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나무

2010.07.02 09:1107.02

클라이드는 제니를 정말 사랑했다. 제니가 죽는 그 순간에도. 제니가 죽은 그 이후로도.

제니는 20년 전에 죽었다. 그 순간은 영원히 클라이드의 머리 속에 박혀버린 것만 같았다.  
원하지 않을 때도, 클라이드는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클라이드는 길에 서서 발코니를 올려다 본다. 발코니에는 두 사람이 쓰러져 있다. 제니, 그리고 제니를 습격한 괴한. 클라이드 손에 쥐어진 총이 방금 뿜어낸 총알을 증명하듯 연기를 흘리고 있다. 정신을 차린 클라이드는 비상계단을 타고 발코니로 올라갔다. 하지만 제니는 괴한에 의해 이미 죽은 후였다. 제니를 겁탈하려던 늙고 추한 남자가 눈 앞에 쓰러져 있었다. 클라이드는 분노에 차서 발길질로 괴한을 제니로부터 떨어뜨린다. 총알이 만든 커다란 상처에서 피가 솟고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괴한을 죽인다해도 이미 죽은 제니를 살려 낼 수는 없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꼭 누가 시킨 듯이 다시 총을 들어 괴한을 쏴버린다. 꼭 커다란 총성이 이 공간을 지워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클라이드는 잠시의 휴식을 마치고 가운을 꺼내입고는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이곳은 거대한 지하실험실. 클라이드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와 어떠한 실험의 결과를 알리는 차분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의 스피커에서 세어 나오고 있었다. 지하지만 지하라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 그곳에서 타임머신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이 연구에 참여한 이유는 당연한 결과였다. 클라이드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니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방법은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클라이드는 연구의 핵심인재였다. 클라이드의 두뇌가 그랬고, 클라이드의 열정이 그랬다. 꼭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마침 오랜 연구가 클라이드의 손에 의해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일까, 타임머신은 완성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역사적인 첫 시험가동일이었다.
클라이드가 연구실에 들어서자 분주히 움직이던 연구원들이 일제히 클라이드에 주목했다. 클라이드는 간단히 눈길을 마주치며 연구실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는 기계가 있었다. 그 기계는 여기저기 전선이 연결되어 묵직한 웅웅 소리를 내며 가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이드의 오른팔 격인 제임스가 다가왔다.
연구소측은 오랫동안 타임머신의 실제 가동실험을 보류해 왔다. 역사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가동여부만 테스트한다는 것이 이번 실험의 요지였지만, 이사회에서는 인류를 건 도박에 싸인을 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 져야 할 테스트날이 결국 다가오게 되었고, 이것이 타임머신인지 아닌지는 오늘의 실험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었다. 결국 이사회는 모든 권한을 연구책임직인 클라이드에게 위임했고, 오늘 클라이드는 부책임자인 제임스와 함께 제한적 가동실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오늘 우린,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모든 준비는 끝났지. 생각해 놓은 데는 없어?

  제임스가 감출 수 없는 흥분과 함께 클라이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차마 사적인 목적을 말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시운전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오리라. 언젠가는 공식적으로 건의를 하여 나의 목적,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 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클라이드는 이러한 생각에, 애써 감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 우선 최대한 조용히 다녀와야겠지.

클라이드는 제임스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클라이드는 제임스와 오랜 연구를 한 친구로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록 클라이드는 자신의 뜻을 말하지 못했지만, 제임스는 여러 번 자신이 타임머신 계획에 참여한 이유를 말하고는 했다. 결국 아닌 척 클라이드는 이야기를 이었다.

- 하지만 인류사에 남을 첫 시운전인만큼 타임머신이란 기기의 과학적 의의와 성능을 홍보할 수 있는 장소여야만 해. 그렇다면 결론이 나지. 오랜 과학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귀납적 해답.

제임스가 기다렸다는 듯 흥분하여 말을 잇는다.

- 창조냐. 진화냐.

클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주자, 제임스는 이내 신이 나서 분주히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타임머신의 계기판에 시간이 입력된다. 기원전 수천만년전. 그곳에 가면 인류의 조상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클라이드와 제임스는 모두의 부러운 시선 속에 기계의 중심부로 들어선다. 빛이 가득하여 더 이상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철저히 훈련받은 연구소의 조수들이 재빨리 절차를 밟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초조해졌다. 클라이드가 외부의 상황이 궁금할 때쯤 그를 둘러싼 빛이 드디어 옅어져 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이미 익숙한 연구소의 내부가 아니었다. 그는 그랜드캐년같은 거대한 황토빛 협곡 위에 서 있었다. 인공적인 것 이라고는 협곡 위의 타임머신 밖에 없었다.

한참을 헤맨 클라이드와 제임스가 유인원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들은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 앞에는 과학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털복숭이 유인원들이 침팬지처럼 불안정한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마주쳤다간 후사를 책임질 수 없었다. 그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자리를 피했다. 약속된 시간이 있었기에 다시 타임머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생각보다 멀리 왔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타임머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땀이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제임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걸어왔다.

- 정말, 정말 어마어마한 광경이었어, 그치?

- 맞아. 이건, 엄청난 발견이야. 약속한, 시간이 됐어. 이제 돌아가도록, 하자구.

그 순간 타임머신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빛의 한 가운데에 휩싸였다. 클라이드는 뿌듯한 마음으로 사방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빛이 다시 공간으로 옅어져 갈 때 그는 연구소로 돌아와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기기를 조작하던 조수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그와 똑같은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순간, 연구소의 어느 구석에서 박수소리가 퍼져 나왔다. 곧 연구소는 축제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소리로 가득찼다.
그러나 클라이드가 흥분된 마음으로 타임머신에서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육중한 기계가 회전할 때 내는 공명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꼭 수천미터의 상공이나 저 지평선 너머의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공명소리가 점차 커지자 연구소 전체가 공명에 맞춰 살짝 진동했고, 그들은 그들 각자 뿐만이 아니라 공간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음을 상호간에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구소의 풍경이 살짝 바뀌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옷이 달랐고, 연구소의 기기들이 달랐고, 연구소의 인테리어가 달랐다. 모든 것이 더욱 세련되어졌고, 더욱 날렵해졌다. 클라이드는 멈칫하다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컴퓨터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그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컴퓨터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은 연구소가 변한 것 이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휘황찬란한 유리건물들이 초고층이라는 단어 이상의 단어가 필요할 정도로 뻗어 있었다. 도로들은 실타래처럼 그 건물들 사이를 이리저리로 잇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실내에서만 생활하는 것 같았다. 태양이 비치는 그 도시의 풍경은 너무나 인공적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그가 '미래'라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뒤늦게 타임머신에서 내려온 제임스가 옆에서 그 광경을 같이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클라이드를 쳐다보던 제임스는 갑자기 식은 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광적으로 온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결국 확신이 선 듯, 풀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클라이드와 눈을 마주쳤다. 클라이드를 향해 울먹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내 지포라이터가, 지포라이터가 없어......
  
...
  
- 정리해보자. 너는 첫 시험여행에서 라이터를 잃어버리고 왔어. 맞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그 라이터는 인류가 수 천만년 앞서 불을 발견하도록 도왔지.

제임스가 고개를 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 인류는 결국 수 천만년 앞서 진화했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수 천만년 후의 미래야......

제임스는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제임스를 조용히 지켜보던 클라이드는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너의 심정을 알아. 너무 자책하지마. 시운전의 장소로는 경솔한 선택이었어. 하지만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겠지. 너도 예상 못했고 나도 예상 못한 결과일 뿐이야. 정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라이터를 주워오면 돼. 문제될 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지마.

제임스가 위안 받고 있음을 확인한 클라이드는 조수들을 향해 말했다.

- 그보다 앞서 우리는, 과학자야. 지금의 사태를 연구해야 돼.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지금 이 사태를 분석해야 돼. 사태가 발생한 후 우린 몇 가지 유의미한 데이터를 모았지. 첫 번째로 다행인 것은, 인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거야. 모든 것은 더욱 풍족해지고 아름다워졌어. 그러니 너가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야. 언젠가 타임머신은 이런 방향으로 이용될지도 몰라.

클라이드는 다시 한번 고개 숙인 제임스의 눈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많은 듯 했다. 클라이드는 다시 시선을 조수들에게 돌렸다.

-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바깥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거야. 그들은 마치 예전부터 지금의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살고 있어. 우리는 온전히 인류의 진보를 수 천만년 앞당겼어. 아무도 지금이 과거의 시점이라는 것을 몰라.

클라이드는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 자신의 논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조수들의 눈을 천천히 하나씩 바라 보았다.

-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건, 여기있는 우리들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거지. 우리와 우리를 포함해서 이사회 멤버...... 개인적으로 이사회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모르기를 바랬지만 아무튼, 우리 연구소 직원 모두는 지금 우리가 역사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타임머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만이, 타임머신을 통해 바뀐 역사도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지.

클라이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클라이드는 학생들을 데려다 놓고 강의를 하는 교수와 같은 자신감으로 차있었다.

- 좋아. 인류의 역사는 바뀌었어.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지 않아? 라이터라는 작은 효과가 나비효과처럼 그 후로 있을 인류의 역사를 모두 바꾸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여기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거야. 바깥에 경적이 울리는 바람에 우리의 아버지들이 삽입을 1초만 늦추었어도 우리 대신 다른 정자들이 수정에 성공하여 여기에 서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말이지...... 이건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확률과 불확실성에 기반한 우리의 논리체계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돼. 난 이 부분에서 다시 신을 찾고 싶어 지더군. 꼭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아. 5억 중에 한 정자가 확률적으로 수정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시점 이 장소에 반드시 존재하여야만 해서 태어난 것같은 느낌. 인류의 시간관념이 수 천만년 당겨지든, 미루어지든 우리는 우주의 절대공간에서 항상 동일한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 꼭 체스판의 디자인이 바뀌어도 체스말의 구성은 바뀌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전율이 일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클라이드는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 치고는 괜찮은 비유였다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 그래서 난 이 가설을 검증하기로 했어. 앞으로 타임머신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간관념의 본질을 연구해 놓아야 해. 이미 이사회에서는 이번 사태의 상세한 보고를 요구하고 있어. 보고에서 조금이라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겠지. 다행히 외부에서는 우리의 실험을 아무도, 정말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니까 이사회에서도 아직까지는 실제적 개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사회에서도 자칫 잘못되면 상황을 원상복구 시키면 된다는 마음으로 느긋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그렇게 하기 전에, 수 천만년 후의 최신기기들을 좀 더 갖고 놀고 싶은지도 모르지.

클라이드는 미소지었다.

- 그렇다면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과거의 자료를 검색하면 모든게 나오겠지. 하지만 실제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 없어? 누구 바뀐 역사에서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한 사람 없냐 이 말이지.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당황한 조수들은 목을 뒤로 빼어 서로들을 황급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서로의 생각이 점차 일치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구동성으로 클라이드에게 회답했다.

- 아돌프 히틀러

...

바람에 은은히 풀잎이 흔들린다. 언덕 뒤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광활한 노을을 펼치고 있었다. 언덕 앞으로는 1930년대 전통적인 독일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럽전통양식의 낮은 건물들이 아늑하게 평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베틀린이었다.
순간, 언덕 위의 풀잎들이 이리저리로 흔들린다. 허공은 곧 새하얀 깊이 없는 빛으로 채워지고 그 빛이 사라지자 그 곳엔 타임머신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일부로 인적이 드문 언덕을 골랐다. 설마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없으리라. 그들은 재빨리 타임머신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제임스를 놓아두고, 평소에 영특하다고 생각했던 여조수 샤론과 역시 못지 않게 똑똑한 남자 조수 마이크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그들이 타임머신에서 발을 떼자 이미 들어 익숙한, 공간 전체에 퍼져 나가는 낮은 웅~ 웅~ 소리가 지평선 너머로 퍼져 나갔다. 소리의 진행과 함께 타임머신을 중심으로 공간의 모습이 물결이 퍼지듯 바뀌어져 나간다. 그들은 언덕 위에 있기에 더욱 자세히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장관이었다. 낮은 유럽전통양식의 건물들은 어느새 모던한 건축물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가져온 천으로 타임머신을 위장한 후, 빠른 걸음으로 도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히틀러를 어떻게 찾지?

- 분명 이 도시에도 인명기록부가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전화번호부처럼!

- 아, 여기 컴퓨터가 있다!

- 한번 아돌프 히틀러를 찾아보자.

그들의 마음은 긴박했다. 검색화면을 이리저리 찾아보던 영특한 조수 마이크는 이내 아돌프 히틀러의 인적사항을 찾아냈다.

- 여기 있다! 전화번호도 있어!

- 좋아, 전화를 걸어 찾아 가자구.

처음에는 히틀러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하지만 샤론이 영리하게 신분도 속여가며 설득한 끝에 히틀러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에 있었다. 그들이 그곳을 찾아갔을 때도 히틀러는 여전히 취해 있었다. 그곳은 단골술집이었는지 술집주인이 저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클라이드가 고개를 돌려 자리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찾던 사람을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특유의 가리마와 콧수염을 보고서.
하지만 히틀러의 몰골은 달랐다. 초라했다. 절제되어 있지 못했고, 심정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다리는 손님이 이곳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혼잣말로, 그러나 큰 소리로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다.

- 이 망할 놈의 유틸레이인들은 모두 싹 쓸어 버려야 해! 이 놈의 유틸레이인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어. 내게 힘만 있었으면! 내게 조금의 힘이라도 있었으면!

그때, 술집 한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한 무리의 덩치들이 조용히 자리를 일어서더니 히틀러를 향해 다가갔다. 아무래도 그들은 히틀러가 말하는 그, 유틸레이인들 같았다. 얼굴에 이미 핏기가 싹 가셔져 있었으니까.

- 어이, 형씨. 내게 힘만 있었으면 뭐? 어?

곧 술집에서는 수십번의 발길질이 이어졌고 바닥에 쓰러져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을 확인한 한 무리의 덩치들은 카운터에 지폐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술집을 나가버렸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가설을 확인한 클라이드는 더 이상 직접 히틀러를 만날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조용히 술집을 나왔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동시대의 여러 유명인사들이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또한 그들이 존재했던 시공간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타임머신으로 돌아와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언덕이 빛으로 가득찼을 때 그들의 두 번째 여행도 완벽히 끝난 것만 같았다. 그들의 빛을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 까지는......

...

이젠 클라이드조차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해 졌다. 그들이 연구소로 발을 내딛는 순간, 더 이상 들으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기분나쁜 공명소리가 다시 공간 밖으로 울려퍼져 갔다. 클라이드는 반사적으로 뛰쳐나와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모든게 바뀌었다. 그의 눈 앞에는 영화와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려했던 고층유리건물들은 찢겨진 잔해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도로들도 폭격으로 군데군데가 뜯겨나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휘어져 있었다. 시커먼 매연덩어리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매연에 가려 햇빛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태는 곧 밝혀졌다. 인류는 진화를 넘어서서 퇴보로 향하고 있었다. 지나친 경쟁은 자원을 낭비하고 서로가 서로의 부를 빼앗기 위해 애쓰는 전쟁터로 바뀌어 있었다. 무엇이 이런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클라이드는 1930년대로의 여행이라면 설령 무엇인가를 또 바꾸고 온다해도 현재에 큰 차이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도 곧 밝혀졌다. 그들이 자료를 얻기 위해 과거문헌을 뒤져보았을 때, 경악할 만한 사실을 마주치리라는 것을 각오했어야 했다. 타임머신은 더 이상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과거문헌은, 이미 1970년대에 타임머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독일에서......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타임머신은 이미 수많은 국가의 전략무기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들은 타임머신 전쟁이 시작된지 그것도 무려 수 십년이 지난 이후의 세계에 당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두 번째 시간여행을 갔을 때 누군가가 잠깐이나마 그들의 타임머신을 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고도로 발달해버린 인류의 지성이, 타임머신이라는 발상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흐름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타임머신을 개발한 독일은, 처음에는 그들도 클라이드처럼 조심스럽게 제한적으로 시험가동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곧 역사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아무리 조심히 다녀오려해도 아주 작은 변화의 씨앗이 큰 변화를 가져오고는 했다.
그리고 똑같은 작용이 일어났다. 한 명이라도 타임머신을 목격했다고 치면, 그것은 연쇄의 연쇄작용을 거쳐 또 다른 이른 시기의 타임머신 개발로 이어졌다. 타임머신의 개발은 점차 앞당겨졌고, 수많은 나라로 퍼졌다. 이제 그들은 경쟁적으로 타임머신을 이용했고, 더 이상의 조심성조차 없어졌다. 이로 인해 역사 상의, 그리고 거의 모든 국가 상의 사람들이 타임머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들이 타임머신의 존재를 알게 되자 이들의 눈에도 타임머신으로 인한 변화가 실시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의 나라가 타임머신전쟁에서 유리한 전세를 유지하면 곧이어 그 나라의 번영으로 이어졌으나 불리한 전세로 역전되면 그들은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부를 실감해야 했다. 그들은 대놓고 타임머신전쟁을 응원하게 되었으며,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타임머신군대가 상대의 타임머신군대를 모두 제압하여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바랬다. 또 다시 세상이 변해버릴 것이라는 불안 없이 살 수 있기를 그들은 바랬다. 이미 클라이드가 존재하는 현재라는 순간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평화를 바라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애석하게도 클라이드에게 이 모든 상황은 이미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이제 때가 왔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이미 외부에서도 타임머신의 존재를 모두 자각했으리라. 이사회에 온갖 압박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임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회는 클라이드의 도착소식을 듣고 곧바로 클라이드를 소환했다. 클라이드는 기나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빨리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과거로 다시 돌아갈 명분과 권한을 획득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곧바로 타임머신 시험가동을 막으리라. 애초에 처음의 가동부터. 그리고 다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클라이드도 역사를 바꾸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즉, 사소한 실수도 현재에 이르면 큰 봉변이 될 수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타임머신은 폐지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논리의 결과도 이사회에 보고해야 하리라.
다행인 것은 이사회도 클라이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사회는 이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논의 도중 클라이드는 아주 중요한 의견의 차이를 눈치채고 말았다. 클라이드의 계속된 추궁에 결국 이사회는 사실을 말해주고 말았다. 그들은 과거로 암살요원을 보냄으로써 이 전쟁을 확실히 끝마치고자 했다. 아마도 정치권의 강력한 압박이 있었는 것이 뻔하였다. 암살될 사람은 뻔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사람, 바로 그였다.
넋을 놓고 있는 클라이드를 향해 경호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호원이 클라이드를 붙잡으려는 순간, 클라이드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팔꿈치를 날리고는 그의 옆구리에서 권총을 빼어들었다. 나머지 한 명의 경호원은 클라이드가 빼든 권총에 반사적으로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클라이드는 모두를 한번씩 노려보더니 이사회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는 연구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한발 늦게 클라이드의 뒤를 쫓았다. 클라이드는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그의 앞엔 놀란 표정의 샤론이 있었다.

- 지금 방금 보낸 사람이 간 곳으로 나를 보내줘! 시간이 없어, 빨리!

경호원들이 문을 마구 두드려대자, 샤론을 비롯한 연구실의 사람들은 그제서야 뭔가 급박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이 클라이드를 감쌌다. 경호원들이 잠금장치를 총으로 부수고 들이닥쳤다. 상황을 파악하고는 타임머신을 향해 총을 쏜다. 하지만 이미 클라이드는 사라진 후였다.

클라이드는 빛이 사라지며 펼쳐진 풍경이 낯익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곳은 그가 사는 동네였고,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에게 익숙한 어렸을 적 평범한 주택가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타임머신에 벗어나는 순간, 그 평범한 주택가의 풍경은 순식간에 번화가로 바뀌었다가 폐허로 바뀌기도 하고, 미래도시로 바뀌었다가 다시 슬럼가로 변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결국 풍경은 마지막으로 미래같기도 하지만 퇴보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분위기의 전혀 모를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길을 찾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방금 암살요원은 이곳에 도착했다. 그가 자신을 발견해 죽이기 전에 먼저 그를 죽여야 했다. 클라이드는 히틀러를 찾았을 때의 요령으로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인적사항을 수집했다.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잇는지를 파악한 후 그곳의 지도를 펼쳤다.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 클라이드는 자신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클라이드는 몇 번 헤맬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이 골목 네 번째 집이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클라이드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달렸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없었다. 이 집의 3층이 자신의 집이었다. 그는 3층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더욱 다급히 문을 두드리다가 총을 꺼내 문고리를 겨눴다. 그러나 다행히 총을 쏘기 전에 문이 열렸다. 낯선 사람이었다. 클라이드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런, 네 번째 집이 아니라 다섯 번째 집이었다! 그는 황급히 맞은 편 건물방향으로 난 창문으로 향했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미 암살요원이 그의 침실창문을 통해 그의 집으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 암살요원을 쏘았다. 암살요원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왠지 옆 건물과의 거리가 멀어보이지 않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옆 건물을 향해 허공을 뛰었다. 낙법으로 착지를 해서 아직 숨결이 남아있는 암살요원의 어깨를 확 잡아 젖히며 그의 얼굴에 주먹을 겨눴다.
  
그 순간 클라이드는 낯선 옷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평선 저너머로부터 기분 나쁜 우웅거림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점차 자신이 알던 과거의 그곳으로. 그리고 그가 잡고있는 사람의 모습도 너무나 낯익은 차림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제니. 그렇게 다시 보고 싶었던 제니는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어쩔 줄 몰라 제니를 부둥켜 안으려던 클라이드는 순간, 수도 없이 봐왔던 장면의 시점이 바뀌어 있음을 깨닫고 원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내려다 본다. 분노에 찬 젊은 자신의 눈빛. 변명할 틈도 없이 클라이드는 총에 맞아 쓰러진다. 비상계단의 발판 아래로 무거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신을 노려보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 그가 보인다. 어째야 할까...... 클라이드는 이것이 마지막이라 직감하고 남은 힘을 다하여 꼭 다시 보고 싶었던 제니의 손을 잡아보기로 한다. 바로 눈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죽어있는 제니. 하지만 마지막 소원도 잠시, 그의 손이 제니에 닿기 전에 발코니에 다다른 젊은 그가 그를 발길질로 제니에게서 걷어낸다. 다시 한번 젊은 그와 눈이 마주친 그는 그의 슬픈 운명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눈빛을 보내지만 돌아오는 회답은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그 조차도 곧 젊은 그가 꺼내든 총구에 가리고, 총구가 마지막 화염을 뿜었다.
  



Written by 'Story Will.B Wri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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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졸작을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 쓸얘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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