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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엔터테인먼트 소설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인구는 우리나라보다 두 배 조금 넘고 출판시장은 세 배 정도 된다지만 출간종수는 열 배에 이른다는 일본. 그나마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을 지탱하는 것은 아동도서 및 학습참고서라고 한다. 출판업계의 축소와 서점 수 감소는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세계적 추세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해 출간된 모든 서적의 판매량과 일본의 1년간 만화 판매량이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양국의 출판시장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일본에서는 소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으니 바로 순문학과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대표적으로 추리, SF, 판타지, 라이트 노벨 등 대중을 위한 재미를 주는 소설을 모두 아울러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 부르며 출간종수와 판매량, 세간의 화제 및 인지도, 영화와 만화 등의 2차 창작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순문학을 압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과거 대중소설, 오락소설, 통속소설 같은 용어가 쓰였으나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통일된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학계의 연구와 사회적 권위, 이름난 문학상 등은 순문학에 치중되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일본 대중의 사랑과 관심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에 쏠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마다 다양한 신인상을 통해 신인들이 데뷔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미 출간된 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도 여럿 있다.

이러한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대표하는 장르는 역시 미스터리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상의 최고봉으로 어느새 우리나라에서 책 소개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나오키상 수상자만 봐도 그렇다. 1990년대 이후 나오키상 수상자 중에서 타카무라 카오루, 오오사와 아리마사, 미야베 미유키, 키리노 나츠오, 쿄코쿠 나츠히코, 히가시노 케이고, 사쿠라바 카즈키 등 많은 작가가 추리소설로 데뷔했거나 현재 추리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인기로 히가시노 케이고,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일본 소설의 대표자로 손꼽히며 묻지 마 출간되는 온다 리쿠의 경우는 판타지 소설상 본심작을 출간하며 데뷔했으나 추리소설을 주로 썼고 추리작가 협회상을 받는 등 추리소설에서 두각을 드러내왔다. 국내에 나온 수많은 번역작의 대다수도 추리물인데, 단편을 그리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지 장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개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온다 리쿠의 단편집이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로만 알았던 비룡소의 레이블(혹은 임프린트) 까멜레옹을 통해 선보였다. 아직 출간작이 거의 없어서 까멜레옹의 성격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청소년용 장르소설을 다루지 않나 추측하고 있다.

2. 1001초 살인 사건

이 작품집은 제목에서 주는 인상과는 달리 추리 단편집은 아니다. 추리에 가까운 단편이 몇 있으나 이마저도 확실하게 추리소설이라고 하기가 좀 힘들 정도다. 주로 환상소설/공포소설 위주이며 장르 혼성적이며 전체적으로 모호한 작풍을 띠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온다 리쿠의 추리소설이 인기라는 이유로 제목을 바꾼 한국 편집자의 의향 때문이다. 왜냐하면 원서 제목은 『아침 햇살처럼 상쾌하게』이며 작가의 전작인 『도서관의 바다』처럼 단편집을 위해 새로 쓴 오리지널 단편의 제목을 따서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제목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에 어긋난 경우라서 바람직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추리소설로 보여야 팔릴 거라는 계산 때문인 듯한데, 막상 저 표제작으로 뽑은 「1001초 살인 사건」도 추리물은 아니다. 부조리하다고 할까, 꿈을 옮겨 적은 듯 갈피도 잡기 힘든 환상소설이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작품의 분량이 대체적으로 짧고 수록작 사이의 수준차도 크며 순간적인 아이디어나 이미지에 기대는 글이 많아서 개별적 단편의 완성도와 만족도는 낮다. 심지어 미숙하거나 어설픈 모습마저 보여서 작가의 초기작이거나 즉흥적으로 쓴 게 아닐까 싶은 글도 있을 정도다. 작가 자신도 인정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온다 리쿠는 단편을 쓰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도 장편에서 실력을 드러내는 편이지만 온다 리쿠 쪽이 더 심하다.
하지만 이는 온다 리쿠의 인기와 성과를 감안하면 차라리 다행이 아닐까 싶다. 장편에서 이 정도의 분량을 꾸준히 좋은 수준으로 내놓은 작가가 단편까지 잘 쓴다면 다른 작가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할 판국이니까.

수록작들을 살펴보자면 「안내」, 「냉동 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엽편이며 「심야의 식욕」, 「외로운 성」, 「졸업」은 기괴한 호러물, 「빨간 공」, 「1001초 살인 사건」, 「외로운 성」은 장르 혼성적인 기괴한 환상소설이며 「해후에 관해」, 「아침 햇살처럼 상쾌하게」는 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작풍으로 작가의 새로운 도전으로 느껴진다.

내용면에서 「빨간 공」, 「그 뒷이야기」, 「외로운 성」, 「졸업」이 동화 혹은 아이들의 세계를 재해석해 신비하고 공포스럽게 포장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 「그대와 밤과 음악과」, 「아침 햇살처럼 상쾌하게」는 미스터리로 작품집 전체에서의 비중은 적지만 분량도 길고 내용도 상대적으로 만족스럽다. 온다 리쿠의 단편집 중에서 재미와 완성도 양쪽에서 『코끼리와 귀울음』이 괜찮은 성과를 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추리 단편에서 가장 실력을 잘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본작은 많은 독서를 통해 눈이 높아진 우리나라의 장르소설 독자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실망스런 단편집으로 온다 리쿠의 팬과 추리소설 매니아라면 한 번쯤 넘겨볼 정도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이후에 쓴 단편집 『나비』(한국 번역은 이쪽이 먼저였지만)에서는 조금 더 좋은 글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지간한 온다 리쿠의 팬이 아닌 이상 이 책은 건너뛰고 『도서관의 바다』에서 바로 『나비』로 가면 될 것이다(추리 독자라면 『코끼리와 귀울음』만 읽어도 만족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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