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즉흥환상

2010.05.13 07:1205.13

        아침바람이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와 분홍빛 이불보를 쓰다듬었고, 물결치던 이불보의 레이스는 소녀의 뺨을 간질였다. 소녀는 잠긴 목으로 한두 차례 신음하더니 안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가늘게 뜨인 눈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아차렸지만 소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과히 귀찮아서이리라.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눈꺼풀이 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시야를 좁혀왔다.
        ‘어차피 오늘은 광장에 나가야 할 일도 없고, 귀하신 손님도 오지 않으니까 더 자도 문제 없어.’
        편한 이유로 자신을 안심시키고 소녀는 다시 망각의 저편으로 향했다. 그 순간, 단정한 옷을 입은 시종이 들어와 침실을 이리저리 살폈다. 규칙적인 시종의 발소리에 소녀의 잠은 달아나기 직전이었다. 소녀는 이마를 찡그리고 잠에 집중했다.
        “샤프란 아가씨, 주무셔요?”
        시종은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어깨를 흔들며 그녀가 깨어나기를 바랐지만 샤프란은 의식을 잡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내 시종은 허리를 펴고 소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프란은 잠에 관해서는 철저한 사람이다. 시종은 짧은 한숨과 함께 이불보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시종은 소녀가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가볍게 목례했다. 그녀 나름의 만족을 느끼고 나가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어머!”
        다른 시종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표정으로 각자의 입술에 둘째 손가락을 붙여 보였다. 말 없는 경고를 보낸 시종들은 주인이 잠든 침대 쪽을 힐끗 거리고 안도했다. 다행히 샤프란은 아직 잠들어있었다.
        “프리페?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침실에 들어오려던 시종이 프리페에게 말했다.
        “나야 아가씨를 깨워드리려고……. 에일, 너야말로 어째서 할당된 방이 아닌 아가씨 방에 들어오려던 건데?”
        에일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나는 아가씨께 들려드릴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아가씨께서 주무시고 계시니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에게 들려주어야겠지!”
        에일과 프리페는 숨죽여 깔깔거렸다. 소리 없이 어수선한 두 시종이 조용히 침실 안쪽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가장 먼 구석을 골라 쭈그려 앉았다. 방구석까지 가는 도중에 두 시종이 샤프란을 힐끔거린 횟수는 오른손가락보다 많았고, 목적지에 다다른 순간 프리페와 에일은 안심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프리페가 부산스럽게 물었다.
        “뭔데, 뭔데? 뭔데!”
        “목소리 낮춰. 아가씨께서 일어나시겠다. 하기야 워낙 엄청난 이야기이긴 하지.”
        “알았으니까 말해줘. 세상엔 들여서는 안 될 것이 세가지가 있어. 낯선 사람, 잘못된 지식, 그리고 뜸이야. 그 중에 뜸들이는 게 가장 나빠, 알잖아?”
        “그래, 알았어, 재촉하긴.”
        에일은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자신과 같은 처지로 만들기 위해 곧장 프리페의 무릎을 떠밀었다. 놀란 프리페가 만들어낸 소음은 순간적이었을 뿐, 잠든 샤프란을 필사적으로 가리키던 에일 덕분에 바로 사그라들었다. 에일은 손을 양 무릎에 하나씩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몇 년 된 이야기래. 풍문으로 들은 소식이지만 강 건너 불구경은 아니야. 강 건너처럼 가까운 곳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반 바퀴 휙 돌아 반대쪽 이야기니까.”
        아는 속담이 나오자 프리페는 눈을 빛내며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속담의 불구경이라는 단어도 프리페의 흥미를 돋워주었다.
에일은 침을 삼키더니 이어 말했다.
        “머나먼 어느 나라에…….”



        머나먼 어느 나라에, 진부한 시작이지만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잖아, 용이 한 마리 살았어. 아, 용 만나본 적 없지? 나도 그래, 흔한 생물은 아니니까.
지금 네 머리엔 우뚝 솟은 뿔로 이리저리 치받고 다니고, 이따금씩 콧구멍에서 불을 뿜는 흉포한 생물이 떠오르나 본데, 전혀 아니야. 그런 생각은 용에게 큰 실례가 될 수 있어.
        용이란 그 자체로 정말 고귀해. 세상 어느 생물에게 감히 ‘높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어. 그러나 용은 가능하지. 용은 높아, 아래에는 없는 생물이야. 고고한 그 생물의 지식은 오래 전부터 한참을 쌓여와서 인간의 지식은 아이들의 모래장난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부리는 마법은 춤추는 요정보다도 아름다우며, 그들의 위엄은 부동의 산조차 비켜줄 만치 웅장했지.
용 비늘의 색깔도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그 나라에는 회색 비늘을 가진 용 ‘메타’가 살고 있었어. 몇 년 전 어느 날 깊은 밤, 메타는 자신의 마력을 쏟아 스스로 말하고 기억하는 검을 만들어냈지. 마법검은 예로부터 용들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자 할 때 쓰였어. 인간들의 일기장과 비슷하게 말이야.
저주 받은 메타의 삶을 기록할 마법검은 날카롭게 빛났어.
마법검이 본 주인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 용의 눈에서 물이 떨어졌지. 메타가 보인 얼굴은 눈물 서린 모습이었어. 인간 마법사들이 그들의 이기심으로 그토록 얻고 싶어하는 용의 눈물. 그 투명한 액체는 고요히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 곳엔 서러움도 억울함도 없었지. 다만 용이 입을 열었을 뿐.
“검이여, 내 저주를 같이 풀어가겠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마법검은 분위기상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고개가 없는 걸 어쩌겠어, 방정맞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 밖에.
“그래. 그러지 뭐.”
그날 밤의 대화는 그걸로 마무리 지어졌지. 메타는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마법검을 올려놓고는 방을 나갔어. 마법검은 잠들기 전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고 그 풍경을 그대로 흡수하려고 애썼어.
푸른빛이 감도는 네모 반듯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나 은은한 촛불 빛이 꿰뚫는 크리스털 의자, 규칙적으로 쌓아 올려진 벽과 그 중간의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 달빛 따위를 말이야. 응, 동화 속에 항상 그려지는 성의 모습을 생각하면 꼭 들어맞을 거야. 하지만 동화 속 성과는 달리 바닥엔 용의 눈물자국이 아로새겨져 있었지. 그래서 마법검은 눈물 보이는 주인을 떠올리며 애매한 기분으로 잠들었지.
그날도 늦는 일 없이 새벽녘이 찾아와 구름찌꺼기 하나 없는 텅 빈 하늘을 내보였어. 회색용 메타는 지금까지의 망설임을 떨치고 인간의 형태로 변신했지. 그래, 마법은 본래 용의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은 대단한 마법이야. 그의 입장을 고려해보라고. 자신보다 저급한 생물로 변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겠어? 하물며 자신이 받은 저주에 의해 원치 않는데도 변신해야 하니 메타는 비늘 사이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 인간으로의 변신은 메타의 마력보다는 수치심을 자극했어. 그래서 회색 눈동자를 가진 흑발의 인간은 거울에 비춰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비늘도 발톱도 없는 매끈한 손을 바라보았지.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결국 느낀 점을 입 밖에 내놓았어.
“역겹군.”
용은 지을 수 없었던 표정. 인간인 메타가 찡그리면서 뱉은 한 마디는 마법검을 이해시키고도 남았어. 예를 갖춰 주인에게 대뜸 한 마디 붙여줬지.
“잘나신 마법으로 박하사탕은 못 만드나?”
벌거벗은 몸으로 성문을 나가려던 찰나, 메타는 자신의 팔에서 작은 생채기를 발견했어. 인간이라면 ‘어디서 긁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메타가 떠올린 물음은 ‘어째서 긁혔을까?’였지. 매끄럽고 강하던 비늘대신 붙어있는 피부는 너무도 여렸기에 감추고 덮을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즉각 마법을 부려 비늘형태의 철옷을 입었어. 허리에는 검을 꽂을 가죽고리가 대롱거리고, 옷에 불편함을 느낀 메타는 정신이 아롱거리고.
산중에는 들짐승과 날짐승이 먹고 먹히며 살아가고 죽어가지만, 메타는 그들에겐 관심이 없었어. 자신이 변한 모습과 같은,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버린 생물과 같은, 바로 인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산하던 메타는 이내 산을 가로지르던 상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
하늘이 맑고 푸른 그날.
인간들에게 밟히고 밟혀 길이 되어버린 흙 위에 끈적하고 빨간 액체가 팔방에 스며들었어. 붉은 길에서 주먹만한 붉은 덩어리를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던 메타는 끝내 눈물을 떨구며 하늘을 바라보았지. 푸르롭게 트여 막히지 않은 하늘은 대지를 걷는 자로 하여금 자유에 대한 열등감을 주기에 충분하거든.
그렇게 스무 여러 명의 심장을 먹었어. 심장의 주인들은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모두 공평한 죽음을 맞았지.
칼을 꺼내 들어 저항한 인간, 목을 잘라 심장을 먹고.
목숨이 너무도 아까워 애원하던 인간, 뼈를 부수어 심장을 먹고.
욕지거리를 토하며 분노한 인간, 사지를 끊어 심장을 먹고.
새 생명을 뱃속에 품은 인간, 배를 갈라 심장을 먹고.
새 생명이었던 작은 인간, 메타는 심란한 표정으로 검을 꽂아 넣고 작은 인간을 빨갛게 젖어버린 양손으로 들어올렸어. 몸집이 너무 작아서 심장을 꺼내기 어려웠으니까. 엉켜오는 혈관들을 드러내고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메타는 엄지 손가락만한 심장을 먹을 수 있었지.
마지막 고깃덩어리가 쾌하지 않은 여운을 남기며 목구멍을 타고 넘었고, 메타는 서둘러 성으로 가 입을 씻어내며 생각했어. 이 짓거리를 수백 번도 더 반복해야 하다니. 입안을 헹구어내며 흐릿한 핏물을 뱉어내는 그에게 마법검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었어.
“인간의 심장을 왜 먹지?”
자기 마음대로 먹어놓고 수 십 번 헛구역질을 하고, 또 한참을 서서 물로 게워내는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지. 메타는 다시 용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 침묵을 고수했어.
“응? 도대체 왜? 어째서? 이유가 뭔데?”
메타는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도대체 왜, 어째서, 마법검에 입을 달아줄 생각을 못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입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틀어막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라는 감정은 정말로 쓸데 없지. 왜냐고 묻지는 마, 이미 알면서 다른 사람 생각은 어떨지 떠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용은 현명한 존재로써 이미 지나간 상황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답하기를 택했어.
“1000개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
“왜냐고 했다?”
“저주를 풀어야 하니까.”
“왜냐고.”
“…….”
온몸의 비늘들은 그 색깔만큼이나 차분히 가라앉아있었지. 회색을 떠올리면 어떤 심상이 떠올라? 까망과 하양 사이,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슬픈 색은 아니야? 오도가도 못하는, 그 사이에 억눌려있는.
메타는 꺼내면 깨어질 듯 조심스럽게 말했어.
“단 한번만이라도 하얀 날개를 저어 백공(百空)을 누리고 싶기에.”
회색 비늘은 깊은 땅의 어둠에도 속하지 못하고 넓은 하늘의 환함에도 속하지 못하는 메타 자신의 상징이었지. 그 언젠가 태어나던 날을 머릿속에 띄우며 메타는 마법검에게 저주를 소개했어. 그런 의아한 눈으로 보지마, 용은 태어날 때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무 것도 잊지 않아.
때는 아직 새끼용이었던 메타가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와 (용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용의 어미는 새끼가 눈을 뜨는 순간 떠나버리지.)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던 시절이었어. 그렇지, 갓 태어난 용은 날개가 없을 뿐 어른 용과 다를 바가 없어, 불 뿜는 입이며, 위엄 서린 눈이며 마법을 부리는 마력까지 지니고 태어나. 그렇게 용은 어깨 너머로 날개가 돋아날 때까지는 땅에 꼬리를 끌며 살아가지.
물론 새끼용도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 불을 토하고 꼬리를 휘둘러 무찌를 능력은 있어.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말이야, 메타가 처음으로 불을 토하고 꼬리를 휘두른 상대가 인간 세상에서 높이 받들어 모셔지던 늙은이였다는 거야. 맞아, 현자니 대마법사니 하던 사람이었지. 그 늙은이는 인생 말년에 용 한번 잡아보겠다고 몇 시간 등산 끝에 메타와 마주치더니 다짜고짜 위협적인 마법을 부려 공격했어.
시릴 정도로 눈부신 번개가 품은 얼음의 창은 새끼용의 회색 꼬리 끝을 잘라냈고, 마법사의 눈에선 명예에 대한 욕망이 부글부글 증식했지. 용 사냥꾼의 칭호를 얻는다면 선대 마법사들의 위용과 나란히 할 수 있거든.
        불과 얼음이 못된 노래를 부르고 번개와 바람이 그 사이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메타는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었어. 하지만 마법사는 소중한 용 사냥꾼 칭호를 그냥 보내줄 수 없었지. 들어는 봤어? 공간 절단이라는 마법은 인간 마법사가 만들어낸 거래. 다른 생물들은 소중한 터전을 잘라낼 엄두를 못 내니까. 그렇게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메타의 도망길을 잘라 그 사이에 검은 균열을 만들어 막아버렸어. 등 뒤로 벽이 솟아나자 메타는 앞 발톱으로 긁어 쪼개려 했지만 그 검은 벽은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걸 어째,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 마법사는 여유만만하게 몇 마디 읊조리더니 메타 앞쪽에 불의 벽을 세웠어. 메타는 꼼짝없이 갇혀버린 거지.
태어나자마자 죽을 위기?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갇혀버렸을 뿐, 메타는 아무런 지장도 느끼지 않고 대기를 찌르는 화염 벽 너머를 무심히 쳐다보았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인간이라는 생물을.
        정말 어리석고 미숙한 생물이군. 메타는 그렇게 생각했어. 왜냐하면 마법사는 바닥에 떨어진 꼬리조각을 주우려 무방비 상태로 허리를 숙였거든.
        어떤 교훈을 붙일 수 있을까? ‘과한 욕심은 자신을 망친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면 안 된다’, ‘할 일은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한다’ 등등이 있겠지만, 그냥 ‘용에 꼬리에 한눈을 팔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라고 붙이자.
        그래, 메타는 두꺼운 불의 벽을 커튼 걷듯이 양 발톱으로 벌린 후 쏜살같이 뛰쳐나가 인간의 허리를 물어버렸던 거지. 어른용보다 입이 작은 새끼용은 한 입에 두 동강 내진 못하고 그저 그 입 모양대로 고기를 뜯어버렸어.
        “크아아악!”
        아득 아드득 아득.
        갈비뼈와 척추뼈가 어우러져 기묘한 소리를 냈지. 메타는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씹어서야 마법사의 상체와 하체를 따로 할 수 있었어. 마법사는 고통에 일그러진 눈을 간신히 떠 상대를 바라보았어. 한낱 새끼용 따위에게, 그것도 용의 마법도 아닌 마치 짐승에게 유린당하듯 물어 뜯겨 숨이 끊어질 줄은 몰랐지.         자존심 자존심 자존심, 떠받들린 사람들은 그게 문제라니까. 마법사의 상해버린 자존심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 어차피 죽는다. 순간적으로 생각의 계단을 밟은 대마법사는 다음 계단에서 복수심이라는 약병을 발견했어. 얼른 주워 썩은 자존심에 부어 넣었지.
        아직까지 허리를 물고 있는 새끼용을 향해 마법사의 손가락이 춤을 췄지. 이리로 휙 저리로 휙 움직이던 손가락 끝에서 빛의 선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메타의 등줄기로 스며들었어. 메타는 다른 마력의 침입에 놀라 튕겨내려 했지만 스며든 마력은 마치 늪의 진흙처럼 늘어져 떨어지지 않았지. 마법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어. 패자의 떫으면서도 미련 섞인 미소.
        “인간이…… 되어…… 인간을…… 죽여……1000개의 심장을…… 먹게…….”
        마법사는 힘에 겨운 듯 한 단어를 말하기 위해 한번의 숨을 필요로 했지. 스며든 마력이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자 메타는 오히려 의아했어. 어린 용은 그저 멍하니 인간의 언어를 이해했지. 크게 숨을 들이킨 마법사는 비웃음을 담아 완벽한 문장을 뱉었어.
        “그때까지 자네는 땅을 기는 도마뱀일세…….”
        메타는 입을 떡 벌리고 물고 있던 늙은 인간의 몸을 떨어뜨렸어. 마법사의 상체는 눈을 감은 채 모자란 숨으로 낄낄거렸지. 웃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메타는 앞 발톱으로 자신의 날갯죽지를 더듬거렸어. 마치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한참을 더듬거렸지.
        날개.
        어른 용이 된 메타는 그것을 필요로 했고 마법검과 함께 저주를 풀기 시작했던 거지.
500개째 심장을 먹은 메타는 그날 밤도 입을 헹궈내다가 문득 의문을 느꼈어. 마법사가 어째서 자신과 같은 종족의 생명을 빼앗게 될 저주를 내렸는지에 대해 말이야.
“검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법검은 마침 자신의 몸에 진득하게 엉겨 붙은 피에 대한 불쾌한 생각을 접은 참이었어. 역시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지.
“종족의 보존은 생물고유의 본능이고, 그들의 존재 이유는 그들도 모르지.  존재하는 동안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이유를 덕지덕지 갖다 붙이다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닫고 슬퍼한다. 그것이 생물이지. ……그러나 인간,”
메타는 침대 위로 올라가 꼬리를 베고 엎드렸어. 그리고 묵묵히 크리스털 탁자 위의 마법검을 응시했지.
“인간만큼은 자신의 존재이유가 아닌, 환경의 존재이유를 찾아내려 하지. 그들은 자신의 감정, 필요, 본능을 위해 다른 존재를 위협하면서까지 지독한 이기심을 자랑스레 꺼내고 다녀. 그 마법사가 어째서 자신의 종족을 죽이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널 저주했냐고? 당연한 거야. 쓸데 없지만 버릴 수 없는, 그래 마치 값비싼 보석과 같은, 복수심을 십분 발휘한 게 틀림없어. 같은 종족? 그딴 건 불필요한 수식어일 뿐이지. 인간은 철저히 ‘혼자’다.”
        마법검의 편향된 말에도 메타는 흔들리지 않았어. 분명 500개의 심장을 먹으며 인간을 지켜보았지만 한번도 그렇게 확정 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 그러나 복수심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에 종족의 보존이라는 생물 고유의 본능을 저버린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도 없었어. 왜냐하면 심장을 먹으며 지켜본 인간들은 이따금 다른 자를 위해 희생하고 지키려 했으니까. 물론 매번 실패하긴 했지만.
        메타는 마법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 섞어 말했어.
        “잘 모르겠군. 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건 아니건 그 인간들의 희생은 분명 타인을 위한 것이었지.”
        마법검은 칼날을 떨며 비웃었어.
        “크하핫! 아니, 그들의 희생은 네놈의 날개를 위한 것이었지. 한번 지켜보라고, 인간들이 개인의 충족을 위해 어떤 짓을 낳아 내는지 말이야.”



        한편 왕국에서는 끔찍한 소문이 나돌아 다녔지. 서쪽 산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던 회색용의 성 근처에 가면 미치광이 검사가 사람들의 심장을 뽑아 먹는다고 말이야. 소문이 소문이라 이리저리 크게 자라난 면이 있지만, 그 속에는 신빙성이라는 씨앗이 들어있었지. 서쪽 산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자를 확인하러 들어간 자들조차 돌아오지 않았거든. 상인과 같이 그 길을 자주 지나가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쪽 산은 거리끼는 곳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그렇게 된 결과 실질적으로 피해본 것은 메타였지.
        “오늘도 오지 않는군.”
        1년에 100개의 심장조차 먹기 힘들어진 메타는 그날도 산 중턱에 앉아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심심해지면 가끔씩 검을 휘둘러 땅에 내려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법검은 용의 신경을 긁을만한 욕을 고르기 위해 무던히 애쓰곤 했지. 그때, 욕지거리를 내뱉던 마법검은 반갑게 외쳤지.
        “저기 심장이 걸어오고 있네.”
        메타는 고개를 들어 웃으며 걸어오는 상대를 바라보았어. 귀 옆에서부터 타고 내려와 수북하게 수염을 형성한 털북숭이 얼굴을 따라 내려가면 술 꽤나 마셨을 법한 풍만한 배가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였지. 메타는 눈을 의심하며 몇 초간 감았다가 떴지만 털보는 분명 웃고 있었지. 내리는 눈의 결정 모양까지 볼 수 있는 용의 눈으로 잘못 보았을 리가 없었지. 가벼운 갑옷을 입고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털보는 확실히 웃는 얼굴이었어. 마법검은 진지하게 속삭였지.
        “옮는 거 아니냐?”
        “뭐 말인가?”
        “헤실헤실 웃는 미친 뚱땡이처럼 되는 것 말이야.”
        털보가 가까이 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자, 메타도 전염성에대해 근심스럽게 중얼거리는 마법검을 뽑아 실실 웃는 검사의 머리 가운데에 겨누었지. 하지만 검사는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이 시큰둥하게 말했어.
        “네가 서쪽 산에 사는 겁쟁이 회색용의 성에 고용된 마물 검사군? 회색 도마뱀에게 영혼을 팔아 강해진 대신에 성 근처를 돌며 심장을 먹지 않으면 몸이 녹아내려 죽을 운명이 된 그 검사가 맞느냐고 묻고 있다, 사실인가? 으음…… 그러나 어째서 그리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용에게 영혼을 팔았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모두의 평화를 위해 너를 처단하러 왔도다. 내 이름은……”
        메타는 뱃속 장기들 뒤쪽에 있을 척추를 부술 생각으로 검사의 복부를 향해 마법검을 내찔렀어.
        “우왓!”
        그러나 나불나불 떠들던 검사의 입에서 피를 토하게 하지는 못했지. 검사는 순간적으로 복부를 뒤로 빼 아슬아슬하게 검의 궤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빠졌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어. 엉덩이를 문지르고 일어선 그는 툴툴거리며 고함쳤지.
        “이름까진 들어도 되잖아! 빌어먹을 놈 같으니!”
        마법검은 한껏 나온 배불뚝이의 배가 어떻게 한 순간에 뒤로 빠질 수 있는지 감탄했고, 메타는 다시 한번 풍선처럼 부풀어있는 그의 배를 노리고 들어갔어. 여태까지 죽여온 인간들 중에는 이런 칼부림을 가진 검사는 없었기에 놀라고 말았지, 한번만 찔려도 치명타가 될 공격들이 모두 막히고 말았거든. 털보가 검은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말했어.
        “백전무패 전설의 용병, 내 이름은 에카프 그란체다! 국왕님의 보배로운 은총을 받아 마물을 처단하러 왔도다! 으야압!”
        고함을 지르며 덤벼드는 에카프의 검은 웬만해서는 피하기 힘든 곡선을 그리며 메타를 뒷걸음질치게 했어. 들어오는 시야는 모두 초점을 맞출 수 있어 항상 전체를 볼 수 있는 용의 눈에는 에카프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지. 배불뚝이 검사는 놀랍도록 크고 빈틈없는 움직임을 보여줬어. 심지어 메타 허리부근의 비늘갑옷을 베기까지 했지. 다시 가슴, 목, 배를 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에카프의 흉기를 여유 있게 막은 메타는 냅다 그의 한쪽 손목을 잘라버렸지.
울컥불컥 솟구치는 피가 용의 마법검으로 매끄럽게 잘렸을 절단면을 입체감 있게 보여주었지. 팔을 내려다보며 에카프는 아랫입술을 멍이 들 정도로 깨물며 새어 나오는 악을 참아냈어. 그래, 용맹한 그는 울부짖으며 주저앉는 대신에 차라리 적의 목을 꿰뚫는 편을 택한 거지. 백전무패의 용병도 한쪽 손을 잃은 상황에서 냉철할 수만은 없었나? 여태껏 노린 부위들이 검을 피하기 까다로운 부위였다면, 목은 그렇지 않았지. 메타는 가볍게 목을 기울여 에카프의 공격을 비낀 후에 그의 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를 가로로 베어버렸어. 마무리 지어진 메타의 검을 따라 핏방울이 흩뿌려졌지. 하지만 갑옷도 갑옷이거니와 에카프가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했기에 상처는 깊지 않았어.
에카프가 검을 버리고 남은 손바닥을 펴 들어올렸지.
“자……잠깐만! 이야기 좀 하자고.”
메타는 검에 뭍은 피를 휘둘러 털어내며 말했어.
“할 이야기가 있는가?”
“그, 그래! 망할 놈, 너로 인해 왕국은 서쪽 나라와의 무역이 설사 묻은 똥파리 날갯짓 마냥 더뎌져 버렸지!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명을 앗아가다니! 아무리 용에게 영혼을 팔아버렸다 하더라도 태생은 사람일 터인데 어째서 여기에 자리잡고 해악을 끼치는 게냐?”
“나는 인간이 아니다.”
“뭐?”
알고 있던 내용과 다름에 높은 음색을 띄고 반문했어.
“나는 서쪽 산 꼭대기 성의 주인, 회색 용 메타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것도, 인간을 해치고 심장을 파먹는 것도, 모두 너희 인간 때문이지.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잣대는 네놈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먹는 인간의 심장에 선악의 의미는 없고, 단지 필요가 있을 뿐이지.”
그렇게 말한 메타는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용의 장엄한 모습으로 돌아왔어. 에카프는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백배는 거대한 용의 모습에 다리가 풀려버렸지. 아래로 굽어보는 용의 대가리가 입을 열었을 때, 주저앉은 에카프는 용의 목구멍을 들여다보며 차라리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가버리는 편을 고려하기 시작했지. 산이 움직이듯 뒤돌아 선 메타의 등에는 어울릴만한 한 쌍이 없었어.
“보았는가? 나에겐 날개가 없다. 성장기가 끝난 용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지. 먹어야 할 1000개의 심장은 이제 백수십 개로 줄어들었다. 알고 싶은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제 심장을 내놓아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찌른 마법검은 에카프의 옆구리를 해치고 들어갔어. 파고드는 칼날과 같은 방향으로 쓰러지며 내뱉은 백전무패 용병의 한마디는 메타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지.
“돕겠다.”
“무엇을 말인가.”
“너는…… 쿨럭! 젠장, 피가 많이도 나오는군. 너는 목적만 이루면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지? 요즘 서쪽 산은 인간이 드나들지 않는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겠어? 쿨럭! 하아아… 나에게 묘안이 있다.”
“말하라.”
“인질을 잡게 해주지. 왕의 딸, 공주를 납치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다.”
마법검이 부들부들 떨었어. 메타는 검을 잡은 손을 통해 마법검이 비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인간의 이기심을 또 한번 보게 되자 비웃고 있었던 거야. 물론 발상 자체는 좋았어. 머나먼 옛날, 사악한 용에게 잡힌 공주를 구하러 떠나는 왕자가 있었어요 라고 시작되는 동화처럼 모험가들이 몰려들 테니까. 메타는 검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펴고 마법을 부렸어.
“좋다. 공주를 데려와라.”
푸른 마력이 빙글빙글 휘감더니 이내 에카프의 상처들을 메웠어. 떨어진 손목이 다시 붙지는 않았지만 뿜어져 나오던 피는 언제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냐는 듯이 몸 속을 맴돌았지. 그리고 또 한 번의 마법. 붉은 빛을 띠던 마력은 에카프의 왼쪽 가슴으로 스며들었어.
“보름달이 4번 뜰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네 심장은 멈출 것이다. 가라. 가서 공주를 데리고 와라. 그렇게 한다면 네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부리나케 뛰어내려가는 거구를 본 마법검은 더 크게 낄낄거렸지. 불과 몇 분전까지 용에게 맞서던 용맹한 남자는 이제 뒤뚱거리며 산길을 따라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마법검이 말했어. 여전히 비웃으면서 말이야.
“이것 봐, 정말 혼자인 놈들이라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타인을 팔아먹는 꼴이라니.”
인간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당장의 메타는 얼굴을 의혹으로 채웠지.
“정말 네 말이 맞는 것인가? 정녕 그들의 마음은 자신의 안위로 가득 차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 몇몇이 내 앞에 보였던 희생은 무엇으로 설명하지?”
마법검은 이제 칼날이 떨어져나갈 듯 웃어 젖혔어. 이윽고 진동이 멎은 후에 말했지.
“혼자에서 비롯된 합리화라고 하지. 그거 모르나? 인간들은 ‘겉’을 굉장히 중요시해. 그리고 그 겉을 포장하기 위한 ‘인사’라는 행위가 있지. 그들은 만났을 때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해.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조마조마 하면서도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가식적으로 안녕을 기원하는데, 그걸 또 서로 믿는 체 한단 말이야. ‘겉’은 참 예의 바른 생물이지? 사실 타인에게 관심조차 없는 주제에. 그래, 네가 겪었던 그 일을 예로 들어보자고. 그때 다른 놈들을 지키기 위해 나선 남자를 누군가 말렸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지.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었을 거야. 앞에 나선 남자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도 개죽음 당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니까.”
메타는 비늘대신 자리잡은 강철투성이 손을 이마에 갖다 댔지. 잠시 생각하던 용은 입을 열었어.
“……그렇다면 그 남자의 일방적인 희생은 배려있지 아니한가.”
“잠깐 잠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그때 그 남자는 높으신 기사였다고. 왜 평소 부려먹던 시종들을 시켜 너와 겨루게 하지 않았을까? 바로 ‘겉’때문이지. 그 무식 용감한 작자는 겉을 명예로 두르고 있었다. 자기보다 품격이 떨어지는 우매한 자들 앞에서 도망치는 추태는 못 보이겠다, 이거였다고. 그 놈이 나머지 인간들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의 ‘겉’을 지키기 위해, 결국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거야. 하긴, 희생될 줄 알았겠나.”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모든 모습은 거짓이며 그 속은 자신의 안위가 가장 우선시된다는 말인가. 어찌 그렇지? 내게 보인 타인을 위하는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고? 그렇다면 왜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하지?”
“겉으로 보이기 때문이지. 언제까지나 겉멋든 혼자, 그것이 인간이라니까.”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메타는 고개를 들어 용의 눈으로 에카프를 쫓았지. 하지만 산에 난 길을 따라 뒤뚱거리며 뛰어가던 물체는 이제 보이지 않았어. 메타는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성으로 돌아갔지.
메타는 생각이 많아졌어. 태어나자마자 인간과 엮인 게 원인일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메타는 마법검에게서 인간에 대해 들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느꼈지. 그 감정은…… ‘실망’이었지. 그건 보통의 용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야. 용이 다른 생물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지. 완벽한 생물인 용은 처음부터 다른 생물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으니까.
정교히 쌓인 푸른 벽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내리 들어오는 달빛이 크리스털 탁자에 반사되어 빛을 뿌렸지. 함부로 던져놓지 말라고 짜증내는 마법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메타는 꼬리에 머리를 올려놓고 웅크렸어. 그리고 곰곰이 깊은 사유에 빠져들었지.
기대했고, 그렇기에 실망했다. 무엇에 기대를 걸었던 걸까. 완벽한 존재인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기에 그 거만한 힘을 보고 기대했나? 마치 높은 존재를 끌어내린 아랫것을 동경하는 것처럼, 이제 그들을 올려다 보고 있는 건가.
……아니다.
        그것은 증오였지 기대가 아니었다. 날 수 없음에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증오했던가.
생각에 난 곧은 길을 따라 걷던 메타는 거꾸로 돌아보았어. 그리고 마침내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결론을 내렸지.
        “불완전해졌기에 불완전한 그들에게 기대했다.”
        완전함에 다가가는 자신은 인간의 위태로운 이기심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용의 사고는 다른 생물들에게 무관심하지만 날개를 잃고 불완전해짐으로써 인간과 얽히게 되었고, 그들의 슬픈 자기중심적 개념을 불쌍히 생각했던 것이지.
메타는 변함없이 빛을 내리는 달을 바라보았어. 더 가까운 곳에서 마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 날이 오면 인간에 대한 기대도 털어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려고 애쓰며 메타는 눈을 감았어.



        보름달, 보름달, 보름달 그리고 보름달.
        4번째 가득 찬 달이 떴을 때, 에카프 그란체가 한 손엔 너덜너덜한 옷깃을 쥐고, 다른 한 손엔 공주의 손을 잡은 채로 돌아왔지. 얼굴 이외엔 드러난 부분이 없는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너무도 지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어. 인간의 모습인 메타 앞에서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지.
        “이 암컷이 공주인가.”
        에카프는 용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어.
        “그렇다. 크리모네 14세 왕의 셋째 영애이신, 공주님이 분명하다.”
        메타는 에카프의 왼쪽가슴을 묵묵히 바라보았지. 거짓말이라면 단숨에 터져버렸을 심장을 말이야. 그러나 에카프는 피가 얼기설기 묻은 몸을 똑바로 펴고 메타와 마주하고 있었어. 메타는 공주를 힐끔거리고 다시 에카프에게 말했지.
        “살려주겠다.”
        에카프의 심장에 스며들었던 붉은 마력이 다시 메타의 손으로 날아와 깃들었지. 그 손을 한번 쥐었다 펴자, 용병의 베인 몸을 대신하던 푸른 마력이 그대로 살코기로 변해 붙었어. 에카프는 놀란 기색 없이 담담히 몸뚱이를 더듬거렸지.
        메타가 뒤로 돌아 공주를 일으켜 세웠어. 그렇게 성으로 인질을 옮기려는데 뒤쪽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지. 빠르고 무거운 발소리가.
        에카프가 메타의 뒤를 노리고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어. 그 정도면 용을 상대로 꽤 성공적인 공격이었지. 메타의 등에 긴 생채기를 만들고 그친 기습공격은 공주와 에카프 모두를 절망하게 만들었어. 에카프가 고함쳤지.
        “젠장! 공주님, 실패했습니다! 어서 도망치세요!”
공주가 언제 지쳤냐는 듯 벌떡 일어나 에카프 뒤편으로 달려갔어. 메타는 에카프의 칼날을 쳐내고 한 손을 들어 마법으로 공주를 끌어당겨 성 쪽으로 처박았지.
“꺄악!”
의도대로 공주를 성문 벽에 고정시킨 메타는 살아난 용병을 향해 마법검을 내리쳤지. 그러나 실패가 가져온 좌절에도 백전을 치렀던 용병의 두 눈은 흔들리지 않았어. 떨어지는 칼날을 따라 그대로 공격을 흘려냈지. 오히려 뒤따르는 에카프의 반격에 메타가 서너 걸음 주춤거리며 물러났어. 전에 쳐냈던 검과는 다른 것이, 목숨의 무게가 더해져 칼질 한번 한번이 상대를 부술 듯 중했지.
하지만 대등한 검술 실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체력과 용의 체력은 그릇부터가 다를 수 밖에. 끝내 에카프의 검이 허공을 향해 튕겨져 날아갔어.
목을 겨눈 마법검 위로 각오에 의해 굳게 다물었던 용병의 입이 열렸지.
“망해버렸네. 용의 뒤를 치는 건 처음이라 일격에 쓰러지지 않을 줄은 몰랐거든. 애써 살려주셨는데 어쩌지…… 이렇게 되어버렸군.”
“네가 실패했다고 외친 것은 계략이겠지. 그 계략은 네 목숨을 버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 너는 살기 위해 타인을 바치려 하지 않았던가.”
“방심서린 뒤를 쳐 단숨에 물리치려던 계략은 내 목숨 값보다야 훨씬 비싸지. 왕의 셋째 딸이라고는 하나 귀하신 공주님을 미끼로 썼다고. 물론 네 앞으로 돌아온 이유는 너를 동강내 죽여버리기 위해서였지. 공주를 바치고 나만 살아 돌아가려는 의도가 아니었단 말이다, 빌어먹을 도마뱀새끼.”
메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어.
“그렇다면 너의 행동은 내 입으로 들어갈 심장들을 막기 위함이었는가?”
“당연하지.”
“타인을 위했군?”
“……단지 무역중단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국왕전하가 징징대는 꼴이 뵈기 싫었다.”
인간 고유의 전문적인 용어가나오자 메타는 의미를 떠올리려 순간적으로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었어. 죽음을 앞둔 에카프가 정체를 느낄 만큼 시간이 지나고 용은 말했지.
“국왕전하. 국왕. 왕. 그래, 왕이란 인간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아래의 인간들을 이롭게 하는 존재였지. 그렇다면 너는 결국 내게 심장을 먹힐지도 모르는 불특정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돌아왔군.”
        증오와 놀라움, 그리고 목 앞의 칼날로 인한 공포로 기묘한 표정을 만든 에카프는 뭔가 말하려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었어. 메타가 말을 이었지.
“종족 전체를 위함은 개인을 위하는 것과는 다른 성질이다. 흐음, 그렇다면 너는 다시 살려준다 해도 나를 노릴 테지. 부응해준 것에 감사한다.”
말의 마지막 부분에 갸우뚱한 목은 그대로 치우쳐져 떨어졌어. 에카프의비명은 들을 수 없었고, 고개가 떨어진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지자 공주가 용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질렀지.
“조용히 하라, 인질.”
메타의 손가락이 휙.
그렇게 공주는 입을 다물었지. 원래 용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면 목숨을 잃으니, 마력에 굴복해 입이 붙어버린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지.
메타는 허리를 굽혀 윗부분이 허전한 몸뚱이를 뒤적거려 심장을 꺼냈어. 마법검은 오랜만에 양치질 하겠군 하고 비아냥거렸지만 메타는 한입 베어 물고는 우물거리며 받아 쳤지.
“특별한 맛이군. ‘혼자’가 아닌 인간의 심장이란.”
마법검은 그제서야 메타 역시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어. 지금까지 검이 내뱉던 인간의 정의와는 다른 인간의 심장을 먹고 있음을. 그리고 마법검은 탄생이래 가장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지.
“어쩌라고.”
공주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셈이지. 절대적 공포의 존재로써 생물 위의 생물이라 일컬어 지는 용이 심장을 우적거리고 있었으니 당연하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어. 그렇지만 그게 뜻대로 되나, 마법에 걸린 공주인데.
메타는 몸서리 칠대로 치고 있는 공주를 들어올려 성으로 데려갔지. 그리고 움직임을 둔화하기 위해 다른 옷을 입히려 화려하게 공주를 가리고 있던 드레스를 태워버렸어. 알몸이 된 공주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지.
자신의 몸이 너무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
“……너는 인간이 아닌가?”
둔화 마법이 걸린 옷을 입히려 손을 들어올리다가 멈춰선 메타가 잔인하게 물었지. 대답은 없었어. 여전히 입이 붙은 공주는 눈물만 뚝뚝 흘렸지.
턱선이 갸름하게 고여있어야 할 곳에는 귀가, 두 개의 구멍으로 숨을 들이킬 곳에는 두 눈이, 발그레하게 화장을 물들일 곳에는 빼뚤어진 입이, 그 반대쪽에는 코가 크기가 너무도 다른 두 개의 구멍을 가진 채, 젖가슴은 배꼽근처에 하나, 나머지 하나는 목 가까이, 옆구리와 붙어버린 한쪽 팔은 구분이 안간 채, 공주는 그런 몸인 채, 소리 없이 울며 떨고 있었어.
메타는 손을 쥐었다 펴서 침묵을 풀었지.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 없는 공주를 위해 말을 걸었어.
“대답하라. 인간이 아닌가?”
메타가 용의 모습으로는 잡기 힘들던 미간 사이에 주름을 한껏 구기며 물러섰어. 용의 침실은 매우 넓지만 그만큼 울림도 크지. 엄청난 짜증이 솟구친 마법검이 공주의 울음보다 더 크게 욕짓거리를 내뱉으려 애썼지만 어림도 없었어. 마침내 메타가 다시 침묵 마법을 걸려고 손을 들어올린 순간 공주가 대답했지.
“인간이에요! 흐아아악! 아무도 인간이라 말해주지 않지만 인간이라구요! 인간이 인간이라면 아무도 인간이라 말해주지 않아도 인간이지만, 저는 항상 의식했죠! 괴물이라고 쑥덕거리는 다른 인간들을 등지고! 저는 인간이에요!”
메타는 안심하고 다시 침묵 마법을 걸었지. 그리고 그 기형적인 몸에 맞는 옷을 만들어 씌웠어. 애성이 당장이라도 찢어져 질러질 듯한 삐뚤어진 입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메타는 이를 닦으러 발걸음을 옮겼어.
몇 주가 지나갔지. 이것저것 잡아다 먹여 생명을 유지시켰지만 공주가 인질의 가치를 전혀 못하고 있을 때였어. 여전히 강제적인 침묵은 지켜졌고, 메타는 궁금해졌지. 그래서 마법을 풀어줬어.
“인질이여, 어째서 너를 구하러 오는 자가 아무도 없는가.”
        공주는 쓰디쓴 표정을 지었지만 마법검과 메타 중에 그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지. 물론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몰라, 궁정의 시종들도 공주가 미소를 지을 때면 그 흉측함에 당혹감을 느꼈을 테니까.
        “저에게 공주는 어울리지 않았죠. 잘못된 자리, 신분, 모습. 아바마마께서는 항상 저를 잘못으로 여겼어요. 두 언니들과는 달리, 잘못 생긴 저주받은 아이, 잘못 태어나 어마마마를 돌아가시게 한 아이. 그런 저에게 아바마마께서는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언니들을 대하던 태도와는 달리, 저를 멀리하셨죠. 아무도 저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요? 저는 겉부터 잘못되어있거든요.”
        “겉…….”
        마법검이 말했었지. 인간은 겉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존재라고. 메타는 낮게 한숨을 쉬고 물었어.
        “그렇다면 너는 혼자인가.”
        “혼자에요.”
        메타는 마법검을 흘낏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낮게 중얼거렸어.”
        “아니, 너는 없다.”
        “네?”
        “너는 혼자가 아니라 없는 것이다. 혼자가 되고 싶다면 관계와 관계 사이에 얽매여야 한다. 네 말대로라면 주변의 사람들이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관계 사이에 없는 너는 혼자조차 될 수 없다. 혼자는 너를 구하러 오지 않는 인간들이지.”
        한편 왕국에서는 서쪽 산의 용이 천 개의 심장을 먹기 위해 인간들을 살육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작전과 함께 떠난 능력 있는 용병과 공주는 실패했다는 사실까지 돌고 있었어. 궁내의 높으신 분들은 지적인 토의에 의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지.
        인질의 가치를 못했으니 공주는 죽었을 것이다.
        하루가 급한 무역관계 회복과 달리 용은 오래 살기 때문에 멋모르는 상인을 긴 시간에 걸쳐 여유롭게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숙지하고 도출된 굉장하고 바람직한 결론이 곧 법안을 통과하기 직전이었어.
        빈민가의 늙고 추레한, 그리고 국익과 나머지 국민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잡아들여 제물로 바치자는 안건 말이야.
        국왕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침대를 뒹굴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지.
        


꼭두새벽이었어.
        


달을 감상하며 하늘을 올려보고 대지를 굽어보던 메타는 환의에 휩싸여 울부짖었어. 서쪽 산 어느 곳 하나 빼먹지 않고 용이 내려앉는 듯했지. 믿기지 않아 다시 굽어보고, 다시 울부짖고, 다시 굽어보고, 세어보고, 너무도 기뻐 다시 울부짖었지.
        한 개도 빠짐없이, 심장의 수가 정확했어.
        다 먹어 치우면 분명히 저주는 풀리겠지. 메타는 인간으로 변해 마법검을 뽑아 들고 한아름에 성 아래로 내려갔지. 여전히 마법에 묶인 공주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이야.
        허리를 베고 목을 베고 팔도 자르고 다리도 자르고.
        한 개, 스무 개, 쉰 개, 백 개.
        수십 년간 수련했기에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신에 겨운 메타의 마법검을 비껴나갈 인간은 없었지. 모두 쓰러져 나가고 붉게 흥건한 대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지막 늙은 인간이 서 있었지. 갑옷도 걸치지 않고 검도 들지 않은 혼자는 서서히 마지막 심장이 되어 메타를 향해 걸어왔지.
        그가 가까워 졌을 때, 메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어.
        심장이라면 성 안에도 한 개가 있잖아? 메타는 혼자를 향해 말했지.
        “혼자여, 그대는 내게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장은 성안에 갇힌 암컷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도 좋다.”
        혼자가 물었어.
        “공주가 아직 살아있는가?”
        “그렇다.”
        혼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바로 잡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어. 그리고 목청껏 울었지. 늙은 인간이 겉을 관리하지 않고 그렇게 울어서야 쓰나, 하고 빈정거리는 마법검을 손에 쥔 채로 메타는 혼자의 결정을 기다렸지. 혼자는 후들거리는 무릎 언저리에 손을 짚어 균형을 잡으려 애썼어.
        그리고 마침내 국왕이 일어섰지.
        “내 심장을 먹고 이 땅을 떠나라! 내 딸에겐 네 가증스러운 비늘 한 개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려라! 절대로 돌아오지 말고 떠나가라!”
        메타는 끄덕였어.
        “그렇게 하겠다. 이곳엔 혼자가 너무 많았거든. ……그러고 보니,”
        메타는 단숨에 국왕의 목을 잘라냈어.
        “너는 혼자가 아니었군.”
        구름이 밀려와 달을 덮쳐 캄캄한 하늘아래엔 메타가 쩝쩝거리는 소리뿐.
        용의 침실엔 속박의 마법이 풀린 공주가 새근새근.
        마법검은 땅에 꽂힌 채로 해방의 노래를 불렀지.
        날개가 장엄하게 펼쳐지고 메타는 작별의 말을 남겼지.
        “검이여, 공주에게 전하라. 그대의 아비는 ‘겉’으로만 ‘혼자’인 체 했다고.”
        마법검이 말했지.
        “그래 알았어. 이제 꺼져.”
        그날 밤은 그랬지.
        날아오른 용을 올려보며 마법검은 인간에 대해 사유했지.
        그날 밤은 그랬지.
숨었던 달이 빛을 내리쬐었을 때 메타의 날개는 하얗게 빛났지.
그날 밤은 그랬지.



“……그랬지. 어때? 재미있는 이야기지? 그치?”
프리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에일이 개의치 않고 프리페의 어깨에 손을 얹자 둔탁한 소리가 나며 방안에 울려 퍼졌다. 너무 세게 올려놓은 게 아닌가 싶어 멈칫한 에일은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아니야.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가 남아있지. 으엉…… 그때, 그게……. 날아온단 말이야.”
프리페는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뭐가?”
“용이! 날아온단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날 밤 날아오른 메타의 날개를 찢어 떨어뜨린 투명한 용! 오고 있어! 그래, 그렇게 월광아래 날아오른 메타는 불시의 습격을 받아버렸지. 겨우 생겨난 날개가 헐고 찢기고 피를 뿌리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상대는 투명한 용이라서 반격할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죽어가는 게 당연하지. 용 중에서 최강의 투명한 용이 울부짖었으니까. 울부짖고 메타를 공격했어. 차원이동까지 마스터한 투명한 용에게 메타는 0.001초 만에 죽어버렸고, 성도 부숴져 버리고, 공주도…….”
프리페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오히려 에일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허하게 울리고 프리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마…… 진심인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너야말로 무슨 소릴 거야! 투명한 공격으로 공주도 죽여버리고 그 나라까지 다 멸망시켜버린 투명한 용이 오고 있다니까?”
“……모두 허구의 이야기 아니었어? 너 어디 이상이 있는 거 같아.”
“왜 이래! 내 말을 믿어! 믿으라고! 투명한 용이 날아오고 있어!”
“……그래, 알았어. 소리지르지마. 이 방에서 나가줘. 부엌에 네 할 일이 남아있을 거야.”
“그래. 믿지? 투명한 용이 오고 있어! 우리 모두 끝날 꺼야! 하지만 나에겐 할 일이 있지. 부엌으로 가자.”
에일은 부산스럽게 일어서더니 샤프란을 향해 목례했다. 그리고 그것이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나가고, 다시 문이 닫길 때까지 프리페는 그것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소녀의 침실에 남은 시종은 그것의 주인을 깨우려 일어섰다.
그때 샤프란이 말했다.
“나 깨어있어.”
“네, 아가씨. 언제 깨어나셨나요?”
샤프란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저 고장 난 로봇이 내 방에서 판타지 소설 몇 개 주워 읽고 들어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프리페가 끄덕였다.
“예, 고장입니다. 제 분석결과 안드로이드 타입 K-1G, 통칭 ‘에일’에겐 오류가 있다고 판명되었어요.”
“내 휴대폰 좀 갖다 줘.”
통화 연결음이 진행되는 동안, 침실 창문 바깥쪽에는 차가 몇 대 지나갔다. 그 아래로 넓게 열린 광장에는 인간들과 그의 보조인 안드로이드들이 정신 없이 지나다녔다. 그 중 몇 기는 고장이 나서, 그 중 몇 기는 프로그램 업그레이드를 하러 광장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달빛전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드로이드 타입 K-1G, 정보 입력상 문제가 발생해서 기억 회로 쪽에 오류가 심한 것 같은데 수리 맡길 수 있을까요?”
<네, 고객님. 수리하실 경우 기존의 저장데이터는 모두 말소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 없어요. 워낙 고물이라 평소에도 족족 사라지는 데이터 따위.”
마침내 수리 약속 시간을 잡은 샤프란은 피곤한(결과적으로 그녀는 수면 시간을 방해 받았다.) 얼굴을 내비치며 시종에게 물었다.
“프리페, 네 배터리는 충전했어?”
“네. 당연하지요.”
“그래. 설마 너도 K-1G가 꺼낸 이야기 좀 들었다고 오류 나는 거 아니지? 저따위로 맛이 가면 수리비가 많이 든단 말이야. 특히 회로 쪽은. 조심해.”
“네.”
샤프란은 부스스한 머리를 다듬고 휴대폰을 화장실 컨트롤러 모드로 바꾼 후 샤워 버튼을 눌렀다. 화장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샤프란은 마침내 침대에서 벗어났다.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긴 하품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아~암. 광장 나가야겠네? 약속 없어서 좋았는데. 망할 오류, 망할 수리비. 정말, 용 중에서 최강의 투명 용이 울부짖는 소리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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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단편은 액자식 구성으로 주제는 이중적입니다.

즐겁게 읽어보셨으면 고맙겠습니다
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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