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Da Capo

2010.06.01 12:2106.01

시작은 항상 이제부터다. 다산을 상징하는 비너스의 아랫배 같은 하얀 구름들이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내 던져 놓은 것처럼, 맛깔스럽게 하늘에 떠 있다. 새파란 하늘이 슬슬 자신이 걸치고 있는 뭉글뭉글한 장신구들을 떼어낼 준비를 한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백치 처녀 같은 맑은 하늘이 버거운 듯 모자와 선글라스, 양산 등으로 무장을 한 사람들이 땀을 닦으며, 그제서야 하늘을 힐끔 쳐다본다. 인간들이 같은 것을 보기 위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곳. 천년 전 인류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에 대한 기원과 축복이었고, 천 년이 지난 지금의 인류에게는 무구한 시간이 흘러간 길다란 길 복판에 있는 거대한 광장 같은 곳.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드나들고, 그리고 기도한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고 있던 사람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정해진 표정이 그려진 목각인형 같다. 제마다 각각의 표정을 가진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표정이란, 대개는 한 배에서 나온 형제처럼 닮아있다.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세월을 견뎌 온 그들을 보고 환성을 지르는 얼굴. 명성보다는 대단치 않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 뜨거운 볕에 지친 얼굴. 무언가에 압도당한 듯한 얼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어제도, 일주일 전에도, 일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이 광경에는 별로 변함이 없다.
개켜진 옷가지처럼 납작해진 구름들이 서서히 퇴장을 준비하는 태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넓게 퍼진다. 파랗던 하늘이 나이를 먹어가는 노인의 마음처럼 노래지고, 붉어지고, 바래지다가, 빛을 잃는다. 매직아워MAGIC HOUR가 끝나면 그들의 시간이 찾아온다.

순식간에 인파가 빠져나가고 바다처럼 어둠과 정적이 광활하게 깔려도, 그들은 참을성 있게 자신들의 시간을 기다린다. 어둠과 고요가 푹 삭은 과일에서 나는 시큼한 향을 풍길 때, 그제서야 그들은 입을 연다.
아주 오래 전 지금보다 믿음이 더욱 그럴 듯 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창조한 그들은 신이자 예술품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랜 세월의 무상함이, 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간절한 믿음이, 황금으로 치장되었던 왕조의 흥망성쇠가, 자연의 무심함이, 현대인들의 호기심, 경외, 실망, 무관심이, 곰보자국처럼 얽혀 있다.

그들은 거대하고 수많은 얼굴들이며, 동시에 하나이다. 인간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신이며, 신이지만 사람과 세월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다. 웅대한 석상의 사면에 달린 그들의 얼굴들은 하나 같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들의 커다란 눈과 귀는 거칠고 딱딱하지만, 세상 끝까지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두툼한 입술은 열려 있는 듯 닫혀 있고, 닫혀 있는 듯 열려 있다.
몰랑몰랑한 달빛이 교교한 밤이 되면 하나였던 그들은 여럿이 된다. 그리고 낮 동안의 뜨거운 열기를 몰아내기 위해 입을 연다. 그들만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깊은 밤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잠에서 깨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소리는 어둠의 소리이자, 달의 소리, 별빛이 내는 소리처럼 결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밤이 찾아오면, 그들만의 놀이가 시작된다. 시장터 아낙들이 나누는 수다처럼, 그것은 세상을 바꾸어 놓지도, 누군가에게 의미를 실어다 주지조차 못하지만, 거짓은 없다. 그들이 천 년을 버티어올 수 있었던 힘, 그것은 그들에게 선사되는 밤이며 거짓 없는 이야기이다. 간혹 몇 억 혹은 몇 십 광년 전에 사라진 별의 먼지 같은 잔해가 그들의 머리 위에 가만히 내려 앉는다. 빛의 속도로 가도 끝이 없이 아득한 곳에 있었던 별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티끌이 그들에게 내려앉으면, 인간들이 들끓는 세상에 살고 있던 어느 한 생명은 사라지고 또 다른 생명이 보태어진다. 그들은 우주의 순환을 느끼고, 광활한 우주 속, 사소한 자신들이 자리 잡고 있음에 겸허해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오늘은 서쪽을 바라보는, 늘 노을 빛을 먼저 받아 홍조를 띠는 그가 먼저 말을 한다.
-저어, 멀리, 우리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이가 지금 막 태어났군. 꽤 오랜만인걸. 우리를 느낄 수 있는 아기가 태어난 지가. 요즘 들어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지.
-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의 운명이 여태껏 순탄한 적은 없었지.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사람의 삶은 고달프게 마련이니.
-오늘 여기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 혹시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겠지?
–있건 없건 간에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보면 아주 오래 전에 우리를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생각나 잠시 추억에 잠겨. 구경거리로써가 아닌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대하고, 애원하는 그 눈빛을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들이 침묵을 지킬 때 밤은 농밀한 어둠에 순간, 압축된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잠은 깊어진다.

-아, 오늘 두 손목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젊은이를 보았나? 머리칼과 눈동자가 검은 젊은이 말이야. 머리칼이 이마를 덮어 눈을 반쯤 가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젊은이. 양 팔목을 칼로 긋고 자살시도를 한 모양이야. 그 젊은이는 꽤 오랫동안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지. 나중에는 털썩 주저 앉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 그 흔한 카메라는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 물론 나는 젊은이의 사연을 아네.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젊은이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사랑하는 사람은 젊은이의 눈 앞에서 죽고 만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눈빛에서 젊은이는 원망과 저주를 읽었지. 젊은이를 향한 원망과 저주가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는 자신을 바라보던 애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지.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그를 걷잡을 수 없이 덮치기 시작했고. 대략 그런 사연이야. 인간들의 사연이란 게 대부분 계보를 짤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이지 않나. 하지만 사연을 겪는 마음의 농도, 밀도, 점성의 종류는, 밤하늘 별처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의 수 정도 만큼은 많지. 대체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와서 수많은 질문과 의심을 쏘아대지. 왜 자신에게만 절망적인 일이 생기는지, 정말로 신이란 존재가 있는 것인지, 고통만 있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음의 세계를 선택하는 게 나은 일이 아닌지, 어째서 자기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 건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나. 우리가 그에게 대답을 준다 해도, 그는 들을 수 없고, 그가 들을 수 있다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며, 그가 믿는다 해도,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말이지. 사람들은 우리를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요구를 하고, 화를 내고, 용서를 구하고, 축복을 바라지. 그러나 그 젊은이는 아무 것도 말하거나 바라지 않았어.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했을 뿐이네. 난 우리가 아주 오래 전에 받아왔던 경외와 존경보다는 그 젊은이의 텅 빈 눈길이 더 마음에 와 닿았네. 잠자코 나를 보던 그 젊은이가 나중에는 무얼 했는지 아나?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는 자신의 피 냄새가 희미하게 베인 붕대에 눈물을 닦았지. 그는 그 붕대를 풀더니 내 뺨을 닦더군. 그의 눈물에 젖은 붕대를 가지고 말이야. 마치 눈물을 흘린 이는 자신이 아니라 나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붕대를 풀은 그의 손목은 거친 흉터로 울퉁불퉁했지. 마치 우리의 얼굴 표면처럼. 그러나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밥상처럼 따스했어. 자신의 가난과 결핍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낮은 울타리 같았어. 피가 흐르는 인간들이 부러울 때가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어.

-난 인간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아. 붕대를 감은 젊은이처럼 진심으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우리를 떠나서 편한 호텔방에서 무얼 하고, 무얼 생각할지 누가 아나? 그게 현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커다란 편리이면서도 서글픔이 아닌가. 진심이 지속되기 힘든 세상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가슴 가장 밑 구석에 숨어있다가 어렵싸리 나온 진심이라는 것도, 유혹과 안락함의 네온사인에 맞닥뜨리면 단비에 지상으로 나온 지렁이가 갑작스레 나온 태양 볕에 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베베 꼬며 죽듯이 꺼지고 말지. 뜨거운 낮에 느꼈던 삶의 절실함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다리 마사지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고, 피부가 그을린 여자를 사서 즐기고 있을 지도 모르지. 인간들은 모두 물렁해. 돌처럼 단단하고 지속적인 부분이 단 한 곳도 없어. 연약한 피부, 물컹한 오장육부, 가느다란 혈관, 부러지기 쉬운 뼈로라도 보호받지 않으면 으깨지기 십상인 뇌, 얼마 안 되는 세월에도 흐물흐물해지는 근육. 그토록 불안한 육체를 가진 생물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통찰력을 가질 수는 없지
-인간들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세상의 진리를 알았다면 우리는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걸세. 무얼 바랄 필요도, 축복을 빌 필요도, 빛나는 순간을 기록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다만 생명을 포기하려 했던 그 젊은이가 무생물로 간주되는 우리에게 우주의 박동 같은 것을 느꼈다면, 인간에 대한 기대는 그것으로 된 거 아닌가.
그 말에 그들은 모두 동의의 침묵을 악수처럼 주고받는다.

-오늘도 그 여자가 왔나? 이방인들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선명히 보여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 말일세
호수를 바라보는 지점에 있는 그가 묻는다.
-꽤 오랜만에 왔지. 아마 이 주일 만에 왔을 걸세. 오늘은 순해빠진 동양 여자에게 찬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자신들의 가난을 하소연하더니, 나중에는 커다란 카메라를 든 서양 남자에게 붙더군.
-몸을 팔기 위해 이 곳에 오는 건 아니지 않나. 그저 이방인들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운이 좋으면 그들과 함께 저녁을 하고,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랑을 바라는 것뿐이고. 오늘 시내로 같이 간 서양 남자를 보자니 인상이 험악하기까지 했지만 말이지. 몹쓸 짓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사람들은 가난을 푸념하는 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침묵으로 가난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작 관대하면서도 말이야. 그렇다고 침묵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 한 조각 더 주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입 다물고 있으면, 그들의 가난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모른 체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이방인들은 관광객들이 묵는 쾌적한 호텔 문에서 불과 한 두 발짝 떨어진 흙 바닥에서 곤히 밤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낮에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증명해주는 우리들을 보지. 그 현지 여자도 서서히 이방인들의 시선으로 자신들을 보게 된 거야. 그뿐이야. 시선이 세상을 결정하는 법이니까.
-여하튼 간에 몸을 팔건 그렇지 않건, 그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 오래 전 신전을 지키는 사제들도 종교의 신성함을 빌미로 공공연히 매춘을 했다네. 의미가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르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지 않나. 또한 찰나적인 기쁨이나 미美에 매달리는 것도 인간들이고. 자주 오는 무리들 중 하나인 젊은 여성들의 아름다움만큼 덧없는 것도 없지만, 또 그만큼 매혹적이긴 한 것처럼.
-꽤나 요란했지. 오늘 몰려온 아가씨들 말이야. 대리석 같이 하얀 피부에, 반짝거리는 머리칼하며, 덥석 베어 물고 싶은 입술, 무지개처럼 환한 허벅지.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건 사실이지. 또 다른 신전 벽에 있는 우리의 비너스만큼 아름답지 않나. 적어도 시간과 상상력을 도려낸 아름다움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그 처녀들은 우리를 보면서 종일 재잘거리더군. 우리와 얼굴이 닮은 추녀로 유명했던 고교 동창, 얼마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남자와의 잠자리, 다른 친구에 관한 가십 거리, 요즘 유행하는 가방의 가격 등.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우리에게 없는 어깨마다 움찔거릴 판이었지.
-그들의 이야기에 담긴 순진성을 붕대를 감고 있던 젊은이의 상처와는 결코 비교하지 말세. 스스로가 충만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슷하니까.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아가씨들의 기도 또한 간절했으니까. 찰나적인 것에 생명을 걸만큼 부질없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생각나는 걸.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오후,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아이만큼 현재를 무방비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오늘 여길 온 사람 중에는 없었을 걸세. 더위에 붉게 익은 통통한 볼만큼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아이 말일세. 이글거리는 태양이 아이의 아이스크림을 핥아버리기 전에 내가 덥석 한 입 베어 물었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아이의 울음소리에는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혹, 원망이 가득했지. 그것도 모르고 어른들은 아이의 짧은 견대팔에 뭍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기만 했어.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온전하게 이해 받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외롭지만, 실상 그들은 남에게 이해를 받는 일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다 자린 성인들은 말이지. 이해가 아니라, 인정을 받고 부러움을 사고 싶은 욕망이 더 크기 때문이지. 이해란, 잠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하는 일인데, 인간은 그런 것 따위는, 사실은 바라지 않아. 타인보다 자신이 더 부유하고 힘이 세기를 바랄 뿐이지. 하물며 여기를 온 길이 자기들 생에 마지막 여행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예감하던 노부부를 보게. 그들도 몇 십 년을 함께 부부로 살았지만 한 순간도 서로를 이해해 본 적이 없을 걸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꼭 이해해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상대방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면, 사랑할 필요 조차 없겠지.

-그 사람은 어떤가. 여장남자 말일세.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칼라가 목을 덮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덩치가 큰 여자를 보았나. 노모와 단 둘이 살고 있는데, 집에서는 여느 특별할 것 없는 사십 대 독신남 같은 행동을 하지. 칠십이 넘은 노모는 아직도 아들의 혼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찬거리들을 만들지. 아침에 출근을 한다고 노모에게 인사를 하고, 여장남자가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지하철 역 근처 허름한 건물의 화장실이야. 퀴퀴한 냄새에 어둑하고 좁은 화장실 안에서 원피스에 팔을 껴 넣을 때마다 벽에 팔꿈치를 부딪쳐 가며 옷을 갈아 입고, 굵은 컬이 들어 간 장발의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해. 그네의 육중한 체중을 버겁게 버티고 있는 하이힐처럼 그의 생활은 위태해 보이지만, 그 사람은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지. 이렇게라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오래 전에 결론을 내렸으니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꾸며야 한다는 독한 아이러니를 받아들인 것이지. 그이가 자신은 여성이라고 말하자마자 남자인 주제에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변태라고 쏘아붙이며 차갑게 등을 돌렸던 친구들과 동료들을 보며 노모에게는 알릴 수 없음을 깨달았지.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 위로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사랑을 나누지. 노모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시간, 그들만의 시간과 장소에서 말이야. 마치 우리들처럼. 그런데도 자네는 아직도 인간들이 자신들이 이해를 받는 일 따위에는 정말은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은 그렇다는 것이 나의 대답일세. 어차피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두 개의 상영관에서 같은 시각에 돌아가는 다른 영화 두 편을 동시에 보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니까. 기껏해야 나머지 한 편은 엔딩 크레딧이나 볼 수 있을 뿐이지. 그런 어려운 일을 누가 감히 시도하려 하겠나. 자신이 품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와 의미도 다 읽어내지 못하는 판에 말일세.
-우리들이 계속해서 밀림에 묻힌 채 인간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면 밤이 와도 우리들의 대화는 지금보다 짧았을 걸세. 빈틈없고, 복수심 강한 전갈 같은 자연만이 우리들의 화제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의 발길과 소음에 시달리진 않았겠지. 폭우가 쏟아지면 왕이 목욕하던 탕으로 가 머리도 적실 수 있었을 테고. 아름다운 여신들의 노랫가락을 듣고, 고혹적인 춤사위도 볼 수 있었을 테고. 코끼리 등에 탄 채 낮은 산등성이에 올라가 바라보던 일몰도 그립지 않나.

그들 중 하나가 약하게 휘파람을 분다. 동시에 후두둑, 굵은 빗줄기가 떨어진다.
-어이, 이리로 와서 비라도 피하는 게 어떤가. 애지중지 품 안에 넣고 간간히 무언가 적어넣고 있는 손바닥만한 종이가 금새 비에 젖어버릴 테니.

  그제서야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그들의 턱 아래로 몸을 옹송그려 들어간다. 빗줄기는 무겁게 떨어져, 땅에 부딪히고 바닥에 가볍게 튕겨 올라 내 종아리에 따갑게 박힌다. 그새 습기에 젖어 눅진해진 종이가 손바닥에 들러붙는다. 수 킬로 떨어져 있는 호숫물을 하늘이 빨아들여 머금고 있다가 쏴아, 그들에게 내뿜어내는데도, 그들은 변함없이 견고하다. 금새 그들이 버티고 있는 이 곳도 작은 연못이 된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기를 원한다. 지금 같은 며칠 간의 휴가를 제외하면 매일 피곤한 몸을 일으켜 메스꺼운 매연을 들이마시며 출근을 하는 이른 아침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한다. 세상이 움직이니 나도 움직여야 한다는 결연한 의무감이 아니라, 다달이 나오는 갖가지 청구서에 찍힌 금액과 카드값을 지불하기 위해 바쁘게 회사 일을 끝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느껴지는 피로감은 그 뒤에 붙는 이야기이다.

그 노곤함 밑에, 다 녹지 않은 설탕 물처럼 깔려 있는 침전물은 창작욕이었다고, 감히 나는 그들에게 말을 한다. 소독저로 아무리 저어도 사라지지 않는 침전물을 녹이기에는 가족들의 염려와 잔소리에도, 지인들과의 흥겨운 시간도, 떠올리면 아득해지는 옛 추억도, 연말에 받는 두둑한 보너스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잠 자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낡은 도시의 골목길을 비적비적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지만 라뷔린토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미노타우르스가 내 머릿속에 기어들어와 단어들과 문장들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나기도 전에 집어 삼키기라도 하듯, 좀처럼 미끈하고 긴 몸통을 꿈틀대는 뱀 같은 글을, 나는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문장들이 결코 부화하지 못했던 절망에 지칠 만큼 지쳤다고. 당신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당신들에게 영감을 받고 싶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이 두툼한 입술을 열고 그들만의 대화에 열중한다.

손가락 길이만한 도마뱀이 내가 앉아 있는 그들의 코 밑에 수염처럼 붙어 있다. 잘려나간 자리에 새로 돋아 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몸통 색깔보다 연한 색의 꼬리가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싱그럽다. 나는 도마뱀 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별 수 없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생명. 생명. 살아 있는 것, 에 대해 인간만큼 잔인한 생명도 없을 걸세. 축복을 저주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보다, 호흡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을지도. 그들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보게나. 결국 강자의 목적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나. 생명을 던질 만큼 가치가 있는 명분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들조차, 결국은 탐욕자들의 장기판 위에 놓인 말에 불과하지. 그렇기에 내장이 두둑하게 들어 있는 생선의 배 조차 가르지 못하는 겁 많고 연약한 인간들을 보면 사랑스럽기조차 하다네
  나는 우주의 비밀이 봉인되어 있을 것 같은, 그의 인중을 가로 질러 붙어 있는 도마뱀을 무의식 중에 잡는다. 난 그저, 꼬리를 만지면 어떤 감촉이 느껴질까 궁금했을 뿐이었다. 도마뱀의 꼬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연약하다. 나에게 잡혀 공중에 매달려 버둥거리던 도마뱀은 결국 자신의 꼬리를 끊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내 손 안에 남은 도마뱀 꼬리는 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바늘에 찔려 낡아빠진 골무 같이 금새 추레해진다. 그들은 잠자코 내 손 안을 본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의 몸뚱이처럼 그들의 대화가 급작스레 끝이 난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하나가 된 그들의 입이 닫혀 있다. 사위에 움직이는 것은, 하나 없다.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미풍 조차 불지 않는 밤이다. 비가 그쳐서인지 어느 새 밤공기의 결이 달라져 있다. 그들의 시간이 주술에 풀린 듯, 나의 시간이 주술에 걸린 듯,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더욱 짙어져 있다.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진다. 고요히 고여 있던 어둠을 조심성 없이 흐트러뜨려 버리는 몸짓이다.

살결이 까무잡잡한 현지인 여자가 나에게, 아니 그들에게 다가온다. 아마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서양 남자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 여자이리라. 그들의 턱 밑에 여전히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나를, 여자는 보지 못한다.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자 여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여자의 눈 밑은 찢어져 있었고, 입술은 부어 있었고, 찢긴 치마 자락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허벅지와 종아리는 여기저기 긁혀 있거나 멍 투성이였다. 여자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 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들 중 하나의 턱 밑으로, 나처럼 들어가 앉는다. 여자는 피가 맺힌 무릎을 끌어 안고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서 한숨 소리나 흐느낌이 흘러나오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여 보지만, 여전히 내 손 안에 놓여 있는 도마뱀 꼬리처럼, 밤은 막 태어나자마자 생이 끊긴 듯 괴기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다 잠시 후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온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양 손목에 깨끗한 붕대를 감은 젊은이가 그들 중 하나를 마주 보고 서 있다. 비를 맞고 걸어 온 듯 젊은이의 머리칼이 젖어 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기 위해 손을 올리자 눈처럼 하얀 붕대가 부드러운 달빛에 비쳐 더욱 흰 빛을 발한다. 붕대의 흰 빛을 보자, 젊은이가 겨울만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아 보인다. 붕대에 숨겨진 살갗의 틈으로 흘러나온 피의 양만큼, 젊은이는 추워 보인다. 미동 없이 서 있던 젊은이가 천천히 몸을 숙이고 그들 중 하나의 턱 밑으로 역시 들어간다. 젊은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는다.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이들이 차례대로 나타난다. 어두운 밤 속에서도 아찔하게 붉은 빛을 내는 원피스 차림의, 몸피와 목젖이 유난히 큰 여자가 나타나고,
달빛처럼 환한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꼬마가 나타나고,
그들의 대화에는 오르지는 않았지만 낮에 나와 같은 시각, 그들에게로 왔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고,
등이 굽은 뒷모습이 닮은 노부부가 나타나고,
움직일 때마다 딸각딸각 소리를 내는 주먹만한 링 귀걸이를 한 젊은 아가씨가 나타나고,
어느 새 그들의 턱 밑에는 목젖처럼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다.
나는 무릎에 턱을 괸 채 가만히 그들, 모두를 바라본다. 마법이 걸린 부적이라도 되는 마냥 도마뱀 꼬리를 손에 꼭 쥔 채이다. 백 년의 세월도 영겁으로 느껴지는 인간이 천 년의 시간을 덮어 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은 올리브 나무에서 기름을 얻어내듯 농축된 어둠을, 정제된 침묵으로 공유할 때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손 안에 도마뱀 꼬리가 흔적 없이 사라져 있다. 온통 시퍼런 멍이 든 무릎 같은 새벽 하늘이 보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서서히 노래지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에서 오직 세상에 나 혼자인 듯한 외로움이 거대한 석상처럼 나를 짓눌렀다.

언제든지 온수가 쏟아지고, 폭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고, 방금 다린 와이셔츠 같이 단정한 침대 시트가 각이 잡혀 있고, 수화기만 들면 룸 서비스로 배를 채울 수 있는, 호텔방에 나는 누워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몸을 일으켜 호텔방 창문 커튼을 연다.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들이 흥분한 기색으로 커다란 관광 버스에서 내린다. 저 사람들도 볼 것이다. 내가 보았던 것을. 물론 나에게 보였던 똑 같은 것을 그들이 볼 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밤, 어둠과 고요가 푹 삭은 과일에서 나는 시큼한 향을 풍길 때, 웅대한 석상의 사면에 달린 그들의 얼굴들 밑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슬슬 체크아웃 시간이다. 숙박비를 결제한 카드에 사인을 하는 손은 도마뱀 꼬리를 잡았던 그 손이다. 능숙하게 펜을 움직이는 손은 도마뱀의 체온만큼 차갑다.
밖을 나서자 뜨거운 햇살이 몸을 죄다 꿰뚫어버릴 듯이 날카롭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제멋대로 타이핑을 한다.

시작은 항상 이제부터다. 다산을 상징하는 옛 비너스 조각상의 아랫배 같은 하얀 구름들이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내 던져 놓은 것처럼, 맛깔스럽게 하늘에 떠 있다. 새파란 하늘이 슬슬 자신이 걸치고 있는 뭉글뭉글한 장신구들을 떼어낼 준비를 한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백치 처녀 같은 맑은 하늘이 버거운 듯 모자와 선글라스, 양산 등으로 무장을 한 사람들이 땀을 닦으며, 그제서야 하늘을 힐끔 쳐다본다. 목각인형 같은 인간들이 같은 것을 보기 위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곳. 천년 전 인류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에 대한 기원과 축복이었고, 천 년이 지난 지금의 인류에게는 무구한 시간이 흘러간 길다란 길 복판에 있는 거대한 광장 같은 곳.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드나들고, 그리고 기도한다.  

D.C

* Da Capo의 준말. 처음부터라는 뜻.
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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