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0.05.19 22:1005.19

- 숨을 쉬고 싶어.

0.
소녀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결 사이에서 길게 흩날렸다. 발목 주변에 감쳐 흐르는 바다의 차가운 물결 때문에, 어깨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소녀는 무심히 뒷편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모래톱 위에서 흰 모래만이 바람의 손끝에서 바스스 흩어져 날아갔다. 소녀는 무심결에 얼핏,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자신이 웃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냥, 웃어야 할 것 같았다.

죽는 이유가 꼭 필요해? 그냥, 죽으면 안 되는 건가?

가끔 세상에게 묻고 싶은 때가 있었다. 세상 안에서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꼭 한 걸음쯤 떨어진 상태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부터 그 의문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고, 그녀는 기억했다. 세상이 웃고 즐겁게 대화하며 밝게 살아가는 그 곳에서 그녀는 영원한 타인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절대로 화합하지도 함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그러한 스치는 존재였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마음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으며 그렇기에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그 자리에 고요히 존재하였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변의 세상들은 늘 그녀에게 강요했다. 학교는 그녀에게 정숙한 여학생의 모습을 지니고 살라 요구했다. 집은 늘 비어 있었고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와 목소리를 높였으며 어느 날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지긋지긋하지 않아? 라고 묻는 것조차 지겨울 것이기에 그녀는 묻지 않았다. 부모님의 다툼도 가세의 기욺도 학교의 요구도 그녀에게는 모두 그냥 한 올 바람과도 같았다. 아주 잠시 옷깃을 흔들고 지나가는 가벼운 일상. 한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금세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질 듯한 그러한 일상, 익숙함, 소중한지 소중하지 않은지조차 알 수 없는 가치 없는 그러한......

그녀는 반항하고 싶었기에 담배를 물었고 술을 마셨으며 남학생과 잔 것이 아니었었다. 그저 한없이, 흘러가는 일상이, 그저, 무료하고 무료하여서. 세상과 자신의 꼭 한 걸음의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 버려서. 세상이 자신에게 아주 조금의 눈짓이라도, 관심이라도, 그런 사소한 싸구려 감정이라도 건넬 것인가 궁금하여서.

세상은 그녀에게 감정을 건넸다. 조소였고, 모멸이었으며,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세상이 그녀에게 건넨 그 감정들에 만족해야 하나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러나 결국 답은 알 수 없었고, 지루하고 귀찮아진 그녀는 그냥 인사하고 싶었다. 너와 나의 거리는 꼭 한 걸음이었는데, 그 걸음을 좁힐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나, 사라져도 되겠지.
어차피 그 자리에 있건 없건, 상관없잖아.
사람 지난 자리에 뒹구는 가랑잎보다도 가벼운 존재이니까.

그녀의 발치에서 갑자기 확, 하고 물이 치밀어올랐다. 동해 바다는 급격하게 수심이 깊어진다, 라는 교사의 설명을 옅은 졸음기 사이로 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여자의 얼굴 끝까지 바닷물은 가득하였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여자는 생각했다. 난 무엇을 바라고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거리를 좁히려 발악하였을까. 세상은 푸르렀다. 머리 위에서 새하얀 햇살이 갈퀴손을 들고 파란 물결 위를 쓰다듬었다. 검은 머리칼이 시야를 가득 가리고, 흔들거리고, 흔들, 흔들, 흔들-.

다만, 숨을 쉬고 싶었어.

여자는 물 안에서 사지를 늘어뜨렸다.
아아, 여전히 난,

숨을 쉴 수가 없구나.


1.
꼭 3일간의 시간 속에서 나를 사로잡았고, 나머지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당신의 눈. 당신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치 검은데 그 안에 잠든 푸르름이 너무나 아릿해서 난 왠지 그 앞에서 이유없이 짊어지고 있는 죄의식들을 고백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믿었던 이유는.

꼭 삼일간의 만남이었고 그 동안 당신의 온기를 느끼고 당신에게 위로받고자 했고 당신을 믿고자 했던 날, 세간 사람들은 멍청한 여자라고 평가할 것이다. 세간의 눈은 별로 겁나지 않는다고 애써 믿었지만, 실은 난 아주 겁쟁이어서 그 눈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노력하며 도망치려고 한다.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쥐었을 때 닿았던 온기가 소중했던 이유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경멸하지 않고 꼭 한 걸음 바깥에서 나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당신이 있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해도 좋았다, 당신의 그 눈동자 당신의 온기 닿는 손길 얼핏 드러나는 무미한 표정 아주 가끔씩 보여주는 미소 놓고 싶지 않았다 집착하고 싶었다 당신의 그 모든 것을 당신의 말에 대한 증거로 삼고자 했다 태생처럼 짊어진 죄의식 아주 잠시라는 것 알아도 놓고 싶었다 등에 진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유로워지리라는 착각을 하고 싶었다 당신이 날 위로해 주길 바랬다 어느 누구도 아닌
당신을,
믿고 싶었다.
당신이 천사라고 했던 그 말,
믿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숨쉴 새도 없이 밀려드는 생각 속에서 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뱉고를 반복했다. 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물고기 같았다 난. 숨을 쉬려면 필연 물을 삼켜야 하고 그 삼키는 물이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싫어서 도망치려 해도 결국은 도망칠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 나를 짓누르는 물 묵직한 그 무게 찰랑이며 주변을 메우는 그것들이 싫고 싫어서 다 놓고 뛰쳐나가려 해도 난 물 밖에서 살아갈 수 없는 물고기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 물의 무게 인정하고 쉽게 살아가는데 나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가끔, 어항에 갇힌 물고기이고 싶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아닌 어항 속의 물고기였으면 하고 바랬다. 나를 가두는 굴레가 있기를 바랬다. 너무나 넓은 자유와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래 속에서 번민하고 싶지 않았다.


꿈이, 길었다.

나는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처음으로 내 눈에 비친 것은 회색의 천장이었다. 낡은 벽지로 발라져 있었지만 방 안은 깔끔해 보였다. 천장에 붙은 예스런 전등 안에는 작은 곤충의 시체가 쌓여 까만 그림자를 이루었다. 손가락을 들려 했지만 온 몸이 무거운 무언가로 눌린 것마냥 힘겹게 비명을 질러서, 나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다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보자, 내가 누운 이불 옆에 커다란 들창이 뚫린 것이 보였다. 유리는 바닷바람에 섞인 소금기로 뿌옜지만, 그래도 그 너머에 넓게 펼쳐진 바다는 잘 보였다.

나, 살아남았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그냥, 누가 날 살렸는지조차 궁금하지 않은데 다시 살았다는 사실만이 칼날처럼 내 목 앞에 들이밀어졌다. 물 안을 헤메이는 물고기의 신세로 다시 돌아온 건가 생각했고, 그러자 조금 우스워졌다.

"아, 하하하..."

혼자서 키득대며 웃고 있으려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조금 마르고 키가 훌쩍하니 큰, 스물 중반 정도 되었을까 싶은 남자였다. 얼굴은 희었고 눈은 새카맣고, 손에는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몇 가지 그릇들이 올려져 있었다.

"물에 빠져 죽으려던 걸 간신히 살려 놨더니, 정신줄을 놓았나."

남자는 요샛말로 '매우 시크하게', 조금 더 적나라하게 설명하자면 '정말 싸가지없게' 말을 꺼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정리한 나는 눈동자만 굴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내 옆에 그릇들을 늘어놓았는데, 내용물은 각각 뜨거운 쌀죽과 간장, 김치였다.

수많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좌절에 빠진 여주인공이 자신을 살린 남자에 대고 '나를 왜 살렸어!' 라고 항의하는 장면은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없어서, 실은 죽으려 한 주제에 남한테 구출당하고 쌀죽까지 얻어먹게 된 이 신세가 좀 민망해서,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랬더니 남자는 힐끗 날 돌아보더니 숟가락을 내 쪽으로 내던졌다.

"아얏."

숟가락이 이마에 맞았다. 솔직히 많이 아프지는 않았는데 그냥 왠지 아프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난 그렇게 했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둑신한 방 가운데 왼편에 빛을 받고 앉은 남자의 검은 그림자가 쓸쓸해 보였다. 더 말하고 싶진 않아서 숟가락을 들고 죽그릇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내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양 두 눈까지 감았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후후 입김을 들어가며 죽을 먹었다. 숟가락 위에 뽀얗게 자리 잡고 앉은 죽은 혀가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 숟가락질이 멈추지를 않았다.

근데 먹으니까 조금씩 서러워졌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도 모르는데 난 먹으면서 뚝뚝 눈물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눈가가 발갛게 부풀어오르고 가슴이 먹먹하게 일그러지는데 그런데도 죽은 맛있었다. 입 안에 죽을 가득 넣은 채 울었다. 흐어엉, 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 젖은 뺨이랑 잔뜩 부은 눈이랑 입에 가득한 죽이 정말 우스운 꼴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울었다.

어느 새 죽은 다 먹었고 포만감과 서러움은 한 데 섞여 내 얼굴을 우습게 만들었다.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울고 있으려니 남자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빈 그릇들을 거둬갔다.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서 밖으로 나갔는데 왠지 휘청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저 뒷모습은 왜 저리도 휘청거릴까,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쿨쩍이며 주변을 돌아보다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이 옆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는 휴지를 잔뜩 뜯어 얼굴에 댔다. 팽, 하고 코를 푸는 소리가 장쾌했다.

코를 풀고 나니 왠지 시원해졌다.

그리고 내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먹고, 우니까 만사가 다 해결된 듯 느껴지냐, 이 멍청아.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 보니 달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뒷모습이 잠깐잠깐 흔들린다.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부엌 겸 조리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부엌 앞으로는 작은 테이블 두어 개와 의자가 놓여 있고 유리로 된 벽면 밖으론 커다란 횟집의 어항이 놓여 있었다. 낡은 회색 벽에 붙은 선풍기는 뿌연 먼지를 얹은 채 침묵한다. 밖을 얼핏 보니 횟집 밖으로는 돌로 된 절벽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에 횟집이 있는 걸까, 손님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 대신 난 남자를 다시 보았다. 뒷모습으로만 서 있는 남자는 퉁명스러이 말을 내뱉었다.

"잘 처먹데."
"........"

조금 무안했다. 나는 턱을 긁적이다가 내 소매를 보았다. 내 옷은 아니고 남자의 옷인가 보다. 저 남자가 내 몸을 봤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만사가 나랑은 관계 없잖아, 하는 무책임한 생각이 든 탓이다. 내가 멀뚱멀뚱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알았는지 남자는 다시 말했다.

"네 몸 볼 거 하나도 없었다."
"어, 진짜요? 이래뵈도 남자들이 내 몸, 되게 좋아했는데."
"그러냐? 별 매력도 없더만. 혹시 공주병 있냐?"

별로요, 라고 대꾸하고 방 턱에 주저앉아 있으려니 남자가 성가시다는 양 손짓을 했다.

"네가 쳐다봐야 나올 것 없으니까 얼른 네 집으로나 가라. 아참, 지금은 말고."
"집이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집이라는 단어랑 나랑 엄청나게 동떨어진 것같이 느껴졌다. 한 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

"나 집 없는데."
"있는 거 다 알아."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난 천사니까."

그릇의 물기를 다 닦아 찬장에 집어넣은 남자는, 진짜 진지한 얼굴로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 기가 찬 내가 하, 하고 소리를 냈다.

"아저씨가 천사라고요?"
"그래, 난 천사야. 그러니까 그놈의 아저씨 소리는 집어치워."
"요즘 초등학생도 그런 말은 안 믿겠다. 무슨 천사가 횟집을 해요?"
"횟집은 내 취미야."
"아, 그러세요."

질렸다, 는 생각이 얼굴이 너무 드러났나,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고 괜히 무안해진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이 곳엔 꼭 3일동안 있을 수 있어. 물론, 오늘까지 포함해서 3일이야. 3일 동안은 내가 돌보아 줄 테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 모든 것이 사라질 테니까. 그러니까 그 동안 너의 얘기를 듣고자 한다. 네 삶의 종적은 모두 알고 있어. 네가 네 존재의 근간처럼 갖고 있던 허무감이랑, 뭐 그런 것들 알고 있다고."

그 말이 끝나자 놀란 나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그러나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뭐, 내가 보기엔 사춘기 꼬마도 너 같은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다만. 그런 걸 세간에서는 중2병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중2병 같은 인터넷 용어를 잘도 말하네요."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천사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말야. 어쨌거나 널 구한 입장에서 보답을 받고 싶네."
"이씨, 천사라면서요. 천사가 무슨 보답을 받아요?"
"노노, 천사가 원래 무보수 노동직이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남자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휘휘 저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 좋아요, 무슨 보답을 받고 싶은데요?"
"너의 이야기."
"....예?"

당황한 내가 콧등을 구기자, 남자는 처음으로 웃었다. 싱긋, 웃는 그 웃음은 솔직히 매력적이긴 했지만, 그 웃음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로써는 그저 난처할 뿐이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너만의 이야기 말야."
"저... 혹시 관음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굴 변태 취급하냐!"

남자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지만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다리를 꼰 자세를 고수했다.

"그럼 왜 멀쩡하게 큰 처녀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요?"
"아픔을 봐야 하니까."
"....예에?"

내 당황과는 무관하게 남자의 웃음은 짙어졌다.

"나 천사랬잖아. 그러니까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네 아픔을 봐줘야 한다고. 솔직히 나도 너의 구질구질한 얘기 같은 거 듣고 싶지는 않은데 천사라는 게 뭐 그딴 거라는데 어떡하냐."

남자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잠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이야기해도 될까, 저 남자가 천사라는 걸 믿는다는 건 보류한다고 쳐도 말해도 될까. 인상을 찌푸리는데 남자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당장 이야기하라는 건 아냐. 아직 이틀의 시간이 있으니까. 내일이랑 내일 모레, 둘 중에 하루를 잡아서 이야기해도 돼."
"알았어요. 그럼 우선 쉬어도 되죠?"
"그건 네 마음대로 하셔."

남자는 자리를 떴고, 나는 소르르 밀려오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오늘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늘 나를 엄습하는 허무감이 없어서 이상할 기분이었다. 두 눈을 깜박이자 졸음은 더욱 짙어졌다. 눈을 감자, 피로함이 몰려든다. 아까 그렇게 잤는데도 난 또 자냐, 역시 난 한심해,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날, 그 때의 잠은 자면서도 안도할 수 있을 만치 따스했다.

2.

다음 날, 나는 내가 자리에 눕혀져 이불까지 잘 덮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온 몸이 상쾌했다. 어디선가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밖을 들여다보니 예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아아, 이런 집에서 저런 냄새를 맡는 게 얼마만이었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천사님?"

장난스레 묻자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잘 잤겠냐? 네가 잠자리 다 차지하고 잤잖아."
"그럼 못 잤어요?"
"응. 못 잤다."

사람 민망하게 고개 끄덕이기는. 난 조금 투덜거리면서 남자의 곁에 가 섰다.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남자의 얼굴은 늘 그렇듯-어제 한 번 봤는데 뭘 '늘'이라는 말까지 쓰겠냐마는-무심했다. 졸려 보이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입술을 내민 난 고개를 슬쩍 내밀어 남자가 끓이는 김치찌개를 들여다보았다. 참치를 넣고 김치를 지져 넣은 흔해 빠진 김치찌개였는데, 무지하게 맛있어 보였다. 아, 원래 식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나.

"횟집도 하면서 겨우 캔참치예요?"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아, 아뇨. 먹을게요."

잽싸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들고 밥그릇을 받았다. 남자는 턱짓으로 냄비를 가리켰고, 난 두 개의 밥공기를 들고 밥을 퍼 담았다. 윤기가 흐르는 쌀밥이 소복하게 올라왔다. 남자는 김치찌개 냄비를 들고 횟집의 테이블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남자의 뒷꽁무니를 쪼르르 따라가며, 난 조금 우스워졌다. 밥 달라고 쫓아가는 강아지 같잖아, 이래서야.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조용히 먹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뿐이었다. 기분좋은 식사였다. 남자가 나를 보며 딱 한 마디 내뱉은 것만 아니면, 끝까지 기분좋을 수 있었으련만.

"무지하게 잘 먹네. 돼지 같다."
".....꼭 그렇게 사람 기분 잡쳐야 해요?"


밥을 먹고 남자는 낚싯대를 챙겼다. 낚시를 하려나 싶어 둥그래진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남자는 나를 보며 간단하게 한 마디 했다.

"밥 먹고 자려는 생각이었다면 집어치워. 살찐다. 산책하는 셈 치고 따라와."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인데도, 남자는 정말 길을 잘 찾았다. 따라 내려가는 나만 휘청거려서,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물 묻은 바위 때문에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데도,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천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닿은 손은 충분히 기꺼웠다.

한참을 내려가자 두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가 보였다. 낚싯대를 드리울 명당 자리임은 물론이었다. 남자는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물고는 굉장히 나태한 자세로 낚싯줄을 드리웠다. 솔직히 바다낚시는 처음이었으니까 조금 기대하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지겹다는 양 먼 바다에 시선만을 주고 있었다. 턱을 괴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발을 흔들어 보다가, 기다림에 지쳐 몸을 뒤틀자니 남자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괜한 심통에 난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언제 낚아요?"
"언젠가는."
"나 기다리기 지루한데."
"먼저 들어가던가."

데리고 나올 때는 언제고! 발끈해서 뒤를 돌아보던 나는 금세 풀이 죽었다. 내려올 때도 무지하게 힘들었던 저 길을, 남자의 도움 없이 올라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뺨을 부풀리며 남자를 노려보자니 남자는 얄밉게 슬쩍 웃었다. 한 대 때려주면 속이 시원하겠다, 생각하는데 남자는 흘리듯 말을 걸었다.

"이것도 선택의 일부일지 몰라."
"...선택이요?"

웬 헛소리인가, 싶어 남자를 봤는데 남자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 먹이를 택하고 또 택하지 않는 물고기들의 선택. 물고기들도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바다를 헤엄칠 수도 있겠고 자기 스스로 먹이를 잡을 수도 있겠고 내가 드리운 낚시에 매달린 먹이를 먹을 수도 있겠지. 그 모든 것은 선택이야. 멍청하게 주변을 살펴보지 않았건,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건, 어쨌거나 자신이 한 행동은 자신이 한 선택이지. 그 선택을 후회하지 말라는 게 아냐, 후회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목으로 몰려갈 수도 있거든.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하려 하거나, 모순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어. 그치만 자신이 선택했다는 건 잊지 말아야지. 그 선택이 자의건, 타의건 이미 해 버렸으니까.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 새로 결정할 수 없는 이상, 이미 택한 것에 후회하고 발버둥쳐 새로운 길을 찾을지언정 그 결정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지."

조금 막막해져버렸다. 내 얼굴이 그리도 멍청해 보였나, 남자는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실은 나를 탐하던 남자는 아주 많았고 남자와 잠자리를 해 보지 않은 여자애는 아니었는데도,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위 '발랑 까진 여자애'인 게 나였는데도, 왠지 남자의 손길은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손은 따스했고 또한 나를 존중해 주는 손길이었다. 지금껏 나를 함부로 굴렸고 그래서 나를 막 대해도 되는 여자처럼 바라보았던 남자들과는 다르게, 그 남자의 눈은 일견 무심해 보였지만 그 안엔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남자의 검은 눈 안쪽이 파르스름하게 빛난다. 그 빛은 마음 한켠을 시리게 하지만 또한, 위로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 앞에 서면 내가 한없이 더러워 보였고 또한, 내가 품고 있는 더러움을 다 토해내고 깨끗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난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를 짓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

남자는 내게 억지로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울먹이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나한테는, 그 남자의 그런 태도가 무심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목을 가다듬어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뽑아내려 애를 썼다.

"...고마워요."

에이, 다 망했다. 끝이 잔뜩 이지러진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난 내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그렇지만 지금껏 나한테 그토록 시쳇말로 시크하게 굴던 남자는, 이 순간만큼은 시크하게 굴지 않았다. 남자는 그가 잘 웃곤 하던 웃음소리 대신 침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내가 스스로 울음을 되삼킬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의 차분한 시선을 받으며 난 조금씩 평정을 되찾아갔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앗, 앗, 아앗!!!!"
"뭐, 뭐야? 왜?"
"고기! 고기, 얼른!!!!!"

그 차분하고 따스하던 분위기가 내 외침 하나로 망가져버렸다. 낚싯대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남자는 낚싯대를 붙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모습을 보던 내 앞에서 남자는 능숙하게 낚싯대를 조정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팔뚝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딸려나왔다.

"엄마야아!!!"
"야, 지금 엄마 찾을 때가 아니야! 양동이 가져와! 얼른!!"
"야 아니거든요!"
"아 씨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물고기의 이름은 물론 몰랐지만, 물고기의 파닥거림에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 물고기는 바닷물이 담긴 커다란 양동이 안에 들어갔고, 그러자 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변을 정리하는 품새가 딱 자리를 뜨려는 것 같아서, 왠지 아쉬워진 나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지금 가요?"
"그럼 언제 가게?"
"그치만 한 마리밖에 안 잡았잖아요."
"이 한 마리로도 너랑 나랑 충분히 먹어."
"......그거, 먹을 거예요?"
"장난으로 잡았으면 잡자마자 놓아줬지, 뭐하러 끌어올려 양동이에 넣었겠냐?"

치,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어디 덧나나.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남자를 따라가는 내 발걸음은 빨랐다. 그렇지 않으면 나 혼자 저길 어떻게 올라가냐고. 남자는 힐끗 등 뒤를 보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려니까, 남자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팔 떨어져, 빨리 잡아. 이때까지 잘 잡고 다녔으면서 왜 이제서야 부끄럼타는 척해? 요조숙녀 역할을 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알았어요, 잡으면 되잖아요! 말 참 얄밉게 한다니까."

여전히 그 손은 따뜻했다. 그 손을 맞잡으며 안도하는 나를 느끼고 조금 기분이 이상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내게 꼭 한 걸음 멀어져 나를 기웃이 들여다보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처럼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데 이 사람만큼은 공기처럼 가벼웠다. 물고기가 산소를 마시기 위해선 필연 물을 마셔야 하지만, 이 사람은 물고기가 물을 마시지 않는 과정을 거치고서도 산소를 주는 거만 같았다.

머리가 흩날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꼬리를 끌고 길게 불어닥치는 바람은 겨울 바다 특유의 차가운 상쾌함을 갖고 있었다. 소금기있는 바다 냄새도 달콤한 향기 같았다. 심장을 가득 채우고 전신을 달려나가는 공기가 좋았다. 차가운 바람에 눈이 시려오는 것도 겁나지 않았다.
그래, 나는 지금 천사와 함께 있으니까.
나는 실소했다.
그럼에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전혀.
실은.....
아주 좋았다.

횟집으로 돌아오자 남자는 잡은 물고기를 횟집 앞의 어항에다 넣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물고기는 어항 속에서 물을 되찾고 유유히 헤엄쳤다. 분명히 외딴 곳인데도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신기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천사라니까 그런가 보지 뭐,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가고 나만 혼자 바깥에 남았다. 물고기를 들여다보았다. 물고기는 흡사 일반인 같았다. 어디서든, 돌처럼 짓누르는 물이라는 세상 속에서만 살아가려 하는 물고기. 그 물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고 당연하게 숨쉬는 물고기. 끊임없이 들이켜는 물에 대해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는 물고기, 어항이라는 굴레를 가질 수 있는 물고기, 돌아갈 수 있고 누군가가 곁에 있는 물고기. 나와는 다른, 세상 안에서 웃을 수 있는 그러한 물고기.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
세상에서 꼭 한 걸음 떨어진 나와는 전혀 다른 물고기였다.

하염없이 어항을 들여다보는 내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솜털처럼 보드랍지만 예리한 차가움을 남기고 물이 되는 무언가. 문득 고개를 들자 회색으로 찌푸린 하늘에서 새하얀 꽃잎처럼 팔랑팔랑 내려오는 눈송이가 보였다. 꽃잎처럼 내리던 눈송이들이 겨울 바람에 휘말려 꽃잎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파도의 흰 포말 아래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조차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을 헝클며 지나가는 눈바람이 좋았다. 겨울이라고, 눈도 내리는구나. 실없이 웃는데 흔들리는 눈들이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순수해 보였다. 뺨에 닿는 눈송이는 눈물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뺨에 닿는 눈의 차가움조차 마음에 들어서 난 눈을 감았다. 지금이면 울어도 좋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들어갔을 때 남자가 얼굴이 그게 뭐냐고 물으면, 눈이 녹아서 내린 물이라고 우기면 그만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아아-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한없이 흐느꼈다. 목이 메이고 숨이 막힐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울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울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느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웃었다가 머리를 흔들며 울었다. 눈을 가린 손이 차가웠다. 눈물이 뺨을 적시고 한없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내 더러움이 눈물로 변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렇게 울고 나면, 세상에 찌들어 무척이나 더러워진 나도 깨끗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나 자신조차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나이지만, 누군가는 나를 소중하게 여겨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 넓고 넓은 세상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 정도는, 내 곁에서 꼭 한 걸음 떨어져 날 보지 않고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 나를 껴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를 껴안고 괜찮다고 달래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너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돌을 던지며 저리 가라고 소리지른다 해도 나만은 너 곁에 남으리라 말해줄 사람, 있지 않을까.
제발.

그제야 난 깨달았다.

난 세상이 무료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어. 한 걸음 멀어져 나를 들여다보는 세상이 미운 것도 아니었어. 세상이 나를 경멸하기 전에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자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한 선택들은 어리석었어. 남이 날 사랑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나를 사랑했어야 했어. 남에게 날 소중하게 여겨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겼어야 했어. 아아, 내가 한 선택들을 후회해. 나를 함부로 굴린 나 자신이 미워.

하지만 그래도 날 사랑해.

세상에 반항하고자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했지만, 실은 난 반항하고 싶었어. 반항해서라도 눈길을 내게 돌리고 싶었어. 조소와 모멸의 눈빛일지라도 받고 싶었어. 내게 향하는 관심이 필요했어. 물을 마시는 물고기의 입장을 조롱했지만 실은 그것을 원했던 거야. 나는, 나는...

실은 죽고 싶지 않았어.

무지막지한 깨달음의 순간이 벼락처럼 나에게 내리꽂혀서, 울부짖던 모양 그대로 나는 멈추었다. 흰 꽃잎처럼 내리는 눈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입 밖으로 내가 방금 깨달은 것을 말해 보았다. 눈 사이로 흩어지고 부서지는 목소리일지라도 말하고 싶었다. 크게 외치고 싶었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어주길 원했다.

"난 나를 사랑해."

더 크게, 라고 누군가가 부추기는 것 같았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난 죽고 싶지 않았어!"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짜릿하리만치 기뻐서 나는 외쳤다.

"난, 나를 사랑해! 죽고 싶지 않았어!!!"
"맞아, 넌 너를 사랑하고 전혀 죽고 싶지 않았었어."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싱긋 웃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송이 사이로 남자의 흰 얼굴이 짓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세상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흰 눈 사이로 모든 것이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이지러져 보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난, 난, 나는-.

남자가 양 손을 벌리고, 그 품에 뛰어들며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처음으로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품은 따뜻했다. 위안을 주는 온기였다. 그 품에 안겨 나는 다시 울었다. 조용히 울었다. 눈발은 점차 고요해졌다. 펑펑 쏟아지는 눈은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끌어안는 포근한 담요처럼 눈이 내렸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눈이 설탕 가루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에서 나는 세상이 달콤하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잠이 쏟아졌다.
잠의 끝자락에서, 남자의 얼굴을 조금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애롭게.

정말로 그가 천사가 아닐까 하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3.

눈을 뜨자마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니 멀리에서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마에 칼이 닿는 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었다. 남자가 뒤를 흘낏 보더니 싱긋 웃는 게 보였다.

"일어났냐? 어제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안 먹고 그냥 자던데 배 안 고파? 너 무지하게 많이 자더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몇 신데요?"
"오후 다섯 시."
"저... 꼬박 네 끼 굶은 건가요? 그러고 보니....."

그제야 나는 무지하게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실은, 지금 무지하게 배고파요."
"앉아, 밥 먹자. 마지막 날인데 술도 한 잔 해야지."
"...마지막 날이군요."

내가 생각한 '마지막 날'과 남자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마지막 날'은 어감 자체가 달랐다. 아쉬운 마음에 말을 못 꺼내자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여간, 헤어진다니까 아쉽냐? 이 몸의 인기란."
"으이구, 정말."

자리에 앉으니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 냄비와 회접시가 가운데에 놓였다. 소주 한 병과 술잔 두 개도 테이블을 차지했다. 이번엔 숟가락과 젓가락도 제 자리에 얌전히 놓였다. 남자는 공깃밥 한 그릇을 내게 내주고는 내 앞에 앉았다. 꼴꼴 소리와 함께 소주가 술잔에 채워지고, 나와 그는 술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남자는 한 입에 모두 털어 넣었으나 나는 반쯤 마시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남자가 짓궂게 농을 걸었다.

"원래 소주는 꺾어 마시는 거 아니래."
"....내버려 둬요."

퉁명스레 답한 나는 숟가락을 들어 매운탕을 한 입 떠 먹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로 요리 잘하네요?"
"지금껏 잘 처먹어 놓곤 '의외'라는 말이 나오냐?"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도 실은 좋은 기색이 눈에 빤히 보인다. 저 사람도 귀여울 때가 있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숟가락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천사의 조건이 '요리 잘 하는 것'도 있나요?"
"대학으로 치자면 전공필수 과목은 아니고 교양선택 정도랄까."
"비유 참 멋지네요."
"내가 좀 멋져."

그리고는 잠시 침묵. 그 침묵 사이에 밥 한 그릇을 몽땅 먹어치우고 회와 매운탕도 반은 비운 우리는 서로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남자는 턱을 괴고 시선을 조금 낮춰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언제 봐도 저 검은 눈동자는 내게 위안을 주었다. 겉은 새카맣게 빛나는데 그 안쪽에 푸르스름하게 비치는 기운이 흡사 순결한 달빛 같다. 저 눈 앞에서는 솔직해져도 될 것만 같았다. 멍하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예뻐요, 눈."
"고맙다."
"나, 이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해. 들을 테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주제에 조금 머뭇거렸다. 입술을 얇게 깨물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으니 남자는 여전히 침착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봐준다면, 끝까지 말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있잖아요. 세상이 물이고, 사람들이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만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물고기죠. 물을 마시고 살아야 하는 게 물고기인데 나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은 늘 내 곁에서 꼭 한 걸음 떨어져 기웃이 날 들여다보죠. 그것이 싫어 견딜 수 없었어요. 참을 수 없어서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도 없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을지도 몰라요. 부모님은 매일 싸우고 엄마는 집을 나갔고 집안 꼴은 말이 아니고.... 그냥 만사가 혐오스러웠어요. 그래서 반항하고 싶었죠. 지금까지는 반항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실은 그것들이 다 자기 합리화라는 것도 알았어요."

남자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뿐 계속해서 내 말을 경청했다. 그의 태도에 용기를 얻어,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껏 나는 멍청한 선택을 해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이 말했죠, 선택한 사실을 후회해도 상관없지만 선택한다는 것 자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선택한 사실을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선택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굴레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 세상이 참 넓으니까 겁이 났어요. 바다에 혼자 남은 외톨이 물고기 같았어요."

그리고는 살며시 웃었다. 그 웃음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내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아마 내 앞의 남자도 알았을 것이다. 그의 눈빛이 따스해졌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그치만 지금은 아니예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게 무척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난 어떤 길이로든 갈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해도 후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잘못된 것을 깨닫는 순간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어요. 세상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기 전에, 내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젠 깨달았어요. 이젠 죽고 싶지 않아요. 난 나를 사랑해요. 실은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젠 잘못된 선택을 해도 겁내지 않을래요. 끝까지 버틸 거예요."

그의 눈빛이 내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난 이제 숨을 쉴 수 있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보았다. 그는 다정했다. 내가 세상에서 봤던 눈빛 중 가장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 시선 앞에서 난 내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실은, 처음부터 더러운 사람 같은 건 없으리라. 그저 나 혼자 나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나를 더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나를 함부로 굴렸기에 다른 사람들도 나를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웃었다. 투명한 달빛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유리문을 치며 쌓이던 눈이 그치려는지, 눈발이 점차 가늘어지는 게 그의 뒷편에서 보였다. 그 위에 내리쬐는 달빛이 푸르스름하다. 나를 바라보는 저 남자의 눈빛 같다.

스스로를 천사라고 말하는 저 남자와, 닮았다.

"긴 이야기 잘 들었어."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빛이 모였다. 빛의 실이 파르르 파르르 제 몸 떨며 등 뒤에 엉겨붙는다. 잠시 후 그 빛들은 제 몸 죽 펴더니, 새하얀 깃털이 달린 날개로 화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진주처럼 부드러운 빛가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이제 바다처럼 푸르렀다. 나를 긍정해주는 저 눈 앞에서 이젠 나는 울지 않았다. 울 이유가 없으니까. 다만 그 눈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저 눈 앞에서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날개를 두어 번 펄럭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정말 천사였어요?"
"천사는 거짓말 치지 않는다구."

남자, 아니 천사는 짓궂게 웃으며 내 뺨을 쥐었다. 뺨에 닿는 그의 손길이 따스하다. 아기 속살처럼 부드럽다. 잠시 후 천사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다사로웠다. 심장 안까지 그가 남긴 온기의 빛으로 물들었다. 천사의 온기가 나에게 옮겨붙어 마음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

천사는 웃었다.

"네."
"스스로를 끝까지 사랑해 줘. 앞으로는 절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 너는 바다 속에 홀로 버려진 물고기가 아니라, 수없는 자유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물고기야. 자유를 족쇄로 생각하지 마, 그마만큼 많은 기회가 네 앞에 있는 거야."

그렇지? 천사는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내가 떠나면 넌 네가 원래 있었던 그 백사장에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 살다 보면 외롭다고 생각할 날이 있겠지, 그럴 때는 오늘의 만남을 기억해. 너 자신을 사랑하고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 나도, 널 사랑할 테니까. 무보수 노동 따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보수 같은 거 받지 않을 테니."
"그럴게요."

그의 미소가 안개처럼 아릿해진다. 부드럽게 흩어진다. 어느 새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앉아 있었던 테이블이 사라지고 벽도 흐려졌다. 잠시 후,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처음에 있었던 백사장이었다. 먼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소나무도, 바닥에 밟히는 흰 모래도 그대로다. 꼬리를 끌고 멀리 사라지는 바람도, 요염한 여인처럼 제 머리 길게 풀고 자리에 엎드린 밤하늘도 제 모습 유지하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검푸른 비단 같은 하늘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이 총총하다. 그 가운데에 파랗게 빛나는 달빛이 마음 한 켠을 간지럽힌다. 내가 만났던 천사 같았다.

4.
문득 고개를 내리자, 흰 모래 위에 내린 눈이 선명하다. 눈 위에 새파란 달빛이 내려 반짝거렸다, 진주 가루를 내어 뿌린 것처럼. 두어 걸음을 옮기자 발 밑에서 사박사박 흔들리는 모래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들자, 내 손 안에는 새하얀 깃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난꾸러기 바람이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스치는 바람은 분명 겨울 바람이라 차가운데 마음 한 켠은 여전히 따뜻하다. 천사가 나누어 준 온기가 분명 마음 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리라. 나는 속삭였다. 내 진심을 가득 담아서.

".....고마워요."


물고기는 이제, 숨을 쉬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5.
소녀는 긴 머리 나부끼며 걸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이 경쾌했다. 눈 쌓인 모래사장 위로 꾹꾹 밟아 낸 발자국이 밀려드는 파도에 의해 지워졌다. 잠시 뒤를 돌아보던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돋았다. 과거의 아픔은 모래 발자국과도 같아서, 저리 쉽게 지워질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긍정해 본 소녀는 잠시 후 달리기 시작했다. 온 몸에 가득 활기가 돋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였다. 가득 들이마쉰 숨은 소녀의 몸에 힘을 주었다. 즐겁고 즐거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기쁜 일이었던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소녀는 잠시 후 헐떡이며 제 자리에 멈추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소녀의 얼굴은 행복하다고, 감히 믿을 수 있을 만치 밝았다.


- 그래서 소녀는 숨을 쉬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577 단편 나무 Story will.B written 2010.07.02 0
1576 단편 악녀, 탄생하다2 회색물감 2010.06.28 0
1575 단편 충(蟲) 고래 2010.06.27 0
1574 단편 마이클 잭슨 고마워요 사랑해요7 dcdc 2010.06.25 0
1573 단편 굴레 (The fate of accursed god)2 인생뭐있나 2010.06.17 0
1572 단편 학원 알바 김정남 2010.06.14 0
1571 단편 아내의 눈물 퍼플 2010.06.11 0
1570 단편 날개 응햙? 2010.06.06 0
1569 단편 화이트 독(White Dog) 베어울프 2010.06.03 0
1568 단편 Da Capo 해나 2010.06.01 0
1567 단편 달갈프라이 소년의 생애 이머루 2010.05.27 0
1566 단편 채굴자3 먼지비 2010.05.25 0
단편 예담 2010.05.19 0
1564 단편 르샤마지끄Le Chat Magique 예담 2010.05.19 0
1563 단편 잉여인간 김진영 2010.05.15 0
1562 단편 부인 초삭 2010.05.15 0
1561 단편 즉흥환상 1G 2010.05.13 0
1560 단편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 주인공이고 싶다 1군 2010.05.11 0
1559 단편 황금으로 된 별을 발견한 사람 먼지비 2010.05.08 0
1558 단편 달로 가는 티켓 이터너티 2010.05.05 0
Prev 1 ...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