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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의 역사는 근대의 역사

 흔히 쿤스트메르헨Kunstmarchen, 고딕, 판타지, SF 등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영역에서 벗어난 흐름들의 근원을 낭만주의에서 찾곤 한다. 물론 쿤스트메르헨은 철학적으로 낭만주의의 적자(適者)라고 할 수 있으나, SF의 발달상은 보다 복잡하다. 낭만주의적인 모험소설이 계몽주의와 그로 인한 과학의 발달과정, 그리고 제국주의를 만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형태가 SF의 본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F는 과학에 대한 낭만적인 시선, 제국주의적 팽창과 정복에 대한 미화와 함께, 그에 대한 동시대적 반성도 아우르는 장르였다. 과학의 측면에서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지녔던 과학의 힘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소설사적으로 계몽주의에 반발했던 사조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SF의 독특한 균형이 장르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한국의 (유사)SF, 비극의 탄생

 메르헨, 혹은 (환상)동화가 어린이들의 전유물처럼 활용되고 발달심리학/교육학적으로 ‘유익’한 것처럼 선전되기 시작하자, SF 또한 어린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선전에 필요한 도구와 논리 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SF를 가장 왜곡시킨 주범은 바로 ‘창의력 계발’과 ‘과학적 탐구심 유발’ 같은 ‘공상과학’적인 판매 전략이었다. 쿤스트메르헨이 소수의 예외적인 천재작가들과 양질의 일본어중역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으로 어떻게든 외연과 내면을 근근이 유지했던 것과 달리, SF는 철저히 시장의 요구에 맞춰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부교재로 활용되며 ‘소설’의 측면보다 ‘학습서’에 가까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왜곡의 잔재는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학소설을 ‘미래탐구 학습백과’ 정도의 위치로 격하하는 낡은 시도가 21세기에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한 번도 과학소설을 특정 목적의 ‘도구’가 아닌 ‘소설’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국SF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SF는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읽어야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SF를 손에 쥘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단하고 치밀한 ‘하드SF’를 소개하여 SF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엔터테인먼트에서 다양하게 활용된 작품들을 번역 소개하여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들이는 것? ‘동화’작가와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 SF에 도전하게 만드는 것? 뭐,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 SF의 본질에 다가서는 접근, 보다 전략적이고도 순수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계를 전복하는 것이다.

 SF를 ‘애들이나 보는 공상과학’으로 치부하는 경향에 감정적으로 반발하고 반례들을 끌어오는 시도가 ‘좋은’ 과학소설을 알리고 과학소설의 여러 측면들을 소개하는 데에 일정 부분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상과학’이 더디지만 조금씩 청산되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SF를 아이들에게서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실제로 과학 학습서들은 여전히 쏟아져 나오지만, 그에 비해 아동청소년 SF는 오히려 가뭄에 가까울 정도로 메마르고 있다. SF를 기획/출판하는 대다수의 창작자/번역자/출판인들은 30대를 주 독자층으로 설정한 듯 성인지향의 SF들을 주로 출간했고, 출간한 SF를 아동청소년 독자에게 소개하려는 노력도 부족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리 포터]와 SF라는 문제

 이런 상황에서 창비 청소년문학은 ‘10대를 위한 SF단편집’인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이어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출간했다. 물론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가 [완득이], [위저드 베이커리] 등 같은 시리즈 내의 흥행작들에 비해 상업적으로 주목할 만한 반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비평적으로는 [완득이]나 [위저드 베이커리]보다 더 나은 성과물이었다. SF라는 카테고리를 전면에 부각한 청소년문학이 다른 카테고리의 작품보다 덜 팔리는 현 상황은, 결국 문학 SF가 지닌 매력이 청소년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탓이 크다. 물론 이 문제는 좋은 청소년SF를 청소년문학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소개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해리포터] 붐에 무기력하게 휩쓸렸던 지난 세대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남 탓하고 손 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청소년SF의 수많은 걸작들을 소개하고 창작하여 빛을 볼 수 있다면, [해리 포터]만큼 인상적인 청소년SF 작품을 국내에 소개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SF라는 문제가 그렇게 해결될 수 있을까?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문학

 [다른 늑대도 있다] 리뷰에서 굳이 아동청소년 판타지 소설의 발달심리학적, 교육학적, 사회문화적 측면의 고려보다 엄밀하게 문학적인 기조만을 유지했던 것은, 그러한 발달심리학적, 교육학적, 사회문화적 성과가 청소년 문학을 읽는 청소년의 것이 아닌, ‘어른’들이 개발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판타지와 SF의 근본 철학 사조로 낭만주의를 꼽은 것도 바로 이러한 어른들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판타지/SF는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문학이며, ‘기술’이 된 문학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SF의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한국에서 진정한 아동청소년문학이 존재했는가, 혹은 현재의 한국 사회가 청소년문학이라는 문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를 묻는다면 그 누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한국의 부모들은 청소년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청소년들은 종속적인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받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좁은 선택만이 허용될 뿐이다. 학교에서도 문학이라는 과목은 ‘고전’과 ‘고전적 해석’만이 존재하는 학문적 문학의 세계, 자유로운 선택과 해석이 거세된 세계다. 논술조차도 배워야 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 좁은 선택권 안에서,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소설들의 목록에서도 SF는 소수이다.

 주체적 선택의 문제

 청소년 SF는 청소년을 비롯한 주체적으로 선택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청소년들은 SF가 아닌 판타지, 무협, 로맨스, 혹은 문학이 아닌 다른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SF를 쓰고 소개하려는 사람들은 SF만의 특징을 내세워 한국의 청소년 독자들을 SF로 끌어들여야 한다. SF라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상대적으로 유연한 청소년 독자들을 매혹할 만 한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명 한국의 실정에서 SF 단편집은 양날의 검이다.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은하영웅전설]의 예를 봐도, 아니 한국 판타지 소설 붐을 이끌었던 [퇴마록], [드래곤 라자], [해리 포터] 등을 봐도 대부분 장편소설이다. 단순히 소설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하나의 세계상을 독자들이 친절하게 따라갈 수 있고, 천천히 그 세계(의 관점과 가치관)에 동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편 판타지 소설은  전략적으로 아주 유리하다. 물론 장편의 단점들도 있지만, 한국에서 유명한 장편소설이 갖는 위상은 단편집과 크게 차이난다.
 대신 단편집의 호흡은 짧고, 가볍다. 가볍게 접근할 수 있고 소설의 다양성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집은 SF라는 낯선 세계를 ‘소개’하는데 적절하다. 이런 점에서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SF를 낯설어하는 독자, SF에 익숙한 독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단편집이다. ‘SF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SF에는 어떤 소설들이 있는가’라는 물음에도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있으며, ‘재미있는 SF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테리 비슨)

 SF를 낯설어하는 독자, SF를 처음 접하는 독자, SF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대화체로 밀어붙인 소설의 형식은 SF의 낯선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에 좋을뿐더러, 대화체 특유의 전개과정과 유머를 잘 녹여내는 작가의 솜씨가 매끄러워 작품의 내용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외계인의 외양 묘사가 나오지 않아도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이며, 우리의 이해 밖에 있다는 사실, 우리가 외계인을 보며 느끼는 낯설고 불가해하며 거북한 감정을 역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SF 특유의 외부적인 시선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태양 아래 걷다(제프리 A. 랜디스)

 하드SF는 과학적 엄밀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장르다. 많은 독자들이 하드SF를 오해하는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소설 속에서 과학적 엄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과학자를 등장시키는 것이고, 실제로 국내에 소개된 하드SF 중에는 과학자가 직접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하드SF의 과학적인 설정들을 직접 설명하는데, 어려운 과학 설정이 독자들에게 장벽이 되곤 한다.
[태양 아래 걷다]가 단편집의 2번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단편이 다른 하드SF 작품들처럼 어려운 과학지식을 알아가면서 흥미진진해지는 종류의 작품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복잡한 과학이 아닌 내면 심리묘사가 중점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하드SF가 어떤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설명하는데 효과적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왜 계속 ‘태양 아래’ 걸어야 하는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과학적인 설정 하에서 주인공이 왜 고독 속에 고뇌하는지 알 수 있다.

 미친 몰리에게 복숭아를(스티븐 굴드)

 영화로도 제작된 [점퍼] 시리즈로 국내에 소개된 적 있는 스티븐 굴드의 소설이다. SF 블록버스터 영화로 SF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액션 위주인 이 작품이 얼마나 호응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스릴러 문학만이 서스펜스와 액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을까.
 하지만 액션을 산문으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기술적 발달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액션의 쾌감과 긴장감을 시청각적으로 정교하게 구현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의 세례를 흠뻑 누려온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작품의 경우, 액션의 비중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높고 플롯보다 스토리텔링과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보여주지만, 한국 독자들이 스티븐 굴드가 만들어낸 이 캐릭터들의 행동양식에 수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영미판 헌화가 이야기?) 영미 SF와 한국의 감수성이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해본다.

 뱀의 이빨(스파이더 로빈슨)

 소재 면에서 ‘10대를 위한 SF 걸작선’이라는 부제에 호응할 만 한 작품이다. ‘부모와 아이들이 ‘이혼’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소유물화하는 문제를 날카롭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청소년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뒷심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타협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대로도 하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나쁘지 않지만,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였으면 어땠을까. ‘뱀의 이빨’이라는 제목 또한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손쉽게 치환하는 듯해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는다.

 조슈아 삼촌과 그루글맨(데브라 도일/제임스 D. 맥도널드)

 어슐러 르귄의 [샘레이의 목걸이]를 연상케 하는 단편이다. SF의 초보자에게는 이런 유의 단편이 SF와 판타지/미스터리의 차이를 알려주는데 적절할 것이다. 말그대로 ‘입문서’의 성격을 띤 이 단편집에서 ‘SF의 기초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클리어리 가에서 온 편지(코니 윌리스)

 아주 고풍스러운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코니 윌리스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할 수도 있지만, 모범적인 SF의 전형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억누른 감정, 절제되지만 절절한 감성을 충실히 전달한다.

 브라이언과 외계인(윌 셔털리)

 묵직한 소설 뒤에 이어지는 개그SF다. 하지만 품격있고 고차원적인 개그는 아니라는 점에서 살짝 아쉽다.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과 같은 영국식 유머를 좋아하는 성인 독자, 혹은 일본식 만담형 개그나 코믹 액션을 좋아하는 청소년 독자들에게는 코드가 맞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종류의 어둠(데이비드 랭포드)

 ‘좋은’ ‘청소년’ ‘SF’이다. 검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청소년에 대한 억압의 이야기일 수도, 발달한 과학이 가로막은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다른 종류’는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 머무르지 않는 인간을 보여주기도 하며, ‘어둠’은 가려진 것, 허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주 비행사가 될래?(그렉 반 에커트)

 [다른 종류의 어둠]과 함께, 단편집을 통틀어 최고. SF의 정수라 할 만 하다.
흔히 SF는 서사의 규모를 터무니없이 거대하게 잡는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혹은, 좋은 SF에서 공통적으로 과학적 상상력의 독창성이나 서정성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꽤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작품들 중에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경우도 있지만, SF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규모나 독창성, 서정성 같은 것이 아니다. SF에서 소재의 ‘낡음’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보다는, ‘낡음’을 낡음으로만 인식하는 안이함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주 비행사가 될래?]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그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어느 지점에서 어떤 정서로 관찰해내는가에 따라, 얼마나 큰 울림을 낼 수 있는가가 판가름 난다. SF의 중심인 영미의 작가들이 아닌, 변두리의 작가들이 의미심장하게 관찰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슬픔의 카드(제인 욜런)

 [다른 늑대도 있다]에서 보여준 울림을 다시 맛보기 어려웠다. 장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작품이 작가의 지나친 야심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데에만 힘쓴 나머지, SF라는 장르의 장점과 이야기의 힘과 독자의 집중을 끌어들이기 버거워 보인다. 잔뜩 힘을 들인 작품이고, 아름답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탄젠트(그렉 베어)

 비록 [신의 용광로]와 [다윈의 라디오]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그렉 베어의 이 단편 하드SF를 읽어본다면 분명 이 작가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학적 상상력, 단단한 캐릭터, 좋은 이야기가 잘 엉겨붙어있다. 막 SF에 입문하는 초심자들에게 하드SF의 상상력이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 내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외계인의 생각(필립 K. 딕)

 필립 K. 딕은 장편보다 소품이 더 훌륭할 때가 많다. 웃을 수밖에 없는 소품. 소품 격의 단편들이 여럿 있지만, 결코 필립 K. 딕의 재능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재치란 이런 것이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낸시 크레스)
 어느새 단편집의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다. 후반부의 특징은 주로 미국의 역사적/문화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특징에서 오는 장점을 제외하고 보는 국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전반부보다 몰입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 작품의 경우도 인종차별의 역사가 뿌리 깊고 ‘외지인’을 ‘이방인’이자 이질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정서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서에 공감하기 어려운 국내 독자들에게는 당연히 감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을 쓴다면, 아마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게 될 듯하다.

 링컨 기차(머린 F. 맥휴)

 미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이 작품의 배경이 익숙할지 몰라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는 링컨이라는 이름과 남북전쟁/노예해방과 같은 단편적인 정보로만 알려져 있기에 상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먹먹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임에도 국내에서의 반응이 미지근한 데에는 어쩔 수 없는 배경지식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 스턴벡이 화성에 변화구를 소개한 이야기(킴 스탠리 로빈슨)
 정말로 제목 그대로다. 화성에서 야구하는 이야기. 이런 것도 SF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SF고, 매우 중요한 SF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SF는 절대 고고하거나 사색적이지만도 않고, 이런 식의 심심풀이도 안 될 법한 이야기들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딴 걸 돈 주고 팔다니’라고 펄펄 뛸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독자들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딜 가나 ‘끼워팔기’라는게 있고,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야구는 인기 있는 운동종목이긴 하지만, 미국만큼 대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폐품 수집(올슨 스콧 카드)
 위의 단편들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는 모르몬 교도가 드물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성장소설의 기본적인 틀 내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단편이지만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기 쉬울 듯하다.

 위대한 이별(로버트 찰스 윌슨)

 흔한 소품이다. 잠깐 [눈늑대]에 실린 {이사 준비}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뒷부분에 놓인 작품들이 국내 독자들에게 덜 재미있을 듯한데, 아무래도 미국의 역사적/문화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국내 단편집에서 국내 실정에 잘 맞는 작품들은 외국의 독자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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