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엔딩의 발견

2020.12.29 07:4112.29

엔딩의 발견

 

급한 연락이라도 온 것처럼 새벽에 눈을 떠서 휴대폰을 집어드는 습관은 아리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 한 번 그렇게 깬 밤들에 아리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습관은 자기도 모르게 영원이 되어버리는 일들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당장 운동화를 꿰어신고 휴대폰과 지갑만 들고 뛰어나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그녀를 깨우는지, 아리는 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뛰어나갔던 건 아주 오래 전이었고, 생각해보면 정우가 새벽이라고 할 만한 시간에 그녀를 불러냈던 건 그렇게 자주 일어났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몇 번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영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이 처음 40도를 찍은 그 여름에 아리는 유난히 자주 잘못된 시간에 눈을 떠서, 물 한 잔을 앞에 두고 식탁에 앉는다. 서울의 여름이 선풍기만으로 버틸 수 없게 된 2010년대 말에도 새벽은 여전히 고유의 추위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타오르고 있고,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결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어쩌면 새벽에는 정말로 타오르는 것이 잠시 멈추는지도 몰랐다.


그 모든 일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우가 한밤중에 서울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왔다고 들은 것은 아마도 한문 시간 아니면 역사 시간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들 잠들어 있거나 잠들기 직전에 있는 그런 시간들이야말로 다른 곳에는 좀처럼 교환되지 않는 비밀들이 교환되는 때였고, 학교라는 공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시간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다른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나든 학교라는 곳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어쩌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다섯 시에 집에 왔어. 차비가 없어서..” 라는 것이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깬 정우의 불완전한 설명이었다

처음 차비를 빌려주러 나간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리가 올림픽 공원에 처음 간 것은 정우를 위해서였으며 아주 추운 날이었다. (학교 소풍으로 올림픽 공원에 가서, 하얀 빛 속에 돌아가는 호수의 바람개비들을 봤던 것은 분명 그보다 나중의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였다. 내성적인 당시의 아리가 “나 밤에 통금도 없는데 차비 필요하면 문자해” 같은 말을 먼저 꺼낼 수 있었을 리가 없었는데. 정우는 부탁은 커녕 여자애들과 말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겨울 밤에 아리가 본 올림픽 공원은 그녀가 그때까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밤은 아주 추웠지만 추운 밤이라고 해서 빛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 밤 덕분에 그녀는 올림픽 공원을 영원히 아주 좋아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그녀에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는 일은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정우가 세상에 대해 처음 얘기한 것도 올림픽 공원 후문 근처에 있는 롯데리아에서였다. 그날은 너무 추워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깊은 밤이었지만 정우는 언제보다도 깨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추워하고 있었고 항상 그렇듯 잠이 모자라 보였지만, 학교에서와는 달리 전혀 졸려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라고 들었어. 요정들한테 몸을 빌려주는 건데 아무 것도 할 필요 없고 밤에 시간만 좀 내주면 된다고. 그래서 시작했는데, 밤에 집에 데려다주는게 아니라 자꾸만 이상한 데다가 날 두고 가는 거야. 이 근처도 익숙해져서 이제 괜찮긴 한데.”

“그런 이상한 아르바이트면, 그만둬야 되는 것 아니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심각하게, 아리는 물었다.

정우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너는 긍정적인 편이야?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게 많은 편이야?”

아리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딱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리가 긍정적인 편이 아니라고 하면 정우는 하려던 말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

“세상을 구해야 된다는 거야. 요정들 말이.”

말을 고르고 있는지 말을 끝냈는지 모를 침묵 속에서 정우는 한참을 더 빨대로 콜라를 젓다가 멈췄다.

“세상을 구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해야 되는데. 이게, 너한테는 미안해.” 그는 말했다.

그 말의 뜻을 당시의 아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긴 겨울 동안 집에만 있다고 해서 달리 더 좋은 일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었고(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명목은 차비를 빌려주러 나왔다지만 어차피 집은 같은 쪽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요정들은 지하철 막차가 끊어지기 전에 몸을 돌려주었으므로, 그들은 긴 귀갓길을 통째로 함께 하곤 했다. 같이 역으로 향하는, 유난히 빛이 많은 길을 그녀는 좋아했다.

세상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때만 해도 아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는 자신이 세상처럼 거대한 것을 좋아하고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구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아주 슬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깜빡하고 있던 건 그 밤의 무수한 빛이나 환한 건물들 같은 것이 세상의 일부라는, 어쩌면 그런 것들이 곧 세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추위 속에서 정우와 본 빛들이 얼마나 오래 잊혀지지 않고 하나하나 그리움이 되어 남을지도 그녀는 모르는 채였지만, 동서울의 빛과 롯데리아는 그렇게 아리의 일상의 일부가 된다. 덕분에 그녀도 낮에 잠이 조금 모자라게 되지만 한문 시간과 역사 시간이 있었으므로 상관 없었다.


리는 고등학교 교실을 너무 좋아했던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대학 생활에는 끝까지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리와 정우가 함께 보내는 밤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혹은 딱 아리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만 변한다.) 그들은 롯데리아보다 맛있는 곳에서 야식을 먹기도 하고, 근처 이십사 시간 카페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더 걸어가서 한밤의 한강을 산책하기도 한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만큼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는다. 춥고 따뜻하고 밝은 겨울 밤들이란 그런 시간이었다. 예를 들어 정우가 학사 경고를 받았던 것이나, 학교에 거의 나가지 않고 잠만 이상할 정도로 많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아리는(어렴풋이 눈치는 채지만) 듣지 못한다. 아리의 어머니와 다단계 피라미드의 일이나, 그로 인해 아리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범한 작은 붕괴들에 대해서도 정우는 듣지 못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리는 그걸 답답하게 느끼지 못하고, 둘은 단 한 번도 말다툼하지 않는다. 그런 침묵과 꼭꼭 챙겨먹는 야식과 모든 것을 날리는 추위까지 한데 모여 빛이었다.

그날이 달랐던 건, 세상이 마침내 2010년대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날따라 요정들이 서울 동쪽이 아닌 낯선 곳에 정우를 두고 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속터미널 근처의 지리는 생각보다 복잡해서, 아리가 날개 달린 다리 밑에서 정우를 찾았을 때는 이미 둘 다 한참 추위에 떤 뒤이다.

“세상 말이야,” 터미널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처음 보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 구석 자리에서 그녀는 아직 녹지 않은 손으로 말을 꺼낸다.

“잠깐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 엄청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멸망해가고 있는 건 아니잖아.”

정우는 자신이 들은 말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우리가 뭘 하지 않아도 세상은 당분간 이대로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 그녀는 설명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그런 식으로 나오는 밤거리가 지겨워졌다거나 다음부터는 못 나오겠다는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아니었다. 잘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어떤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유로 밤거리를 헤매고 다닐 시간 말이었다. (반면 세상은 그날 밤 하얗게 빛나는 고속터미널의 건물들처럼 그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있었고, 밤을 꼬박 요정들의 일에 쓰고 낮에 잠을 보충하는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물론이고, 정우도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고 애초에 잘 전달이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정우는(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날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그는 그녀의 것만큼이나 말하기 어려운 어떤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이 그의 마음의 용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대로이지 않을 거야. 괜찮지도 않을 거야. 세상 말이야.”

그는 이 년도 버티지 못하고 닫게 되는, 생각보다 후렌치 후라이가 맛있던 그 햄버거 집 구석에서 고백한다.

“다 변할 거야. 우리가 세상을 구하지 못하면.”

“변한다는 게, 어떻게?”

그 자리에서 탄소 배출량이나 기후 협약 같은 말을 쓰고 아리에게 검색해 보라고 했더라면, 빙하의 종말에 대해 생생히 묘사했더라면, 그 변화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잘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 역시 정우의 두려움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후로도 정우는 몇 번 더 그녀를 불러낸다. 정확히 어떤 것이 마지막 연락이고 어떤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전화를 받고 나가서 동서울 터미널 근처 한강 진입로에서 그를 찾았던 그날이었는지(그날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다음에도 한 번이나 두 번쯤 더 연락이 왔었는지. 어떤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타이밍을 우리는 당면해서는 결코 알지 못하고, 뒤늦게 기억해보려고 해도 기억의 불완전함만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 마지막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마지막이란 흔히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잊지 못하는 중간 부분들, 그러니까 늦은 밤 올림픽 공원의 고요와 겨울 하늘과 멀리 보였던 아파트 빛들 따위인지도.

그리고 변화는 그것을 알 수 밖에 없는 형태로, 어떤 둔한 사람이라도 어느 순간에는 깨달을 수 밖에 없는 형태로 찾아온다. 미세먼지와 역대급 더위로 얼룩진 어느 봄과 여름 사이에서 아리는 정우의 두려움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때 그의 번호는 이미 결번이 되어 있고, 페이스북 페이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삭제되어 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세상이 멸망해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 있었고, 정우가 그런 일들을 이유로 세상을 구하려고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리의 감에는 그랬다. 누군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기를 그녀는 바란다. 그리고 정우가 그런 존재들 중 하나이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아무래도 그녀가 정우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렇지만 그들은 다시 만난다. 그것은 아주 추운 날의 일로, 아리는 이불 속까지 스며들어오는 찬기에 눈을 뜬다. 그녀가 졸업하고 쭉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만큼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던 2월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리는 반쯤 깬 상태로 생각한다. 겨울이 예전처럼 깊지 않게 된지도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추위가 아니었다. 바닥은 흠칫할 정도로 차갑고, 창문을 열자 바깥은 그해 1월에도 맛보지 못했던 깊은 겨울이다. 단 번에 남아 있던 잠을 걷어내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맑은 추위였다. 미세먼지는 온 데 간 데 없다. 일기 예보에 이런 추위가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리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휴대폰은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채로 먹통이다. 스웨터를 하나 걸치고 내려왔을 때 아파트 단지 안은 건물도 차들도 나무도 모든 것이 잠든 채이다. 그 안에 들어가서 며칠을 나오지 않을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하고 깊은 추위였다. (그런 추위는 정말로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았고, 없었다.) 어째서 그 추위 속 집 밖으로 나왔는지 누가 설명하라고 했다면 그녀 자신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오래된 나무들이 서 있는 놀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정우는 놀이터 들어가는 입구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녀가 오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든다.

“조금 늦었지만.. 아르바이트 값으로 소원을 들어주러 왔어.”

정우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우가 아닌 존재는 말한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는데요.”

“정우가 했잖아. 너도 같이 했고.”

“정우는 아르바이트를 한 게 아니라 세상을 구하려던 거에요. 저는 그냥 정우 친구고요.”

지난 밤까지 제대로 된 데 다시 취직만 된다면 영혼이라고 팔고 싶어했던 건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몰랐지만, 그녀는 이 본 적도 없는 존재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화가 나 있던 것 같았다. 그들이 세상을 구하지 못해서인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게 둔 일들 때문인지는 몰랐다.

“맞아. 그렇지만 너도 우리와 같이 세상을 구하려던 거잖아.”

그녀가 아무 대답도 않자 요정은 말한다.

“정우 대신 받아주는 걸로 하면 안되겠어? 정우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못해서 그래. 네가 무엇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절실히 원하는 것, 그것 말고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어.”

“정말로 원하는 건 안된다고요..?”

“간절히 원하는 건 안 돼. 우리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래. 누구의 소원이든 정말로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거든.” 요정은 묘하게 변명하는 것 같은 투로 말한다.

“정우는..” 그녀는 묻는다. “이제 없는 거죠?”

“맞아.”

“그러면 정우가 잠깐이라도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요정은 그녀의 마음 어떤 부분을 헤아리려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건 간절한 소원이잖아.”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그 정도로 바라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 날씨가 변하는 걸 막아줘요. 몇 년 만이라도.”

아리는 말하면서도 그건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러 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네가 너무 바라고 있어. 그리고..” 요정은 망설이다가 말한다. “그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희 과학자들이 어떻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는 수밖에 없어. 정말로.”

그때 아리에게는 문득 좋은 소원이 하나 떠오른다. 그 소원은..

  •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잠깐 전화하는 건 안 돼요? 정우한테요. 우리가 마지막 만났던 날의.”

► ⑴ 로 간다.

 

  • 지구를 지킬 수 없다면 매년 조금씩이라도 지켜주세요. 그러니까, 매년 하루나 이틀 만이라도 원래대로의 날씨로 있게 해주세요.”

► ⑵ 로 간다.

 

  • “소원, 꼭 당장 대답해야 돼요? 진짜 생각이 안 나는데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보면 안 돼요?”

► ⑶ 으로 간다.

 


⑴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잠깐 전화하는 건 안 돼요? 정우한테. 우리가 마지막 만났던 날의.”

“딱 한 번, 오늘이 지나기 전, 네 휴대폰으로 걸어야 돼.”

요정은 아리를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열 세 자리 번호를 알려준다. 아리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보조배터리를 찾아 방을 뒤진다. 엄마가 깨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아리에게는 대답할 여유가 없다. 아리는 비상 계단에 도착해서야 숨을 몰아쉰다. 옛날식 아파트에만 있는, 아주 오래 되고 삼면이 밖으로 열린 비상 계단이었다. 그녀는 색이 벗겨진 콘크리트 벽들의 고요 속에서 휴대폰이 충전되기를 기다린다.

요정들이 알려준 번호는 해도 뜨지 않았지만 벌써 바퀴 소리와 경적 소리로 가득한 동서울 터미널 앞 공중전화로 연결된다.

‘길 건너서 한강 내려가 있을게.’

정우가 과거의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막 전화를 끊은 시점인 것 같았다. 그날 아리가 정우를 찾았을 때 그는(휴대폰도 없이) 잠실 철교를 지나 한강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물결에 빛이 맺히는 걸 보고 있었고,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평화로워 보였다.

그들은 삼십 분 전화하면서, 간절한 소원이라고는 이뤄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을 한다. 좋았던 것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처음 그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었을 때의 일부터 쭉 이야기하고, 아리는(요정들이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결국 실패하고 서울이 아주 더운 곳이 된다는 것도 얘기해준다. 날씨가 변할 즈음을 전후하여 그가 실종된다는 것도. 정우는 잠깐 말이 없지만, 놀라지는 않은 것 같다.

“음. 그건 그럴 것 같았어.”

그는 그런데 과거의 아리와의 약속 때문에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아니면 너랑 엇갈릴 것 같아. 매번 나와줘서 고마웠던 거 알지.”

“재밌어서 간 거야. 매번, 정말로.” 아리는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앞으로는 그렇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내 생각에, 어떤 일이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게 일어나기 직전이랑 일어날락 말락 할 때인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을 거란 건 아닌데, 아주 일어나버린 다음에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또 괜찮을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택시들의 클락션 소리와 강변북로로 향하는 버스들 소리, 그리고 아직 미세먼지보다는 안개가 많던 아침 공기의 반짝임 속으로 사라진다.

안녕. 그녀는 이상한 추위가 걷히고 구름들이 떠나기 시작한, 조용한 비상 계단에서 말한다. 그걸로 안녕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심지어 날씨 같은 것들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엔딩이었다.

 


“지구를 지킬 수 없다면 매년 조금씩이라도 지켜주세요. 그러니까, 매년 하루나 이틀 만이라도 원래대로의 날씨로 있게 해주세요.”

요정은 반색한다.

“그건 할 수 있지. 언제가 좋은데?”

고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2월과 4월 중에 망설인다. 서울에서 날씨가 제일 좋았던 건 아무래도 4월 같았다. 밤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목련 꽃잎과 벚꽃들이 섞여서 떨어지던.

(여행을 많이 다녔던 그녀의 친구 성희는 도시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다르다고 했다. 도시 전체가 딱 그때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날씨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그건 뉴욕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이지만 도쿄에서는 이른 봄이며, 서울에서는 10월 말에서 11월 사이, 마지막 따뜻함이 남아 있는 늦가을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술자리에 있던 성희의 남자친구 재욱은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은 안 가봐서 모르지만 서울도 봄이 제일 예뻐.’

‘서울 봄은 너무 소란스럽잖아.’

‘늦은 봄은 그런데, 3월은 달라.’

재욱은 그날따라 물러서지 않고, 나뭇가지에 잎은 없고 하얀 꽃들만 맺혀 있는 말 없는 3월이야말로 서울 봄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아리도 서울은 역시 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리는 3월보다는 말랑말랑한 4월 파였다.)

2월은 좋은 날씨라고 하기에는 일반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아리는 이상할 정도로 2월이 그립다. 정우와 서울을 헤매고 다닐 때 가장 추웠던 것도 반짝였던 것도 2월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마지막 눈들이 내리고, (빛이 있는 곳에서는) 정말로 춥지는 않고, 곧 두 번 다시 들르지 않게 될 교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던 2월. 그녀는 결정을 내린다.

“2월이 좋아요. 2월 중에서는 마지막 주가 좋고,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서는..”

그녀는 쉽게 고르지 못하고 망설인다.

“못 정하겠으면 일주일 전체도 되는데.” 요정은 슬쩍 힌트를 준다.

그렇게 해서 2월 마지막 주는(다른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오래된 서울 날씨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월의 좋음을 아는 사람은 원래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리처럼 남몰래 2월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그 일주일은 무엇보다 소중한, 살아갈 힘이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기억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힘이 되지 않고 우리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 없이는 매일을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소원, 꼭 당장 대답해야 돼요? 진짜 생각이 안 나는데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보면 안 돼요?”

요정은 의외로 순순히 납득한다.

“열흘 후에 괜찮아? 그날 저녁에 바람이 불고 온도가 많이 내려갈 거야. 그때 올게.”

그날은 낮부터 무슨 일이 날 것처럼 바람이 불지만, 온도는 생각만큼 내려가지 않고 바람이 공기를 깨끗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가지고 나온 두꺼운 목도리는 짐이 된다. 아리는 요정과 만나기로 한 잠실 롯데몰의 카페에서 기다리지만 요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그녀는 요정들이 추운 날씨가 아니면 인간의 껍질을 쓰고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정우가 그녀를 불러냈던 것도 주로 겨울의 일이었고, 봄이나 가을 중에서도 유난히 추운 날들이었다.

“혹시 내일 모래 새벽은 괜찮아?”  

요정은 정말로 미안한 것 같은 목소리이다.

“괜찮아요. 아직 소원 생각도 다 못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는 이틀 후 삼성역 근처 이십사 시간 카페로 나가는 길에도 결정을 하지 못한 채이다. (아주 많은 양의 돈을 달라는 것을 포함해서)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원은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은 데 취직을 하게 해달라고 빌기는 싫었다. 마음을 다해 절실히 원하는 것과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뭐가 있기는 한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었다.

“이거,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해요? 보통.”

“보통이면.. 타인을 위한 소원이 많지.” 요정은 휘핑크림을 올린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시면서 말한다.

아리는 생각해보지만, 부모님을 그녀 나름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위해 하나뿐인 소원을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리는 그를 꽤나 좋아했지만 그를 위해 뭔가를 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지하철 막차를 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는 시간보다는 돈을 아껴야 하는 취준생이었으므로 그들은 시간을 두고 같이 생각한다. 말도 놓기로 한다. 요정은 제안한다.

“시간 여행 같은 건 어때? 기억을 가지고 갈 수는 없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아니면 캐나다 같은 데로 이민은? 북쪽은 기후가 변하면 오히려 살 만해지는 데들도 있을 거고, 잘 찾아보면 옛날 서울하고 느낌이 비슷해지는 곳들도 있을 거야.”

그건 둘 다 좋은 생각 같았지만 아리는 묘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이상한 말인데, 나는 그런 곳에 가도 영원히 서울을 그리워하면서 지낼 것 같아.” 그녀는 말한다. “시간 여행은 언제로 가는 건데?”

“아주 옛날이나 모르는 시대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의외로 별로 없어. 보통은 좋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몇 년 전이나 어릴 적으로.. 좋았던 시간을 한 번 더 사는 거야. 너는 그런 건 관심 없어?”

“그래도 결국은 이런 결말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거잖아.” 좋았던 것들을 잃는 부분도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거라면 아리는 그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는 결국 그날도 소원을 정하지 못하고, 열흘 뒤 봄비 오는 밤에 다시 요정을 만나 얘기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봄비 내리는 석촌호수를 우산을 쓰고 산책하면서, 아리는 정우와 요정들이 정말로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듣는다.

“처음에는 우리 쪽에서 문제가 생긴 줄 알았어.”

지구에는 기후 자체를 바꿀 만큼 강력한 마법사는 없지만 하루 저녁 날씨가 좋아지게 해달라고 빌 정도의 조그만 마법사들은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날씨가 좋아지게 해달라고 할 때 따뜻하게 해달라고 빌지 춥게 해달라고 빌지는 않으니까. 그런 작은 날씨 마법들이 모이면 예상치 못한 큰 효과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법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날씨 마법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효과가 없어서 인간 세상 쪽 문제인 것을 알았다고, 요정은 말한다. 그 다음 계획은 사람의 모습을 빌려서 쓰고 가서 인간 세상 쪽 높은 사람들과 말해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높은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절실하지 않은 소원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았어.”

그 밤 이후로는 좀처럼 요정들이 좋아하는 날씨가 되지 않고 봄은 순식간에 여름이 되어, 그들이 다시 만나는 것은 역대급 더위를 견딘 뒤 10월이 다 되어서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꾸 전화하고 약속을 다시 잡는 사이에 정우의 모습을 한 요정과 아리는, 말하자면,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겨울이면 꽤 자주 만나서 소원에 대해서는 잠깐만 얘기하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고, 날씨에 대해 불평하며 예쁜 카페들을 찾아 다닌다. 서울에는 예쁜 카페가 많았고 그건 날씨가 어떻게 되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며, 요정은 그런 곳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쁜 카페도 정우와의 밤 나들이를 대체할 수는 없었으므로 아리는 원래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점차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그리고 어떤 요정)의 마음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아주 친해져서, 204*년, 서울이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고 산책도 할 수 없는 곳이 될 쯤에 요정은 아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우리는 이제 다른 행성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서울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괜찮은 곳이야.”

아빠는 한참 전, 엄마는 일 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아리를 잡아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리는 요정 나라로 떠나서, 그곳에서 영원은 아니지만 아주 오랜 시간 행복하게 산다. 잃어버린 날씨는 물론 대체될 수 없었지만, 깊은 그리움과 행복이 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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