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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프리트 프라이슬러는 미카엘 엔데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독일 동화 작가일 것이다. 미카엘 엔데가 범세계적인 상징과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현실과 약간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낸다면, 프라이슬러는 철저히 독일의 전설과 역사에 기반하여, 익숙하면서도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빚어낸다. [작은 물요정](1956), [작은 마녀](1957), [대도둑 흐첸프로츠](1962), [꼬마 유령](1966), [대도둑 흐첸프로츠 두 번째 나타나다](1969), [대도둑 흐첸프로츠 세 번째 나타나다](1973) 등의 작품에서 프라이슬러는 요정, 마녀, 유령, 마법사, 천리안(통신이 아닌 수정구슬로 먼 곳을 보는 사람) 등을 주 인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아동문학이므로 교훈적인 결말을 맺고 있긴 하지만, 교훈성의 여부를 떠나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따스하고 유쾌하다. 약간의 예외라면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크라바트](1971)일 것이다.
[크라바트]는 프라이슬러가 1959년 작업에 착수하여 1970년에야 완성한 작품이다. 그 12년 동안 프라이슬러는 크라바트가 살던 시대인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역사적 배경, 그 당시 물레방앗간의 구조, 직원의 생활, 그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전설과 신앙 등을 조사하여 좀 더 완벽한 [크라바트]를 만들려고 하였다. 원래 [크라바트]는 독일 동남부의 라우지츠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이지만, 이러한 12년간의 노력을 통하여 프라이슬러는 [크라바트]를 문학적으로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신비로운 물방앗간 이야기

그렇다면 이제 [크라바트]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크라바트]라는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을 뜻한다. 크라바트는 본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친척집에 맡겨져 있다가, 그 집의 독일식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뛰쳐나왔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지방은 독일 안에 있기는 하지만 붼드 인을 비롯한 서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 사이에 소수민족으로서 살면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라바트는 저 붼드인이었던 것이다. 집을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데, 어쨌든 크라바트는 집을 나와서는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구걸하고 돌아다니는 생활을 한다. 때는 마침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므로 그들은 동방박사 세 사람(마침 일행은 셋이었다)의 역할을 하면서 동네를 전전한다. 그러던 중 크라바트는 소명을 받는다.
사실 소명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저 부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로 부제에 붙어있는 물방앗간에서 크라바트를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꿈으로.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행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크라바트]라는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하나가 결정된다. 크라바트는 물방앗간으로 부름을 받는데 그것은 사실상 고대에서부터 계속 있었던 비밀결사체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그 물방앗간에는 직공이 11명, 두목이 1명 있다. 크라바트가 들어감으로써 직공 12명, 두목 1명, 총 13명이 되는데, 이 인원은 언제나 유지된다. 일년 중 지극히 짧은 기간을 빼고는. 일년의 마지막에 누군가는 사라지고, 신참은 사라진 이의 옷을 물려입고 그의 자리를 메운다. 신참은 3년 동안의 견습기간을 무사히 마치면 정식 직공이 될 수 있다. 정식 직공이 될 때에는 진짜배기 한 사람 몫의 일꾼으로서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적당히 패서 견습자를 맷돌에 갈아낸다. 이러한 의례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진정으로 획득함을 뜻한다. 견습기간이 끝나면 신참은 비로소 진정한 비밀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은 인원만이 존재할 수 있는 비밀단의 일원이.
그 정도를 가지고 비밀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다. 사실 웬만한 직장이나 학교도, 그 구성원의 숫자가 엄격하게 똑같지는 않더라도 저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의미가 약화되었지만 그런 모든 진학과 진급은 통과의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크라바트에서 그 통과의례의 성격이 짙게 나타나는 것은, 물방앗간이 단순한 물방앗간만이 아니라 마법학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목은 물방앗간 두목일 뿐만 아니라 마법학교의 선생이며, 직공들은 방앗간 일을 하는 젊은이들일 뿐만 아니라 금요일 밤에 열리는 마법학교에서 마법을 배울 자격이 있는 학생이자 구성원인 것이다. 이 마법을 배우면 힘든 일도 모두 수월하게 해낼 수 있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장난을 칠 수도 있다. 그 대신 이 마법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 결사체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직공들은 물방앗간에서 일정 범위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마법적인 강제력이 도주를 막고 있다. 일년 중 마지막에 언제나 한 사람씩 사라짐으로써(정확히는 죽음으로써) 유지되는 12명이란 숫자, 강제적인 물방앗간의 구속, 마법의 공유, 일정한 의례를 거쳐야만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는 폐쇄성과 의례성. 이 모든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물방앗간이며, 그래서 그곳은 비밀결사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밀결사체와 그에 얽힌 어두운 이야기가 [크라바트]의 주요 내용이다.


민담과 전설과 역사의 유쾌한 능직

그렇다고 [크라바트]가 계속해서 암울한 이야기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어둠의 마법을 배우고, 음침한 두목이 존재하고, 일은 죽도록 힘든 물방앗간 생활이지만 일단 이것은 한창 때의 젊은이의 이야기인 것이다. 직공들 중에서 신참인 크라바트가 가장 어린 축이긴 하지만 직공들은 다들 젊고 육체적으로도 건장하고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도 사실 힘들게 하고 있지 않다. 12명의 직공은 하나하나가 다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들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도 재미있고, 그들이 마법을 써서 하는 장난이나, 휴식시간에 하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웃음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암울꿀꿀한 죽음에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 보면, 프라이슬러가 12년간이나 했던 자료조사가 단순한 조사로 끝나지 않았음에 경탄하게 된다. 우선 역사적으로 17-18세기의 독일은 왕이 있긴 하지만 선제후들이 선거를 하여 왕을 세웠었다. 자연히 왕보다는 제후들의 세력이 컸고, 독일이란 나라 자체도 통일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영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크라바트 같은 평범한 시골뜨기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프라이슬러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도 않고, 시골뜨기들을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버리지도 않는다. 단지 한 번의 밤나들이를 통해 넌지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그 일화 또한 마법을 통한 조롱과 풍자로 채색되어 있다. 휴식시간에 직공들이 하는 재미난 이야기에는 제후님이 스타일 구긴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꼭 지금 현대에서 정치인들에 얽힌 구린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떠도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프라이슬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골뜨기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적절히 소개하면서 재치 또한 잃지 않고 있다.
또한 [크라바트]에서는 민화와 전설에서 차용한 모티프가 눈에 많이 띈다. 이것 또한 겉도는 일화로서 처리하지 않고, 크라바트의 운명과 결말에 관한 상징으로서 등장한다. 중간에 나오는 ‘헐렁모자’의 전설은 실제로 그 당시에 유행하던 ‘로빈훗’ 식의 영웅이라고 하는데, [크라바트]에는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뿐만 아니라 그가 실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슬라브 민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변신대결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물고 물리는 그러한 대결은 인물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면서 중요한 요소로서 큰 몫을 한다. 어떤 요소인지는, 스토리에 너무 깊이 연관이 되어 있으므로 밝히지 않겠다.


반복되고 심화하는 패턴의 즐거움

[크라바트]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1년째, 2년째, 3년째...로 글이 단락지어지면서, 일년 중의 정기행사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크라바트가 자라고 상황이 바뀌는 만큼, 2년째의 부활절은 1년 전의 부활절과는 또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3년째에는 더욱 더 차이가 나지만 또한 첫 해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언제나 같은 행사이고 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시간의 차이 때문에, 혹은 상황의 차이 때문에 달라지는 패턴을 보는 건 즐겁다. 또한 그 패턴을 보면 1년째에 일어난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사건이 어떻게 발전되어 나가는가도 한눈에 알 수 있어 더욱 더 즐겁다. 물론 이것도 결말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지나가도록 하겠다. 다만 그러한 패턴과, 연중행사의 묘사, 계절감 등이 [크라바트]를 좀 더 일상적이고 친근한 작품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매년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것은 학원물의 패턴이기도 하다. 시커먼 어른 일꾼들이 드글드글해서 읽어나가는 동안에는 잊기 쉽지만,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앞에도 말했듯이 이곳은 마법학교, 그러므로 크라바트도 남부럽지 않은 마법학원물이란 말이다.



[크라바트]는 동화작가가 쓴 작품이라 어린이 책 출판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지나치기 쉬운데, 사실 적어도 청소년용이라고 생각하고, 어른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민담을 근간으로 하는 이야기인지라 전체 스토리는 평범하고, 패턴 또한 사랑은 모든 걸 이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구원은 의외의 곳에서 온다, 첫 머리에 등장한 이는 다시 등장한다 등 전통적인 패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생하고 해학적인 캐릭터, 그 가운데서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어둠과 공포, 마녀를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마법 이야기 등이 아주 맛깔나게 펼쳐진다. 특이한 목판화 삽화가 매력을 더해주는 이 책을 읽으며 물방앗간을 둘러싼 이야기의 매력을 함께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맺는다.
덧붙이자면, 영화는 비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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