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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녀사냥

2008.04.07 00:0704.07

한순간, 소년은 자신이  그의 신호탄을 장전시켜 놓았더라면 그가  저렇게 갈기갈기 찢겨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호리호리했던 그 몸뚱아리는 형체도 없이 찌그러져 버려서 구멍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린 생쥐처럼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소년의 입술에는 어제 그가 건네주었던 주스의 달콤함이 조금 남아있었다. 소년은 문득 그 사나이는 죽은게 아니라 단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니! 피해!!"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쾅, 하는 충격음도 들렸다.
대개는 그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까지 찾아와 정신없이 없어진 신호탄 발사기를 찾고 있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 '따라와!' 라며 내심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을 해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운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가끔씩 소년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때가 두려웠다. 언제나처럼 '저녁시간이다!' 라며 활기차게 들려오던 그런 목소리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사라져버릴 작정이라면 아예 기억할 수 없는 곳에 있다가 잊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따분한 나무판자 비석 ㅡ높은 관직이 아니라면 대개는 죽은 전사를 그렇게 묻었다 ㅡ 앞에 서서 울먹이며 사라져간 이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 따윈 죽어도 하고싶지 않았다. 게다가 비석 안에 시체가 없는 경우는 더욱 우울했다. 물론 그것은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ㅡ 콰콰쾅!!

소년의 바로 옆에서 벽돌이 튀어올랐다. 마치 어릴적 가지고 놀던 개구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년은 앞을 바라보며 거리를 재었다.
손에는 기다란 신호탄 발사기를 자신의 수호천사인 마냥 꼭 움켜쥐고 있었다.

오늘 타격대에게 주어진 오픈 포인트는 세곳이었다. 열 다섯명이 투입되었다. 방금 전까지, 신호탄이 올라가는 것을 일고여덟번 정도 봤지만 ㅡ 사실, 다섯번까지 세고서 부터는 셈하기를 그만두었다. ㅡ 제대로 들어간 것은 하나라도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몇몇은 적을 향해 위협용, 혹은 호신용 아니라면 단말마의 비명 대신으로 써버린 탄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년은 최대한 한개 이상의 오픈 포인트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탄약을 세어보았다. 두개였다. 이래서야 혼자서 세개의 게이트를 모두 열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윗대가리들. 그들도 전투에 투입된 타격대의 평균 생존시간이 채 1분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딴에는 군비를 줄일 목적으로 탄약을 지급한 것이겠지만, 자신 혼자 남았을지도 모르는 지금, 소년은 부디 온전히 남은 신호탄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더욱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아직 타격대원들이 몇 남아있고, 그들이 임무를 완수해서 이 지옥같은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렇게 빌어도 좋을까 하고 소년은 고민했다. 언젠가 형으로부터 '신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라면 결국 신은 너를 배신할 거야.' 라는 말을 들었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또다시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돌멩이 들이 날아올랐다. 최대한 머리를 숙이고 달리면서 소년은 자신의 머리위로 쏟아지는 흙먼지들이 죽은대원들의 뼛가루 같다고 생각했다. 여느때처럼 소년의 작은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며 '괜찮아, 괜찮을꺼야.' 라고 달래는 것만 같았다.

-쾅!

소년의 코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소년은 지금껏 올라왔던 돌무더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높은 곳이면 조금 더 잘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에 찢겨 훨씬 초췌한 꼴이 되어 버렸음에도 소년은 자기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았다. 녀석들은 하늘을 날아다닌다구.
그렇지만 결국은 자책뿐일 그 행동은 마치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스스로 암시를 거는 행동과도 비슷했다.

아닌게 아니라 소년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을 한차례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빌어먹을. 난 안죽어. 고함을 크게 지르지 않은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순간 소년의 머리위로 휙 지나가던 녀석들은 뭔가 움직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자리에서 산산조각 내어버릴 기세였던 것이다.

소년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누르기 시작했다. 마녀가 머리위를 지나갈때 뜬 머리카락이 있으면 잡혀버린다는 구닥다리 미신을 광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소년이 지금보다 더욱 어린 소년일때 장난꾸러기 로키나 슈마때문에 골탕을 여러번 먹었기 때문도 있다.

이제 마녀들은 타격대원들이 전부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며, 마치 언젠가 그림책에서 보았던 에어쇼(도대체 마법이 아닌 어떤 방법으로 인간이 하늘을 날았는지는 모르겠지만)와 비슷하게 서너명이 짝을 지어서 하늘을 순회하고 있었다.


'심판은 하늘로부터!'

큰 소리로 마녀들에게 들리랄 듯이 외치고 싶은 충동을 소년은 간신히 참아냈다.
그것은 타격 대원들이 게이트를 열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가장 처음 게이트를 발견했던 허수아비(소년이 속한 단체는 그들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가 사용했던 말이라던데,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이 말 역시 어딘가의 고서에서 발견한 문구겠지 하며 대충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은 어쩌면 그 문구가 성경에 적혀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폭발소리는 멎었지만 소년에겐 마녀들이 득실거리는 평원을 지나 원래의 땅굴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손에 꼭 쥔 수호신이 점점 녹아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두운 동굴에서 심지가 반쯤 남은 양초를 들고 홀로 길을 잃은 느낌과 비슷했다.
소년은 돌무더미 사이에 몸을 잔뜩 붙인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땀은 비오듯이 쏟아졌다. 한참을 달려도 막힐 것 하나 없어보이는 평원은 그래서인지 태양빛 조차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은 빛을 잃은지 오래인데, 저 빌어먹을 태양은 아직까지 팔팔하시군' 레이컨 아저씨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이번 타격대의 리더를 맡았었는데, 아마도 지금쯤은 먼지가 되었으리라 하고 지레 짐작할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점차 소년의 정신은 혼미해져 갔다.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몸에 공포심과 뜨거운 평원의 햇빛이 겹치면서 가벼운 일사병 증세를 일으킨 탓이었다. 소년에게는 점차 눈앞의 돌무덤이 세개가 아니라 여섯개로 보이기 시작했다.(아냐,아냐, 아무리 봐도 세개인걸. 소년은 한손으로 양 볼을 차례차례 때렸다.) 시야가 흐려지면 목숨도 거기까지라고 누가 그러했던가.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격언과도 비슷한 것들이 살아남는데 도움은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뒤, 돌무더기 끝에 위태롭게 놓여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깡 하고 충격음을 낼때 쯔음, 소년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소리니! 소리니!"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소년도 알고 있었다.(사실, 꿈속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심판은 하늘로부터!!"

비운하게도 소년은 꿈속에서까지 마녀들과 전투를 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꿈속의 그는 따분하고 초라한 신호탄 발사기 대신에 허수아비의 뛰어난 암살자들이 사용하는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의 동료들은 무선으로 박격포를 어디에다 사용하면 좋을지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발 아래서 살려달라고 비는 마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는 무전기에 대고 짤막하게 말했다.

"위로."

퐁퐁퐁 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하늘높이 쏘아진 박격포탄은 멍청하게도 그들 바로 위를 지나고 있던 마녀들에게 파편을 뒤집어 씌웠다. 소년은 탄창을 갈아끼운채 하늘위로 날아다니는 마녀 한마리를 쏘아 넘어뜨렸다. 이마에 정통으로 총을 맞은 마녀는 거꾸로 선 채로 추락했다. 그것은 마치 줄이 끊어진 곡예사의 마지막 비행같았다.

"소리니! 여기다!"

레이컨 아저씨가 소리치고 있었다. 아저씨는 손에 스코프가 달린 기다란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그가 가르킨 돌무더기 아래에는 몇마리의 마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소년은 수류탄 하나를 꺼내어 아래로 던졌다.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후두둑 하며 돌 부스러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 조용해졌다. 누구 말마따나 '남태평양으로 날아가버린 듯한 침묵' 이었다.

흡족하게 웃고있던 소년의 옆으로 작은 폭발음이 들렸다. 돌멩이가 조금 튀어 소년의 군화를 살짝 건드린다.

"저녀석들 뭐로 공격하는 거죠?"

소년이 묻자 레이컨 아저씨는 그 와중에도 마녀 한마리를 쏘아 넘기며(이녀석은 목을 뚫리는 바람에 추락할때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자못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폭죽이야! 동네 문구점에서 몇개 주워왔겠지."

그렇군요!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하늘을 보았다. 총알을 피해 마녀들은 더욱더 높이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너무 높이 올라간 녀석들은 햇빛때문에 빗자루가 타버려 그대로 추락하고 만다. 녀석들은 심장이 없어서 떨어지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역시 심판은 오는군."

레이컨 아저씨가 금요일날 케잌굽는 냄새를 맡은 꼬마아이 처럼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돌무더기 아래에서는 소년의 동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이제껏 보지 못한 한 여자아이가 그들 틈에 끼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보이면서도 무척이나 성숙해 보이는, 마치 하늘을 날아다닐 것만 같은 아이였다. 게다가 예쁘기 까지 했다.(사실 레이컨 아저씨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땅에 무언가를 열심히 묻고 있었다.

"뭘 묻니?"

소년이 물었다. 소녀는 그저 발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그거. 가지고 싶지?"

"그거라니."

"네 총."

소녀는 한손으로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한쪽 눈을 질끈 감은채 총구 속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곧 별로 재미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소년의 어깨에서 총을 홱 채어갔다.

"뭐하려는 거야!"

소년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그 금발의 소녀는 살짝 미소지으며 아래를 가르켰다. 손가락 아래에는 하늘색 원피스가 가지런했다. 그리고 그 아래는 노랑색 구두도 있었다.(이 신발은 어울리지 않아 이 소녀에게는 차라리 회색 구두나, 뭐 그런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작은 구덩이가 있었다.

소녀는 소총을 거기에다 넣고 묻었다. 어느새 총은 거의 다 묻어지고, 총구 끝만 어렴풋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에 삐죽이 꽂힌 파라솔 같기도 했다.

소년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소녀는 그에게로 허리를 굽히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가지고 싶지? 그러면 나를 도와서 뇌를 찾아보도록 해. 거기에 너의 지혜가 담겨 있을껄?"

    소녀는 소년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번 말은 소녀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소년의 귀에다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아 가는 것 같았다.

   소녀는 소년의 귀에다 대고 그렇게 나지막히 속삭였다.





...소년은 꿈을 깨었다.
그는 손바닥을 올려 이마를 한번 훔쳤다. 비린내 나는 땀이 묻어나왔다. 여전히 땅은 조용했다. 하늘에서만 승리를 가진자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심판은 하늘로부터!'

소년은 계속해서 그 말을 되뇌였다.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었다. 좀 전엔 성경에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소년은 성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제와서 그것이 무엇이든. 심판에 대해서 철썩같이 믿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면, 더이상의 '하늘을 섬기라' 따위의 문구는 필요가 없어보였다.

어느새 손에서 미끄러져서 땅위에 떨어져 있는 신호탄 발사기를 주워든 소년은 두손으로 그것을 꼭 잡고 신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녀들은 아직 자기들의 축제에 미쳐있었다. 한 삼십명쯤 되어보이는 마녀들은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서로 가까이 모이기도 하면서(소년은 꿈속에서 보았던 퐁퐁퐁 하고 불꽃을 만드는 그 기계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고민했다.)춤을 추고 있었다.

첫번째 게이트가 소년과 가까운 곳이 있었다. 어쩌면 저 게이트를 열고, 그 근처에 있는 돌무덤에 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결심을 한 소년은 재빨리 달렸다. 몇시간을 꼼짝없이 서 있는 바람에 온 몸이 뻐근했지만, 달리면서 그 기분은 점차 잊었다.
다행히 발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게이트 아래에 도착한 소년은 하늘을 향해 주저없이 신호탄을 발사했다.

폭죽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환한 빛이 구름을 뚫고 지나간다. 그 광경을 본 마녀들이 기겁을 하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당황했다. 여기가 평지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이제 마녀들은 소년을 정확히 바라보며 최고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어쩔줄 모르며 우왕자왕하던 소년은 손목까지 오들오들 떠는 바람에 발사기를 한번 떨어뜨릴 뻔 했다.

사방에서 마녀들이 달려오자 소년은 일단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신호탄 나머지 한발을 장전했다. 두번째 게이트는 분명 이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나하면 주위에 신호탄 발사기의 파편들(소년이 본 것만 해도 세개.)이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잘 뛰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하늘에서와 땅에서의 추격전은 의미가 없는 경주였다.
마녀 두명이 소년에게 거의 접근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려고 할때쯤, 소년은 신호탄을 발사했다. 깜짝놀란 마녀들은 빗자루에 제동을 걸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와중에 마녀 한명의 빗자루에 불이 붙었다.(잠시뒤, 쿵 하는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좋아!'

소년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신히 두번째 게이트를 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마녀 하나를 잡았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무더기로 그에게 달려드는 마녀떼들을 보며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 게이트를 두개나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을 보면. 결국 타격대원들은 단 하나의 게이트도 열지 못한채 몰살당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렸던 소년이 두개를 열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높으신 분들에게 큰 칭찬을 받을 수 있겠지만(어쩌면 리더의 자리가 주어질지도 모른다.)소년이 오늘 아침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란 정말 불가능해 보였다.

탄약을 다 쏘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발사기를 버리지 않았다. 왠지 그것을 버리면 희망마저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소년의 죽음은 그의 목덜미에서 약 3미터 가량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울고싶었지만 기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땅에 고개를 박고 우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은 소년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이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땅보다는 차라리 작은 곰인형인 편이 나았다.

휘릭, 소년이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마녀들의 손길이 그의 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마녀들은 다시한번 공중제비를 돌며 소년에게로 낙하한다.

하늘 저편에서부터 날아오는 것 같은 까만 점들. 이제 곧 소년을 덮쳐 형체마저 희미한 뼛가루로 만들어 버릴 무시무시한 악의 화신들.
그런것들을 초점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다 소년은 문득, 그것을 보았다.

...게이트였다. 마녀들이 흡사 푸른 도화지에 점점이 묻은 검은 물감처럼 새까맣게 다가오고 있을때, 그 뒤에서는 찬란한 오색 빛을 내비추고 있는 게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저것만 열면(이번에는 소년도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저것만 연다면, 소년은 승리 할 수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에게는 남은 탄약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사방에는 돌멩이들만 그득하고, 삭막했다.
죽어버린 무덤에 홀로 서 있는 파라솔처럼. 소년의 존재부터가 무의미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잠깐만.'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바라본 소년은 큰 소리로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곳에는 손잡이만 반쯤 부서진 신호탄 발사기가 꽂혀 있던 것이다.
소년의 꿈속에서 금발의 소녀가 그의 총을 묻었던 바로  그자리였다.


"개자식들!"

하늘을 향해 욕설을 내뱉은 소년은 미친듯이 웃으며 신호탄 발사기를 뽑아내었다. 탄약은 한발. 정확히 장전되어 있었다.
소년은 누워있는 상태였지만, 발사기는 반동이 적어서 언제 어디든지 쓸 수 있었다. 그것에 흡족한 나머지 소년은 연신 미소를 지우지 못한다. 그의 입꼬리는 귓가에까지 올라있어서, 그런 웃음을 짓는 사람만 제외하고는 누구나 두려움에 떨. 그런 표정이었다.

소년이 신호탄 발사기를 집어든 장면을 목격한 마녀들은 자신들과, 뒤에있는 게이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개중엔 정말이지 아름다운 마녀도 있어서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뜰때면 그만한 구경거리가 따로없다.)그리고는 손에서 수많은 불덩이들을 쏟아내었다.

빠른속도로 날아오던 마녀들이 날린 불덩이는 한층 더 빨랐다. 그것들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서 눈앞의 목표물이 키 작은 소년이라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차게 달려온다.

소년은 즐거운 듯이 짜릿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그는 죽게 되겠지만(쿡쿡, 소년은 연신 웃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짜릿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덩이들을 바라보며 발사기를 든 손을 치켜올려 하늘을 겨눈다. 죽음이 가까웠지만,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불덩이들의 접근이 소년의 시야를 넘어서 ㅡ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ㅡ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직전 소년은 신호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심판은! 하늘로 부............"


.........

두개의 빛이, 챙 하는 소리를 내며 엇갈렸다.












하늘높이 떠오른 b-25ut형 신호탄은 대기를 뚫고 나가 G-7구역의 세번째 오픈게이트를 정확히 개방했다. 그곳에서 밝은 빛이 솓아오른다. 대기권을 지나고 있던 다기능매체수신위성 『토네이도』가 그 파동을 감지한다. 이내 0.5초만에 위성은 그들의 태양 중심에 있는 다우주굴절시공간게이트에 웜홀 개방 암호를 수신한다. 본 기지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각 기체에게 승인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이었다. 웜홀 게이트 에서는 이 신호를 「비상사태-167」건으로 인식하고 웜홀을 개방한다.

평행세계 제 212번 지구에서 발사된 SOS건은, 그것과는 별개로 독립 42번 지구로 수신된다. 독립 42번 지부에서는 공간 전이의 매개체를 탐색, 현존하는 나라중, 미국 캔자스의 언저리에서 적당한 대상을 찾는다.
그것은 즉시 독립 42번 지구의 다기능매체수신위성 에 의해 웜홀로 시공간 전이된다. (물론 대기권 아래에서는 그에 합당한 형태의 방식으로 공간 전이가 진행된다. ex)사이클론, 윌리윌리)웜홀에서 입자정보로 분해된 그 매개체는 곧바로 평행 212번 지구로 이동된다.

도착한 대상을 웜홀 게이트에서는 『토네이도』로 수신, 다시『토네이도』에서는 대기권 아래로 정보를 쏘아보낸다.
G-7구역에 있는 세개의 오픈게이트의 정 중앙을 목표로 발신된 정보는 대기권을 지나면서 점차 형태를 찾아간다.
비상사태 발생으로부터 정확히 3.76895초 후. 정보의 도달이 확인되었다.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때에 따라 누구에게는 길 수도 있었겠지. 웜홀 게이트 에서는 보고서에 그런 말을 기입해 볼까, 고민중이다.






평원에는 정적이 감돈다. 집 문을 열고 나온 하늘색 원피스의 소녀는 자신의 집 아래에 무엇인가가 깔려있는 것을 눈치챘다.
등위로 가느다랗게 느러뜨린 금발을 살짝 찰랑거리며 그쪽으로 걸어간 소녀가 본 것은 끔찍하게도 집 아래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사람의 다리였다.
거기에 신겨진 회색 장화를 보니(소녀는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릴것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집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아마 옷도 회색일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 이상한 곳이네."

도로시가 말했다.

야키
댓글 2
  • No Profile
    화룡 08.04.07 16:00 댓글 수정 삭제
    처음의 분위기와 마지막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좀 벙 쪘습니다만, 5분 정도 곱씹어보니 그래서 더 재밌었던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카엘류르 08.04.12 00:10 댓글 수정 삭제
    마구 빠져들어서 읽었습니다...중간에 소녀가 등장하면서 회색 구두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 언뜻 도로시가 떠올랐는데, 정말이었군요.(웃음) 신비로우면서도 사실적이고, 즐기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인 것 같군요. 잘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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