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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화이트 독(White Dog)

2010.06.03 14:1506.03


“뭘 그리니?”
내가 물어도 세훈은 묵묵부답이었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해서 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홉 살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한 세훈의 뒷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세훈에게 키 크는 영양제를 사주라고 부탁했건만, 새엄마는 마이동풍이었다. 이러니 내가 새엄마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기르기 원하는 개야.”
한참 후에야 대답하는 세훈의 목소리는 의기소침해있었다. 그러면서도 색연필을 쥔 고사리손을 부지런히 놀려 스케치를 하고 있다. 내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세훈아. 꿈 깨. 새엄마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나는 애써 세훈을 다독거렸다. 세훈은 못들은 척 색연필만 바삐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진돗개를 닮은, 크고 늠름하게 생긴 개야. 털은 흰 색인데 윤기가 흘러.”
개를 키우려는 세훈의 소망을 새엄마는 철저히 무시했다. 새엄마가 개털 알레르기 운운 하며 반대하는 것은 속이 빤히 보이는 핑계였다. 본인의 외모를 가꾸는데 투자하느라 시간이 모자라서 개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을 뿐이다. 아빠는 엄마가 죽은 후에 새엄마를 만났다고 우겼지만, 누가 그 말을 신용하겠는가. 엄마가 스트레스가 쌓여 암으로 죽은 것도 순전히 아빠의 바람기 탓이다.
세훈도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빠 같은 바람둥이가 되면 큰일이다. 다행히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낮다. 아빠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면, 세훈은 정반대로 소심함의 극치다. 아홉 살인 세훈은 선천적인 약골에, 신경이 예민해서 걸핏하면 잠을 설쳤다. 엄마가 죽은지 일 년 만에 새엄마가 등장하자 상처를 받았는지 세훈의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마가 하듯 세훈을 보살피려니 어림도 없다. 나는 열 일곱 살의 고등학교 일학년 여학생이고, 학업 성적이니 다이어트니 내 고민거리만 해도 감당을 못했다. 고백하건대 늦둥이 동생인 세훈은 내게 버거운 짐이었다.
“세훈아, 누나는 학원 간다. 무슨 일 있으면 누나 휴대폰으로 전화해라. 알았지?”
내 말에 세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림에만 전념했다.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상상 속 애완동물을 그리며 위안을 삼는 동생이라니, 나까지 씁쓸해졌다. 슬픔이 허기로 둔갑했는지 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나는 냉장고를 열고 주섬주섬 어린이 치즈를 꺼냈다. 밥을 원수 보듯 께작거리는 세훈에게 주려고 내가 용돈을 모아 사놓은 간식거리였다. 그런데 세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까운 마음에 내가 처치하는 형편이다.
나는 거듭 다이어트에 실패했다. 서른 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섹시한 새엄마를 보면 괜히 열 받아서 식욕이 솟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혼 후 새 남편을 물색하던 새엄마는 치아교정을 하러 아빠의 병원에 들렀고, 꾸준히 내원하는 과정에서 아빠와 눈이 맞았다. 아빠는 새엄마의 쭉쭉빵빵 몸매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 내용물의 품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개미허리인 새엄마 옆에서 내 절구통 허리는 상대적으로 굵어 보일 것이다. 자괴감에 허덕이면서도 나는 어린이 치즈 한 봉지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새엄마라는 막강한 장애물로 막힌 내 인생은 저주받은 것같았다. 그렇다면 이 저주를 기필코 남에게 돌려줄 테다.

“아까 그린 그림 보여줘.”
“무슨 그림?”
“내가 학원 가기 전에 네가 스케치북에 그리던 개의 그림.”
세훈은 움찔하더니 내 시선을 피해 먼산을 봤다.
“마음에 안들어서 찢어버렸어.”
세훈이 초조한 듯 코를 문지르는 것이 좀 수상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미운 아홉 살짜리 동생의 변덕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내가 입력한 검색어는 저주의 주문이었다. 새엄마의 머리카락을 넣은 저주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로 찌를 작정은 아니었다. 다만 새엄마가 뚱뚱해지고 밉게 되는 주문이 있다면 기꺼이 외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새엄마에게 느끼는 열등감도 희박해질 것이고, 나는 이른바 착한 딸이 되어 새엄마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 벽을 타고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옆집에 이사 온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우는가 보다. 울음소리가 우렁찬 것으로 미루어보아 덩치가 큰 개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려면 밤에 울지 못하도록 훈련시키는 게 예의인데, 저게 뭐야. 이리하여 내가 저주하는 대상의 목록에 옆집 이웃이 추가됐다. 내 개인적인 저주 목록은 한없이 늘어났다. 죽은 엄마와 세훈을 제외한 온 세상이 내게는 적이었다. 적을 따돌리고 내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인터넷 상으로 떠도는 저주의 주문은 하나같이 유치원생 수준이어서 도움이 안됐다. 이런저런 잡념으로 뇌를 혹사하고 에너지를 소모한 탓에 뱃속에서 꼬르륵 허기가 춤을 췄다. 나는 야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감싸쥐고 몸부림쳤다.

새엄마의 비명은 그야말로 돼지 멱 따는 소리였다.
“누가 내 구두를 물어뜯었어! 내 날씬한 발목을 돋보이게 하는 명품 펌프스를!”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 침대에서 어기적거렸다. 아침부터 새엄마의 히스테리에 시달려야하다니,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이다.
“가죽이 너덜너덜 떨어졌어. 꼭 개가 물어뜯은 것같아. 당신 생각도 그렇지?”
“말도 안되는 소리. 오늘은 치과 예약 환자들이 많아. 밥 먹고 빨리 병원에 가봐야돼.”
아빠가 건성으로 대꾸하자, 새엄마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여 악악댔다.
“여기 이빨 자국을 봐. 개의 송곳니 자국이 아니면 뭐야?”
“그러고 보니 송곳니 자국이 선명하군. 개의 침도 흥건히 묻어있고. 나운아! 나와보렴.”
아빠한테 밉보이면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 수 없다. 앞뒤를 계산한 나는 문틈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어젯밤 개 우는 소리, 너도 들었지?”혹시 옆집의 개가 몰래 잠입해 엄마 구두를 물어뜯
었다면......”
아빠는 스스로도 황당한 듯 말을 끝내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대단한 개군요. 우리 집 대문을 통과하다니 초능력이라도 있나보죠?”
내가 노골적으로 비꼬는 말에 아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아차 싶었다. 용돈 인상은 물 건너갔다.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세훈이 방문을 열고 내다봤다. 세훈은 파자마를 질질 끌며 나오더니, 현관에 놓인 새엄마의 구두를 굽어봤다. 그런 세훈을 보는 아빠의 눈빛에 연민과 불만이 동시에 스쳐갔다.
“우리 아들, 오늘은 웬일로 일찍 일어났니? 아빠가 네 담임선생님을 만나 얘기했단다. 담
임선생님은 네가 좀 더 활발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어. 다른 애들도 너랑 놀고 싶어하는데,
넌 애들을 피해 구석에 숨는다면서?”
세훈을 살살 달래는 아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빠가 뒤늦게 아빠 노릇에 충실하려고 노력해도, 세훈의 마음을 얻기에는 한 발 늦은 것 같다. 염색한지 한 달도 안됐을텐데 아빠의 흰머리가 쑥쑥 올라와 정수리 위로 나부꼈다. 열두 살 연하인 새엄마와 사느라고 무리했는지 요즘 아빠는 폭삭 늙어버렸다.
아빠의 진부한 충고 따위는 귓전으로 흘리며 세훈은 새엄마의 구두만 응시했다. 세훈이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쾅쾅쾅. 새 엄마가 내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왜 그래요?”
나도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새엄마는 초췌한 기색으로 연신 기침을 하고 코를 훌쩍였다. 하도 코를 풀어서 새엄마의 코끝이 빨개져있었다. 새엄마는 다짜고짜 내 팔을 움켜잡더니 안방의 파우더 롬으로 끌고 갔다.
“네 눈에 이게 무슨 털로 보이니?”
새엄마가 가시 돋힌 어조로 물었다. 화장대의 화장품 주위로 짧고 굵은 흰 털이 흩어져있었다.
“뭐긴 뭐예요. 아빠의 흰 머리카락이지.”
나는 진지하게 얘기했건만, 새엄마는 벌컥 화를 내며 반박했다.
“이건 개털이야. 나처럼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겐 치명적이야.”
“개털일 리가 없어요. 세훈이가 누구 때문에 개를 못 키우는 줄 알잖아요.”
“난 확신해. 이 촉감은 개털이 맞아.”
새엄마가 흰 털을 내 손바닥에 얹었다. 흰 명주실을 뚝뚝 끊어놓은 것 같은 털이었다. 흔히 보는 개털과 달리 오묘한 광채를 발했다. 마지못해 만져보았다. 매끄럽기가 비단을 능가했다. 아빠의 흰 머리카락은 철사처럼 뻣뻣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훈이 장난이지? 넌 알면서도 동생을 감싸는 거지?”
새엄마의 짐짓 떠보는 말에 내 머리 뚜껑이 열렸다.
“동생은 그럴 애가 아니에요.”
새엄마가 째려보자 나도 질세라 눈싸움에 응했다. 결과는 새엄마의 기권패였다. 새엄마는 화장대 위의 흰 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에 경악해서 눈싸움을 중도포기한 것이다. 내 손바닥의 흰 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사라져버렸다. 귀신에 홀린 듯 했다.
내가 황급히 세훈의 방으로 갔을 때, 방문은 굳게 잠겨져있었다. 아홉 살짜리가 무슨 사생활이 있다고 방문을 걸어 잠근단 말인가. 절로 코웃음이 처졌다.
“세훈아. 누나야. 문 열어.”
세훈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세훈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방문에 귀를 바짝 대고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엔 세훈이 뭐라고 말을 받았다. 킁킁거리는 소리와 세훈의 목소리가 마치 대화하듯 주거니 받거니 이어졌다.
“문 열지 않으면 아빠한테 이른다.”
내 엄포가 효력을 발휘했는지 방문이 열렸다. 세훈은 침대에 걸터앉아 발을 까불거리고 있었다.
“너, 누구랑 얘기했니?”
내가 묻자, 세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적 없어.”
내게는 익숙한 그 표정을 직면하노라니 부아가 치밀었다. 바람피우다 들켜 엄마의 심문을 받을 때마다 아빠가 상비약처럼 활용하던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세훈이 시치미 떼는 것은 꺼림칙한 징조였다. 나는 새엄마의 화장대에서 본 흰 털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옆집 부부와 인사를 나눴어. 어떤 애완동물도 키우지 않는다고 장담했어. 나는 염치불구
하고 집안까지 들어가 살펴봤어. 실제로 개는 없었어.”
아빠의 말을 들으며, 새엄마는 여전히 불신하는 눈빛이었다.
“당신도 봤잖아. 내 물어뜯긴 구두의 이빨자국을.”
“개의 이빨자국이라는 증거는 없어. 가죽이 낡아서 해어졌을 수도 있어.”
“그럼, 내 화장대의 개털은? 내가 헛것을 본 거야?”
일요일 점심 시간에 벌어지는 아빠와 새엄마의 부부싸움은 이종격투기 생방송만큼 치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했다. 옆자리의 세훈을 힐끔 봤다. 어찌된 영문인지 세훈도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있었다. 영양제를 먹은 것도 아닌데 세훈의 입맛이 돌아오다니 신기했다.
“나운이도 그 개털을 봤어. 희고 짧은 털이었어. 그렇지? 나운아.”
새엄마가 내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나는 몹시 난감했다. 흰 털이 사라졌다고 얘기했다간, 아빠가 날 정신병자 취급할 것이다. 어쩌면 새엄마가 날 정신병원에 감금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럴 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왕이면 세훈이 하듯 순진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얼굴만 실룩거릴 뿐 잘되지 않았다.
“글쎄요. 화장대 조명이 어두워서 자세히 못봤어요.”
내가 일격을 날리자, 새엄마의 얼굴이 경련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승리의 뒷맛은 츄파춥스처럼 달콤했다.  

세훈의 학원 선생이 전화해서 아빠에게 고자질했다. 세훈은 이번 주 내내 학원을 땡땡이친 것이다. 아빠는 심하게 야단치면 세훈이 엇나갈까봐 조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타일러보겠다고 청하자 아빠도 승낙했다. 나는 세훈을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로 내려왔다. 우리는 아파트 놀이터의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세훈아, 엄마 유언을 잊었니? 넌 꿋꿋이 살아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해.”
“이 세상에 훌륭한 어른은 없어.”
세훈이 어린애답지 않게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뜨악해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학원을 가든 말든 세상은 변하지 않아. 세상은 어른들의 놀이터야. 애들은 낄 틈이
없어. 누나도 잘 알텐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별소리를 다하는군. 세훈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 꾹 참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네도 미끄럼틀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훈이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해를 등지고 섰다. 세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곁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뾰족하게 솟은 귀. 말려 올라간 꼬리. 세훈이 걸음을 옮겼다. 개의 그림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훈의 그림자를 따라다녔다. 개의 그림자에서 풍겨나오는 압도적인 아우라는 세훈의 그림자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누나, 춥지 않아? 집에 가자.”
세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이성을 일깨웠다. 이미 개의 그림자는 사라진 후였다.

사건의 발단은 부부 동반 모임에 참석하려고 새엄마가 옷장을 열었을 때 시작됐다. 새엄마는 결혼 전 아빠로부터 선물 받은 비비안 웨스트우드 원피스를 골랐다. 약아빠진 아빠는 중고를 저렴하게 구입해서 생색을 냈었다. 새엄마가 비비안 웨스트우드 원피스를 입으려고 하는 순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피스에 개의 배설물로 추정되는 것이 무더기로 퍼질러 있었던 것이다.
새엄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기절해버렸다. 새엄마가 도통 외출 준비를 마치지 못하자, 의아해진 아빠가 안방에 들어갔다. 아빠는 대자로 뻗어버린 새엄마와 새엄마의 원피스에 퍼질러진 개똥을 보고 질겁했다. 아빠는 아우성치며 우리를 불렀다.
“바른 대로 말해. 너희가 담합해서 저지른 소행이지?”
흥분한 아빠는 침을 튀기며 우리를 들볶았다. 황금색 바나나 형태의 개똥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자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훈은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 개똥을 어디서 구해와요? 우리가 개똥을 구해오는 걸 아빠가 봤어요? 새엄마의 원피
스에서 우리의 지문이 채취됐나요? 아빠는 심증과 물증의 차이도 몰라요?”
내가 따지듯 항변하자 아빠는 입을 다물었다. 세운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나, 저것 봐. 개똥이 빛나고 있어.”
이 와중에 농담을 하다니. 핀잔을 주려고 했다. 그 때 아빠가 털썩 주저앉더니 신음했다. 세훈은 농담을 한 게 아니었다. 원피스에 묻은 개똥에서 황금색 광채가 발산되며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엉겁결에 세훈을 얼싸안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여보, 정신 차려.”
아빠가 새엄마의 뺨을 때렸다. 새엄마는 겨우 깨어났지만, 얼굴이 사색이었다. 나도 세훈을 부축하며 일어났다. 방안의 황금색 광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새엄마의 투피스도 멀쩡했다. 냄새도 흔적도 없었다. 일시에 바보가 된 우리 네 명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사건의 진상을 실토할 수 없었다. 방금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은 무덤 속까지 가져가는 비밀로 하자고, 우리는 암암리에 동의했다.
  새엄마는 사람이 아주 변해버렸다. 새엄마의 전매특허인 요염한 미소와 애교도, 남자를 자극한다는 톡톡 튀는 말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새엄마는 기가 빠진 사람처럼 비실거리더니 자리를 깔고 몸져누웠다. 새엄마는 두통을 호소했고,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집안 살림을 일절 하지 못했다.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스트레스 증후군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일주일에 세 번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왔다. 솔직히 말해 가사도우미 아줌마의 요리 솜씨는 새엄마보다 나았다.
유령 같은 개는 더 이상 출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개가 새엄마에게 남긴 정신적 외상은 좀처럼 치유되지 않았다. 유령 같은 개에게 연이어 당한 후, 새엄마도 덩달아 유령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새엄마는 졸지에 실어증 환자가 된 듯, 우리는 물론 아빠에게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새엄마와 사이가 소원해지자 아빠도 염색을 그만 뒀다. 아빠의 흰머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거의 반백이 됐다. 아빠는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댔다.
저주의 주문을 써먹기도 전에 내 소원이 실현됐지만, 나는 착잡할 따름이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구상한 시나리오는 새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고, 우리끼리만 오붓이 사는 가정이었다. 아빠를 왕따시키고, 세훈과 나 단둘이 엄마의 추억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려고 했었다. 지금돌이켜 보면 그 시나리오는 유치찬란해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이거야 원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 사는 집에는 온갖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는 법인데, 우리 집에는 그런 원초적인 감정의 근원이 말라있었다. 인위적인 평화의 그늘 아래서 우리 가족은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 무기력하게 삶을 연명했다. 가족 중에서 오직 세훈만이 밝고 명랑했다. 세훈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입가엔 미소가 배어있었다. 세훈은 냉장고의 간식을 열심히 챙겨먹고, 케이블 TV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며 신이 나서 발을 굴렀다.
반대로 내 경우는 입맛이 딱 떨어졌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뱃속의 허기가 사라진 것이다. 야식을 끊어도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다이어트라는 단어의 의미도 퇴색했다. 나는 부지불식중에 할머니가 된 듯 노티를 팍팍 내며 인생을 달관하게 됐다. 누군가를 저주하며 그 대상의 목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도 깨달았다. 인생 자체가 시시한데 저주하면 뭐하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저주와 무관하게 인생은 주기적인 일식의 패턴을 따르고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일식이 지나갈 때까지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다보니 학원이 예고 없이 휴강하는 날도 있다. 학원 강사가 교통사고를 당했대나 어쨌대나. 나는 만세삼창을 한 뒤 희희낙락해서 집에 돌아왔다.
“세훈아! 누나 왔어.”
세훈의 방은 텅 비어있었다. 온 집안을 뒤져 세훈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장소는 안방이었다. 새엄마가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있는 안방에 세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했다.
“세훈이 여기 있어요?”
무턱대고 안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새엄마는 의식을 잃은 듯 침대 밑에 쓰러져 있었다. 새엄마를 올라탄 짐승이 나를 노려보았다. 헉 숨이 막혔다. 송아지만한 그 짐승은 앞발로 새엄마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진돗개와 유사하지만, 진돗개는 아니었다. 개의 흰 털은 가닥마다 후광을 입혀놓은 듯 빛났다. 새엄마의 화장대에서 목격했던 흰 털의 주인이 바야흐로 자신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다.
흰 개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게 개입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몸짓이었다. 흰 개의 인광이 번득이는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나는 이내 항복하고 말았다. 비굴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까스로 안방을 뛰쳐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휴대폰으로 119를 호출했다.
“엄마가 쓰러졌어요. 살려주세요.”
새엄마를 엄마라고 부른 건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새엄마에 대한 색안경을 벗기로 했다. 새 엄마가 내 나이에 사고를 쳐서 딸을 낳으면 나 같은 딸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먼 훗날 새엄마처럼 섹시해질 수도 있고, 새엄마처럼 재혼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새엄마가 보통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119 응급대의 도착은 예상보다 늦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방에서 나가 거실을 서성였다.
“어? 누나 왔어?”
세훈이 츄파춥스를 빨며 나타났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세훈은 안방에서 나왔다.
“너, 안방에 있었니? 그 개를 봤니? 개가 아직도 있니?”
나는 세훈의 어깨를 흔들며 질문을 퍼부었다.
“무슨 소리야? 난 내 방에 있었어. 흰 개는 못봤다고.”
세훈은 세차게 도리질하며 부인했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훈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한 것이다. 내 입으로는 흰 개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세훈은 자연스럽게 흰 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새엄마를 병원으로 옮긴 119 대원들에게도,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아빠에게도 흰 개에 관한 이야기를 숨겼다. 흰 개로부터 새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나로 하여금 침묵을 지키게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흰 개가 날 공격하지 않고 사라진 사실에 안도했다. 새엄마를 향한 흰 개의 살의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세훈으로 밝혀질까봐 두려웠다.
병원에 간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심장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새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말에 내 가슴이 무너졌다. 흰 개의 범행을 묵인한 나는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새엄마의 병상을 지키게 되자, 집에는 세훈과 나, 둘만 남게 됐다.
“새엄마는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거야.”
내가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차린 저녁을 먹으며, 세훈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세훈은 고개를 쳐들며 의기양양한 어조로 덧붙였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야.”
그 순간 세훈의 뺨을 때릴 뻔했다. 내 동생의 내면에 그런 사악한 심성이 잠재돼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런 말 하면 못써. 새엄마가 썩 좋은 여자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할 만큼 했잖아.”
내 말이 못마땅했는지 세훈이 팔짱을 끼고 건방진 자세로 말했다.
“누나가 새엄마 편을 들다니 실망이야. 화이트는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데.”
“화이트? 화이트가 누구야?”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그 뻔뻔스러운 표정이 세훈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내가 키우는 개야. 털이 흰 색이어서 이름도 화이트야.”
“개가 네 말을 듣는다니 무슨 뜻이야? 네가 그 개를 조종하니?”
내가 다그치자 세훈은 신경질을 내며 대들었다.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 화이트의 주인은 나야.”
새엄마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세훈의 반응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만약 세훈이 그 사건들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면? 세훈이 화이트를 시켜서 새엄마를 골탕 먹였다면? 불길한 예감이 내 뇌리에 맴돌았다.
“세훈아. 너, 날 속이는 게 있지?”
내가 윽박지르자 세훈은 도끼눈을 뜨고 고함을 질렀다.
“누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세훈이 숟가락을 내던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이가 없었다.
“누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혼나고 싶어?”
나는 세훈의 뒤통수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세훈은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문제집을 펴놓고 꾸벅꾸벅 졸던 나는 문득 잠이 깼다. 꿈결처럼 아련히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는 위협적이고 사나웠다. 벽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졸음을 쫓으려면 냉장고의 찬물이라도 마셔야할 것 같았다. 방에서 나와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은 어두웠다. 거실 벽에는 여러 개의 전등 스위치가 한데 모여 있었다. 그 중 거실의 조명을 켠다는 게 실수로 발코니의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발코니가 환하게 밝혀졌다. 백열등 불빛 아래 우두커니 앉아있는 세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몸집이 우람하고 당당했다.
“너 거기서 뭐하니?”
내가 발코니로 다가가자 세훈의 뒷모습이 명확하고 세밀해졌다. 세훈에게 찰싹 붙어 한몸이 되어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무시무시한 전율이 내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새엄마를 심장발작에 이르게 했던 그 흰 개였다. 흰 개가 분리되자 세훈은 원래의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훈이 일어나서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세훈의 눈빛은 초연하고 무심했다.
“소개할게. 내 화이트야.”
세훈은 흰 개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흰 개는, 화이트는 위풍당당하게 포효했다. 귀에 익은 그 울음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울음을 그친 화이트는 얌전히 세훈의 손을 핥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한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쏘아대려고 벼르던 저주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오다니. 세상은 공평했다. 결국은 내게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했다. 괴물 개가 동생의 애견이 되고, 그 애견이 우리 가정을 파괴하는 것처럼 끔찍한 저주는 없었다.
“화이트는 우리를 엄마에게 안내해줄 거야.”
세훈이 날 선 어조로 하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국사 시간에 주워들은 얄팍한 지식이 내 머릿속에서 난무했다.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로 인식되어 있었다. 옛사람들은 개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현세에서 저승세계로, 저승세계에서 현세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흰 개가 내 눈앞의 화이트였다.
“나는 화이트에게 엄마를 돌려달라고 때를 썼어. 화이트는 그 대가로 새엄마를 요구했지.
오늘 밤, 엄마와 새엄마를 맞바꿀 거야.”
세훈의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는 비장했다. 내 머릿속 퓨즈가 퍽 터지며 끊어졌다.
“누나, 기쁘지 않아? 우리는 엄마와 재회하는 거야.”
세훈은 으스대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나는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린애인 세훈이 닳고 닳은 중년 아저씨를 흉내내는 모습은 징그럽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화이트가 세훈의 옷자락을 살짝 물고 잡아당겼다. 세훈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화이트 말이 서둘러야한대. 저승길은 그리 만만치 않대.”
몇 시간 전에 먹은 저녁이 내 목구멍을 타고 고스란히 올라오려고 했다.
“싫어. 너나 저승에 가!”
세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세훈은 손힘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않았다. 어둠이 쏜살같이 밀려와 우리를 둘러싸며 짙어졌다. 내가 발을 딛고 선 발코니 바닥이 출렁거리며 소용돌이쳤다. 소용돌이 속에서 심연이 아가리를 벌렸다. 화이트가 심연의 아가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세훈이 화이트를 따르자, 나도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우리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뽀얀 강물 속에 서있었다. 저만치 앞선 화이트가 유유히 개헤엄을 치며 전진했다. 세훈은 뭐에 씌었는지 첨벙첨벙 잘도 걸어갔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세훈을 뒤쫓아갔다. 강물이 점점 불어나 허리까지 올라왔다. 강물의 빛깔도 샛노랬다. 내가 주춤하자, 화이트가 뒤돌아보고 재촉하듯 짖었다. 강물은 어느새 목까지 차올랐다. 피처럼 붉은 강물이었다. 세훈처럼 화이트의 등에 올라탄 채 강을 건너긴 죽기보다 싫었다. 수영을 배우지 않은 것이 후회막심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가 아는 모든 신들의 가호를 빌었다.
신들은 자비롭게도 내 소원을 들어줬다. 무사히 강을 건너자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졌다. 가지각색 꽃들이 만발한 꽃밭이었다. 아이들이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꽃밭에 주고 있었다. 꽃밭을 거닐던 한 여인이 우리를 알아보고 탄성을 질렀다. 엄마였다.
“엄마!”
세훈이 애타게 부르며 뛰어갔다. 세훈이 와락 안기자, 나도 엄마의 품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속으로만 삭여왔던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나는 목이 메었다. 엄마도 우리를 껴안은 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너희가 서천강을 건너 서천꽃밭까지 오다니. 난 꽃감관으로 일하고 있단다. 이 서천꽃밭
의 꽃들을 지키는 게 내 임무야.”
엄마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부심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서천꽃밭에만 피는, 인간의 생명과 운명을 관장하는 꽃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환생꽃, 사람을 죽게 하는 수리멸망악심꽃, 보기만 하면 웃게 되는 웃음꽃, 보기만 하면 싸우게 만드는 싸움꽃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환생꽃은 검은 색, 노란 색, 빨간 색, 파란 색, 하얀 색의 다섯 빛깔의 종류가 있는데, 각각 죽은 사람의 뼈와 살, 피, 숨, 혼을 살려낸다고 했다.
우리가 엄마의 얘기를 경청하는 동안 화이트는 꽃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윽고 화이트가 꽃 다섯 송이를 꺾어 한꺼번에 입에 물고 왔다. 검은 색, 노란 색, 빨간 색, 파란 색, 하얀 색의 다섯 빛깔의 꽃이었다. 화이트는 엄마 앞에 꽃 다섯 송이를 내려놓았다. 엄마의 표정이 굳어지며 화이트와 우리를 번갈아 일별했다.
“엄마, 그 환생꽃을 먹고 우리랑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세훈이 팔을 잡아끌었지만, 엄마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어. 너희는 이승의 자식들이지만, 나도 저승에 와서 새 자식들이 생겼거든.
난 저 아이들의 영혼을 돌본다고 약속했어. 너희에겐 미안하지만......”
연못에서 물을 길어오는 아이들을 눈짓하며,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아빠가 새 가정을 꾸렸듯 엄마도 저승에서의 새 삶이 있었다. 나는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특히 세훈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듯 어깨가 축 처졌다.  
“늦었어요. 새엄마는 저승의 문턱에 와있어요. 엄마와 새엄마가 서로 자리를 바꾸기만 하
면 문제없어요.”
세훈이 징징 짜며 엄마를 설득하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러나 세훈을 비껴간 엄마의 시선은 연못가의 아이들에게 머물고 있었다.
“아니.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 환생꽃은 새 엄마에게 주도록 해. 너희도 지체하지 말
고 이승으로 돌아가. 서천은 애들이 놀러오는 곳이 아니야.”
세훈과 엄마의 대화를 듣던 화이트는 목덜미의 털을 세우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화이트가 껑충 뛰어오르며 세훈의 팔을 물었다. 눈이 뒤집힌 엄마는 세훈에게서 화이트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화이트는 엄마에게 덤볐다. 엄마가 화이트를 걷어찼다. 화이트가 엄마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화이트와 엄마는 뒤얽힌 채 서천꽃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얼이 빠졌고, 세훈은 울먹였다.
세훈의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입술은 부르터져 딱지가 앉았고, 바지 주머니는 불룩했다. 그제야 세훈의 바지 주머니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종이가 눈에 띄었다. 몇 번을 곱게 접고 또 접은 종이. 내가 냉큼 그 종이를 낚아채서 펴보았다.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종이에는 세훈의 솜씨로 흰 개가 그려져 있었다. 노란 색연필로 윤곽을 그린 후, 흰 색연필로 털을 묘사한 흰 개는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이게 화이트야?”
내가 멍하니 묻자, 세훈은 고개를 떨궜다. 흰 개의 그림 옆에 연두색 색연필로 몇 몇 글귀가 적혀있었다. ‘새엄마를 괴롭히기.’‘새엄마를 앓아눕게 하기.’‘새엄마와 엄마를 바꾸기.’세훈의 필체였다.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이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세훈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가공의 동물이었다.
“그림 주제에 감히!”
나는 화이트가 그려진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엄마의 목에 이빨을 박던 화이트는 일순 동작을 멈췄다. 화이트의 몸이 쩍쩍 갈라지며 금이 갔다. 그러더니 산산조각 분해되어 흩날리며 먼지가 됐다. 그 먼지가 비처럼 내리자, 서천꽃밭이 일렁이며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모든 꽃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울음소리였다. 그 울음소리가 공명이 되어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엄마가 돌본다는 저승의 아이들이 엄마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엄마가 양팔을 벌려 그 애들을 껴안았다. 꽃들은 격렬하게 요동치며 꽃잎을 마구 떨어뜨렸다. 꽃잎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높이 솟구쳤다. 세훈과 나는 서천꽃밭에서 멀리 내팽개쳐졌다. 서천꽃밭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갔다. 엄마는 안개에 파묻힌 듯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엄마를 재차 잃어버린 셈이며, 그걸로 끝이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벽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빠였다. 극적으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새엄마가 일반 병동으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빠는 들뜬 나머지 헛소리도 했다.
“아내가 꿈속에서 너랑 세훈이를 봤대. 너희가 서천꽃밭의 환생꽃을 줬다면서?”
아니에요. 엄마의 은덕이 새엄마를 구했어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 발길은 세훈의 방을 향했다.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세훈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아있고, 파자마는 땀에 젖어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은 한결 성숙하고 의젓했다. 하룻밤사이 세훈의 키가 한 뼘이나 자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훈의 꽉 쥔 주먹 사이로 흰 털 한 가닥이 반짝였다. 그 흰 털은 예전처럼 호기심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것은 무의식의 찌꺼기에 불과하니까. 언젠가 세훈이 어른이 되면 화이트는 세훈의 유년의 기억 속으로 침잠해버릴 것이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세훈의 주먹에서 빼낸 흰 털을 창밖으로 날려보냈다. 화이트와도 영영 이별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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