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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녕, 인공존재!

2010.06.26 01:1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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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거울’ 웹진을 처음 찾아갔을 때였다고 기억한다. 단편소설 게시판에서 {철거인 6628}이라는 왠지 웅장하고도 호기로운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무심코 클릭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제목만 보고는 왠지 거대한 인간형의 금속제 기계가 최소한 6628대 이상 우글거리는 스팀펑크스러운 SF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실제 작품을 읽어보니 전혀 다른 이미지의 스토리가 튀어나왔다. 인생의 의미를 잃고 잉여롭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남자가 적국의 핵공격으로 의심되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스스로와 주변을 되돌아보고 어떤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다는, 다분히 실존적인 서바이벌 서스펜스 스릴러(?)였던 것이다. 분명 구성요소 하나하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매우 익숙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것들인데 그것들을 뒤섞고 굴리고 뽑아내는 방식이 묘하게 독특한 느낌을 주어서 인상에 남았다.

 두 번째 접촉은 ‘거울’ 편집장님이 권해 주신 앤솔로지 [누군가를 만났어]를 통해서였다. 위에 언급한 단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과 비일상을 다소 억지스럽게 반죽하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천연덕스러운 말빨로 독자를 납득시키는 노련함이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이 작가, 겉으로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소재나 스타일이 다방면으로 뻗쳐 있다. {이웃집 신화}와 {임대전투기}에서 보여준 에로스와 서민개그의 조화, {누군가를 만났어}와 {철거인 6628}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남자의 감수성과 만남에 대한 갈망, 그리고 {355 서가}에서 묘사된 백과사전적 잡학과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엄청난 결과로 증폭되는 부조리함 등등. 첫 번째 접촉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묵직한 충격과 함께 두 번째 접촉은 훨씬 오랫동안 필자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 번째 접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왔다. [안녕, 인공존재!]라는 알 듯 말 듯한 제목을 달고 황공하옵게도 필자의 책상 위에 떡하니 올라앉은 이 책은 작가의 첫 번째 단독 단편집이다. (그 전에 나온 최초의 단독 단행본인 [타워]는 동일 세계관을 이용한 연작 소설집이라 약간 문제가 다르다.) 역시나 이번 책에서도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변화무쌍한 작품들로 독자를 즐겁게 해 주고 있는데, 작품 별로 간단히 체크 포인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 크레인 크레인 (2009, 단행본 오리지널)

 고즈넉한 시골을 무대로 안타까운 사랑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클라이막스에서 은하계 규모의 대 스펙터클을 펼쳐 보이는 작가의 뻔뻔함에 건배. 권말에 실린 평론가 코멘트에서는 ‘남들은 금기시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대놓고 써먹었다’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당돌함을 통해 일상의 지겨움을 돌파하는 것이 환상소설의 묘미가 아니던가. 신(神)이라는 존재에 대한 독특하고도 발칙한 해석이 그러한 묘미에 더욱 깊은 향기를 더해준다. 그전의 작품들에서는 주인공과 상대역인 여인이 파경을 맞거나 아예 어긋나는 결말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는데 여기서는 비록 고통스럽지만 둘이서 함께하는 엔딩을 맞이해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 누군가를 만났어 (2007, 앤솔로지 [누군가를 만났어])

 고독은 때로 시공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이 된다. 르 귄의 데뷔작인 「파리의 4월」에서도 마법진을 이용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대를 뛰어넘는 고독이었다. 이 단편 역시 고독과 그 고독으로 인해 촉발되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중반까지는 목적도 방식도 다른 3개의 발굴팀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아슬아슬한 균형 속에 작업을 해 나간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차차 불필요한 요소들이 정리되고 최종적으로는 땅 속에 묻혀있던 비밀스런 ‘그 무언가’와 주인공의 조우(遭遇)로 수렴된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결국 미궁에 빠진 채로 끝나지만, 결정적인 만남의 순간 이후 평온함을 되찾은 주인공의 마지막 한 마디는 독자의 가슴에 아련한 파문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참고로 혼령들의 존재를 감지하여 고고학적 연구를 진행한다는 ‘고고심령학’이란 학문은 이 작품 이전에 집필된 「고고심령학자」라는 글에서 처음 확립된 것으로, 작가 스스로도 꽤 재미있는 소재로 여기고 있어서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 안녕, 인공존재! (2009, [문학동네])

 도무지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물건만 골라서 만들던 천재 과학자가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친구인 주인공에게 남긴 유작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조약돌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도불명 원리불명 상세불명의 ‘인공존재’. 전원을 연결해도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 물체를 통해서 주인공은 ‘부재를 통한 존재의 인식’이라는 패러독스에 직면한다.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데카르트 철학을 엉뚱한 각도에서 접근하여 존재의 본질과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 매뉴얼 (2009, 앤솔로지 [유, 로봇])

 휴대전화 사용설명서를 들여다보며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지껄여대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놀이에는 의외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진실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놀이에 집중하여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와 그 아이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기울이는 이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육아소설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이면에는 주위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예언자의 숙명과 일상 속에 서서히 스며드는 비일상의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다.
 본문 중에 등장하는 ‘마로하라는 인물이 자기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 - 즉 우리들의 세계를 침공한다’라는 설정은 본래 작가 본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연재하던 이계 판타지(현재는 비공개)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본 작품은 바로 그 ‘마로하 시리즈’와 설정 일부를 공유하는 스핀오프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중반까지의 전개는 아주 흥미진진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이야기로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엄청난 일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 놓고 바로 그 시점에서 싹둑 잘라버리기 때문에 하나의 단편이라기보다는 보다 거대한 이야기의 프롤로그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언젠가 ‘마로하 시리즈’가 재개되어 그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된다면 이 작품 역시 전혀 다른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 얼굴이 커졌다 (2009, 앤솔로지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2])

 일격필살의 스나이퍼로서 어둠의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부풀어오른 것을 알고 경악한다. 절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감쪽같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스나이퍼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기 때문. 그럼에도 의뢰받은 일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현장에 뛰어든 그는 목표물과 그 주변을 관찰하다가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챈다.
 SF나 판타지라는 구분을 넘어서서 그냥 ‘기이한 이야기’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듯한 현대 우화. 주인공의 얼굴이 갑자기 커진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러한 사고를 통해 주인공 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중점을 두고 감상할 필요가 있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훈훈한 결말에도 주목.

 □ 엄마의 설명력 (2007, 앤솔로지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어릴 때 한국으로 입양된 외국인 소녀인 주인공은 천문학자인 양엄마의 절륜한 설명 솜씨에 현혹되어 천동설이 진리라고 믿었다가 학교 과학시간에 망신을 당한다. 이런저런 일로 엄마에 대해 정이 떨어지기 시작한 주인공은 가출을 결심하지만, 그것을 미리 눈치챈 엄마는 태어난 고향으로 데려가 주겠다며 외국 여행을 제의한다. 그리고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믿을 수 없지만 왠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표면적으로는 해외 입양아의 뿌리 찾기와 양엄마의 허풍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입담이 핵심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4백여년에 걸쳐 전세계를 무대로 진행 중인 천동설과 지동설의 치열한 싸움을 다루는 음모론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진짜 부모는 누구이며 지구를 둘러싼 진실은 어느 쪽인가’에 대하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재치 만점의 작품. 약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 단편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주인공의 설명력에 힘입어 진짜처럼 느껴지는 허구는 아닐까’라는 잡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애초에 허구가 맞긴 맞지만.)

 □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2010, 웹진 《문장》)

 앞서 {철거인 6628}이라는 제목을 보고 멋대로 로봇물이 아닐까 상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뒤로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진짜로 배명훈의 로봇물이 나와 버렸다. 그것도 보통 로봇물이 아니라 변신합체 로봇이라는 해묵은 클리셰와 내셔널리즘의 폭주라는 정치적 테마를 하나로 융합한 대우주전쟁 스펙터클 블랙코미디 괴작이다. 점점 합체하는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정작 전투시에는 할 일이 없어 별별 딴짓을 다 하며 시간을 죽이는 잉여 파일럿들의 쪼잔한 일상이 웃음을 자아낸다. 합체로봇을 통한 군비경쟁이 종국에는 그 목적을 잃고 오직 파괴를 위해 내달리는 ‘힘’의 발현으로 귀결된다는 전개 또한 비범하다.
 작가는 이후 {예비군 로봇}에서도 탑승형 거대로봇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관료주의의 부조리한 현실과 지성의 존재의의에 대한 고민을 거침없이 풀어낸 바 있는데, 같은 소재를 다시 요리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내용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 마리오의 침대 (2009, 웹진 《거울》)

 인생의 동반자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단점을 굳이 고치려 들지 않고 너그럽게 포용하는 자세는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활을 침해하여 건강까지 위협한다면 어떨까? 이 동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마리오는 그런 문제를 떠안고 계속해서 고민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탈 없이 관철하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물질도 당연히 필요하다는 극히 현실적인 전제 또한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마리오가 찾아낸 최후의 해결책이 너무나 SF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지라 더욱 감탄스럽다. 진지한 고민은 책상 서랍 속에 모셔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에 적합한 소품.


 이상으로 간단히 수록 작품들을 살펴보았는데, 최대한 각 단편의 매력을 전하면서도 치명적인 내용 누설을 피할 수 있게 리뷰를 작성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본 작품집을 읽고 배명훈이라는 작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출세작인 [타워]는 물론이고 ‘거울’에 게재된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 실린 글들도 보통 수준을 넘지만 그 정도로는 작가의 드넓은 작품세계를 파악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최고 문제작이라 생각하는 {연애편지}가 실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기도 하고.) 독자 여러분이 배명훈이라는 이름의 광활한 대지를 마음껏 여행하고자 결심하였다면, 이 책은 여러분의 초행길을 이끌어 주는 든든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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