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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가는 이야기]에 이은 김보영의 두 번째 단독 작품집. 다만 [멀리 가는 이야기]의 경우는 예전에 ‘거울 개인 단편선’이라는 카테고리 하에 전자책 및 종이책으로 판매된 책을 다시 펴낸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리지널 상업 단편집은 이쪽이 사실상 처음인 셈이다.

 김보영 작품세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뒤집기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익숙하게 느끼던 일상의 모습이 순식간에 전혀 다른 별세계 얘기로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처음에는 어딘가 다른 차원인 것처럼 느껴지던 이야기의 무대가 한 순간의 깨달음에 의해 우리가 사는 세계와 동일한 곳임을 보여줌으로써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한 뒤집기는 작가의 단순한 공상이나 변덕에 따른 것이 아니고, 치밀한 내적 논리와 촘촘한 복선을 거쳐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하나의 결론이기 때문에 더욱 감탄스럽다. 그리고 그 뒤집기의 과정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독자의 두뇌를 사정없이 강타하는 센스 오브 원더(기성관념을 깨뜨리는 데서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경이감)의 물결이 뒤따른다.

 SF와 판타지의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으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스토리의 핵심이 주인공과 외부의 갈등보다는 주인공 자신의 내적 변화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는 어슐라 르 귄을 방불케 하는 면도 있다. 물론 이번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종횡무진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진화신화 (2006, 무크지 《HappySF》 2호)

 ‘[삼국사기]에 수록된 기이한 동물들에 관한 서술이 만약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판타지 사극. 진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지는 현실세계와는 달리 이 작품의 세계에서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상당히 단시간에 생명체 자신도 예측 못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설정인데, 그 덕분에 상상의 산물로만 여겨지던 기이한 동물들의 정체도 꽤 설득력 있게 해명된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저지르지도 않은 반역죄로 쫓기는 신세가 된 왕족의 고독한 도피행각이 주된 내용으로,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진화에 대한 남다른 설정과 주인공의 서글픈 심리 변화가 뒤얽혀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과 감동의 결말을 이끌어낸다. 킹 오브 상상동물(?)이라 불릴 만한 ‘그분’의 마지막 등장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발군.

 □ 땅 밑에 (2006, 웹진 《크로스로드》)

 이 작품을 다 읽고 떠올린 작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이다. 극한상황에 처하여 외부와 고립된 주인공이 남들은 이해 못할 목표를 위해 폐쇄공간 속에서 끝없이 정해진 방향으로 전진한 끝에 세계의 얼개에 관한 진실과 직면한다는 점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바빌론의 탑}에서는 하늘 위로 파고 올라가는 데 비해 여기서는 계속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구도이며, 또한 {바빌론의 탑}은 처음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다를 것이 없는 세계를 그리다가 ‘사실은 우리 세계와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폭로하는 데 비해 여기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환경을 보여주어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선사한 뒤 클라이막스에서 ‘그러나 사실은 지구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는 등 여러모로 대조적인 부분이 많다.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처음 부분에서 완전히 다 설명하지 않고 그때 빠져 있던 결정적인 퍼즐조각을 클라이막스에 제시함으로써 속임수가 탄로나는 시점을 적극적으로 늦췄다는 점이 재미있는데, 만약 영상매체였다면 처음부터 그림으로 세계관을 보여줬어야만 했을 테니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굳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상상력에 맡김으로써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술수(?)는 문자매체가 가진 일종의 특권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2009, 앤솔로지 [백만 광년의 고독])

 아이작 아시모프의 {전설의 밤}에서는 주변에 너무 많은 항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낮이 계속되고 수천년만에 한 번씩만 밤이 찾아오는 행성을 묘사하고 있다. 본작의 무대가 되는 곳도 이와 비슷한 환경으로, 은하 중심에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밤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그 곳에 사는 지성체들도 ‘잠’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때때로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돌연변이들이 나타나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그러한 돌연변이 중 한 명으로, 과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잠을 억지로 못 자게 막음으로써 남들과 똑같아지려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한 일인지 의문을 갖는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극히 당연하고 흔해빠진 문장을 약간 시점만 바꿈으로써 경이에 가득찬 깨달음의 한 마디로 둔갑시키는 특이한 작품. 본래는 작품 내의 전개와는 반대로 천문학 아이디어를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무리 없이 드러내기 위해 ‘잠을 모르는 종족’을 역산하여 설정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 몽중몽 (2006, 웹진 《거울》)

 동일인이 꾸는 여러 개의 꿈 시퀀스로 구성된 옴니버스식의 단편. 꿈의 내용에 따라 주인공의 모습과 기억도 다양하게 바뀌며 어느 것 하나 고정된 것이 없지만, 단 두 가지 - 주인공은 꿈의 속성을 지닌 자(者)라는 점과 그의 곁에는 항상 태양을 인격화한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만은 계속 이어진다.
 삶 자체가 하나의 덧없는 꿈이고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면 대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고민하게도 만들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싱싱한 생명력을 이어가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지나친 이성적 전개를 피하고 무의식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로 써 보려고 시도한 결과물로, 다른 단편들과는 구별되는 성격의 실험작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는 르 귄의 {머리로의 여행}과도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몽중몽} 쪽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 거울애 (2007, 웹진 《거울》)

 감정표현에 심각한 장애가 있어 타인과의 접촉에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예전에 상담했던 의사로부터 특이한 소녀 하나를 위탁받는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극단적인 감정변화를 보여주며 범죄의 가능성마저도 비치는 이 소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주인공에게 이 아이를 맡긴 이유는? 해답의 힌트는 바로 작품의 제목 안에 숨어 있다.
 그야말로 열반에 가까운 ‘완전한 미소’의 경지에 도달하여 해피엔딩을 맞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소녀의 속성을 생각하면 ‘저놈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사나’라는 걱정이 들기도 해서 다소 불편한 마음이다. (무슨 얘긴지는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안다.) 보기 드물게 구체적인 외부의 위협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 형식을 취했다는 점도 체크 포인트.

 □ 0과 1 사이 (2009, 웹진 《크로스로드》)

 기존의 뉴턴 역학에서는 0과 1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무한한 가능성의 확률이 그 사이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0이면서도 동시에 1인 존재를 상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딸아이의 불행한 자살로 상심에 빠진 학부모나 과거의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시도하는 미래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무한히 꼬이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하는 작품. 요즘의 과열된 교육열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풍자소설의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자기가 살아있는(또는 살아오거나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 사로잡혀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현대의 어른과 아이들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인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 마지막 늑대 (2007, 앤솔로지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인간이 ‘그들’이라고만 불리는 거대생물의 애완동물로 전락하여 생존과 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대의 이야기. 애완인간으로 귀여움을 받고 살아가던 주인공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류의 문화를 보존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늑대’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러나 주인공이 ‘늑대’들을 찾는 진짜 이유는 과연?
 인류와 감각계통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인간들과는 전혀 소통의 여지가 없는 ‘그들’을 상대로 뭔가 의미있는 것을 보여주며 자기의 진심을 전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른 삶을 택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느껴진다. 주인공이 육체적으로는 해방되지만 정신적으로는 패배했다는 점에서 보면 여기 실린 작품들 중에서 가장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일지도?

 □ 스크립터 (2008, 웹진 《문장》)

 너무나 오래 되어서 이용자도 한 명밖에 없고 관리회사도 운영방법을 전혀 모르는 골동품급의 가상현실 네트웍 게임에 직원 한 명이 투입된다. 유일한 이용자를 구슬려서 현재의 게임을 포기하고 다른 서비스로 옮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문제의 이용자는 도대체 인공지능인지 또 다른 사람인지 아리송한 별개의 캐릭터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 캐릭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접촉을 시도하던 직원은 문득 이 끝없는 밀고 당기기가 진짜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회의를 품는다.
 스토리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진짜 인간과 인공지능을 무슨 수로 구별하면 좋을 것인가?’ 쪽이고 가상현실이라는 도구는 그러한 질문이 유효하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인간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봉쇄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채택된 것이라고 한다. 한때 게임 개발자로 종사한 작가의 경험에 힘입어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치밀하고 생동감 있는 하드SF의 영역에 접근하고 있다. 조악한 그래픽과 무성의한 스크립트에 치를 떨면서도 밤새도록 게임에 몰입했던 구세대 온라인 게이머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만가(輓歌)라 해도 좋을 듯.

 □ 노인과 소년 (2009, 네이버 ‘오늘의 문학’ 코너)

 거울 단편선 [타로카드 22제]에도 수록된 우화풍의 단편. 조용히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늙은 사제와 재기발랄한 어린 제자가 벌이는 대화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삶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알기 쉽게 풀어나가는 작품으로,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단아함과 명쾌함이 느껴진다. 처음과 마지막이 대구를 이루면서 두 세대의 주인공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듯하여 인상깊다.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단편들(전 9편 중 6편)이 현실세계와는 확연하게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무대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모험을 묘사하고 있어서 한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세계로 가게 될까?’라는 궁금증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식의 세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작품마다 달라지는 독특한 세계관에 적응하느라 약간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제시되는 세계관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전개되는 주인공의 편력도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서로 구별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생존을 목적으로 한 도피({진화신화}), 우연히 발견한 벽화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고행({땅 밑에}), 스스로의 육체적 특성에 적응하는 동시에 사회의 편견에 대항하여 살아가기 위한 투쟁({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복구하여 시공의 혼란을 막기 위한 침투({0과 1 사이}), 잃어버린 문화의 회복과 타종족에 대한 소통의 모색({마지막 늑대}), 인간과 프로그램의 구별 기준을 찾기 위한 전뇌세계에서의 논쟁({스크립터}) 등등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보여주는 모습이나 전개되는 방향은 각각 다를지언정 이들 이야기에서는 핵심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가 느껴지는데,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묵상(黙想)의 자세가 그것이다. 어떤 세계에서 어떤 조건 하에 살아가든 간에 각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우리들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성과 이성을 가지고 저마다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며, 그러는 과정에서 세계의 참모습은 물론 스스로의 내면에 잠재한 자기 자신의 참모습과도 조우(遭遇)하면서 뒤통수에 냉수를 확 끼얹는 듯한 깨달음을 얻고, 세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화해(‘타협’이 아니라)하여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특정한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고 주로 캐릭터 중심으로 전개되는 나머지 3편의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단편집은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멀리 가는 이야기]와 더불어 20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구축된 김보영 월드의 중간 결산에 해당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아이디어 중심의 단편에서는 이미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아직도 개척해야 할 방향성은 무한히 남아있는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첫 장편 [7인의 집행관]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다음 도약을 보여주는 일종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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