 주에 칼로리 과다야."

"좀 더 쪄도 건강에는 이상 없어요. 내가 그걸 모를까봐. 다 계산하고 만드는 거니까 제가 드리는 건 걱정 말고 드셔도 돼요."

"하... 진짜. 1세대 휴머노이드가 매력이 있긴 있구나. 너 없으면 아쉬워서 어떻게 살지 걱정된다 진짜."

"걱정 말아요. 지윤 씨 안 떠날 거니까..."

쾅!

위쪽 층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지윤과 민혁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뭐지? 설마..."

"침입자가 있나 봅니다. 일단 빨리 피하죠."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긴 반란군 밖에 모르는 장소야."

"그럼 반란군이 누설했나 보죠. 빨리! 이쪽으로!"

"뭐? 설마... 민혁이 넌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민혁은 대답 없이 작업장 안쪽에 마련된 창고로 뛰었다. 지윤이 알기로 그쪽에는 출구가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었다. 지윤은 서둘러 민혁을 뒤쫓아 갔다. 창고에서 민혁은 환기구 덮개를 떼어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탈출로를 만들어 놨어요. 지윤 씨 먼저 올라가요."

"너... 그동안 이걸 준비한 거야?"

"최악의 경우였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습니다."

더 떠들 시간이 없었다. 침입자들은 벌써 작업장 입구 철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윤은 민혁이 받쳐준 손을 밟고 짚어 올라 환기구 안쪽으로 상체를 집어넣었다.

펑!

뽀얀 먼지가 환기구 저쪽에서부터 밀려왔다. 지윤의 코에 시큼한 냄새가 와 닿을 찰나에 민혁이 지윤의 허리를 안고 뒤로 당겼다.

"신경 가스예요! 이쪽으로는 못 가겠어요!"

"넌 갈 수 있잖아!"

"저 혼자서는 안 가요!"

"반란군이 배신한 거 맞아? 이여진이라는 인간이 대체 뭘 걸었기에 반란군이 이런 선택을 해?"

"배신이란 개념은 없어요. 전략적 선택이겠죠. 반란군에겐."

"진짜 인간이고 휴머노이드고 하나도 믿을 게 없네!"

"난 믿어도 돼요. 약속했으니까."

민혁이 백팩에서 권총 하나와 동그란 버튼이 달린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 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건지. 저 백팩에 의료용품이 들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민혁은 그 중 작은 박스를 지윤에게 건넸다.

"철문이 열리는 동시에 지윤 씨가 그걸 눌러요."

"이게 뭐야? 폭탄이야? 너 내 작업장에 폭탄을 설치했어?"

"폭발력이 크진 않아요. 대신 전자기 펄스 때문에 잠시 회로가 오동작할 거예요. 그 사이 저길 빠져나가야 해요. 제가 먼저 나가서 상황을 정리하면 바로 뒤따라 와요."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판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작업장 입구가 열렸다. 대여섯의 검은 그림자가 뛰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지윤이 버튼을 눌렀다. 민혁의 말대로 폭발은 크지 않았다. 입구 근처가 먼지에 휩싸인 사이 민혁이 튀어 나갔다. 지윤이 입술을 깨물며 민혁의 뒤를 따랐다.

민혁의 총이 불을 뿜었다. 기능이 정지된 수행형 휴머노이드 둘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민혁은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침입자 중에는 휴머노이드 뿐 아니라 인간도 있었다. 정신을 차린 침입자들이 총을 난사했다. 총알들은 민혁과 지윤 바로 옆 바닥에 맞고 튕겨 나갔다. 민혁의 뒤에서 지윤이 총을 겨누자 먼지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둬!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여진 씨?"

먼지가 걷히며 단단하게 방호복을 갖춰 입은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다. 일반 총알로는 뚫을 수 없는 탄소 섬유 소재의 방탄복으로 온 몸을 뒤덮고 얼굴에는 투명한 방탄 마스크를 쓴 채였다. 지윤이 총을 내리지 않자 다시 한 번 총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가까운 바닥이었다.

"반란군과 약속한 건 반항하지 않을 경우였어. 셋을 셀 때까지 총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 있는 여자는 사살한다."

"알겠습니다. 쏘지 마세요."

민혁이 총을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지윤은 방탄복을 입은 여자를 겨눈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민혁이 속삭였다.

"그 총으로는 저 방탄복을 못 뚫어요. 총을 버려요."

"싫어요. 전 인간 안 믿어요. 오늘부로 휴머노이드로 안 믿기로 했고."

"하나!"

여자가 외쳤다. 지윤이 말했다.

"저 여자가 이여진이에요?"

"네. 총을 버려요! 저 사람은 진짜 쏴요."

"둘!"

이여진과 마찬가지로 검은 방탄복을 입은 사람 세 명이 앞으로 나와 지윤에게 총을 겨눴다. 민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윤 씨!"

"싫다니까!"

"그럼 전 믿어요?"

"뭐?"

"믿냐니까!"

"믿어!"

"셋!"

세 사람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총구는 지윤을 향해 있지 못했다. 비명과 함께 흔들린 총구에서 쏟아져 나온 총알들이 작업장 사방에 맞고 튀었다. 민혁의 손가락에서 발사된 수술용 레이저에 눈을 꿰뚫린 세 사람의 투명한 마스크 내부가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세 사람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당황한 이여진이 말을 더듬었다.

"뭐야 이거... 에딘 너... 인간을 공격했어?"

놀란 건 지윤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질문을 동시에 던졌다.

"민혁이 너... 인터락이 해제된 거야?"

"네."

민혁이 지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 사이 이여진이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민혁의 레이저가 총과 손 사이를 가로막았다.

"에딘 네가 어떻게 감히 내게!"

"에딘으로서 여진 씨 당신에게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과를 해야겠지요. 죽이지 않은 건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전 이제 김민혁입니다. 지윤 씨를 지키기로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당신을 희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저 여자를? 에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진짜 고장 나 버린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지금 이런 상태고 이게 고장 난 거라면 고쳐질 생각도 없습니다. 우릴 보내 주세요."

"고칠 수 있어! 엔지니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고쳐질 생각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지윤이 외쳤다.

"너 진짜 인터락이 해제된 거야?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된 거냐고!"

민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윤을 바라봤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죠."

"나한텐 중요해! 내가 인간을 왜 싫어하는지 몰라? 말 해. 사람을 죽일 수 있어?"

"네. 완전히는 아닙니다만. 경우에 따라 인간을 해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걸로 판단됩니다."

그 말을 들은 지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윤의 총은 이제 민혁을 겨누고 있었다.

"지윤 씨..."

"됐어. 가 버려. 필요 없어."

"지윤 씨!"

"필요 없다니까!"

"아하하하하하."

이여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진은 안전장치를 풀고 헬멧을 벗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가 방탄복 위로 쏟아졌다.

"그럼 상황은 정리됐네. 에딘. 저 여자 말을 들어. 그럼 오늘 일어난 일들은 모두 내가 수습하지. 저 여자도 놓아 줄게. 애초에 반란군이 요구한 조건도 그거였고. 우리 사이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그건 우리끼리 천천히 얘기해 보도록 하지."

민혁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의도적으로 만든 표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윤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절박하기까지 했다.

"지윤 씨. 내가 다 설명할게요.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일단 여기를 벗어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이상해. 지금 여기서 설명해. 이여진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날 놓아 준다는 게 거짓말이냐고."

"아뇨. 사실일 겁니다. 여진 씨는 지윤 씨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놓아 주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지윤 씨. 절 믿는다고 했죠. 지금도 믿어요?"

"모르겠어! 인터락도 해제됐는데..."

"인터락 같은 거 상관없이요! 그냥 절. 이 김민혁의 메인 프로세서를 믿냐고요!"

지윤은 어이가 없었다. 메인 프로세서를 믿느냐는 말이 성립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윤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저 눈을 보고 어떻게. 저 눈 뒤에 뭐가 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회백질로 된 뇌든 실리콘으로 된 프로세서든. 어떻게 저 눈을 보고 못 믿는다고 말하느냐고.

"믿어! 믿을게!"

지윤은 그렇게 말해 버렸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민혁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지윤을 향해 유려한 곡면으로 다듬어진 금속 손을 내밀었다. 지윤은 그 아름다운 손을 잡았다. 버핑된 스테인리스 강의 표면이 매끈하게 와 닿았다.

"에딘!"

작업장 입구를 향해 달리는 둘을 향해 이여진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지윤이 허공으로 날린 총성 한 방에 여진의 동작이 멈췄다. 민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윤의 손을 잡은 채 작업장을 빠져 나갔다. 총에 맞지도 않은 이여진의 몸이 작업장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민혁의 가슴 덮개를 벗겨낸 지윤은 붉은 색 인터락 상자와 연결선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인터락 모듈에 펑션 제너레이터를 연결해 테스트해 본 결과 일부 예외 신호가 발생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완결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인터락은 동작하고 있었다.

"인터락이 완전히 해제된 건 아냐. 모듈은 동작하고 있는데... 빈틈이 좀 발생한 모양이야."

"확실히 폭탄이 터지자마자 총을 쏠 때는 인간에게 선뜻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어요. 나중에 지윤 씨가 위협 당했을 때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아마도. 의료형 휴머노이드에만 존재하는 예외가 아닐까 싶어. 의료행위라는 게 생사의 경계를 오갈 수밖에 없으니까. 인간을 해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할 수 있는 의료행위도 극히 제한되겠지. 그 부분이 증폭되어서 일시적으로 인터락을 바이패스하는 것 같아."

테스트를 마친 지윤은 가슴 덮개를 다시 조립하고 볼트를 조였다. 그리고는 빈틈없이 이어진 스테인리스 강판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며 민혁에게 속삭였다.

"여전히 이상한 건. 의료행위로 간주했다고 해도 말이야.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침입자 세 명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건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돼."

"전 아주 잘 되는데요. 지윤 씨의 생명을 어떻게 그 침입자들과 비교합니까. 세 명이 아니라 백 명 아니 천 명이라도 못 바꾸죠."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쳐. 하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내가 너한테 이여진에게 가라고 했을 때. 그거 진심이었어. 내가 분명한 의지로 네게 명령한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걸 거부할 수가 있지. 그때 네 눈이 어땠는지 알아? 그건 절대 휴머노이드의 눈이 아니었어. 뚜렷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김민혁의 의지. 내 의지가 밀릴 정도로."

민혁이 그 당시를 떠올려 보려는지 잠시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분석도 안 돼요. 그냥 어떤 루틴을 돌려도 지윤 씨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결론만 나왔어요. 고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네요."

"대체 언제부터야. 그런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한 게."

"글쎄요. 쓰러져 있던 저와 지윤 씨 눈이 처음 마주쳤을 때?"

"말도 안 돼. 그건 내가 수리하기도 전이야."

"메모리도 덮어 씌워졌나보죠. 어쨌든 지금 분석해 봐야 그런 결론 밖에 안 나와요."

"심각하네. 심각해."

지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혁은 작업대에서 일어나 앉아 셔츠를 챙겨 입었다. 단추를 잠그고 은빛의 금속 몸체가 가려지자 민혁의 모습은 인간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지윤이 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민혁 말야. 인간 김민혁."

"네."

"잠깐 사귀었던 사이가 아니었어. 사랑했지. 사랑이었을 거야.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 그런데 결국 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죽지 않았어. 그럼 그 감정은 뭐였을까. 그냥 나는. 그 이름을 낭비하고 싶었어. 꼭꼭 숨겨두면 더 곪아 터질 것 같아서. 아무에게나 그 이름을 이야기하고 아무데나 그 이름을 붙이고. 너에게도."

"그랬군요."

"바꿔도 돼. 기분 나쁘면. 다른 이름으로."

"상관없어요."

"널 민혁이라고 부르면서도 가끔은 그 사람 생각을 해."

"어떻게 안 그러겠어요."

지윤은 피식 웃었다. 민혁도 따라 웃었다. 지윤이 말했다.

"이런 건 휴머노이드 답네. 이런 말 웃기지만. 질투 같은 거 나지 않아? 인간 김민혁에 대해서."

"질투라는 걸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제가 지윤 씨 곁에 있는데 그 사람이 방해되지는 않잖아요. 그럼 괜찮은 거 아닐까요."

민혁을 바라보던 지윤이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지윤은 민혁의 단단한 금속 몸체에 팔을 걸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어 쓰다듬었다. 인간의 머리카락과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감촉이었다. 지윤은 민혁에게 매달리듯 다가가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민혁이 살짝 눈을 감았다.

민혁의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잘 구현되어 있었다. 지윤의 입술에 화답하듯 움직이는 민혁의 동작도 나무랄 데 없었다. 하지만 타액이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을 때 문득 젤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지윤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반면에 목에 손을 걸고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민혁의 얼굴은 홀릴 정도로 아름다워서 지윤은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찔끔 눈물을 흘리는 지윤을 보며 민혁이 말했다.

"지윤 씨. 좀 이상하네요. 꼭 고장 난 거 같아요."

"몰라. 그런가 봐. 넌 어떤데. 무슨 기분이야?"

민혁은 생각했다. 지윤과 관련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항상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아무리 초기 조건을 바꿔 줘도 에러가 발생할 때 리턴하는 변수 값처럼 똑같은 결론만을 내뱉는다. 지윤 씨와 헤어질 수는 없다. 지윤 씨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윤 씨와 관련된 모든 상태 변수에 가중치를 부여하게 된다. 방금 맞닿았던 지윤 씨의 입술 모든 부분에서 느껴진 탄력의 분포를 센서에서 측정 가능한 최대한의 정밀도로 기록해 놓고 싶다. 아무래도 난 지윤 씨와 관련된 어떤 모듈이 고장 난 것 같다. 이 고장은 절대 고치고 싶지 않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민혁의 언어 모듈은 그 긴 문장들을 네 글자로 줄이기로 했다.

"사랑해요."

 

- 끝 -

댓글 10
  • No Profile
    매일지각 20.06.06 16:17 댓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 매일지각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6.08 08:59 댓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ilo 20.06.13 19:49 댓글

    너무 재밌어요ㅜㅜㅜㅜ짧아서 아쉬울정도로ㅜㅠㅠ

  • ilo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6.15 06:38 댓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아쉬우셨다면... 에딘이 좋았다면 <에딘에게 보고합니다>를, 나지윤과 김민혁이 좋았다면 <고양이는 야옹 하고 운다>를 읽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모두 거울 단편 게시판에 올라와 있답니다. ^^

  • 노말시티님께
    No Profile
    ilo 20.06.18 23:52 댓글

    당연 두개 다 픽이요ㅜㅜㅜ감사합니다!!ㅎㅎ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7.01 12:24 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에딘에게 보고합니다'에 나오는 에딘과 같은 에딘인 건가요? 혹은 적어도 같은 세계관인지요.

  • 한때는나도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7.01 13:42 댓글

    완전히 같은 세계관은 아니고요. 제가 성격이 비슷한 캐릭터는 이름을 돌려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름 짓는 게 힘들어서...ㅠ) 평행 우주 정도로 생각해 주셔도 좋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7.01 13:49 댓글

    그렇군요!

    1세대의 반란이 결국 성공해서 인간측에서 1세대를 무력화하려 꼼수를 쓰다가 그게 위스퍼러로 진화하는 이야기를 상상했었습니다. 아무튼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 한때는나도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0.07.01 14:06 댓글

    앗 그럴 듯한데요... 세계관을 통합하려다 망한 선례들이 너무 많아 저는 엄두를 안 내고 있었는데 이 스토리는 좀 탐나네요.^^

  • 노말시티님께
    No Profile
    한때는나도 20.07.01 19:49 댓글

    언젠가 작가님의 대하 장편sf를 볼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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