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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존재론적 SF의 탄생

 존재론, 혹은 실존주의라고도 하는 서양 사상의 기본 명제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존재는 닥치고 일단 태어나고 본다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만물에 다 자기 자리를 예비해 두시는 하늘의 뜻 이런 거 없다는 게 존재론의 기초가 되는 주장이다. (기독교적 실존주의도 있긴 있는데 지금은 잠깐 넘어가자.)

 그러므로 일단 닥치고 태어나고 봤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모른다. 모르니까 찾아 헤맨다. 존재의 의미를 신과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들면 그게 기독교적 실존주의인데 약 19세기 쯤부터 시작되었고 이쪽 방면의 대표주자로 키에르케고르가 있다. 존재의 의미를 존재 자체에서 찾으려 들면 20세기 초중반에 대유행한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되는데 그 쪽의 대표주자로는 사르트르가 있다. (하이데거도 있고 까뮈도 있고 그 외 무척 많다.)

 어쨌든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우리는 닥치고 일단 태어난다. 태어난 존재는 몸을 가진다. 이 ‘가진다’는 동사는 한국어에서 상당히 구체적이며 제한적인 의미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사실 ‘몸을 가진다’는 문장은 좀 이상하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몸은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중심이며 본체이다.

 존재론에서는 몸과 정신이나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의식도 감각도 모두 몸이 있기에, 두뇌가 있고 신경이 있고 혈관이 있고 기타등등 몸 안에 살아 움직이는 기관이 있기에 가능한 몸의 작용이다. 몸을 통해서 존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맺고, 간단히 말하자면, 살아간다.

 이런 알 듯 모를 듯한 뻘소리를 왜 늘어놓냐 하면 김보영(이다)의 ‘멀리 가는 이야기’에 소개된 중단편 작품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에 존재론이 가장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짜루? 진짜다. 의심나면 읽어보시기 바란다. 존재론 말고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멀리 가는 이야기’를.

 1. 몸의 체험

 ‘멀리 가는 이야기’의 목차 순서대로 얘기해보자. ‘촉각의 경험’과 ‘다섯 번째 감각’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몸에 관한 이야기이다. ‘촉각의 경험’에 등장하는 클론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 모두 차단당한 상태에서 오로지 촉각에만 의지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클론의 세상 전부였어요. 손가락 사이에서 움직이는 배양액의 움직임, 손가락을 부드럽게 비빌 때, 강하게 쥘 때, 손톱으로 긁을 때, 그 감각의 작고 미세한 차이, 그것이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겁니다.” (“촉각의 경험”, 멀리 가는 이야기 59쪽)


 사실 생각해보면 촉각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범위가 넓은 감각이다. 말 그대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덮인 곳 어디에나 촉각이 있으니까. 단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감각에 더 많이 의존하고, 또 옷 등으로 피부를 덮어 촉각을 무디게 하거나 차단하는 데 익숙해 있을 뿐이다. 그런 촉각만으로, 그러니까 몸의 바깥쪽을 덮은 피부의 감각만으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온몸으로’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의미이다.

 작가는 몸의 모든 감각을 촉각 하나로 축소시킴으로써 역으로 이 ‘온몸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경험을 극대화한다. 감각의 경험이란, 어느 감각이 됐든 간에, 작품 속에서 더없이 찬란하고 황홀하게 묘사된다. 작품의 줄거리 자체는 비극적일지언정, 이러한 감각의 찬미는 곧 몸의 찬미, 존재의 찬미, 생의 긍정으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감각’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주인공 채연주가 살아가는 세계는 일종의 디스토피아이다. 이곳의 억압 기제는 “1984년” 등의 디스토피아물에서 흔히 보는 사고방식의 통제나 기억의 박탈이 아닌 감각의 통제,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 번째 감각’인 청각의 박탈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감각의 박탈은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은 물론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심장을 졸이며 그의 주위에 흐르고 있는 이(異)세계의 공기,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을 단절시켜 놓은 듯한 경계선, 그리고 그가 앞에 앉아 있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느낌에 대해 말할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다섯 번째 감각”, 멀리 가는 이야기 102쪽)


 이 ‘공기’나 ‘느낌’ 혹은 ‘경계선’은 물론 소리를 가리킨다. 청각을 하나의 독립된 감각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 간단히 한 마디로 설명되는 개념이 주인공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이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 종교 혹은 마약 같은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즉 청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소리는 미지의 영역이 되어버렸고, 자기 몸의 감각인데도 단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약간의 정부 선동이 곁들여지자 그 즉시 청각에 관련된 모든 것은 두렵고 나쁘다고 결론지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주인공에게 자유와 새로운 희망의 발견이 ‘다섯 번째 감각’의 재발견, 즉 몸의 재발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실존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김보영 작가는 이처럼 부분적으로 박탈되거나 축소된, 그러니까 변형된 감각의 세계를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촉각에만 의지했다거나 제대로 기능하는 청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이러한 감각의 세계를, 글쎄, 말하자면 ‘생생(生生)하게’ 묘사하며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데서 작가의 상상력의 깊이뿐만 아니라 필력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2. 존재의 방식

 신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는 자기 몸을 자각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의식을 바깥으로 뻗어나가 자신과 동등한 다른 존재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한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활동이 돼 버린다.

 다른 존재들도 분명히 나처럼 신체와 정신이 있고, 세상을 의식하고 지각하고 해석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존재의 몸을 뚫고 들어가서 다른 의식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내 몸과 내 존재 안에 갇힌 나에게 다른 몸 안에 있는 다른 존재의 경험이란 영원히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종의 기원’은 바로 이 다른 종류의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존재의 경험을 다룬다. 주요 등장인물인 로봇은 모두 신체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의미를 탐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등장하는 로봇들도 작품을 읽는 독자 혹은 현재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유기생물’인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인용한 존재Dasein의 정의에 관심 있는 분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뒷일은 책임 못 진다.)

 무기생물인 로봇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주인공 케이는 유기생물학이라는 것에 눈을 뜨면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존재 형태,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일종의 신화 혹은 전설 속에서만 전해 내려오던 존재의 형태가 실제로 가능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의 기원;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에서 케이가 모르는 사이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진화한 이 유기생물체들은 무기생물의 존재 의미를 위협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완전하고 더 아름답고 한없이 신성하고 매혹적인 존재 앞에 섰을 때, 자신을 모두 바쳐 그 존재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무의미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자유 의지를 가진 독립된 개체로서 남을 것인가? 케이는 여기서 후자를 택한다.

 인간을 모르는 모든 로봇들은 케이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했고, 인간을 만난 적이 있던 모든 로봇은 케이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랬느냐고.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멀리 가는 이야기 357쪽)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케이가 정확히 무슨 ‘영웅적인 행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지만 저 ‘왜 그랬느냐’는 질문이야말로 실존의 문제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다른 존재를 통해 부여받기를 거부한 케이는, 그러니까, 으음, 실존적인 로봇이라 하겠다.

 이럴 때 보면 SF라는 장르는 철학적인 문제를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기에 편리한 장르인 것도 같다. ‘소설이니까 모두 허구’라는 일종의 안전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다른 존재의 관점과 다른 신체의 경험이라는 다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거꾸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김보영 작가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말 못 믿겠으면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주 그냥 돌아버린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룰 작품은 ‘우수한 유전자’이다. 이 작품은 같은 인간들 사이의 서로 다른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수한 유전자’는 물질 문명에만 치중했을 때 인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지 경고하는 작품이다. 물론 SF 소설 중에 이런 ‘물질문명 경고 스토리’는 흔해빠졌다. ‘우수한 유전자’가 돋보이는 것은 일단 형식에 있어서 결말의 반전(!)이 독자의 허를 찌른다는 점과, 내용상으로 그 물질 문명이 결국 사람의 몸으로 귀결된다는 점 때문이다.

 자세하게 인용해 버리면 반전을 다 까발리게 되기 때문에 무척 인용하고 싶지만 생략하겠다. 어쨌든 물질 문명 혹은 과학의 발달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우선 기계의 발달이나 생활의 편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기계가 발달해서 생활이 편리해진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몸이 편해진다는 의미다. 작가는 이렇게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지적한다.

 몸과 정신은 사실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합일되지 못하고 모든 정신작용이 몸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데 활용되거나, 반대로 신체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만을 위해 존재하고 정신만을 극도로 발달시켰을 때, 이 두 가지 존재의 방식이 어떤 형태로 대립하게 되는가의 문제가 ‘우수한 유전자’에서는 상당히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우수한 유전자’는 몸의 이야기를 다루기는 하지만 ‘촉각의 경험’이나 ‘다섯 번째 감각’과는 반대쪽 극점에 서 있는 이야기다.

 3. 돌아오는 이야기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과 동등한 다른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나면 자신과 다른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탐구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내 존재와 다른 존재를 얼렁뚱땅 묶어서 다루고 사르트르는 나 타인  세계 (존재들 사이의 관계) 순으로 차근차근 설명하고 철학자마다 방식이 약간씩 다르지만 큰 차이는 없다.

 어쨌든 ‘멀리 가는 이야기’로 돌아오면, 몸의 체험에서 존재의 방식을 지나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에서 주인공은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로 나아가서 우주의 끝을 탐험한다. 가만 보면 목차부터 상당히 실존적으로 의미 있게 짜여 있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내 몸이 인식하는 세계, 즉 나와 우주의 관계를 탐험하는 이야기이다. 첫 작품인 ‘起’에서 항법사 셀레네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파리는 세상을 육각형의 조합으로 알고 있고, 소는 세상을 흑백으로 생각하지. […]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돼.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영상보다는 인간의 신경계와 빛의 성질을 연구해야 해. 중요한 건 ‘왜 그렇게 보이는가’ 하는 거지, ‘어떻게 보이는가’ 가 아니야.” (“미래로 가는 사람들: 起, 멀리 가는 이야기 387쪽)


 이것은 상당히 역동적인 세계 인식이다. 세계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불변의 객체가 아니라 나의 인식에 따라 바뀌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지 이해해야만 나를 둘러싼 세상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눈과 신경계’, 그러니까 또다시 나의 몸으로 되돌아온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의 주인공 성하(星河)는 첫 이야기인 起에서 자신의 몸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여기서는 우주)의 상관관계를 배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지구로 돌아왔다가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다시 우주로 나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과 동등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인데, 그 한쪽 끝에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미개인’들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우주에 묶인’ 우주 비행사들이 있다.

 ‘미개인’들은 지구를 떠나본 적도 없고 지구 밖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꿈도 꾸어본 적이 없다. 우주 비행사들은 반대로 새롭게 정착할 만한 행성을 찾아나섰다가 시공간이 너무나 많이 지나버려서 이제 다시는 고향 별에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정반대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지만 양쪽 부류에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 당면한,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개인’들은 성하의 행동과 흔적에 신성성을 부여하고, 우주 비행사들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광속을 추구한다.

 이런 양극단의 인물 군상 사이에서 주인공 성하는 자기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쓴다. 그러면서 그도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자기 존재의 증명을 남기게 된다.

 성하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있었다. 성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앞에, 여덟 개의 괘를 ‘올바른’ 순서대로 그렸다. 5백년 전, 그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문자가 없던 이들에게 알려준 자신이라는 증명.
 그것이 신이 표식을 남기는 이유인 것이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承, 멀리 가는 이야기 413쪽)


 성하가 ‘표식’을 남기는 이유를 실용적인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나중에라도 혹시 지구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그저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증명을 남긴다는 행위가 인상적이다.

 지구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고, 문명은 생겨나서 꽃피었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성하는 몇 백 년에 한 번, 혹은 몇 천 년에 한 번씩 되풀이해서 지구로 돌아온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은 죽고 그를 둘러싼 세계는 영속할 것이다. 그러나 성하의 경우에는 반대로 지구는 멸망했다 다시 살아나지만 그는 변함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지난 번에 찾아왔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죽은 후에 성하 자신이 남긴 존재의 증명만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의 그림자만이 집에 돌아온 성하를 맞이해주는 느낌일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쓸쓸해서 마음에 남는다.

 주인공 성하는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지구로 계속 돌아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지구와 우주의 끝과 시간의 시작 사이에 하나의 궤적을 남긴다. 그래서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을 읽으면서 이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주의 윤곽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좌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4. 결론

 여기까지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까 ‘멀리 가는 이야기’가 무슨 굉장히 심각하고 어렵고 철학적인 작품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철학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로 심각하거나 어렵지 않다. 반대로 무척 재미있다. 나는 SF에 전혀 취미가 없는 사람인데 얼떨결에 읽어보고 재미있다고 추천하는 거니까 믿어도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다른 세계의 체험, 다른 몸과 다른 존재의 체험을 이토록 실감나고 흡인력 있게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반전도 있고 액션도 있고 카타르시스도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

 이렇게 골고루 다 갖춘 작품에 비해서 리뷰만 지나치게 각 잡고 무거워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라는 게 원래 각 잡고 심각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뷰가 무거워진 것은 실존주의 탓이지 리뷰어 잘못이 아니다. (이봐) 그러나 확실한 것은, ‘멀리 가는 이야기’는 실존주의 정도 언급해줄 만한 깊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시간의 시작과, 우주의 끝과, 존재의 근원을 모두 아우르는 깊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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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10.06.30 01:49 댓글 수정 삭제
    국내최초 존재론적 SF.... ^^a 아 어쩜 좋아. 이번 특집에는 제목부터 국내최초에 대한 농담이 많네요. 읽으시는 분들 부디 SF대담 참고하시고 오해 없으시길... 국내최초 자연의 딸 피망 키우는 SF 사골작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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