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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엔 햇빛이 쏟아지네…….
―――김국환 노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 주제가 中

[은하철도999](마츠모토 레이지 원작, 후지TV, 1978)는 국내 방영(MBC, 1980) 당시 김국환이 부른 주제가만큼이나, 그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딘가 쓸쓸하고 황량하고 어둡다. 기계로 된 몸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이들은 그런 기계를 가질 수 없기에 본래의 약한 살덩어리에 의지한 채, 그저 메갈로폴리스 주변에서 계속 ‘가난하게’ 살아갈 뿐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삶은 편리해졌다.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며,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는 더 이상 수많은 선원의 노동력이나 바람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어쩌면 앞으로는 사람이 기계를 이용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한 몸을 만들어 이끌고 다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신과 기억마저도 자유롭게 복사해서는 직접 네트워크에 접속하면서 사는 미래가 도래할 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4월이면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려왔던 그림 속 세상이 그대로 인류의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과학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도 윤택하게 해준다. 동시에, 과학은 인간의 삶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SF 작품에서는 대체로 과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지식이고, 지식은 앎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아는 것은 곧 힘이다. 굳이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돼지고기 아저씨’ 라고 따로 별명까지 지어가며 공부했던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힘이 된다. 권력이 된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 어느 마을의 성당에 한 청년이 찾아와 신부에게 말한다.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았습니다.” 어떤 소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남의 집에 숨어 들어가서 먹을 것을 훔쳤습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팠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차마 누군가에게 이야기도 꺼내지 못한 채 홀로 죄책감에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고는 했을 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비로소 혼자만의 짐을 덜어낸다. 아니, 덜어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연을 입 밖으로 내뱉어 풀어내는 과정에서 최소한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을 수는 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하나쯤 지니게 될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그 마을 성당의 신부에게 힘을 실어 준다. 고해성사는 그렇게 그의 권력에 살을 붙인다. 그 누구든, 자신의 양심을 가장 아프게 찌르는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이청준, 문학과지성, 1971)]에는 지독한 폭력이 스며들어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 가을 무렵, 남쪽의 경찰대와 북쪽의 공비들이 번갈아 들어와 주인공이 사는 마을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심문한다. 어느 날 밤, 주인공의 집에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집 안에는 주인공과 어머니 단둘뿐. 시야 가득 쏟아지는 눈부신 불빛 때문에, 불빛 저편에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들은 다 어딜 갔느냐. 누굴 따라갔느냐.’ 하는 추궁. 상대편과 같은 ‘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잔인한 상황 앞에서, 주인공과 어머니는 겁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전등을 비추는 상대방의 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면 살아남을 방도를 궁리해보기라도 할 텐데, 도무지 불빛 뒤에 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불빛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고급 수준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정보의 분배는 더욱 불공평해졌다. 이제 정보는 그 정보가 담고 있는 수준 자체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접해도 무방한 정보’와 ‘몇몇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제한적으로 열람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정보’로 나누어진다. 특정 정보를 제한 없이 가까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은, 자신에 관한 정보는 철저히 은폐하면서도 얼마든지 타인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굳이 고해성사와 같은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과학이, 그리고 기술이 진보하는 한, 그 과학기술을 이용하거나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이들은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아는 것이 곧 힘이기에, 그들은 훨씬 더 강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제한적 접근만을 허용하는 ‘특별한 정보’에 대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하여, 기존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한다. SF 속 ‘과학이 발달한 세상’이 대체로 디스토피아로 흘러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이 영위하는 일상생활에 대해 잘 모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지급해야 하는 교통비가 얼마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교과서에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를 집어넣어 놓고는 말한다. “네가 최소한 인간이라면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지만 피아노학원 문턱 한 번 못 밟아본 채 성장하고, 성장 과정에서 들어온 음악이란 오로지 대중가요뿐인 아이들은 ‘살아가는 데 별 도움도 안 될 모차르트’ 때문에 누구나 공평하게 갛는 권리가 있는 교육의 영역에서부터 좌절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생활과 그 일상을 깨뜨리기도 하는 비(非)일상의 순간이, 사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누군가의 손에서 철저하게 재단되어 나온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과학의 최고봉은 생물과 관련된 분야라고들 한다. 이것은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에 응용되기도 하고, 질병을 만들거나 치료하는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누군가는 바로 이러한 지식을 이용해서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도 한다.
1936년부터 1973년까지 정기적으로 의학저널에 보고된 미국의 의학 관련 비치료실험이 있다. 40여 년간 미국 정부가 매독으로 고생하는 가난한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그들의 몸 상태를 관찰하기만 했는데, 실험이 있었던 앨라배마의 지명을 따서 ‘터스키기(Tuskegee)매독연구’라고도 한다. 이러한 터스키기 연구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존재하던 질병에 대한 치료방법을 찾아내어 더욱 많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하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러한 실험이 자행될 수 있다. 그리고 생화학 무기를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힘없는 소시민들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이 시행될 수도 있다. 또 그 무기에 맞설 치료법이나 새로운 생화학 무기를 개발한다는 대의(?) 아래 무고한 시민이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소시민들의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2003년 SARS나 최근의 신종플루와 같은 질병에 대해서도, 이것이 생화학무기네, 인체실험 과정이네 하는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그 추측이 사실에 근접했는지, 혹은 사실과 전혀 관계없는 괴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실제로 미국에서 터스키기 연구와 같은 비치료관찰실험이 시행되었던 적이 있고, 또 과거 일본 측에서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을 자행했던 만큼, 사람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람들 대개가 {처음이 아니기를(정소연)}에서 죽어갔던 남희나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하고 힘 있는 사회구조는 인간의 몸을 변형시키고자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신체는 약하다. 인간이 생각 없이 밟아 죽이는 개미조차 ‘인간과 유사한 몸 크기’를 지녔다고 가정한다면, 인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빠르고 강하다지 않던가. 확실히 인간은 자연 속에서,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다른 생물과 더불어 살기에는 약하다. 그 약은 두뇌로 도구를 만들고 함정을 파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라앉아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런 두뇌가 없었다면 과연 인간은 먹이사슬 피라미드 내에서 어디쯤을 차지했을까. 그 약한 육체에 각 생물의 뛰어난 장점만을 모아 붙일 수 있다면, 인간은 한층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목 정도는 가볍게 잘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날렵한 몸으로 어디든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물의 엽록체와 같은 시스템이 있어서 먹지 않아도 햇빛과 물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인간 병기를 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애니멀 201(김두흠)}의 애니멀201과 같은 인간병기를 보유한 국가가 나타나고, 그런 국가의 수가 늘어난다면,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각 국가는 어떻게든 그러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다는 대의명분 아래서, ‘앎’이라는 힘을 지니지 못한 이들의 생명과 삶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 되어, ‘인간으로 무기를 만들어 활용하는’ 대서사의 흐름 속에서 무기의 재료로 사용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정말 그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돈과 권력을 모두 지닌 ‘소수의 무리’란,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을 보호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이나 인체개조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은 교육과 선발이라는 거름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불사조 : 그럼 우리 앞으로도 졸업해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
영수 : 하하……. 물론 졸업하면 노동자지, 너희는.
- 김규삼, 만화[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 398화 ‘그들의 감정은’(네이버, 2010. 7. 1)]中


강중 :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자마자 학비를 벌기 위해
      부유한 가정집의 자식들의 과외를 맡았는데,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그들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갔다.
- 미티, 만화[남기한 엘리트 만들기 142화 ‘신뢰의 문제’(네이버, 2010. 7. 15)] 中


물론 [입시명문사립정글고등학교]에 등장하는 영수의 경우, 대단히 독특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영수와는 다른 계층에서 출생하는 학생들 또한, 어떤 식으로든 기존 부모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교육 및 선발의 구조 속에서라면 말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방안이 추진될수록,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우수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통신교육시스템이 활성화될수록, 대학 입시에서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특성과 재능을 중시하는 전형이 확대될수록,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하고자 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진다. 만기선발체제 아래에서 상대적 경쟁을 하는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수준으로 제공되는 공교육은 아무리 그 질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인다고 해도 수요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남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남들도 다 받는 교육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든지 접할 수 있는 교육방송 강의 내용에서 수능문제가 출제된다면 어떠할까. 아무리 해당 방송과 교재를 학교나 학원에서 쓸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사교육 현장에서는 그 내용을 분석하는 수업이 진행된다. 법을 피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김현중)}의 ‘아인시술’이라는 것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수술의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술을 받은 흉터가 있느냐, 즉 그 수술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있느냐이다. 이 흉터는 그 자체로 특권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시술받은 이의 실제 지능이 어떠하든, 그들의 실제 삶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말이다. 어쩌면, 그런 특권의 상징이 언뜻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면을 쓴 채, 사회․경제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데에 한몫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과학기술이 이렇게 ‘그 당시’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활용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사회에 소속된 개인이 그 사회에 저항하거나 그 사회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수단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할 수도 있다. {스위치, 오프(정보라)} 속 서술자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존의 사회체제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지식’을 가진 존재였다는 데에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힘으로 새로운 사회를 찾아 탈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모두 본래의 성별로 살던 그 사회에서 ‘그들과 같은 지식을 지니지 못한’ 다른 이들은 해당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고, 문제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탈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그에 저항하는 것도 어느 정도 ‘앎’이 있는 사람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신체에 조작을 가해서 더욱 뛰어난 물리적 능력을 지니게 한다거나, 그동안 생득적이라고 여겨왔던 특성 또한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다. 만약 그러한 과학기술이 더욱 발달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정신적인 측면에도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머리 사냥꾼(류형석)}에서 제시된 기억의 보존과 복제에 관한 기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이성이나 감정이란 또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풀어놓은 설명은 많지만, 그러한 설명이 차라리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의 정신과 관계된 부분은, 여전히 그 실체가 모호하고 신비로울 것만 같은 대상이다. 기억을 어떤 ‘장치’에 옮겨 보존하고, 몸이 사망했을 때에는 다른 ‘몸’에 그 기억 장치를 옮겨 심은 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지, 그 리셋 지점을 ‘설정’할 수 있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전부터 이런 운명이 당신에게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네. 벌써 이와 같은 일을 나는 셀 수 없이 겪었다네. 자네는 이해하겠나? 자네가 자네의 차원에서 나를 이기기 전에, 내가 쫓겨난 그 전의 차원에서의 자네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다시 와서 나의 손에 죽었다네. 내가 자네의 차원에서 패해서 블랙홀을 통해서 여기의 차원으로 오면서도 패배감은 전혀 없었다네. 그건 자네가 다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자네는 결국 알게 될 걸세. 나는 이 모든 차원을 통하여 단 1명이지만, 자네는 자네와 같은 운명을 지니고 그 차원을 살아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네들 중에 한명이라네. 내가 지금 여기서 당신을 죽이더라도 이 차원에 살고 있는 자네에 의해 다시 다른 차원으로 쫓겨날 것이네. 하지만 그도 곧 나에게 죽으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
- 안영기, 게임 [다크 메이지 실리안 카미너스(1994)]中 네크로만서


전작에서 플레이어의 손에 패배해 차원의 틈을 따라 밀려난 네크로만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처럼 모든 기억을 지닌 채, 끊임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삶은 악몽이다. 그 무한 반복해야 할 같은 일이 ‘죽음’이라면, 그 개체의 정신은 과연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물론, 사람의 정신을 어떻게든 보존할 수 있다면, 사람은 육체라는 껍데기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제약을 벗어던질 수 있다. 쓰던 육체가 붕괴하거나 고장 나면 더 나은 ‘몸’으로 환승(?)할 수 있고, ‘죽기 전에’ 지식이나 기술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수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관계나 이기심, 극단적인 성격장애와 얽히기 시작하면 어떤 방식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 반사회적인 성격장애를 지닌 사람이나 극도로 이기적인 누군가의 그릇된 상념이 무수히 복제된다면? 혹은 복제된 ‘나’의 의식이 더는 ‘나’가 아닌 상태가 되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의학이 과학의 힘을 빌려 지금보다 더욱 발달하게 된다면, 뇌수술을 통해 기억을 삭제하는 형태로 인간의 정신적 측면에 변화를 가할 수도 있다. 기억을 일종의 프로그램처럼 특수 장치에 저장한 다음에 기억을 편집하는 것과 직접 뇌에 편집 작업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편리하고 쓸모 있는 기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다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고 재단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정해복)}에서처럼 뇌에 수술을 가하는 방식으로 특정 인물의 행동과 기억을 통제할 수 있다. 그대로 두어서는 타인이나 사회에 해악을 미칠 만큼 반사회적이거나 반인륜적인 특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안전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뇌 편집 작업을 마친 뒤에는 실험을 한다. 과연 수술이 잘 되었는지. 당사자는 평범한 일상이라 여길 만한, 실상은 철저하게 계산된 환경을 꾸며놓고 말이다.
색종이로 집을 만들고 물감으로 들판을 그려 채색하는 과정을 노래한 어느 동시에서는 독자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어느 커다란 손이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과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어떤 곳인가. 그것이 조작된 환경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기억을, 그리고 경험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떤 개인의 삶에, ‘특정 쓰임에 맞는 인간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누군가의 목적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어느 커다란 손’이 사실은 같은 인간의 손이라면 어떠할까.
1990년대 후반, 각급 학교 선생님들께서 소지품 검사를 단행하게 했던 애완동물이 있었다. 현재의 휴대용 게임기에 비하면 상당히 조잡해 보이는 이 달걀 모양의 게임기는, 일종의 ‘사회문제’처럼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다마고치류’의 게임기가 아니더라도, 1990년대에는 [프린세스메이커], [졸업] 등 각종 PC용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쏟아져 나왔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다양한 육성 게임이 출시되고 있으며, 전자 애완동물을 기르는 게임기 역시 흑백 액정화면을 버리고 다채로운 색상과 기능을 탑재하는 방식으로 진화되었다. 현실 속에서 어떤 생명을 기른다는 것과 게임 속에서 어떤 무언가를 기른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아름다운 감금(임태운)}은 ‘육성 게임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식으플레이를 돌아보게 한다. 밥 달라고 울어대는 애완동물이 귀찮다며 처박아 두지는 않았는지다며유미삼필여금린  식을 유흥업Œ액정보내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살아 있는 애완동물을 단지 지겨워졌다는 이유로 아무 곳에나 내다버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식이든 부모든 제자든 선생이든 친구든 동료든 다른 그 누군가를 대할 때 무책임하고 무신경하게 대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정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대가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든 고통을 받든 상관없이 말이다. 쓴웃음을 짓게 하는 작품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게임 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다른 무언가’를 대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말한 ‘나와 너(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t)’의 관계 중, 우리 자신은 어떤 관계를 주로 맺고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통이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통은 단지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어도, 말이 통한다고만은 할 수 없죠.”
“말이 통하더라도 서로 이해할 수 없을 때, 한층 덧없게 느껴지는 겁니다.”
- 오노 후유미, 소설 [십이국기(조은세상, 2002)] 中 코우코와 리요우의 대화


서로 같은 언어권에 속한 두 사람이 말소리를 서로 식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늘 대면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들 사이에서 대화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특별한 대화가 없어 왔던 사이에서, 혹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생물학적 종(種)이 다른 존재 사이에서 더욱 깊이 있고 진실한 소통이 일어나기도 한다. {해바라기(정희자)}의 서술자와 뭉글이의 관계처럼 말이다.
대개는 ‘입’이 있다. 하지만, 입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귀’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란 보통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지 않다. 의견 차이를 대화로 조율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만을 무한 반복한다. 이들의 머리에는 분명히 귀가 달려 있지만, 그 귀는 귀가 아니다. 상대가 아무리 뭔가를 말하려 해도 듣지 않는 귀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하기는 쉽지만 듣기는 어렵다. 거미줄처럼 얽힌 인적 네트워크를 떠올려보자. 수많은 지인 중, 정말 자신이 상대를 이해하고자 공감하고자 애쓰며,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그런 사람은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자. 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만큼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자 노력한 적은 과연 얼마나 있는지.
입으로 뱉기는 쉽지만, 귀로 담는 것은 어렵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 타인이란, 모두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그것’일 뿐이다. 자신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잔인할 정도로 강요한다.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배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기에, 자신이 싫은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 그중에는 눈앞의 모두에게 예외 없이 귀를 여는 사람도 있고, 특별한 몇몇에게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를 만나다(곽재식)}의 서술자는, ‘어떤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존재이다. 본래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 속에 제시된 시점에서의 그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본래 하나였던 ‘나’는 둘로 나누어진다. 그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이 둘은 어느 쪽이 원래의 뇌를 더 많이 계승했는지, 검사를 통해 측정한 수치를 상대적으로 비교한다. 뇌의 하층부에서 깨어난 ‘그’는 오로지 ‘그녀’를 인식하는 부분에 있어서만 근소한 차이로 상층부의 자아에 앞설 뿐, 다른 측면은 모두 지극히 열세한 측정 결과를 보인다. 그렇기에 하층부의 ‘그’에게 ‘그녀’라는 존재는 더욱 절대적이다. 상층부의 ‘그’에 비해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심장 한 개와 뇌 한 개, 그리고 전화기 한 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달랑 심장 한 개만 가진 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전화기가 없으면 엄청 불행하겠구나.”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얘는 뇌가 없기 때문에 별걱정 모르고 살았어요. 그럭저럭 어느 날, 드디어 일어 터졌어요. 얘는 달랑 심장만 있기 땜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한심한 일이죠. 남들이 뭐라 하든, 얘는 걔를 사랑했어요. 언젠가 얘가 걔랑 헤어져야 했을 때, 얘는 전화기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뇌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암튼 그 후 그 애의 머리 위에는 괴상한 것이 솟아났어요. 비록 가진 건 달랑 안테나 한 개였지만, 그 애는 걔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이우일, 만화 [리우일뎐 ‘안테나 소년’(TTL 제19호, 2001. 2)]


그렇지만 그는, 오로지 측정된 결과를 수치화하여 상대적 우위만을 비교하는 이 검사에서 밀려나게 되어, 그 사랑하는 사람과도 멀어지게 된다. 새로운 이름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서 말이다. 스쳐 가듯 만났다가 헤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슴아슴 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은, 수술 성공 확률이라는 것을 높이고자 한 사람을 조각내고, 그 조각쉘쳐 Ü다른검사하고 그 결과를 수치화하여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만을 통해 우위를 차지한 어느 한쪽에만 모든 법적 권리와 인간관계를 계승하게 하는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어쩌면 ‘그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층부에서 깨어난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작아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가듯 인지하는 것과 사랑하는 감정에는 차이가 있기에 상층부의 자아가 ‘그녀’를 지한 어아가 ‘지는 알 수 없지만, 하층부의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하층부의 그가 기억하는 만큼을, 상층부의 그는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를 만나다}가 과학과 의학이 합리적 사고를 표방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거나 애써 보려 하지 않았던 맹점과, 그 맹점으로 말미암아 인간성이 느끼는 아픔을 다루었다면, {아빠의 우주여행(양원영)}은 그러한 과학의 맹점마저 감싸 안는 따뜻한 인간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피보호자가 성인이 되면, 그가 무사히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길러준 안드로이드를 수거해 간다고 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분명히 부모로서 존재했다. 생명이 있느냐, 감정이 있느냐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분명 함께 시간을 보낸 존재였고, 마음이 뒤숭숭할 때면 늘 옆에서 힘을 주던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런 안드로이드를 잃는다는 것은 과거를 공유하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측면은 꼭 누군가의 뇌가 조각나고 찢기는 것과도 닮았다.
심장이 없어도 그는 존재했다. 그 존재가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학과 논리는 필요한 곳에 쓰고자 하는 목적에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지만, 그러한 안드로이드에 부모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도 소통을 할 수 있는 귀가 있기에. 그런 이들로부터 안드로이드를 수거한다는 것은, 필요와 목적에 따라 제작한 ‘그것’이기에 그 목적과 필요가 사라진 시점에서 버린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인간적인 정이나 애착, 추억과 같은 정서적 측면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맹점이 있다. 세영은 그런 합리적 사고방식과 안드로이드에 대한 애착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마침내 합리적 사고방식이라는 비인간적이고 딱딱한 녀석을 인간적인 정으로 감싸 안는다. 만화 {선우네 일기(이은혜, 밍크, 1995년)}에서 안드로이드 연우가 유오와 헤어지면서 흘린 눈물은, 어쩌면 안드로이드 아빠 호석의 눈꺼풀 안쪽에서도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직 국내에는 ‘지금 현재의, 혹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닌 ‘미래의 어느 시점이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대해 서술하는 문학 작품을 ‘통속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느 정도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작품이 지니고 있는 작가의 사유가 어떠하든 간에, 무엇을 소재로 하고 언제 어디를 배경으로 하였는지에 따라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결정된다는 점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작품이 무엇을 소재로 삼고 있든, 언제 어디를 배경으로 했든 간에,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사유를 뽑아낼 수 있게 한 것은 창작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배경 위에서 ‘지금 여기’의 불합리한 문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작품이든, 평범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로 날아가서는 도착 즉시 천하무적 먼치킨이 되어 해당 세계를 자신의 발바닥 아래에 두는 작품이든 말이다. 그렇기에 소재와 배경을 문제 삼아 해당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유를 무조건 깎아내리기보다는, 그러한 사유가 발생한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해 짐작해보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빠의 우주여행]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은 혼란이나, 과학기술과 기술문명의 비인간적인 발달 행로와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든, 환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든, 문학작품은 기본적으로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어느 정도의 관련을 맺기 마련이다. 의식적으로 시대상황이나 작가 자신 고유의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고 해도, 한 개인의 가치관이 형성되기까지 그 사람에게 미친 사회적 배경이나 문화적 맥락의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작품의 씨앗과도 같은 사유 역시 그러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다. 읽는 사람 또한 맥락 속의 인간이다. 독자는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상황, 문화적 현상 등에 비추어 작품을 읽게 된다. 그렇기에 작품의 배경이 무엇이든, 소재가 무엇이든 간에 문학은 해당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빠의 우주여행]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이 고민하는 문제는 SF를 창작하는 다른 수많은 작가가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SF 작품이, 과학기술과 기술문명이 인간에게 어떤 혼란을 줄 것인지에 대해 탐구하고 있으며, 과학기술과 기술문명이 지닌 비인간적인 합리성과 논리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여러 작가에게서 이러한 공통적인 사유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마도 현재 과학기술과 기술문명에서 비롯된 문제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 대단히 어둡고 부조리하기에, 작가들이 상상하는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는 대체로 디스토피아로 흘러간다. 그런데 그러한 작품 중에도, 개개인이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작은 행복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는 관점을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시대‧사회적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 그런데 그들은 과연 그렇게 탁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저마다의 행복을 품에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 반, 슬픔이 반인 것입니다.”
“네?”
“누군가가 행복한 것은 그 사람이 축복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 오노 후유미, 소설[십이국기] 中 코우코와 스즈의 대화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 반, 슬픔이 반이다. 과학기술이 빚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유토피아가 될 것이냐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냐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그다지 의미 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를 선물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를 얹어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순간에는 과학기술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순간에는 절망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서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소서사를 지니고 있고, 그 소서사 안에는 여러 일상이 있다.
과학기술은 힘이다. 아는 것이 힘이듯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꼭 긍정, 혹은 부정의 한쪽 측면에 치우친 미래를 선물하지는 않는다. 소서사는 대서사에 종종 휩쓸리지만, 동시에 그러한 대서사와는 별개로 움직이기도 하기에.

여럿의 말씀은 무쇠도 녹인다고
물 속 천리를 뚫고
바다 밑바닥까지 닿아 가게 할 만큼…….
- 서정주, 시 {수로 부인의 얼굴([신라초], 1961)}


기계화된 인간세상이라는 차가운 미래가 도래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감정을 잃지 않는다면, 어쩌면 [은하철도999]와 같이 ‘메마르고 차가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만 같은 ‘미래’에도, 그렇게까지 차갑고 황폐하지만은 않은 구석이 조금은 생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것이야말로 기술문명으로 어둡고 혼란해질 미래의 시대․사회적 흐름을 부분적으로나마 씻어내는 청류가 아닐까. 비록 하나하나의 흐름은 작다고 하더라도, 무쇠를 녹이거나 물 속 천리를 뚫고 바다 밑바닥까지 닿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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