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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이 있다!

[11인이 있다!] 라는 만화가 있다.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하기오 모토의 SF 만화인데, [11인의 우주용사]라는 제목으로 80년대에 명절 특집으로 애니메이션을 방영한 바도 있다. 10인이 팀을 짜서 53일 동안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우주선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주대학 입학 최종시험 이야기이다. 그런데 막상 우주선 안에 사람이 다 모이자 10인이 아닌 11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가짜는 누구인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지, 무언가 처음부터 잘못된 이 시험에서 53일이나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우주선 안에 감도는 긴장과 반전을 그린 작품이다.
뜬금없이 이 작품이 떠오른 건 책 날개에 있는 다른 단편선의 홍보문구 때문이었다. [얼터너티브 드림]과 [U. Robot]이 같은 SF 단편선 친구로서 함께 가길 바라며 책 날개를 장식하고 있는데 모두 단편10선이다. 물론 아빠의 우주여행도 단편이 10작품이다. 원래 쓸데없는 호기심이 가장 강렬한 법, 황금가지에서 나온 다른 장르의 한국 작가 단편선을 모두 검색해보았더니 단 한 권을 빼고는 모두 하나같이 10선의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공포문학 단편선 4종 중 3종, 스릴러 단편선 2종과 SF 단편선 3종, 환상문학 단편선 2종 모두 그랬다.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분량과(10개의 단편 정도면 300쪽 내외 분량이 되기가 쉽다) 브랜드 전략(이 출판사는 ‘10선’이 특징이라는)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선정했을 것이다.
11인이 있다!의 설정과 이 단편 10선들의 물결을 합치니 이런 광경이 눈에 보였다.
아하, 이 단편선 한 권 한 권이 10인의 용사들이 장르문학을 알리고 자기 목소리를 알리고 세상에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 팀이구나. 배구나. 우주선이구나. 아주 걸출한 선장급 작가가 있을 수도 있고, 처음 이 팀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장밖에 눈에 안 띄일지 몰라도 결국 이 배가, 이 우주선의 방향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10인 모두의 몫이겠구나. 이 10인이 같은 제목 아래, 같은 채점표 아래, 같은 홍보 문구 아래 묶인 운명 공동체구나. 계속 바뀌어야만 하는 10인의 용사가 계속 같은 얼굴이면, 같은 얼굴인데 예전의 재기는 간 데 없고 그저 안이함과 세월의 더께만 내려앉아 있으면, 다른 얼굴인데 이전 용사들이 애써 모아놓았던 시선을 도로 외면하게 만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그들과 한 공간에서 부대껴서 정말로 동료로 생각하는 사람이든 그들이 횃불 들고 나선 그 장르를 사랑해마지 않아서 그들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든 다 같이 하고 있을 터이지만, 자신의 글과 이야기를 혹독한 시장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느낌을 공유할 것은 이 10인뿐이겠구나.
그렇게 하나뿐인 팀으로 탄생한 10인과 그들의 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그들이 따로이 걸어온 길은 어땠는지, 이 팀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글은 어떤 것인지.


아빠의 우주여행 - 양원영
양원영은 거울에서는 raile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로, [용이 잠드는 바다]와 그 외전을 완결하고, [베스타 ~마과학 온천 비행담~]의 1부를 완결한 후 현재 2부와 외전격인 [페르세우스의 시대]와 [오디세우스의 제전]을 동시 연재하고 있다. 단편은 거울 2호에 {뿌와뿌와 벌레}를 실으며 합류한 후 만병통치 병원 외 8편을 시간의 잔상에 선보였고, 시작에서 출간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에 {파랑새}를 실었으며, 이 단편선의 표제작인 {아빠의 우주여행}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게재하기도 했다. 장편의 경우 고색창연한 동양풍의 세계부터 좌충우돌 종횡무진 유머만발 얼렁뚱땅 먼치킨 캐릭터 중심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언뜻 보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작가이지만, 언제나 유머와 사람 사이 체온, 둘째 가라면 서러울 스케일로 무장한 점이 이 작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편의 스펙트럼에서도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아빠의 우주여행}은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주인공을 돌봐주었던 아빠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의 성년에 국가에 수거된다는 통고를 받고, 주인공이 아빠의 소원인 우주여행을 이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문장이나 캐릭터를 자아낼 때 평소에 과도하게 넣기도 하던 힘을 빼고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빠의 이야기를 단편에 알맞는 스케일로 잘 마무리 지은 작품이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힘 있는 전개와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 김현중
김현중은 거울에서 계림이란 필명을 쓰고 있으며, 독자우수단편 우수작으로 2차례 뽑힌 후 73호에 {자연은 살아 있다}로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다.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게재했다. 일견 길고 장황하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입담이 생생하면서도, 단정한 문장으로 매끈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독자를 몰아가는 작품들을 썼다. 주로 현실과 생생히 밀착된 묘사를 발판삼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조차 천연덕스럽게 넘겨버리는 내공을 가졌으나, {이밧의 구도}와 같은 작품에서는 신화적인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뇌수술을 둘러싸고 주인공이 고등학생이었을 때와 그 후 14년이 지나 첫사랑을 재회했을 때를 오가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 수술을 하고서 급격히 멀어진 첫사랑과 이후 꼬인 인생, 고등학생 때와 14년이 흐른 현재의 진실이 교차한다. 아주 밀도 높게 천천히, 옛날 일과 교차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감질 나고 일견 이 이야기가 그저 그런 로맨스처럼 보일 우려가 있다. 이 작가의 글 중에서는 가장 첫눈에 끌어들이는 힘이 약한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과 밀착된 이야기에서 풍기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매력적이다.

머리사냥꾼 - 류형석
류형석은 거울에서 bluewind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3호에 {물고기와 소년}을 발표하며 합류했고, 글잔디, 유전자가 이상하다 등 여러 편의 단편을 선보였다. 웹진 크로스로드에 {미운 오리새끼의 죽음}을 게재했고, 시작에서 출간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에 {목소리}를 수록한 바 있으며, {머리 사냥꾼}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게재했다. 날카로운 감성, 빛나는 아이디어를 모자람 없이 잘 닦아 내보이는 작가로서, {목소리}에서는 옛 이야기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머리 사냥꾼}은 두뇌에 박은 칩에 인격과 기억을 저장하여 인공 신체로 사람이 옮겨다닐 수 있는 미래 사회에서 딸이 유괴당하여 그러한 부활의 기회마저 상실하도록 머리가 잘린 남자가 다시 범인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파괴된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두뇌에 심었던 칩이 있는 한 몸을 옮겨서도 고유한 성격과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단편으로서는 수월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매끄러운 작품이다.

처음이 아니기를 - 정소연
정소연은 거울에서 이수완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거울 13호와 16호에 편집진에게도 비밀로 응모한 {우주류}와 {앨리스와의 티타임}이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다. 19호에 {입적}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시간의 잔상 필진에 합류했다.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만화 부문에서 스토리를 담당한 {우주류}로 가작을, 제48회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에서 {마산앞바다}로 가작을 수상했고, 무크지 [Happy SF] 2호에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창비청소년문학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비거스렁이}를 수록했다. 번역 작업도 활발한데, 창작과 번역 모두에서 치열하게 사회적인 관심을 좇으며,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확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작가다.
{처음이 아니기를}은 중국 북부로 생애 첫 외국 여행이자 어학연수를 떠난 절친한 친구가 원인 모를 병에 걸린 후 그 후의 선택과 과정과 결과를 지켜봐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억눌린 소망,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망을 품게 되는 화자에게 이입할 수 있는 애잔한 작품이다.

스위치, 오프 - 정보라
정보라는 거울에서 보라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거울 59호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된 후 거울 66호에 {죽은 팔}을 게재하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다. 중편 {호(狐)}로 제3회 디지털 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에 {죽은 팔},{암살}을, 웹진 문장에 {은둔자의 영혼}을, 웹진 크로스로드에 {사랑, 그 어리석은}을 게재했다. 또한 피우리에서 단편을 모은 전자책 [방문]을, 새파란상상에서 장편소설 [문이 열렸다]를 출간했다. 폴란드와 러시아 작품을 번역하기도 한다. 거울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며, 초기에는 어둡고 암울한 이야기를 주로 썼으나 성실한 자세와 깊이 있는 인간 탐구를 무기로 하여 점점 다양한 색깔로 작품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스위치, 오프}는 예전에는 폭력과 분노를 미덕으로 여기며 좁은 틀에서 갇혀 살아야 했던 나라에서 탈출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화자의 부모님 이야기이다. 실상은 인간의 자유와 미래에 대한 중대하고 무거운 담론을 던지는 이야기이지만 어린이 화자를 채용하여 동화적이고 순수한 어조로 이야기를 펼쳐나가 쉽게 읽을 수 있다.

애니멀 201 - 김두흠
김두흠은 거울에서 아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하나의 공간}이 거울 2호에 거울 첫 번째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그 후 4호에 {천칭}이 역시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다. 8호에 {진화하는 장난감}을 실으며 거울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하였다. 이후 잠시 활동을 쉬다가 68호에 중편 {냄새}를 게재하며 다시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돌아왔다. 시작에서 출간된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에 {1억원}을 실었다. 어찌 보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비틀린 환상과 인물상을 보여주는, 개성이 강한 작가이다.
{애니멀 201}은 농장에서 농작물로 불리며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병기 실험체가 탈주하여 바깥 세상과 접촉하는 이야기이다.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소재를 강렬한 성격 묘사로 재치 있게 버무렸다.

아름다운 감금 - 임태운
임태운은 거울 43호에 {채널}이, 58호에 {무기여 잘 있거라}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63호에 {마법사가 곤란하다}를 게재하면서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다.  KT&G 상상마당 문학공모전에서 중편소설 {싹쓰러슈 데이}로 동상을, 한국전자출판협회 제2회 디지털 작가상에서 SF 장편소설 [이터널 마일]로 우수상을 수상했고, 웹진 크로스로드에 단편소설 {앱솔루트 바디}, {채널}을, 문장에 {그레이브키퍼},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가울반점}을 게재했다. [앱솔루트 바디]에 {앱솔루트 바디}를, [유,로봇]에 {무기여 잘 가거라}를,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에 {채널}을, 시작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에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을,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 {뮤즈는 귀를 타고}를 수록했으며,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을 와키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아드레날린 수치를 증가시키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과 어울리게 유쾌하고 활동적이고 아이디어와 문체 모두가 발랄하게 빛나는 글을 쓴다.
{아름다운 감금}은 좁은 곳에 이유도 장소도 모른 채 갇혀서 정기적으로 먹을 것만 받는 처지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단숨에 읽고 결말에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단편이다.

해바라기 - 정희자
정희자는 거울에서 pilza2라는 필명을 쓰고 있으며, 거울 24호에 [북풍의 등에서] 리뷰를 게재하며 기사 필진으로, 62호에 단편 {거울 속에서 사는 법}을 게재하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고, 먼 여정에서 장편소설 [코뉴코피아 ~The Dream of Cornucopia~]를 연재하여 완결했다. 크로스로드에 게재한 단편 {지구의 아이들에게}를 [앱솔루트 바디]에, [유,로봇]에 표제작 {유,로봇}을,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에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을 수록했다. 타 웹진과 단행본에 게재된 단편은 비교적 건전하고 휴머니즘적이나 거울에서는 극단적이고 작가와 밀착된 것으로 보이는 소재를 사용한 작품도 볼 수 있다. 다양한 소재를 잡아 성실하고 무난하게 완성하여, 첫머리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바를 충실히 보여주는 작가이다.
{해바라기}는 먼 미래에 지구와 달리 태양이 3년에 한번씩만 모습을 드러내는 행성으로 이주해간 인류의 후예들이 올리는 태양 축제와, 행성 원주민과 교감하고자 하는 십대 소녀를 엮은 이야기이다. 동경하는 동성 친구와 적대적이리만치 소통이 단절된 이성의 집착 등 학원물의 요소와, 소통 방법이 전혀 다른 외계생물과 나누는 인연 등 SF라고 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전형을 단편으로 잘 소화한 작품이다.

코르사코프 증후군 - 정해복
정해복은 거울에서 창간호부터 아르하라는 필명으로 {그 안드로이드는 마법사}를 수록하며 참여했다.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단편집 1, 2호에 각각 {상냥한 마녀}와 {좌변기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수록했으며, 단편집 [N.O.S.T.F]를 직접 제작해 동인지 형태로 출간하기도 했다. 날카롭고 예민하며 기괴한 환상이 숨 쉬는 작품과 따스하고 귀여운 작품이 공존하는 작가로, 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은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확실히 방법이 발견될 때까지 냉동수면과 해동을 반복하며, 그 사이 기억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담담한 문체와 격렬한 인물들이 대비를 이루며 무거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작품이지만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게 차분히 풀어나갔다.

그녀를 만나다 - 곽재식
곽재식은 거울 24호에 {달과 육백만 달러}가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면서 거울 필진으로 합류했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이 MBC 베스트극장에서 {토끼의 아리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된 바 있고,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에 {콘도르 날개}를, [유, 로봇]에 {박시은 특급}을 수록했다. 왕성하게 발표해온 단편을 모두 모아 개인 단편선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공계적인 지식과 공감 가는 생활형 주인공을 앞세워 풍부한 아이디어와 입담을 자랑하는 작가로, 진정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그녀를 만나다}는 인플루엔자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뇌 이식법이라는 모험에 가까운 치료법을 선택한 남자가 수술과 재활훈련을 마치고 점검 겸해서 1년 반 만에 애인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작가 특유의 공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주인공과 인생 요지경스러운 전개, 애틋하고 감동적인 마무리가 담담하고 평범한 제목과 대조적으로 빛나는 작품이다.


SF예요, 발칙하지 않아요

ida님 특집 대담과 인터뷰에서 어쩐지 SF 작가라고 하면 통통 튀어야 할 것 같고, 언제나 신인이고, 언제나 국내 최초라든가 본격이라든가 탄생 같은 말이 따라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장르 문학만 그런 것은 아니고 사실 어느 문학이든, 더 넓게는 어느 상품이든 간에 광고를 하고 팔아야 할 때가 되면 쉽게 어필할 수 있는 패턴을 광고에 적용하게 마련이다. 팩션은 다빈치 코드의 이름을 팔고(그것이 히트하기 전에는 장미의 이름을 팔았고), 인문학은 지성을 팔고, 자기계발서는 읽지 않으면 뒤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팔고, 판타지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를 빗대서 판다. 수식어도 언제나 비슷한데, SF라고 하면 주로 붙는 수식어에는 위에 말한 것 외에도 ‘발랄하고’ ‘발칙한’ ‘미래적’ ‘젊음’ ‘상상력’ 등이 있다.
예외 없이 이런 수식어가 붙은 이 작품집이 정말로 발칙한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쓰지도 않았고, 충격적이고 잔인한 장면도 들어 있고, 미래이기 때문에, 로봇이기 때문에, 외계이기 때문에, 우주이기 때문에, 기술이 발달해서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생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학이기에, 사람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가가 작품에서 던지는 질문, 화두는 보통 순수문학이나 본격문학이라고 하는 것과 SF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이 작품집에서는 앞에서 말한 새로운 이야기거리의 힘을 빌려 더 순수한 형태로 근본적인 질문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와 내가 아닌 것,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아빠의 우주여행]은 그런 면에서 발칙하기보단 따뜻한 작품집이다. 고아한 문학성이나 대단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길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비추천, 그러나 독특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소재 속에서 사람 냄새, 사람 이야기를 더 짙게 느끼길 바라는 사람에게는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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